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문화

산성은 한반도 유형적 문화요소의 대표
대공산성·아미산성·제왕산성의 입지와 역사

일반적으로 백두대간의 문화요소는 크게 무형적 요소와 유형적 요소로 분류할 수 있다. 무형적 문화요소로는 대관령성황제와 같은 각종 놀이와 축제, 민간신앙과 백두대간 권역에서 생겨난 설화 및 전설, 민담 등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유형적 문화요소는 백두대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산림생활사와 관련된 취락경관 및 가옥, 산간의 생활민속문화, 산간의 풍토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각종 민간신앙 시설 및 사찰을 대표로 하는 종교시설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또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등줄기로서 영남과 영동지역의 생활권을 구획하는 자연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통과할 수 있는 고개 등의 교통시설(驛 등)과 아울러 숙박시설(院) 등을 유형적 역사경관으로 들 수 있겠고, 백두대간이 지니는 지형상의 군사적이고 전략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각 요충지에 포진하고 있는 산성, 봉수 등과 같은 각종 군사시설 역시 중요한 유형적 문화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산성은 그 숫자나 역사적 경관의 중요성에 비추어보아서도 백두대간의 유형적 문화요소 중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산성은 우리나라의 산지에 보이는 인문적 역사경관으로서 대표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국적 지형에서 생겨난 독특한 문화경관으로서,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이자 산성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산성의 숫자만 하여도 전국에 무려 2천여 개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가히 단위면적 당 밀도가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당연히 한반도의 등줄기를 동서로 크게 가르고 있는 백두대간 지역에도 수많은 산성들이 있으며 각각 그 조성시기와 위치, 역사적 의미, 그리고 형태와 기능에 따라 특성이 있다.

▲ 보현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대공산성. 백제 또는 발해가 쌓았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조선조 말 을미의병 때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사진=정정현 부장>

그 중에서 대관령에서 진고개를 너머 오대산에 이르는 구간의 백두대간에는 대공산성(보현산성), 아미산성(금강산성), 제왕산성 등 여러 산성이 있어서 주목된다. 그러면 우선 일반적인 산성의 역사적 특성을 형태와 기능별로 개관하여 보고, 대관령에서 오대산 구간의 산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 성은 행정적 위계에 따라 왕성(궁성)과 읍성으로 나뉘고, 입지한 지형적 위치에 따라 평지성, 평산성(산기슭성), 구릉지성 산성으로 나뉘며, 축성 형태에 따라 산 능선을 중심으로 주위 둘레를 띠처럼 축성하는 테뫼식과 산골짜기를 포함하여 넓은 면적으로 축성하는 포곡식으로 구분되고, 축성 재료에 따라 석성과 토성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그중에서 산성은 산에 입지한 성곽으로서 주요 기능은 군사적 방어인데, 위치상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적의 동태를 쉽게 조망하여 파악할 수 있고, 요새지에 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유리한 장점을 갖추고 있다. 특히 고대의 산성은 군사적 기능과 겸하여 행정중심지의 기능도 하였기에 교통로가 집중되고 주변의 넓은 평야를 장악할 수 있는 지점에 입지하였으나, 근대로 가면서 행정 중심지는 구릉지 혹은 평지로 이동하고, 산성은 유사시를 대비하는 성곽으로 비중과 기능이 축소되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고조선의 환도산성 등과 같이 수도 역시 산성의 입지 양상을 보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부 지방중심지의 읍성이 산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것 외에는 주로 도성의 경우에는 평지나 산기슭 혹은 구릉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성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는 부족 간의 분쟁 과정에서 방어를 위해 구릉지에 도랑(해자)을 판다거나 목책이나 토담을 두르는 등의 시설을 하였다. 역사 기록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성은 고조선의 왕검성인데, 그 위치와 형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윽고 삼국시대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산성이 축성되는 시기로서 전국의 산성 중 3분의 2 이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는 당시에 산성을 거점으로 하는 정치세력 중심지의 위치와 전투방식 때문이다. 삼국은 산성의 위치, 형태, 축성방식에서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고구려는 험준한 지형에 석축(石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한편, 백제는 구릉지에 토성으로 축성하는 경향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산성의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역사시기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속성과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통일신라시대에는 행정적 거점에 산성이 축성되는데, 구릉지에 토성을 축성하여 평소에는 성 밖에 있다가 유사시에 성으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하는 양상을 보인다.

고려에 와서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기간의 항전에 유리한 대규모 산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국경과 내륙의 도시에 주로 석축의 읍성(邑城)을 건설하고 인근에는 산성을 운용하였으며, 국경과 해안의 요소마다 진보(鎭堡)를 설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수많은 해안의 산지에 설치된 진보는 당시 창궐했던 왜구들의 침탈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도 수많은 산성이 있는데, 특히 큐슈 지역에 나타나는 고대 산성은 한국의 산성과 같은 축성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일찍이 주목된 바 있다. 학계의 문헌조사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는 3세기부터 산성이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에는 한국의 축성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식 성은 일본의 큐슈 지역과 오카야마(山崗) 부근에 여러 개가 분포하고 있다.

일본의 산성 경관을 살펴보면, 성안은 영주가 거주하여 지배권력의 거주지가 되고, 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천수각(天守閣)이라는 상징적 건물이 들어선다. 성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가신, 상인, 공인, 노동자 등이 거주하여 도회를 형성하는데, 이 도시를 조카마치(城下町)라고 불렀다. 일본 근대도시 경관의 전개양상은 조카마치와 일직선으로 연속된 철도역의 간선도로, 그리고 도회공간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공산성·아미산성·제왕산성

그러면 이제 대관령에서 오대산에 이르는 지역의 산성에 관하여 유형별로 개관하고, 대표적인 산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강릉지역의 산성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이준선, 1982, <강릉지역의 고대산성>), 여러 시대에 걸쳐 축조되고 다양한 지형에 입지한 산성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대공산성을 비롯하여 교허성, 아미산성, 명주성, 칠봉산성, 왕현성, 제왕산성, 장안성, 고려성, 삼한성, 우계산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산성은 입지 유형별로 크게 표고 100m 미만에 분포하는 야산(구릉지)형 산성과 표고 700~1000m의 산각(山脚)에 입지하고 있는 고산(高山)형 산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야산형 산성은 규모가 1km 내외에 불과하여 소규모인데, 이 산성들은 신라 하대에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농업 생산양식의 기반에 있으면서 촌락민들을 통제하던 지방호족들의 자위 방어시설로 추정된다.

▲ 청학동 소금강의 아미산성, 마의태자가 쌓았다고도 하고, 고려 때 쌓았다고도 한다
상대적으로 고산형 산성은 표고가 높은 산중에 입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크다는 특징이 있어 대조적이다. 백두대간의 줄기에 분포하고 있는 대공산성, 아미산성, 제왕산성은 고산형 산성의 부류에 속하며, 각각의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대공산성의 위치는 강릉시의 서쪽 약 20km쯤 되는 보광리의 북쪽에 솟은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높이 1~2m, 둘레 약 4km의 석축 산성이다. 보광리 서쪽의 대궁산(1,000m) 능선부를 중심으로 남북 양쪽의 완만한 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성의 동남과 북쪽 바깥면은 급경사면인 반면 서남단부는 완경사의 사면으로서 곤신봉(1131m)으로 이어진다.

