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 문헌고찰

청화산 산수 사랑해 스스로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불러
이중환, “빼어난 기운이 나타나서 가리운 것이 없는 복지(福地)”

▲ 선유동계곡.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은 뒤에 내외(內外) 선유동(仙遊洞)을 두고, 앞에는 ?E유동(龍遊洞)에 임하여 있으며, 앞뒤 편의 수석(水石)이 기절(奇絶)함은 속리산보다 휼륭하다` 고 했다.

속리산(俗離山?1057.7m) 이북 백두대간 상의 늘재에서 이화령(梨花嶺?529m)에 이르는 구간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명산 대야산(大耶山?930.7m)을 비롯해 그 이남에 조항산(鳥項山?951.2m)과 청화산(靑華山?984m), 그 이북에 장성봉(長城峯?915,3m), 구왕봉(九王峯?877m), 희양산(曦陽山?998m), 백화산(白華山?1063.5m) 등 여러 산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청화산, 대야산, 희양산은 명산의 반열에 들 만한, 훌륭한 명산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산들이다. 이들 산군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칠성면, 청천면 지역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 농암면과 상주시 화북면 경계지역을 뻗어가고 있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고 있다.

선유동과 용유동 명승을 앞뒤에 둔 청화산

늘재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오르면 곧 청화산에 이른다. 속리산 동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늘재를 통하여 이어져 있는 속리산의 지산(支山)과 같은 산이다. 이 산은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와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문경조에 의하면, 본래는 17세기 무렵까지는 대체로 화산(華山)으로 불리어졌다.

이후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에 청화산으로 일컫고 있고, 대동지지 문경조에 화산의 일명으로서 청화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18세기 무렵부터는 청화산으로도 불리어온 것으로 보인다.

▲ 희양산 정상.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 일관되게 희양산으로 불리어 왔다.
화산의 華 자는 대체로 연화(蓮華)의 준말로 많이 쓰이는 글자다. 그렇다면 華山 또는 靑華山이란 산 이름은 산의 모습을 연꽃, 또는 푸른 연꽃 같은 형상의 수려한 산이란 의미로 지칭한 이름일 것이다. 청화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나간 곳에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한 연엽산(蓮葉山)이란 이름이 보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산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청화산은 뒤에 내외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하여 있다. 앞뒤 편의 수석이 기절(奇絶)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큰 것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준한 곳이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이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이 나타나서 가리운 것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

이중환은 일찍이 이러한 청화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그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하였다.

청화산의 연꽃 같은 여러 봉우리들 사이 한 복판, 곧 그 연심(蓮心)에 자리한 절이 원적암(圓寂庵)이다. 일설에는 원적암터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모란형(牡丹形)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원적사사적(圓寂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개산하였고, 조선 고종 광무 7년 (1903)에 석교 선소(石橋 善沼) 선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리(상주시 화북면)에는 명승인 용유동계곡(일명 쌍룡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용유동계곡가 우측에는 우복동(牛腹洞)이라 쓴 표석을 얹은 향토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일대를 복지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곳은 예로부터 지리산 청학동과 같은, 우리 민족의 전설적 이상향 우복동으로 주목받아온 곳이다.

▲ 봉암사 서옹스팀 다비식. <봉암사실약론>에 `옛날 봉암사를 창건할 때 늘 그 바위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이 있어서 `봉암(鳳巖)` 이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등의 감결에 의하면,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서 ‘보은속리하 증항근지(報恩俗離下 蒸(甑)項近地)’ 또는 ‘보은속리산 사증항근지(四甑項近地)’를 들고 있다.

속리산 주위에는 북쪽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북쪽의 시루봉, 칠성면 사은리 남쪽의 시루봉, 동쪽 문경시 경계 청화산 동쪽의 시루봉, 남쪽 보은군 마로면 경계의 시루봉 등 4개 시루봉이 보인다. 우복동은 이 십승지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용유리 동북쪽에 사증항과 관련이 있을 듯한 시루봉(876.1m)이 둘러 있고, 북쪽과 남쪽에 청화산과 도장산이 용유리를 감싸안고 병풍처럼 둘리어 있다.

용유리 남쪽 상오리의 쉰섬 마을과 수침동 및 우복동 명당터의 쇠뿔에 해당한다는 장각동(長角洞) 근처도 모두 이상향 우복동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우복동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이 일대의 화북면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리 일대가 일찍이 우복동으로 주목받아 왔듯이 용유동계곡 상류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풍운(風雲)을 만난 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서체로 ‘동천(洞天)’이라 새겨 놓은 멋진 글씨가 있다. ‘洞天’이란 곧 신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로, 신선들이 살만한 명산계곡의 승경을 이르는 말이다.

이 글씨는 양봉래(楊蓬萊)가 썼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양봉래는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아니라 속칭 양봉래로도 일컬어진 상주 개운동 출신의 전설적인 도승 개운조사(開雲祖師)로, 그가 맨손으로 쓴 것이라 한다.

▲ 대야산 용추계곡. 조선 정도때의 <봉암사사실약록>에 이 용추(龍湫)가 기관이경(奇觀異景)이라는 언급이 보인다.
개운조사는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에 모두 조예가 깊은 대도인으로서, 1730년 경술에, 일설에는 1790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3세와 5세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외가인 양씨가에 의탁하여 살다가 7세에 외숙부를 잃고, 9세에 외숙모를 잃은 후 상주가 되어 모두 3년상을 치르자 인근 사람들이 그를 양씨집의 효동이란 의미로 양효동(楊孝童)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13세 때 출가하여 희양산의 환적암(幻寂庵)과 백련암(白蓮庵), 청화산 맞은 편의 도장산 심원사(尋源寺.또는 深源寺)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여 크게 성도한 후 평소에 수많은 신비의 이적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51세 때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琉伽心印正本首楞嚴經)의 주해원고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심원사 경전서가 천장 위에 깊이 간직해 둔 뒤 더 깊이 수행하기 위해 아주 인적이 드문 지리산 반야봉의 묘향대로 들어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몰년에 대해서는 20세기 말엽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도 하고, 1988년 187세로 입적하였다고도 하는 등 대도인으로서의 전설적인 일화만 전하고 생몰연대가 모두 분명하지 않다. 그의 속성은 김씨였으나, 어려서 외숙부와 외숙모의 3년상을 치루기도 하고, 출가하여 수행한 후 선도에 정통하여 선인과 같은 많은 이적을 보이기도 하여 양봉래로 속칭되기도 하였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동계곡(쌍룡계곡) 안쪽 계곡가 너럭바위에 그가 썼다는 ‘洞天’과 ‘閑坐(한좌)’는 그가 51세 되는 경자년 8월 세번째 경일(庚日)에 쓴 것으로, 그때 읊은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한다.

주먹으로 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의 부드럽기가 물렁한 흙과 같아,

나의 명구를 받아들여 잘 나타내 주네.

맑은 물 흐르는 반석 위에,

짐짓 용으로 하여금 놀게 하니,

이러한 내 어릴 적 놀던 일 같은 자취도,

천추 만추에 전할 수 있거든,

하물며 경전을 간행하는 공덕이랴!

복의 터전이 한이 없으리.

