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17구간] 두타산 문화

두타산의 은사(隱士)들
신라 삼공·범일국사·이승휴·이상여의 행적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를 지탱하는 큰 산줄기일 뿐만 아니라 겨레 정신의 큰 줄기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의 장소성은 겨레의 정신사를 지탱하는 벼리(綱)로도 자리매김될 수 있으니, 백두대간의 은사(隱士)라는 주제는 백두대간의 문화사를 정리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역사와 구전(口傳)에는 백두대간의 자락에 깃들어 위대한 정신을 밝힌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전승되고 있으니, 두타산(頭陀山) 역시 그 현장의 한 곳이다.
두타라는 산이름은 그 이름마저 은사의 자취를 풍긴다. 원래 두타란 Dhuta라는 범어를 번역한 말로서,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 혹은 두타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두타산 설경. 신라 범일국사, 고려 이승휴, 조선 이상여 등 여러 은사들이 머물렀던 산이다.

두타에는 총 열두 가지의 먹고, 입고, 거주하는 행법이 있어서 12두타 혹은 12두타행이라고 한다. 먼저 주거에 있어서 인가를 멀리 떠나 산·숲·광야의 한적한 곳에 있거나, 무덤 곁에 머물면서 무상관(無常觀)을 하며, 나무 밑에 머물고, 한 데에 앉을 뿐만 아니라,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늘 밥을 빌어서 먹고,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걸식하며, 한 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다. 그리고 발우 안에 든 것만으로 만족하며, 정오가 지나면 과실즙, 꿀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 입는 것에도, 옷은 헌옷을 빨아 기워 입고. 겹옷·상의·내의 밖에는 쌓아 두지 않는다. 요즘처럼 식도락으로 혀를 자극하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고, 값비싼 명품 의류를 자랑하고, 호화주택에 집착하는 눈먼 세태와는 달리, 열두 가지의 두타행은 인간세상에서 추구하는 의식주의 번거로움과 욕망을 최소화하고, 생명의 본원을 성찰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하려는 불교적인 실천행법인 것이다.

미수 허목의 ‘두타산기’

두타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며, 따라서 예부터 여러 선인, 은사, 승려들이 숨어들어 소박하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본래 성품을 맑히고 겨레의 역사를 위한 참살이를 하였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은 1661년에 두타산에 유람하고 ‘두타산기’를 지었는데, 그의 <미수기언>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무릉계곡. 허목은 삼화사를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 이라고 했다.


‘6월에 두타산에 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덩굴 속에 무너진 옛날 탑과 철불만이 남아 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 한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는데, 바위너덜로 된 골짜기가 몹시 험하게 가파르고, 그 아래는 바위가 평탄하여 차츰 내려갈수록 험한 바위는 없어져 올라가 놀 만하며, 계곡에는 물도 흐르고 있다.

바위너덜 위로 1백 보쯤 가서 중대사를 지나가면 바위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鶴巢臺)에 와서 쉬었는데, 이곳에 이르니 산세가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指祖山)에서 구경하였다. 이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석굴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으로는 옛 성이 보인다.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上院庵)의 황폐한 터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의 산장이었다고 한다.’

허목이 말한 삼화사는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고, 경내에는 철불과 탑도 보전되어 있다. 무릉계는 삼화사 앞에 펼쳐진 골짜기로서, 두타산의 맑은 계곡물에 씻겨 오랜 세월을 다듬은 넓고 흰 반석이 일품인데, 거기에 새겨진 무릉동천(武陵洞天)이라는 달필의 초서가 무릉계의 현장을 일러준다.

무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두타산의 선경은 이미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선교(仙敎) 계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졌던 것 같다. 그 예증이 두타산에 전해지는 세 명의 선인에 대한 설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있었는데 각자가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것과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 삼화사 원경. 이승휴가 책을 빌려 읽던 절이다.


이윽고 불교가 이곳까지 전파됐고, 현재의 두타산이라는 이름도 이 산에 불교적인 자취가 깃들면서 새로 지어진 이름임이 분명하다. 두타산이라는 불교적인 이름을 추정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원으로는, 우선 범일국사(810-899)가 삼화사를 창건했다는 864년 무렵을 잡을 수 있고, 또한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에 의하면, 829년 되던 해에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청련대(동쪽), 백련대(서쪽), 흑련대(북쪽)라 했으며, 서역에서 약사여래가 와서 삼화사, 지장사, 궁방에 주석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써 근거하여 볼 때 두타산이라는 이름은 9세기 무렵에 생긴 이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동안거사 이승휴

두타산에서 참살이를 한 사람 중에는 역사에 유명한 인물로서 고려의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와, 조선의 알려지지 않은 선비인 삼화처사 이상여(1602-1665)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는 정사를 말하다가 파직당한 후 두타산 밑에 터를 잡고 살면서 역사와 정신을 바로 세웠다.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고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라는 별호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0세 되던 해에 왕의 명을 받고 두타산에서 나와 서울에 왔는데, 이승휴는 ‘외로운 종적이 몇 해나 강산에 의지했더니, 다시 서울 땅 밟으니 한 꿈속이어라’라는 시를 남기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두타산에는 간장암(看藏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절 이름 또한 이승휴와 관련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축의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승휴는 당초에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대개는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고 늙어서는 부처를 섬김이 더욱 근엄하였다. 이에 별장을 지어 거처하였다. 이 산에 있는 삼화사에 가서 불경을 빌려 날마다 열람하였고, 십년 만에 읽기를 마쳤다. 그 후에 그 별장을 절에 희사하고 현판을 간장암이라고 하였다.’