북쪽 성벽은 험준한 절벽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붕괴되었고, 지금은 남쪽 방면으로 높이 2m쯤의 다듬지 않은 할석(割石)으로 쌓은 성벽과 동·서·북쪽의 성문터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약 1,000여 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아직도 있다. 성안의 정상부에서는 전망이 탁월하며 영동지방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전설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 또는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가 쌓았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기록에는 이곳을 보현산이라 하고, 성은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둘레가 1,707척이라고 하였다. 조선 고종 32년(1895) 이른바 을미의병 때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아미산성 혹은 금강산성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다. 소금강의 구룡폭포에서 왼쪽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서 돌로 쌓은 성으로, 아미산성 또는 만월성이라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의태자가 쌓았다고 하며, 고려 충숙왕의 사위인 최문한의 아들 최극임이 의병을 이끌고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구룡폭포의 동·서쪽 능선을 따라 쌓은 성으로, 동쪽 성벽은 소금강의 정상부를 거쳐 다시 계곡까지 약 3㎞에 걸쳐 있으나, 서쪽 성벽은 폭포 부근에만 약 400m 정도 나타난다. 동쪽 성벽은 남·서쪽으로 뻗는 산기슭을 따라 약 400m의 성벽이 남아있고,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기슭을 따라 약 700m의 성벽이 따로 쌓여있다.

이 성은 2∼3겹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성의 남·서쪽에는 성을 쌓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성벽의 크기는 곳에 따라 다르며 높이 1∼2m, 상부의 폭 1m다. 성 안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평탄한 대지가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토기나 기와조각 등 유물은 발견되지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병장, 수양대, 망군대, 사형대로 불리는 곳이 있다.

제왕산성은 대관령과 능경봉을 잇는 백두대간에 자리한 제왕산 정상의 능선부와 남사면에 발달된 두 개의 골짜기를 둘러싸고 입지하였다. 성안의 정상부는 강릉 일대를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다. 제왕산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산인데, 고려 말 우왕이 이곳에 쫓겨와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 한다.

성벽은 크기가 다양한 사암(砂岩)으로 축조되었으나 거의 붕괴되어 극히 일부분에서만 1.5~2m의 성벽이 3km 정도로 나타난다. 지금도 성이나 축대를 쌓은 돌과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세 산성은 공통적으로 산 높은 곳에 입지하고 있는 고산식 산성이며, 둘레가 3~5km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석축 성곽이고, 성 내부에는 건물지와 식수 확보가 가능한 작은 골짜기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입지는 강릉지역의 여러 구릉지나 평지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러한 점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야산식 산성과는 입지시기와 기능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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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르포

물과 바람과 구름의 오케스트라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 구간

비에 젖고 있는 숲으로 들 때, 마음은 충분히 ‘맞을’ 준비가 돼 있어도 몸은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당연하다. 인간은 양서류가 아니니까.

장마전선이 남쪽으로 향한다는 기상 캐스터의 전언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면서 더 피둥피둥해지기 시작한다. 심란함의 도가 한계에 이르기 직전, 비가 멎는다. 거짓말처럼 구름이 옅어진다. 이런 우아한 유혹 앞에서, 계속 ‘햄릿형’ 고민에 빠질 대간 종주자는 없다.

국사성황사쪽 길을 택한다. 소위 대간 ‘마루금 밟기’를 고집할 경우 대관령 성황사와 산신각은 눈 아래로 스쳐 지나게 된다. 하지만 마루금을 고집하는 태도는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간은 스카이라인에 해당하는 ‘등마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기슭 없이 등성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간 종주는 기슭이든 마루든 산이 허락해 준 길을 따라 산줄기 전체를 더듬는 일이다. 하물며 영서와 영동을 가르는 고갯마루를 지키는 성황과 산신을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 이틀 동안 비와 안개 속을 걸었다. 지우는 비는 하늘과 땅을 맞대 놓았고, 안개는 풍경에 깊이를 더해 주었다. 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좋은 산.

우산을 받쳐들고 산행하는 재미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에서 30분 못 미처 국사성황사와 산신각에 이른다. 다 알다시피 대관령 성황신은 범일국사(810-889)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역대 고승 중 성황신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강릉 단오제의 주신도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국사와 강릉 지역의 인연은 깊다. 대간 오른쪽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지가 있는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사찰인 굴산사의 창건주가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국사의 탄생설화를 보면, 어머니가 샘물에 뜬 해를 마시고 잉태했다고 한다. 마땅히 동햇가 사람들에게 신으로 받들어질 탄생의 드라마라 하겠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또 있다. 임진왜란 때, 범일국사가 대관령에 올라 기도를 올리자 나무와 풀들이 왜군들에게 군사의 모습으로 보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시대가 맞지 않는다.

산신각은 성황사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김유신을 이곳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청 사이트에는 ‘장군 왕순식이 고려 태조를 모시고 후백제의 신검군을 정복코자 할 때, 두 귀신이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어 싸움에 이겼다고 한다. 그 뒤 두 분을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고 소개돼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제압한 왕순식에게 왕건이 “내 꿈에 기이한 중이 나타나 갑병(甲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왔더니, 그 다음날에 경이 도와주었으니 그 꿈이 들어맞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왕순식이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대관령)으로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어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습니다. 임금께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강릉의 옛 향토지인 임영지에도 왕순식이 꿈에 승속(僧俗)을 만나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승속 2인이 바로 범일국사와 김유신이라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오랜 믿음이다. 또한 임영지에는 한글 소설의 효시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산신제를 구경하다 우두머리 관리에게 산신이 누구인지 물어본즉, 김유신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김영기 저 <백두대간 민속기행>(강원일보사 간) 참조).

어차피 전설인데 아무렴 어떠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설이란 당시대인들의 믿음이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가치 판단이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지역민의 믿음과 무관하게 몇 가지로 유통되는 것은 곤란하다. 강릉은 물론 강원 지역에서는 일반인들은 물론 언론에서도 대관령 산신을 김유신이라 믿는다.

성황과 산신에 인사를 올리고 등성마루로 걸음을 옮긴다. 비에 젖은 숲에서 ‘풀 비린내’가 펄떡인다. 걸음을 따라 낙엽 냄새가 섞여든다. 몸속으로 숲이 들어온다. 기꺼이 우중(雨中) 산행을 즐기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사실 이번 산행에서 비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횡계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어차피 그럴 거라면 우산을 받쳐 들고 걷기로 했다. 마침 이번 구간은 시작과 마지막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평탄한 풀밭이 아닌가.

친구들과 우산을 쓰고 학교로 가던 어릴 적의 기억이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랐다. 대관령으로 이동하기 전 우산을 샀다. 어린이용밖에 없었다. 번개 소년 아톰이 그려진 캐릭터 우산이었다. 간신히 상체나 가려줄 자그마한 우산을 펼쳐들고 마음껏 낄낄거렸다. 배낭 뒤에 우산을 찔러 넣은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우리는 또 낄낄거렸다. 절로 다가오는 즐거움이 진짜겠지만, 이렇게 노력해서 얻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노력하는 동안 이미 즐거워지니까.


자연을 위해 자연의 한 부분을 파괴해야 하는 모순

▲ 선자령으로 향하는 취재팀. 비가 오락가락한다.
새봉을 지나 목초지를 만날 때까지는 서서히 키를 높이는 숲길이다. 선자령을 앞두고 삼양축산의 목초지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하늘과 맞닿은 초원을 느낄 수 있다. 동쪽(강릉)은 숲이 우거진 가파른 기슭이지만 서쪽(평창)은 황소의 잔등 같은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다. 강원도에서는 하늘이 내려주는 비만 바라보며 화전을 일구던 이곳을 1980년대 초반부터 목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풍광이 조선 숙종 연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팔도총론에 그때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 놓고 있다.
'내 나이 열넷이던 계미년에 아버지께서 강릉의 원이 되어 가셔서 나도 가마를 따라갔다. 은교역에서 강릉부 서쪽 대관령에 이르도록 평평한 곳이거나 고갯길이거나 가릴 것 없이 깊고 빽빽한 숲이었다. 무릇 나흘 동안 걸으면서 쳐다보아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서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잇닿아서 산에는 한 치 굵기의 나무도 없다. 이로 미루어 보면 딴 고을도 이와 같을 텐데, 착한 임금 밑에서는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을 알겠으나 산천은 손해가 많다.

