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제18구간] 석병산

남녘은 여름 문턱인데, 강원도 산골은 이제야 봄
백봉령~자병산~석병산~삽당령~화란봉~닭목재 구간

시간의 눈금은 공간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다. 남녘은 이미 여름 문턱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강원도 산골엔 이제야 봄이 한창이다. 온갖 들꽃으로 화사하다. 하지만 계절의 표정이 아예 지워져버린 곳도 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들여 놓게 될 자병산(紫屛山)이 바로 그렇다. ‘자줏빛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자태는 옛이야기가 돼 버렸고, 872.2m였던 높이는 지도에나 남아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석회석을 파먹으면서 산 하나가 송두리째 지워져버린 것이다. 문명의 그림자다. 그것은 분명 상처지만, 또한 반창고나 붕대 같은 것이다. 빚이 무겁다. 그렇지만 우리의 부채의식은 너무 가볍다.

백봉령을 가로지르는 대간길은 고갯마루 표지석 뒤로 쳐진 나무울타리 너머로 이어진다. 길은 대간 등성마루로 나아가지 못하고 42번 철탑에서 839m봉을 지나 44번 철탑에서 대간을 만난다. 이어서 45번 철탑을 지나 임도를 가로지르자 비로소 대간 품에 안긴 느낌이 든다. 백봉령에서 1시간쯤 걸은 다음이다. 이곳에서 다시 1시간30분쯤 아기자기한 산줄기를 따라 너울거리자 생계령(820m)이다.

할아버지 둘러맨 산나물 주머니는 한 편의 시(詩)

백봉령에서 생계령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왼쪽 기슭은 지리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임계 카르스트 지역이다. 기슭 곳곳에서 움푹 꺼진 곳을 보게 되는데, 돌리네라 불리는 함몰지다. 석회암이 녹아서 이루어진 침식 현상의 결과다. 석회암의 용해 침식작용은 중국의 석림(石林)처럼 송곳 모양의 지형을 거쳐 평평해져야 끝이 나는데, 이 과정을 카르스트 윤회라 부른다. 돌리네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년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생계령에 이르러 우리는 푸르고 화사한 봄기운에 흠뻑 젖는다. 곤드래나 취 같은 산나물과 들꽃이 지천이다. 얼레지, 붓꽃, 둥굴레, 은방울꽃, 족두리풀, 산괴불주머니, 쥐오줌풀, 별꽃, 벌깨덩굴…, 그리고 내가 이름을 알 수 없어 불러주지 못하는 들꽃들이 저마다 빛난다. 어디 그뿐인가. 눈을 들면 연분홍 철쭉이 수줍게 곱고, 하늘을 우러르면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참나무 잎이 또 꽃처럼 피어있다.

귓속으로도 봄이 흘러든다. 산꾼들이 흔히 그 울음의 색깔에 빗대어 ‘홀딱벗고새’라고 부르는 검은등뻐꾸기 소리다. 취재에 동참한 조점선씨는 그 소리에 대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엇을 듣고 싶은지 잠깐 생각에 잠겨 본다.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지 못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설 때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한 말이 되살아난다. “다치지 마.” 7년 전 그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첫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종주를 마쳤을 때, 그 아이에게 백두대간은 아빠가 다니는 회사 이름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연민과 사랑을 보낸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다. 아이가 삶의 신산을 어렴풋 느끼는 같아서다. 산에 갈 때는 한껏 행복해 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원고 마감에 쫓겨 허둥대는 모습이 아이의 눈에도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생계령에서 산나물을 뜯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친절하게도 석병산 가는 길을 일러준다. 우리가 대간 종주자들인지 모르시는 것 같다. 어디로 내려가냐고 물으시기에 닭목재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웃하신다. 대간 등마루를 경계로 등을 맞대고 사는 동리(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고개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평생을 산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으신 것 같다. 유목민처럼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몰골이 이 할아버지의 붙박이 삶으로 하여 아프게 각인된다. 할아버지에게도 버거운 삶이 왜 없을까만, 당신의 어깨에 걸친 산나물 주머니에서 나는 한 편의 시(詩)를 읽는다. 그 시는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완전하게 타 버리는 나무의 삶 같은 것이다.

짝짓기에 한창인 새들의 푸른 함성을 들으며 석병산을 향한다. 순한 오르막, 적당히 냉기를 머금은 바람. 산과 인간이 짝짓기하기에 이보다 좋을 때는 없을 것 같다. 1시간쯤 지나자 품격 높은 소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잠시 쉬어가라는 뜻이겠다. 썩 괜찮은 조망처다. 뒤로 자병산의 헐벗은 모습이 눈에 아프지만, 새살이 돋기 시작하는 산기슭은 하늘이 붓질한 천진의 화폭이다. 연두에서 암록까지, 세상 모든 초록이 그 속에 다 있다. 처지는 것도 도드라지는 것도 없다. 화엄의 바다다. 만다라다.

석병산 지나면서는 반드시 뒤돌아볼 것

노송 옆 조망처에서 또 1시간 남짓 나아가면 대간은 성큼 키를 높이며(922m봉) 북쪽으로 몸을 튼다. 이곳에서부터 석병산까지는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다. 900m대 고도를 약간씩 오르내린다. 우리는 저마다 취향대로 산길을 즐긴다. 디카에 들꽃을 담기도 하고, 저녁에 먹을 취나물을 뜯기도 한다.

