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 문헌고찰

청화산 산수 사랑해 스스로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불러
이중환, “빼어난 기운이 나타나서 가리운 것이 없는 복지(福地)”

▲ 선유동계곡.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은 뒤에 내외(內外) 선유동(仙遊洞)을 두고, 앞에는 ?E유동(龍遊洞)에 임하여 있으며, 앞뒤 편의 수석(水石)이 기절(奇絶)함은 속리산보다 휼륭하다` 고 했다.

속리산(俗離山?1057.7m) 이북 백두대간 상의 늘재에서 이화령(梨花嶺?529m)에 이르는 구간에는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명산 대야산(大耶山?930.7m)을 비롯해 그 이남에 조항산(鳥項山?951.2m)과 청화산(靑華山?984m), 그 이북에 장성봉(長城峯?915,3m), 구왕봉(九王峯?877m), 희양산(曦陽山?998m), 백화산(白華山?1063.5m) 등 여러 산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청화산, 대야산, 희양산은 명산의 반열에 들 만한, 훌륭한 명산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산들이다. 이들 산군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칠성면, 청천면 지역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 농암면과 상주시 화북면 경계지역을 뻗어가고 있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고 있다.

선유동과 용유동 명승을 앞뒤에 둔 청화산

늘재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오르면 곧 청화산에 이른다. 속리산 동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늘재를 통하여 이어져 있는 속리산의 지산(支山)과 같은 산이다. 이 산은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와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문경조에 의하면, 본래는 17세기 무렵까지는 대체로 화산(華山)으로 불리어졌다.

이후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에 청화산으로 일컫고 있고, 대동지지 문경조에 화산의 일명으로서 청화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18세기 무렵부터는 청화산으로도 불리어온 것으로 보인다.

▲ 희양산 정상.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 일관되게 희양산으로 불리어 왔다.
화산의 華 자는 대체로 연화(蓮華)의 준말로 많이 쓰이는 글자다. 그렇다면 華山 또는 靑華山이란 산 이름은 산의 모습을 연꽃, 또는 푸른 연꽃 같은 형상의 수려한 산이란 의미로 지칭한 이름일 것이다. 청화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나간 곳에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한 연엽산(蓮葉山)이란 이름이 보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산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청화산은 뒤에 내외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하여 있다. 앞뒤 편의 수석이 기절(奇絶)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큰 것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준한 곳이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이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이 나타나서 가리운 것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

이중환은 일찍이 이러한 청화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그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하였다.

청화산의 연꽃 같은 여러 봉우리들 사이 한 복판, 곧 그 연심(蓮心)에 자리한 절이 원적암(圓寂庵)이다. 일설에는 원적암터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모란형(牡丹形)의 명당이라고도 한다. 원적사사적(圓寂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개산하였고, 조선 고종 광무 7년 (1903)에 석교 선소(石橋 善沼) 선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리(상주시 화북면)에는 명승인 용유동계곡(일명 쌍룡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용유동계곡가 우측에는 우복동(牛腹洞)이라 쓴 표석을 얹은 향토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일대를 복지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곳은 예로부터 지리산 청학동과 같은, 우리 민족의 전설적 이상향 우복동으로 주목받아온 곳이다.

▲ 봉암사 서옹스팀 다비식. <봉암사실약론>에 `옛날 봉암사를 창건할 때 늘 그 바위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이 있어서 `봉암(鳳巖)` 이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등의 감결에 의하면,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서 ‘보은속리하 증항근지(報恩俗離下 蒸(甑)項近地)’ 또는 ‘보은속리산 사증항근지(四甑項近地)’를 들고 있다.

속리산 주위에는 북쪽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북쪽의 시루봉, 칠성면 사은리 남쪽의 시루봉, 동쪽 문경시 경계 청화산 동쪽의 시루봉, 남쪽 보은군 마로면 경계의 시루봉 등 4개 시루봉이 보인다. 우복동은 이 십승지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용유리 동북쪽에 사증항과 관련이 있을 듯한 시루봉(876.1m)이 둘러 있고, 북쪽과 남쪽에 청화산과 도장산이 용유리를 감싸안고 병풍처럼 둘리어 있다.

