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풍수

좌향 잘못 잡아 흉상이 된 미륵리 절터
뒷산 중심에 비껴 있고, 월악산도 경사면을 바라보고 있어

▲ 미륵사지 전경. 특이하게 석조물들이 모두 북향으로 되어 있다.

풍수지리학은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로 구성되었는데, 형기풍수는 용(龍), 혈(穴),사(砂), 수(水)에 관련된 내용이고, 이기풍수는 주로 방향에 관련된 내용이다.

용이란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꿈틀거려 생동감 있게 생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풍수가에서는 특별히 용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 용의 생김새에 따라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라는 중국의 풍수서에서 생룡(生龍)과 사룡(死龍), 강룡(强龍)과 약룡(弱龍), 순룡(順龍)과 역룡(逆龍), 진룡(進龍)과 퇴룡(退龍)으로 나누고, 이중 생룡(生龍), 강룡(强龍), 순룡(順龍), 진룡(進龍)은 길한 용으로 보고, 사룡(死龍), 약룡(弱龍), 역룡(逆龍), 퇴룡(退龍)은 흉상으로 본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복룡(福龍), 병룡(病龍), 겁룡(劫龍), 살용(殺龍) 등 많은 이름이 있다.

내룡(來龍)의 핵심은 ‘기복(起伏)하면 생(生)이고 강경(强硬)하면 사(死)’다. 풍수지리에서는 용이 좋아야 혈도 좋기 때문에 먼저 용을 잘 관찰해야 한다. 결혈처(結穴處)는 용이 내려오다가 머무는 장소인데, 바로 이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는 자리가 되므로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며,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분합(分合)하면 생이고 모호(模糊)하면 사’다.

풍수지리의 핵심논리는 생사(生死)의 논리

사(砂)와 수(水)에 관한 이론도 많지만 핵심적으로 ‘만곡(彎曲)하면 생이고 반직(反直)하면 사’다. 형기풍수로 명당이 되는 네 가지 조건이 되는 용, 혈, 사, 수의 이론은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결국은 생과 사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기풍수에서도 삼원구운(三元九運)을 위주로 하여 산성(山星)과 향성(向星)에 따른 구성(九星)을 보고, 현재와 미래은 생으로 보고 이미 지났거나 너무 오래된 과거는 사로 본다. 이렇게 풍수지리의 핵심논리를 한 마리로 표현하자면 생사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백두대간 대간룡 자락인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지는 고려 초에 건축한 석불입상(보물 제96호), 석등, 오층석탑(보물 제95호)이 북향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했다. 과연 미륵사지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명당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은 좋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파된 이래 수많은 절과 탑을 지었으며, 지금까지 보존이 잘 되어 전해 내려오는 사찰도 있지만, 반면에 폐사지로 남은 곳도 있고, 거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폐사지도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사찰이라고 하여 모두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건립한 것은 아니고, 길지가 아닌 장소의 사찰은 설령 당시에는 규모 큰 사찰일지라도 폐사가 되는 사찰도 많다는 의미다.

미륵사지는 비록 폐사가 되었지만, 석불과 석등 등의 석조 조형물이 많은 이유로 폐사지라는 이름 하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 미륵불상의 특이한 점은 드물게 북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좌향이 유별나게 북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은 끌기에는 충분하지만 결코 명당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물론 북향일지라도 명당은 있다.

이곳 석불과 석탑의 좌향은 북향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좌향은 오좌(午坐·0도)와 정좌(丁坐·15도) 사이인 7.5도다. 이기풍수지리에서는 좌향을 중대하게 여기므로 당연히 좌향으로 길흉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좌향을 응용해 형기풍수의 용렬사수의 길흉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형기풍수로 아무리 좋은 땅일지라도 입향(立向·좌향을 놓는 것)을 잘못하면 오히려 피해를 보게 된다.

먼저 나경(羅經·패철이라고도 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경의 종류와 사용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다. 나경 사용법이 풍수지리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적을지라도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아주 중차대하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풍수계에서는 나경의 원리와 사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좌향론에 대해 아예 무시하여 심지어 나경무용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천반을 잘못 사용하면 공망에 빠진다

나경은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양반(楊盤)과 장반(蔣盤)으로 나눈다. 장반이란 나경은 청나라 초기의 장대홍(蔣大鴻) 선생을 지칭하여 생긴 말이다. 장대홍 선생은 현공풍수의 종사(宗師)인 양균송에 이어 근대 현공풍수종사라고 할 수 있으며, 현공풍수에서 사용하는 나경으로 지반만 사용하기 때문에 나경의 구조가 간단하다. 중화민국 초기에 심소훈의 저서인 심씨현공학에 소개된 장반나경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

▲ 미륵석불 뒤편에 있는 주산도 석불의 좌향과 일직선상에서 벗어나 있어 무정하게 보인다.
한편 양반이란 장반에 비교해 그렇게 칭할 뿐 양균송 선생의 풍수이론과 전혀 관계 없다. 양반은 지반을 중심으로 인반(人盤)과 천반(天盤)이 있는데, 천반은 지반에서 7.5도 왼쪽으로 비껴 있고, 인반은 지반을 중심을 오른쪽으로 비껴 있다. 그리고 인반의 용도나 천반의 용도는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해 장반은 좌향을 비롯한 사수(砂水)를 측정하는 데 오직 지반 하나로 측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풍수이론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나경 사용법에 혼란이 예상되고, 이에 따른 기존의 풍수사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풍수지리에서 음택이나 양택 모두 지반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론은 진실된 이론이다.

나경 사용법에 대해 대만의 풍수대가인 종의명(鐘義明) 선생은 현공고험주해(玄空地理考驗註解)에서 “有些地師以天盤(縫針)或人盤(中針)爲立向, 大都犯‘大空亡’·‘小空亡’, 以致發生悲劇. 立向時務須小心, 切莫犯之(일부 지사들이 천반(봉침)혹은 인반(중침)으로 입향을 하는데 대개는 ‘대공망’이나 ‘소공망’에 걸리어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입향을 할 때에는 반드시 조심하여야 하며 절대로 공망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절대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뿐만 아니라 풍수지리 각종 고전에도 천반 봉침을 사용함에 따른 공망에 대한 설명과 경고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양균송의 저서인 都天寶照經(도천보조경)에는 ‘陰陽差錯敗無窮(음양이 어긋나면 잘못이 끝이 없다)’고 했고, 비성부(飛星賦)에서는 ‘豈無騎線遊魂,鬼神入室, 更有空縫合卦, 夢寐牽情(기선에는 혼이 떠도는 곳인데 어찌 귀신이 입실하지 않을 것이며, 공봉은 합괘가 되어 꿈속마저도 불안하다)라고 했다.