석병산을 1시간 정도 앞둔 헬기장에서 빵과 과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신들메를 고친다. 헬기장에서 흘러내리는 길이 눈부시다. 짙푸른 조릿대숲 위로 이제 막 잎을 피우기 시작하는 신갈나무는 초록빛 물보라다. 드문드문 끼어든 낙엽송 여린 잎도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곱다.

석병산 동쪽 기슭의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이 가까이 다가오자 대간은 또 한번 키를 높인다. 석병산(1,055.3m)에서 우리는 맘껏 바람을 들이킨다. 재킷을 입지 않고는 한기가 들 정도다. 땀방울은 금방 자취를 감춘다.

석병산 정상은 그리 크지 않은 세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암봉 아래에는 암굴이 있는데 돌로 막혀 있다. 치성을 드리느라 켜는 촛불이 염려스러운 때문인 듯하다. 암봉을 오르내리는 동안 진달래를 만난다. 짙붉다 못해 파리해 보인다. 강원도 산골의 늦은 봄은 나른할 겨를도 없이 철쪽과 함께 깊어간다.

석병산에서 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약간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정상에서 바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온 길을 약간 되짚어야 한다. 자동차 시험장의 T코스로 생각하면 된다. 정상에서 내쳐 가면 만덕봉으로 향하게 된다.

석병산에서 두리봉을 향할 때는 절대 앞만 보고 내달려서는 안 된다. 정상에서 내려선 첫 허리에서 몸을 돌려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왜 이 산이 돌 병풍 산[石屛山]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서쪽 기슭 전체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아주 운치 있는 암벽이다.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달리는 종주는 반쪽짜리다.

필시 석병산은 동남쪽의 자병산과 짝을 이룬 이름일 것이다. ‘자줏빛 병풍 산’과 ‘돌 병풍 산’이라는 이 둘의 관계는 이제 무너져 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먼 훗날 자병산의 앙가슴 위로 다시 풀이 돋아 새로운 모습을 볼 때, 석병산 자락에서 자병산을 떠올리며 상전벽해를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석병산을 지나면서부터는 진달래꽃과 철쭉이 함께 피어있는 풍광을 만난다. 이 두 꽃은 시기적으로 함께 피는 꽃이 아니다. 같은 진달래과지만 피는 시기도 모습도 느낌도 사뭇 다르다. 잎보다 꽃을 먼저 꽃을 터트리는 진달래가 지고 나서야 철쭉은 잎과 꽃을 함께 피워 올리기 시작한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어 ‘참꽃’이지만, 그렇지 못한 철쭉은 ‘개꽃’이다. 아무리 먹을 것 귀한 시절이 만든 이름이지만 ‘개꽃’은 좀 그렇다.

진달래꽃과 철쭉의 다른 느낌을 나는 이렇게 표현해 본다. 비유컨대, 진달래꽃이 색동옷 입고 나선 천진난만한 여자 아이 같다면, 철쭉은 이제 막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한 소녀 같다. 하지만 그 소녀의 귀밑머리는 아직 여리다. 내가 그려본 그 소녀는 또 한 소녀를 불러낸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

봄날 우리가 산으로 드는 것은,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가 엿듣고 있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데 그 소리는 무엇일까. 그리워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일까? 산벚꽃 열리는 소리일까? 나비와 벌의 날갯짓 소리일까? 어쩌면 나는 영원히 그 처녀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필경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절망처럼 희망한다. 산에서든 지하철 안에서든, 내가 하는 그렇고 그런 짓들이 문설주에 귀대고 무언가를 듣고 있을 처녀의 귀를 많이는 어지럽히지는 않기를.

끝없이 이어지는 진달래와 철쭉 사이로 드물게 산벚꽃도 피어 있다. 참 좋은 때를 누리는 즐거움에 겨워 두리봉(1,034m)을 오른다. 이름 그대로 둥두렷한 형국인데 정상 언저리는 제법 가파르다. 두리봉에서 삽당령까지는 구불구불 휘어 돌긴 해도 길은 편하다. 조릿대와 다래 넝쿨에 맨팔을 맡겨야 하지만 그것도 즐길 만한 수준이다. 한 여름에 숲이 더 우거지면 제법 팔이 아릴 것 같다.

두리봉을 떠난 지 2시간 남짓 지나자 삽당령(670m)으로 내려서는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삽당령에 선다. 3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를 이어주는 고개다. 고갯마루 서쪽에 산신각이 서 있고, 그 아래 도로 위로는 생태이동통로가 놓여 있다.

삽당령 샘터 옆 임도 가에 하루 별장을 세우고 나자 어둠살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맑던 하늘이 무거워진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있는 옷 다 껴입고도 떨면서 저녁을 먹는다. 낮에 뜯은 취나물로 뱃속에 봄을 가득 채운다.