용유리 남쪽 상오리의 쉰섬 마을과 수침동 및 우복동 명당터의 쇠뿔에 해당한다는 장각동(長角洞) 근처도 모두 이상향 우복동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우복동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이 일대의 화북면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리 일대가 일찍이 우복동으로 주목받아 왔듯이 용유동계곡 상류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풍운(風雲)을 만난 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서체로 ‘동천(洞天)’이라 새겨 놓은 멋진 글씨가 있다. ‘洞天’이란 곧 신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로, 신선들이 살만한 명산계곡의 승경을 이르는 말이다.

이 글씨는 양봉래(楊蓬萊)가 썼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양봉래는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아니라 속칭 양봉래로도 일컬어진 상주 개운동 출신의 전설적인 도승 개운조사(開雲祖師)로, 그가 맨손으로 쓴 것이라 한다.

▲ 대야산 용추계곡. 조선 정도때의 <봉암사사실약록>에 이 용추(龍湫)가 기관이경(奇觀異景)이라는 언급이 보인다.
개운조사는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에 모두 조예가 깊은 대도인으로서, 1730년 경술에, 일설에는 1790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3세와 5세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외가인 양씨가에 의탁하여 살다가 7세에 외숙부를 잃고, 9세에 외숙모를 잃은 후 상주가 되어 모두 3년상을 치르자 인근 사람들이 그를 양씨집의 효동이란 의미로 양효동(楊孝童)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13세 때 출가하여 희양산의 환적암(幻寂庵)과 백련암(白蓮庵), 청화산 맞은 편의 도장산 심원사(尋源寺.또는 深源寺)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여 크게 성도한 후 평소에 수많은 신비의 이적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51세 때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琉伽心印正本首楞嚴經)의 주해원고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심원사 경전서가 천장 위에 깊이 간직해 둔 뒤 더 깊이 수행하기 위해 아주 인적이 드문 지리산 반야봉의 묘향대로 들어가 그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몰년에 대해서는 20세기 말엽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도 하고, 1988년 187세로 입적하였다고도 하는 등 대도인으로서의 전설적인 일화만 전하고 생몰연대가 모두 분명하지 않다. 그의 속성은 김씨였으나, 어려서 외숙부와 외숙모의 3년상을 치루기도 하고, 출가하여 수행한 후 선도에 정통하여 선인과 같은 많은 이적을 보이기도 하여 양봉래로 속칭되기도 하였다.

청화산 남쪽 기슭 용유동계곡(쌍룡계곡) 안쪽 계곡가 너럭바위에 그가 썼다는 ‘洞天’과 ‘閑坐(한좌)’는 그가 51세 되는 경자년 8월 세번째 경일(庚日)에 쓴 것으로, 그때 읊은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한다.

주먹으로 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의 부드럽기가 물렁한 흙과 같아,

나의 명구를 받아들여 잘 나타내 주네.

맑은 물 흐르는 반석 위에,

짐짓 용으로 하여금 놀게 하니,

이러한 내 어릴 적 놀던 일 같은 자취도,

천추 만추에 전할 수 있거든,

하물며 경전을 간행하는 공덕이랴!

복의 터전이 한이 없으리.

수학하는 여러 어진이들은,

나고 죽는 물거품 같은 일을 벗어나리,”

(이상의 개운조사 사적은 윤양성 편저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능嚴經環解刪補記)에 부록한 ‘원고함중개운당유서(原藁緘中開雲堂遺書)’, 부흥기획 1993 참조

대야산은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산

▲ 대야산 정상. 대야산은 <여지도서>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문경조 등에 `大野山` 으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문경조에 `大治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의 산 이름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야산은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청천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동서 안팎에 구곡(九曲) 명승을 갖춘 2개 선유동계곡을 거느리고 있는 명산이다. 본래는 선유산(仙遊山)으로 불리던 산으로, 일찍이 이중환은 이 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청화산 동북쪽에 있는 선유산은 정기가 높은 데에 모여진 국판이어서, 맨 꼭 대기는 평탄하고 골이 매우 깊다. 위에는 칠성대(七星臺)와 학소굴(鶴巢窟)이 있다. 옛날에 진인 최도(崔搗)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여기에서 수련하였다고 한다. 저기(著記)에는, ‘이 산은 수도하고자 하는 자가 살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택리지 복거총론)

