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2구간 / 갈전곡봉] 문헌고찰

5만 보살의 진신(靈)이 상주하는 영산
삼국유사가 우통수 한강 발원지 설의 원조

오대산(五臺山·1,563.4m)은 백두대간 상의 진고개에서 구룡령에 이르는 구간 일대의 주산으로, 신라시대부터 5만 보살의 진신(眞身=靈)이 상주한다고 전하는 한국의 불교 영산이다.

특히 5대의 중심봉인 중대에는 고대시절부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으며, 때때로 근처 상원사 일대에 문수대성이 36가지 형상으로 변해 그 모습을 나투기도 한다는 문수성지로 일컬어져온다.

또한 금강산 보개산(寶蓋山)과 함께 지장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한국 3대 불교 명산의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산 안에는 신라시대 이래로 많은 불교문화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동대봉 기슭에 자리한 월정사는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인 대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개산한 이후 조선 세조 때 크게 중창됐으며, 경내에는 팔각구층석탑과 약왕보살이라 전하는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중대봉 기슭에 자리한 상원사는 신라의 보천(寶川) 태자 형제가 개산한 이후 성덕왕 때 중창된 신라 명찰로, 경내에 동종, 목조문수동자상, 중창권선문 등의 귀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오대산은 또 조선시대에 선가(仙家)의 수행자들이 선도를 수행하던 명산승지였던 곳으로 보인다. 곧 택리지 산수조에 ‘오대산은 흙산으로 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겹겹으로 싸여 깊숙하게 막혀져 있다···상당(上黨) 한무외(韓無畏·?-1610)는 이곳에서 도를 얻어 혼백이 육신을 떠나 신선으로 화해 갔으므로 수단복지(修丹福地)로 일컫기를 이 산을 제일로 삼는다’고 했다.

또 조선 중기에 조여적(趙汝籍)이 저술한 선가서(仙家書) 청학집(靑鶴集)에도 그의 스승 편운자(片雲子) 이사연(李思淵·1559-?)이 남대 기린봉에서 금선자(金蟬子) 등의 선인들을 만나 선도에 입문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오대산의 혈이 맺혀 있는 최고의 명당처는 곧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상봉인 비로봉 동쪽 중대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개산한 것이라 전한다. 이 곳은 풍수지리적 견해에 의하면 나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인 비룡함주형(飛龍含珠形)으로 일컬어진다.

이 중대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동대·서대·남대·북대가 중대를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으면서 누대처럼 전망 좋은 오대를 형성하고 있는 산이 오대산이다. 1975년에 진고개 동북쪽 일원의 청학동 소금강을 아울러 우리나라 대표적 명산의 하나인 산악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대산의 오대 봉이름

오대산 일대의 백두대간 주능선 상에는 진고개 서쪽에 동대산(東臺山·1,433.5m), 그 북쪽에 두로봉(頭老峯·1,422m)이 위치하고, 두로봉에서 서남쪽 방면으로 큰 산줄기가 갈려 나가면서 상왕봉(象王峯·1,491m), 비로봉(1,563.4m), 호령봉(虎嶺峯·1,561m)이 자리하고, 호령봉 동남쪽에 1336.8m 봉과 남대봉으로 보이는 1301.2m봉이 자리하고, 상봉인 비로봉 동쪽에 중대봉인 1190m봉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불리고 있는 봉우리 이름들은 고대부터 불려온 본래의 봉이름에서 변화된 것들이다. 핵심을 이루고 있는 5대의 이름을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神文王)의 태자 보천·효명(孝明) 두 형제가 속세를 벗어날 뜻을 은밀하게 약속하고는 남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갔다…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로 참례하러 올라가니 동대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고, 남대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나타나 있으며, 서대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아미타불)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대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이 나타나 있으며, 중대 풍로산(風盧山) 일명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예를 올렸다. 또 매일 새벽이면 문수대성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36가지 형상으로 변하여 어떤 때에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어떤 때에는 보구형(寶球形)으로 …·어떤 때에는 청사형(靑蛇形)으로 나타나 보였다. 두 태자는 매양 이른 아침에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저녁이면 각기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오대의 원래 이름은 동대 만월산(봉), 서대 장령산, 남대 기린산, 북대 상왕산, 중대 풍로산(일명 지로산)이다. 그렇다면 현재 불리고 있는 오대의 이름 중 그 이름과 위치가 원래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북대 상왕산(봉)뿐이고, 위치상으로 동대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동대산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중대·서대·남대의 이름과 위치다.

