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지명

‘속리’는 높음의 뜻인 ‘수리’
늘재는 ‘비탈이 길게 늘어진 재’란 의미

‘법주사가 창건된 지 233년만인 784년(신라 선덕왕 5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김제 고을의 금산사(金山寺)로부터 이곳에 이르자, 들판에서 밭갈이하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회심이 저리 존엄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이 산으로 입산수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속세를 떠난다’는 뜻에서 속리산(俗離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 속리산 능선. 속리(俗離)를 음역된 지명으로 보고, 이를 옛날식 우리 음을 따라 유추해 보면 결국 '수리'가 된다. 속(俗)은 중국 음으로는 '쉬'이고, 우리의 옛음으로는 '수'이니, 속리는 결국 '쉬리', '수리'이거나, 아니면 이에 근사한 어떤 음일 것이다.<사진 허재성 기자>

문헌이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속리산의 이름 유래다. 속리산은 그 산이름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산의 여러 봉우리 이름에서도 신앙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이 그러하고, 비로봉(毘盧峰), 관음봉(觀音峰) 등이 그러하다.

‘세속을 떠난 산’의 의미를 가진 속리산

백두대간의 남쪽 줄기는 한반도의 남부 내륙을 활 모양으로 휘어내려 영호남을 구분지어 놓았는데, 이 산줄기 중에는 태백산, 속리산, 지리산 등 잘 알려진 산들이 많다. 이러한 산들 중 불교적 색채가 유달리 짙은 이름이 속리산이다. 따라서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신앙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지게 한다.

속리산은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소금강, 또는 제2금강이라고도 불러왔다. 또, 구봉산(九峰山), 지명산(智明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자하산(紫霞山), 광명산(光明山), 이지메 등의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속리라는 이름을 보고, 한자 그대로 풀어 ‘세속을 떠나’라는 지명풀이에 머물러야 할까? 세속을 떠난다는 뜻을 한자로 나타낸다면 조어의 관행상 ‘이속(離俗)’이어야 더 옳을 것인데, 왜 ‘이속’이 아닌 ‘속리’가 되었는지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러 산이름들을 살펴보면서 순 우리말에서 출발한 이름들이 한자로 붙여지는 과정에서 뜻의 혼동을 가져온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특히, 음역(音譯)에서 그러한 경우가 많은데, 큰 산, 신성한 산의 뜻인 ‘감뫼(검뫼)’가 검산(劍山), 감악산(紺岳山)이 된 것이라든지, 밝은 산, 양지쪽 산의 뜻인 ‘??(밝달)’이 박달산(朴達山), 백산(白山)으로 된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승려나 풍수가들이 만든 지명 수두룩

무릇 모든 땅이름이 거의 다 그렇지만, 산이름도 처음부터 특별히 어떤 이름이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대로 산이나 꼭대기의 뜻인 달, 두리, 술, 수리, 부리, 모로, 모루, 모리, 마루, 마리, 자, 재 등으로 불려왔다. 지금과 같이 어떤 큰 생활 영역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던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기 집, 자기 마을 주위만 알면 그만이어서, 무슨 산이라는 이름의 필요성을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산’이라는 말 자체가 그대로 이름처럼 사용됐고, 부득이 어느 산을 따로 지칭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큰 산, 작은 산, 앞산, 뒷산, 동산, 남산 식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불려온 관계로 전국의 수많은 산들이 몇 개의 아주 큰 산, 잘 알려진 명산을 빼놓고는 모두 비슷비슷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같은 산이름이 무척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활권의 확장, 고장과 고장 사이의 교류 왕래에 따라 서로 같거나 비슷한 산이름이 조금씩 구분지어 불려지기 시작했고, 더욱이 지명의 한자화에 따라 같은 산이름을 두고도 표기를 각기 달리하는 방법을 써서 이름의 다양화를 꾀하였다. 그래서, ‘한밝’이 태백(太白), 대박(大朴), 함박(咸朴), 함백(咸白) 등으로 되고, ‘감뫼(검뫼)’가 신산(神山), 가마산(可馬山), 검산(劍山), 웅산(雄山), 흑산(黑山) 등으로 되었다.

순 우리말 산이름을 한자로 바꿔 붙일 때, 우리 조상들은 가급적 뜻이 좋은 한자를 취하였다. 특히, 불교가 성해지고 풍수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산이름을 붙임에 있어 산과 관련이 많은 승려나 풍수지리가들이 산이름을 그러한 쪽으로 이끌어간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속리’를 한자풀이의 차원이 아닌, 우리말의 유추 차원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속리는 ‘수리’의 차음일 듯

한자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에서 쓰고 있지만, 잘 알다시피 그 뜻은 같되, 읽는 법은 나라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天(천)’이란 한자 하나만 보더라도 중국 음으로는 ‘톈’이요, 우리 음으로는 ‘천’이며, 일본 음으로는 ‘덴’인 것이다.

그런데, ‘天’은 우리의 옛 자전에 ‘하늘 텬’하는 식으로 ‘텬’으로 읽은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세 나라가 이 글자를 거의 같은 음으로 읽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자 발생지가 중국인 점에 비추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음이 처음에는 중국 본래의 음에 가까웠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자로 기록된 삼국시대의 옛 지명을 우리말로 유추해 보면 이 추측은 더욱 굳어진다.

따라서, 음역이 확실한 어느 한 지명을 가지고 우리 본래의 음으로 유추할 때, 지금의 우리식 한자음에 맞추기보다는 음역되었을 당시의 발음 상황을 고려해야 더욱 확실한 우리 본래의 땅이름을 찾아낼 수 있다.

속리(俗離)를 음역된 지명으로 보고, 이를 옛날식 우리 음을 따라 유추해 보면 결국 ‘수리’가 된다. 속(俗)은 중국 음으로는 ‘쉬’이고, 우리의 옛음으로는 ‘수’이니, 속리는 결국 ‘쉬리’, ‘수리’이거나, 아니면 이에 근사한 어떤 음일 것이다.

수리는 꼭대기를 뜻하는 옛말로서, 오늘날의 머리의 정수리도 바로 이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리는 그 원말이 ‘술’일 것이며, 폐음절(閉音節)이 주를 이루었던 원시 언어로까지 올라가면 ‘숟(숫)’일 것이다.

·수리 < 술 < 숟(숫)
·마리 < 말 < 맏
·가리 < 갈(갇, 갓)

그렇다면, 수리의 뿌리말인 ‘숟(숫)’은 원래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학자층에서는 높음(高)이나 힘셈(强)의 뜻이었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지금의 말에 숫놈, 숫소 등의 그 ‘숫’과도 연결지어 볼 만하다.