수학하는 여러 어진이들은,

나고 죽는 물거품 같은 일을 벗어나리,”

(이상의 개운조사 사적은 윤양성 편저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능嚴經環解刪補記)에 부록한 ‘원고함중개운당유서(原藁緘中開雲堂遺書)’, 부흥기획 1993 참조

대야산은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산

▲ 대야산 정상. 대야산은 <여지도서>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문경조 등에 `大野山` 으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문경조에 `大治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의 산 이름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야산은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청천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동서 안팎에 구곡(九曲) 명승을 갖춘 2개 선유동계곡을 거느리고 있는 명산이다. 본래는 선유산(仙遊山)으로 불리던 산으로, 일찍이 이중환은 이 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청화산 동북쪽에 있는 선유산은 정기가 높은 데에 모여진 국판이어서, 맨 꼭 대기는 평탄하고 골이 매우 깊다. 위에는 칠성대(七星臺)와 학소굴(鶴巢窟)이 있다. 옛날에 진인 최도(崔搗)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여기에서 수련하였다고 한다. 저기(著記)에는, ‘이 산은 수도하고자 하는 자가 살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택리지 복거총론)

대야산은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 등에 大耶山 으로, 대동여지도 문경조에 大冶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의 이름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전설적인 속설로는 옛날 홍수 때 정상의 봉우리가 대야만큼만 남아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까지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산으로 보이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산이란 의미의 선유산으로 불리면서 명산의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 산 동 서에 위치한 절경의 계곡 이름까지도 모두 선유동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야산 동쪽 문경시쪽의 계곡을 외선유동(外仙遊洞), 산 서쪽 괴산군쪽의 계곡을 내선유동(內仙遊洞)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내외선유동은 모두 각기 구곡의 승경을 갖추고 있는데, 먼저 문경쪽 선유구곡의 제1곡에서 제9곡까지의 이름을 김유동의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옥사대(玉寫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泳歸岩),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石), 옥하대(玉霞臺).

이곳 가은읍 완장리, 대야산 용추계곡 입구에 있는 벌바위 마을 아래 너른 바위가 있는 개울가에 자리한 학천정(鶴泉亭) 앞 큰 바위에 ‘선유동문(仙遊洞門)’ 이라 새긴 글이 있는데, 선유구곡은 여기서부터 그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옥사대와 난생뢰 등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글씨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라 전해진다. 학천정은 조선 숙종-영조 때의 문신?학자인 이재(李縡?1680-1746)를 기리기 위해 1906년에 세운 정자다.

이곳 선유구곡을 지나 상류쪽의 대야산 방면 등산로로 접어들면 맑은 개울이 시작되면서 넓은 반석과 담소들이 이어지는 용추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백색의 화강암반이 깔린 계곡에 물이 수억 년 동안 흘러내리면서 기묘하게 패어져 완성된, 천연의 목욕통 같은 용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발하게 하는 비경이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와 삼송리에 위치한 괴산쪽의 선유구곡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 근처의 친지를 찾아왔다가 주위의 절경에 반하여 아홉 달을 유람한 후 9곡의 이름을 지어 새겼다고 한다. 그 제1곡에서 제9곡까지의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유동문(仙遊洞門),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巖),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瀑), 난가대(爛柯臺), 기국암(基局巖), 구암(龜巖), 은선암(隱仙巖).

대야산은 이렇듯 그 동서에 신선이 내려와 노닌다는 내외 선유동의 승경을 거느리고 있는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이름의 의미가 분명치 않은 대야산 보다는 차라리 이전부터 불려온 선유산으로 불러주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희양산은 전통선문 봉암사의 주산

▲ 청화산 동쪽의 시루봉. 속리산 주변에는 모두 4개의 시루봉이 있는데,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서 `보은속리하 증항근지(報恩俗離下 蒸(甑)項近地)` 를 들고 있다.
희양산(曦陽山?998m)은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 봉암사(鳳巖寺)의 주산이다.

희양산은 고운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과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역대지리지의 문경조에 의하면,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 일관되게 희양산으로 불려왔다.

희양산의 曦 자는 햇빛 희 자이고, 陽 자는 태양(해) 양 자다. 글자 그대로 새긴다면 햇빛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같은 산의 의미일 것이다. 한낮의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한자어로 백일(白日)이라고도 한다. 희양산을 가은 등지에서 원경으로 바라보면 백옥 같은 거대한 암봉이 부드러운 삼각형을 이룬 채 우뚝 솟아 있다. 그렇다면 희양산은 햇살처럼 하얗게 빛나는 태양 같은 산의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

여지승람 문경조에 보이는, 봉암사의 일명 양산사(陽山寺) 등에서도 그러한 이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희양산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에서 온 것이라면, 하얗다의 옛말 ‘해얗다’에서 온 ‘해얀(하얀)산’이 전음(轉音)되어 ‘해얀산→해양산→희양산’으로 불리어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 의하면, 봉암사 창건시의 소재처를 언급할 때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언급하면서, 이 산의 형세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있어서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인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 같다.’

이에 의하면 희양산 암봉의 모습을 ‘봉암’으로, 계곡의 모습을 ‘용곡’으로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봉암사의 정진대사원오탑비문(靜眞大師圓悟塔碑文)에서는 이 산의 형세에 대하여 ‘우뚝 솟은 산은 마치 거북이 비석을 지고 있는 듯 선덕(禪德)의 비명과 같고, 험준하고 웅장한 산봉우리는 거대한 불상인데, 신령스러운 광명이 항상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 정조 7년(1783)에 청은자(淸隱子) 지수(知守)가 기록한 봉암사사실약록(鳳巖寺事實略錄)에 의하면, 희양산의 산봉과 계곡 명소에 관한 명칭과 유래, 봉암사의 연혁 및 그에 딸린 부속 건물과 암자 등에 관한 이름과 사적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그 중 산봉 이름과 계곡 명소에 대한 것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봉우리들과 계곡의 명승은 희양봉(曦陽峯).법왕봉(法王峯).반야봉(般若峯).지장봉(地藏峯).규월봉(窺月峯).구룡봉(九龍峯.현 구왕봉)과, 야유암(夜遊岩).취적대(取適臺).낙석대(落石臺).백운대(白雲臺)와, 백송담(柏松潭).단석문(斷石門) 및 기연(妓淵).용추(龍湫)이니, 다 기관이경(奇觀異景)이다…야유암은 태평교(太平橋) 위 백송담 아래에 있는데, 바위면에 크게 쓴 세 글자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최고운 선생이 쓴 것이라 한다.

취적대는 야유암 옆에 있는데, 새긴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치 아니하다. 대체로 옛말에 이르기를, 낚시질을 하는 참뜻은 고기 잡는 데 있지 아니하고 쾌적(快適)을 취하는 데 있다고 하니, 이곳은 아마도 고운이 낚시를 드리운 곳일 것이다.

▲ 청화산 용유동 계곡의 `동천(洞天)` 글씨. 상주 개운동(開雲洞) 출신의 전설적인 도승 개운조사(開雲祖師)가 맨손으로 쓴 것이라 한다.
백송담은 야유암 위에 있는데, 돌이 희고 물이 맑으며, 누운 폭포의 물이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데, 어떤 이는 가야산의 홍류동계곡 보다도 낫다고 한다.

낙석대는 백송담 위에 있는데, 사람들이 정진국사가 입적시에 떨어진 곳이라 한다…백운대는 온 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삼연선생(三淵先生)이 일찍이 금강산의 만폭동에 비유한 곳이다…바위면의 미륵상(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은 곧 환적(幻寂) 의천선사(義天禪師?1603-1690)의 원불이다. 선사는 평생을 환적암에 주석하였는데, 해가 서산에 이르면 이 미륵상을 바라보고 예를 올렸다고 한다. 미륵비가 지금도 암자 뒤편에 있는데, 중간이 끊어져 읽을 수 없다.