또한 현공풍수의 이론을 토대로 음택과 양택의 실제 현장사례를 기록한 택운신안(宅運新案)에는 ‘針落兩字之間曰騎縫, 是無向也(나침이 24좌와 24좌의 글자 사이에 떨어지면 기봉이라고 하는데, 향이 없다)’고 했다. 기선(騎線)이란 일명 대공망(大空亡)이라고도 하며, 괘지교제(卦之交界)로 팔괘와 팔괘 사이가 된다.

나경의 24좌로 말하자면 辛↔戌, 亥↔壬, 癸↔丑, 寅↔甲, 乙↔辰, 巳↔丙, 丁↔未, 申↔庚 사이의 모두 8곳이며, 그 범위는 6도다. 그리고 공봉(空縫)이란 소공망(小空亡)이라고도 하며 좌여좌지교계(坐與坐之交界)로 좌와 좌 사이인데, 24좌 중 대공망을 제외한 16곳이 된다. 향이 없다는 말은 목표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선(대공망)은 공봉(소공망)에 비해 더욱 흉하다.

차라리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몰라 아예 나경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우연히 공망으로 좌향을 놓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설픈 기존의 양반식(楊盤式)의 나경을 사용하고 천반을 활용하여 입향했을 경우에는 오히려 공망을 찾아가는 식이 된다. 따라서 기존의 풍수 실력으로 소위 지관이 입향하면 공망에 빠질 확률이 더욱 높다.

실제로 과거 조선시대 왕릉의 대부분은 천반을 이용하여 입향했으며, 이중에서도 특히 정중앙의 분금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고, 지금도 양반식(楊盤式) 나경을 사용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좌향이 공망에 걸린 묘나 집은 어김없이 흉한 일이 발생하게 됐다는 사실은 수많은 측정과 결과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이론에 따른 실제가 일치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경험에 의하면 건축 도중에 안전사고가 발생하거나 건축 도중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건축을 중간이 포기하는 사례도 있으며, 당연히 흉사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건축물의 부가가치도 떨어지게 된다.

미륵리 석탑은 공망입향

▲ 미륵석불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조산(朝山)의 경사면을 바라보고 있어 무정하게 보인다.
공망으로 인한 흉사 중에 제일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부부간에 별거하거나 이혼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했고, 회사나 공장의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공망에 걸리면 흉상을 없애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설령 풍수지리를 불신하더라도 좌향만은 공망으로 놓아서는 절대로 피하여야 한다. 묘뿐만 아니라 건물을 지을 때 공망만은 피하여야 한다는 사실만이라도 국민 누구든지 알아야 할 사항이다.

미륵리 석탑과 석불의 좌향은 7.5다. 천반으로 정좌계향(丁坐癸向)이며, 지반으로는 오좌자향(午坐子向)과 정좌계향(丁坐癸向)의 중간이 된다. 즉 석불과 석탑의 좌향은 천반으로 입향했으며, 그 결과는 소공망이 되어 흉상이 된다.

실제로 석불을 중심으로 천반정좌로 입향한 결과 석불 뒷산을 보면 뒷산의 중심을 비껴있고, 또한 앞쪽에 있는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역시 산의 경사진 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안산과 조산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 절을 찾는 사람이 적거나 경제적인 도움이 적다고 해석할 수 있다.

누군가가 ‘문화유산의 마지막 답사지는 폐사지’라고 했는데, 마치 황성옛터의 유행가 가사처럼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라는 대목처럼 과거에는 화려하였겠지만 이제는 인적이 드물고 쓸쓸한 폐허를 보고 서러움을 달래기도 하고 향수에 젖을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폐사의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통해 현재의 나 자신의 행복감을 확인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여하간에 자기 자신이 미륵리의 사지처럼 폐사가 되어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글 최명우 (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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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문헌고찰

조령산 구간은 행정·군사상의 요충지대
조령·새재·계립령·대원령·하늘재·지릅재의 관계

▲ 하늘에서 본 부봉(앞쪽)과 주흘산. 주흘산은 조령 일대 여러 산봉의 주산이자 문경의 진산이다.

백두대간 상의 이화령(梨花嶺←伊火嶺?529m)에서 대미산(大美山←黛眉山·1,115m)에 이르는 조령산(鳥嶺山·1,026m) 구간은 이 일대 산봉의 주산인 주흘산(主屹山·1,106m), 조산(祖山)인 대미산 및 탄항산(炭項山·857m)·포암산(布巖山·962m) 등의 명산과 함께 고금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국계(國界) 또는 도계(道界) · 군계(郡界) 등의 지방경계를 이루고 있는, 행정·군사 상의 주요 영로(嶺路)인 이화령·조령(鳥嶺:650m)·하늘재(525m) 등이 자리한 요충지대다.

이 일대는 일찍이 고대시절에는 백제와 신라,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계 및 연풍·충주와 문경의 군계 및 영남 지방의 경계를 이루었다. 현재도 충북와 경북의 도계 및 괴산군·충주시·제천시와 문경시의 시군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현대에 이르러 죽령과 함께 조령(새재)을 대신하여 영남 지방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이화령 고갯길은 현재는 모두 터널(tunnel), 곧 굴로(窟路)로 바뀌어 역사 속의 영로로만 인식되어 가고, 이제는 단지 여행객·유람객들의 탐방로로만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화령 곧 이우릿재는 아득한 고개

조령산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 속칭 이우릿재는 조선세종실록 지리지 문경조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의 역대 지리지 문경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던 고개 이름인데,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 조령 제2관문 조곡관. 조령관의 성을 고개에 있는 성이라 하여 영성(嶺城), 조곡관의 성을 중성(中城), 주흘관의 성을 초곡성(草谷城)이라 했다.

현재의 ‘梨花嶺’ 표기는 조선총독부에서 1914~1918년에 걸쳐 조사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잘못 표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표기다. 1929년에 김유동이 저술 간행한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도 伊火峴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살 필수 있다.

이화령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19 병고(兵考)에 보이는, 조선 숙종 31년(1705)조 기사에 의하면, 이오령(伊吾嶺)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방언(方言) 상에서 이화령→아와령→이오령으로 전음(轉音)되어 일컬어지던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화령의 속칭 이우릿재도 이화령 부근의 동리 이름을 따서 이화리의 고개란 뜻으로 이화릿재라 일컫던 말이 이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거나, 또는 이화(伊火)의 음과 훈(訓)이 혼용된 이불(벌)재, 이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음과 훈이 혼용되어 일컬어지는 땅이름 용례는 우리 땅이름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예컨대 하늘재 동남쪽 문경읍 갈평리의 갈평(葛坪)도 속칭 갈벌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또는 이화령은 아득하다, 희미하다의 옛말 ‘입다’의 고형태인 ‘이블다(이울다)’에서 ‘이블’을 취하여 아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블재[伊火峴]라 일컫던 것이 전음되어 이울재→이우릿재라 일컫던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화령은 1925년에 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로 닦이면서 북쪽에 위치한 조령을 대신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요 교통로의 기능을 담당했고, 조령은 옛길의 하나로서 가벼운 등산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로 변했다.

