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식생

“등대시호! 다시 만나 반갑구나”
정이품송 닮은 낙락장송 숲에 땅개나무 솔나리 자라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식물이 살고 있는 곳을 다시 찾아가는 일이 두려울 때가 있다. 혹시라도 그 식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을 내가 맞이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속리산도 그런 심정으로 찾아갔다.

▲ 정이품송. 조선 세조가 정2품 벼슬을 하사한 소나무로,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법주사 소유이며 천연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서 백두대간을 이루는 천황봉(1,058m)에서 문장대(1,054m)까지는 3.5km쯤 되는 거리다. 문장대에서 밤머리재를 지나서 눌재까지, 또 천황봉에서 형제봉(803m)까지도 국립공원 지역 안쪽이기는 하지만, 속리산 국립공원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지역은 아니다. 따라서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가 백두대간으로서의 속리산이라 할 수 있다.

천황봉에 서면 전망이 좋다. 속리산 국립공원은 물론이고, 황악산 이후 상주를 거쳐 문경 이화령에 이르는 백두대간 구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이름값을 한다. 남쪽으로 형제봉쪽 대간 능선은 물론이고, 북쪽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경땅으로 이어져 올라가는 대간의 산군이 켜켜이 겹쳐지면서 가히 백두대간다운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정남쪽 대목골 아래에 위치한 보은군 외속리면 삼가저수지도 가늠된다.

국립공원의 백두대간까지 올라온 귀화식물

▲ 개다래나무. 전국의 산에 자라는 덩굴나무이며, 다래나무와는 달리 열매를 먹을 수 없다. 속리산에서는 백두대간 능선에서도 자라고 있다.
천황봉 정상은 그리 넓지 않은 바위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식물은 전망에 비해 신통치가 않다. 신갈나무가 정상 주변 숲을 이루고 있고, 조릿대, 산철쭉, 철쭉나무, 함박꽃나무, 미역줄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나무, 산수국 등이 자라고 있다. 산딸기나무, 질경이 같은 저지대에 사는 식물도 섞여 있는데, 사람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올라온 것으로서 천황봉 일대에 인위적인 간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위 한 쪽에 남아 있는 바위채송화가 과거의 좋았던 이곳 자연성을 대변하고 있다.
사람에 의해 저지대 식물이 속리산의 백두대간 능선까지 올라온 사실은 천황봉 조금 아래에 있는 헬기장에 가면 더 분명해진다. 이 헬기장에서 상오리쪽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이 등산로는 10년 이상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어 등산객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헬기장 주변에는 짚신나물, 산딸기나무, 질경이 등 양지를 좋아하는 저지대 식물들이 올라와 자라고 있다.

일대에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는 속리산이지만, 인간 간섭에 의한 식물상의 변화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온 듯하다.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는 물론이고, 법주사가 자리 잡은 백두대간 서쪽 사면 일대에서 그런 증거들이 쉽게 발견된다. 예로부터 사찰과 암자가 발달한 탓에 이곳을 중심으로 외래식물들이 속리산 산중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 돌양지꽃. 전국의 산 바위 겉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바위가 발달한 속리산에서는 여러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번 취재에서 둘러본 상환암 부근만 하더라도 텃밭 주변에 강아지풀, 줄딸기, 개망초, 질경이, 환삼덩굴 등이 퍼져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망초, 환삼덩굴 같은 식물은 이곳 생태계의 입장에서 외래식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 보더라도 귀화식물로서 악명을 날리고 있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다.