신라시대의 벼슬로, 지방민에게만 수여한 외위(外位;外職) 11관등 중에 술간(述干)이란 것이 있는데, 여기서의 ‘술’도 높음의 의미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간(干)이나 한(汗)은 신라시대 고위직(벼슬) 이름에서 접미사처럼 많이 붙는 음절이다. 따라서 산이름에서 술뫼나 수리뫼처럼 ‘술(수리)’이 들어가 있을 때는 큰 산(大山)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리를 음역으로 한 산이름에는 수리산(修理山·안양시), 소래산(蘇來山·시흥시), 소리산(所伊山·강원도 이천군 *대동여지도 상의 지명), 소의산(所衣山·가평군), 소라산(所羅山·황해도 평산군) 등이 있다. 차산(車山), 차령(車嶺), 취령(鷲嶺) 등도 모두 ‘수리’를 수레(車)나 수리(鷲)로 보고 한자로 취한 것이다.

늘재는 ‘늘어진 줄기의 산’의 뜻

▲ 늘재. '늘'은 땅이름에서는 대개 '늘어진'의 의미로 들어간 것이 많은데, 이것이 고개 이름으로 쓰일 때는 느릅재, 느랏재, 늘재 등이 된다.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용유리 사이의 늘재라는 고개는 늘티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유티(楡峙) 또는 어치(於峙)라고 쓴다. ‘늘’은 땅이름에서는 대개 ‘늘어진’의 의미로 들어간 것이 많은데, 이것이 고개 이름으로 쓰일 때는 느릅재, 느랏재, 늘재 등이 된다.

·느릅재 : 동해시 발한동,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등의 유치(楡峙) / 춘천시 동면 감정리, 원주시 귀래면 운계리, 인제 귀둔리, 괴산 장연면 방곡리,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 등의 유현(楡峴)

·늘째(늘재, 느럿재, 느릇재) : 경주시 덕동, 정읍시 고부면 용흥리, 문경시 농암면 율수리

·늘티(늘티고개, 눌티재) : 보은군 회남면 판장리, 옥천군 군북면 구건리 등의 판치(板峙) /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 계룡시 계룡면 기산리

위에서 보다시피 늘어짐의 ‘늘’은 한자로 판(板) 또는 유(楡)로 옮겨간 것이 많다. 전국에는 판(板)을 앞음절로 하는 지명이 허다한데, 이것은 대개 늘어지거나 너르다(廣)의 의미를 가진 토박이 이름들이 그 바탕인 것이 많다.

늘다와 넓다는 큰 의미로 보아서는 같은 뜻이기 때문에 판(板) 지명 중에 산 관련에서는 대개가 늘어짐의 뜻으로 보아야 하고, 들 관련에서는 너름(넓음)의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너름과 느러짐은 큰 의미로는 같아  

판교(板橋)라는 지명은 전국에 무척 많다. 서천시의 판교면과 판교리, 성남시 분당구의 판교동, 순천시 서면, 강릉시 사천면 등의 판교리(板橋里) 등이 그성이다. 판교의 앞글자를 한자 뜻 그대로 풀면 널빤지가 되겠지만, 땅이름에서 널빤지라는 뜻이 그렇게 많이 들어갈 까닭이 없다. 즉, 판교를 널빤지로 놓은 다리로 무조건 푸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성남시의 판교는 옛날에 너들 또는 너드리(너더리)라고 불리던 곳이다. 다리(橋)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지명이며, 단지 너른 들의 의미일 뿐인 것이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늘’을 ‘널’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늘’ 관련 땅이름들이 한자로 옮아간 것 중에는 광(廣) 자가 취해진 것이 많다.

서울 한강의 섬 중에는 넓다는 뜻이 들어간 이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의도다. 여의도는 전에는 딴 이름으로도 불렸다.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름은 잉화도(仍火島)다. 그러나, 잉화도는 밤섬과 여의도를 하나의 섬으로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밤섬과 여의도는 한강 물이 높지 않을 때에는 서로 붙기 때문이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나의도(羅衣島)로 나와 있고, 대동지지에는 여의도(汝矣島)로 나와 있다. 이렇게 여러 이름을 가졌지만, 그 뜻은 모두 너른 벌의 섬이란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너벌섬‘이 원이름일 것이다.

나의주의 ‘나‘는 ‘너‘의 소리빌기, 의(衣)는 ‘벌‘을 취한 한자 표기로 보인다. 옷의 옛말이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羅衣)는 너른 벌의 뜻인 ‘나벌‘ 또는 ‘너벌‘의 표기로 보인다.

잉화도에서 잉(仍)도 ‘너‘ 또는 ‘나‘의 옮김일 것이다. 이 잉(仍)은 ‘니‘로도 읽어 왔는데, 이 글자는 예부터 땅이름에서 ‘너‘, ‘니‘ 등의 소리빌기로 많이 써 온 글자이다. 잉화의 화(火)는 ’불‘로, ‘벌‘과 음이 근사하니, 잉화도는 결국 ‘너벌섬(니벌섬)‘의 한자 표기라 여겨진다.

따라서, 여의도, 잉화도, 나의주는 모두 ‘너벌섬‘의 다른 표기로 보이는데, 항간에 떠도는 여의도 이름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즉, 여의도를 쓸모없던 땅이라고 해서 ’너나 가질 섬‘의 뜻에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한낱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근거 없는 말이다.

‘늘다’나 ‘너르다’와 관련한 산지(산줄기나 고개) 지명에서는 한자로 광(廣) 자가 들어간 것을 그리 많이 볼 수 없다. 더러 보이는 광현(廣峴)이란 지명은 대개 ‘넉고개’나 ‘늦고개’가 그 바탕인 것으로 보아 이는 고개의 폭이 넓어서라기보다 비탈이 길게 늘어져서 붙여진 것일 것이다.

산지 지명에서는 ‘늘다’의 ‘늘’의 뿌리말 같은 인상을 주는 느릅나무 유(楡) 자나 ‘늘’의 취음으로 적합한 어조사 어(於) 같은 한자가 들어간 것이 많다. 따라서, 백두대간 상에 있는 상주시의 늘재(유치, 楡峙)도 늘어진 고개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문헌 고찰

8봉(峰), 8대(臺), 8대문(大門)과 여덟의 이명 가진 명산
최고봉 천왕봉(天王峰)은 일제가 천황봉(天皇峰)으로 표기 왜곡

▲ 청법대에서 바라본 문장대.<사진 허재성 기자>
속리산(俗離山·1057.7m)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사이에 뻗어 있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큰 산이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우리나라 12종산(宗山)의 하나로도 일컬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산이다.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하여 옛 선인들은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옥(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고, 또는 처음 피는 연꽃 같기도 하고, 멀리서 횃불을 벌리어 놓은 것 같다고도 하면서 이 산을 소금강산(小金剛山),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으로 일컬어 왔으며, 그 승경을 조선8경의 하나로 일컫기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속리산기(俗離山記)’에 의하면, 그러한 속리산의 개략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속리산 : 보은현 동쪽 44리에 있다. 곧 태백산의 남쪽 줄기다. 북쪽으로 조령(새재)과 이어지고, 또 이 산에서 두 산줄기로 나뉘면서 한 줄기는 꺾어지면서 북쪽으로 뻗어가 한강 이남, 금강 이북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장수의 덕유산이 되고, 또 남원의 지리산이 된다. 이 산은 삼도(三道)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신라 때에는 속리악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세가 웅대하고 꼭대기는 모두 돌 봉우리로서 하늘에 나란히 솟아 있어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빚은 연꽃과 같기에, 세속에서는 소금강산이라 부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돌이 쌓여 있는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위에 돌웅덩이가 형성되어 있는데, 마치 가마솥 같다. 비가 내리면 그 속에 물이 샘처럼 고여 있다. 산 남쪽 정상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매우 높고 험준하며, 문장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보은조>