조령산은 북쪽으로 영남대로 상의 큰 고개인 조령과 남쪽으로 3번 국도 상의 큰 고개인 이화령을 거느리고 있는 문경의 큰 산이다. 조령산은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의 연풍조 기록과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공정산(公正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이 조령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조선총독부에서 이 산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문의 지명도와, 국방상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 산에 축성한 조령산성 등이 자리하고 있는 산이라 하여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이 산의 산명을 조령산(鳥嶺山)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일제시대 이후의 일이라 추측된다.

조령산은 이화령 고갯마루에 서 있는, 충북과 경북의 도경계를 알리는 도계비 좌측 북쪽 10m 정도에 있는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과 쉼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약 70분 정도 오르면 쉽게 정상에 이른다. 그러나 등산로가 마루금을 따라 가는 능선길이 아니라 대체로 9부 능선길을 따라가게 되므로 먼 곳까지 조망해 볼 수 없어 조령샘 근처 삼거리 등의 안내판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정상으로 가는 방향을 헷갈리기 쉽다.

조령은 죽령·계립령 이후의 새 고개

조령, 속칭 새재는 조령산 북쪽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다. 예부터 영남쪽에서 이 고개를 넘어 충주를 경유해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크고 빠른 고갯길이었다. 새재는 조선시대 과거길에 올랐던 영남의 선비들이 급제의 꿈을 안고 넘었던 고개다. 그로 인해 새재 이남의 고을 이름을 영남 자제들의 경사스러운 과거급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고을이라 하여 문경(聞慶)이라 했다는 속설까지도 생겨나게 됐다.

그러나 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의 문경조 연혁에 의하면, 이미 고려 태조 때부터 이 고을 이름을 문희군(聞喜郡)이라 불러왔고, 고려 현종 이후 조선조 이전 시기에 ‘聞喜’의 기쁠 희(喜) 자와 유사 의미를 지닌 ‘慶’자로 고쳐 문경이라 불러온 것을 보면, 위의 지명유래는 아마도 부회되어 생겨난 속설일 것이라 추측된다.

▲ 새재계곡의 KBS 사극세트장. 조선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재의 본명으로 정착되다시피한 ‘鳥嶺’이란 한자말 표기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옛 흥녕사) 경내에 있는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에 처음 보인다.
새재의 한자말 표기에 있어서는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앞선 시기 문헌에 초점(草岾), 여지승람·여지도서 등 조선 중·후기의 지리지 기록에 조령(鳥嶺),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여암전서(旅菴全書) 산수고(山水考) 문경조에 신령(新嶺) 등의 표기를 살필 수 있다.

새재의 땅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들 한자말 표기와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속설은 곧 조령과 연관시켜 ‘나는 새도 쉬어가는 험준한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험하고 높은 고개’라 풀이하는 것이다. 또는 초점과 연관시켜 ‘새(억새 따위)가 우거진 고개’라 풀이하고도 있다. 여기서의 ‘새’는 곧 산과 들에서 자라는 띠나 억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새재에 대하여 이미 고려시대부터 ‘草岾’이라 불러왔고,

또 새재 골짜기 들머리의 마을 이름을 조선시대에도 초곡방(草谷坊)으로 칭했고, 현재까지도 조령 제1관문 위쪽을 상초리(上草里), 아래쪽을 하초리(下草里)라 불러온 것을 보면, 이곳 조령 일원에 새(억새 따위)가 많아 뜻옮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신령과 연관시켜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영로가 개통된 죽령·계립령이 옛 고개, 묵은 고개임에 대하여 이 고개는 새로 난 고개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신경준은 일찍이 이 표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조령…신라 아달라왕이 이 영로를 새로 열었기 때문에 신령이라 했다. 방언에 조(鳥)의 해석(훈)을 새[新]라 하므로 鳥嶺이라 했다. 또 방언에 초(草)의 해석이 新[새]의 해석과 동일하므로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조에 의하면, 계립령은 아달라왕 3년에, 죽령은 5년에 개통됐다는 기사가 보이나, 같은 왕대이든, 다른 왕대이든 신라시대에 조령이 개설됐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신경준의 새재설(신령설)을 다 동의할 수는 없으나, 계립령·죽령의 옛 길에 대하여 새로 개설한 영로라는 의미로 새재[新嶺]라 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를 후대에 ‘鳥嶺’으로 표기하게 된 것은 주로 시인·묵객과 같은 표기자의 주관에 따라 좀더 우아하게 소리옮김한 표기로 볼 수 있다. 위의 설들은 대체로 다 일리 있는 말들이라 어느 설이 정설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새재의 역사유적과 전설

백두대간 상의 새재 고갯마루에는 조령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조령관 남쪽으로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에 형성된 계곡의 상초리 위쪽에 조령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상초리 아래쪽에 조령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이 위치하고 있다. 1966년 이들 3관문과 부속성벽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됐고, 1981년에는 이 일대가 모두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조령관의 성을 고개에 있는 성이라 하여 영성(嶺城), 조곡관의 성을 중성(中城), 주흘관의 성을 초곡성(草谷城)이라 했는데, 여지도서 문경조의 문경현지도에도 초곡성·중성의 이름이 보인다. 초곡성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조선 숙종 34년(1708)에 설관했다. 중성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 수문장 신충원(申忠元)이 단독으로 축성한 것이라 한다. 영성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1708)에 중창한 것이라 한다.

주흘관 안쪽에는 근래에 건립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KBS 사극세트장이 있다. 근래에 왕건 드라마, 무인시대 등의 사극을 촬영한 곳으로 보통 왕건세트장이라 일컫는다. 조선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재의 본명으로 정착되다시피한 조령이란 한자말 표기에 대해서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옛 흥녕사) 경내에 있는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에, ‘대순 2년(891·진성 5년)에 대사(징효대사 절중·826-900)께서 상주 남쪽으로 피난해 잠시 조령에 머물렀다(大順二年, 師避地於尙州之南, 暫栖鳥嶺)’라 한 기록에 처음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기록이 현 문경새재에 대한 최초의 한자말 표기라 보나, 징효대사가 상주 남쪽으로 피난한 후 조령에 잠시 머물렀다면 현 문경새재는 상주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령은 현 문경새재가 아니고, 상주 남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에 잠시 조령에 머무른 것이라면 여기서의 조령은 현 문경새재라 볼 수 있으나 문장 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기록 이외의 조선시대 이전 기록에서는 조령이란 표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의 고려사 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 문경조 기록에는 모두 새재를 초점이라 기록하고 있고, 조령 표기는 동국여지승람 이후부터의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새재에는 많은 일화와 전설이 전한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 장군과 병자호란 때의 명신 최명길과 관련한 전설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대대적인 왜군이 서울을 향해 북상해 올 때 조정에서는 신립 장군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북상하는 왜군을 막으라고 충주로 내려 보냈다.