대야산은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문경조 등에 大耶山 으로, 대동여지도 문경조에 大冶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의 이름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전설적인 속설로는 옛날 홍수 때 정상의 봉우리가 대야만큼만 남아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까지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산으로 보이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산이란 의미의 선유산으로 불리면서 명산의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 산 동 서에 위치한 절경의 계곡 이름까지도 모두 선유동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야산 동쪽 문경시쪽의 계곡을 외선유동(外仙遊洞), 산 서쪽 괴산군쪽의 계곡을 내선유동(內仙遊洞)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내외선유동은 모두 각기 구곡의 승경을 갖추고 있는데, 먼저 문경쪽 선유구곡의 제1곡에서 제9곡까지의 이름을 김유동의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옥사대(玉寫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泳歸岩),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石), 옥하대(玉霞臺).

이곳 가은읍 완장리, 대야산 용추계곡 입구에 있는 벌바위 마을 아래 너른 바위가 있는 개울가에 자리한 학천정(鶴泉亭) 앞 큰 바위에 ‘선유동문(仙遊洞門)’ 이라 새긴 글이 있는데, 선유구곡은 여기서부터 그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옥사대와 난생뢰 등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글씨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라 전해진다. 학천정은 조선 숙종-영조 때의 문신?학자인 이재(李縡?1680-1746)를 기리기 위해 1906년에 세운 정자다.

이곳 선유구곡을 지나 상류쪽의 대야산 방면 등산로로 접어들면 맑은 개울이 시작되면서 넓은 반석과 담소들이 이어지는 용추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백색의 화강암반이 깔린 계곡에 물이 수억 년 동안 흘러내리면서 기묘하게 패어져 완성된, 천연의 목욕통 같은 용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발하게 하는 비경이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와 삼송리에 위치한 괴산쪽의 선유구곡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 근처의 친지를 찾아왔다가 주위의 절경에 반하여 아홉 달을 유람한 후 9곡의 이름을 지어 새겼다고 한다. 그 제1곡에서 제9곡까지의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유동문(仙遊洞門),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巖),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瀑), 난가대(爛柯臺), 기국암(基局巖), 구암(龜巖), 은선암(隱仙巖).

대야산은 이렇듯 그 동서에 신선이 내려와 노닌다는 내외 선유동의 승경을 거느리고 있는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이름의 의미가 분명치 않은 대야산 보다는 차라리 이전부터 불려온 선유산으로 불러주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희양산은 전통선문 봉암사의 주산

▲ 청화산 동쪽의 시루봉. 속리산 주변에는 모두 4개의 시루봉이 있는데,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로서 `보은속리하 증항근지(報恩俗離下 蒸(甑)項近地)` 를 들고 있다.
희양산(曦陽山?998m)은 문경시 가은읍과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 봉암사(鳳巖寺)의 주산이다.

희양산은 고운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과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역대지리지의 문경조에 의하면,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 일관되게 희양산으로 불려왔다.

희양산의 曦 자는 햇빛 희 자이고, 陽 자는 태양(해) 양 자다. 글자 그대로 새긴다면 햇빛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같은 산의 의미일 것이다. 한낮의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한자어로 백일(白日)이라고도 한다. 희양산을 가은 등지에서 원경으로 바라보면 백옥 같은 거대한 암봉이 부드러운 삼각형을 이룬 채 우뚝 솟아 있다. 그렇다면 희양산은 햇살처럼 하얗게 빛나는 태양 같은 산의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

여지승람 문경조에 보이는, 봉암사의 일명 양산사(陽山寺) 등에서도 그러한 이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희양산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에서 온 것이라면, 하얗다의 옛말 ‘해얗다’에서 온 ‘해얀(하얀)산’이 전음(轉音)되어 ‘해얀산→해양산→희양산’으로 불리어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 의하면, 봉암사 창건시의 소재처를 언급할 때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언급하면서, 이 산의 형세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있어서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인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 같다.’