예전에 인삼이 나는 곳은 모두 고개의 서쪽 깊은 두메였는데 산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느라 불을 질러서 인삼이 점차로 줄어들었고, 장마 때면 산이 무너져서 한강에 흘러드니 한강이 차츰 얕아진다.‘

참으로 놀랍도록 정교하고 긴 안목이다. 마치 오늘의 형편을 예측이나 한 듯하다. 이때가 18세기 초반이니 300년 가까이 화전을 일구던 땅이 현재 목초지로 바뀐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송천이 발원하는데, 비가 올 때면 송천 상류는 거의 황토물이 된다고 한다. 물론 고랭지 채소밭인 횡계고원이 주된 영향이겠지만, 현재 풍력 발전을 위해 등선마루의 길까지 넓히고 포장을 하면서 더 악화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대관령 풍력발전단지. 목초지에 이국적 풍광을 더하고 있다.

천연 에너지인 풍력으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은 분명 친환경적이다. 자연을 위해 자연의 한 부분을 파괴해야하는 모순은 심층생태주의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배려는 최대치도 모자란다. 그런데도 도로 옆 절개면은 아무런 조치도 없이 황톳물과 토사를 흘려보내고 있다. 물론 나중에 보강공사를 하겠지만, 비용면에서도 한꺼번에 공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구호가 말장난에 그치지 않으려면 테크놀로지가 모든 걸 해결할 것이라는 미망부터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규모를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벗 삼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닐까.


공간에 깊이와 신비를 더하는 안개

선자령(1,157.1m)에서부터 대간 트레일은 거침없이 초원을 달린다. 가끔 숲을 들락거리지만 서쪽으로 내려서지만 않으면 곧장 도로를 따라가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어디로 가느냐는 순전히 취향 문제다. 햇볕 쨍쨍한 날이면 당연히 숲으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 굳이 숲으로 들 이유가 있을까.

선자령 정상표지석에서 점심을 먹으려 하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서둘러 비박용 가림막으로 천막을 급조한다. 아늑하다. 별것 아닌 일에서도 마치 큰 일을 해낸 듯한 이 유치한 행복감이라니. 산에 드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 소황병산 가는 길. 드문드문 선 소나무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같고, 그 옆 취재팀은 신선을 만나러 가는 것 같다.
따로 또 같이. 우산을 받쳐 들고 산길을 걷는 취재팀의 모습이 딱 이렇다. 아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양새가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도심 보도 위를 제각각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 치던 것과 지금 산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일은 질적으로 다르다. 도심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소리를 즐길 여유는 없다. 오직 비라는 ‘이물질’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일만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누가 조금만 뒤처져도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하고 속도를 늦춘다. 그러면서도 나만의 우주를 거니는 듯한, 나와 대지가 한 몸이 된 듯한 충만감을 느낀다.

도로가 비탈을 휘어돌 때, 간간히 풀 우거진 트레일로 들어선다. 풀잎에 묻어있던 물방울이 와락 바지에 안긴다. 바지가 살갗에 찰싹 달라붙는다. 작은 우산이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거의 젖지 않았는데, 한 순간 풀잎을 스친 물방울이 하루 종일 젖은 양보다 더 많다. 흔히 숲을 강물을 가두는 인공댐에 빗대어 녹색댐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숲이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은 소양댐 10개와 맞먹는 180억 톤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인공댐으로 얻을 수 있는 126억 톤의 1.6배다. 실감되지 않는 이 수치를 바짓가랑이에 묻은 물방울로 체감한다.

곤신봉(1,127m)을 지나면서부터는 안개가 짙어진다. 1,000m가 넘는 고지대지만 워낙 편안한 길인데다, 서쪽에 비해 기울기가 가파른 동쪽 기슭이 구름에 갇혀있어 고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가면 새로이 길이 열리고, 가끔 바람이 안개를 지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가끔씩 홀로 선 소나무들이 안개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드러낸다. 울창한 숲보다 더 존재감이 뚜렷하다. 안개는 공간에 깊이와 신비를 더한다. 익숙한 것들에 경이의 옷을 입힌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며 어떤 심경이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몇 구절을 보자.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는 '높은 절벽에 붉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銀河)에 씻을 듯하다'고 노래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령은 늘 안개와 구름을 벗 삼으며 보는 이들의 시적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매봉을 앞두고 동해전망대에 이르자 한기가 들기 시작한다. 전망이라고는 동해를 삼켜버린 구름밖에 없다. 그렇다고 눈 아래로 깔린 운해도 아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고 있는 무거운 비구름이다.


여름은 한뎃잠 자는 이들의 편

▲ 소황병산에서 노인봉으로. 소황병산 일대는 강아지처럼 막 뛰놀고 싶은 풀밭이다.
커피 한 잔 생각에 간이휴게소로 들어갔으나 막걸리를 보자 금방 생각이 바뀐다. 메밀전 안주가 간식 이상의 막걸리를 삼킬 즈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매봉에서 합류하기로 한 에코로바 임직원들이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반가움의 정도를 증폭시킨다. 에코로바팀이 적당히 지친 취재팀에 활력을 나눠준다.

에코로바팀을 앞장세우고 느릿느릿 뒤따른다. 도로와 트레일을 넘나든다. 에코로바팀들의 화사한 펀초 우의가 곱다. 사람도 분명 자연의 일부지만 그걸 자각하면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연의 품에서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결이 삭으면 절로 자연성을 회복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인지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몸이 절로 터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토끼에게 한뎃잠을 자는 요령을 배우지 않아도, 노루에게 계곡에서 물 찾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웬만한 경우는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지나친 자기확신이나 방심이다.

매봉(1,173.4m)에서 배낭을 부린다. 이번 구간에 지나온 대부분의 봉우리가 그렇듯이 매봉 또한 봉우리 같은 느낌은 없다. 멀리서 보면 구릉에서 솟아올라 있지만 봉우리의 속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텐트와 가림막으로 대충 잠자리를 만든 다음 산상 만찬에 들어간다. 밥과 술이 끼니의 자리를 넘나든다. ‘기갈이 감식’이듯, 악조건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린다. 되는 대로 걸판지게 즐겁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멈추더니 금방 하늘 한 귀퉁이가 열린다. 구름 사이로 상현 반달이 얼비친다. 맑은 하늘의 달보다 더 가까워 보인다. 야, 별이다, 하고 누군가 외친다. 하늘바라기에 인색한 도회의 삶 때문도, 과장된 감정 탓도 아니다. 산이 ‘치레’의 옷을 벗겨 준데다 비가 그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확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소주 한 잔 먹고 하늘 한 번 보고, 옆 사람과 눈 마주치다 또 하늘 한 번 보고 하는 사이 별빛이 물결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상쾌한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영글기도 전에 구름은 다시 비를 흩뿌린다. 슬그머니 한둘씩 자리를 뜬다. 아무렇게나 누워도 내일 안녕할 것이다. 비가 올지라도 여름은 한뎃잠 자는 이들의 편이다.