신립은 이 때 김여물 등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펴본 후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준한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하는 김여물 등 여러 사람의 견해를 뿌리치고 충주 남한강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두로 하여 대대적으로 공격해오는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신립은 김여물 등과 함께 남한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에 대해서는 신립을 짝사랑하다가 자살한, 새재 골짜기에 살던 처녀 귀신이 원한을 품고서 꿈에 나타나 남한강변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라고 일러준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가 잘못된 결과라는 전설이 전한다.

이에 반해 인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최명길은 새재 제1관문 옆 산기슭에 모셔져 있는 성황당 여신이 그를 보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며 훗날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종묘사직과 백성을 살피는 길은 화의밖에 없다는 여신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여 전란의 피해를 줄이고 더욱 훌륭한 명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한다.

월항삼봉은 봉수대가 있던 탄항산

조령에서 북쪽 마폐봉을 경유하여 동쪽 백두대간을 따라가면 현재 월항삼봉(月項三峯·857m)이라 일컫는 탄항산(炭項山)이 자리하고 있다. 탄항산은 ‘項’자가 유사자형인 ‘頂(정)’자로도 잘못 표기되어 동국여지승람 문경조 등에는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이보다 앞서 이미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에 탄항산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도 이를 탄항산으로 바로잡아 놓아 현재까지도 탄항산이란 산 이름이 그대로 전하여 온다.

▲ 새재계곡 KBS 사극세트장의 가을.
다만 현대에 이르러 발간된 각종 지도 상에 월항 마을 부근의 세 봉우리라는 의미로 누군가가 월항삼봉으로 잘못 표기한 이래 이 산이름으로 잘못 왜곡되어 많이 불리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탄항산의 탄항(炭項)은 아마도 변방·국경 등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자리 ‘수(戍)’자와 지키기에 알맞은 ‘목’이라는 의미의 ‘항(項)’ 자가 합성되어 ‘수항’이라 일컫던 것이 숫항→숯항으로 전음되어 숯 탄(炭) 자의 훈을 빌리어 뜻옮김하여 불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 걸맞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이 산정에 봉수대가 시설되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살필 수 있다.

월항삼봉의 월항(月項)도 여지도서 문경조의 조령산성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음과 훈이 혼용된 달항(達項)으로 불리었음을 살 필 수 있다. 달항은 다시 달목→달매기로 전음되어 속칭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뜻옮김하여 월항이라고도 칭하게 된 것이다.

이의 본래 이름 달항은 아마도 ‘큰 목’이라는 의미에서 일컫던 큰 고개의 목이 되는 곳, 곧 평천재(월항재) 부근 959m 안부에서 한 줄기는 백두대간 줄기로서 서쪽으로 뻗어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주흘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크고 중요한 산줄기의 목을 지칭하던 땅이름으로 추측된다.

계립령과 미륵대원 하늘재

조령 일대 여러 산봉의 주산인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으로서, 포암산이나 문경의 평천리 쪽에서 조망해보면 주봉(主峯·1,075m)에서 영봉(靈峯·1,106m)에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를 이룬 큰 산이 글자 그대로 제산의 군주처럼 우뚝 솟아 있다.

주봉 서쪽 중복에는 신라 문성왕 때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했다는 혜국사(惠國寺)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에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와 머물렀다는 곳으로 이후 국은을 입은 절이라 하여 본래의 법흥사를 혜국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탄항산에서 북동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가면 고대사에서 매우 주목시되는 하늘재[大院嶺·519m]와 포암산(962m)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재는 고대시절에는 계립령(鷄立嶺)으로, 또는 마목현(麻木峴)·마골점(麻骨岾) 등으로 불린 고개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찍이 아달라왕 3년(156)에 개설됐다. 계립령의 계립(鷄立)은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일컫는 우리말 겨릅을 소리옮김한 것이다. 겨릅은 곧 겨릅대의 준말이다. 마목(麻木)과 마골(麻骨)은 이 겨릅, 곧 삼대를 뜻옮김한 한자말이다.

필자는 한 때 이곳 하늘재길 일원에 혹시 삼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지나 않나 하고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러다가 수년전에 대미산을 등산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문경 갈평리를 지나 여우목고개 방면으로 가다가 하늘재 북쪽의 포암산을 조망하게 되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유래가 바로 저 산의 모습에서 비롯됐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 산은 현재 속칭 베바우산(베바위산)이라 일컫고, 이를 한자말로 뜻옮김하여 포암산이라 일컫고 있다. 이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하늘을 가득 채우고 우뚝 솟은 포암산이 마치 베[布]를 짜서 펼쳐 놓은 것 같이 암벽이 펼쳐져 있어 그러한 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는 이 산의 모습이 우뚝 솟은 산의 하얀 암벽이 펼쳐져 있는 것이 마치 껍질을 벗긴 삼대가 죽 펼쳐져 있는 듯이 보였다. 최근에 포암산을 등산하기 위해 갈평리를 지나 관음리로 접어들어 하늘재를 오르면서 포암 마을 근처 뒤편에 우뚝 솟을 포암산을 가까이서 바라보자 더욱더 그러한 모습이 실감나게 연상됐다. 바로 포암산이 계립산이요, 마골산이었고, 그 아래에 위치한 고개가 계립령이요, 마골점이었던 것이다.

옛날 관음사가 있었던 문경 관음리쪽에서 하늘재를 넘어 미륵사지가 있는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재는 곧 현세의 관음세계에서 내세의 미륵세계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하늘재 중복에 있는 미륵사지는 나말여초인 10세기 초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사원인 미륵대원터다. 전설상으로는 신라 말의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머물며 조성한 사원이라 전해진다.

▲ 사적지로 지정된 조령 제1관문.

미륵대원은 1978년 충청북도에서 이곳 절터를 발굴했을 때 발견된 ‘대원사(大院寺)’라 쓴 명문기와와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 ‘충주 대원사(忠州 大院寺)’라 언급하고 있는 내용 등에 의하면 절 이름이 대원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발굴 당시에 ‘미륵당(彌勒堂)’이라 쓴 기와 명문이 발견되고, 미륵당이라 일컫던 석굴금당에 높이 10.6m의 거대한 미륵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있었던 점과, 삼국유사 왕력 아달라왕조에 ‘[계]립현([鷄]立峴)은 지금의 미륵대원 동령(東嶺)이 이 고개이다’라 언급한 대목에 의하면, 대원사는 일명 ‘미륵대원’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곳 미륵대원터에는 현재 보물 제96호로 지정된 미륵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로 지정된 5층석탑, 그리고 크기가 동양 최대로 일컬어지는 돌거북(귀부)과 절터 앞을 가르고 흐르는 개울 건너 거북바위라 불리는 암벽에 올려져 있는 온달장군의 공깃돌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온달장군 공깃돌은 지름 1m 가량의 둥근 돌로, 고구려 영양왕 때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하고자 이 일대에 와 머물 때 군사들에게 힘자랑하기 위해 공깃돌 같이 가지고 놀던 돌이라 전하여 온다.

