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20구간>노인봉] 문헌고찰

선자령은 산인가 고개인가
대관령 ·선자령 ·진고개 ·청학동에 대한 옛 기록들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대관령에서 진고개[泥峴(니현)]에 이르는 노인봉 구간은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 주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 구간은 동고서저형(東高西低形)의 특이한 산세를 이루면서 동쪽은 높은 산릉과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서쪽은 낮고 평평한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는 고원지대이다.
이 일대는 바람이 많고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여 대관령 북쪽의 선자령과 남쪽의 능경봉·고루포기산 구간은 심설(深雪) 산행지로도 유명하며, 바람이 강력한 고원지대에는 최근에 세운 풍력발전기가 구릉 곳곳에 서 있어 마치 풍차가 서 있는 듯 이국적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 자력으로 길 넓혀

대관령은 예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동서교류 상의 큰 관문[大關]이었다. 서울로 통하는 큰 길로 아흔 아홉 구비를 이루고 있는 높고 큰 영마루다.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관동(關東)과, 대관령 이동의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영동, 대관령 이서의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영서라는 땅이름도 이 영마루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대관령은 동국여지승람 강릉조에 의하면, 강릉부의 진산으로서, 일명 대령(大嶺)으로도 불리었다.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의 차권적시(次權迪詩)와 고려사절요 고종 4년조 기사 및 산경표에 의하면, 대관산(大關山)으로도 불리어진, 큰 영마루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고개가 험준하여 오르내릴 때 ‘대굴 대굴 구르는 고개’ 라는 뜻에서 대굴령이 음차(音借)되어 대관령이 되었다는 속설이 전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다.

▲ 청학동 소금강. 이 계곡을 둘러싼 산 전체를 청학산이라고도 했다.

대관령은 조선 초기까지는 사람만 겨우 통행하는 토끼길만 있었는데, 조선 중종 때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 자력으로 몇 달에 걸쳐 도로를 개설해 놓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병자호란 때 오랑캐 군사가 주문진에 상륙하여 고형산이 개설한 도로를 통하여 대관령을 쉽게 넘었으므로 한양 함락에 있어서 적을 이롭게 하였다 하여 왕명으로 고형산의 묘를 파내어 육시의 형을 내린 바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대관령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고, 또 고형산이 1519년(중종14)에 남곤(南袞) 일파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들을 축출하기도 하여 이로 인해 강릉사회에 상당한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으므로 뒷날 의도적으로 조작한 이야기로 보기도 한다.

여지승람 강릉 역원(驛院)조에 의하면, 대관령 위에 대령원(大嶺院), 고을 서쪽 28리 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부동(釜洞·가맛골) 남쪽에 제민원(濟民院), 고을 서쪽 20리 현 성산면 구산리(丘山里)에 구산역(丘山譯) 등의 역과 역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대관령은 조선시대에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충분히 살필 수 있게 한다.
위의 제민원에서 대관령 고갯마루에 이르는 대관령 길은 현 대관령터널 위쪽의 옛 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이 개설된 이후 ‘대관령 옛길’로 불리고 있다. 승용차로 현 대관령을 넘어 옛 고속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붓글씨체로 크게 ‘大關嶺옛길’ 이라 쓰고, 그 밑에 좀 작게 ‘반정(半程)’이라 쓴 우람한 돌비(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반정 속칭 반쟁이는 이곳이 대관령 아래쪽 제민원에서 옛길 따라 올라오다 보면 대관령 길의 절반의 노정이 되는, 절반 정도의 지점이라 하여 일컬어진 땅이름으로 보인다.
▲ 대관령 성황사. 범일 국사가 신위로 모셔져 있다.

이곳 반정에서 옛길을 따라 약 300m 정도 내려가면 길 옆 산소 앞에 ‘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라 쓴 비석이 서 있다. 곧 조선 말기 순조 24년(1824)에 대관령을 오르내리는 여행자들이 쉴 수 있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던 반쟁이 오두막(주막)을 짓게 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도 이를 관리하며 살 수 있게 하여준 이병화의 선덕을 기려 세운 비다.