역사에서 이승휴는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과 몽고 간섭하의 격동기를 살았던 문신이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정치적 굴곡과 은둔을 거듭하는 생을 살면서,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은 50세 이후부터 16년간에 불과했다. 이승휴는 1280년에 국왕의 실정과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당하였으며, 파면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여 당호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삼화사의 불경을 빌려 공부하였으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綠)을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64세 되던 해에 두타산(현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로서,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으로부터 잡은 최초의 사서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었는데, 상권은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칠언시로 읊었으며,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삼은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원래 부여·고구려·신라 등은 각각 자신의 시조설화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시례(尸禮)·고례(古禮)·남북옥저·동부여·예맥부터 삼한·신라까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했다.
▲ 삼화사


이것은 민족사에 중요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단군신화를 소개하기를, 환인의 아들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였지만, 이승휴는 박달나무의 신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함으로써 겨레 형성의 시원적 장소성에 있어서 숲(나무)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언자 이상여

한편, 조선시대에 두타산에 은거하였던 숨은 선비로서는 이상여(1602-1665)가 있다. 이상여에 대한 사료는 삼화처사이상여묘갈명(三華處士李相如墓碣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이상여는 나이 60이 되도록 거리낄 처자식이 없었고, 벼슬할 생각도 없었으며, 불의로 이룬 부귀를 보면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질 것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는 은자나 승려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였고, 평소에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명승지라면 발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천하의 명산ㆍ대천과 군읍(郡邑)ㆍ요새와 산하의 분계점과 육지와 바다의 배치에서부터 오지의 거리ㆍ풍토와 특이한 종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속에 묵묵히 기억해 두어서 마치 몸소 직접 두루 밟고 다녀본 것 같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도교와 불교의 문자를 잘 알아서 일찍이 무언자(無言子)라 자호하여 스스로 기록하였으며, 만년에는 영동의 두타산 아래 삼화동에 들어가 잡초를 베어내고 집을 짓고 살면서 굳은 절조의 계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천하 국가의 일을 가지고 걱정하거나 즐거워할 뿐이었고, 자기 한 몸의 영욕과 안락하고 배부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천하의 선비가 아니라고 하면 안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고려의 이승휴는 두타산에서 겨레의 역사를 올곧게 세웠고, 조선의 이상여는 꼿꼿한 선비의 절조를 굳게 실행하였다. 두타산의 푸른 정기는 그들의 정신을 길렀고, 그들은 두타산의 역사에 기록될 참사람이 되었다.

글=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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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6구간] 덕항산…명산과 다른 호젓함이 좋다

피재~건의령~푯대봉~구부시령~덕항산~큰재~황장산~댓재 구간

나무들이 물을 뿜어 올리기에 바쁜 계절이다. 대지도 나무들의 모세혈관이 일으키는 파동을 따라 어깨를 들썩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눈으로 감지되는 세상은 겨울이다. 더욱이 우리는 물러나는 겨울의 뒤를 좇아 강원도 심산으로 들어가고 있다.

겨울도, 그렇다고 확실히 봄도 아닌,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으스레한 계절에는 눈이 머쓱해진다. 이런 경우 오관의 총아는 눈이 아니라 살갗이다. 낙타의 코가 사막에서 물을 감지하듯이 피부는 모공을 열고 바람을 안는다. 봄이다.

우리는 지금 하늘이 3평밖에 되지 않아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바지랑대 삼아 빨랫줄을 연결할 수 있다는 정선 지역을 벗어나서 태백과 삼척 경계로 들어섰다. 이번 구간의 출발점인 피재(920m)는 삼수령이라고도 불린다. 피재라는 이름은 삼척쪽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넘어오던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달리 삼수령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오십천의 분수령을 이루기 때문이다.