현재 미륵대원터 동쪽 고개를 하늘재, 서쪽의 고개를 지릅재라 일컫고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하나의 고개 이름으로 통칭해 계립현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초에 이곳 중간 지점의 분지에 미륵대원(대원사)이 조성되면서 이후 대원사 동쪽의 고개를 대원사고개라는 뜻으로 약칭하여 대원령, 서쪽 고개를 옛 이름 그대로 계립현, 또는 계립령으로 일컫게 되면서 후대에 두 고개 이름으로 분리되어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세종실록지리지 연풍조에 의하면, 마골점 곧 계립령이 동쪽으로 문경 탄항에 응한다고 한 것을 보면 여기서의 마골점은 곧 지금의 지릅재를 지칭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재는 탄항 동쪽에 위치하므로 하늘재는 서쪽으로 문경 탄항에 응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오만분지일지도에서의 하늘재의 높이를 보면 한원령(限院嶺·하늘재) 519m, 계립치(鷄立峙·지릅재) 507m, 미륵대원 근처를 401m로 표기한 것을 볼 때 이들 세 곳의 높이는 고대에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늘재는 고려사 권24의 고종 42년조 기사 등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후로는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이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두 고개 이름이 분리된 것을 모르고 때로는 대원령을 고대시절의 고개 이름과 같이 계립령으로 혼동하여 보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하늘재 동쪽 관음리에 있었던 관음원의 위치에 대하여, 여지승람 문경조에 ‘관음원 : 계립령 아래에 있다’고 한 경우다.

하늘재는 대원령이 훈과 음이 혼용되어 한원령→한월령→한월재→하늘재로 전음되어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지리지에서는 대체로 대원령을 계립령으로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때로는 소리 나는 그대로 주관적으로 기록하여 19세기의 정혼(鄭混)은 진재집(進齋集) 한훤관방방략(寒喧關防方略)에 한훤령(寒喧嶺)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대원(大院)의 원(院)을 훈독하여 에운담 곧 ‘울’로 읽으면 ‘한울’로 읽을 수도 있으므로 한울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寒喧嶺·限院嶺등의 표기에 의하면, 하늘재는 전자와 같이 한원재의 전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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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식생

지형 경관이 그 지역 식생을 결정한다
가야산은분취·꼬리진달래·가는잎향유 자생지

▲ 백두대간 조령산 구간에 무리를 지어 자라는 개쑥부쟁이가 꽃을 활짝 피웠다. 바위지대가 발달한 이 구간의 지형적 특징은 이곳에 자라고 있는 식물의 종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화령(548m)에서 조령 제3관문(643m)까지의 백두대간 조령산 구간은 지형이 험준하다. 특히 조령산(1,026m) 정상과 조령 제3관문 사이에 있는 신선암봉(937m) 일대는 등산 초보자가 접근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험하다.

겨울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보통사람들이 주파하기에 불가능한 구간이고, 기상 여건이 좋은 때라도 정상에서 제3관문까지 가는 데 5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도상거리 5km 남짓한 거리임에도 소요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그만큼 오르내림이 심하고 험한 구간이 많다는 증거다. 백두대간 개념이 알려지고, 종주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나마 밧줄을 매단 길이 났을 정도이지 이전에는 등산객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이처럼 험한 지형이 식물 분포에도 영향을 미칠까? 험한 지형이기는 하지만 이 구간의 고도가 1,000m 이하이므로 고산식물이 많이 분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도가 낮더라도 특별히 험한 지형이므로 어떤 특별한 식물들이 살고 있지는 않을까? 사람이 접근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이곳에는 어떤 식물들이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고, 가을 맞을 준비를 하는 조령산을 찾았다.

접근 어려운 험한 능선의 꽃을 찾아서

가야산은분취 중부 지방의 높은 산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조령산 능선에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이화령을 출발점으로 잡았다. 안동, 문경, 상주 일대에서 충주, 제천, 서울을 이어주던 이곳은 이화령터널이 새로 뚫려 3번 국도가 그곳으로 옮겨 지나게 된 이후에는 한적한 고갯길이 됐다.

조령산을 향해 출발하자 예의 그 소나무숲이 나타났다. 소나무숲에는 굴참나무, 신갈나무가 간간이 섞여 자라고, 숲 바닥에서는 물봉선, 오리방풀, 꽃며느리밥풀, 참산부추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이가 많이 나는 절기이고 보니, 꽃며느리밥풀이 자라는 소나무숲이 범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송이꾼들에게는 ‘송이풀’(정확히 송이풀이라고 불러야 하는 진짜 송이풀도 있는데, 며느리밥풀 종류와는 아주 다른 것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송이버섯이 나는 소나무숲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식물이 며느리밥풀 종류들이다.

‘마사토에 며느리밥풀’이 자라는 소나무숲이라야 송이버섯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곳이면 모두 송이버섯이 나는 것은 아니므로 ‘마사토에 며느리밥풀’은 송이버섯이 나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구절초 전국의 산과 들에 비교적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쑥부쟁이 종류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을꽃이다.
마사토에 꽃며느리밥풀이 자라고 있었고, 송이냄새도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자기만 안다는 송이밭을 아침 일찍 둘러보고 오는 송이꾼도 만났다. 하지만, 그 귀한 송이가 어디 아무 눈에나 띄겠는가. 냄새만 맡고 문경이나 괴산이 유명한 송이버섯 산지라는 것을 실감만할 따름이다.

이화령에서 조령산 정상 아래에 있는 조령샘까지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동쪽 사면을 따라서 대부분의 길이 나 있다. 대간종주가 붐을 이루면서 능선을 따라서도 길이 새로 나기는 했지만, 이 사면길이 예로부터 자연스레 난 등산로라 할 수 있다.

사면의 등산로는 골을 이룬 곳에 작은 돌들이 쌓인 퇴석지대를 여러 번 건너갔다. 이곳에 자라는 식물은 소나무숲이나 다른 활엽수림 바닥에서 자라는 풀들과는 종류가 조금 달랐다. 나비나물, 신감채, 참꿩의다리, 나도송이풀 등이 자라고 있는 활엽수림 바닥과는 달리 이들 퇴석지대에는 바랭이, 까치고들빼기, 강아지풀, 닭의장풀, 산물통이, 눈괴불주머니, 거북꼬리, 담쟁이덩굴 등이 자라고 있었다.