현재 오대산에 관한 각종 산행기나 사적기 따위에 의하면, 대부분 비로봉을 중대인 지로봉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또는 오대에서 대와 봉우리를 분리해 달리 보기도 한다. 예컨대 김장호의 <한국명산기>에 의하면, 대는 적멸보궁터와 같은 제단이나 불단을 차릴 만한 알맞은 높이의 대지를 말한 것이고, 산(봉) 이름은 그 뒤쪽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 하여 중대는 적멸보궁터이고, 그 뒤 봉우리가 바로 비로봉이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의 백운대·만경대, 관악산의 연주대, 속리산의 문장대 따위와 같이 대 또한 봉우리 이름일 뿐이다. 백운대·문장대 따위의 봉우리처럼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고, 누대에 올라선 듯 조망(전망)이 좋은 이러한 산봉우리를 대체로 ‘~대’라 일컫는다.

오대산의 오대도 비록 백운대·만경대처럼 석벽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는 아니나, 그 정상부가 마치 누대에 올라선 듯 전망이 좋은 평평한 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대’라 지칭한 것이다. 곧 삼국유사 기록대로 중대가 지로산·풍로산이고, 지로산·풍로산이 중대이지, 비로봉이 중대의 봉우리는 아니다. 다른 봉우리에 있어서도 동대가 만월산이고, 만월산이 곧 동대일 뿐이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오대산기에서도 전망 좋은 오대의 각 봉우리 정상부가 바로 대이고, 비로봉은 중대가 아니라 북대인 상왕산의 최고봉이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중대는 현재의 비로봉이 아니라 옛 사자암(獅子庵) 자리에 근년에 새로 크게 중창한 비로전 뒤편에 솟아 있는 배후 산봉인 1190m봉이다.

비로전에서 오른쪽 비로봉 가는 길로 오르다가 용안수(龍眼水) 샘터를 조금 지나면 나오는 두 갈래 갈림길에서 왼쪽에 솟아올라 정상부가 마치 전야(田野)처럼 평평한 대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오대산기에서는 이 봉우리를 지로전(智爐田)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이 지로봉 정상부에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대 적멸보궁에서 서북쪽에 상봉인 비로봉이 위치하고, 서남쪽에 호령봉이 위치한다. 그렇다면 중대 서쪽의 두 봉우리 중 비로봉은 북대인 상왕산의 최고봉이었으므로 서대은 자연스럽게 현재 호령봉으로 개명되어 불리고 있는 봉우리임을 알 수 있다.

▲ 사고사의 사각. 실록을 보관하기 전부터 영감사가 있었고, 그 배후 산봉인 1190m봉이 남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대산 남부의 봉우리들 중에는 이름이 붙은 봉우리가 하나도 없으므로 남대는 오대 중에서도 그 이름과 위치가 가장 분명치 않다. 미수의 오대산기에 ‘장령봉 동남쪽이 기린봉(산)이고, 그 정상이 남대다. 그 남쪽 기슭에 영감사(靈鑑寺)가 있고, 이곳에 사서(史書=조선왕조실록)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 영감사와 사각을 재건한 사고지의 배후봉인 1301.2m봉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남대가 서대 남쪽에 있는 것으로 현재의 호령봉 정남쪽에 위치한 1368.5m봉이나 1336.8m봉을 지칭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정확하게는 서대 동남쪽에 자리한 영감사의 배후봉임을 알 수 있다.