불편한 잠자리가 일찍 아침을 부른다. 갓 밝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운해는 선잠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하다. 지난밤의 흔적을 지우고 서둘러 아침을 먹는다. 하늘이 다시 무거워진다.

매봉에서부터는 등성마루로 난 찻길은 없다. 트레일은 제법 이슥한 숲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20분쯤 지나서 살포시 올라섰다 내려서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이루는 숲길이다. 제각기 카메라에 안개가 흐르는 숲을 담느라 분주하다. 숲 사이로 안개가 흐른다. 안개를 따라 숲이 흐른다. 흐르는 숲을 따라 우리도 흐른다. 안개로 하여 사라진 원경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숲의 관계를 한층 좁혀준다.

▲ 매봉을 지나 소황병산으로.

숲길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열린다. 소황병산(1,328m)이다. 트레일에서 소황병산 표지석까지는 맘껏 달리고 싶은 분위기의 목초지다. 송아지처럼 즐거운 에코로바팀의 젊은 에너지가 눈부시다. 바위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본다. 구름뿐인 하늘인데도 왠지 마주하기가 민망하다. 헛울음 우는 아이처럼 노래 한 곡 불러본다.

소황병산에서 노인봉산장까지는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산장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전망대 바위는 누워서 낙조를 보기에 딱 좋은 곳이지만 오늘은 무망한 일이다. 이제는 폐쇄된 노인봉산장에서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노인봉을 오른다. 천지는 구름과 안개뿐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집중하며 진고개를 향한다. 물과 바람과 구름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자연의 음악에 흠뻑 젖은 이틀이었다.


즐거운 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피할 수 없는 비, 디카로 즐기자

대간 종주자들에게 여름은 겨울만큼이나 부담스럽다. 비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구간종주를 할 경우 폭풍우가 아니면 산행을 접기도 께름칙하다. 그래서 비 맞을 각오하고 종주를 시도한다. 전망도 좋지 않다. 이럴 경우 차라리 구름이나 안개를 디카(디지털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으로 운행의 불쾌감을 날려버리자. 디카는 콤팩트해 무게 부담도 없다.

직업 사진가가 아니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사진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산에서 이런 날씨는 풍경에 극적인 요소를 더하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운해, 안개, 비, 바람을 찍어 보자. 그런데 이런 날씨는 적정 노출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운행 중에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산을 준비하고, 소형 삼각대를 챙겨야 한다.

▲ 노인봉 가는길, 소풍나온 아이들처럼 사진 찍고 찍히기에 바쁘다.

일반적으로 녹음이 우거진 숲을 찍을 경우는 반드시 노출은 적정보다 부족하게 하는 것이 좋다. 안개나 구름을 찍을 경우 카메라가 가리키는 대로 찍으면 원하는 효과보다 노출이 부족한 사진을 얻기 쉽다. 안개나 구름은 빛을 확산시키기 때문에 카메라의 노출은 부족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노출을 약간 더해 주는 것이 좋다.

원경만 찍으면 눈으로 보는 느낌과 달리 밋밋한 사진을 얻게 된다. 근경이나 나뭇잎의 물방울, 잎맥, 나무껍질 등을 찍어 보자. 더 재미있는 사진을 얻으려면 망원을 즐겨 사용하자. 산기슭의 일부만 잘라내어(cropping) 찍어도 전경 사진과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첩첩 산줄기나 산 주름을 망원으로 클로즈업시키면 원근감이 압축되면서 겹치기 효과가 극대화된다. 판에 박힌 사진에서 벗어나 보자.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글 허재성 기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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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식생

북방계 고산식물 사스래나무와 분비나무 군락지
금강초롱꽃·참배암차즈기·누른종덩굴 등 특산식물 분포

대관령을 넘은 백두대간은 지척의 거리에 오대산(1,563m)을 일으켜 세운다. 설악산, 금강산으로 뻗어나가며 더 큰 산들을 품을 준비라도 하는 듯하다. 오대산 상봉인 비로봉은 정작 백두대간의 마루금에 서 있지 않고, 대간의 두로봉(1,422m)에서 6km 남짓 물러나 있다.

백두대간에서 오대산 주능선이 갈라지는 이 두로봉은 대관령에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30km쯤 떨어져 있다. 대관령에서 출발해서 선자령(1,157m), 곤신봉(1,127m), 매봉(1,173m), 소황병산(1,328m), 노인봉(1,338m)을 거쳐 진고개에 이르며, 진고개 후에는 동대산(1,434m)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두로봉 남쪽의 동대산과 노인봉 경계에 진고개가 자리 잡아, 오대산과 노인봉 산군을 갈라놓고 있는 셈이다.


소금강 화강암반과 어우러진 소나무숲

대간에서 물러나 앉은 오대산이 대간의 두로봉과 동대산을 세력권 안에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노인봉은 언뜻 황병산(1,407m)에 속한 한 봉우리처럼 보인다. 대관령에서 진고개까지 백두대간 주변에서 가장 높고, 대간에 솟아 있는 소황병산과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봉을 황병산에 속한 봉우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 마디로 황병산보다 노인봉이 더 유명하다. 노인봉은 오대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데다가 소금강이라는 이름 높은 계곡을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봉은 품고 있는 골짜기로 말한다면 이뿐만이 아니다. 대간의 서쪽, 정확히는 노인봉 정상에서 남서쪽으로는 안개자니계곡을 거느리고 있다. 육산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깊고 깊은 이 골짜기는 6km쯤 흘러 진고개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만난 후에 다시 5km 남짓 흐른 뒤 오대산에서 흘러내리는 오대천에 합수된다.

소황병산을 경계로 하여 남쪽에는 대관령 습지를 이룬다면, 이후 북으로 올라가며 산세가 사뭇 달라진다. 대간 동쪽으로는 예의 급한 경사를 계속하여 이루지만, 서쪽으로는 펑퍼짐한 습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 경사가 있는 산사면과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간 서쪽의 숲과 계곡은 서쪽 멀리까지 이어져 계방산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넓고 넓은 오대산 산군을 형성하게 된다. 서쪽의 골짜기 가운데 하나가 노인봉과 소황병산의 물을 받아 시작되는 안개자니계곡인 셈이다.

▲ 분비나무. 만주, 몽골, 우수리 등지에 분포하는 북방계 침엽수로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한의 높은 산 능선에 분포한다. 한라산부터 덕유산까지 분포하는 구상나무는 솔방울 모양이 조금 다르다.

노인봉에서 2시간쯤 거리에 있는 진고개 일대는 6번 국도, 고랭지 채소밭 등으로 자연성이 일부 훼손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노인봉 일대의 백두대간은 자연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노인봉만을 대상으로 하여 세밀하게 이루어진 식물조사는 없지만, 800여 종류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대의 식물조사는 국립공원 자연자원 조사의 일환으로 오대산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전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가 많이 나타나는 특징은 이곳이 고도가 높은 산지임을 방증하는 것으로서, 이들 침엽수는 북방계 식물로서 이곳의 높은 고도가 분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침엽수들은 고도에 따라서 분포하는 종이 달라지는데, 낮은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소나무가 해발 1,100m까지 보이며, 이후에는 전나무와 잣나무가 섞여 자라고 있고, 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는 잣나무와 분비나무가 섞여 있으며, 해발 1,200~1,300m가 되면 분비나무만이 자란다.