가는잎향유 속리산, 월악산, 주흘산 등지에 매우 드물게 자라는 한해살이풀로, 조령산 능선의 바위지대에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꽃은 10월 중순에 핀다.
숲속에서 덩굴지어 자라고 있는 한 식물이 눈길을 끌었는데, 꼭두서니과의 계요등이었다. 주로 남부지방에 자라는 식물인데, 이곳까지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 백두대간 조령산 구간의 동쪽, 속리산 구간의 남쪽 땅인 문경 일대는 몇몇 남쪽 식물들의 분포에 있어서 북방한계선이 되고 있는데, 계요등도 그런 식물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문경이 북방한계선이 되는 대표적인 식물로는 춘란(보춘화)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대흥란이 발견됐는데, 이 역시 이곳이 북방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춘란이나 대흥란 모두 동해안을 따라서는 동해나 삼척까지 진출해 자라지만, 한반도 내륙 중앙부에서는 문경땅까지만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들 식물의 분포를 경계 짓는 데에 백두대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두대간 능선쪽으로는 소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계곡쪽에는 신갈나무, 굴참나무를 비롯해서 물푸레나무, 쪽동백나무, 층층나무, 마가목, 생강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다. 조림한 잣나무가 숲을 이룬 곳도 더러 있었다.

까치고들빼기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로 시들 때 고약한 냄새가 난다. 조령산 능선에 큰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잘록한 능선 안부에서 대간 길로 올라서자 어린 물푸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는 무리지어 자라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는 나무이므로, 자연적인 것이라면 재미있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능선 잘록이에는 환삼덩굴과 개망초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어 사람들이 백두대간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대간 위의 헬기장에도 짚신나물, 쇠서나물, 억새, 개쑥부쟁이 등과 함께 개망초, 나도송이풀 등이 자라고 있어 사람에 의해 귀화식물과 저지대 자생식물들이 유입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한동안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조령샘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났고, 대간에서 벗어나서 잠깐 올라서자 조령샘이다. 해발 870m에 있는 이 샘은 커다란 버드나무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는 잣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는데, 인공적으로 심은 것임을 곧 알 수 있었다. 조령샘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하자마자 꽤 넓은 잣나무 조림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에 가까워지면서 어수리, 동자꽃, 속단 등이 눈에 띄었고, 물봉선은 밭을 이루었다 할 정도로 많았다. 늙은 신갈나무 군락이 잠깐 나타나서 이전에 좋았던 숲의 모습을 짐작케 하기도 했다.

대간 마루금까리 올라온 미국쑥부쟁이

미국쑥부쟁이 북미 원산의 여러해살이 귀화식물로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부터 급속도로 퍼졌다. 조령산 구간의 헬기장에 침입하여 살고 있다.
대간에 올라선 후 조금 더 가자 전망이 좋은 헬기장이다. 속리산부터 이곳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물론이고, 주흘산과 월악산 일대가 가늠됐다. 훌륭한 전망에 한껏 고조되었던 기분은 이곳 식물로 관심을 돌리자 씁쓸하게 변하고 말았다. 참취, 억새, 큰까치수염 등과 함께 자라고 있는 쑥, 강아지풀, 달맞이꽃, 산딸기나무 등 사람들에 의해 이곳 높은 능선까지 올라온 식물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쪽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 미국쑥부쟁이를 보고는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 때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주로 1980년대 이후에 경기도 포천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한 이 식물이 백두대간 능선까지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 생태계의 현주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나도송이풀 전국의 양지바른 들판에 비교적 흔하게 자라는 한해살이풀이다. 조령산 구간에서는 능선의 헬기장 등에서 발견된다.
산비장이, 수리취, 바디나물의 꽃을 보며 어린 잣나무들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조림지를 지나자 곧 조령산 정상이다. 정상을 지나자마자 길이 험악해지기 시작한다.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이다. 이화령에서 정상까지와는 산세가 완전히 달라지며 골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기 시작한다.

식물도 달라졌다. 잣나무 따위를 심은 조림지는 아예 없어졌고, 소나무숲도 아니다. 신갈나무가 우점하는 숲에 물푸레나무, 당단풍, 함박꽃나무, 층층나무, 진달래 등이 섞여 자라고 있다. 소나무는 숲을 이룰 정도로 많지 않고 바위지대에 간간이 자라고 있는데, 수령이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고, 수형이 아름답다. 몇몇 곳에서는 자생하는 잣나무도 관찰됐다.

풀꽃 종류들도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바위지대에서만 자라는 자주꿩의다리의 늦은 꽃이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개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화령에서 정상까지 별로 보이지 않던 개쑥부쟁이와 구절초는 정상부터 조령 제3관문까지 이곳저곳에 큰 무리를 지어 가을꽃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맘때쯤 대간의 이 구간을 종주한 이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정령엉겅퀴 강원도 이남의 산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조령산 능선에서는 몇몇 개체가 발견됐다.
구절초와 개쑥부쟁이 외에도 죽대, 오리방풀, 미역취, 바위떡풀이 많았다. 지난번 대야산 취재에서 발견해 최남단 자생지라고 추정한 왜솜다리도 눈에 띄었다. 눈길을 끄는 식물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가야산은분취였다. 가야산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 특산식물로서 가야산뿐만 아니라 덕유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분포하는 식물이다. 은분취에 비해서 잎이 더 얇고, 보통 키가 더 큰 게 특징이다. 한두 포기가 아니라 아주 많은 포기가 바위지대에서 자라고 있었고, 꽃이 한창이었다.

바위봉우리를 넘고 잘록이에 도착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중에 꼬리진달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야산 정상 부근에서 몇 그루 만났던 희귀식물이 이곳에도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웃한 주흘산이나 월악산 일대에서 많은 개체를 만난 적이 있어서 백두대간의 이 부근부터는 나타나리라 기대했던 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대야산 이후 육산의 면모를 지닌 이화령~조령산 구간에서는 볼 수 없었고, 조령산 정상 이후에 골산다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시 나타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지형이 그곳에 자라는 식물을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또 다른 식물이 하나 나타났다. 가는잎향유라는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주흘산, 속리산, 월악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쪽에 고향을 둔 북방계식물로 평양 등 북한에도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한의 고립된 분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매우 한정된 지역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 있는 주흘산, 속리산, 월악산의 것들은 주능선이 아니라 7~8부 능선 또는 저지대 바위 위에서 자라는 것들이었는데, 이곳 백두대간 조령산 구간에서는 바로 백두대간 마루금에 자라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남한의 백두대간에서는 아마도 이곳 조령산 구간이 유일한 자생지라고 여겨진다.

눈괴불주머니 전국의 산과 들 습기가 많은 곳에 흔하게 자라는 두해살이풀이다. 봄이 꽃이 피는 산괴불주머니와는 달리 늦여름부터 가을에 꽃이 핀다.
이곳의 가는잎향유는 신선암봉 전과 후 두 곳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개체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보통 무리를 지어 자라는 것과는 달리 몇몇 개체들이 빈약하게 모여 자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해살이풀이기 때문에 태풍이나 채취 등으로 씨앗을 남기지 못하게 되면 멸종 위험이 크다는 것을 감안할 때, 백두대간의 가는잎향유는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 할 것이다.