이곳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제민원이란 역원 이름에서 땅이름이 유래된 상제민원·하제민원을 지나게 되고, 이곳에서 약 600여m 더 내려가면 원읍현(員?峴), 속칭 원울이재에 이르게 된다. 원울이재는 여지승람 강릉조에 의하면, ‘세간에 전하기를, 어떤 원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갈려서 돌아갈 때 여기에 와서는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로 인해 원읍현[원울이재]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곧 옛날 고을원이 영서에서 강릉으로 올 때는 길이 험하여 이곳에 앉아 쉬면서 울고, 강릉을 떠날 때에는 강릉의 경치가 너무 좋아 떠나기 싫어 이곳에서 앉아 쉬면서 울었다고 하여 일컬어진 고개 이름이라 전한다.

원울이재에서 옛길 따라 약 900m 정도 내려가면 옛 고속도로 옆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 이르게 되고, 대관령박물관 몇m 정도 못미처 제민원터였던 작은 기와집 옆에도 반정과 같이 ‘大關嶺옛길-濟民院’ 이라 쓴 우람한 돌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곧 대관령 옛길의 초입이다.

이곳 옛길 초입에서 역으로 대관령 반정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면 대관령과 제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하여 형성된 계곡이 나타나는데, 수량도 꽤 풍부하고 계곡과 수석이 매우 수려하다. 초입의 계곡가 우측 큰 바위에는 영해이씨(寧海李氏)들이 이곳에 들어와 산 곳이라는 의미로 새겨놓은 ‘영해이씨세장동(寧海李氏世藏洞)’이란 각자도 보인다.

대관령의 국사성황신과 산신의 정체
대관령 옛길의 반정에서 옛 고속도로를 건너 다시 대관령 옛길과 이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관령에서 선자령 방면으로 가는 백두대간 주능선에 올라선다. 여기서 대간을 건너 반대편 산기슭으로 약 5분 정도 내려가면 ‘성황사(城隍祠)’와 ‘산신당(山神堂)’이라 쓴 현판을 단 두 동의 당집 건물이 있는 곳에 이른다. 또 그 앞 등산로 가에는 두 당집의 제례 따위를 돕고 관리하는 곳으로 보이는 살림집 건물 한 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옛 대관령휴게소 근처에 ‘대관령국사성황당(大關嶺國師城隍堂)’ 이라 쓴 거대한 돌비가 서 있는 곳에 이른다.
성황사가 바로 ‘대관령국사성황지신주(大關嶺國師城隍之神主)’라 쓴 위패와 그 국사성황신의 영정을 봉안한 대관령국사성황사이고, 산신당은 ‘대관령산신지신주(大關嶺山神之神主)’ 라 쓴 위패와 그 대관령산신의 영정을 봉안한 대관령산신당이다.
▲ 대관령 산신당. 김유신 장군을 신위로 모시고 있다.