▲ 광동댐 이주민들이 고랭지 채소 밭 텅 빈 들녘을 지나는 바람이 한가롭다. 땅을 들썩이는 풀싹들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고개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오십천으로 흘러든다. 여기서 우리는 삼척시로 흘러들어 동해로 빠지는 작은 하천인 오십천을, 한반도의 중심부와 영남지역의 젓줄인 한강과 낙동강과 같은 지위로 언급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두대간이 이곳에서부터 거의 동해로 치우쳐 줄곧 북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부터 향로봉까지 남한 지역 백두대간의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 중 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하나도 없다. 삼척의 오십천과 강릉 남대천, 양양 남대천이 큰 물길에 든다. 특히 이번 구간은 동쪽으로 높은 우리나라 지형이 또한 동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관모와 관복 걸어 놓고 벼슬길 나서지 않기로

▲ 푯대봉 오름길. 질척거리는 봄의 흔적이 신발에 묻어 있다. 나른하다.
피재~댓재(810m)까지인 이번 구간 전체를 대략 살펴보면, 실거리 약 26km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표고차도 크지 않다. 봉우리들이 끝없이 출렁이기는 하지만, 구부시령과 덕항산을 오르기 전 크게 허리를 세우는 것 말고는 대부분 산책을 즐기듯 걸을 수 있다. 물론 깊은 눈이나 심한 비바람과 같은 기후 조건은 이런 트레일 조건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만. 또한 이번 구간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도 거의 없다. 근래에 들어 환선굴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그것을 품고 있는 덕항산이 알려지기 시작한 정도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게 그렇듯이 한 곳이 비면 다른 곳이 차는 법. 주말 산행객들로 시끌벅적한 유명 산의 분위기와 다른 호젓함이 좋다.

아직 숲이 무성하지 않은데다 구간의 대부분이 참나무가 우점한 상태에서 사이사이로 철쭉이 자라는 정도다. 트레일도 말끔한 편이다. 그래도 숲이 무성해지는 여름철에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특히 피재에서 건의령까지가 그렇다.

피재에서 건의령(840m)까지는 2시간~2시간30분 정도로 워밍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람한 등마루의 느낌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조망도 없다. 강원도 산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올망졸망하다. 며칠 전 눈이 와서 조금 걱정했는데, 북서쪽 기슭을 제외하고 눈은 거의 땅 속으로 숨어 버린 상태다.

건의령부터는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숲도 산세도 이곳에서부터 대간의 위엄을 되찾는다. 이곳에서부터 덕항산 너머까지 대간 동쪽은 삼척군, 서쪽 일부가 삼척군이다. 삼척군이었던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 1981년에 태백시로 독립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재 건의령은 도로확장공사를 하느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지만, 마루의 품새가 넓은 편이어서 쉬어가기에도, 야영을 하기에도 좋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 달리 고개에 얽힌 사연은 비장하다. 태백시문화원에서 정리해 놓은 전설에 따르면 이렇다. 고려 말 삼척으로 유배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망국 유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관모와 관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로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관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 됐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건의령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도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 1 지도에는 한의령(寒衣嶺)이라고 표기돼 있다. 도로표지판도 마찬가지다. 두 이름 다 내포 의미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로 통일이 돼야 할 것 같다.

건의령에서 푯대봉(1,009.2m)으로 오르는 초입은 소나무 숲길이다. 잘 생긴 적송인데, 태백국유림관리사무소에서 ‘태백송’으로 육림 중인 소나무다. 이 소나무 종자를 번식시켜 광산재해 산림복구용으로 보급할 것이라고 한다. 척박한 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이 소나무의 후세들이 폐광 후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기를 기대해 본다.

소나무숲을 벗어나면 대부분의 등성이는 참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드문드문 아름드리 금강송이 웅자를 드러내며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푯대봉을 지나서는 참나무숲과 관목 지대를 번갈아가며 구부시령을 향한다. 구부시령 직전에서 크게 솟구치는 것 말고는 편안한 길이다.

황사가 차지해 버린 하늘은 부옇지만 날씨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볕이 잘 드는 트레일은 상당히 질척거린다. 그러나 북쪽으로 내려서는 길 곳곳엔 빙판이 낙엽을 덮고 짓궂게 누워 있다. 자칫 방심을 했다가는 엉덩이로부터 원망을 듣게 된다.

밭은 숨을 토하며 1055m봉을 넘자 구부시령으로 내려서는 길은 순하다. 트레일 옆의 평지 같은 자락이 두 다리에 모종의 메시지를 전한다. 구부시령에서 야영하려던 계획을 접고 배낭을 부린다. 산에서는 다리가 뇌를 우선한다. 온전히 산에 들었다는 느낌을 주는 피로감은 언제나 나른한 행복감을 동반한다. 바로 이런 기분 때문에 산길을 걷고 야영을 하는 게 아닐까. 일상에서는 한 순간도 문명의 이기 없이 살 수 없는 목숨들이지만, 하루 이틀만이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즐거움은 현대의 신(神)인 문명에 대한 가냘픈 저항이다. 이런 의미 맥락에서 되뇌어 보는 랄프 월도 에머슨(1083-1882)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얼마나 통쾌한가.

“문명인은 마차를 만들었지만, 발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지팡이로 몸을 떠받치지만, 근육의 지탱력은 잃어 버렸다. 그는 훌륭한 제네바산 시계를 갖고 있지만, 태양으로 시간을 알아보는 재간은 없다.”