상고암, 관음암 일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암자들이 백두대간에서 직선거리로 5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음을 감안하면, 속리산 전체에 외래식물들이 유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자 주변뿐만 아니라 등산객이 많이 다니는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의 백두대간 능선 여러 곳에서도 외래식물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은 식물 생태계 면에서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 김천 황악산부터 고도가 급격히 낮아져서 야산 같은 분위기로 흐르던 대간이 서서히 고도를 높임과 동시에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조성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주 백학산 등 저지대 백두대간에서는 능선 위까지 소나무며 심지어 조림한 리기다소나무까지 생육하고 있지만, 적어도 속리산 구간에서는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정이품송 같은 낙락장송이 해발 600m 이하에 무리 지어 자라고 있지만, 고도가 높아진 대간 위로는 올라오지 않고 대신에 신갈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대간 높은 곳에 숲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법주사쪽 사면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물론이고, 계곡 주변의 활엽수들도 울창하여 숲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처럼 나무들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가야산 등 고찰을 품은 다른 산에서처럼, 이곳 숲이 사찰림으로서 가꾸어져온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사찰은 일대의 숲을 보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딱총나무. 전국의 산에 자라는 떨기나무로, 꽃은 봄철에 일찍 피고, 여름에 열매가 붉게 익는다.
하지만, 사찰이 자리 잡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 간섭도 피할 수 없이 이루어져 온 게 사실이다. 사찰이 없었다면 개망초, 환삼덩굴 같은 강잡초 귀화식물이 속리산 중심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찰이 생태계에 미치는 양면성,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속리산이 아닌가 싶다.

법주사쪽 사면의 소나무는 일품이다. 벌건 줄기를 자랑하며 죽죽 뻗은 소나무들이 해발 400m에서 600m, 높게는 1,000m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능선에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양수로서 계곡쪽에 잘 자라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계곡 옆에까지 내려와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어찌나 잘 자랐는지, 세한도의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속리산에는 한 그루도 없는 듯하다. 이렇게 많은 소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가 정2품 벼슬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간판격인 정이품송이 태어날 수 있었던 토대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환경 조건이 소나무 자라기에 좋기 때문이라는 것과 함께, 이것을 적극 보호해준 사찰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속리산 소나무 군락이 명성을 더하는 것이리라. 사찰이 생태계에 미치는 긍정적인 단면 가운데 하나다.

10년만에 다시 만난 등대시호

▲ 등대시호. 덕유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북방계 고산식물로, 속리산에서는 능선의 바위지대에 극소수 개체만이 자라고 있어 특별히 보호해야 할 식물이다.
천황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문장대를 향해 출발하면 길은 곧 숲속으로 들어간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신갈나무 같은 큰키나무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 등산로가 계속해서 숲속으로 이어지는 것도 속리산 구간의 특징이다. 특히 바위가 발달한 산세를 자랑하는 산에서 백두대간 등산로가 숲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실제로 백두대간 마루금의 정점은 바위 봉우리들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곳에다 길을 내기 어려운 사정 때문일 것이다.

신갈나무, 함박꽃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고, 등산로 가에는 원추리, 물레나물, 숙은노루오줌, 큰개현삼 등이 자라고 있다. 장각계곡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헬기장을 지나서 능선의 경사가 누그러들면 바위지대가 나온다. 일대에는 자주꿩의다리, 바위채송화가 꽃을 피우고 있고, 산오이풀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자주꿩의다리는 이곳부터 문장대에 이를 때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이 식물은 양지에 자랄 때는 자주색 꽃이 피지만, 음지에 자라는 것은 흰 꽃이 핀다. 이곳에서는 구실사리가 바위에 넓게 퍼져서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곧 상환암을 거쳐서 법주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왼쪽을 갈려 나간다. 꽃은 이미 지고 잎을 커다랗게 키우고 있는 금강제비꽃이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 바위채송화. 바위 겉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 10cm 이하로서 작으며, 꽃은 지름 1cm 쯤이다.
이곳부터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발달해 있다. 전망 좋은 한 바위. 잠시 장마가 힘을 잃은 사이 솟아오른 태양이 발산하는 뜨거운 햇볕 때문에 바위로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굵은 땀방울 흘리며 바위 위를 둘러본다. 산철쭉, 진달래, 쇠물푸레나무, 산앵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바위 아래에는 자생하는 잣나무가 여러 그루 보인다. 꽃은 피지 않았지만 산오이풀, 참산부추, 구절초, 죽대 등이 자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돌양지꽃과 자주꿩의다리는 꽃이 한창이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원추리도 시선을 붙잡는다.

잠시 그늘로 물러났다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바위채송화 사진을 찍기 위해 쪼그리고 앉은 내 발 옆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식물. 등대시호였다. 속리산 취재를 나설 때 나를 망설이게도 하고, 설레게도 했던 바로 그 식물이다. 혹시 멸종되어버린 현장을 내가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식물이다. 북방계 고산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설악산 고지대, 소백산, 남덕유산에서만 자라고 있는 멸종위기식물이다.