국사성황신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堀山門)의 개창조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가 죽어서 되었다는 강릉지방의 수호신이라 전한다. 고려사 왕순식전(王順式傳)에 의하면, 명주장군(溟州將軍) 왕순식이 태조 왕건의 신검 토벌을 도우려고 출정할 때 대관령에 이승(異僧)의 사당이 있어 제사를 베풀고 기도한 일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승사(異僧祠)가 바로 범일국사를 봉향하던 지금의 국사성황사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사성황사는 일찍이 고려 초부터 건립되어 이에 봉안한 범일국사를 영동 일대의 수호신으로 봉향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산신당의 대관령산신은 허균(許筠·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藁)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에 의하면,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이라 전해 온다. 곧 김유신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면서 산신에게 검술을 배운 일 등의 인연으로 백제를 평정한 후 이곳 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조선시대까지도 그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 경종 때 강릉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를 취사 선별하여 다시 간행한 강릉지(江陵誌) 풍속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남정(南征)하였을 때 꿈에 승속이신(僧俗二神) 곧 승려와 속인의 두 신이 병졸을 이끌고 와서 구해준 꿈을 꾸고서 싸워 이기게 되어 대관령산신에게 제사하고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에 보이는, 두 신도 바로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선자령 정상. 강릉쪽에서 오를 때는 엄청난 산이지만, 횡계쪽에서 보면 둔덕의 고개처럼 느껴진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강릉단오제 때 그 주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행사 내용 중에 국사성황신의 배위(配位)인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이 된 강릉정씨가의 딸과 관련한 내용, 곧 두 성황신 내외를 합사(合祠)하는 따위의 일이나, 국사성황신이 호랑이를 시켜 정씨가의 딸을 납치하여 영혼결혼하는 따위의 전설적 이야기는 불교사상적 관점에서 볼 때 무속적인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불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범일국사는 조당집(祖堂集) 권 17에 의하면, 당에 유학하였을 때 염관 제안(鹽官 濟安) 선사에 의해 동방의 보살로 칭송된 당대의 고승이다. 법명 그대로 불교의 태양과 같은 당대 최고의 불교지도자로서 국왕들에게도 국사로 예우를 받은 인물이다. 그러한 대선승의 신이 정씨가의 딸을 납치하여 영혼결혼하였다면, 이는 음사(淫祠)의 신으로 전락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근대로 오면서 범일국사를 봉향하던 성황사가 무속적 민속신앙에 접합되어 민속제에서 본질이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모습에 있어서도 수염 기른 얼굴에 모자를 쓰고 활통을 메고 말을 타고서 좌우에 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국사성황신의 모습은 민간신앙대상의 성황신일 뿐 큰 절의 조사전(祖師殿) 등에 봉안되어 있는 고승의 모습과 같은 국사의 모습은 아니라 생각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보이는 영동민속제에 관한 내용이나 허균의 대령산신찬에 의하면, 조선시대 강릉단오제 때의 주신은 성황신이 아닌 대관령산신으로서, 김유신 장군의 신이었다.

선자령은 신선이 사는 곳
선자령(仙子嶺·1,157.1m)은 대관령 북쪽 백두대간 상에 둥그런 영마루를 이루고 있는 큰 산봉우리다. 정상 부근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초막골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 안부 동쪽으로는 계곡이 수려한 보현사골과 통일신라시대 선종 사찰 보현사(普賢寺)가 자리하고 있다. 북쪽 안부에서 북으로 뻗어 가면서 다시 솟아오른 곤신봉(坤申峯·1,131m) 동쪽 산줄기에는 고구려 때 쌓은 석축 산성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발해시조 대조영이 영토확장을 위해 강릉지역까지 진출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도 전해오는 보현산성(普賢山城), 일명 대공산성(大公山城)이 자리하고 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진고개. '긴 고개'가 구개음화해 진고개로 됐다.
선자령은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 또는 약칭되어 소은백산(所隱栢山)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여지승람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릉부 서쪽 65리에 있다. 세속에 전하기를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을 쫒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띠집과 길들이 삼연(森然)하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알지 못하였다.’

소은백이산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강릉조에는 약칭하여 ‘소은백산’으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산은 강릉 서쪽에 있는 산 중 어느 산을 지칭한 것인지 지금까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산의 위치를 알려면 같은 여지승람 강릉조에서 이 산보다 더 많이 알려진 대관령과 보현산의 위치를 가지고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곧 같은 책 강릉조에서는 대관령을 강릉부 서쪽 45리, 또는 부의 치소지에서 50리 거리에 위치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고, 보현산에 대해서는 부의 서쪽 35리에 위치한 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은백산은 이 중의 대관령보다 15~20리 정도 더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강릉 서쪽 45~65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여러 산 중에서 선자령 이외에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또는 신선의 전설과 관련한 산으로 전해오는 산이 없다.