“마지막 1온스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

해가 종적을 감추면서 산바람은 금방 표정을 바꾼다. 낮의 봄기운을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거두어 가버린다. 한 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대출금 이자를 빼내 가는 은행처럼. 저녁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침낭으로 들어간다.
▲ 덕항산 정상에서 환선굴 쪽을 바라본 풍광. 능선 왼쪽으로 광동댐 이주단지 채소밭이 보인다.

오랜 만에 꿈 없는 긴 잠을 잤다. 냉랭한 아침이다.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일기예보대로다. 간절히 원할 때는 잘도 틀리더니, 빗나갔으면 싶을 때는 귀신 같이 정확하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린다. 기분이 좋아질 만큼 배낭 무게가 줄어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게에 대한 부담은 뿌리가 깊다. 대간 종주 초창기에는 ‘숟가락도 반 토막’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서양 속담엔 이런 게 있다. “마지막 1온스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

구부시령을 넘는 바람은 맨 얼굴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맵다. 어제나 그제쯤 시베리아에서 태어났을 바람이다. 아직 계절은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취재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겨울 복장을 하고 있다.

구부시령(九夫侍嶺·960m). 한자 이름 그대로, 만나면 죽고 만나면 죽고 해서 아홉 남편을 모셨다는 여인이 이 고개의 동쪽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실제로 그런 여인이 있었건 없었건, 따비밭에 목숨을 의탁해야 했던 강원도 산골 마을의 신산한 삶이 투영된 이름으로 들린다. 지금은 통행로로서 구실을 잃은 고개지만, 옛날에는 태백시 하사미동 외나무골과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를 이어주던 고개였다 한다(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고개 이름이 구부대령(九夫待嶺)으로 되어 있다. 오식으로 보인다. 지리정보원이 지도제작과정에서 잘못한 것도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하나).

고개가 높으면 고개 저쪽 산은 더 높은 것이 당연할 터. 고개 북쪽으로 오르는 산이 바로 덕항산(1,072.5m)이다. 서서히 허리를 세우다 정상부에서 불끈 솟는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벗어나자 멋진 조망처가 나타난다. 눈 아래로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가 활짝 열려 있다. 요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환선굴(지리정보원 지도에는 ‘한선굴’로 표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동해 바다가 안개와 몸을 섞고 있다.

북쪽으로는 광동댐 이주단지의 고랭지 채소밭의 앙가슴이 보인다. 덕항산 남동쪽 기슭은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 동쪽이 가파른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데도 등성마루와 서쪽 기슭은 전체적으로 황소 등처럼 둔중하다. 산의 이름도 이런 산세에서 비롯됐다. 옛날 삼척 사람들이 이 산만 넘으면 화전(火田)을 할 수 있는 땅이 많아 ‘덕메기산’이라 하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항산(德項山)’이 되었다 한다.

덕항산 정상부에는 광동댐 이주단지까지의 동쪽은 아슬한 벼랑이 가깝다. 하지만 위험성은 거의 없다. 동쪽으로 나무와 줄로 보호장치를 해놨다. 이번 구간 대부분은 트레일 관리가 잘 돼 있다. 훼손 가능성이 있는 곳 대부분은 나무와 돌로 자연스런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의 손길이 최소화된 모습이어서 보기에도 좋고 걷기에도 좋다. 덕항산에서 1시간쯤 가자 환선봉(지각산·1,079m)이 나타난다. 과거에도 지금도 지도상에는 무명봉이다. 요즘 들어 그렇게 부르는지 옛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환선굴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최근에 정상석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우뚝 선 두타산

환선굴에서 다시 1시간쯤 더 나아가자 환선굴로 연결되는 자암재가 나타난다. 이어서 채소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간 동쪽의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에 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 주민들이 옮겨와 농사를 짓는 곳이다. 상당히 규모가 크다. 바람이 비껴가는 산기슭에 알록달록한 이주민들의 주택이 보인다.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다음, 곳간에 먹을 것 가득 채워 놓고 겨울 내내 쉬는 저들의 삶이야말로 이상적이 아닐까, 하는 속내를 취재팀 중 한 명에게 털어 놓아 본다. 그런 한편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겨우내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방법만 다를 뿐 산에 삶을 의탁하는 사람들이 산을 보는 안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옛날부터 덕항산 일대는 화전을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고랭지 채소밭 일대를 지나는 길은 어떤 길을 택해도 좋다. 농사를 지을 때는 당연히 밭고랑을 피해야 하겠지만, 요즘 같은 때는 어디로 가던 대간의 등성마루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임도와 밭을 가로질러 큰재를 향한다.