우람한 바위에 붙어사는 소나무 거목

밤새 살짝 비를 맞은 아침은 맑다. 게으르게 아침을 먹고 삽당령을 가로지른다. 트레일은 산불감시초소 맞은편 숲으로 나 있다. 참나무숲과 조릿대숲을 잇달아 지나자 임도가 나타난다. 소슬한 아침 기운 때문에 입었던 재킷을 벗고 다시 숲으로 든다. 진달래 만발한 순한 능선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삽당령을 떠난 지 1시간쯤 지나자 방화선으로 벌목한 능선이 나타난다. 두릅나무와 소나무를 제외한 풀과 관목들은 깨끗하게 베어져 있다. 불모지대에 가까운 방화선 위로 드문드문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이채롭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나무 사랑은 지극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해찰을 부리며 들미재를 지나 석두봉(991m)을 오른다. 석두봉은 말 그대로 바위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사람 서넛도 붙어 서기 힘들 정도로 좁다. 정상을 알려주는 표지목이 없다면 그냥 스쳐 지날 법하다.

석두봉에서 내려서면 곧 헬기장이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면 훤칠한 참나무가 선 구릉에 가까운 형국의 조릿대숲이다. 산죽밭과 관목이 빽빽한 숲을 차례로 지나면 대간은 서쪽으로 허리를 튼다. 이곳에서부터 화란봉(1,069.1m)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2시간 정도. 심하게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정상 직전은 한참 곧추선다. 이번 구간 중 가장 센 오르막이다.

하지만 그곳에 오르면 선물이 기다린다. 난초꽃처럼 예쁜 봉우리는 아니지만 정상을 지나면 우람한 바위에 붙어 사는 대단한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흔히 바위벼랑에 붙어사는 소나무는 그리 크지 않은데, 이곳의 소나무는 바위에 붙어서도 거대하고도 기묘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단체 여행 온 학생들처럼 얌전하게 기념 촬영을 한다.

화란봉 아래 소나무에서 조금만 내려서도 사람의 기운이 짙게 느껴진다. 나무 사이로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논밭들이 두 다리의 긴장을 풀어 놓는다. 잘 가꾼 금강송 군락을 지나자 닭목령이다. 취재팀 모두의 얼굴 가득 봄이다. 우리는 이 기운으로 또 한 달을 살아낼 것이다.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 송천 따라 아우라지까지

이번 구간의 종점인 닭목령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그 반대편 길을 택할 경우, 송천(松川)을 끼고 노추산 계곡과 구절리를 거쳐 아우라지를 둘러볼 수 있다.

닭목재에서 남쪽 행로를 택해서 410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노추산 방향으로 들면 계속 송천을 따라 아우라지까지 갈 수 있다. 말 그대로 물길 옆에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 송천은 황병산과 매봉 사이에서 발원하는 남한강 상류다.

노추산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과 정선군 북면에 걸쳐 있다. 신라의 설총과 조선의 율곡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중국 노 나라와 추 나라의 기풍을 찾아볼 수 있다 하여 노추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노추계곡에서 발을 담근 다음 구절리를 지나면 정선군 북면 여량리의 아우라지다. 송천과 정선군 임계면에서 흘러온 골지천이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로 불린다는 이곳은, 현재 채록된 가사만 4,000여 가지에 달한다는 정선 아리랑에 비극적 사랑의 노래 하나를 보탠 곳이기도 하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로 시작되는 가사의 사연인즉,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여량과 가구미(가금)에서 살던 처녀 총각이 함께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는데, 밤새 내린 폭우로 물이 불어 그 약속을 이룰 수 없자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노추계곡과 구절리, 아우라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일삼아 가볼 만한 곳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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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식생

천연기념물급 노간주나무가 자란다
석회암지대의 식물특성 뚜렷 …한계령풀, 노랑무늬붓꽃 새로 발견

백두대간 백복령~삽당령 구간에는 우리나라의 석회암 산지 가운데 매스컴을 가장 많이 타는 자병산(873m)이 포함되어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간의 생태계 보전운동도 시작됐다 할 수 있겠는데, 자병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회석 채광을 위해 백두대간 마루금까지 완전히 파들어온 현실에 대해 산악인들과 생태보전 운동가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자병산 자체는 이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채 일대에 대한 훼손지 복구 논의가 일고 있다.

벌깨풀, 자병취 등 호석회암 식물 다수 분포

당시 등산잡지 기자 생활을 하던 필자는 백두대간의 물리적인 훼손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훼손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자병산 일대의 식물 생태계를 취재해 기사를 쓴 적이 있다. 5월 초순경 일대를 돌아보았는데, 여러 곳의 돌리네 습지에서 만개하여 노란 꽃밭을 만들었던 동의나물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또한, 한 뼘 남짓만 남아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놓여 있던 자병산 정상과 그 사면에서 보았던 희귀식물 만리화와 백리향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자병산은 백봉령~삽당령 구간의 백복령쪽 초입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북서쪽으로 뻗어 올라가며, 산계령(생계령), 고병이재를 거쳐 석병산(1,055m)을 솟구친 후 두리봉(1,033m)을 거쳐 삽당령에 이른다. 이 구간의 최고봉인 석병산 일대도 자병산 못지않게 석회암이 발달한 지역이다.

정상 일대에는 석병산(石屛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석회암벽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돌로 병풍을 두른 듯하다. 북쪽으로는 아찔한 벼랑을 이루고 있고, 동쪽 일대도 급경사 벼랑을 형성하고 있는데, 동쪽과 북쪽은 강릉시 옥계면, 서쪽과 남쪽은 정선군 임계면에 속한다.