이는 여지승람에서 소은백산 곧 선자령의 높이가 대관령보다 훨씬 더 높은 것 등으로 인하여 거리가 실제보다 부정확하게 기재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에서는 이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채 여지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왔다.

단지 조선 말기에 여지학의 대가 김정호(金正浩·1804-1866?)만이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곧 대동여지도에서 소은백이산을 대관령 남쪽,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도암면 경계에 위치한 고루포기산(1,238.3m)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지승람에서 강릉 서쪽 80리에 위치한 산으로 언급한 소우음산(所?音山)을 일명 발음봉(鉢音峯)이라 하여 지금의 고루포기산 서남쪽의 발왕산(發旺山·1,458.1m) 위치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김정호가 所 자의 훈(訓)을 ‘바’ 또는 ‘곧(곳)’으로 보고서 所隱栢伊山을 곧은백이산→고루포기산 으로, 所?音山을 바우음산→발음산(발왕산)으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곧 우리말의 음과 훈을 빌려 혼용한 산 이름 표기로 보고 이를 대동여지도에 구체적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라 본다.

여지승람에서 밝히고 있는 강릉 치소지 서쪽의 선자령과 서남쪽의 대관령·고루포기산·발왕산의 거리상 위치로 보면 김정호의 지리적 견해는 매우 근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88년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가 편찬한 강릉부지를 1871년에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가 재정리하여 편찬한 강릉부지에 의하면, 소은백이산을 대관령의 북맥(北脈)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또 소우음산(所?音山)을 대관령 남쪽 기슭에 있는 산으로, 일명 능정산(凌頂山)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맹지대와 윤종의 등은 소은백이산을 지금의 대관령 북쪽에 위치한 선자령으로, 소우음산을 대관령 남쪽에 위치한 능경봉으로 보고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강릉 서쪽의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은 능경봉에서 서남쪽으로 더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들 산을 본래의 소은백이산과 소우음산으로 볼 수는 없다.

물론 현재 불리고 있는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의 산 이름과 위치는 김정호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고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나, 여지승람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언급하고 있는 명승을 지닌 신비의 산으로 연관시켜 볼 수 있는 내용은 고루포기산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 산은 본래의 소은백이산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의 강릉부지에서는 소은백이산을 이미 대관령 북쪽 산줄기로 언급하고, 또 이 산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속전의 기록을 그대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소은백산은 바로 지금의 선자령을 지칭한 산 이름이라 하겠다. 선자(仙子)는 곧 신선 또는 선녀를 뜻하는 말이므로, 선자령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사는 영마루인 것이다.

여지승람·강릉부지 등에서 높은 봉우리에 올랐을 때 신선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골 안은 곧 지금의 선자령 안부 동쪽 골짜기 보현사골을 언급한 것으로 추측된다. 속전에 의하면, 이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선자령의 본래 옛 이름으로 보이는 所隱栢伊山과 그 약칭 所隱栢山의 본래 의미는 ‘잣(재)이 숨겨져 있는 산’이 아니었을까 한다. 곧 잣 또는 재는 성(城)의 고훈(古訓)인데, 이를 훈차하여 栢伊 또는 栢으로 달리 표기한 것이라 본다.

