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풍수

대명당은 아닐지라도 길지임은 분명
명주군왕릉의 풍수지리…‘용진혈적하고 수산수수하다’

삼국시대의 왕릉은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를 연상하는데,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신라의 ‘명주군왕능(溟洲郡王陵)’이 현존하고 있다. 명주군왕릉은 명주군(지금의 강릉)에 있는 왕릉이라는 의미로, 신라 태조무열왕의 6세손이며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의 묘다. 비록 정식 왕은 아니지만 왕릉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명주군왕릉의 전경. 앞쪽에는 왕의 묘이고 뒤쪽에는 왕비의 묘다.

신라의 김주원과 조선의 단종은 동병상련

대관령에서 새봉을 지나고 선자령을 지나면 곤신봉(坤申峰·1,127m)에 이른다. 곤신봉에서 백두대간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노인봉으로 가는 백두대간 능선이고, 대공산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명주군왕릉에 이른다. 이 왕릉은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강릉휴게소 뒤편 가까운 곳에 있다.

신라 37대 선덕왕(재위 780-785)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김주원은 왕위계승자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으나 김경신(金敬信)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가 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군신회의를 열고 김주원을 추대하기로 계획되었다. 김주원은 경주의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 밖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로 인하여 알천(閼川·현 경주 부근의 하천)을 건널 수 없게 되어 결국 회의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원성왕을 추대했다.

▲ 명주군왕의 능향전과 석상은 황제 능의 양식이다.

그 후 원성왕은 김주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를 중심으로 양양, 삼척, 울진, 평해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김주원은 정식 왕은 아니지만 왕의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명주군왕릉 입구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은 신라 29대 무열왕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숭의제(崇義齊)는 명주군왕의 제실이며, 청간사(淸簡祠)는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잘 알다시피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어 방랑길에 오른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물론 김시습은 명주군왕의 23세손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 평생을 야인으로 남은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강릉김씨 대종회에서는 김시습을 강릉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이곳에 특별히 청간사를 건립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김주원이 명주군왕의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왕위계승전에서 원성왕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강릉까지 도피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김주원의 차남인 김헌창(金憲昌)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 사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822년(헌덕왕 14)에 웅주(熊州·현 충남 공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사실과,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도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왕권에 도전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실은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과 비슷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은 강릉김씨인 김시습의 가슴에 울분을 쌓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열왕의 숭열전(崇烈殿)은 김주원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고, 김시습의 청간사는 왕위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일국의 대통령이 지은 명주군왕 신도비문은 김주원의 왕위에 대해 확고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2 강릉김씨인 김시습의 사당인 청간사도 명주군왕의 재실과 함께 있다.(왼쪽) 명주군왕의 무덤은 일반 묘의 형식이다.(오른쪽)

묘인가, 왕릉인가

김주원의 능은 조선의 왕릉처럼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고종황제의 홍릉처럼 일자형의 능향전(陵享殿)과 능향전 앞쪽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하여 석수(石獸)가 있다. 다만 능향전 뒤에 있는 묘는 일반 묘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일반 묘 형식에서 황제 능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의 묘제는 능(陵)·원(園)·묘(墓)로 구분하여,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의 사친(私親·임금의 부모)·왕세자·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공주·옹주·귀인 등의 무덤으로 벼슬의 품계에 따라 명칭과 분묘 양식이 각기 다르다.

다만 정식 왕이 아닐지라도 왕과 왕비로 추존되면 왕릉이 된다. 예들 들면 서오릉에 있는 경릉(敬陵)은 덕종(德宗·세조의 장남)과 소혜왕후의 능,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장릉(章陵)은 원종(元宗·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과 인헌왕후의 능, 파주시에 있는 영릉(永陵)은 진종(眞宗·영조의 세자)과 효순왕후의 능, 화성시에 있는 융릉(隆陵)은 장조(莊祖·영조의 둘째아들로 사도세자)과 헌경왕후의 능,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수릉(綏陵)은 문조(文祖·순조의 장남이며 헌종의 아버지)과 신정왕후의 능이 있다. 한편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묘라고 부른다.