속리산의 주능선 상에서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봉인 천왕봉과 문장대 구간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산줄기 상의 한 구간으로, 북쪽 문장대에서는 동북쪽 청화산(靑華山·984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남쪽 천왕봉에서는 동남쪽 형제봉(832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있다.

이 구간은 대체로 형제봉 동쪽 갈령(葛嶺·443m)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문장대까지 가는 백두대간 산행의 주요 코스로, 속리산을 남북으로 종주하면서 수려한 산세를 감상한 후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대가람 법주사 방면으로 하산하여 문화유적지까지도 둘러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백두대간 중의 한 구간이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속리산의 경관이 비록 금강산에 뒤지기는 하나, 다음과 같은 여러 명산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명산이라 평하고 있다.

‘청량산과 같은 빼어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그 산세를 널리 깔고 있고, 덕유산과 같은 깊음이 있으면서도 기이함은 덕유산보다 넘치고, 지리산에 비교해도 피차 장단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걸출한 사찰과 아슬아슬한 건축물에 인간의 힘을 능가한 신의 조화가 있음에 이르러서는 가야산 해인사와 그 우열을 논할 만하다.’<지행록(地行錄) 속리산기>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산

속리산은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전국의 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에게 제사를 올릴 때 중사를 지내던 주요 명산의 하나로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속리악이라 불리어 왔다. 또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등에 수록한,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세운 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俗離山法住寺 慈淨國尊碑銘)과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주요지리지 보은조 및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등의 속리산 관련 기록에 의하면, 속리산은 고대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일관되게 속리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속리산의 산이름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국어학적 관점에서 더러 ‘속리’를 음역(音譯)된 산이름으로 보고, ‘꼭대기’를 뜻하는 우리의 옛말 ‘수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시절부터 불리어 오는 수많은 산이름 중 왜 속리산만 ‘속리(←수리)’라 일컬어지고 고유 이름이 없는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막연하여 수용하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은 상고시절부터 산이든, 물이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고유의 이름을 명명하여 왔다. 우리나라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져 온 속리산을 어찌 ‘~수리(~꼭대기)’가 아닌, 보통명사로 그저 ‘수리(꼭대기)’라고만 막연히 지칭하여 왔겠는가?

‘俗離山’이란 산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속세를 여읜[離] 산, 또는 속세를 떠나 있는 산의 의미로 새긴다. 그러나 한문 문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미의 산이름은 ‘이속산(離俗山)’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속리산이란 산이름의 의미는 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 있다는, 곧 세속인들이 세사(世事)에 얽매여 자연을 멀리하고 있음을 경각시켜 주는 듯한 의미의 산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고인의 시(詩)에서 그러한 산이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 법주사 전경. 한때 법주사 경내에는 무려 60여 동의 당우가 있었고, 산내에는 7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 사람들이 산(자연)을 떠나있네(山非離俗俗離山).’

위의 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라고 하지만, 실은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아무튼, 속리산이란 산이름이 꼭 위의 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위의 시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의미는, 후대인이 속리산에 와서 세속에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산을 둘러보면서 ‘俗離山’이란 산이름에서 느껴지는 시상(詩想)을 통하여 도를 멀리하고 자연을 멀리하고 있는 세속인들을 경각시켜 주고 있는 듯한 의미로 읊어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속리산의 산이름 의미는 곧 세속에서 떠나 있는 산,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있는 순수한 산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가 10대 시절 혼자서 속리산 문장대로 올라 천왕봉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 종주산행을 할 때 이 산에 당도하기 전 차가 구절양장 같은 험준한 말티고개를 굽이 돌아가면서 넘어가던 시절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필자의 청소년기 시절에도 그러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하던 옛 시절 선인들은 더더욱 이 산에 접근하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때문에 고대시절에는 세속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산으로서,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산이 바로 속리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속리산의 산이름과 봉이름

▲ 화양구곡의 학소대.<사진 김상훈>
속리산은 여덟 팔(八)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첫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이 여덟 개다. 곧 예로부터 불려온 속리산과 구봉산(九峰山)·소금강산·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이지산(離持山)·형제산(兄弟山)·자하산(紫霞山)의 8개 산이름이 전한다.

둘째로 속리산은 그 주요 봉우리가 여덟 개다. 최고봉인 천왕봉(→천황봉)에서 그 산릉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비로봉(毘盧峯)·길상봉(吉祥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관음봉(觀音峯)·묘봉(妙峯)·수정봉(水晶峯)의 8개 봉우리가 있다.

속리산의 8봉설은 다분히 인위적으로 맞춘 숫자로 보인다. 곧 앞의 첫째 항에서도 속리산의 별칭으로서 구봉산(九峰山)의 이름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일찍이 조선 전기에 이미 속리산의 구봉설이 전래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셋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난 대(臺)가 여덟 개다. 곧 문장대·입석대(立石臺)·경업대(慶業臺)·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신선대(神仙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가 그것이다.

넷째로 속리산은 바위 대문(石門)이 여덟 개다. 곧 내석문(內石門)·외석문(外石門)·상고내석문(上庫內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비로석문(毘盧石門)·금강석문(金剛石門)·상환석문(上歡石門)·추래석문(墜來石門)이 그것이다.