영감사는 조선 선조 39년(1673)에 사명대사가 바람과 물과 불의 3재를 막을 수 있는 길지라 하여 그 곁에 사고를 건립한 이후 일명 사고사로도 불렸다. 때문에 이 절을 사고의 수직승려나 머물던 암자 따위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본사인 월정사와 함께 수행처로서 개창한 것으로 전하는, 역사가 매우 오래된 사찰이다.

이곳 오대산사고는 조선 후기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관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의 화를 면한 전주사고본 3부를 재인(再印)하여 춘추관·태백산·마리산[摩尼山]에 보관하고, 그 교정본을 이곳 오대산사고에 소장했다. 그러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를 가지고 가서 동경대학에 이관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상당수가 소실되고 당시 교수 등에게 대출해준 책들만 남았다.

금년에 일본에서 이를 서울대에 반환(기증 방식으로)했는데,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이를 본래의 소장처였던 이곳 사고지로 옮겨 관리하고자 추진하고 있다.


오대산의 산수 이름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상원사중창기에서는 오대산에 대해 ‘그 웅장함과 깊고 높고 큰 것이 금강산과 1·2위를 다툴만하다·…산에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고루 대등하고, 크기가 서로 가지런하다. 이들 봉우리들을 바라보면 마치 연꽃이 물에 나와 피어 있는 듯하고, 누각이 공중에 떠 있는 듯 하므로 오대라 이름하였다’라 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이 만월, 남쪽이 기린, 서쪽이 장령, 중앙이 지로인데, 다섯 봉우리가 빙 둘러가며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루 대등하므로 오대라 이름하였다’ 고 했다.

오대산의 산봉 이름과 물 이름 등에 대해서는 미수의 오대산기에 잘 요약해 언급하고 있다. 이보다 뒤에 쓴 유형원·이만부·성해응 등의 오대산기는 대부분 이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이 높고 크고 깊은데, 산의 기운이 가장 많이 쌓인 것이 다섯이니 그것을 오대라 한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 상왕산으로, 매우 높고 험준하다. 그 정상을 비로봉이라 하고, 그 동쪽으로 두 번째 높은 봉우리를 북대(현 상왕봉)라 하는데, 감로정(甘露井)이 있다. 비로봉 남쪽이 지로봉이고, 지로봉 정상이 중대가 된다.

산이 깊고 기운이 맑아서 새나 짐승이 이르지 않는다. 불제자들이 이곳에서 상 없는 부처(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엔 불상이 없음. 곧 부처의 진신사리)에 새벽 예를 올리니, 이곳은 최고의 자리다.

중대에서 조금 내려가면 사자암이 있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중건하신 것이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사자암 중창기를 짓게 했다. 옥정(玉井)이 있고, 그 물이 아래로 흘러 옥계(玉溪)가 된다. 북대 동남쪽이 만월봉이고, 그 북쪽이 설악산이다. 만월봉 정상이 동대이며, 동대의 물은 청계(靑溪)가 된다. 동대에 오르면 붉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수 있다.

상왕봉 서남쪽이 장령봉이고, 그 정상이 서대다. 서대에는 신비한 샘물을 길으니, 그 샘을 우통수(于筒水)라 일컫는다. 한송(寒松)의 선정(仙井·강릉 북쪽 15리 한송정 옆에 있었던 찻물 샘)과 함께 영천이라 병칭된다. 장령봉 동남쪽이 기린봉이고, 그 정상이 남대다. 그 남쪽 기슭에 영감사가 있고, 이곳에 사서를 소장하고 있다.

상원사는 지로봉 남쪽 기슭에 있는데, 산중의 아름다운 절이다…상원사를 유람한 후 중대에 오르기까지가 5리이고, 또 북대에 오르기까지가 5리다. 서쪽으로 장령봉에 오르기까지가 10리이고, 또 남쪽으로 10리를 가면 월정사다. 월정사 위쪽에 관음암이 있는데, 서쪽으로 종봉암(鐘峯庵)과 마주 대하여 굽어보고 있다. 종봉은 장령봉 서남쪽에 위치한다. 이상은 그 중 가장 큰 봉우리들을 들어서 기록한 것이다.