북방계 고산식물 분비나무 군락 이뤄

가장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분비나무는 노인봉 정상 북쪽 사면 일대에 작은 무리를 지어 생육하고 있다. 소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는 높이 30m에 이르며,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등 백두대간을 따라 높은 산에만 분포한다. 구상나무와 매우 비슷하지만 솔방울의 열매조각이 수평으로 벌어질 뿐, 뒤로 젖혀지지는 않으므로 구분된다. 덕유산에 이르면 분비나무와 구상나무가 섞여 자라면서 열매조각의 특징도 둘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불분명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말 이름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을 칠한 듯한 회색 나무껍질을 가진 나무라는 뜻에서 ‘분피(粉皮)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분비나무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요강나물: 중부지방의 높은 산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6월에 핀다. 덩굴손이 없으므로 검종덩굴과 구분하지만 중간형이 관찰된다.

꼬리조팝나무: 계곡 주변 등 습기가 많은 곳에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6~8월에 핀다. 동북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며, 어린잎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노인봉 일대에 분포하는 떨기나무와 덩굴나무로는 할미밀망, 누른종덩굴, 민둥인가목, 생열귀나무, 꼬리조팝나무, 쉬땅나무, 산앵도나무, 철쭉나무, 미역줄나무, 꽃개회나무, 작살나무, 노린재나무 등을 꼽을 수 있다.

누른종덩굴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연약한 덩굴나무로서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한라산부터 북부 지방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숲 속에 분포한다.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이는데, 노란색이고 아래쪽 겉에 돌기가 나 있다. 중부 이북부터 만주 지역까지 분포하는 세잎종덩굴은 꽃이 자주색이고 꽃받침 겉에 돌기가 나지 않아서 다르지만, 다른 여러 특징이 이 식물과 비슷하다.

노인봉의 초본 즉 풀로는 투구꽃, 흰진교, 참꿩의다리, 선괭이눈, 수정란풀, 참좁쌀풀, 참배암차즈기, 광대수염, 오리방풍, 금마타리, 모싯대, 금강초롱꽃, 산민들레, 고려엉겅퀴, 은방울꽃, 금강애기나리, 연령초, 말나리 등이 주요 종이라 할 수 있다.

참배암차즈기는 경남 가야산 이북의 높은 산에 자라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문경 조령산 부근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화관이 위아래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특히, 화관의 윗입술에는 하얀 암술이 밖으로 길게 나와 있어서 뱀의 혀를 연상하게 한다.

▲ 동자꽃: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산에 자라는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진한 붉은색 꽃이 여름철에 핀다. 동자승에 얽힌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등칡: 경상도 이북의 산에 비교적 드물게 자라는 쥐방울덩굴과의 덩굴나무로, 꽃은 5월에 핀다. 꽃은 U자형으로서 모양이 특이하며, 암꽃과 수꽃이 다른 그루에 달린다.

노인봉 일대의 숲은 크게 보아 소나무숲, 굴참나무숲, 신갈나무숲으로 나눌 수 있다. 해발고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데, 고도가 낮은 지역에 소나무숲, 중간 지역에 굴참나무숲, 백두대간 능선 등 높은 고도에 신갈나무숲이 발달해 있다.

소나무숲은 해발고도 250m에서부터 1,100m까지 나타나는데, 고도가 낮은 습한 계곡 부근, 건조한 바위지대, 건조한 산사면 등 여러 곳에 발달한다. 일부는 고도가 높은 백두대간과 지능선 상에도 생육하고 있는데, 이때는 군락을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소금강계곡 주변의 바위지대 해발 500m쯤의 화강암 지역 등에서 군락으로 이뤄 자라고 있다. 소나무숲 속에서는 보통은 풀과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하지만 철쭉나무와 싸리 같은 떨기나무, 맑은대쑥, 삽주, 큰기름새, 주름조개풀 같은 풀은 적응하여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 누른종덩굴: 중부 이남의 높은 산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나무로 꽃은 6~7월에 핀다.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이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사는 특산식물이다.

광대수염: 전국의 산 습기가 많은 곳에 자라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6월에 핀다. 가늘게 갈라진 꽃받침 조각이 광대들이 얼굴에 그리는 수염을 닮았다.

소나무숲이 발달하는 저지대에서 볼 수 있는 식물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장미과의 개벚지나무가 있다. 산벚나무, 귀룽나무, 산개벚지나무 등과 함께 벚나무속에 속하는 이 큰키나무는 저지대 계곡 주변에서 생육한다. 지리산에도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로 강원도 깊은 산에서만 드물게 발견되는 북방계 식물로서, 백두산을 비롯한 북부지방과 만주, 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필자는 가리왕산, 설악산 등지에서 관찰한 바 있다. 꽃은 5월에 피며, 총상꽃차례는 길이 5~7cm로 발달한다. 다른 벚나무속 식물들에 비해서 줄기껍질이 매우 독특한데, 황갈색으로 윤기가 나서 자작나무나 거제수나무의 줄기껍질과 비슷하게 생겼다.

중간 고도에는 굴참나무가 많이 자란다. 특히, 소금강의 산허리에 해당하는 지역 가운데 양지바른 곳에 무리를 지어 자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참나무의 한 종류인 굴참나무는 줄기껍질이 발달하여 굴피집의 재료가 되기도 하며, 건조한 환경에서도 잘 견딜 수 있어 수분 스트레스에 강한 나무 가운데 하나다. 노인봉 해발 300~600m에서 군락을 지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300~400m 지역에서는 소나무와 섞여 자라기도 하며, 600m 부근에서는 신갈나무와 섞여 자라는 모습도 관찰된다. 이 숲에서는 쪽동백나무, 조록싸리 등의 떨기나무가 중간층을 이루며, 다양한 풀들이 숲 바닥에서 자란다.

▲ 참배암차즈기: 중부 지방의 높은 산에 비교적 드물게 자라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꽃은 7~9월에 피며, 화관의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매발톱나무: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매자나무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4~6월에 핀다.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으며, 열매는 초가을에 붉게 익는다.

해발 1,000m가 넘는 지역에서는 신갈나무가 숲을 이룬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보다 낮은 고도에서도 신갈나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군락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군락을 이루어 자란다. 습도와 유기물 함량이 높아 비옥한 토양이 발달한 고지대에서는 어김없이 신갈나무가 극상림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신갈나무숲 속에는 쪽동백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등이 섞여 자라며, 노린재나무, 국수나무, 조록싸리, 싸리나무 등의 떨기나무가 중간층을 이루고 있다. 숲 바닥에는 흰진교, 투구꽃, 송이풀, 모싯대, 금마타리, 미역취, 맑은대쑥, 곰취, 수리취 등의 여러해살이풀이 자라고 있다.

이밖에도 노인봉 일대에는 피나무, 고로쇠나무, 당단풍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당단풍나무는 해발 500m 지역, 고로쇠나무는 600~800m 지역, 피나무는 800~1,000m 지역에 무리 지어 자란다. 또한 서어나무는 250~1,000m 지역에서 자라고 있으며, 300~800m 지역에서는 졸참나무도 관찰된다. 백두대간 능선 부근에서는 사스래나무, 전나무, 분비나무의 무리를 볼 있다. 전나무는 노인봉에서 소황병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간간이 작은 군락을 지어 나타난다. 분비나무는 노인봉 정상 부근의 해발 1,200~1,330m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사스래나무는 1,100~1,300m 지역에서 나타난다.

▲ 산겨릅나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단풍나무과의 작은키나무로서 꽃은 4~5월에 핀다. ‘벌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 약재이며, 열매에 날개가 달려 있다.

말나리: 전국의 산 숲 속에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7~8월에 핀다. 줄기에 6~20장의 잎이 돌려나며, 줄기 끝에서 1~6개 꽃이 옆을 향해 핀다.