밧줄을 잡고 바위지대 오르내리기를 여러 번 한 끝에 신선암봉에 도착했다. 문경새재쪽 전망이 시원스레 터지고, 구불구불한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처럼 서있다. 바위틈에 흙이 쌓인 곳에는 바위채송화며 난장이바위솔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서 제3관문까지는 아직도 2시간 이상 더 가야 한다.

드물게 보이던 꼬리진달래는 이제 바위지대를 따라 지천이다. 이 식물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잠시 바위봉우리가 흙 속으로 모습을 숨겨 활엽수가 숲을 이룬 곳이고, 다시 나타나면 바위지대가 시작되었다. 바위지대에서 넘쳐나는 개쑥부쟁이와 구절초는 바위지대뿐만 아니라 활엽수 숲속에서도 무리를 지어 자라는 광경이 번번이 발견됐다. 육체적으로 고된 산행에서 흐뭇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일이 되고도 남았다.

조령 제3관문이 가까워지면서 부드러운 능선에 소나무가 섞인 신갈나무숲이 가끔씩 나타났고, 이곳에는 철쭉나무, 진달래, 생강나무, 노린재나무, 미역줄나무, 쇠물푸레 같은 떨기나무와 함께 큰참나물, 정령엉겅퀴, 지리고들빼기, 조밥나물 등의 풀꽃이 자라고 있었다.

생물다양성 감소시키는 백두대간의 간벌

큰참나물 전국의 산에 비교적 드물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참나물에 비해서 잎이 두껍고 자주색 꽃이 피므로 구분된다.
깃대봉 갈림길 표지판에 이르자 길고 험했던 백두대간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20여 분이면 조령 제3관문이다. 1km쯤 되는 이 구간에서 숲은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곧게 잘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 떨기나무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군데군데 나무토막들이 쌓여 있다. 주변에서 자라던 소위 잡목들을 제거하는 간벌을 한 지역이다.

이런 백두대간의 간벌은 이화령에서 조령산을 향해 출발하는 곳에서도 목격됐다. 이화령에서 조령 제3관문까지 조령산 구간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 형국인 셈인데, 이것은 도로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화령의 옛 3번 국도, 조령 제3관문의 새재길로 인해 간벌에 필요한 인원과 장비가 투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벌이나 조림이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킨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한 국가의 생태계, 나아가 지구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녹지축이자 생물다양성의 터전인 백두대간에서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키는 간벌과 조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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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지명

이화령은 ‘이우릿재’의 차음
늘어진 산줄기의 뜻인 ‘니부리’가 ‘이우리’로 변해

국어 사전에 보면 ‘부리’란 낱말을 ‘①새나 짐승의 주둥이. 구문(口吻) ②물건의 끝이 뾰족한 부분 ③병이나 자루 따위의, 한 끝의 열린 부분’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 따라서, 땅 위에 내민 묻힌 돌멩이의 뾰족한 부분은 돌부리가 되고, 봉우리의 꼭대기는 멧부리, 또는 산부리가 된다.

담뱃대의 입에 무는 부분은 물부리가 되며, 바짓가랑이의 끝부분은 바짓부리, 옷소매의 아가리는 소맷부리, 총구멍 있는 총의 앞부분은 총부리, 통나무의 위쪽 끄트머리 부분은 끝동부리가 된다. 매의 주둥이는 매부리가 되어 얼굴에서 콧부리가 아래쪽으로 많이 쳐진 코를 매부리코라 한다.

부리는 땅이름에선 툭 불거진 곳 의미

땅이름에서도 부리가 들어간 말을 많이 볼 수 있다.

부리 : 거제 사등면 청곡리, 합천 야로면 정대리

▲ 하늘에서 본 이화령. 이화령은 이우릿재에서 온 한자 표기로, 늘어진 산줄기의 뜻인 니부리가 이우리로 변했다.

부리골-부릿골 : 양평 청운면 여물리(골짜기), 거창 고제면 농산리(〃), 달성 구지면 대암리(마을),

부리재-부리치-부릿재-부리고개-부릿등 : 파주 천현면 동문리(고개), 경주 강동면 유금리(〃), 경산 하양읍 사기동(〃), 곡성 삼기면 근촌리(마을), 여주 대신면 보통리(고개), 울산 중구 고사동(〃), 경산 와촌면 계전리(등성이)

매부리 : 무안 현경면 외반리(산), 제주 서귀포 강정동(〃)

부릿재먼딩이 : 울산 중구 고사동(산)

부리팃골[火峴谷] : 경주 강동면 유금리(골짜기)

부리끝 : 파주 교하읍 신촌리(들)

부리너머 : 여주 대신면 보통리(들)

그밖에 한부리(화성 우정면 한각리. 閑角), 영부리(인천 중구 덕교동), 샛부리(인천 중구 운서동), 막부리(서산 원북면 동해리), 안부리(남제주 남원읍 위미리), 부릿담(원주 소초면 교항리) 등이 있다.

충남 금산에는 지금도 부리면(富利面)이란 면이 있는데, 옛날 부리현(富利縣)의 부리라는 이름을 원형 그대로 전하고 있다. 지금 나주의 남평읍, 산포면, 금천면, 봉황면, 다도면 일대는 백제시대 미동부리(未冬夫里)다. 이 지명은 ‘밋부리’로 유추되고 있다. 또, 지금의 정읍 고부면 일대와 부안군, 고창군의 일부는 백제시대에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부군(古阜郡)으로 고친 것인데, 역시 아직도 면이름으로 남아 있다.

위의 여러 부리 관련 지명들을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대개가 산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형이 툭 불거진 지역에 부리라는 이름이 많다. 일반 용어에서 튀어나온 곳(부분)의 의미인 부리는 땅이름에서도 그 뜻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화령 고갯길은 일제 때 열어

경북 문경읍과 충북 괴산 연풍면 경계에 있는 고개가 높이 548m의 이화령(梨花嶺)이다. 이 고개는 조령산(鳥嶺山)과 갈미봉(葛味峰)이 맞닿는 안부에 위치하는데, 고개 남동부에는 조령천(鳥嶺川)이, 북서부에는 쌍천(雙川)의 지류가 곡류한다. 백두대간의 이화령 부분에서도 물줄기가 각각 낙동강권, 한강권으로 나뉘어 흐르는 것이다.

조령산은 남서부로 조금 이화령에 이르러 남동쪽으로 산세를 이루고, 갈미봉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기복이 적은 이들 사면을 따라 이화령 고갯길이 꾸불꾸불 이어져 있다.