희양봉은 곧 이 한 산의 주봉이다. 그 절정에 샘이 있는데, 맛이 달고 차며 배탈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구룡봉은 곧 절 바깥의 청룡에 해당된다. 온 산이 다 주먹 같은 돌들이 많이 쌓여 산중에 물이 없는데도 늘 물 흐르는 소리가 울린다. 갠 날에도 사람이 가면 문득 구름과 안개가 인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절터는 옛날 큰 못 이어서 신물(神物)이 들끓었는데, 지증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이것들을 내몰았더니, 신물들이 도망가서 이(구룡봉) 사이에 숨었다고 한다.

산중에는 최고운의 독서굴(讀書窟)이 있다. 지금도 울타리를 쳐놓은 듯한 형상이고 거기에 연기를 피운 자취가 남아 있으며, 또 돌로 된 탁상과 돌절구 따위가 남아 있다. 대체로 고운의 일생이 이름난 산수에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지리산 청학동, 가야산 홍류동 같은 곳이 다 그가 은거하여 수학하던 곳이다. 그렇다면 이 산에서 독서하던 것도 그 때의 일일 것이다.

백운대 위 용추 아래에 이른 바 이언담(離言潭)이 있고, 그 아래에 또 이른바 상백운대라는 것이 있는데, 다 산수가 수려한 곳이다. 상하 백운대 사이에 이른바 계암(鷄巖)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날 봉암사를 창건할 때 늘 그 바위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이 있어서 이 때문에 ‘봉암(鳳巖)’이라는 절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국사 도헌(道憲.824-882)이 창건하고,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국사 긍양(兢讓.878-956)이 피폐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긍양은 고려 태조 7년(924)에 24년간의 중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스승 양부선사(楊孚禪師)가 머물던 강주(옛 진주) 관내의 초팔현(草八縣) 백엄사(伯嚴寺.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던 선종고찰)에 주석하고 있다가, 935년에 도를 넓히기 위해 이곳 희양산으로 옮겨왔다. 두 국사의 탑비가 절 경내에 현존하고 있다.

이후에도 조선 세종 13년(1431)에 함허선사(涵虛禪師.1376-1430)가 절을 중수하고 이곳에서 금강경설의를 저술하였으며, 현종 15년(1674)에 거의 다 소실된 절을 신화화상(信和和尙.1665-1737)이 또 중건한 바 있다.

봉암사에는 이밖에도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조선시대에 환적 의천, 상봉 정원(霜峰淨源.1627-1709) 등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으며, 현대에도 광복 이후 한국불교의 자체 정화를 위해 서암(西庵), 월산(月山), 자운(慈雲), 청담(淸譚), 성철(性徹) 스님 등이 참선결사를 이루고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에 봉암사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고, 1982년부터 서암선사의 주도 아래 옛 구산선문의 참선도량으로서의 전통을 부활하여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1년 중 4월 초파일에 한해서만 산문을 개방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속리산 시는 임제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지난호에 언급한 속리산의 이름과 관련한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시에 대한 고찰이 좀 미진한 것 같아 조금 더 보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임백호와 동시대 인물인 지봉(芝峰) 이수광(李?光?1563-1628)은 임제의 속리산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제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中庸)을 800번 읽고서 시 한 귀를 얻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山)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이 산을 떠나 있네(山非離俗俗離山).’ 이는 중용의 말을 끌어다 쓴 것이다.”(지봉유설(芝峰類說) 권14)

▲ 속리산 문수대에서 바라본 천황봉.

이에 의하면, 위의 두 시구는 분명히 백호가 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씨의 가승(家乘)인 회진임씨세고(會津林氏世稿) 유사(遺事)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정상의 조그만 암자에서 3년 동안 중용을 읽었더니, 산을 나올 때 온 산의 나뭇잎이 다 중용의 글자를 이루었다. 이에 한 구절을 읊었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지금도 그곳에 사는 승려들이 임모의 독서암이라 한다.”<역주백호전집(백호집 부록, 신호열?임형택 공역, 1997) 참조>

그러나 위의 두 시구는 백호가 창작한 시는 아니다. 첫 귀는 중용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일찍이 이를 인용하여 진감선사탑비명(眞鑑禪師塔碑銘?지리산 쌍계사 소재) 첫 귀에, “무릇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아니하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라 언급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임백호의 속리산 시를 고운 최치원의 시로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호가 읊은 둘째 귀도 백호보다 앞서는 시기의 인물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기김중원유속리산시(寄金重遠遊俗離山詩)에 이미 다음과 같이 먼저 언급된 바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옛 지름길엔 인적이 없어 자주빛 이끼만 얼룩얼룩하니, 산은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닌데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났네(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 )

이에 의하면, 백호가 읊은, 속리산의 이름과 관련한 ‘山非離俗俗離山’이란 시구는 이미 백호 이전부터 구전되어 온 시다. 확실한 전거는 없으나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최치원 선생의 시로도 구전되어 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된 금계 선생의 속리산 시에 의하면, 俗離山이란 이름은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일반적 해석보다는 곧 세속 사람들이 떠나 있는 산, 곧 인적이 드물어 산이 세속에 때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란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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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 역사지리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
지증대사, 봉암사 창건시 네 기둥으로 터 누르고 철불로 호위

▲ 금색전과 봉암. 지증대사가 사찰 개창 후 사찰을 호위토롤 철불 2구를 만들어 금색전에 한구를 봉안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머리를 들어 우뚝 솟아 있는 희양산(曦陽山?998m)은 백두대간의 수많은 산무리 중에 거대한 암봉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할 만한 산이다. 희양산을 처음 대면하노라면 단일 암괴로 이루어진 산체(山體)의 느낌과 밝은 빛깔의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강력하게 각인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백두대간 체계에서 희양산의 위상 역시 태백산~소백산~월악산의 맥을 받아서 백두대간의 중추인 속리산을 일으키는 산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희양산을 배경으로 전개된 역사를 보면,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창지가 여기였으며, 봉암사라는 절이름도 희양산의 봉암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치원(857-?)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 있는 희양산 봉암의 산세와 형상에 대한 묘사다. 여기에는 최치원이 문학적이고 심미적인 수사로 희양산을 표현한 몇 구절의 대목이 등장한다.

희양산이라는 이름은 언제 누가 지었을까? 산이름이란 사람이 부여한 이상 역사적 과정을 겪기 마련이며, 따라서 생성하고 변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희양산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지증 도헌(智證 道憲?824-882)의 희양산 선문의 개창과 시기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늦어도 9세기 중반기에 이미 있었던 이름으로 간주할 수 있다. 희양(曦陽)이라는 글자는 빛나고(曦) 밝다(陽)는 뜻으로서 희양산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과 부합한다.

희양산에 대한 또 하나의 별칭은 봉암(鳳巖)이라는 이름이다. 봉암이라는 표현은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서 희양산의 계곡을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고 한 데서 연유된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희양산 봉암의 산세를 가리켜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고 놀라운 필치로 표현했다.

이 말을 풀이하자면, 봉황이란 희양산을 가리키는 상징적 비유이며, (봉황의)날개가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는 표현은 희양산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산세를 봉황의 날개로 비유한 것이다.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

▲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풍수적으로 표현하자면, 봉암이라는 봉황의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 좌우의 지맥들은 봉황의 날개로써 그 산세가 활개 치듯 치켜 오르는 듯하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석양에 붉게 물든 산노을이 비친 희양산의 산세를 살아있는 듯이 신령스럽게 표현했다.