산 동쪽으로는 절골과 상황지미골 등 두 개의 큰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상황지미골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는 쉰길폭포를 품고 있는 협곡으로서, 곳곳에 석회암반으로 이루어진 담과 소가 발달해 있다. 골짜기가 깊고 험해서 쉰길폭포를 지나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절골에는 예전에는 관광지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금은 폐쇄된 석화동굴이 자리 잡고 있고, 이곳을 통해 오르면 백두대간의 고병이재에 올라서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는 석회암벽이 드러난 석병산 정상 일대와 석회암반으로 이루어진 골짜기만이 석회암의 성질을 가진 듯해 보이지만, 백두대간 석병산 구간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대간의 남쪽과 서쪽, 즉 내륙 쪽을 이루는 곳이 임계면이고, 이 임계면이 바로 그 유명한 임계카르스트 지형이라는 말이 생겨난 곳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돌리네가 형성되어 석회암 지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이 일대는 지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식물학적으로 보면 석회암 지대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식물종들 가운데 석회암 지대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는 식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확인한 것만 해도 가는대나물, 당조팝나무, 산조팝나무, 백선, 소영도리나무, 회양목, 민대극, 분꽃나무, 털댕강나무, 벌깨풀, 백리향, 돌마타리, 뻐꾹채, 자병취, 바위솜나물, 방울비짜루 등의 호석회암 식물을 꼽을 수 있다.

민대극은 붉은대극이라고도 부르는 식물로서 절골과 상황지미골 초입 일대에 매우 큰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백두대간 덕항산 자락의 석회암 지대에서 이 식물의 대군락을 만났던 것을 기억하면, 이 식물 분포 역시 석회암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석회암반이 드러난 계곡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산조팝나무와 당조팝나무 역시 석회암 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두 식물 모두 산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정상부 능선의 석회암벽 지대에서도 나타남으로써 고도보다는 토양 성분이 이 식물의 분포를 결정하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 꽃이 피면 화장분 냄새가 나는 분꽃나무 역시 이러한 생태적 습성을 보여준다.

습기 많은 돌리네에 희귀식물 군락 형성
벌깨풀은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자병산, 석병산, 덕항산 등 석회암벽이 발달한 백두대간 고지대에서만 분포가 확인된 희귀식물이다. 석병산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분포가 확인된 것으로서, ‘석회암 지대는 북방계 고산식물들의 피난처가 된다’는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를 확보한 셈이다.

자병취는 전남대 임형탁 교수에 의해 최근에 자병산에서 발견되어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기록된 여러해살이풀로서 석병산, 덕항산, 석개재 등 석회암 지대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병산 일대의 능선에는 곳곳에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 주민들이 쇠곳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지형은 백두대간 능선 또는 능선 가까운 사면에 움푹 꺼진 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 둘러본 고병이재에서 석병산 정상에 이르는 백두대간 능선에서도 3곳 정도의 돌리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대에서는 어김없이 습지를 좋아하는 동의나물, 피나물, 홀아비바람꽃 등의 봄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백두대간 능선에는 신갈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고 있다. 이곳 능선의 우점종이 신갈나무인 것인데, 7부 능선 정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숲을 이루고 있다. 신갈나무와 함께 간혹 피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곳이 있고, 당단풍나무, 함박꽃나무, 소나무, 물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산돌배, 층층나무 등이 섞여 자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남쪽 임계쪽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이깔나무 조림지가 능선까지 올라온 곳도 있다. 숲의 중간층을 이루는 떨기나무로는 생강나무, 줄딸기, 조록싸리, 철쭉나무, 진달래, 산앵도나무, 고추나무, 미역줄나무, 짝자래나무, 노린재나무, 개옻나무 등을 꼽을 수 있다.

신갈나무숲 아래에는 많은 곳에서 조릿대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초본식생의 발달을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조릿대가 없는 능선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여러 종류의 초본이 자라고 있다. 가장 풍부한 초본식생을 자랑하는 고병이재 일대에서는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요강나물, 투구꽃, 현호색, 노랑제비꽃, 참나물, 벌깨덩굴, 당개지치, 멸가치, 얼레지, 퉁둥굴레, 풀솜대, 말나리, 박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석병산 구간의 백두대간 능선에는 참개별꽃, 홀아비꽃대, 동의나물, 병조희풀, 노란장대, 금강제비꽃, 광릉갈퀴, 터리풀, 붉은참반디, 참당귀, 당개지치, 족도리풀, 참배암차즈기, 수리취, 서덜취, 사창분취, 대사초, 각시붓꽃, 처녀치마 등이 자라고 있다.

능선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희귀식물로서 환경부가 법정보호종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도 있다. 솔나리, 노랑무늬붓꽃, 한계령풀 등 3종이 그것인데, 이들은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노랑무늬붓꽃은 화피에 노란색 무늬가 있어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진 식물로서, 백두대간 능선 4곳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모습이 관찰됐다. 능선에는 각시붓꽃도 대군락을 이루며 여러 곳에 피어 있었지만, 두 종이 같은 장소에서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되어 흥미로웠다. 노랑무늬붓꽃은 하나의 줄기에서 꽃이 2개씩 피는 습성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붓꽃 종류들 가운데는 이 종과 노랑붓꽃만이 그런 특징을 보인다. 전라도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노랑붓꽃 역시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는 희귀식물이다.