이화령은 조선시대까지엔 지금과 같은 그리 큰 고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길줄기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고, 이름도 똑같지는 않았다. 옛날 충청도 연풍(延豊)에서 경상도 문경으로 넘는 고갯길이었으나, 그 북쪽의 조령(鳥嶺)이 워낙 잘 알려져서 이용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주 교통로는 새재라고 불리던 조령이었는데, 산세가 험준하여 일제 강점기 때 이 고개 남쪽에 이화령을 만들고 3번 국도를 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조령은 괴산 연풍면의 고사 마을과 문경읍의 상초리를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될 뿐 차량은 물론 인적이 매우 드물게 되었다. 현재 이화령은 그 밑에 이화령터널을 두고 있는데, 문경 일대에서 생산되는 특용작물을 운반하는 수송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화령 북동쪽에는 문경새재 도립공원과 월악산 국립공원이 있고, 남서쪽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이 있다.

이화령은 배꽃과는 관계없어

이화령(梨花嶺)-. 우선 그 이름을 들으면 배꽃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고개가 배꽃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 고개에 배꽃이 많아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배꽃과 관련한 어떤 전설이라도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땅이름에선 화(花) 자가 들어간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갯벌(갯불) : 부안의 계화도(界火島)

배고지(배곶) : 서울 강남구 삼성동(梨花洞), 인천 계양구 이화동(〃), 화성 우정면 이화리(梨花里)

한곶 : 고양 일산서구 대화동(大化洞←大花洞)

곶가름 : 북제주 한경면 금등리 화동(花洞)

곶나리 : 남양주 별내면 화접리(花蝶里)

곶내 : 경주 건천읍 화천리(花川里)

곶마-곶매-곶뫼 : 경주 천북면 화산리(花山里), 청양 적곡면 화산리(〃), 고창 심원면 연화리의 화산(花山)

곶만이왓 : 북제주 애월읍 어음리의 화만전(花滿田)

곶이-곶이골-고지-고줏골-고지개-고재 : 해남 마산면 화내리(花內里), 포항 북구 청하면 필화리의 화지(花枝), 영주 장수면 화기리(花岐里), 나주 산포면 화지리(花池里), 상주 상주읍 화개리(花開里), 진천 덕산면 화상리의 곶재 →화성(花城), 천안 구성동의 고재(花峙)

고잔(곶안) : 남해 고현면 갈화리의 고잔, 당진 송산면 무수리의 고잔 →화내(花內)

곶밭 : 고양 덕양구 화전동(花田洞)

▲ 이화령 고갯마루. 이화령의 토박이 땅이름은 이우릿재다. 지금도 이 고개 동쪽 마을인 문경읍 각서리의 새터(신기) 마을의 촌로들은 이 고개가 넓혀지기 전의 고개 이름 이우릿재를 떠올리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지역에서 콧마루처럼 불쑥 튀어나간 곳을 뜻하거나 단순히 장소를 뜻하는 곶(곳)은 한자로 화(花)로 많이 취해져 있다. 이화령도 화(花) 자가 취해진 이름이지만, 이는 꽃과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화령의 토박이 땅이름은 이우릿재다. 지금도 이 고개 동쪽 마을인 문경읍 각서리의 새터(신기) 마을의 촌로들은 이 고개가 넓혀지기 전의 고개 이름 이우릿재를 떠올리고 있다. 그 너머 연풍쪽에서도 이와 거의 같게 이유릿재라고 불러오고 있다. 한글학회에서 낸 <지명총람>에는 이 고개 이름이 이우릿재, 이류릿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 요광원 서북쪽 이우릿재 밑에 있는 골짜기인 이우릿골은 한자로 이화이리(伊火伊里)로 적혀 온다.

이 이우릿재가 바로 대동여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기요람 등에 나타나는 이화현(伊火峴)으로, 지금의 이화령(梨花嶺)이다. 여지승람 연풍현(延豊縣) 조에는 이화현이 현(縣)의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고 했다.

뉘부리가 이화령으로 되기까지

이우릿재의 이우리는 원래 이부리의 변음인 듯하다. 그리고, 이 이부리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니부리(뉘부리)나 느부리(는부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이우리를 느부리까지로 보는 데는 다소 조심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한자 지명에서의 이(伊)가 니 또는 느의 음차로 많이 씌어 왔다는 사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학자들이 옛 지명에서 닛재(늦재)로 유추하는 이벌지(伊伐支)나 니즌매(느즌매)로 유추하는 이진매(伊珍買)가 그 예에 해당한다. 이벌지와 이진매는 각각 지금의 영주 순흥면 일대와 황해도 이천군(伊川郡) 일대이다. 닛재는 이어진(連) 산, 니즌매는 (줄기가)늘어진 산의 뜻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전국에는 이와 비슷한 땅이름들이 많다.

이붓재 : 광주 광주읍 목현리

이불 : 밀양 청도면 두곡리, 서천 서천읍 화금리, 나주 문평면 옥당리

니분, 너분등 : 청도 매전면 지전리

너불게 : 고양 덕양구 원당동

너불등 : 합천 삼가면 어전리

너불목 : 하동 악양면 봉대리, 영월 주천면 금마리

너불머리 : 김천 구성면 금평리

이우리에서의 우리는 부리(불이)가 그 뿌리였을 것으로 본다. 이는 이러한 이름들이 뒤에 한자로 화(火)로 많이 취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에는 이화령의 원이름인 이우리와 똑같은 땅이름이 있는데, 한자로 이화어(伊火於)라고 쓴다. 또, 밀양의 이불매(이울매)는 화산(火山)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 국어의 변화 과정을 보면, ㅂ(p, b) 음이 한글의 o을 취하게 되는 모음이나 영어의 w 발음식으로 옮겨간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옛말의 고블이 고을로 된 것이라든지, 지금의 서울이 셔블에서 변해온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또, 지금의 말 중에 술(酒), 시골(村), 새우(鰕) 등의 말이 수블, 스그불, 사? 등의 옛말에서 변해온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쉽다나 곱다 같은 말이 그 어근 뒤에 부사형 어미 ~고를 취하면 쉽고나 곱고가 되지만, 서술형 어미 ~ㄴ을 취하면 쉬운이나 고운 식으로 ㅂ음이 떨어져 나간다. 또, 형용사가 명사로 변한 미움(밉다>밉음>미움), 도움(돕다>돕음>도움) 등의 말을 통해서도 ㅂ 탈락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부리가 이우리로 변했을 수도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부리는 아마도 그 원말이 니불(니부리)일 것이다. 니는 느와 서로 넘나들어 씌어온 말이므로 니브리는 느브리일 수도 있으며, 이것은 바로 늘어진 부리(山), 즉 산줄기가 길게 늘어져 있음을 뜻하는 이름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올 수 있게 한다.

느+불(부리)=느부리(니부리)>이부리>이우리

여기에서 느(니, 이)가 이(伊)로, 부리(불)가 화(火)로 취해져 한자로 이화(伊火)가 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부리를 불이(불)로 하여 화(火)로 취하는 것은 지명 옮김의 일반적인 예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풍과 문경 사이의 이부릿재는 니부릿재(느부릿재) 또는 이와 근사한 원이름을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했을 것으로 본다. 이 이화현은 일제가 고개를 크게 새로 내면서 이화령(梨花嶺)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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