이는 곧 선자령 북쪽 봉인 곤신봉 줄기가 동으로 뻗어가는 산줄기 상에 예부터 보현산성(일명 대공산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컬어진 산 이름이라 본다. 그러다가 음과 훈이 복잡한 산 이름을 피하고 좀더 쉽게 음과 훈을 혼용하여 소은잣산→손잣산→선잘산→선자산’으로 전음되어 불리어 오다가, 후대로 오면서 영동과 영서 지역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보현사골을 경유하여 선자령을 넘나들던 사람들이 이 산을 하나의 영마루(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선자령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특히 영동지방 사람들이 교통량이 많지 않던 옛날에 동쪽에서 이 산을 올라보면 매우 높고 가파르면서 계곡도 아주 수려하고, 산정에 올랐을 때는 동쪽으로 탁 트인 동해 바다가 잘 조망되어 예부터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여길 법도 하지만, 넓은 초원지대와 구릉이 펼쳐져 있는 영서지방쪽에서 이 산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산이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영마루로 여기게 되어 교통량이 많아지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산이 산이 아닌 선자령이라는 재 이름으로 불리며 정착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에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도 이 산이 ‘仙子嶺’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적어도 교통이 좋아지는 20세기 무렵부터는 이 산이 선자령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관령 방면에서 이 산을 경유하여 진고개 방면으로 가다 보면 주능선 동쪽 초막골 하산로 표지기둥이 서 있는 삼거리에서 기둥에 세로로 ‘선자령 정상’이라 쓴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선자령은 어디가 정상인지 헷갈리게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다보면 왼쪽 정상지대에 약 80cm 높이의 돌비에 한글로 ‘선자령’이라 쓴 표지석을 세워 놓아 등산가들이 분명하게 정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선자령 북쪽 대공산성이 자리한 보현산 기슭에는 범일국사의 제자 낭원 개청(朗圓 開淸·834-930)이 지장선원을 열고 주석하면서 사굴산문을 크게 번창시켰던 선찰 보현사(普賢寺)가 자리잡고 있다. 보현사 축대 아래쪽에는 보물 제192호로 지정된 낭원대사오진탑비가 서 있고, 삼성각 뒤 산속으로 약 100m 정도 올라가면 보물 제191호로 지정된 낭원대사부도(오진탑)가 자리하고 있다.

낭원대사는 함양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사굴산문의 범일국사에게 불법을 전하여 받은 당대 고승이다. 신라 경애왕 때 국사를 지냈으며, 뒤에 이곳에 보현사를 창건하고 선풍을 전하다가 96세에 입적하였다. 고려 태조가 시호를 낭원(朗圓), 탑명을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청학동 소금강과 진고개 장천의 유래
현재 오대산 소금강으로 불리고 있는 청학동 소금강(靑鶴洞小金剛)은 노인봉(1,338.1m) 동북쪽 계곡을 일컫는 말이다. 그 이름이 시사하고 있듯이 절승의 경관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명승 제1호로 지정된, 장대하고 수려한 계곡이다.

금강산(金剛山·1,638.2m)은 본래 현재의 강원도 금강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는 천하제일의 수려한 명산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이래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을 지칭하는 일반명사화한 산 이름으로서 금강산이라 일컫기도 하고, 규모면에서 또는 그 경관 면에서 본래의 금강산 보다 조금 작거나 버금가는 산 이름, 계곡 이름 등의 명승을 소금강산, 또는 소금강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예컨대 보은 속리산, 봉화 청량산, 포항 내연산, 양산 천성산 등이 그러한 산 이름이다.

청학동 소금강은 위의 예와는 달리 산 이름이 아닌, 골짜기 이름, 계곡 이름으로서 소금강이라 칭한 것이다. 다만 소금강이라고만 칭하면 어느 곳을 일컫는 이름인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예전에는 앞에 청학동이란 말을 붙여 썼고, 현대에 이르러 이 일대가 오대산 산악국립공원에 편입한 이후로는 앞에다 오대산이란 말을 붙여 써서 어느 곳의 명승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일컫고 있다.