이에 의하면 희양산 암봉의 모습을 ‘봉암’으로, 계곡의 모습을 ‘용곡’으로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봉암사의 정진대사원오탑비문(靜眞大師圓悟塔碑文)에서는 이 산의 형세에 대하여 ‘우뚝 솟은 산은 마치 거북이 비석을 지고 있는 듯 선덕(禪德)의 비명과 같고, 험준하고 웅장한 산봉우리는 거대한 불상인데, 신령스러운 광명이 항상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 정조 7년(1783)에 청은자(淸隱子) 지수(知守)가 기록한 봉암사사실약록(鳳巖寺事實略錄)에 의하면, 희양산의 산봉과 계곡 명소에 관한 명칭과 유래, 봉암사의 연혁 및 그에 딸린 부속 건물과 암자 등에 관한 이름과 사적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그 중 산봉 이름과 계곡 명소에 대한 것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봉우리들과 계곡의 명승은 희양봉(曦陽峯).법왕봉(法王峯).반야봉(般若峯).지장봉(地藏峯).규월봉(窺月峯).구룡봉(九龍峯.현 구왕봉)과, 야유암(夜遊岩).취적대(取適臺).낙석대(落石臺).백운대(白雲臺)와, 백송담(柏松潭).단석문(斷石門) 및 기연(妓淵).용추(龍湫)이니, 다 기관이경(奇觀異景)이다…야유암은 태평교(太平橋) 위 백송담 아래에 있는데, 바위면에 크게 쓴 세 글자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최고운 선생이 쓴 것이라 한다.

취적대는 야유암 옆에 있는데, 새긴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치 아니하다. 대체로 옛말에 이르기를, 낚시질을 하는 참뜻은 고기 잡는 데 있지 아니하고 쾌적(快適)을 취하는 데 있다고 하니, 이곳은 아마도 고운이 낚시를 드리운 곳일 것이다.

▲ 청화산 용유동 계곡의 `동천(洞天)` 글씨. 상주 개운동(開雲洞) 출신의 전설적인 도승 개운조사(開雲祖師)가 맨손으로 쓴 것이라 한다.
백송담은 야유암 위에 있는데, 돌이 희고 물이 맑으며, 누운 폭포의 물이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데, 어떤 이는 가야산의 홍류동계곡 보다도 낫다고 한다.

낙석대는 백송담 위에 있는데, 사람들이 정진국사가 입적시에 떨어진 곳이라 한다…백운대는 온 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삼연선생(三淵先生)이 일찍이 금강산의 만폭동에 비유한 곳이다…바위면의 미륵상(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은 곧 환적(幻寂) 의천선사(義天禪師?1603-1690)의 원불이다. 선사는 평생을 환적암에 주석하였는데, 해가 서산에 이르면 이 미륵상을 바라보고 예를 올렸다고 한다. 미륵비가 지금도 암자 뒤편에 있는데, 중간이 끊어져 읽을 수 없다.

희양봉은 곧 이 한 산의 주봉이다. 그 절정에 샘이 있는데, 맛이 달고 차며 배탈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구룡봉은 곧 절 바깥의 청룡에 해당된다. 온 산이 다 주먹 같은 돌들이 많이 쌓여 산중에 물이 없는데도 늘 물 흐르는 소리가 울린다. 갠 날에도 사람이 가면 문득 구름과 안개가 인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절터는 옛날 큰 못 이어서 신물(神物)이 들끓었는데, 지증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이것들을 내몰았더니, 신물들이 도망가서 이(구룡봉) 사이에 숨었다고 한다.

산중에는 최고운의 독서굴(讀書窟)이 있다. 지금도 울타리를 쳐놓은 듯한 형상이고 거기에 연기를 피운 자취가 남아 있으며, 또 돌로 된 탁상과 돌절구 따위가 남아 있다. 대체로 고운의 일생이 이름난 산수에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지리산 청학동, 가야산 홍류동 같은 곳이 다 그가 은거하여 수학하던 곳이다. 그렇다면 이 산에서 독서하던 것도 그 때의 일일 것이다.