큰재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억새 무성한 둔덕이다. 동쪽으로 동해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흐린 날씨가 우리에게서 그것을 앗아갔다. 큰재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나자 발걸음이 느긋해진다. 두어 시간만 걸으면 이번 산행의 종점인 댓재이기 때문이다. 길도 편안하다. 파랑이 크지 않은 산 너울 몇 개만 넘으면 황장산이다. 황장산 정상은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만큼 오지랖이 넓지 않다. 황장목은 간간히 명목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산은 발길을 오래 묶어 둔다. 이 산에서 보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모습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두타산(1352.7m)이 동쪽으로 잔뜩 어깨에 힘을 준 듯한 암릉 위로 솟아 있고, 왼쪽으로 청옥산(1403.7m)의 둥두렷한 정상이 우람하다.

그런데 청옥산이 더 가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청옥산이 더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타산에서 청옥산이 거의 직각에 가깝게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두 산이 동일선 상의 직선에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두 산의 모습(산 이름은 오늘 날과 바뀌어 있지만)이 황장산에서 바라본 두 산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상의 두타산은 주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댓재는 두 산 사이에 竹峙(죽치)와 竹嶺(죽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두타와 청옥이라고 부르는 산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상의 순서와 뒤바뀌어 있다. 그 까닭을 누구도 확언할 수 없겠지만, 위에서 살펴본 사실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대동여지도로 도상 등산을 하면 댓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산이 두타산이다(현재는 청옥산). 그런데 실제로 댓재에서 주맥을 따라 오르면 현재의 두타산에 닿게 된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그대로 신뢰하고 산을 올랐다면 댓재에서 올라 처음 나타나는 산을 두타산이라 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확인하게 된 진짜 두타산은 어쩔 수 없이 청옥산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두타산과 무릉계의 이름이 가진 친족 유사성이다. 일체의 속박을 벗어난 운수승(雲水僧)을 일컫는 두타와, 신선들이 사는 무릉도원이 짝을 해야 더 어울린다고 여긴 데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청옥산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정상성(頂上性)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의 분위기로 본다면 현재의 두타산이 당연히 더 도드라져 보인다. 과거 측량기술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당연히 산경표 상의 청옥 즉 오늘의 두타산에 더 인상 깊은 이름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아무튼 대동여지도의 표현 오류와 두 산의 자태는 후대인들이 이름을 바꿔놓을 소지를 안고 있다. 소설적 상상력에 기댄 유추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황장산은 급하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서서히 자세를 누그러뜨리며 조릿대 밭을 펼쳐 놓고 있다. 댓재로 내려서는 발길을 편안하다. 댓재에서 우리를 반기는 건 큰 바람뿐이다. 다음 구간 우리는 이 바람에 실려 두타산으로 오를 것이다. 바람에 몸을 맡긴 구름처럼.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환선굴 남한 최대 노년기 동굴

이번 구간을 대표하는 덕항산은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안에 환선굴을 비롯하여 관음굴, 바람굴 같은 많은 동굴을 품고 있다. 그 동굴들을 묶어서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하고 있다. 그 중 환선굴은 총 길이가 약 6.5Km로 남한에서 가장 큰 노년기 동굴이다.

환선굴에서 덕항산까지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덕항산으로 올랐다 자암재로 내려가든 그 반대로 하든 3시간 안팎이면 원점회귀산행이 가능하다. 하루 산행을 하려면 댓재에서 출발하여 황장산~덕항산을 거쳐 환선굴로 내려갈 수 있다.

댓재민박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차량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전화 033-554-1123, 011-9797-7960).

글=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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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덕항산 -지형지질] 물이 빚어낸 지하궁전 환선굴

석회암 생성은 수억 년 전이지만, 동굴 형성은 기껏(?) 수백만 년 전

서해로 흘러가는 한강, 남해로 흘러가는 낙동강, 그리고 동해로 흘러가는 오대천의 삼파수 물길이 갈라지는 삼수령(일명 피재·920m)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15km 정도 올라서면 이내 만나게 되는 산이 있다. 바로 덕항산(1,071m)이다. 덕항산과 그 앞으로 마주한 지극산(1,079m) 자락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환상적인 별천지가 펼쳐지고 있어 유장한 백두대간의 산세를 한층 더 빛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동굴학회에서도 동굴다운 동굴로 인정받고 있는 관음굴과,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환선굴을 포함한 4개 동굴이 덕항산과 지극산 자락 지하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일대에 군집한 동굴을 가리켜 대이리 동굴지대라 일컫고 있다.
덕항산에서 지극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동쪽 사면 일대는 하늘 높이 솟구친 탑 모양의 첨봉들이 군집해 있어 그야말로 ‘한국의 계림(桂林)’이라 부를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비나 눈으로 지표면에 내린 물의 일부는 강물이 되어 지표면을 흐르며 침식을 가해 다양한 지형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땅속으로 흐르면서 또한 여러 지형을 만들어낸다. 지하수가 석회암지대의 지하를 흐르며 만들어낸 석회동굴이 바로 전형적인 예다.