이렇듯 희양산을 봉암이라고 부른 것은 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전통적인 사유일 뿐만 아니라 산을 봉황 혹은 용으로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풍수적인 인식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 선인들의 눈에 비친 희양산은 거대한 봉황이 머리를 치솟고 있는 모양의 산이었던 것이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는 희양산의 형상에 대해 묘사한 또 한 구절의 표현이 있다. 봉암이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내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는 묘사가 희양산의 산세를 묘사한 것이라면, 이 말은 희양산의 형상을 의인화하여 역동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갑옷을 입은 기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양산은 남성 혹은 기사의 이미지를 줄만큼 강성한 형상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냥 우뚝하게 솟은 부동(不動)의 산덩어리가 아니라‘내달리는 듯하다’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으니, 이는 희양산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기질, 그리고 형세를 한 마디로 압축해 드러낸 것이다. 덧붙이자면, 희양산 봉암은 우측의 법왕봉(法王峰, 혹은 九王峰)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주위의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의 형상으로 보인다.

▲ 보물로 지정돼 있는 지증대사 적조탑.
희양산을 배경으로 삼아 그 남쪽 기슭에 입지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국사(靜眞國師)가 봉암사에 주석하면서 중창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함허득통(涵虛得通)이 주석하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했다. 봉암사는 그 후에도 몇 번의 소실을 당하고 중건을 거듭했다.

봉암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기의 삼층석탑뿐만 아니라 지증대사적조탑 및 탑비, 정진대사원오탑 및 탑비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건축된 극락전 등이 있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는 봉암사(鳳巖寺)를 개창한 지증도헌의 터잡기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때는 881년 경, 지증대사가 입적에 들기 1년 전의 일이다.

문경에 사는 심충(沈忠)이라는 거사가 있었다. 소문에 지증대사가 선(禪)의 정혜(定慧)가 넉넉하고 천지(천문과 지리)의 이치를 거울처럼 환히 들여다본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가진 땅인 희양산 배(腹) 부위의 봉암용곡에 선사(禪寺)를 지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지증대사는 자신이 이제 늙었고, 이미 오래 전(864년)부터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머물고 있는지라 굳이 사양했다. 그런데 심충의 청이 워낙 굳건하고, 터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나다는 말에 마음이 이끌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선사들은 참선 수행에 좋은 가경(佳景)을 물색했던 것이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

▲ 지증대사 적조탑비. 지증대사는 희양산 봉암의 형세에 놀라워하며 이곳에 봉암사 개창을 결정했다고 한다.

지증대사는 희양산 봉암의 형세에 내심 놀란 듯하다. 그래서 그는 곧 석장을 짚고 두루 터를 살피기에 이르는데,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쳤는데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였고,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둘러싸는데 마치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이 묘사는 봉암사 주위에 전개된 산천의 경관을 심미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비유다. 해석하건대 희양산 봉암의 산세가 봉황이 활개 치는 듯하다는 것이고, 봉암사 터를 안고 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계곡들은 마치 용과 이무기가 걸쳐 꿈틀거리는 듯하다는 말이다. 산 높은 곳에서 봉암사 계곡을 보면 정말 하늘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등천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지증대사는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마침내 그는 주저치 않고 대중에 솔선하여 터를 일으키니,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처마기둥을 드리워 터를 진중히 누르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사찰을 호위토록 했다. 한 구는 지금의 금색전(金色殿)에 봉안했다고 하며, 또 다른 한 구는 어디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는데, 둘 다 현존하지는 않는다.

지증대사가‘네 개의 처마기둥으로 터를 누르고, 철불로 사찰을 호위했다’는 내용은 풍수적인 비보(裨補)와 압승(壓勝)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비보, 압승은 터에 허결(虛缺)함이 있거나, 반대로 지나칠 때 사찰, 탑, 혹은 불상으로 보완하거나 누름으로써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다.

외견상으로, 봉암사 터의 기세가 너무 강해 사찰과 철불로 터의 지맥을 누르고 안정시키며, 탑으로써 중심을 진중히 잡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사탑비보라고 하는데, 그것은 풍수비보설의 일종이며 한국에서는 도선(道詵?827-898)이라는 지증도헌과 같은 시대의 선승을 시조로 친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찰에서는 풍수비보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봉암사 경내의 삼층석탑. 전후좌우로 둘러있는 산들은 연잎이 되고, 중앙의 삼층석탑은 꽃술처럼 비친다.

그럼 지증대사가 봉암사 터의 중심으로 잡은 곳은 어디인가? 바로 현재의 금색전(金色殿) 자리가 그곳이다. 여기는 누가 와서 보아도 화룡점정한 곳으로 고개를 끄떡일 만한 곳이다. 그곳에 서면 봉암용곡 입구에 들어서 이곳에 이르면서 휩싸였던 기이하고 생동하며 위압되는 마음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태풍의 눈처럼 정적 아닌 정적에 잦아든다. 마음은 명징부동(明澄不動)하고 적요(寂寥)하나 몸짓은 거대한 봉황처럼, 법왕처럼 일대 대장부의 활개를 치는 곳, 바로 그곳이 봉암사 금색전 자리다.

후대에 와서는 그 자리를 비유해 연꽃 봉우리의 화심(華心)이라고도 했으니, 전후좌우로 둘러있는 산들은 연잎이 되고, 중앙의 삼층석탑은 꽃술처럼 비친다.

봉암사를 창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때에 지증은 헌강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 반월성 월지궁(月池宮)에 갔던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헌강왕은 지증에게 불교적 가르침의 본질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헌강왕의 물음에 대해 지증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대답하던 광경을 최치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담쟁이덩굴에 바람 없이 고요하고, 빈청(賓廳) 뜰에는 바야흐로 밤이 다가오는데, 때마침 달그림자가 연못 복판에 임하였거늘, 대사가 고개를 숙여 바라보다가 우러러 보고 고하였다. “이것(水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지증이 가리킨 마음이란 무엇인가? 고요한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는 그 무엇, 바로 나와 타(境)가 송곳만큼의 빈틈도 없이 정밀히 일치된 만남을 가리킨 것이다. 똑같은 산일지라도 마음이라는 지경에 임하여 보는 산과 눈이라는 제한된 시각적 감각으로 보는 산은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최치원이 글로 묘사했듯이, 지증이 봉암사 터의 산천을 보고 느낀 마음자리는 후일 헌강왕에게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가리킨 마음자리와 진배없을 것이다.

글 최원석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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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 르포

늘재~청화산~조항산~대야산~장성봉~희양산~이화령 48km

▲ 옅은 구름 속에 지워질 듯 아스라한 여름 백두대간의 봉우리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만큼 맨가슴을 열어 보인다. 여름 백두대간 종주의 고통과 즐거움은 흘린 땀방울의 무게와 비례한다.

한여름 한낮 더위는 청각적이다. 미동도 없는 대기.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연못 같은 땡볕. 훅-,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 속으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매미 울음소리. 머리 속이 어찔어찔해지면서, 한순간 정지 모드였던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산천은 안녕하다. 땀방울을 훔친다. 손바닥에 매미 울음소리가 묻어난다.

배낭 위에 한가득 매미울음 올려놓으며 늘재(490m)에 선다. 속리산과 청화산 사이의 고갯마루다. 장승처럼 대간 길목을 지키는 엄나무에 목례를 하고 청화산을 향한다. 이 땅을 사무치게 사랑했던 이중환은 이 산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했다. 그는 이 산을 이렇게 말했다.