다섯째로 속리산은 그 아래쪽에 물줄기가 아홉 구비로 돌고 돌면서 꺾어지는데, 그 한 구비마다 다리가 있어 도합 8개의 다리가 있었다. 속리산은 이렇듯 여덟 팔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닌 산으로서, 또한 조선8경의 하나로도 일컬어진 훌륭한 팔자를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상봉의 본래 이름은 천황봉(天皇峯)이 아닌 천왕봉(天王峯)이다. 현재 속리산의 최정상 자리에 속리산번영회가 1994년에 세운 돌비에도 ‘天皇峯’이라 써놓고 있으나, 이는 일제시대에 왜곡시켜 놓은 왜색 산봉이름이다.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보은군속리산사실(報恩群俗離山事實),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지지 등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속리산의 현 천황봉은 본래가 천왕봉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이곳 천왕봉 정상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속칭 천왕사, 일명 속리산사(俗離山祠)가 있었는데, 천왕봉의 봉이름과도 연관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신(神)은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아다가 제사지내는데, 그곳에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한일합방 직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를 상세히 조사하면서 제작한 ‘근세한국 오만분지 일 지형도’에 속리산의 상봉을 ‘天皇峯’으로 표기한 이후부터의 일이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산이름, 봉이름 등을 접하면서 일본 천황을 인식하게 하려고 한 저의가 깔려있는 의도적 개칭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이름 중 고유의 산이름·봉이름을 천황산·천황봉으로 개칭하여 표기한 것이 상당수가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울산시 상북면과 밀양시 단장면?산내면 경계에 위치한 천황산(1,189m·원래 재약산)
②함양군 병곡면?서하면 경계에 위치한 괘관산의 상봉인 천황봉(1,288m·원래 천왕봉). ③남원시 보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위치하는 천황산. 일명 천황봉(910m·원래 만행산. 속칭 보현산).
④진안군 주천면 구봉산(995m)의 상봉 천황봉(원래 천왕봉).
⑤전남 영암군?강진군 사이에 위치한 월출산의 상봉 천황봉(809m·원래 천성봉).

세 강의 발원지 문장대

▲ 대동여지도의 속리산 부분. 천황봉이 아니라 천왕봉으로 표기돼 있다.
문장대(文藏臺·1,054m)는 천왕봉 북쪽에 위치하면서 천왕봉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속리산의 걸출한 봉우리다. 오늘날처럼 산의 고도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던 시절의 옛 사람들은 대개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문장대는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름 속에 웅장한 대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봉우리다. 문장대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초기에 세조가 피부병 치료 차 속리산에 들어와 요양하던 시기의 행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그 당시 꿈속에 월광태자(月光太子)라 하는 귀공자가 나타나 왕에게 동쪽으로 시오 리(里)를 오르면 영험한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튿날 조신들과 더불어 향(香)과 축(祝)을 싸들고 산꼭대기를 헤메어 이윽고 한 영롱한 멧부리에 올랐더니, 널따란 바위봉우리 위에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세조는 꿈속의 계시에 새삼 탄복하며 엎드려 기도한 후 책장을 넘기면서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이로부터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세조의 속리산 행적에 부회되어 생겨난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고려 문신 박효수(朴孝修·?-1377)의 우제속리사시(偶題俗離寺詩)에 ‘문장대 위엔 천고의 이끼 덮이어 있고(文藏臺封千古蘚)’라고 한 시구를 보더라도 이미 고려시대에도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에서는 모두 문장대를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금강, 북쪽의 달천으로 흘러가는 세칭 삼파수(三派水)의 발원지로 언급하고 있다. 곧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대 위에는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 계속 전하여 온 세 강의 발원설이다. 속리산을 답산하면서 이를 정밀하게 살펴본 이만부는 문장대 정상의 발원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여기 와서 증험하여 보니 이 세 강은 본시 그 근원을 이 산에 두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문장대 정상에서 발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장대 위에 있는 바위의 등에 Y자 모양의 흠 자욱이 있고 이것이 동쪽?남쪽?북쪽의 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데, 이로 인한 기록의 잘못일 것이다.’<지행록 속리산기>

현재도 문장대 정상에 오르면 삼파수의 발원처가 되는 가마솥 만한 물웅덩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빈 웅덩이만 패인 채 두세 군데 있을 뿐이고, 이만부 선생이 이곳을 답산할 때처럼 Y자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웅덩이의 모습도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많이 변화되었는지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장대를 삼파수의 발원처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였던 옛날의 일이다. 현재는 천황봉(천왕봉)이 확실한 속리산의 최고봉이라 하여 그 정상에 세운 천황봉 석비 뒷면에 천황봉을 삼파수의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업대와 수정봉

▲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 중 문장대에서 샘이 솟는다는 여지승람의 언급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부분.
문장대에서 속리산 정상의 천왕봉을 향하여 주능선을 따라가면 신선대 삼거리가 나오고, 천왕봉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입석대(立石臺)가 나온다. 또 신선대 삼거리에서 서남쪽 금강골로 한 20분 정도 내려가면 경업대(慶業臺)가 나온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경업대는 곧 조선의 영웅적 무장이었던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의 무예 수련장이었다.

독보대사(獨步大師)에게 무예를 사사 받으면서 이곳에서 불철주야하고 7년을 수도한 끝에 그의 힘을 시험해 보기위해 누워있던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일으켜 세워 놓았다는 것이 바로 해발 약 1,000m 되는 산정에 곧추 서 있는 입석대다.

경업대 일대의 하산길에서 외돌면서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창건하였다는 관음암(觀音庵)을 향하면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거대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진 듯 서있는 석문을 지나가게 된다. 이것이 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이 석문을 지나면 속칭 ‘임경업토굴’로 일컫기도 하는 바위동굴이 있다. 그 동굴 속에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신기한 샘물이 고여 있다. 임경업 장군이 마시던 샘물이라 하여 세칭 장군수(將軍水)라 불린다. 샘이 깊어 배를 깔고 엎드려 팔을 뻗어 한 바가지 떠서 먹어보면 매우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과연 소문대로 불로장생의 약수로구나 하는 짜릿한 느낌이 가슴속에 전해온다.

법주사 서쪽에는 청동미륵대불의 배경을 이루면서 속리산의 주봉들로부터 외떨어져 있는 한 봉우리가 있으니, 곧 수정봉(水晶峯?566m)이다. 이 봉우리는 속리산 주능선 상에 이어져 있는 연봉들을 한꺼번에 감상해 볼 수 있는 속리산 최고의 전망대다.

고종 때 경내에 무려 60여 동

법주사는 속리산 기슭,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위치한 대찰이다. 일주문 현판에 씌여 있는 그대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이다. 경내에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받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 팔상전(捌相殿)과 석련지(石蓮池), 쌍사자석등 등이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의 2층 불전 건물 대웅전과 그 내부의 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매우 웅장한 규모의 건물과 불상이다.

팔상전 서쪽에는 1989년에 완성한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과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금동미륵장륙존상을 봉안하고 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일명 산호전(珊瑚殿)이 있었던 자리다.

조선 고종 10년(1873년)에 편찬된 법주사 사적에 의하면, 법주사 경내에는 60여 동 건물이, 산내에는 7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그 암자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해도 58개 암자에 이른다. 법주사는 그 전성기 때 한 산중에 이처럼 많은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들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속리산은 진실로 하나의 거대한 불국토를 이루고 있던 불교 명산 중의 하나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절이다. 초창시에 의신이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서 이곳에 와 머물렀기 때문에 법주사라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의신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절을 창건하였으므로 인도의 불법이 와서 머물고 있는 절이란 의미로 법주사로 일컫게 되었다고도 한다.

