[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문화

산성은 한반도 유형적 문화요소의 대표
대공산성·아미산성·제왕산성의 입지와 역사

일반적으로 백두대간의 문화요소는 크게 무형적 요소와 유형적 요소로 분류할 수 있다. 무형적 문화요소로는 대관령성황제와 같은 각종 놀이와 축제, 민간신앙과 백두대간 권역에서 생겨난 설화 및 전설, 민담 등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유형적 문화요소는 백두대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산림생활사와 관련된 취락경관 및 가옥, 산간의 생활민속문화, 산간의 풍토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각종 민간신앙 시설 및 사찰을 대표로 하는 종교시설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또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등줄기로서 영남과 영동지역의 생활권을 구획하는 자연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통과할 수 있는 고개 등의 교통시설(驛 등)과 아울러 숙박시설(院) 등을 유형적 역사경관으로 들 수 있겠고, 백두대간이 지니는 지형상의 군사적이고 전략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각 요충지에 포진하고 있는 산성, 봉수 등과 같은 각종 군사시설 역시 중요한 유형적 문화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산성은 그 숫자나 역사적 경관의 중요성에 비추어보아서도 백두대간의 유형적 문화요소 중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산성은 우리나라의 산지에 보이는 인문적 역사경관으로서 대표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국적 지형에서 생겨난 독특한 문화경관으로서,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이자 산성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산성의 숫자만 하여도 전국에 무려 2천여 개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가히 단위면적 당 밀도가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당연히 한반도의 등줄기를 동서로 크게 가르고 있는 백두대간 지역에도 수많은 산성들이 있으며 각각 그 조성시기와 위치, 역사적 의미, 그리고 형태와 기능에 따라 특성이 있다.

▲ 보현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대공산성. 백제 또는 발해가 쌓았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조선조 말 을미의병 때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사진=정정현 부장>

그 중에서 대관령에서 진고개를 너머 오대산에 이르는 구간의 백두대간에는 대공산성(보현산성), 아미산성(금강산성), 제왕산성 등 여러 산성이 있어서 주목된다. 그러면 우선 일반적인 산성의 역사적 특성을 형태와 기능별로 개관하여 보고, 대관령에서 오대산 구간의 산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 성은 행정적 위계에 따라 왕성(궁성)과 읍성으로 나뉘고, 입지한 지형적 위치에 따라 평지성, 평산성(산기슭성), 구릉지성 산성으로 나뉘며, 축성 형태에 따라 산 능선을 중심으로 주위 둘레를 띠처럼 축성하는 테뫼식과 산골짜기를 포함하여 넓은 면적으로 축성하는 포곡식으로 구분되고, 축성 재료에 따라 석성과 토성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그중에서 산성은 산에 입지한 성곽으로서 주요 기능은 군사적 방어인데, 위치상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적의 동태를 쉽게 조망하여 파악할 수 있고, 요새지에 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유리한 장점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고대의 산성은 군사적 기능과 겸하여 행정중심지의 기능도 하였기에 교통로가 집중되고 주변의 넓은 평야를 장악할 수 있는 지점에 입지하였으나, 근대로 가면서 행정 중심지는 구릉지 혹은 평지로 이동하고, 산성은 유사시를 대비하는 성곽으로 비중과 기능이 축소되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고조선의 환도산성 등과 같이 수도 역시 산성의 입지 양상을 보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부 지방중심지의 읍성이 산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것 외에는 주로 도성의 경우에는 평지나 산기슭 혹은 구릉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성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는 부족 간의 분쟁 과정에서 방어를 위해 구릉지에 도랑(해자)을 판다거나 목책이나 토담을 두르는 등의 시설을 하였다. 역사 기록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성은 고조선의 왕검성인데, 그 위치와 형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윽고 삼국시대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산성이 축성되는 시기로서 전국의 산성 중 3분의 2 이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는 당시에 산성을 거점으로 하는 정치세력 중심지의 위치와 전투방식 때문이다. 삼국은 산성의 위치, 형태, 축성방식에서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고구려는 험준한 지형에 석축(石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한편, 백제는 구릉지에 토성으로 축성하는 경향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산성의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역사시기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속성과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통일신라시대에는 행정적 거점에 산성이 축성되는데, 구릉지에 토성을 축성하여 평소에는 성 밖에 있다가 유사시에 성으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하는 양상을 보인다.

고려에 와서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기간의 항전에 유리한 대규모 산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국경과 내륙의 도시에 주로 석축의 읍성(邑城)을 건설하고 인근에는 산성을 운용하였으며, 국경과 해안의 요소마다 진보(鎭堡)를 설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수많은 해안의 산지에 설치된 진보는 당시 창궐했던 왜구들의 침탈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도 수많은 산성이 있는데, 특히 큐슈 지역에 나타나는 고대 산성은 한국의 산성과 같은 축성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일찍이 주목된 바 있다. 학계의 문헌조사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는 3세기부터 산성이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에는 한국의 축성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식 성은 일본의 큐슈 지역과 오카야마(山崗) 부근에 여러 개가 분포하고 있다.