▲ 늘재 위 청화산 기슭의 `백두대간 성황당`을 참배하는 취재팀.
“청화산은 내외 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속리산 같이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택리지 복거총론-산수)

이중환은 왜 이토록 청화산을 극찬했을까? 생리(生利)와 인심을 강조한 그의 국토관으로 미루어볼 때, 단순히 산의 빼어남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화산 남쪽 기슭의 용유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뱃속, 이른바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리는 승지(勝地)가 바로 상주시 화북면의 용유리다. 이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속리산과 청화산 일대의 지세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속리산의 남쪽 백두대간은 형제봉에서 갈령쪽으로 가지 줄기를 뻗어 동북쪽으로 도장산(827.9m)을 솟구쳐 올린다. 그리고 청화산에서도 동남쪽으로 가지를 쳐 한 봉우리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시루봉이다. 마주보고 선 시루봉과 도장산 사이로는 한줄기 물길이 흐른다. 병천(농암천으로 흘러듦)이다.

이들 산줄기를 선으로 그어보면 시루봉~청화산~늘재~문장대~천황봉~형제봉~갈령~도장산이 된다. 흡사 그 모양이 시위를 팽팽히 당긴 활 모양인데, 그 사이의 분지가 바로 용유리다. 외부세계로 열린 곳이라고는 병천밖에 없다. 그래서 소의 뱃속처럼 안온한 곳이라는 것이다.

▲ 청화산을 내려서는 취재팀.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오늘의 십승지

하지만 감결(鑑訣), 혹은 비결서(秘訣書)에서 말하는 안온한 곳, 즉 승지(勝地)란 오늘날 서울 강남 같은 곳이 아니다. 정반대다. 떵떵거리며 잘 살 곳이 아니라 병난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부터 피할 만한 보신(保身)의 땅이었을 뿐이다. 당시 개념으로는 경제적,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 그야말로 근근이 살아갈 만한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곳이 경제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관광지로, 휴양지로, 혹은 별장지로 자본의 군침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땅에 은자(隱者)들이 살만한 곳은 거의 없다. 옛 풍수가들이 살아난다면 통탄할지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재앙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자본의 탐욕.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을 부정하는 건 기만이지만 탐욕은 문제다. 그렇다면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오늘의 승지는 어디일까? 자연,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십승지를 말하는 건 호사 취미다. 어쩌면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오늘의 십승지가 아닐까. ‘백두대간보존법’은 오늘의 십승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해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주민의 경제적 이익과 법의 공리가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도시인의 양보(세금)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도 더 정교해져야 할 것이다.

▲ 조항산 오름길. 땀방울과 함께 대간 속으로 스며드는 길이다.
한반도 생태축으로서 백두대간의 중요성은 대간 종주 붐 이후 국가적 의제로 떠올랐다. 대표적 훼손 구간인 추풍령 위 금산 채석장이나 이번 구간인 고모치 광산의 개발을 중단시킨 것도 종주 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을 송두리째 뭉갠 자병산의 석회석 채굴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개발의 관성이다.

백두대간 상의 도로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더 입체적이어야 한다. 개발론자든 보존론자든 도로 그 자체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는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생태계 단절만을 문제 삼으며 생태이동로를 만드는 것으로 친환경인 양 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좋은 예로, 지리산의 정령치 도로의 경우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문제의 실상은 관광버스로 쉽게 지리산에 접근하는 사람이 폭증하면서 산을 마구잡이로 대하는 데 있다. 케이블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모든 구성원이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를 바란다. 땀과 사랑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백두대간 보존을 위한 한 방법은 지역별로 자원봉사자를 활용해 등산로를 관리하는 것이다. 최적의 장소에 최소한의 캠프사이트(헬기장 등을 이용)를 공인하는 것도 종주 산행에 따른 훼손을 최소화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청화산 초입에는 근년에 새로 세운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의 내력을 밝힌 비문에는 아예 ‘백두대간 성황당’이라고 새겨두고 있다. 늘재가 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가르는 남쪽 최초의 분수령(실제로는 속리산 천황봉 이후부터)이라는 점도 허름했던 옛 성황당을 허물고 새롭게 짓게 된 이유다. 이곳부터 백두대간의 남한 부분 끝까지 왼쪽으로 흐르는 모든 물은 한강을,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을 살찌운다.

▲ 대야산 정상의 암릉.
성황당을 뒤로 하고 30분쯤 지나자 또 하나의 비석이 보인다. 비석의 몸돌 중앙에는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백의민족중흥성지’?‘백두대간 중원지’라는 글자가 한자로 병기돼 있다.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제단이라는 얘기이겠다. 누가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았지만 이제 백두대간은 현대적 산악신앙의 경배대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중환이 스스로를 청화산인이라 한 까닭

늘재에서 청화산(984m)은 2.5km 정도지만 2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표고차 500m 정도로 제법 가파르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짧은 암릉이 있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특히 원적사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 조망처의 눈맛은 보통이 아니다. 청화산인 이중환이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고 한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겠다.

청화산 정상으로 다가가자 미리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진주의 종주팀 김종현씨와 정인숙?신동국(진서산악회)씨가 수박을 쪼개 놓고 기다리고 있다. 감정 표현이 곰 발바닥 같은 사람도 이런 경우는 코끝이 시릴 것이다. 한여름 장기 산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젓가락도 반 토막만 가지고 다닌다는 무게 공포에서 수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야채 샐러드를 곁들인 빵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다음 조항산을 향한다. 부드러운 오르내림을 반복하지만 갓바위재까지는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옅은 구름이 끼긴 했지만 조망도 괜찮은 편인데, 연신 땀을 훔치느라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다. 송글송글 맺혔다 주루룩 흐르는 땀방울이 아니라 땀구멍 하나하나가 열린 수도꼭지 같다. 눈으로 흘러드는 땀은 소나기 속에 맨몸으로 선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애초의 목적지인 밀재까지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갓바위재에서 일찍 산행을 끝내기로 한다.

▲ 저녘노을에 물든 백두대간. 청화산에서 갓바위재로 가다가 만난 풍광이다.

갓바위재 위 헬기장에 배낭을 부린 다음 반은 조항산 서쪽 계곡 임도를 따라 물을 뜨러 가고 나머지는 저녁 준비를 한다. 어둠보다 더 빨리 허기가 밀려든다. 그런데 물을 뜨러 갔던 사람들이 감감 무소식이다. 한참을 내려간 모양이다.

언젠가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휴대 전화기가 들썩거린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멀뚱히 마주 앉은 사람을 바라본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전화를 건 것이다.

“술잔 비었어.”

술자리에서 웃자고 한 일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한없이 가까운 듯하지만 섬처럼 고립되어 가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함축하는 듯도 했다.

인간관계의 내구성은 힘든 상황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상 속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장기 산행이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내구성은 쉽게 결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배려다. 그것이 무너질 때 산행의 즐거움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종주팀 김종현씨의 동료들은 이런 경우 최고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덕분에 우리는 퉁퉁 불어터져서 국물이라고는 없는 수제비를 산해진미보다 더 달게 먹었다.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빼놓을 수 없는 산행의 즐거움이다. 저녁을 먹고 사각 플라이로 대충 집을 짓고 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할 일이다.

