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 역사지리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
지증대사, 봉암사 창건시 네 기둥으로 터 누르고 철불로 호위

▲ 금색전과 봉암. 지증대사가 사찰 개창 후 사찰을 호위토롤 철불 2구를 만들어 금색전에 한구를 봉안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머리를 들어 우뚝 솟아 있는 희양산(曦陽山?998m)은 백두대간의 수많은 산무리 중에 거대한 암봉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할 만한 산이다. 희양산을 처음 대면하노라면 단일 암괴로 이루어진 산체(山體)의 느낌과 밝은 빛깔의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강력하게 각인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백두대간 체계에서 희양산의 위상 역시 태백산~소백산~월악산의 맥을 받아서 백두대간의 중추인 속리산을 일으키는 산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희양산을 배경으로 전개된 역사를 보면,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창지가 여기였으며, 봉암사라는 절이름도 희양산의 봉암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치원(857-?)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 있는 희양산 봉암의 산세와 형상에 대한 묘사다. 여기에는 최치원이 문학적이고 심미적인 수사로 희양산을 표현한 몇 구절의 대목이 등장한다.

희양산이라는 이름은 언제 누가 지었을까? 산이름이란 사람이 부여한 이상 역사적 과정을 겪기 마련이며, 따라서 생성하고 변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희양산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지증 도헌(智證 道憲?824-882)의 희양산 선문의 개창과 시기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늦어도 9세기 중반기에 이미 있었던 이름으로 간주할 수 있다. 희양(曦陽)이라는 글자는 빛나고(曦) 밝다(陽)는 뜻으로서 희양산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과 부합한다.

희양산에 대한 또 하나의 별칭은 봉암(鳳巖)이라는 이름이다. 봉암이라는 표현은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서 희양산의 계곡을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고 한 데서 연유된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희양산 봉암의 산세를 가리켜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고 놀라운 필치로 표현했다.

이 말을 풀이하자면, 봉황이란 희양산을 가리키는 상징적 비유이며, (봉황의)날개가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는 표현은 희양산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산세를 봉황의 날개로 비유한 것이다.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

▲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풍수적으로 표현하자면, 봉암이라는 봉황의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 좌우의 지맥들은 봉황의 날개로써 그 산세가 활개 치듯 치켜 오르는 듯하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석양에 붉게 물든 산노을이 비친 희양산의 산세를 살아있는 듯이 신령스럽게 표현했다.

이렇듯 희양산을 봉암이라고 부른 것은 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전통적인 사유일 뿐만 아니라 산을 봉황 혹은 용으로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풍수적인 인식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 선인들의 눈에 비친 희양산은 거대한 봉황이 머리를 치솟고 있는 모양의 산이었던 것이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는 희양산의 형상에 대해 묘사한 또 한 구절의 표현이 있다. 봉암이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내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다’는 묘사가 희양산의 산세를 묘사한 것이라면, 이 말은 희양산의 형상을 의인화하여 역동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갑옷을 입은 기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양산은 남성 혹은 기사의 이미지를 줄만큼 강성한 형상을 하고 있다. 더구나 그냥 우뚝하게 솟은 부동(不動)의 산덩어리가 아니라‘내달리는 듯하다’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으니, 이는 희양산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기질, 그리고 형세를 한 마디로 압축해 드러낸 것이다. 덧붙이자면, 희양산 봉암은 우측의 법왕봉(法王峰, 혹은 九王峰)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주위의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의 형상으로 보인다.

▲ 보물로 지정돼 있는 지증대사 적조탑.
희양산을 배경으로 삼아 그 남쪽 기슭에 입지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국사(靜眞國師)가 봉암사에 주석하면서 중창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함허득통(涵虛得通)이 주석하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했다. 봉암사는 그 후에도 몇 번의 소실을 당하고 중건을 거듭했다.

봉암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기의 삼층석탑뿐만 아니라 지증대사적조탑 및 탑비, 정진대사원오탑 및 탑비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건축된 극락전 등이 있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는 봉암사(鳳巖寺)를 개창한 지증도헌의 터잡기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때는 881년 경, 지증대사가 입적에 들기 1년 전의 일이다.