솔나리는 여름에 꽃을 피우는 백합과 식물로서, 솔잎처럼 가느다란 잎을 가진 나리 종류이므로 어렸을 때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삽당령 구간 가운데 바위가 발달한 능선에서 발견됐다. 아름다운 꽃이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운 법이라 불법채취될 위험이 있고, 등산객에게 밟혀서 생장을 방해받을 수 있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정상 석회암벽에 가는대나물, 백리향, 만리화 분포

4월 말에 노란 꽃을 피우는 한계령풀은 백두대간 능선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큰 무리가 발견됐다. 자병산 부근에도 자생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극소수의 자생지만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세계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불연속적으로 분포하는 희귀종이다. 일찍 꽃을 피운 후 6월이 되면 열매를 모두 익히고, 줄기와 잎 등 식물체 지상부가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생태적 특성을 가진 식물이기도 하다.

정상 일대에는 개박달나무, 털진달래, 털댕강나무, 만리화, 돌갈매나무, 회양목, 정향나무, 민둥인가목, 산조팝나무, 백리향 등 키 작은 나무들이 석회암벽에 붙어서 자라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나무들이 석회암 지대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석병산 식물상의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초본으로는 자병취, 돌마타리, 각시붓꽃, 시호, 가는대나물, 솔체꽃, 바위솜나물, 백작약, 벌깨풀, 참배암차즈기 등이 자라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희귀식물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정상부 식생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한편, 석병산 일대의 계곡에는 굴참나무나 까치박달이 우점종으로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가래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산뽕나무, 복자기, 당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산벚나무, 말채나무, 들메나무, 쪽동백나무 등이 섞여 자라고 있다.

상황지미골의 쉰길폭포 일대의 숲에는 큰 까치박달이 많이 자라고 있어 이채롭다. 떨기나무로는 생강나무, 으름덩굴, 진달래, 철쭉나무, 산조팝나무, 당조팝나무, 산초나무, 화살나무, 고추나무, 소영도리나무 등이 관찰된다. 숲 바닥의 풀 종류로는 홀아비꽃대, 덩굴개별꽃, 큰꽃으아리, 노란장대, 미나리냉이, 큰앵초, 미치광이풀, 백선, 민대극, 개감수, 쥐오줌풀, 단풍취, 윤판나물, 용둥굴레, 개불알꽃 등이 있다.

높이 15m, 흉고직경 60cm의 노간주나무 자라

이번 석병산 구간의 취재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두메닥나무 군락을 발견한 것이다. 전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몇몇 높은 산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희귀한 떨기나무로서, 키가 30~40cm밖에 되지 않는다. 석병산의 두메닥나무 군락은 고도 1,000m쯤 되는 지역에서 발견됐는데, 꽤 넓은 면적에서 자라고 있었으며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자생지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곳임은 물론이다. 일대에는 백작약이 군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는 모습도 관찰됐다.

또한, 이번 취재에서는 천연기념물급 노간주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것도 발견됐다. 높이 15m, 흉고직경 60cm에 이르는 커다란 노거수 10여 그루가 석병산 가지능선에 자라고 있었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는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는 보통 2~3m로서 크게 자란 것이라 하더라도 높이 8m, 흉고직경 20cm쯤이 고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곳에 자라는 개체들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2002년 환경부의 전국자연환경조사를 통해 조사된 석병산 일대의 식물은 89과 291속에 속하는 482종류이다. 서울대 박종욱 교수팀에 의해 이루어진 이 조사는 석병산을 중심으로 일대의 만덕봉(1,035m), 칠성대(954m), 망덕봉(781m)을 포함해 이루어졌으며, 구상난풀, 나도수정초, 큰제비고깔, 태백기린초, 산새콩, 회목나무, 만리화, 자주쓴풀, 사창분취 등의 희귀식물이 기록됐다.

하지만, 이 조사에서는 가는대나물, 두메닥나무, 벌깨풀, 백리향, 바위솜나물, 자병취 등 석회암 지대 식물상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몇 식물들과 환경부 법정보호종인 노랑무늬붓꽃, 한계령풀, 솔나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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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풍수

弦과 肉地 분명해야 窩體 명당
카르스트 지형은 공와(空窩)로 명당 되기 힘들어

우리나라 한의학에는 인간의 체질을 사상(四象)으로 나누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사상의학은 조선 말기의 한의학자 동무 이제마(東武 李濟馬·1837-1900) 선생이 창안한 독특한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주역에 근간을 두고 있다.

주역 계사전에 이르기를 ‘역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 팔괘가 길흉을 결정하고, 길흉은 대업을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라고 했는데, 팔괘의 생산원리와 함께 천지만물의 생산과정을 설명한 대목이다.

태극은 ‘큰 하나[대일(大一)]’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의미이며, 움직임 이전의 상태다. 태극에서 움직이면 변화를 하면서 음양이라는 한 쌍의 양의(兩儀)가 생기고, 양의가 다시 동(動)하면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少陽), 태음(太陰) 즉 사상이 생기고, 다시 동하면 팔괘가 생기는데, 팔괘에서 비로소 길흉이 정해진다고 했다.
주역에서는 음을 --로 표기하고 양은 ―로 표기하는데, 수학의 부호 +, -와 다를 바 없다.