8세기 초엽 신라 성덕왕 때 중창하였다. 지행록에 의하면, 이때 왕이 법주사라는 절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8세기 말엽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인 대덕(大德) 영심(永深)이 경내 길상초(吉祥草)가 나는 곳에 스승이 절 지을 자리를 표하여 둔 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였다. 속리산 경내에 창건된 길상사와 진표율사의 사상적 영향으로 인해 이후 그 본부사찰인 법주사는 모악산 금산사, 팔공산 동화사와 함께 법상종(法相宗)의 중심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법주사의 중창 시기에 있어서 흔히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진표율사사적기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결과에서 초래한 잘못이다. 766년~770년 시기에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갈 때 속리산에서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길상사 창립지지로서 표시해 둔 곳에 제자인 영심이 776년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부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상고암(上古庵, 上庫庵)에 오르면 북쪽으로 상암(上庵)이 바라보이는데, 본래의 길상암(吉相庵)이다’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심 대덕이 창건한 길상사는 비로봉 기슭에 있었던 절로, 현 법주사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법주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왕자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크게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소된 것을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르포

건성으로 대하기 쉬운 비산비야에 대한 '헌사'
추풍령~용문산~백학산~화령재 55km

‘결국 자연이란 쪽마다 중요한 얘기를 담아서 건네주는 유일한 책이라 하겠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우연히 <“한마디” 책 사랑>이란 책을 보다가 얻게 된 한 구절이다. 자연을, 산을, 그리고 ‘백두대간’을, 들고 다닐 수 없는 한 권의 ‘경전’이라고 쓴 적이 있는 터여서 반가움의 강도는 아주 진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반가움은 등 가려운 홀아비 효자손 만났을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긁을 것도 없이, 가려움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니까.

▲ 순한 능선. 편안한 산길. 이번 구간의 대부분 트레일은 산책로처럼 호젓하다.

산과 책은 닮은 데가 많다. 다가오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첫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몇 년을 두고 만지작거리다가 끝내는 독파를 포기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은 그 둘째다. 그러나 산이든 책이든 지극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에게는 자신을 감추는 법이 없다. 이것이 셋째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백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한다(讀書百遍義自通)’고 했다. 엄홍길·박영석·한왕용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이라는 책을 읽어낸 사람들이다.

물론 산과 책은 판이한 데도 많다. 우선 책은 들고 다닐 수 있지만, 산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책은 설렁설렁―적당히 건너뛰면서―읽을 수 있지만, 산은 그럴 수 없다. 동네 뒷산이든 에베레스트든 ‘한 걸음의 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이 산과 책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래서 나는 앞서 인용한 ‘자연이란 쪽마다 중요한 얘기를 담아서 건네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괴테의 말 중 ‘쪽마다’라는 부분에 특별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백두대간 종주를 한 권의 책읽기에 비유해 보자. 대부분의 독서 행위가 그렇듯이 쉽거나 어렵거나, 재미있거나 지루하다. 그렇다면 이번 구간 추풍령에서 화령까지는 어떤가. 통념대로 표현하자면 쉽고 지루하다. 높은 산도, 조망이 좋은 봉우리도, 깊은 계곡도 없다. 구간 전체의 실거리가 약 55Km에 이르지만, 용문산(710m)과 백학산(615m)을 제외한 나머지 산은 모두 600m 미만이다. 동네 뒷산 같은, 흔한 말로 야산에 가까운 산들이다. 책읽기로 치자면 건성건성 건너뛰며 읽게 만드는 구간인 것이다.

'살기에 알맞으나 산이라고 하기 어렵다‘

▲ 반토막난 백두대간. 추풍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금산은 과도한 석재 채취로 등성마루의 북쪽 절반이 헐렸다. 자병산과 함께 대표적 훼손지 중 하나다.
실제로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 이 구간은 야산으로 인식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테와는 다른 종류의 ‘산 읽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책의 야산편에 해당할 이번 구간의 ‘쪽마다’ 담긴 중요한 얘기란 과연 무엇일까?

야산의 사전적 의미는 ‘들 근처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의미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하자면 산 같지 않은 산을 일컬을 때 끌려나오는 말이다. 보통 이런 산들은 일삼아 오를 대상에서 제외된다. 늘 가까이에 있어서 오히려 희미해진 존재감에 경외의 감정이 깃들 여지도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산들이 없다면 우리는 설사 시골에 산다 해도 여름밤 소쩍새 울음소리를 창문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네 삶 속에서 쉽게 곁을 주고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산은 높고 험한 산이 아니라 야산이다.

평소에도 나는 야산이라는 말에 섞인 콧방귀 냄새가 싫었다. 그러던 차에 55km(남한 백두대간의 약 7.5%에 해당하는 거리)에 달하는 야산(?)을 걷고 나자 약간의 오기와 또 그만큼의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나는 괴테의 ‘한 말씀’을 만났다. 나는 주저없이 이번 종주 르포를 ‘야산에 대한 헌사’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

헌사의 첫 구절은 취재팀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저 얻었다.

“정말 평화로워요. 우리 산이 아니고서는 이런 평화로움을 느낄 수 없어요.”

취재팀 김석우씨의 말이다. 그는 산길을 걷다가도, 산행을 끝내고 야영을 하면서도 노래 부르듯 이 말을 읊조렸다. 20여 일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트레킹을 다녀온 직후여서 우리 산에 대한 느낌이 각별했던 모양이다. 그는 또 히말라야의 척박함에 대해 말했다. 내가 듣기에 그가 말하는 척박함의 의미는, 산 자체의 척박함보다는 그곳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읽혔다.

산악 영화를 준비해 온 영화감독인 그는 지금 ‘문경산악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또 다른 형태의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다. 우리 산의 평화로움에 대한 그의 예찬이, 그가 고른 영화 사이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인플루엔자처럼 관객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결론삼아 말해서 추풍령에서 화령까지 백두대간의 산들은 사람과 산이 함께 살고, 늙고, 죽어가는 공간이다. 아주 평화롭게.

▲ 백두대간이 준 간식, 오디. 산자락 곳곳에 마을이 있어서 자주 이런 횡재(?)를 만날 수 있다.
간단히 이번 구간의 지리적 특징을 개관해 본다. 우선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를 포함하여 7개 포장도로와 1개 철도가 지난다. 그만큼 산들이 낮다는 얘기다. 기슭에는 과수원과 논밭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능선 위에는 무덤이 또 끊임없다. 삶과 죽음이 더불어 한가롭다. 이런 산의 형국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했을까.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경치가 그윽하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살기에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

택리지의 기록이다. 산의 의미를 ‘높이’에서 찾은 인식의 결과다. 현대 지리학의 개념으로 말하면 노년기의 산들이다. 당연히 이런 산들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에서 드물지 않게 보게 되는 성황이나 산신각이 없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찌 이런 산을 즐겁게 걷지 않을 수 있을까.