진고개 일대는 자연성 훼손

백두대간 진고개 일대는 화전에 의한 인위적인 생태계 훼손이 일어난 지역이다. 산림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 많으며, 신갈나무가 숲을 이룬 곳에서는 조릿대가 함께 자라고 있다. 이밖에도 떨기나무로 고광나무, 딱총나무, 국수나무, 산딸기나무, 산가막살나무, 노린재나무 등이 관찰된다. 풀로는 애기수영, 광릉갈퀴, 홀아비바람꽃, 미나리아재비, 큰뱀무, 금강제비꽃, 어수리, 광대수염, 산외, 노박덩굴, 초롱꽃, 마타리, 산민들레, 고려엉겅퀴, 은방울꽃, 금강아지풀 등을 볼 수 있다.

▲ 시닥나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단풍나무과의 작은키나무로서 꽃은 5~7월에 핀다. 수술은 8개이며, 잎의 갈래에 끝까지 톱니가 난다.
산민들레는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서 과거에는 마을 근처에도 매우 흔하게 자라는 토종식물이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화와 함께 외국에서 들어온 서양민들레에 살 곳을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양민들레와는 달리 꽃차례를 받치고 있는 모인꽃싸개잎이 뒤로 젖혀지지 않으며, 민들레와는 달리 바깥쪽 잎의 끝 부분에 뿔처럼 생긴 돌기가 나지 않으므로 구분할 수 있다.

진고개에서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에는 신갈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해발 1,000~1,200m 지역에서는 순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많다. 소나무, 분비나무, 노간주나무 등의 침엽수가 자라고 있고, 고산식물인 사스래나무도 보인다. 그밖에 함박꽃나무, 찰피나무, 당단풍나무 등의 교목, 참조팝나무, 미역줄나무, 노린재나무 등의 떨기나무, 관중, 일엽초, 동자꽃, 흰진교, 수정란풀, 졸방제비꽃, 송이풀, 개갈퀴, 금마타리, 쥐오줌풀, 모싯대, 산씀바귀, 산구절초, 단풍취, 천남성, 삿갓나물, 말나리, 둥굴레, 은대난초 등의 풀이 생육하고 있다.

소황병산 부근의 백두대간 숲에는 금강초롱꽃이 자라고 있다. 금강초롱꽃은 설악산 및 금강산 일대에 분포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로서 남쪽으로 백두대간의 두타산까지 분포한다는 보고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 소황병산 일대까지가 띠를 이루며 많은 개체가 생육하는 분포선으로 여겨진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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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지명

대령(大嶺)·대관(大關)·진고개는 모두 ‘큰 고개’의 뜻
고개도 크기에 따라 치(재), 현, 령, 관 등으로 구분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한송정 솔빛은 푸른 연기에 어리었는데
경포대 물빛은 먼 하늘을 밝히도다
총석과 금란과 또 국도여
하나 하나 기관이 눈앞에 벌어지네
내 일찍이 이 사이에서 마음껏 유람할 때
기이하고 훌륭한 것을 더듬고 찾아 여러 번 말채찍을 머물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동의 천지 안에는
좋은 산천은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다 하였더니
어제 대관령을 지나 이곳까지에 이르매
거칠고 묵은 고을 속절없이 남아 있네

寒松松色凝蒼煙
鏡浦波光明遠天
叢石金蘭與國島
一一奇觀供眼前
我行此閒恣遊覽
搜奇摘勝多留鞭
自言海東天壤裏
更無一遺好山川
昨過大關到此境
荒郡古縣空依然

- 고려 공민왕 때의 문장가 형군소(邢君紹)의 칠언시 춘주소양강차운(春州昭陽江次韻)의 일부


‘고개 위 하늘 폭이 겨우 석 자’

태백산맥 서부 산지에 있는 대관령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과 강릉시 성산면의 경계에 있다.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 동쪽의 마지막 고개로, 해발고도 832m.

대관령 지역은 백두대간 해안산맥의 중부로서, 황병산, 노인봉, 선자령, 발왕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동쪽은 대관령이 경계이고, 서쪽은 유치(杻峙·싸리재)와 경계를 이루는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 지형이다.

비가 많은 편(연강수량은 1,450㎜)이며, 지대가 높아 기후가 평지와는 많이 다르다. 몹시 추워 9월이면 벌써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이 긴 반면에 봄과 가을이 짧으며, 여름도 길지 않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대관령 일대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옥수수, 감자 등의 농산물을 재배하거나 송이버섯을 채취하며 생활을 꾸려 가는 한적한 산촌 지역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유일의 고랭지 시험장이 있어 여러 작물을 시험 재배하고, 소와 양의 사육 시험도 하고 있다.

전에는 이 지역 주민들이 통나무를 기와 크기의 널빤지로 쪼개어 지붕을 이은 너와집이나 이 지역에 흔한 점판암 조각으로 지붕을 이은 돌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요즘은 화전민들이 사라지면서 나무로 만든 너와집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열이 잘 보존되는 돌너와집은 겨울이 길고 추운 이 지역에서 아직도 유용한 주거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돌너와집을 지을 때 쓰는 점판암은 진흙이 단단히 굳어서 이루어진 검은 바위로, 몸이 곱고 얇은 조각으로, 떡켜처럼 얄팍하게 갈라지기 잘하는 성질이 있어, 기와처럼 이용하기에 매우 좋은 퇴적암이다.

대관령은 지대가 높기에 조선시대 정도전의 시에서는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 자’라고까지 과장해 표현했다. 그런 데다가 지세가 험하니 교통이 불편할 수밖에 없어 임진왜란 때를 빼고는 전쟁에 휩싸였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동사강목에는 고려 고종 4년(1217)에 최원세(崔元世)와 김취려(金就礪)가 거란군을 여진 땅으로 몰아내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대관령이 등장한다.

‘…관군은 드디어 산마루로 올라가서 밤을 새웠다. 질명(質明·날이 샐 무렵)에 적이 과연 산마루 남쪽으로 진군하여 먼저 수만 명으로 하여금 좌우의 산봉우리로 나누어 올라가게 하여 요해처를 쟁취하려 하였다. 취려가 장군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으로 하여금 왼편을 맡게 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로 오른편을 맡게 하고, 취려는 가운데에서 북을 쳐서 격려하니 군사가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중군이 이것을 바라보고 또한 크게 외치며 다투어 전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버리고 간 노약한 남녀와 병기, 치중(輜重)이 질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은 끝내 남하하지 못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나므로 이를 추격하여 명주(溟洲) 지금의 강릉 대관령에 이르렀으나, 장수와 사졸들이 겁약해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가 10일만에 진군하니 적은 이미 대관령을 넘어간 후였다. 중군, 좌군, 전군이 다시 추격하여 모로원(毛老院)에 이르러 이를 패배시켰다.’

모로원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에서 대화면 노근리로 넘어가는 몰잇재(모릿재·모로현) 밑에 있었다.

‘공중에 치솟은 대관령은 여러 늙은 아비(大嶺凌空衆父父) / 여러 주름살이 동으로 와서 팔다리처럼 흩어졌구나(衆皺東來散肢股) / 팔이 나뉘고 다리가 갈려 평호를 두른 곳에(肢分股別擁平湖) / 푸른 메와 흰 물결이 서로 삼켰다 토했다 하네(靑巒白浪相呑吐)’

속동문선 제5권에 나오는,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1439-1504)의 ‘경포대를 오르며(登鏡浦臺)’의 일부다. 이처럼 대관령은 ‘공중에 치솟은’이란 표현처럼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높음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영동지방을 간다고 하면 으레 대관령을 들먹이는 일이 많았다.