산이 대체로 흙이 많고 바위가 적으며, 나무는 노송나무가 많다. 산 중의 물은 합류하여 큰 내(大川·오대천 상류)가 되고, 남대의 동쪽 구렁에 이르러 반야연(般若淵)이 되고, 월정사 밑에 이르러 금강연(金剛淵)이 된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오대의 위치와 이름, 그리고 주요 명천(名泉)과 시내 이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앞에서도 조금 살펴보았지만, 비로봉과 중대 지로봉 및 남대 기린봉에 관한 내용은 오대의 위치와 이름이 실전(失傳)되거나 개명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 오대산조에서는 각 오대에서 발원하는 샘물 이름을 좀더 보완하여 서대 우통수, 동대 청계(수), 북대 감로(수), 남대 총명수(聰明水), 중대 옥계(수)로 일컫고, 이 중 우통수를 한강의 근원이 되는 영천으로 언급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오대산 신앙

오대산의 산 이름과 개산의 역사는 중국 4대 불교 영산의 하나인 오대산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오대산(3,058m)은 산서성 오대현 동북쪽에 있으며, 그 상봉인 북대봉은 화북(華北)의 최고봉으로서 화북의 지붕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산이 높기 때문에 주봉의 그늘진 곳에는 만년빙설이 늘 남아 있으며, 산 중에는 한 여름에도 늘 맑고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서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일컫는 것은 이를 따른 것이라 본다.

상봉인 북대는 엽두봉(葉斗峯·3,058m)이라 하고, 남대는 금수봉(錦繡峯·2,474m), 동대는 망해봉(望海峯·2,796m), 서대는 괘월봉(掛月峯), 중대는 취암봉(翠巖峯)이라 일컫는다. 다섯 봉우리 복판에 널따란 복지(腹地)가 있는데, 대회(臺懷)라 일컫는다.

산 중 사찰 중 가장 큰 사찰은 현통사(顯通寺)다, 이 산은 후한 영평(永平·58-75) 연간에 인도 고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개산했다. 후한 명제 때 이 두 고승의 주청에 의해 창건한 대찰 대부영취사(大孚靈鷲寺)가 곧 지금의 현통사다.

5대에도 우리나라 오대산의 가람배치와 같이 북대에 영응사(靈應寺), 서대에 법뢰사(法雷寺), 그리고 중대 남쪽 기슭에 길상사(吉祥寺)가 자리하고 있다. 또 대회 서남부 수상사(殊像寺)에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안치하고 있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오대산의 상원사 청량선원 법당에 문수보살상을 안치하고 있는 가람 형태와 유사하다.

▲ 중국 오대산 용천사 일주문. 중국의 오대산 신앙은 서기 1세기에 인도로부터 전수됐다. 우리나라는 7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받았다.

중국의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요람으로서 고대부터 1만 보살을 거느린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전한다. 이 오대산(청량산)이 후대에 문수성지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그의 권속 1만 보살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하고 있다고 한 화엄경 권45의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수신앙을 우리나라 오대산에 전래한 이가 바로 신라의 자장율사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자장정률 조에 자세히 전한다. 그것을 요약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에 당에 유학하고자 건너갔다. 그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청량산(오대산)에 들어가 북대의 문수보살 소상, 일설에는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속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범어로 된 4구의 게를 전해 주었다. 다음 날 한 승려의 모습으로 몸을 나툰 문수보살이 찾아와 잘 이해하지 못했던 4구 게에 관한 해석을 전해주고, 그에게 부처의 가사 한 벌, 주발 하나, 정골사리 한 조각을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溟州=강릉) 경계에 오대산이 있다. 1만의 문수보살이 항시 그곳에 거주하니 그대는 가서 보라.”