과거에는 지리산에서도 자란다고 알려져 왔으나 지금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속리산에서는 10년 전 내가 바로 이 장소에서 처음 발견하여 보고하였으며, 소백산 국립공원의 한 봉우리에서도 환경부 조사에서 발견된 바 있다. 속리산이나 소백산 국립공원은 이 식물의 분포에 있어서 설악산과 남덕유산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의미가 크다.

이곳의 등대시호는 10여 개체만이 자라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멸종해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게 고마울 따름이다. 10년 전에는 9월에 조사를 하여 꽃이 핀 개체를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취재 때 만난 것들은 꽃대조차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백두산, 설악산에서는 이맘때 꽃봉오리를 달거나 일부 개체들은 꽃이 피기도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늦게 꽃을 피우는 듯하다.

망개나무, 솔나리, 백부자는 환경부 보호종

▲ 산꿩의다리. 전국의 산 숲 속에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키 20~90cm이며, 수술은 많고 꽃잎은 없다.
등대시호는 멸종위기식물이기는 하지만 현재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식물은 아니다. 예전에 126종이 법정보호식물이던 때는 보호식물이었지만, 법정보호식물 숫자가 줄어들면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속리산 식물 가운데 현재의 법정보호식물 64종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망개나무, 솔나리, 백부자 등이 있다. 망개나무는 내속리면 사내리의 수령 350년 된 고목이 천연기념물 제207호 지정되어 있고,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의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해부터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된 백부자도 속리산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나리는 10년 전 이곳을 둘러볼 때 꽃이 진 개체를 여러 포기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번 취재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직 남아있다 하더라도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등산로를 따라가면서도 쉽게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이밖에도 속리산에 자라는 식물로 알려져 있는 872종류의 식물 가운데 땃두릅나무, 노각나무, 등칡, 끈끈이주걱 등도 보호할 가치가 높은 범주에 속한다.

등대시호 재발견의 기쁨을 뒤로하고 문장대쪽으로 능선을 타고 가면서 유난히 많이 자라고 있는 산뽕나무를 만난다. 고도가 높은 곳보다는 산중턱 아래의 계곡 주변 등지에 많은 것이 보통인데, 이곳에서는 백두대간 능선의 숲을 이루는 주요 나무로서 나타난다. 개다래나무가 이제야 꽃을 피운 것을 보면 해발 1,000m 가까이 되는 높은 고도인데, 산뽕나무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산속 깊이 들어와 있는 암자들과는 무슨 연관이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증명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숲속에서는 산꿩의다리가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 원추리. 전국의 산에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속리산의 백두대간 능선 여러 곳에 작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비로봉 직전의 석문 부근은 커다란 바위들이 너덜을 이루면서도 층층나무, 시닥나무, 함박꽃나무 같은 큰키나무들이 많아서 숲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회나무, 산수국 같은 떨기나무들도 자라고 있으며, 바위 겉에는 바위떡풀이 붙어서 자라고 있다. 이 부근에 속리기린초도 자라고 있는데, 속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름 붙여진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잎과 수술이 각각 4장씩이어서 기린초와 다른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기린초와 같은 식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입석대 직전에서 만나는 떨기나무숲은 예전에는 초원지대였다고 한다. 노린재나무, 조릿대, 미역줄나무 등의 떨기나무와 덩굴나무가 얽혀 자라고 있는데, 노린재나무가 순군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경업대 갈림길을 지나 30여 분이면 신선봉을 거쳐 문장대에 이른다. 바위가 발달한 곳곳에서 산오이풀, 구절초, 자주꿩의다리가 보이고, 숲속에서는 산짚신나물, 병조희풀, 오리방풀 등이 자라고 있다.

문장대에서 백두대간은 외래식물, 귀화식물 많은 속리산 능선을 벗어나서 월악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간다. 탐방객 많은 법주사 코스, 화북 코스와도 이별이다. 속세와 이별한다는 속리산에서 생태적으로 속세를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백두대간은 산세를 더욱 키워나간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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