풍수에도 와·겸·유·돌 사상(四象)이 있다

주역의 이치에 근거해 풍수지리에서 혈의 모양에 따라 사상(四象)인 와(窩), 겸(鉗), 유(乳), 돌(突) 네 가지의 종류로 구분한다. 와와 겸은 양에 속하고, 유와 돌은 음에 속한다. 다만 풍수서적에 따라 와겸은 음에, 유돌은 양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사상에서 팔괘를 낳듯이 와겸유돌은 각기 다시 음양으로 구분하여 팔상(八象)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와의 치과(雉 ·꿩집), 과저(鍋底·솥바닥), 장심(掌心·손바닥), 선라(旋螺·소라), 금분(金盆·동이), 하엽(荷葉·연잎) 등의 형상처럼 오목하게 파인 형상으로 흔히 ‘소쿠리 명당’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

와의 모양은 사상으로 분류하면 태양(太陽)의 형상이다. 본래 양은 볼록하게 솟은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와를 태양으로 분류한 이유는 양은 음에서 생기기 때문이다(陽生陰中). 와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는데, 진가(眞假)를 구별하는 방법은 혈의 뒷부분에 있는 현(弦·윤곽선)과 혈이 있는 곳의 육지(肉地·살점)의 유무에 있다. 현이 분명하고 육지가 미돌(微突)로 솟아 있으면 양와(陽窩)라고 하여 혈이 되지만, 현이 불분명하고 육지가 없으면 음와(陰窩)라고 부르며 결혈(結穴)이 되지 않는다.

겸은 사상으로는 소양(少陽)에 속하며, 와형의 변체로 모양이 와에 비해 길쭉한 목성의 모양으로 일명 ‘호구(虎口)’라고도 하며, 속칭 곡식을 까부는 도구인 키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흔히 ‘키 명당’이라고 부른다. 겸도 와처럼 현이 분명하고 육지가 필히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대부분의 음택 명당은 유체(乳體)가 제일 많으며, 다음으로는 돌체(突體)가 많이 있다. 유돌에 비해 와체(窩體)와 겸체(鉗體)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와겸에 대한 풍수 공부를 할 기회가 적기도 하고, 생김새가 움푹 파인 형태로 인해 빗물이 쉽게 고일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수사들이 와겸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양택의 경우는 와체나 겸체의 명당이 유체나 돌체의 명당보다 더욱 많은 편이다.

한편 중국의 음택 명당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와체나 겸체의 명당이 많은 반면에 유돌체의 명당은 적은 편이다. 실제의 예로 당나라 시대의 양구빈 선생이 소점한 강소성의 명당 대부분이 와체나 겸체로 되어있다.

돌은 태음(太陰)에 속하며, 원형의 돌기 형상으로 속칭 계심( 心), 어포(魚浦), 마적(馬跡), 아란(鵝卵), 표매(飄梅), 용주(龍珠), 자미(紫微), 왕룡(旺龍) 등으로 불리며, 특히 평지에서는 지주결망(蜘蛛結網·거미가 그물을 만드는 형국), 금구몰니(金龜沒泥·거북이가 물을 찾아가는 형국) 형국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체의 혈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조선시대 왕손들의 태를 묻은 소위 태실들이다.

유는 소음(少陰)에 속하며, 돌체의 변형이며, 여성의 유방처럼 약간 흐르는 듯한 형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형체로, 혈의 위치는 높더라도 허리 부위에 위치하거나 낮은 곳에서는 발에 해당되는 곳이 된다. 유체는 현공풍수이론의 왕산왕향에 적합한 국이다.

카르스트 지형은 풍수의 와체가 아니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지역의 백복령(780m)과 생계령 사이의 백두대간에는 카르스트라는 특이한 지형이 있다. 지도에도 함몰지 일대를 ‘임계 카르스트지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함몰지는 등고선의 모양도 요지(凹地) 표시로 되어있다.

카르스트 지형이란 용해되기 쉬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의해 점점 깎여 오목한 와지(窩地) 모양으로 생긴 지역이다. 생계령 근처에 있는 등산로 주변 가까운 곳에 직경 20m 내외의 함몰지가 곳곳에 있기 때문에 함몰된 곳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의 함몰지에 묘지를 조성한 곳이 있다. 외형상으로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상 중 하나인 와체(窩體) 명당이며, 또한 바람을 잘 막아주고 배수가 잘 되어 명당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와겸의 땅에는 윤곽선이 분명해야 하고, 육지(肉地)가 없으면 생기(生氣)가 없고, 생기가 없으면 취기(聚氣)가 되지 않기 때문에 명당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곳의 묘지는 윤곽선이나 육지가 없기 때문에 좋은 땅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일반적인 지역에서의 와체는 종종 습하고 물이 쉽게 고이는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카르스트지형의 함몰지는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무덤의 구덩이 속에 물이 차는 염려는 전혀 없다. 실제로 카르스트 지대에는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주로 밭이나 과수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카르스트 지형은 북한의 경우,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지역, 남한의 경우 문경, 단양,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삼척, 강릉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 사이(5억7천만 년 전~4억3천8백만 년 전)의 석회암층이 대규모로 분포한다.