▲ 구 고속도로(아래 도로)와 신 고속도로(위 도로)가 교행하는 대관령. 옛 고갯길은 왼쪽 계곡으로 나 있다.

울고 넘던 고개 대관령

대관령 정상에는 대령원(大嶺院), 횡계리에는 횡계역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에서 여객의 편리를 도모했었다. 지금은 고개 모습이 달라지고, 고갯길 위치도 조금 빗겨 가면서 도로폭도 많이 넓어졌지만, 옛날엔 산굽이도 더 많았고, 길폭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대관령 옛길은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란 사람이 조금 넓혀 놓았다. 이 고개는 그야말로 ‘울고 넘는 고개’였다. 한양쪽에서 영동으로 가다가 관원들이 이 고개 산마루에 겨우 올라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면 그제서야 세상 끝에 당도했다고 눈물을 흘렸고, 떠나올 때는 그 동안 정들었던 생각을 하며 울면서 갔다 하여 ‘울고 넘는 고개’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개 마루 반정에서는 강릉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이율곡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산길을 오르던 모습과 지금 가면 친정에 또 언제 오려는지, 오죽헌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신사임당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 이 몸은 서울길로 홀로 가는데 /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하고 /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신사임당)

그 옛날 대관령을 넘었을 때는 정말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본 사람들은 아래로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과 구불거리는 길 위에서 사람들이 좌불안석이었다고 지금도 말한다.

새 길이 생기면 옛길은 없어지게 되지만, 아직도 대관령에는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윗반정에서 강릉시 어흘리 대관령박물관에 이르는 약 5㎞의 호젓한 오솔길로 이어져 있는 대관령 옛길은 조상들이 괴나리봇짐에 짚신 차림으로 넘었던 고갯길. 굽이가 많아서 고개가 높아도 비탈이 그리 가파르지 않아 2~3시간이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넘는다.

대관령에는 옛날에 골짜기 한 켠과 반정에 주막이 각각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강릉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것은 반정 주막.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을 넘는 중에 반정 주막터에 잠시 머무르면 강릉 시내와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반정 주막은 옛사람들이 고개를 오르다가 땀을 씻으며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던 곳. 역마 제도가 있었던 조선시대엔 영동선의 구산역과 고개 너머 횡계역의 중간이라 하여 ‘반쟁이’라고 불렀다는 곳이 바로 그 주막터다. 고개 중턱 어흘리 길가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는 연자방아, 돌대야, 구리거울, 토우 등 질박한 삶의 흔적들을 모아 두고 있다.

대관령 옛길은 이제는 어쩌다 옛 추억과 향수에 이끌리는 몇몇 여행객들, 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거나 마을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만 오가는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에는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던 중요한 교통로답게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옛길로서는 제법 그 폭이 널찍하다.

그런데, 지금은 ‘대관령을 넘는다’는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서울에서 간다고 해도 대관령 고갯길이 아닌 터널을 통해 바로 강릉쪽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동고속도로의 횡계-강릉 구간은 지난 2001년에 개통된 신작로. 총 21.9km로, 서울에서 강릉까지를 무려 1시간여나 단축시켰다.

▲ 대관령 옛길. 대관령 정상에는 대령원. 횡계리에는 횡계역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에서 여객의 편리를 도모했었다.

대관령이란 이름은 대령(大嶺)의 첩어식 이름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사이의 고개인 대관령은 그 길이가 13㎞나 된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문화의 전달로이며, 큰 생활권의 경계지라고 할 수 있다.

강릉시 관련 모 홈페이지에서는 대관령이란 이름에 관해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을 이 지역 사람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너무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대관령이란 이름이 대굴대굴이라는 의태어에서 나왔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대관령이라고 할 때 ‘대갈령’이라고 발음하기 쉬운데, 이 지역 사람들의 특이한 사투리 관습에 따라 ‘대굴령’으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굴’이라는 순 우리말과 ‘령(嶺)‘이라는 한자말의 조합도 이해하기 힘들다.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이 자연스럽게 지명처럼 정착되려면 이것이 ’대굴고개‘나 ‘대굴재’로 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며, ‘대굴+령’ 형식의 이름으로 가기는 쉽지 않다.

대관령은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동쪽 경사면의 도로는 아흔아홉구비라고 한다. 대관령을 대령이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은 이 고개 정상의 대령원(大嶺院)이란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지승람에도 대관령을 대령이라고 칭하였다고 나온다.

아흔아홉고개란 말은 이곳뿐만 아니라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등 전국에 여러 곳에 있는데, 이러한 이름은 고유명사적 이름이 아니라 일반명사적 이름이라 할 수가 있다. 즉, 산굽이가 무척 많은 고개라는 뜻의 일반적 이름인 것이다. 대관령이란 이름은 어디까지나 한자 이름의 大關嶺이며, 순 우리말 지명이 직역된 이름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대관령이란 이름에서 대관(大關)이라고만 해도 이것이 고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령이라고만 해도 역시 고개 이름이 될 수 있다. 관은 지명에서 고개의 뜻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따라서, 고개 이름은 결국 대령이며, 대관령이란 ‘역전앞’과 같은 첩어식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경북 문경새재의 조령(鳥嶺)을 조령관(鳥嶺關)이라고도 하는 것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옛날에는 그저 이 고개를 ‘큰 고개’ 또는 ‘긴 고개’ 식으로, 일반적 이름처럼 불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그리고 주로 학자들에 의해 문헌 등에 자주 적혀 올려지다 보니 대령 또는 대관령으로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서울에서 강릉쪽으로 곧장 가다 보면 이 고개처럼 아주 큰 고개는 없다.

이렇게 보면 대관령 근처에 있는 진고개 역시 한자로 의역해 표기하면 대령이 될 것이다. 진고개는 ‘긴 고개’이며 이 역시 ‘큰 고개’의 의미와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고개는 대관령처럼 그리 왕래가 많지 않았고, 학자들이 글로 적어 올릴 일이 대관령처럼 많지 않아 이를 의역해 적을 필요가 별로 없어 순 토박이 이름인 진고개가 그대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고개도 사실상 ‘큰 고개’의 뜻

▲ 진고개. '긴 고재' 가 구개음화된 것으로, 대관령처럼 역시 큰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를 크기에 따라 말할 때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얼마나 높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나 고갯길이 길게 뻗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고개가 높으면 자연히 고갯길도 길어질 수 있으므로 고개가 크다고 할 때는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말에서 높은 고개라고 할 때 이를 한자로 고현(高峴)이라고도 할 만하건만 어느 국어사전에 찾아봐도 이런 낱말은 별로 볼 수 없다. 다만, 이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사료 등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사료에 보면 삼국시대에 신라 장수 거칠부(居柒夫)가 고현 이남의 10군을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고현은 바로 철령(鐵嶺)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긴 고개라고 할 때도 장현(長峴)이란 말이 당연히 나올 만하지만, 이 역시 국어사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에는 장현이란 이름의 고개가 무척 많은데, 이런 고개들의 토박이 이름들을 보면 대개는 ‘긴 고개’의 변한 말인 ‘진고개’가 대부분이다. 혹자는 진고개를 고갯길이 질어서 그렇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을 갖춘 고개라기보다는 대개는 ‘긴 고개’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발음 습관상 구개음화가 심한 남부 지방에서는 ‘기름’을 ‘지름’으로, ‘드새다’를 ‘지새다’로, ‘겨울’을 ‘저울’이라고 많이 하는데, 이러한 발음 습관에 따라 ‘긴 고개’ 역시 ‘진 고개’가 되는 것은 도리어 더 당연하게도 보인다.