우리나라에는 석회동굴이 유난히 많은데, 지금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석회동굴만 약 600여 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대이리 동굴지대와 초당굴, 영월의 고씨동굴, 평창의 백룡동굴, 단양의 고수동굴·온달동굴·노동동굴, 울진의 성류굴, 익산의 천호동굴 등은 천연기념물로, 나머지 일부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현재 대이리 동굴지대는 환선굴만 1997년 개방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으며, 관음굴은 보존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발견 즉시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폐쇄시켰고, 나머지 덕밭세굴, 양터목세굴, 큰재세굴, 사다리바위바람굴 등은 미개발 상태다. 그리고 이곳은 빼어난 절경 덕분에 주위 산림 약 200만 평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한여름 환선굴 동굴 입구에 서면 동굴 안에서 불어나오는 냉기가 냉장고를 방불케 할 만큼 시원하다. 마치 지하 속 커다란 조각궁전을 연상케 하는 이 굴은 어떻게 만들어져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일까?

약 5억~4억 년 전 적도 부근의 따뜻한 바닷속
우리나라는 유난히 석회동굴이 많다. 그런데 남한에 있는 약 600여 개의 석회동굴 가운데 400여 개가 강원도 남부인 영월, 평창, 정선, 태백, 삼척, 강릉 지역에, 나머지가 충북 북동부인 단양, 제천, 그리고 경북 문경 등 일부 지역에 옹기종기 모여 발달해 있다. 이는 무슨 이유에서일까?

석회동굴은 석회암 지층에 생겨난 동굴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을 이루는 주 암석이 석회암이다. 석회암은 약 5억~4억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 사이에 바다에 살던 산호와 조류, 패류들의 껍질이나 골격 등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암석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석회암이 나타나는 지역은 과거 고생대 당시 모두 바다였던 곳이다.

석회암이 그 일차적인 증거이며, 보다 확실한 증거로서는 고생대 당시 바다를 주름잡았던 삼엽충 화석이 발견되는 지점이 석회암 분포지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삼엽충 화석은 석회암과 석회암 사이에 끼어있는 셰일층에서 발견되는데, 석회암이 노두에 드러난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석회암을 만드는 여러 생물은 남·북위도 25~30도 사이의 따뜻한 바다에서만 사는 생명체다. 따라서 석회암이 나타나는 지대는 고생대 무렵 적도 부근의 따뜻한 바닷속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고생대에 한반도는 남위 5도의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대륙이었던 판게아(Pangaea)가 분열하면서 점차 북상해 현재의 북반구 중위도에 위치하게 된 것은 약 2억 년 전쯤인 중생대 쥐라기에 해당된다.

이후 바다에서 수천만 년 오랜 세월 동안 퇴적된 석회암층은 중생대 약 2억 년에서 1억5천만 년 사이 대륙의 융기로 인해 육지로 올라오게 됐다. 이후 신생대 약 2천5백만 년 전쯤 경동성(傾東性) 요곡(凹谷)운동에 의해 강원도 남부와 충북 북동부 지역이 높이 솟아올라 석회암 산지지형이 형성됐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빗물과 지하수에 의한 침식을 받아 석회동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하세계 조각궁전 연출 주인공은 물!
환선굴은 총연장 6.2km에 달하는 거대한 동굴로, 현재 동굴 입구로부터 1.6km 구간만 개방된 상태다. 생성 초기단계에 있는 동굴로, 단양 고수동굴이나 영월 고씨동굴 등에 비해 종유석이나 석순 등의 동굴생성물은 드문 편이지만, 넓은 광장과 도깨비방망이, 꿈의 궁전, 사랑의 맹세, 지옥소, 옥좌대, 만리장성 등 다양하고 독특한 형상의 동굴생성물들이 넘쳐난다. 특히 10여 개의 크고 작은 소(沼)와 6개 폭포가 발달해 있어 살아 있는 생동감을 전해주며, 폭 10m를 넘는 거대한 터널로 연결되어 있어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지하에 거대한 동굴과 예술가의 손으로 흉내낼 수 없는 천태만상의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물이다. 그렇다면 솜씨 좋은 동굴의 조형자라고 할 수 있는 물 즉, 지하수는 어떻게 석회암을 녹여 이렇게 커다란 동굴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석회암은 이산화탄소(CO2)를 뭉쳐 바위로 만들어 놓은 결정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는 물에 닿으면 다시 녹아버린다. 그러나 단순한 물의 힘만으로는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을 충분히 녹일 수 없다. 석회암을 용해시키기 위해 주로 작용하는 것은 바로 탄산(H2CO3)이다.

탄산은 자연계의 식물이 부식하거나 동물이 호흡할 때 생기는 이산화탄소가 물과 결합해 생긴 것이다. 탄산은 최대로 농축시켜도 약산이지만, 미량일지라도 지속적으로 장기간 공급될 경우는 석회암의 침식과 풍화에 충분한 힘을 발휘한다. 대기 속에는 0.03%의 이산화탄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에서 만들어지는 탄산은 동굴형성작용에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따라서 석회암을 용식하기 위해 필요한 이산화탄소의 대부분은 토양에서 얻어진다.

