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문화

산신제·성황제·세시풍습의 습합
비빔밥 문화의 전형인 강릉단오제와 대관령

▲ 대관령 가는 길. 영동과 영서를 잇고, 산촌과 어촌을 이어주는 대관령은 민간신앙이 깃들 여지가 충분한 고개다.

백두대간의 생활사와 문화사를 이루는 요소 중의 하나로 대동제(축제)가 있다. 백두대간의 터전에서 둥지를 튼 고을과 마을에는 역사와 문화생태적 배경을 반영한 대동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고을 대동제가 대관령의 강릉단오제다.

강릉단오제는 백두대간의 지역문화축제 중에 생활문화, 놀이문화, 세시문화, 제의문화, 산촌문화, 농촌문화, 어촌문화, 공연문화, 조형문화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대동제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대동제는 축제를 개최하는 세력의 정치적 주체, 혹은 사회집단과 역사문화적 성격, 그리고 지리적 배경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계층적 측면으로는 왕실 혹은 귀족의 국가적 축제가 있는 반면, 호족 및 지방토호나 관리의 지방축제가 있고, 마을 단위에서도 세시풍습에 따라 여러 가지 축제가 있다.

역사문화적 성격으로는 불교, 유교, 굿과 민간신앙, 세시풍습에 관련된 다양한 축제가 있으며, 지리적이거나 문화생태적인 속성으로는 산간, 해안, 들판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의 입지특성에 따라 축제의 성격과 의례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런 관점으로 분류해 볼 때, 대관령의 강릉단오제는 사회적으로 지방축제이고, 역사문화적으로 불교, 유교, 굿 혹은 샤머니즘, 세시풍습, 민간신앙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관령과 동해안을 끼고 자리 잡은 강릉 지역의 축제에 해당된다.

강릉단오제의 내용을 이루는 구조를 살펴보면 산신제와 성황제와 민속놀이가 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산신제라는 지리풍토적 특성과, 성황제라는 읍치(邑治) 향리들을 주축으로 한 지방적 제의의 사회적 속성이 단오제라는 세시풍습의 축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유교, 불교, 굿, 민간신앙, 세시풍습, 놀이가 한데 어우러져 일대 난장을 이루고 있는 소위 비빔밥 문화의 전형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계층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고, 문화적 프리즘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며, 역사적 성격과 시간적 속성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관령과 강릉이라는 장소적 현장성도 구비하고 있어서 역동적인 한마당 축제의 전형적인 양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강릉단오제에서도 가장 역사적 원형에 가까우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다.


대관령성황사와 산신각

대관령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2m, 총연장 13km에 이르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 강릉대도호부의 진산(鎭山)이었고,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넘는 고개의 하나이자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이었으니, 대관령 일대는 황병산·선자령·노인봉·발왕산에 둘러싸인 고위평탄면으로서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하여 아흔아홉구비라고도 한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오십천은 동해로 흘러들며, 서쪽에서는 송천의 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에 흘러든다.

대관령 정상에서 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인 도암면 횡계리에는 시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된 대관령성황사와 산신각이 있다. 성황당에는 범일국사(810-889)를 모시고 있고, 산신각에는 고려의 왕순식과 후백제의 신검을 모시고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낸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릉은 옛 동예(東濊)의 땅이고, 기록에 의하면 예국(濊國)에서는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축제를 행하였으니 강릉지역 대동제의 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강릉단오제는 산신제와 성황제, 그리고 세시풍습의 민속놀이가 결합되어 있는데, 우선 대관령 산신제의 내력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대관령 길에서 내려다본 관동지방.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관령을 신성시한 기록은 경종 때(1721-l724) 편찬된 <강릉지>에도 남아있다. 산신제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15세기)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추강냉화>(秋江冷話)에서,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 동안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에는 1603년(선조 36년)에 산신제를 구경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계묘년(1603) 여름 내가 명주에 있었는데 그 당시 명주사람들은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였다. 나는 수사에게 물었다. 이에 수리가 대답하기를 "이 신은 신라대장군 김유신입니다"라고 했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였는데 검술을 산신이 가르쳤고, 그가 소지한 칼은 명주 남쪽에 있는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그 칼이 완성되어 빛은 달빛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멸하고 백제를 평정했으며 죽은 뒤에 대관령의 신이 되었다 한다. 이 신이 지금까지 영험하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신봉하여 해마다 5월 길일에 번개와 향화를 갖추어 대관령에 가서 그 신을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5일에 이르면 온갖 자비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신이 즐거우면 길상이 깃들어 풍년이 든다 하고, 신이 노하면 반드시 풍수의 천재지변을 준다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광경을 보았는데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며 서로 경하하고 춤을 추었다.’