석회암지대에서 생성되는 함몰지는 겉모양을 언뜻 보면 장풍(藏風)이 잘 된 모양으로 와체의 명당처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취기(聚氣)가 되지 않아 공와(空窩)가 되기 때문에 명당으로 오인하기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기(地氣)를 설명하기가 본래 어렵다. 풍수고서를 이르기를 ‘누가 진기를 상세히 설명할 것인가, 말로는 불가할 뿐이다(誰能詳說此眞氣 不可言語以)’라 했다. 그래서 또한 ‘제자는 스승에게 배울 수 없고 스승도 제자를 깨우쳐 줄 수가 없다. 이심전심으로 전하고 눈에서 눈으로 전하여 묘한 이치를 안다(弟子不能學於師 師不喩弟子. 以心傳心眼傳眼 然後識妙理)’고 했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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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문화

호랑이 두려워하며 화전 일구던 시절
석병산 일대의 화전농업·호식총(虎食塚)·서낭당 등 산림생활사

백두대간의 문화사는 백두대간의 산지에 태어난 사람들이 산을 삶터로 삼아 경작하고 마을을 형성해 살다가 죽어 일생을 마치는 전 과정의 생활사가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룬다. 생활사에는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풍속사, 주거사, 신앙사 등이 모두 포괄되어 복합적인 체계를 구성하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적 생활, 다시 말해 산림경제라고 할 만한 것이다.

백두대간을 주 무대로 산지가 개간되고 산촌이 형성된 시기는 언제부터이고, 또 지역적인 분포는 어떻게 나타날까? 그리고 백두대간 구간에서 석병산 일대 주민들의 산림생활은 어떠했을까?

백두대간 산지 개간의 과정은 화전농업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학계의 연구 성과(옥한석, ‘한국의 화전농업에 관한 연구’, <지리학연구> 10집, 1985)에 의하면, 한국에서 화전농업이 언제 본격화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기록에서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전 면적이 늘어갔으며, 조선 중기에는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1~2년 경작하다가 지력이 쇠퇴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 전답 규모로 커져

조선 후기의 화전에 관해서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화전의 규모가 평전(平田)과 비슷하다고 한 점으로 보아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 영농합리화 등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산간에 화전을 일구는 경우가 많았고, 해방과 함께 화전민수는 급격히 줄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식량난으로 화전민이 다시 급증했으나, 1968년의 화전정리법을 제정 공포해 법령으로 화전을 금지하기에 이르렀고, 강원도 산간지방의 화전마을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지역별 화전 면적은 평북,함남,강원,평북,황해도의 순으로 많이 분포했다. 화전경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백두대간 지대, 청남정맥의 산악지대, 태백산에서 금강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지대와 낙동정맥 일대였다.이 중에서 맹부산, 희색봉, 연화산, 백암산을 잇는 개마고원 일대가 가장 화전이 성했다.강원도는 한북정맥과 백두대간의 접경지대, 오대산과 태백산을 잇는 고위평탄면 일대에서 화전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강원도에서는 화전을 일굴 수 있는 국유림의 큰 산을 중심으로 골골마다 화전민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고, 그 현장에는 골이름이나 마을이름이 남아 있다. 강원도 산간지역에 터를 일구던 사람들의 부류는 여러 가지였는데, 화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 북한에서 승지를 찾아온 비결파들, 정치 사회의 혼란을 피해 들어온 피난민들,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사람의 연고에 의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화전민들은 개간할 땅이 정해지면 터를 정하고 살기 때문에, 마을 형태는 동족마을처럼 집촌(集村)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골에 두세 집씩 흩어져 사는 산촌(散村) 형태를 띤다.

서낭당은 호환에 대한 대비 의례

그러면 강원도에서 행해진 화전의 주요 작물과 경작과정도 잠깐 살펴 보자. 강원도 화전의 주요 작물은 조와 콩이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메밀도 경작했다. 화전은 농사지을 땅을 미리 알아본 다음 가을에 나무나 풀을 베어 놓았다가 다음해 봄에 불을 놓아 땅을 일구는 것이 보통이다.

삼척의 경우는 양력 2월이나 3월쯤 풀이나 잡목을 베어서 깔아 놓았다가 4, 5월쯤 이것이 마른 다음에 불을 놓고, 불이 타서 재가 남으면 그 위에 좁씨 등을 뿌리고 괭이로 판다. 첫해에 조를 심으면 이듬해에는 콩을 심으며, 이렇게 해마다 경작물을 바꾸어서 4년 정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화전민들은 촌락을 이루게 되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당(성황당)을 모셨다. 서낭당의 형태는 커다란 신목을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 담을 쌓은 형태와 당집을 모신 형태가 많다. 동해안 바닷가 마을의 경우 여서낭은 바위서낭의 형태가 많고, 남서낭은 당집이 많다.

서낭당에는 쇠나 흙으로 조그맣게 말 모양을 빚어 놓은 경우도 있다. 서낭의 신격은 말을 탄 할아버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삼척의 일부지역에서는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으며, 영월과 정선 등지의 단종서낭과 강릉의 범일국사와 같이 인물이 서낭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삼척에서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는 경우에서 짐작하겠지만, 강원도 화전민들의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두대간 태백산 권역의 생활사에서 장묘(葬墓)의 풍속으로 호식총(虎食塚)과 호식장(虎食葬)이라고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와 관련한 민간신앙(산멕이)과 가옥의 호환 방지시설과 함께 호랑이의 서식 생태와 관련된 지역주민의 자연적응 양태가 문화적 양상으로 표현된 것으로 관심을 끈다.