그리하여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본국으로 귀국한 후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는데, 바로 지금의 월정사 자리다. 이렇듯 우리나라 오대산이 진성(眞聖)의 상주처, 곧 1만 문수보살의 상주처로서 문수성지로 여겨지게 된 것은 신라시대 자장율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장 이후 보천·효명 태자가 자장의 신앙사상을 더욱 계승 발전시키고, 후대에도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 신효거사(信孝居士·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사굴산문 범일국사(梵日國師)의 10성 제자의 한 사람인 신의 두타(信義 頭陀), 수다사(水多寺·강릉 정동진 괘방산 기슭의 낙가사)의 유연장로(有緣長老)가 자장이 머물던 곳에 와서 머물면서 그 신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1752년(영조 29) 이휘진(李彙晋)의 오대산월정사중건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자장이 월정사를 개산한 이래 뒤이어 이를 중창하고 이곳에 머문 위의 4인을 4성으로 높여 일컫고 있다. 신효거사의 사적은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 조에도 자세히 전한다.


보천태자의 수행처 신성굴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의하면, 자장 이후 그 신앙사상을 계승하여 오대산 신성굴(神聖窟)과 울진국(경북 울진군) 장천굴(掌天窟=聖留窟)에서 수도하여 성도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의 태자 보천은 신성으로 일컬어질 만큼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보천태자가 신통력을 발휘해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기 보다는 그의 도력이 높아지고 수차력(水借力)에 의한 경신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축지법도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 경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굴은 송광연(1638-1695), 김창흡(金昌翕·1653-1722),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현 두로봉 남쪽 골짜기인 신선골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가 왼쪽 산기슭에 있었던 굴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상원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다른 시내가 흘러와 모이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제법 맑고 그윽하였다. 그 골짜기를 뚫고 가면 양양의 부연동 계곡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곁에 신성굴이 있는데, 옛날 명승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신성굴이 있는 계곡은 곧 오늘날의 신선골로서, 이 계곡으로 들어가 백두대간 주능선 상의 신선목을 넘어 양양(현재는 강릉시 연곡면)의 부연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선골은 곧 신성골이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선골 입구에는 현재도 보천태자의 수행정신을 계승하고자 신성암(神聖庵)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수도처로 삼고 있다.

송광연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동굴만을 지칭하던 이름이 아니라, 금강산의 보덕굴(普德窟), 삼각산(북한산)의 문수굴(文殊窟) 등과 같이 동굴을 이용해 조성한 암자, 또는 굴 안에서 수행정진을 하기 위해 굴 주변에 주거공간으로 조성한 초암 따위를 포함하여 일컫던 수행처가 아니었을까 한다.

일생을 거의 월정사에서 주석한 현대 고승 탄허(呑虛·1913-1983)도 말년에 그가 머물던 암자를 방산굴(方山窟)이라 했듯이 후대에도 불승들은 위와 같은 고사를 본받아 자신들이 머무는 수행공간을 ‘~굴’이라 즐겨 불렀다. 송광연은 그 신성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월정사 방면에서)곧장 중대쪽을 향하여 시내를 따라 십수 리를 가 신성굴에 이르니 한 층의 암석이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고, 아래쪽에 작은 굴이 있었다. 그 위에 한 칸짜리 정사를 새로 창건하여 수좌승 의천(義天·1603-1690)이 머물면서 환적당(幻寂堂)이라 붙이고 정좌수도하는데, 정신과 풍채가 의연하였다. 나이가 지금 74세라 하는데, 밝은 광채가 얼굴에 가득하였다. 어려서부터 늘 솔잎을 복용하여 득력한 것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위의 내용에 보이는 환적 의천은 편양 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문인으로서, 21세에 청량산에 들어가 31년 동안 벽곡(?穀) 수행한 특이한 고승이다. 그는 아마도 불도를 수행하면서 선가의 수행방법도 실행한 인물로 보인다.