또한 <고려사>와 경종 때 간행된 <강릉지>에 보면 고려 태조를 도와 왕순식이 신검을 토벌하였는데, 이때 태조가 왕순식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감응이다” 하니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大峴-대관령)에서 승사(僧祠)가 있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상감께서 보신 꿈은 이것입니다” 라고 하여 신성시되어온 대관령 산신제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신목이 떨어야 신이 강림한 것으로 간주

한편, 대관령 국사성황 신위를 모시고 행하는 성황제에서는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고 민관 합동으로 제의를 행한다. 제사가 끝나면 무당이 부정을 가시고 성황을 모시는 굿을 하며, 이어서 산에 올라가 신목을 베는데 요란한 제금 소리와 무녀의 축원으로 신목을 잡은 신장부의 팔이 떨리면 신이 강림한 것으로 믿는다. 이때 사람들은 다투어 청홍색의 예단을 걸며 소원 성취를 빈다. 성황신의 위패와 신목을 모신 일행은 신명나는 무악을 울리면서 대관령을 내려온다.

영조 대에 편찬된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성황신을 모시러 가는 행차는 아주 장관이었다고 한다. 나팔, 태평소, 북, 장고를 든 창우패들이 무악을 울리는 가운데 호장, 부사색, 수노(首奴) 등의 관속, 무당패들 수십 명이 말을 타고 가고, 그 뒤에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고개를 걸어 올라갔다는 것이다.

‘매년 4월 보름에 강릉부에서 임명된 호장(戶長)이 남자와 여자 무당을 인솔하고 대관령 정상에 있는 신령을 모신 사당으로 간다. 호장이 먼저 사당 앞에 나가 고유(告由)하고, 남자와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나무 가운데 서신이 내린 나무를 찾아 모시고 오라 시킨다. 갑자기 나무 하나가 미친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이 나뭇잎이 저절로 흔들리면 마침내 신령이 그 나무에 내린 것으로 알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건장한 장정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는 이를 국귀(國歸)라 하였다…’

대관령 성황신은 강릉 태생의 범일국사(泛日國師)이며, 여성황신은 강릉 정씨(鄭氏) 집 딸이다. 단오제 때에는 대관령 서낭당에 있는 성황을 모셔다가 시내에 있는 여성황당에 며칠 동안 머물게 한 다음 서낭 내외분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대관령성황신은 호랑이를 데리고 있고 여성황신도 호환을 당한 여인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영동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던 호환에 대한 두려움과 그 대응양상이 신앙적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범일국사는 구산선문 사굴산파 개창조

호랑이 숭배에 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동예는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祭虎以爲神)’는 대목도 나오고 있어 그 역사적 기원의 아득함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실제 영동지역에서는 호랑이 숭배신앙이 널리 확산되어 한 예로 삼척시 원덕면 갈남리는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고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모셔진 범일은 강릉 출신으로 성은 김씨이고,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堀山派)의 개창조다. 범일은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흥덕왕 6년(831)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리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도이다”라고 하였다.

▲ 고갯마루 부근의 대관령 옛길.

이 말을 들은 범일은 크게 깨우쳐 제안의 문하에서 6년간 수학하고 나서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을 나누고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귀국 후 4년 동안 백달산에 머물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堀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선문을 펼치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였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지자체가 주최한 지역 축제는 2004년 현재 1,178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감사원이 2003년에 열린 496개 지역 축제를 감사한 결과 대부분이 사업타당성 검토가 부족하고 예산집행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고 보도된 바 있다. 축제 종류만 하더라도 대게축제, 송이축제, 인삼축제, 머드축제, 철쭉축제 등 수많은 아이템이 있지만, 강릉단오제가 종합적인 축제이듯이, 백두대간의 줄거리로 여러 축제를 연합하는 학술제와 문화대동제라도 한번 열어볼 판이 되었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백두대간이 지니는 정신과 생활문화를 올바로 전해주고 함께 배울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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