산지 주민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었을 경우, 유해를 화장하고 그 자리에 돌무덤을 만든 후 시루를 뒤집어 엎어놓고 가락을 꽂은 무덤을 호식총(虎食塚)이라고 부른다. 호식총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김강산, <호식장>, 태백문화원), 그 분포는 전국에 흩어져 있으나 태백산 권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식총으로 확인되는 것만 하더라도 태백시에서 50개소, 정선군에서 80개소, 삼척군에서 70개소가 발견됐다. 백봉령-자병산-석병산-닭목재 구간에서도, 자병산 남사면 자락의 임계면 도전리 수병산의 호식터가 보고됐다.

호식총의 형태가 흥미로운데, 왜 돌무지 위에 시루를 엎어놓고 가락을 꽂아두었을까? 가락은 물레의 실꾸리를 감기 위해 물레줄에 의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로, 시루에 가락을 꽂는 이유는 가락의 모양이 창처럼 생겨서 귀신을 찔러 제압한다는 의미와 함께 창귀(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귀신)가 물레의 가락처럼 시루 안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민간의 민속에서 시루는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귀신이 들어와서 몸이 아프다고 여길 때 시루와 가락으로 제압하는 의식이 있다.

그밖에도 산촌 사람들은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도 마련했다. 가옥에 설치하는 것으로는 호망, 빗장, 참나무장작발 등이 있는데, 호망(虎網)은 호랑이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굵은 밧줄로 망을 엮어 서까래에서 마당으로 늘어뜨려 그물을 치는 것이고, 빗장은 방문에 두꺼운 나무판자를 끼우는 것이며, 참나무장작발은 참나무 장작을 발처럼 엮어 방문에 드리움으로써 호랑이의 침해를 막는 지혜였다.

그밖에 신앙적이고 심리적인 호환 방지 노력의 일환으로 산멕이라고 있었다. 정해진 날에 산제를 올리며 호환 방지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산멕이의 대상은 산신 혹은 호랑이였으며, 산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둘은 구분되지 않았다. 강원도에는 산멕이 신앙이 성황신앙과 함께 널리 퍼져있다.

이렇듯 호식총을 비롯해 가옥의 방호(防虎)시설과, 호랑이와 관련된 서낭당 신앙은 백두대간 일대에 광범위하게 서식했던 호랑이의 생태와 관련한 주민의 적응 양상이 반영된 문화생태적인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산삼 세금 폐해 커 계 조직해 해결

이제 석병산 일대 산지 주민의 생활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석병산(1,055m)은 백두대간의 태백산을 넘어 동해안 방향으로 두타산과 대관령 사이에 있으며, 강원도 정선군과 강릉시 옥계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석병산은 비경의 천연동굴과 석회암이 용해되어 형성되는 카르스트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일월문, 비선굴, 가셋골굴, 영밑굴 등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비경을 자아낸다.

석병산 동사면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드문드문 취락이 형성돼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옥계면 산계리와 북동리에 해당한다. 산계리는 골이 많고 깊어 물이 깨끗해 산자수명한 곳이라 옛부터 시인묵객이 많이 찾아서 반암팔경(泮岩八景)과 산계팔경(山溪八景)이 생겼다.

가새골, 검단이, 곰밭골, 반바우, 곱실, 쇠바우, 서낭댕이, 절골, 영밑, 원뜨루, 조월뜰, 황지미를 합하여 이 마을에 산계사(사찰)가 있어 산계라 했다. 산계리의 입지는 옥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뚫린 큰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제일 뒤에 석병산이 있고, 동쪽 낙맥으로 자병산(紫屛山·873m)이 있으며, 그 사이에 조그마한 남산(南山 혹은 鳳璋山)이 있다. 1970년대 한라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서 여러 마을들이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산계리 입구에는 강릉 산계리 금옥계 방역사적비(江陵山溪里金玉契防役事蹟碑))와 종선비(種善碑)라는 유적이 있다. 조선시대의 산계리는 옥계면의 5개 마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농업과 산채를 생업으로 했다고 한다. 18세기에 들어서 조세와 삼세(蔘稅)의 부담에 겹쳐서 흉년이 들어 폐동의 위험에 처하자 자구책 차원으로 금옥계를 만들어 일정한 자본금을 모아 공전(公田)을 확보하고, 그 이익금으로 조세와 삼세를 해결했다.

금옥계 방역사적비는 이러한 업적을 기리고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1796년(정조 20)에 건립했는데, 1828년(순조28)에 비석이 마모되자 새로이 비석(종선비)을 마련하고 비각(종선각)을 아울러 건립했다.

조선조의 삼세 폐해는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삼(貢蔘)으로서 호삼(戶蔘)이라 하여 평상적으로 부과하는 것, 세삼(稅蔘) 또는 상평삼(常平蔘)이라 칭해 삼군(蔘軍)을 입산시켜 채취하게 한 것, 무삼(貿蔘)이라 하여 종친부 등에 상납하는 것, 단삼(單蔘)이라 하여 쓰시마에 급여용으로 쓴 것, 신삼(信蔘)이라 하여 일본 도쿠가와((德川)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필요한 것 등등 실로 각종 명목으로 삼세를 긁어내었다.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역민 중 유산(流散)하는 자가 속출했다.

옥계면을 지나 석병산 깊은 가슴 속으로 들어서다 보면 산계리의 옥계동굴과 자연마을의 삼거리 길목에 성황댕이 마을이라고 있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 현존하고 있는 성황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성황당은 당집에 돌담을 두른 모양으로,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석병산을 등지고 배치돼 있다.

글=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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