물론 율곡 이이(1536-1584)의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에 의하면, 청학동을 산 이름으로도 언급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그 의미는 청학동계곡 곧 소금강계곡 일원의 전체 산을 통틀어 일컬은 산 이름일 뿐(摠名其山曰靑鶴), 노인봉 구간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는 주산격 황병산(黃柄山·1,433.5m)이나 주능선상의 소황병산(1,328m), 또는 노인봉 등의 산을 구체적으로 지칭한 산 이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대관령 옛길 표지석 앞의 필자

율곡의 유청학산기에 의하면, 소금강계곡을 품고 있는 전체적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일컫고, 소금강계곡의 주요 동부(洞府) 이름은 천유동(天遊洞)이라 일컫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의 대동지지 강릉조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율곡의 견해를 그대로 산수 이름에 반영하여 지금의 소금강계곡 중심부에 위치한 식당암·삼선암·구룡폭 일원의 동부 이름을 천유동, 그 배후 산을 이루고 있는 노인봉·백마봉 산줄기의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일컫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여 볼 때 지리적으로 소금강계곡을 품고 있는 노인봉을 일명 청학산으로도 일컫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물론 이 구간 주변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이 황병산이므로 이 산을 청학산으로 지칭함이 옳을 듯하지만, 대간길 주능선 상에서 조금 벗어나 소황병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또 황병산이 품고 있는 계곡은 오히려 서남쪽의 개자니골 계곡이 옳을 듯하다.

소금강계곡은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청학동구룡연기(靑鶴洞九龍淵記),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언고시(五言古詩·입재유고1),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강릉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청학동으로 불렸으며, 이에 있어서는 비록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이 계곡 일원의 전체적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명명한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세속에서 청학동의 일명으로 불리기도 하다가 현재 공식 이름으로 정착된 소금강이란 계곡 이름은 일반적으로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곧 율곡이 지칭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이는 유청학산기를 접해보지 않은 이들의 속설일 뿐이다.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는 소금강을 언급한 적이 없다.

소금강은 강재항의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권1 오언고시조에 ‘세속에서는 청학(동)을 소금강이라 한다’고 한 예가 보이고, 여지도서 강릉조에도 세간에서는 청학동을 소금강이라 칭한다고 언급한 것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소금강계곡은 조선 후기에 청학동의 속칭으로 불리다가 현대에 이르러 본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소금강계곡 곳곳의 구체적 명소에 관한 이름은 율곡의 유청학산기와 허미수의 청학동구룡연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오대산의 동대산과 노인봉 사이에는 진고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그리고 일제시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등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니현(泥峴)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니현은 진고개의 뜻옮김 표기로, 긴 고개라는 의미로 일컬은 고개 이름일 것이다.

삼국사기 일성왕 4년조 기사에 의하면, 진고개는 고대에 장령(長嶺)으로도 표기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신라 자비왕 11년(468)조 기사에 하슬라(河瑟羅·현 강릉) 사람 중 15세 이상 되는 청소년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축성한 일과, 신라 조지왕 3년(481)에 고구려·말갈의 연합군과 백제·가야의 구원병의 지원을 받은 신라군과의 전투 기사에 등장하는 니하 또한 진고개의 옛 이름으로 추리해 볼 때 진강(긴 강)이라는 의미로 일컬은 뜻옮김 표기로 보인다. 당시의 지리적 형세로 볼 때 고대에 진고개 북쪽 연곡천(連谷川)을 일컫던 하천 이름으로 보인다.

신라 자비왕대 기사의 주에 의하면 니하는 일명 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내(긴 내) 곧 장천(長川)의 의미를 뜻옮김한 표기일 것이다. 연곡천 중류 지역인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는 마을 앞으로 연곡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고 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을 이름을 장천(長川) 또는 장내라 한다.

신라 자비왕 때 니하에 쌓은 니하성은 이곳 니하에 합류하는 소금강계곡의 구룡폭포 옆 능선으로 올라 천마봉 방면으로 오르는 산줄기 상에 위치한 아미산성(娥媚山城), 일명 청학산성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말엽에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성을 중수하고 신라 부흥을 꿈꾸며 군사들을 훈련하며 머물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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