얼려 온 캔맥주 마시는 모습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비는 멎었다. 서둘러 조항산(951m)을 오른다. 괴산군 청천면과 문경시 농암면에 걸쳐 있다. 몸을 돌려 세우자 문장대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불꽃같은 암릉이 이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북쪽으로는 대야산과 동쪽으로 둔덕산의 우람한 자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선다.

▲ 대야산 암릉(정상에서 북쪽).

조항산에서 고모치까지는 경쾌한 내리막이다. 아직 산은 열기를 내뿜고 있지 않지만 땀방울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고모치 옆의 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물의 순환 혹은 윤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은 끊임없이 돌고 돈다. 지금 우리가 고모샘에서 마신 물도 땀과 오줌 등의 형태로 순환한다. 아니 우리의 순간순간 호흡도 크게 보면 물의 순환과 무관하지 않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은 여러 형태의 물’이라고 했다. 우리 인체도 3분의 2가 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고모샘에서 백두대간을 마신 셈이다. 백두대간 종주자들끼리 교감하는 모종의 연대감은 그래서 육친적이다. 우물이 수돗물로 바뀐 후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자, 여기서 정치권에 제안을 하나 한다. 선거제도나 권력구조를 바꾼다고 지역 간의 벽이 허물어지는 건 아니다. 진정 지역 구도를 깨고 싶으면 전국민에게 정중하게 백두대간 종주를 권하시라.

이제 온전히 백두대간과 한몸이 되어 대야산(931m)을 오른다. 백두대간의 남한 부분 중 지리산과 설악산 사이에서 으뜸의 산악미를 보여 주는 산이 바로 이번 구간의 대야산과 희양산이다. 특히 대야산은 기슭 곳곳에 빼어난 계곡을 빚어놓고 있다. 선유동 하면 흔히 괴산의 선유동을 떠올리기 쉽지만 대야산의 동쪽인 문경에도 선유동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대야산 아래에 내선유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 운무에 싸인 희양산을 바라보는 취재팀.
선유동 말고도 대야산은 서쪽으로 화양골, 동쪽으로 월영대, 용추계곡, 용소와 같은 가경을 빚어 놓았다. 정상 부근의 기묘한 바위와 북동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암릉은 울창한 수림과 조화를 이루며 산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관을 압축해 놓고 있다.

대야산 정상에서 하루 산행객들이 얼려 온 캔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행여나 속 좁은 신이 있어 저분에게만 당신의 가호를 빠뜨리는 일이 없기를…. 우리는 맹물에 안주(간식)만 먹고 촛대봉을 향한다. 촛대봉에서는 취재팀의 일원인 김석우씨가 문경산악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연으로 조령산구조대의 김칠석씨가 식수를 떠 와서 기다리고 있다. ‘감로수’라는 말은 이런 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약사여래가 따로 없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바로 그다.

촛대봉에서 1시간쯤 지나 곰넘이봉을 넘어 다시 30분쯤 내려서자 버리미기재다. ‘벌어먹이다’의 경북 내륙지방의 사투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목숨을 의탁해야 했던 궁벽한 산골 살림살이가 굳은살처럼 박혀 있다. 고갯마루에 배낭을 부린 다음 고개 옆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잠시 신선놀음에 빠진다.

백두대간 종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숨은 명산인 장성봉을 오른다. 정상으로 오를수록 참나무숲이 무성하다. 희양산, 백화산의 자태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정상의 조망은 부연 이내 속에 갇혀 있다. 장성봉에서부터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북쪽으로 곧장 내달리다 악희봉에서 동남쪽으로 심하게 휘어돌며 은치(540m)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우리는 길게 숨을 고르기로 했다. 또 하루를 백두대간에서 묻는다.

무게와 거리에서 오는 고통만큼 즐거움도 크다

밤새 내린 빗줄기가 아침에는 더욱 몸집을 부풀린다. 하지만 산행 마지막 날의 비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더욱이 여름인 경우는 더위와 맞바꾸면 되기 때문에 하늘 탓할 일도 아니다.

▲ 버리미기재 직전의 낙엽송 숲길.

구왕봉(877m) 오름길은 아주 가파르다. 구왕봉은 달리 구룡봉으로도 불렸는데, 지증대사가 봉암사 터를 잡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연못을 메울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 용을 쫓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봉암사 스님들은 이 봉우리를 날개봉이라고도 부른다. 지도를 놓고 보면 희양산 좌우로 구왕봉과 시루봉이 봉암사를 향해 날아드는 새의 날개와 거의 흡사하다.

비가 그치면서 희양산 위로 구름이 비껴가고 있다. 언뜻언뜻 시야가 열리면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언저리가 참선 삼매에 빠진 고승의 풍모를 보여준다.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봉암사가 별천지인양 아스라하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야호를 외치는 바람에 82년부터 희양산 등산로는 폐쇄되고 말았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취지를 헤아리고 보면 경박한 산행문화에 떨어진 장군죽비로 새길 일이다.

신라 헌강왕 3년(879) 지증 도헌(智證 道憲?824-882) 국사가 창건한 봉암사. 오늘날 희양산문으로 불리는 9산 선문의 하나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문'에 전하는 창건의 내력은 이렇다.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를 찾아가 ‘봉암용곡’을 희사하며 절 짓기를 간청했다. 이에 지증대사는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가면서 산세를 두루 살폈다. 이 때의 모습을 최치원은 그림을 그리듯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있으니 마치 봉황이 날개로 구름을 헤치며 오르는 듯하고, 백 겹 띠처럼 흐르는 계곡물은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에 (지증국사가) 감탄조로 말하기를 ‘어찌 하늘이 내린 땅이라 하지 않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였다.”(옮긴 우리말은 지관 스님의 역주를 바탕으로 하였음.)

▲ 희양산 정상에서 조망의 즐거움에 빠진 취재팀.

이렇게 열린 희양산문은 후삼국 격변기에 폐허가 되었고, 935년에 정진 긍양(靜眞 兢讓.878-956)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조선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이후 1947년 겨울 성철 스님의 주도로 ‘봉암사 결사’로 불리는 일대 사건을 통해 혁신의 싹을 움틔우고 불교 교단을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오늘날 산문 폐쇄도 그 정신의 연장으로 볼 수 있겠는데, 모쪼록 그것이 우리 사회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준엄한 경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양산을 벗어난 백두대간은 시루봉(914.5m)까지 북진하다가 이만봉(990.1m)에서 백화산(1063.5m)까지 동남진, 다시 황학산(915.1m)과 조봉(671m)을 지나 이화령까지 북서진하며 야속할 정도로 휘돈다. 하지만 이만봉에서 백화산까지는 오르내림의 표고차가 작고 백화산에서 이화령까지는 평원 같은 분위기이기 때문에 숲길 걷기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번 구간 늘재에서 이화령까지는 실거리 약 48km로 상당히 먼 거리지만, 빼어난 조망처와 암릉, 그리고 산책길 같은 분위기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무게와 거리에서 오는 고통만큼 즐거움도 크다.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7)

먹는 즐거움과 무게의 고통을 화해시키자

겨울 산행에 비해 여름 산행은 상대적으로 무게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더위 때문에 쉽게 지치기 때문에 체감 고통 지수는 별 차이가 없다. 특히 여름 산행은 물 무게가 부담스럽고 음식 보관이 쉽지 않은 불편이 따른다. 식단 짜기에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여름 산행에서는 라면도 물 부담 때문에 결코 간편한 끼니가 아니다. 그렇다고 행동식으로만 해결하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금방 허기가 지기 때문이다. 이 때 가장 좋은 먹을거리가 누룽지. 어떤 종주자는 식사 후 출발할 때 물병에 누룽지를 넣어 다음 끼니 때 적당히 불은 누룽지로 해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미숫가루보다 영양이 풍부한 선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한두 끼는 그것으로 해결할 만하다. 포만감이 문제가 된다면 번거롭긴 하지만 오곡을 불렸다가 반쯤 말린 상태에서 볶은 다음 믹스로 살짝 갈아서 가져가면 훌륭한 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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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르포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화령재~봉황산~비재~속리산~밤재~늘재 32km

▲ 화령을 지나 비로소 대간다운 높이를 만들어가는 봉황산 오름길.
여름 숲은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짙푸르다 못해 ‘훅-’ 숨이 막힐 정도로 이글거리는 초록 불꽃. 나무에 맺힌 태양이다.