일본의 산성 경관을 살펴보면, 성안은 영주가 거주하여 지배권력의 거주지가 되고, 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천수각(天守閣)이라는 상징적 건물이 들어선다. 성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가신, 상인, 공인, 노동자 등이 거주하여 도회를 형성하는데, 이 도시를 조카마치(城下町)라고 불렀다. 일본 근대도시 경관의 전개양상은 조카마치와 일직선으로 연속된 철도역의 간선도로, 그리고 도회공간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공산성·아미산성·제왕산성

그러면 이제 대관령에서 오대산에 이르는 지역의 산성에 관하여 유형별로 개관하고, 대표적인 산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강릉지역의 산성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이준선, 1982, <강릉지역의 고대산성>), 여러 시대에 걸쳐 축조되고 다양한 지형에 입지한 산성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대공산성을 비롯하여 교허성, 아미산성, 명주성, 칠봉산성, 왕현성, 제왕산성, 장안성, 고려성, 삼한성, 우계산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산성은 입지 유형별로 크게 표고 100m 미만에 분포하는 야산(구릉지)형 산성과 표고 700~1000m의 산각(山脚)에 입지하고 있는 고산(高山)형 산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야산형 산성은 규모가 1km 내외에 불과하여 소규모인데, 이 산성들은 신라 하대에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농업 생산양식의 기반에 있으면서 촌락민들을 통제하던 지방호족들의 자위 방어시설로 추정된다.

▲ 청학동 소금강의 아미산성, 마의태자가 쌓았다고도 하고, 고려 때 쌓았다고도 한다
상대적으로 고산형 산성은 표고가 높은 산중에 입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크다는 특징이 있어 대조적이다. 백두대간의 줄기에 분포하고 있는 대공산성, 아미산성, 제왕산성은 고산형 산성의 부류에 속하며, 각각의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대공산성의 위치는 강릉시의 서쪽 약 20km쯤 되는 보광리의 북쪽에 솟은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높이 1~2m, 둘레 약 4km의 석축 산성이다. 보광리 서쪽의 대궁산(1,000m) 능선부를 중심으로 남북 양쪽의 완만한 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성의 동남과 북쪽 바깥면은 급경사면인 반면 서남단부는 완경사의 사면으로서 곤신봉(1131m)으로 이어진다.

북쪽 성벽은 험준한 절벽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고, 지금은 남쪽 방면으로 높이 2m쯤의 다듬지 않은 할석(割石)으로 쌓은 성벽과 동·서·북쪽의 성문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약 1,000여 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아직도 있다. 성안의 정상부에서는 전망이 탁월하며 영동지방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전설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 또는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가 쌓았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기록에는 이곳을 보현산이라 하고, 성은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둘레가 1,707척이라고 하였다. 조선 고종 32년(1895) 이른바 을미의병 때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아미산성 혹은 금강산성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다. 소금강의 구룡폭포에서 왼쪽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서 돌로 쌓은 성으로, 아미산성 또는 만월성이라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의태자가 쌓았다고 하며, 고려 충숙왕의 사위인 최문한의 아들 최극임이 의병을 이끌고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구룡폭포의 동·서쪽 능선을 따라 쌓은 성으로, 동쪽 성벽은 소금강의 정상부를 거쳐 다시 계곡까지 약 3㎞에 걸쳐 있으나, 서쪽 성벽은 폭포 부근에만 약 400m 정도 나타난다. 동쪽 성벽은 남·서쪽으로 뻗는 산기슭을 따라 약 400m의 성벽이 남아있고,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기슭을 따라 약 700m의 성벽이 따로 쌓여있다.

이 성은 2∼3겹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성의 남·서쪽에는 성을 쌓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성벽의 크기는 곳에 따라 다르며 높이 1∼2m, 상부의 폭 1m다. 성 안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평탄한 대지가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토기나 기와조각 등 유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병장, 수양대, 망군대, 사형대로 불리는 곳이 있다.

제왕산성은 대관령과 능경봉을 잇는 백두대간에 자리한 제왕산 정상의 능선부와 남사면에 발달된 두 개의 골짜기를 둘러싸고 입지하였다. 성안의 정상부는 강릉 일대를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다. 제왕산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산인데, 고려 말 우왕이 이곳에 쫓겨와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 한다.

성벽은 크기가 다양한 사암(砂岩)으로 축조되었으나 거의 붕괴되어 극히 일부분에서만 1.5~2m의 성벽이 3km 정도로 나타난다. 지금도 성이나 축대를 쌓은 돌과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세 산성은 공통적으로 산 높은 곳에 입지하고 있는 고산식 산성이며, 둘레가 3~5km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석축 성곽이고, 성 내부에는 건물지와 식수 확보가 가능한 작은 골짜기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입지는 강릉지역의 여러 구릉지나 평지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러한 점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야산식 산성과는 입지시기와 기능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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