묘(卯)함산이 아닌 난(卵)함산

사뿐히 추풍령 마루에 선다. 남상규의 노랫말처럼, 자고 가는 구름이나 쉬어 넘는 바람 같은 건 없다. 해발 210m에 불과한 4번 국도 상의 희미한 고개일 뿐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런 노랫말이 생겨났고,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졌을까.

추풍령의 무게감은 대관령이나 죽령 같이 압도적 높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추풍령은 낮아서 높이 이름난 고개다. 20세기 이전까지의 추풍령은 조령(문경 새재)처럼 영남과 서울을 오가는 인마(人馬)가 붐비던 고개가 아니었다. 근세에 들어 철마(鐵馬)가 넘나들면서부터 비로소 분주해진 고개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부터다. 가파르지도 않고, 굴을 뚫을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기차가 지나기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이후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추풍령은 우리나라 고개를 통틀어 가장 바쁜 고개가 되었다. 이때부터 통일신라 때 9주의 하나로 큰 고을이었던 상주는 추풍령을 낀 김천보다 한갓진 도시가 되었다. 조선 성종 때 전국을 8도로 정리하면서 오늘의 경상남?북도를 경상도라 칭했을 때 그 이름은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었다. 도로 하나가 고을과 고개의 지위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산 속에서의 '평화'. 이번 구간은 아기자기한 우리 산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4번 국도 상에 있는 본디 추풍령도 이제는 역사적 흔적으로나 남게 됐다. 영동-김천 구간이 확장과 함께 선형이 변경되면서 고가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재 고갯마루에 있던 노래비는 딴 곳으로 치워져 있다. 만약 처음으로 종주를 하는 사람이 노래비를 표지로 트레일을 찾으려 하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만 하게 된다.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의 경계표지를 기점으로 힐튼모텔을 왼쪽에 두고 큰 길을 따라 곧장 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금산으로 오르는 트레일을 찾을 수 있다.

금산으로 오르는 초입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다. 트레일 양쪽으로 산딸기가 무릎을 간질인다. 그 몸짓을 따라 기슭으로 눈길을 주자 은사시나무 잎사귀들이 아직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햇살을 은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20분 쯤 지나자 금산(370m) 정상이다.

그런데 지도에 그려진 이 산 북쪽 기슭의 등고선은 허공에 그려진 가상의 선일 뿐이다. 능선의 북쪽 절반이 몽땅 헐려나갔기 때문이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먹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1962년부터 철도 레일에 까는 자갈로 쓰기 위해 계속 헐어낸 탓이다. 현재는 채석을 중단하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를 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 붐이 더 이상의 훼손을 막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산을 내려서자 트레일은 아늑한 숲길로 표정을 바꾸고 있다. 여름으로 다가서는 숲의 얼굴은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 같다. 보송보송한 코밑수염이 거뭇해지듯이, 연록색 잎들은 어느새 검푸르게 이글거린다. 다투어 피어나던 꽃잎들도 우월적 지위를 잎사귀로 넘겼다. 씨앗을 여물게 하는 일로 본분사가 바뀐 것이다. 앞으로 이들은 몇 달 동안 햇빛과 비와 바람과 격렬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조망거리라고는 없는 숲길을 잠행하듯이 2시간쯤 걷자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사기점고개에서 20~30분쯤 나아가면 난함산(733.4m)으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는 난함산(卵含山)이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취재 결과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이었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 백학산 내려서서 만난 호밀밭. 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파란 지문'.

난함산인지 묘함산인지 알쏭달쏭해 하는 동안 길도 헷갈린다. 시멘트 포장길이 마치 뱀이 구불거리듯이 대간의 등성마루를 지나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든 곧이곧대로 끊어진 대간 등성을 따라가든 작점고개로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편한 길을 택했다. 덕분에 길가에서 오디를 따먹는 즐거움도 누렸다. 시멘트 포장길이 아스콘 포장길을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능치리고,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작점고개다. 당연히 고개로 올라야 한다.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으로 ‘능치쉼터’라는 현판을 단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런데 대간 종주 자료에는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다.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만약 이 고개가 시끌벅적한 저자의 고개였다면 당연히 동네마다 연고권을 주장할 텐데, 워낙 외진 곳이어선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초여름 대간의 밤은 진양조로 온다

능치쉼터(정자)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고 낮잠까지 한소끔 잔 다음 무좌골산(470m)을 향한다. 2시간쯤 걷자 용문산(710m)이다. 트레일도 좋은 데다 적당한 간격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어선지 길이 줄어드는 속도가 무척 빠르게 느껴진다. 용문산 오른쪽 기슭의 용문산기도원은 우거진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5년 전 이 길을 지날 때는 훤히 내려다보였었는데, 몇 년 사이에 눈으로 느낄 정도로 숲이 무성해져 있다.

용문산에서 국수봉(763m)까지는 1시간 남짓 시원하고 편안한 길이다. 국수봉 정상의 조망도 우거진 숲이 독점하고 있다. 정상을 벗어나 북쪽으로 10m쯤 나아가면 시야가 툭 터지면서 경북 상주시 공성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부터는 대간의 좌우가 모두 상주땅이다.

국수봉에서 큰재까지는 줄곧 경쾌한 내리막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달릴 수는 없다. 10분쯤 지나자 아기자기한 바위가 어우러진 조망처가 나타난다. 눈앞으로 큰재 위 초등학교 건물의 머리부분이 보인다. 대간의 기슭이 쫙 편 손가락처럼 흘러내린 사이사이로 조그마한 산골마을과 논밭들이 한가롭게 누워있다. 산이 우리를 어떻게 보듬어 안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산의 품에 기대 있는지를 한 폭의 고운 수채화처럼 펼쳐 보인다.

큰재까지 내리막길은 초가지붕의 곡선처럼 순하다. 한결 가벼운 발길은 눈길을 바쁘게 한다. 은방울꽃 둥글레꽃잎은 모두 땅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심심찮을 정도로 껑충한 엉겅퀴가 쑥스러운 듯 눈인사를 건넨다. 보일 듯 말 듯 꽃을 피운 은대난초도 가끔씩 눈에 띈다.

중모리 정도로 시작하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에 가까운 속도로 끝낸 20km. 그런데도 큰재에 몸을 세운 시간은 오후 6시30분밖에 되지 않는다. 해가 지려면 1시간이나 남았다. 느긋하게 걷는 편인 평소 취재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그런데도 허급지급 걸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편안한 길 덕분이다.

▲ 백두대간 위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상주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하는 취재팀.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속출된 폐교 중 하나로 1997년에 문을 닫았다.