김주원의 무덤이 묘인지, 아니면 왕릉인지에 대한 구분은 기존의 묘제형식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야 할 것이다.
능향전 뒤쪽에 명주군왕과 왕비의 묘가 상하로 안장되어 있다. 비석에 보면 ‘王妃墓在後(왕비묘재후)’라고 적혀있다. 즉 앞쪽이 왕의 묘이고 뒤쪽은 왕비의 묘다. 묘가 좌우로 있을 때에는 상석의 위치에서 묘를 바라보고 ‘남좌여우(男左女右)’라 하여 왼편에는 남자, 오른편에는 부인의 위치가 된다. 다만 남녀가 서로 바뀌는 경우에도 종종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비석에 ‘부우( 右)’라고 기록한다. 길흉화복에는 영향력이 없고 전통적인 관습일 뿐이다.


길흉은 좌향(坐向)·산수(山水)·시운(時運)에 달려

이곳의 묘는 백두대간의 곤신봉에 출발하여 시계바늘 방향으로 회룡고조(回龍顧祖)한 지세다. 회룡고조는 풍수용어로 조종산(祖宗山)이 조산이 되는 산세다. 곤신봉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180도 번신( 身)하여 다시 곤신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혈이 역결(逆結)하는 산세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산세는 현공풍수이론으로는 쌍성회향(雙星會向)에 적합하다. 쌍성회향은 앞쪽에 물이 있고 물 뒤에는 안산과 조산이 있어야 합국(合局)이 된다.

김주원의 묘의 길흉화복을 알기 위해서는 풍수지리의 3대 요소인 좌향(坐向), 산수(山水), 시운(時運)의 기본자료가 있어야 한다. 묘의 좌향은 나경(羅經·나침반)으로 측정하면 되고, 산수는 형기풍수이론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를 보면 되지만, 운명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길흉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남는다.

형기풍수로 보아 명주군왕의 묘는 대명당은 아닐지라도 용진혈적(龍眞穴的)하고 수산수수(秀山秀水)하여 길지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김주원의 슬하에는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 김종기(金宗基)의 손자인 김양(金陽)의 자손은 대가 끊기고, 차남인 김헌창의 부자는 반란으로 무후(無后)하고, 삼남인 김신(金身)이 유일한 강릉김씨로 김주언의 증손 3형제에서 강릉김씨의 최초 분파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보면, 김주원의 묘는 길지이기는 하지만 시운이 맞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시운은 어느 묘이든지 어느 집이든지 적용되며, 설령 시운이 맞지 않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본래 일기(一氣)는 음양으로 나누어지면서 소식영허(消息盈虛)하고 순환무단(循環無端)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길한 것도, 영원히 흉한 것도 없다. 하늘의 시간변화에 따라 조화를 이루면 순천(順天)하는 자는 흥하게 되고, 부조화하면 역천(逆天)하게 되어 망하게 된다는 이치다.

▲ 강릉김씨 시조 명주군왕릉 입구 안내석.(왼쪽) 명주군왕릉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산세로 정면에 조산(朝山)인 곤신봉이 바라다보인다.(오른쪽)

한편 명주군왕릉의 좌향은 현재의 상석이나 둘레석을 기준으로 측정하면 지반으로 갑좌(甲坐·75도)와 묘좌(卯坐·90도) 사이, 즉 82.5도다. 풍수이론에 어느 좌이든지 좌와 좌 사이는 공망(空亡)이라고 하여 흉상(凶象)이 되므로 절대로 공망의 좌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다만 명주군왕의 묘는 조장(造葬)한 당시의 좌향, 즉 관(棺)의 좌향은 지반 갑좌경향(甲坐庚向·75도)으로 입향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공망으로 입향하였다면 강릉김씨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관상의 좌향은 공망이다. 상석을 비롯한 각종 석물을 공망으로 입향한 이유는 조선 후기 1747년에 묘역을 새로 단장할 당시에 좌향이론을 잘못 적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형기풍수이론에서 좌향을 결정하는 방법은 안산 또는 조산이 정면과 묘의 좌향을 일직선상에 둔다. 특히 길지일수록 묘의 좌향과 안대(案對)는 일직선상에 자연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명주군왕릉에서 가까이에 있는 안산과 일치하고 멀리로는 곤신봉도 정면에 위치하여, 즉 묘와 안산 그리고 곤신봉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곤신봉(坤申峰)에서 곤(坤)과 신(申)은 좌향에 관한 용어로 곤방(坤方)은 225도이고 신방(申方)은 240도다. 특정지점에서 곤신방을 향하면 곤신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특별한 지역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 방위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한 산이름은 극히 드물어 곤신봉을 ‘坤申峰’으로 표기한 점에 대해 의문이 있는데, 명주군왕과 관련한 산이름이라면 ‘곤신봉(困臣峰)’이 아닐까.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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