고개에도 크기에 따른 급수가 있다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산(山)을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독립된 산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악(岳)은 무주의 삼도봉(三道峰)이나 서울의 도봉(道峰)처럼 험한 지형의 것으로 풀이한다. 산이름에서 암(岩)이 뒷음절로 들어가면 우이암(牛耳岩), 관음암(觀音岩)처럼 산 정상이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본다.

고개에 해당하는 령(嶺)은 옛날에 국경을 방비하던 관방(關防)이 있던 곳으로, 대관령, 한계령, 조령, 추풍령 등이 이에 속하고, 현(峴), 치(峙)의 경우는 구분이 령에 비하여 작은 고개로 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치는 현에 비해 다소 험한 고개로 본다. 그 예로 남원, 운봉의 팔랑치나 횡성의 삼마치가 용인의 수유현, 춘천의 부황현에 비하여 다소 높고 험한 지형의 고개라는 것을 들고 있다.

산이름에서 끝음절이 대(臺)로 되어 있으면 산지의 고원이나 대지에 해당하는 지명으로, 야산 또는 고원의 의미를 지니게도 된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산(山), 악(岳), 암(岩), 봉(峰), 구(丘), 대(臺), 덕(德), 곡(谷), 계(溪), 현(峴), 영(嶺), 치(峙), 고개(古介), 굴(屈) 등의 산 관련 지명을 볼 수 있다.

산지에서 고원(高原)이나 대지(臺地)에 해당되는 지명이 대(臺)와 덕(德)이다. 대는 경포대(鏡浦臺), 강경대(江景臺)와 같이 정자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야산을 뜻하고, 덕은 검의덕(檢義德), 가목덕(加木德) 등과 같이 오늘날의 고원을 뜻한다.

신경준의 산경표에서는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에서 산이름, 고개 이름 등을 나열해 그 맥의 흐름을 짚어 주고 있다. 이 중에서 백두대간의 것에서만 고개 관련 이름의 것만 추려 보면 영(嶺)이 48개, 현(峴)이 5개, 치(峙)가 8개로 나온다. 다른 정간이나 정맥 부분에서보다 영의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백두대간에서는 다른 맥에 비하여 영급의 고개가 무척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4년 4월27일 조선일보 ‘알고 싶어요’난을 통해 ‘고개 이름을 쓸 때 치, 영, 재 등 다양한 이름을 쓰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들어왔다. 신문사의 요청으로 필자인 내가 지면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고개’를 뜻하는 표현에 영(嶺), 현(峴), 치(峙) 등이 있다. ‘매우 큰 고개’란 뜻으로 관(關)이 쓰이기도 한다. 고개는 ‘산이나 언덕의,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을 말한다. 지명의 뒷음절로 들어갈 때는 ‘벌고개’ ‘싸리고개’처럼 앞 음절이 일반명사인 경우가 많다. ‘재’ 역시 독립적으로 쓰이는 낱말이며, 고개와 거의 같은 뜻이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등에서 보듯 옛날에는 사용 빈도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라는 말에 묻혀 사용하는 경우는 적다. 고개 이름에 다른 낱말이나 지명이 붙는다. ‘재’는 단순히 고개의 뜻을 넘어, 산(山)이란 의미로도 사용된 듯하다.

치(峙)는 고개란 뜻이지만 독립적으로 쓰이진 않는다. 서울 대치동의 대치(大峙)나, 남원의 웅치(熊峙), 원주의 송치(松峙)처럼 두 음절 지명에 치가 많이 들어간다. 영(嶺)은 명사 뒤에 붙어 고개임을 뜻하는 접미사로 쓰이지만,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인 조령, 추풍령, 한계령처럼 비교적 큰 고개에 영이 많다.

고개를 뜻하는 것에 현(峴)도 있는데, 애오개라 했던 서울의 아현(阿峴), 인성붓재라 불렸던 인현(仁峴) 등이 좋은 예다. 관(關)은 한자 풀이로는 고개가 아니지만, 두 지역을 지형적으로 크게 구분 짓는 큰 산줄기의 목(고개)을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답이었다.


관, 영이 관북, 영남 등의 이름 낳고

▲ 대관령박물관.
사전에서는 관(關)을 ‘국경이나 국내 요지의 통로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하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 등을 조사하던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명사적인 풀이이고, 땅이름에서는 중요한 고개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을 고개 이름으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지방의 명칭을 정하는 데는 관을 고개로 생각하여 정한 경우가 있다. 함경도 지방을 가리키는 관북지방(關北地方)이라는 말과 평안도 지방을 가리키는 관서지방(關西地方)이 그 좋은 예다. 이 때의 관은 사전에서의 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관북-관서에서의 관을 학자들은 강원도 안변 지방에 있는, 즉 백두대간 해안산맥 북단에 있는 철령(鐵嶺)으로 보고 있다, 즉, 이 고개 북쪽 지방이 관북이고, 서쪽 지방이 관서다. 전에는 함경도의 마천령 남쪽 지방, 곧 함경남도를 남관(南關)이라 했고, 함경도 전체 지방을 일컬을 때는 북관(北關)이라고도 했다.

관동지방은 지금의 동해안 지방을 가리켰는데, 여기서의 관은 철령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백두대간의 동쪽이란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관동을 대관령의 동쪽이란 뜻으로 풀이해도 무리는 없다.

강원도의 백두대간 서쪽 지역, 즉 영서지방을 뺀 지역을 총칭해서 관동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 강원도에 있는 아홉 군이 모두 동해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백두대간 서쪽의 춘천을 비롯한 고을들이 성장하자, 태백산맥을 경계로 강원도를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영동과 영서라 하게 되었고, 관동만이 강원을 총칭하는 지방명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오늘의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관내도(關內道)라고 하였는데, 강원도 지역은 관내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관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관동과 관북, 즉 강원도와 함경도를 일컬을 때는 관동북(關東北)이라 하기도 했다.

평안도 지방은 관용상으로는 관서라는 말보다 서북로(西北路), 서북계(西北界), 서로(西路), 또는 서북도(西北道)라는 이칭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형적 명칭이라기보다는 행정적 또는 교통적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칭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이 지역을 패서도(浿西道),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후에 북계(北界), 서북면(西北面)이라 개칭하였다가 1102년(숙종 7)에 서북계(西北界)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백두대간의 태백산 남쪽 줄기, 즉 전에 소백산맥이라 했던 곳의 이남 지역은 영남(嶺南)이라 했는데, 이것은 백두대간의 서쪽을 영서(嶺西)라 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영남이라 말을 쓴 것에 비하여 ‘영북(嶺北)’이란 말을 쓴 예는 거의 없다. 이것은 이미 새재 이북의 광역 지명이 기호(畿湖), 호북(湖北), 영서(嶺西), 중부(中部) 등의 이름으로 거의 고정화되어 있어 ‘영북’이란 이름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남이란 이름이 백두대간 중에서도 새재(조령), 대재(죽령), 가파름재(추풍령) 남쪽 지역이란 뜻으로 붙여졌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관북, 관서, 영동, 영서, 영남 등이 산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붙여진 데 반하여 호남(湖南)이란 이름은 강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강은 당연히 금강일 것이며, 여기서의 ‘호(湖)’는 호수가 아니라 강을 의미할 것이다. ‘호’가 강을 의미함은 서울 근처에서 금호(金湖), 용호(龍湖), 동호(東湖), 서호(西湖) 등이 모두 호수가 아닌 한강의 부분 이름이었음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호남의 호가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라는 의견을 내기도 하나, 이는 한자의 ‘호(湖)’를 단순히 큰 못(湖)으로 생각한 데 따른 것이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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