여름 숲은 거대한 분수(噴水)다. 산림청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숲은 1년 동안 소양댐 저수량의 10배에 해당하는 180억 톤의 물을 머금을 수 있다고 한다. ‘나무는 서 있는 운수(雲水)’다.

여름 숲속에서 ‘불과 물’은 상생한다. 그리하여 여름 산행은 불과 물의 회오리 속에 몸을 던지는 일이다. 이번 구간, 화령에서 봉황산~비재~속리산~밤재~늘재에 이르는 약 32km를 걷는 동안 우리는, 안개와 장대비 그리고 햇빛을 번갈았다. 땀 냄새, 물 냄새, 곰팡이 냄새. 우리 몸의 변태는 그러했다. 전철 안에서라면 쉽게 용서받을 수 없을 그 냄새들에 대해 우리는 무감각하다. 산속에서 우리는 숲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먹는 짜장면(자장면이 아니다)은 언제나 성찬이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혹은 지갑이 얇아서 먹는 그런 맛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먹은 짜장면 맛을 기억하고 있다.

경북 상주시 화서면 시장 한 귀퉁이에서 짜장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떼웠다’고 말하면 짜장면에 대한 모독이다) 화령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은 서서히 키를 높이며, 옛사람의 표현대로 ‘높고 어지러운 멧부리’를 이루어간다. 하지만 화령에서 봉황산 초입까지의 등마루는 지워져버렸다. 화서면쪽으로 꺾어져 구릉으로 몸을 바꾼 등마루는 도로와 밭이 차지하고 있다. 25번 국도를 따라 화서면쪽으로 고개를 내려서자 우측으로 문장대 방향 49번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다. 이곳에서부터 봉황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우리는 충분히 젖을 준비가 돼 있다

▲ 천황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속리산의 주릉은 '대(臺)'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너럭바위와 조망처의 연속이다.
산허리에 구름이 길게 누워 있다. 풀잎들은 안개에 젖어 있다. 하마하마 비가 올까 하는 조바심 같은 건 없다. 우리는 충분히 젖을 준비가 돼 있다.

봉황산(741m)은 이름 그대로 우아한 자태를 지닌 산이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로 서서히 키를 높인다. 1시간 남짓 걷자 산불감시초소다. 정상은 구름에 가려 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봉황산 정상까지는 약 1.5km.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봉황산은 화령의 진산답게 정상에 서면 화서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만 좋으면 속리산 천황봉도 조망되지만 오늘 그것은 구름의 몫이다.

봉황산을 막 내려서서 암릉을 우회한 다음부터 비재까지는 표고차 400m의 긴 내리막이다. 1시간30분 정도 100m 정도의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급경사를 이루며 비재(330m)로 떨어진다. 날아가는 새의 형국과 같다 하여 비조령이라 불렸다는 고개다.
하늘이 무겁다. 구름이 햇빛을 삼킨 자리에 일찍 어둠살이 퍼진다. 귀신들이 마실 나설 시간이다. 우리는 고갯마루 서쪽(화남면 방향)의 공터에 집을 짓는다.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미리 옮겨둔 승용차 지붕에 텐트 깔개를 연결하여 천막을 친다. 순식간에 시골 잔치마당 분위기가 펼쳐진다.

진주에서 취재팀 일원인 김종현씨 일행이 합류하자 잔치 분위기는 급상승한다. 이원영씨가 투가리에 담긴 막걸리 같은 목소리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꺼내 놓는다. 솔직히 노래 솜씨는 형편없지만 마음결만큼은 이미자의 목소리 같은 이 남자, 우리나라 3대 사회문제를 몽땅 안고 산다.

3대 사회문제란 무엇인가. 육아문제, 노인문제, 농촌문제가 그것이다. 그는 지금 강원도 홍천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세 살 난 아들과 몸이 불편하신 장모를 보살피며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 문제를 끌어안는 방식이 대책 없이 낙천적이다. 그래서 나는 들을 때마다 난감한 그의 ‘동백 아가씨’를 절대로 싫어할 수 없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진다. 봄비 같이 촉촉하지는 않지만 을씨년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숲속에서 이 정도 비는 ‘나무 우산’이 해결해 준다.

비재에서 대간 길은 가파른 철계단으로 시작된다. 철계단의 이물스런 느낌은 숲으로 들면서 곧장 지워진다. 비 오는 여름 숲의 고요는 유혹적이다. 숨소리, 발자국 소리, 나뭇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빗물과 함께 땅으로 스민다. 나무와 더불어 우리는 혼연히 산과 하나가 된다.

비 오는 숲의 고요가 아무리 유혹적이라 할지라도 하루 이틀 계속 맞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삽시간에 먹장구름이 드리우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는 숲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내 머리 속에 조각처럼 남아 있는 소나기 내리는 숲의 표정은 이렇다.

▲ 문장대에서 밤재로 내려서는 길의 암릉. 뒤로 속리산 주릉의 실루엣이 불꽃무늬 같은 속리산 바위 등성마루의 진경을 보여준다.

축축한 바람이 먼저 잎사귀를 긴장시킨다. 이끼 냄새, 나뭇잎 섞는 냄새, 비릿한 흙냄새가 섞인 공기는 물풍선처럼 팽팽해지기 시작한다. 풀잎에 솜털처럼 맺힌 미세한 물방울들이 번뜩인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난다. 숲이 크게 몸을 뒤챈다. 바람의 궤적을 따라 일렁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이 핏줄 같은 선을 그으며 계곡으로 사라진다.

이어서 ‘후두둑-’ 굵고 선명한 빗줄기들이 쏟아져 내린다. 일순간 숲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쏴아-’, 잎사귀들의 탄주가 시작된다. 곧장 바닥에 닫지 못하고 잎사귀에 모였다 뭉클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심벌즈처럼 악절을 끊는다. 땅이 흥건히 젖고 나면 스며들지 못한 빗물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제각기 계곡을 찾아든다. 낙엽도 엉덩이를 들썩인다. 주춤주춤 계곡으로 다가서는 돌멩이들도 있다. 이끼들도 생기를 얻는다. 숲이 펄떡인다.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 비로봉 오르는 길의 암문을 지나는 취재팀.
비재에서 1시간30분쯤 지나자 암릉이다. 발끝을 기분 좋게 긴장시킨다. 암릉을 지나자 못재다. 이름처럼 물을 담고 있는 못은 아니지만, 고원습지인 만큼은 분명하다. 이곳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못재 맞은편 대궐터산(해발 873m인 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곳 못재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를 안 황충이 못에 소금을 풀어 견훤의 힘을 꺾었다는 것이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사실일리야 없겠지만 지금 못재에는 한 풍운아의 못다 핀 꿈인 양 풀들만 무성하다.