CO2 + H2O

H2CO3 + CaCO3 → Ca+2 + 2HCO-13
땅위에 떨어진 낙엽은 토양 속에 기생하는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된다. 이 과정에서 식물과 동물의 부패한 찌꺼기를 거쳐 탄산과 유기산을 다량 함유한 지하수가 석회암층에 발달한 층리와 절리를 타고 스며들어 암석의 화학적 풍화 즉, 용식작용을 활발히 일으켜 1차적으로 큰 홈을 파서 통로를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하수 길은 점점 커지게 되어 마침내 거대한 동굴이 만들어진다.

일단 동굴이 만들어지고 나면, 석회암을 녹였던 물속의 이산화탄소는 대부분 다시 가스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물속에는 석회암 성분이 과포화 상태가 되어 순수한 화학적 성분인 탄산칼슘만 광물의 결정으로 침전하게 된다.

이후 침전한 광물 결정이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로 떨어질 때 굳으면서 길게 고드름처럼 자라 종유석이 되고,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은 촛농이 쌓이듯 쌓여 자라 석순이 만들어진다. 또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기둥인 석주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물이 벽을 따라 흘러 폭포와 같은 종유벽이나 베이컨, 혹은 커튼처럼 생긴 무늬를 만들기도 하며, 마치 눈꽃처럼 하얗게 피어나 동굴생성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돌로 된 꽃 석화(石花)를 만든다.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밖에도 동굴 팝콘이라 불리는 동굴산호, 보석을 닮은 동굴진주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보는 기기묘묘한 동굴 속의 화려한 모습은 바로 이런 2차 생성물들이 빚어낸 자연의 조화인 것이다.

동굴 소개책자나 프로그램 등을 보면 모두 하나같이 ‘수억 년 전의 비밀’,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지하궁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동굴‘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제목들은 모두 과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말들이기 때문에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 석회동굴을 배태하고 있는 암석 대부분은 약 5억~4억 년 전에 형성된 고생대 석회암이다. 그런데 석회동굴의 형성 연령은 그것을 배태하고 있는 암석의 연대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 동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리고 사실 수억 년 전에 퇴적된 암석 중에 배태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된 석회동굴은 십만 년 전보다도 훨씬 젊은 것들에 해당된다는 것이 강원대 원종관 명예교수(동굴지질학)의 주장이다. 1989년 삼척 대이리 일대를 직접 조사한 강원대 우경식 교수(동굴지질학)도 이와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대이리 동굴지대는 고생대 바다 속에서 형성된 석회암이 중생대 2억5천만~1억5천만 년 전 육지 위로 솟아 오른 후, 지하수에 의해 용식을 받아 동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히 가늠할 수 없지만, 대략 제3기 말인 수백만 년~수십만 년 전쯤부터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석회동굴의 형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수천만 년에서 억만 년에 이를 만큼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환선굴 관리사무소에서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는 팜플릿과 안내판에 적힌 ‘환선굴의 형성 연령이 약 5억3천만 년 전’이라는 기록은 고쳐야 할 것이다. 환선굴을 배태하고 있는 석회암층의 형성연령이 5억3천만 년 전의 고생대 것이라는 것이지, 환선굴 자체가 5억3천만 년 전에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생명은 살고지고
한 줌의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과 죽음 같은 고요만이 존재하는 암흑세계,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기영양원이 없어 생물이 자라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에는 놀랍게도 생명체들이 굳센 삶을 이어가고 있다.

동굴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은 퇴화되고 대신 어둠의 세계를 돌아다니기 위한 더듬이, 다리, 털 등의 촉각기관은 고도로 발달했다. 뿐만 아니라 빛이나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적기 때문에 몸 색깔은 기분 나쁠 정도로 병적인 흰 색으로 변했다.

경이로운 적응이자 진화가 아닐 수 없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종(種)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적 주장을 동굴생물만큼이나 생생하고 뚜렷하게 증명하는 생물은 지구상에 달리 없는 듯하다.

연중 12~14℃의 기온을 유지하는 환선굴은 건강한 먹이사슬을 유지해와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지표면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화석으로 가끔 나타나기 때문에 화석곤충이라고 일컫는 갈로와, 하늘을 정복한 유일한 포유동물인 동굴의 왕자 박쥐, 동굴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하수 생물의 대표적 생물인 장님옆새우, 이밖에도 장님좀딱정벌레, 굴잔나비거미, 노래기, 도룡뇽 등 수십 종의 동굴생물이 살고 있다.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연유산
동굴 입구에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박쥐가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면 동굴의 주인이자 어둠의 지배자인 여러 생물들이 지금 이 순간도 생멸을 반복하며 동굴과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자연이 빚어낸 지하 속의 예술 세계인 동굴, 그러나 이러한 동굴들이 인간에게 개방되면서 점차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많은 관광객들은 호기심에서 동굴생성물에 손을 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손에 묻은 염분을 포함한 유기물이 동굴생성물 표면에 피복되어 오염됨으로써 흑색 오염이 발생하며, 탐방객 수의 증가에 따른 동굴 내 이산화탄소의 농도 증가는 동굴생성물의 성장을 둔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동굴 내 조명은 많은 열을 발생시켜 동굴 전체 에너지의 평형상태를 깨 조류와 이끼류가 번식하는 녹색 오염을 유발하기도 한다.