초여름 백두대간의 밤은 진양조로 온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우리는 최대한 게으르게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 폐교가 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운동장. 백두대간 위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곳이다. 도시의 탐욕이 토해낸 이 역설적 평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민망스럽게 행복하다. 개구리 소리에 소쩍새 울음이 섞여든다. 소리와 음악의 경계가 지워진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카치카치, 깍깍.’ 낮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로 까치 울음소리가 아침햇살을 대신한다. 아침밥을 짓는 동안 취재에 동행한 강문호씨(서울문리대 산악회 OB)가 학교 뒤편에서 산딸기를 잔뜩 따온다. 먹는 일에 관한한 언제나 독창성을 발휘하는 취재팀의 이원영씨가 냉큼 소주에 집어넣는다. 오늘 만찬은 화려할 것이다.

무성한 덤불을 이루고 있는 산딸기밭을 헤치고 다시 대간 마루에 선다. 오늘도 대간은 성난 파도가 아니라 미풍에 살랑대는 잔잔한 바다처럼 흐를 것이다.

능선길에서 30~40분쯤 나아가자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나타난다. 잠시 머뭇거린다. 길 너머로 대간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서다. 지도를 확인하고 나서 과수원쪽으로 길을 따라가자 오른쪽으로 트레일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회룡재, 개터재를 지나 백학산 전 생태이동통로가 놓인 임도까지도 큰 기복이 없다. 이곳에서 이번 종주의 클라이맥스라 할 백학산(615m) 정상 길도 여느 험산처럼 가파르지는 않다. 부드럽게 1시간 정도 키를 높이면 된다.

칠순 종주객의 ‘대단함’, 또는 ‘무모함’

백학산에서 1시간30분쯤 내려서자 들풀이 무성한 농로가 나타난다. 대간 트레일은 왼쪽으로 몇 걸음 농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기슭으로 방향을 바꾼다. 느긋이 봉우리를 하나 넘자 우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중년을 갓 넘긴 듯한 대간 종주자가 쉬고 있다. 또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도 한숨을 돌리려는데, 조그만 카메라 가방을 내보인다. 칠순 기념으로 일시 단독 종주에 나선 한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주운 것이라 했다.

가방 안 메모지에는 비장함마저 묻어나는 종주의 변이 적혀 있다. 내일도 계속 걸을 우리가 그 할아버지를 만날 것 같으니 카메라를 좀 전해 달라고 한다.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하는 순간 헐레벌떡 한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배낭을 벗어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 부지런히 안내산행팀을 따라다니며 체력을 다진 다음 종주에 나섰다고 한다. 취재팀 모두는 우리보다 압도적인 열정의 이용찬 할아버지께 유보 없는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참,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빈 몸으로 우리보다 앞서가시던 할아버지가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우리보다 뒤처지는 순간 ‘대단하시다’고 했던 생각은 한 순간에 ‘무모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진짜로 말리고 싶다. 아무리 건강하다손 치더라도 25kg의 무게는 무리로 보인다. 그 무게에 짓눌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뒷모습은 산행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가까워보인다.

과연 무엇이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하는 것일까?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내게는 그만두시라고 말릴 자격이 없다. 하지만 무게를 줄이라는 권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끝내 나는 그것도 건방진 행동일 수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지기재를 지나 포도밭 한 귀퉁이에서 야영 준비를 하시는 할아버지와 헤어진 우리는 신의터재를 향한다. 이곳에서부터 대간은 한참 동안 옆구리에 논밭을 끼고 간다. 20~30분쯤 지나 슬랩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서서 신의터재까지는 1시간 남짓. 오늘 운행 거리는 약 25km. 두 다리의 능력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일까?

땅거미가 짙어올 무렵 신의터재에 도착한 우리는 고개 왼쪽 2km 못 미친 화동 마을의 화동식당(054-533-9275)에서 탕수육을 시켜 깜짝 파티를 즐겼다. 산길을 걷다 녹초가 된 다음 맞이하는 이 유치한 행복감. 단순의 즐거움.

해발 280m 정도인 신의터재는 이번 구간의 모든 고개가 그렇듯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임진왜란 이전 이 고개는 신은현(新恩峴)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임란 때 의병장 김준신이 이 고개에서 의병을 모아 큰 전공을 세우고 임진년 4월25일 순절한 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린다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어산재로 불리다가 광복 50주년을 맞던 해에 제 이름을 되찾았다 한다.

신의터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화령까지는 10.5km로 웬만한 하루산행 거리다. 하지만 쉬어 가도 4~5시간이면 족할 정도로 편하다. 큰 기복 없이 좌우로 휘돌다 윤지미산(538m) 정상에서 30여 분 정도 가파른 내리막이 오히려 힘들다. 그 길을 내려서자말자 무덤가에 누운 우리는 주검처럼 평화롭다.

한 걸음, 한 걸음! 산다는 것도 결국 이것이 아닐까. 걷든 뛰든 허공에 발을 딛을 수는 없는 법. 그런데 나는 왜 이 단순한 진리를 산에서 내려서는 잊어버리는 걸까.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5)
배낭 속에서 우려내는 차

뜨거운 여름, 배낭 속에서 후근 달아오른 뜨뜻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이럴 경우 물통이나 페트병에 녹차 티백을 넣으면(현미가 들지 않은 것으로 2리터에 1개면 적당함) 청량한 느낌의 물을 마실 수 있다. 녹차의 냉랭한 기운이 열기를 가셔주기 때문이다. 남은 티백은 음식 그릇을 닦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만약 원두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산에서라 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휴대 간편한 천으로 만든 드리퍼를 사용하면 된다. 퍼콜레이터를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 번거로움은 조금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여유로운 느낌과 즐거움은 기대 이상이다. 피로감을 휘발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찌꺼기는 기름기 있는 그릇을 닦는 탁월한 세재이기도 하다.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역사지리

‘낮고 평평하여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통 산맥이란 외형적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 의미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구간은 국수봉(680m)과 백학산(615m)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계를 이루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날줄이자 산경(山經)이다. 이 구간의 지형적 특성은 비산비야(非山非野), 혹은 야산(野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나지막한 등성이의 연속이다.

▲ 봉황산 아래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로 서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擇里誌)에서,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시골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맥은 화령에 이르러 몸을 추스르다가 급기야 봉황산(740m)으로 일단 한 번 솟구치고는 속리산(1,057m)이라는 백두대간의 큰 허리를 일으키게 된다.

이 구간의 산줄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산경(山經)이라는 개념을 역사지리적으로 고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산경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흔히 산맥(mountain range)이라고 번역되는 학술적인 개념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며, 한국 사회에서 한반도의 산맥체계를 둘러싼 학계와 일반인들의 혼란은 서로 다른 개념이 산맥이라는 같은 용어로 혼용된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알다시피 산경이라는 말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조선 후기 신경준(1712-1781)의 저서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로서 말 뜻 그대로 산의 날줄, 다시 말해 산줄기의 종적인 계열, 혹은 경로를 말한다. 신경준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로, 그는 이미 산수경(山水經)이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산경은 곧 분수계를 의미

산경(山經)이 있으면 마땅히 수경(水經)도 있을 터인즉, 다산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한강 이북 지방의 주요 하천의 계통과 이에 관련된 자연지리·역사·군사·정치·지역 등의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산경이라는 개념은 형태적으로는 산과 산을 이어주는 능선의 날줄적인 계열이고, 이것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인식으로는 분수계(分水界)를 뜻한다.