백운대 위 용추 아래에 이른 바 이언담(離言潭)이 있고, 그 아래에 또 이른바 상백운대라는 것이 있는데, 다 산수가 수려한 곳이다. 상하 백운대 사이에 이른바 계암(鷄巖)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날 봉암사를 창건할 때 늘 그 바위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이 있어서 이 때문에 ‘봉암(鳳巖)’이라는 절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국사 도헌(道憲.824-882)이 창건하고,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국사 긍양(兢讓.878-956)이 피폐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긍양은 고려 태조 7년(924)에 24년간의 중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스승 양부선사(楊孚禪師)가 머물던 강주(옛 진주) 관내의 초팔현(草八縣) 백엄사(伯嚴寺.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던 선종고찰)에 주석하고 있다가, 935년에 도를 넓히기 위해 이곳 희양산으로 옮겨왔다. 두 국사의 탑비가 절 경내에 현존하고 있다.

이후에도 조선 세종 13년(1431)에 함허선사(涵虛禪師.1376-1430)가 절을 중수하고 이곳에서 금강경설의를 저술하였으며, 현종 15년(1674)에 거의 다 소실된 절을 신화화상(信和和尙.1665-1737)이 또 중건한 바 있다.

봉암사에는 이밖에도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조선시대에 환적 의천, 상봉 정원(霜峰淨源.1627-1709) 등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으며, 현대에도 광복 이후 한국불교의 자체 정화를 위해 서암(西庵), 월산(月山), 자운(慈雲), 청담(淸譚), 성철(性徹) 스님 등이 참선결사를 이루고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에 봉암사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고, 1982년부터 서암선사의 주도 아래 옛 구산선문의 참선도량으로서의 전통을 부활하여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1년 중 4월 초파일에 한해서만 산문을 개방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속리산 시는 임제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지난호에 언급한 속리산의 이름과 관련한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시에 대한 고찰이 좀 미진한 것 같아 조금 더 보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임백호와 동시대 인물인 지봉(芝峰) 이수광(李?光?1563-1628)은 임제의 속리산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제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中庸)을 800번 읽고서 시 한 귀를 얻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山)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이 산을 떠나 있네(山非離俗俗離山).’ 이는 중용의 말을 끌어다 쓴 것이다.”(지봉유설(芝峰類說) 권14)

▲ 속리산 문수대에서 바라본 천황봉.

이에 의하면, 위의 두 시구는 분명히 백호가 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씨의 가승(家乘)인 회진임씨세고(會津林氏世稿) 유사(遺事)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정상의 조그만 암자에서 3년 동안 중용을 읽었더니, 산을 나올 때 온 산의 나뭇잎이 다 중용의 글자를 이루었다. 이에 한 구절을 읊었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지금도 그곳에 사는 승려들이 임모의 독서암이라 한다.”<역주백호전집(백호집 부록, 신호열?임형택 공역, 1997) 참조>

그러나 위의 두 시구는 백호가 창작한 시는 아니다. 첫 귀는 중용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시대 최치원은 일찍이 이를 인용하여 진감선사탑비명(眞鑑禪師塔碑銘?지리산 쌍계사 소재) 첫 귀에, “무릇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아니하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라 언급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임백호의 속리산 시를 고운 최치원의 시로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호가 읊은 둘째 귀도 백호보다 앞서는 시기의 인물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기김중원유속리산시(寄金重遠遊俗離山詩)에 이미 다음과 같이 먼저 언급된 바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옛 지름길엔 인적이 없어 자주빛 이끼만 얼룩얼룩하니, 산은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닌데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났네(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 )

이에 의하면, 백호가 읊은, 속리산의 이름과 관련한 ‘山非離俗俗離山’이란 시구는 이미 백호 이전부터 구전되어 온 시다. 확실한 전거는 없으나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최치원 선생의 시로도 구전되어 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된 금계 선생의 속리산 시에 의하면, 俗離山이란 이름은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일반적 해석보다는 곧 세속 사람들이 떠나 있는 산, 곧 인적이 드물어 산이 세속에 때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란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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