다행히 97년부터 인간의 출입을 허락한 환선굴은 개방된 지 오래지 않아 비교적 신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발 당시 동굴 보존에 대해 배려와 관리를 세심히 한 덕분에 동굴생성물과 동굴생물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관람객으로 인해 동굴의 자연성이 위협받고 있다. 최근 석순, 종유석, 동굴산호 등을 몰래 잘라가는 관람객은 많이 사라졌으나, 음주로 만취한 상태서 동굴에 들어와 괴성을 지르고, 여기저기 마구 침을 내뱉고, 금지된 음식물을 반입하거나 구석구석에 쓰레기를 버리는 등 몰지각한 관람객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소득을 올리는 데만 힘쓰다보니 관람객 수가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시설물과 조명 등 실질적인 동굴 환경의 개선과 유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동굴은 인간의 발길이 닫는 순간부터 본래의 자연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동굴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우리는 자연이 오랜 세월에 걸쳐 빚어낸 동굴을 소중한 자연 유산으로 여기고 더 이상의 손상 없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글= 이우평 백령중학교 교사

** 플러스 이야기 상자

돌리네 … 석회암의 용식이 만들어낸 사발 모양의 와지
석회암은 빗물이나 지하수에 쉽게 녹기 때문에 석회암이 넓게 분포한 지역에서는 독특하고도 다양한 형태의 지형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형을 통칭해 카르스트(karst) 지형이라고 하며, 대표적인 지형으로 돌리네(doline), 우발라(uvala), 폴리예(polije), 라피예(lapie) 등이 있다.

카르스트라는 용어는 ‘험한 바위산’이라는 뜻으로, 아드리아해 북동 연안에 위치한 구 유고슬라비아의 석회암지대의 지명에서 유래한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석회암 지역 곳곳에서는 움푹 파인 웅덩이 모양의 지형이 여기저기에 모여 있어 눈길을 끈다. 어떻게 하여 깊이 쏙 들어간 지형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지형을 두고 돌리네라고 말한다. 돌리네는 카르스트 지형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지하에 동굴이 형성되어 지표를 흐르던 물이 지하로 빠져나가면서 마치 깔때기 모양을 한 커다란 웅덩이와 같은 지형이 생겨난 것이다. 돌리네 중앙에는 주로 물이 잘 빠지는 배수구(sinkhole)가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원형 내지 타원형이며, 지름은 수m에서 수백m이고, 깊이도 1m 미만에서 100여m까지 다양하다.

돌리네는 위와 같이 석회암이 녹으면서 형성되기도 하지만, 지하에 동굴이 있을 때 동굴 내 암석이 붕괴되면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돌리네의 성장이 계속되면 인접한 다른 돌리네와 결합해 우발라를 형성한다.

한편 석회암 밑에 다른 종류의 암석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서 땅 밑을 흐르던 지하수가 다른 암석을 녹이지 못하고 옆으로 흘러나오면서 넓고 편평한 지형인 폴리예가 형성되기도 한다.

돌리네는 주로 경작지로 이용되며, 관서지방에서는 ‘덕', 평창군 대화 지방에서는 ‘구단', 삼척 지방에서는 ‘움밭', 단양 지방에서는 ‘못밭'으로 불리는 이름이 각각 다르다.

한편 정선군 임계면 백복령 부근에 발달한 카르스트 지형은 돌리네와 우발라 등 카르스트 지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지형이 좁은 지역에 밀집, 발달해 있어 원시 자연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곳은 지형·지질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자연경관적 가치 또한 매우 큰 곳으로 평가되어 백복령 부근의 6,040㎡ 일대의 카르스트 지형을 2004년 4월9일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해 보호관리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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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6구간] 덕항산 - 7 태백산 문헌고찰

고대부터 천제를 지내온 靈山(영산)
단군사화와 연관성 있는 유적은 구월산(북한)에 몰려 있어

백두대간 상의 선달산 동쪽 도래기재에서 매봉산(천의봉·1,303.1m) 동북쪽 피재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인 태백산(太白山·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루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옛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만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군 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주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 기슭 옛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태백산의 봉우리들과 문화유적

태백산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 그리고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들이 태백산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제단이 있는 현재의 산봉이 태백산 주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대박(大朴)·삼태(三台)·우보(牛甫)·우검(虞檢)·마라읍(摩羅邑)의 봉우리들 이 6,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의 차용표기로, 전음되어 현재는 함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오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으며,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葯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었던 각화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1,176.7m)이고,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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