못재를 지나면서부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갈령 삼거리를 지나 형제봉에서 피앗재로 내려서기까지 2시간 동안 속수무책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모순어법임을 안다. 이곳은 종로 네거리가 아니고, 깊은 산속이다. 그것은 대간 종주자의 역설적 자기 위안이다.

피앗재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자 오한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냉큼 멈출 비가 아닌 것 같다. 사진 취재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다. 난감한 상황이다. 하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장 짧은 탈출로는 충북 보은 내속리면의 만수동. 동네 이름의 한자도 만수동(萬壽洞)이다. ‘만수’까지는 몰라도 당장 내일 안녕하려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시간 반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속리산 천황봉은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약간의 원망을 담아 그곳을 보노라니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난다’고 노래한 한 시인의 노래가 생각난다. 지금 우리 신세가 딱 그렇다.

조선 선조 때의 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는 다음과 같이 속리산을 노래한 바 있다.

도는 사람을 멀리 않건만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 신선대에서 문장대 가는 길인 조릿대 숲.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출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참고로, 산행기(山行記)의 한 모범을 세운 고 김장호 선생은 위 시를 백호 임제가 쓴 것이라 하면서, ‘도는 인간을 멀리 하지 않는데 인간이 도를 멀리한다. 그렇듯이 산은 이승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인간이 산을 닮으려 들지 않는다’고 옮기고 있다.

살펴본 바로는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당나라에서도 문명을 떨친 최치원의 국제적 사고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다소 샛길이 길었지만, ‘글자 한 자의 빠지고 더함이 전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탈무드)’는 경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문에 밝은 분의 좀더 명쾌한 고증을 기대해 본다.

천황봉 표기는 분명 ‘천왕봉’의 의도적 왜곡

5일 뒤, 다시 속리산을 찾아 천황봉(1,058.4m)에 오른 시간은 정오. 옅은 구름에 걸러진 햇살이지만 땀방울을 짜내는 데는 염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암릉 위로 고추잠자리가 가득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잠자리가 인간보다 우등하다.

속리산은 제1봉의 지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산이다. 천황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약 3,8km의 등성마루 전체가, 그 기기묘묘한 암릉 전체가 하나의 봉우리다. 옛사람들도 제1봉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예 천황봉을 언급하지 않고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峰山)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다른 문헌도 마찬가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돌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 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사실적이고도 아름다운 묘사다. 문헌비고의 기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처럼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이라 하게 되었다.'

▲ 나리꽃과 함께 대표적인 여름 들꽃인 원추리. 스스로 꾸미는 법 없이 아름다운 꽃 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흐릿하게 지워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언제부터 천황봉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분명히 ‘천왕봉(天王峯)’이라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천왕봉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속리산 마루에 대자재천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의 천황을 염두에 두고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또한 천황봉은 한강·금강·낙동강의 젖샘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을 살찌우고, 서쪽 법주사를 거쳐 달래강을 이루는 물줄기는 충주의 탄금대 아래서 남한강과 몸을 합친다. 그리고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려 보은 땅을 적시는 물줄기는 금강에 몸을 누인다. 예로부터 이러한 물줄기를 삼파수(三派水)라 하여 충주 달천과 오대산 우통수와 함께 조선의 명수(名水)로 각별히 여겼다.

한남금북정맥이 대간에서 솔가하는 기점도 천황봉이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말티고개를 지나 선도산과 보현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갈래친다.

천하 명산에 명찰이 없을 수 없다. 법주사가 바로 그런 산이다. 세속이 떠난 산에 ‘불법(佛法)이 머무른(住)곳’이라는 뜻의 법주사가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속리산과 법주사는 분리 불가능한 관계다. 이렇다보니 속리산은 서쪽으로 보은, 동쪽으로 상주에 걸쳐 있지만 흔히 보은의 산으로 인식된다. 법주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픈 조망처가 도처에

▲ 너럭바위 위에 경상(經床)을 올려놓은 듯한 문장대.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게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여기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베어 있다. 예토(穢土)가 곧 정토(淨土)요, 번뇌가 곧 보리(지혜)임을 가르치기 위함인가.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상념이 길었다.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는 평균 속도로 2시간이면 된다. 하지만 뒤에서 누가 쫒지 않는 다음에야 그 시간에 걷는 건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걷다가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픈 너럭바위는 물론, 바투 다가가 쓰다듬고 싶은 기암을 두고 휑하니 지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픈 조망처가 도처에 늘려있을 뿐 아니라 법주사쪽 기슭은 구르고 싶을 만큼 울창한 수림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 밤재 하산 길에 암릉을 즐기는 취재팀.
암릉 곳곳에 화장기 없는 색시 같은 나리꽃과 원추리와 눈인사를 나누며 비로봉을 지난다.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이 독보대사를 스승 삼아 7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 일으켜 세웠다는 입석대를 지나자 신선대다. 신선의 자리는 휴게소가 차지하고 있다. 컵라면에 신선주(당귀술)를 곁들어 점심을 해결한다. 휴게소의 진돗개가 꼬리를 살랑대며 주위를 맴돈다. 10살이나 됐다는데 아주 젊고 건강해 보인다. 개 팔자도 천차만별이다. 이 개야말로 평생 신선놀음이지 싶다. 신선대에서부터 문장대는 걸음걸음마다 확연한 원근감을 보여주며 마중이라도 나오듯 가깝게 다가선다,

문장대. 세조가 몹쓸 병을 고치고 올라 신하들과 삼강오륜을 강론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그 때 세조는 알았을까? 사방 거칠 것 없는 조망이야말로 그 어떤 뛰어난 강론보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강론이라는 걸. 남쪽으로는 천황봉까지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묘봉과 관음봉, 도명산과 낙영산이 옅은 구름을 두른 채, 바라보는 나를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 신선이 구름을 타고 지나간다고 해도 하나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문장대에서 늘재로 내려서는 길은 급전직하의 내리막은 아니지만 1시간 이상 까다로운 암릉이 계속된다. 잔뜩 팔다리에 힘을 주어야 하거나 배낭을 벗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가야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더 좋은 구간이다. 중간 중간 쉬면서 이우는 햇살에 선명한 하늘금을 드러내는 속리산의 표정을 살피는 맛도 보통이 아니다. 이런 재미를 아껴 맛보며 2시간쯤 지나자 밤재다. 이곳에서 늘재까지는 1시간 반 정도의 편한 길이지만 봉우리(692.2m) 하나를 넘어야 하는 일은 조금 부담스럽다.

늘재에서 청화산을 올려다보며 배낭을 부린다. 우리에게 택리지라는 보배로운 인문지리서를 선물한 이중환이 자신의 호로 삼을 정도로 사랑한 청화산. 이런 산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기분은 이미 이겨 놓고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만큼이나 느긋하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6)

여름 산행의 ‘러브하우스’ 사각 플라이

여름 산행의 가장 큰 매력은 온몸으로 산과 뒹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별바라기를 하면서 비박을 하는 즐거움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그런데 문제는 비다. 비 안 올 확률 99%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여름 산행이다. 이럴 경우 사각형 플라이만 같고 다녀도 웬만한 비바람은 문제가 안 된다.

요즘은 장비점에서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판다. 부피와 무게 부담도 없고, 스틱을 세워 A형 텐트 모양 집을 지으면 웬만한 텐트도 부럽지 않다. 그리고 더 좋은 기능은 우중산행 때 점심을 먹거나 할 경우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면 멋진 휴식공간이 된다는 점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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