현 신성암 뒤편 석벽에 신성굴로 지칭되던 자그마한 석굴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민간인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승려들의 조용한 수행처라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이곳에서 계곡가를 따라 약 10분쯤 더 올라가면 또 절터로 볼 수 있는 빈 터가 보이기는 하지만, 신선골에는 현재 신성굴로 볼 만한 굴은 보이지 않는다.

상원사 승려나 이곳 관리공단 직원들도 잘 몰랐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신성굴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거나 기록하고 있는 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강의 발원샘 우통수

서대의 우통수는 미수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신정, 신천, 또는 영천으로도 일컬어진 신령한 샘물로,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중창기 등에 의하면 여말선초 이후 한강의 발원샘이라 전하여 온다.

권근은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는 중령(中?)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아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우통수를 중국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옛 장강(양자강) 복판에 위치한 금산사(金山寺) 앞쪽 부용루에 있는 찻물로 유명한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 일명 중령수(中?水)와 비견하여 언급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에 보이는, 우통수에 대한 최초의 표기 우동수(于洞水)는 대산오만진신조의 같은 내용에 어조사 于 자를 쓰지 않고 그냥 동중수(洞中水) 또는 영동지수(靈洞之水)라 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서대 골짜기 속의 물, 또는 신령한 골짜기의 물이란 뜻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곧 于 자는 목적격 조사 ‘를’로 새길 수 있는 어조사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원문의 급우동수(汲于洞水)는 ‘우통(동)수를 길어’가 아니라 ‘동수(洞水·골짜기의 물)를 길어’의 의미이고, 복우동영수(服于洞靈水)는 ‘우통영수를 마셔’가 아니라 ‘동령수(洞靈水·골짜기의 신령한 물)를 마셔’의 의미라 하겠다.

뒤에 이 샘물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되면서 아래 상원사 일대의 샘물에 대하여 ‘웃동(윗동)의 물’로 언급하게 되면서 이를 소리옮김한 것으로 인식하고 于洞水로 끊어 읽게 되고, 다시 동음의 글자를 빌려 于筒水란 차자표기로 좀더 분명하고 고상한 표기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한다.

▲ 한강 발원지인 대덕산 검룡소. 한동안 오대산 우통수를 한강 발원리로 여겼으나 도상거리로 이곳이 더 길다는 것이 증명됐다.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이라는 권근의 내용은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 강릉조에 거의 그대로 수용되고 좀더 보완되어 ‘(우통수는)금강연에 이르러 한수(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언급한 이후 부동의 정설로 정착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내용을 현대적 시각으로 종합해 보면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샘이고, 금강연은 낙동강 발원지 황지와 같은 한강의 발원지(發源池·발원소)이고, 우통수가 있는 산봉우리 서대 장령봉은 한강의 발원지역(산)이라 하겠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위와 같은 전통적 한강 발원설은 1981년 이형석(한국하천연구소장)에 의해 한강의 최상 발원지역이 태백시 골지천 상류의 금대산 지역으로 문제가 제기된 후(월간山 1981년 5월호 참조) 김강산(태백문화원)과 전상호 교수(강원대) 등에 의해 좀더 발전적으로 조사 연구되어 지금은 발원지역을 태백시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금대산(금대봉·1,418m)으로, 발원샘을 금대산의 1351m봉에 자리한 제당굼샘으로, 발원지(발원소)를 태백시 창죽동의 창죽천 상류, 금대산 북쪽 금대봉골에 지리한 검룡소(儉龍沼)로 보고 있다(<한강의 발원지와 강원도> 강원개발연구원, 2000년 참조).

특히 태백시는 유로(流路)가 끊기는 제당굼샘, 또는 고목나무샘과 같은 발원샘 보다는 둘레 20여m에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면서 하루 5천여 톤 가량의 지하수를 용출하고 있는 검룡소를 황지와 같은 한강의 공식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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