문경에 사는 심충(沈忠)이라는 거사가 있었다. 소문에 지증대사가 선(禪)의 정혜(定慧)가 넉넉하고 천지(천문과 지리)의 이치를 거울처럼 환히 들여다본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가진 땅인 희양산 배(腹) 부위의 봉암용곡에 선사(禪寺)를 지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지증대사는 자신이 이제 늙었고, 이미 오래 전(864년)부터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머물고 있는지라 굳이 사양했다. 그런데 심충의 청이 워낙 굳건하고, 터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나다는 말에 마음이 이끌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선사들은 참선 수행에 좋은 가경(佳景)을 물색했던 것이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

▲ 지증대사 적조탑비. 지증대사는 희양산 봉암의 형세에 놀라워하며 이곳에 봉암사 개창을 결정했다고 한다.

지증대사는 희양산 봉암의 형세에 내심 놀란 듯하다. 그래서 그는 곧 석장을 짚고 두루 터를 살피기에 이르는데,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쳤는데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였고,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둘러싸는데 마치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이 묘사는 봉암사 주위에 전개된 산천의 경관을 심미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비유다. 해석하건대 희양산 봉암의 산세가 봉황이 활개 치는 듯하다는 것이고, 봉암사 터를 안고 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계곡들은 마치 용과 이무기가 걸쳐 꿈틀거리는 듯하다는 말이다. 산 높은 곳에서 봉암사 계곡을 보면 정말 하늘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등천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지증대사는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마침내 그는 주저치 않고 대중에 솔선하여 터를 일으키니,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처마기둥을 드리워 터를 진중히 누르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사찰을 호위토록 했다. 한 구는 지금의 금색전(金色殿)에 봉안했다고 하며, 또 다른 한 구는 어디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는데, 둘 다 현존하지는 않는다.

지증대사가‘네 개의 처마기둥으로 터를 누르고, 철불로 사찰을 호위했다’는 내용은 풍수적인 비보(裨補)와 압승(壓勝)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비보, 압승은 터에 허결(虛缺)함이 있거나, 반대로 지나칠 때 사찰, 탑, 혹은 불상으로 보완하거나 누름으로써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다.

외견상으로, 봉암사 터의 기세가 너무 강해 사찰과 철불로 터의 지맥을 누르고 안정시키며, 탑으로써 중심을 진중히 잡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사탑비보라고 하는데, 그것은 풍수비보설의 일종이며 한국에서는 도선(道詵?827-898)이라는 지증도헌과 같은 시대의 선승을 시조로 친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찰에서는 풍수비보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봉암사 경내의 삼층석탑. 전후좌우로 둘러있는 산들은 연잎이 되고, 중앙의 삼층석탑은 꽃술처럼 비친다.

그럼 지증대사가 봉암사 터의 중심으로 잡은 곳은 어디인가? 바로 현재의 금색전(金色殿) 자리가 그곳이다. 여기는 누가 와서 보아도 화룡점정한 곳으로 고개를 끄떡일 만한 곳이다. 그곳에 서면 봉암용곡 입구에 들어서 이곳에 이르면서 휩싸였던 기이하고 생동하며 위압되는 마음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태풍의 눈처럼 정적 아닌 정적에 잦아든다. 마음은 명징부동(明澄不動)하고 적요(寂寥)하나 몸짓은 거대한 봉황처럼, 법왕처럼 일대 대장부의 활개를 치는 곳, 바로 그곳이 봉암사 금색전 자리다.

후대에 와서는 그 자리를 비유해 연꽃 봉우리의 화심(華心)이라고도 했으니, 전후좌우로 둘러있는 산들은 연잎이 되고, 중앙의 삼층석탑은 꽃술처럼 비친다.

봉암사를 창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때에 지증은 헌강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 반월성 월지궁(月池宮)에 갔던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헌강왕은 지증에게 불교적 가르침의 본질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헌강왕의 물음에 대해 지증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대답하던 광경을 최치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담쟁이덩굴에 바람 없이 고요하고, 빈청(賓廳) 뜰에는 바야흐로 밤이 다가오는데, 때마침 달그림자가 연못 복판에 임하였거늘, 대사가 고개를 숙여 바라보다가 우러러 보고 고하였다. “이것(水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지증이 가리킨 마음이란 무엇인가? 고요한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는 그 무엇, 바로 나와 타(境)가 송곳만큼의 빈틈도 없이 정밀히 일치된 만남을 가리킨 것이다. 똑같은 산일지라도 마음이라는 지경에 임하여 보는 산과 눈이라는 제한된 시각적 감각으로 보는 산은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최치원이 글로 묘사했듯이, 지증이 봉암사 터의 산천을 보고 느낀 마음자리는 후일 헌강왕에게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가리킨 마음자리와 진배없을 것이다.

글 최원석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