그러면 산맥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산맥’이라는 용어의 뜻과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이라는 번역어의 개념을 비교해 고찰해 보자. 전통적인 산맥이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보면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나타난다. 그 첫째는 산경과 같이 산줄기라는 뜻으로 사용됐으며, 또 하나는 산의 기맥이라는 뜻으로 풍수적인 인식체계에서 표현된 말이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권의 천지문 편에는 ‘선비산맥(鮮卑山脈)’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기서 백두산에 이르는 ‘산의 줄기와 가지(枝幹)’를 설명하면서 산맥의 경로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18세기 중엽)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각 지방에 이르는 산줄기의 경로를 기술하는 대목에서 ‘산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 대동여지도의 추풍령~화령 구간. 실제 산줄기 보다 굵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이 두 가지 문헌에서 보자면 조선 후기에 산맥이라는 말은 산줄기의 경로, 혹은 지간(枝幹)이라는 뜻으로서, 산경이라는 용어와 유사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효종 2년 조의 기사를 보면 ‘파주에 은혈(銀穴)이 있다고 하니 관상감 제조가 지관을 데리고 가서 살피게 하여 산맥을 범하지 않으면 채취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의 기맥(氣脈)이라는 다분히 풍수적인 의미다. 따라서 전통적인 산맥 개념은 외형적인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산줄기 개념을 산경, 산맥, 산계로 구분하자

그런데 문제는 현대에 들어와서 근대 서구 지형학의 ‘mountain range’ 개념이 산맥이라는 말로 번역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다. 왜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산맥이라는 말은 ‘지반운동 또는 지질구조와 관련해 직선상으로 길게 형성된 산지’ 로서 그 개념적 기초가 전통적인 산맥 개념인 외형적 산줄기, 혹은 분수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지질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형태적으로는 다발 혹은 계열(系列)의 체계이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의 학술적 용어다. 이는 산경표와 같은 형태적이고 미시적이며 선적인 경로의 산줄기와는 차이가 난다.

금년 초 국토연구원이 전통적인 산줄기 개념의 산맥체계를 과학적으로 재정립한 연구 결과를 놓고 대한지리학회가 반박한 내용은 정확히 용어와 개념의 혼동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리학회의 주장에 의하면, 산맥과 분수계(分水界)의 개념은 다르며, 분수계는 유역 분지를 구분하는 능선을 따라 선으로 표현되지만, 산맥은 여러 개의 산줄기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넓은 폭을 가진 연맥(連脈)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산맥은 한반도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중국, 연해주, 시베리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의 장기간에 걸친 지반구조운동에 따른 광범위한 산맥체계의 일부라고 말했다.

산맥을 일반인들이나 산악계에서는 산줄기의 경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지형학계와 현행 교과서에는 지질구조적 개념으로 달리 쓰이고 있는 현실상의 괴리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제의 실마리가 산맥이라는 용어의 혼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차라리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산계(山系)’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 성봉산과 재학산 사이의 골짜기인 공성면 효곡리에는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다.이곳은 우곡 송량(宋亮)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렇게 산지체계를 산경·산맥·산계의 세 측면으로 접근할 때 서로를 비교해 보면 산경이라는 용어는 외형적인 산줄기의 경로라는 뜻이 강하고, 산맥이라는 용어는 가시적인 산줄기와 풍수적인 산의 기맥이라는 양면이 내포되어 있으며, 산계라는 말은 지형학적으로 지질구조에 기초한 구조적인 산지체계라는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한반도의 산을 훨씬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의 생활과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산줄기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적인 독특한 풍수사상의 기맥이라는 통찰로 산을 이해할 수도 있고, 거기에다 근대과학의 합리적인 체계로 산지의 구조적인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맥 논의는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다는 양자택일적이고 절대우위적인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 있고 상호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담론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각 측면의 의의를 살펴보자면, 산경이라는 개념은 지역적인 생활권이나 가시적인 산줄기의 체계를 파악하는 데 유리한 반면,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경이라는 개념에 풍수적인 기의 관점을 복합해 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학술용어로서의 mountain range(산맥)라는 개념은 한반도 전체의 거시적인 산줄기 구조와 체계를 이해하는 데 장점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실제 굵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표기

▲ 신봉리 석조보살상.
이러한 논리로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산지를 적용시켜 보면 이 구간은 구릉성 산지의 연속이기 때문에 지형학적인 산맥(산계) 개념보다는 전통적인 산경 개념으로 설명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이 구간은 실제적인 산줄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그려지고 있으니 대간 줄기라는 인문적 가치가 개입되어 표현된 것으로 해독할 수 있다.

역사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추풍령에서 오도치 구간을 제외하고는 상주의 권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상주 서쪽을 종단하는 산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 조선에 걸쳐 군사적 요충이자 영남의 대읍이었던 상주의 영향력과 문화적 파급력이 크게 미친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간을 형성하는 줄기를 기준으로 동쪽 사면은 상주읍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전면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를 확보하고 있어서 수많은 촌락이 형성되어 발달했고, 상주시 청리면의 체화당(華堂)이나 존애원(存愛院) 등 조선조 지배층의 역사유적이 많이 들어섰다. 특히 존애원은 상주의 위상을 잘 드러내주는 현장으로, 상주의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성리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뜻에서 1559년에 설립한 질병퇴치를 위한 사설 의료원이다.

상대적으로 대간 줄기의 서사면 권역은 산지로 에워싸인 좁은 분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동사면 권역에 비해 마을의 숫자도 적을 뿐더러 촌락의 발달은 더딘 편이었다. 성봉산과 재학산 사이의 골짜기인 공성면 효곡리에는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는데, 이곳은 우곡 송량(宋亮·1534-1618)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택리지>
추풍령에서 뻗어 올라가던 대간 줄기가 속리산으로 이어지기 전의 고개인 화령은 상주에 이르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이라고 택리지에는 적고 있다. 소재는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성리학뿐만 아니라 양명학, 불학, 시, 문장과 서도에도 일가를 이룬 분으로 알려져 있다.

화령이 속하는 화서면 면소재지에는 화령장이 지금도 3일과 8일에 선다. 또한 화령장 북쪽으로는 태봉산이라고 있는데, 여기는 연산군 왕자의 태실을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태실금표비(胎室禁標碑)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이 현재 면소재지 입구의 국도변에 있는데,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여기가 상주로 이르는 주요 고갯마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령에서 속리산쪽으로 바라보면 봉황산이 수려한 자태로 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그 아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를 드러낸다. ‘사람은 나이가 더할수록 근심이 쌓이고, 백발만 늘어나는데 저 노송은 의연히 푸른 산빛을 더하고 있구나.’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