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두대간 남류설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남류하여 종기한 웅산
여지승람, ‘백두산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여기 이른 것’

지리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조종인 백두산의 큰 줄기가 남류(南流)하여 남해가에 종기한 남녘땅 최고의 웅산(雄山)이다. 그 때문에 지리산은 옛부터 일명 두류산(頭流山), 또는 두류산(頭留山)으로 애칭되어 왔다.

‘두류산’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아온 지리산의 별칭으로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려조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지리산 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 와 동국여지승람 남원조 지리산기에 잘 나타나 있다.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꽃봉오리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帶方郡·남원)에 이르러서 수천 리에 서리어 맺혔다. 그 테두리는 무려 10여 고을에 뻗치어 있다’ (파한집).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니, 여진(女眞) 백두산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流 자는 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여지승람).

▲ 운해가 들어찬 지리산 천왕봉. 여지승람에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流 자는 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는 언급이 있다.

위의 두 기록에 보이는 백두대간 남류설은 고려시대 이래의 우리 선인들의 전통적 산악관이 잘 드러나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산사상(山思想)으로서,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곧 삼국유사 권3의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 및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字傳記)에 전하는,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神文王)의 태자 보천(寶川)이 오대산 등지에서 수행하여 성승(聖僧)이 된 후 입적시에 남긴 유기(留記)에 의하면, ‘오대산(五臺山)은 곧 백두산의 대맥(大脈), 또는 백두산의 대근맥(大根脈)으로, 각 대(오대)에는 진신(眞身)이 상주하고 있다’고 하여 오대산을 백두대간 상에 있는 영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6년(1357)조 기사에 인용된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의 옥룡기(玉龍記)에도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으로, 흑(黑)을 부모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았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 상에 형성된 여러 명산들이 모두 북쪽 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그 대맥이 남으로 흘러와 형성되었다고 하는, 백두대간 남류설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전래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곧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에 의하면, ‘신라시대 의상(義相)의 청구비기(靑丘秘記)에 두류산(頭流山)은 일만의 문수보살(진신)이 머무는 세간으로, 산 아래 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성실하다고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고, 또 의상의 청구비결(靑丘秘訣·곧 청구비기)에 ‘두류산[頭流之山]에는 은거하는 이들이 많이 귀의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에 보이는 청구비기가 진실로 신라 의상조사가 저술한 진서(眞書)인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8세기 후엽 신라 고승 견등(見登)의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에도 청구기(靑丘記)가 언급되고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청학동변증설에도 청구비기를 청구기로도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지리산의 백두대간 남류설은 통일신라 때부터 전래된 것으로, 또 이로 인해 생겨난 지리산의 별칭 두류산(頭流山 또는 頭留山)이란 산이름도 일찍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지리산(智異山)과 함께 그 일명으로 별칭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지리산과 두류산은 우리 선인들의 전통적 산사상의 의미가 담겨져 1,000년 이상 불려지고 쓰여온 지리산의 대표적 산이름이다.

실학자들에 의해 백두대간 사상 확고해져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적 산악관에 의거한 백두대간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이르러 좀 더 확고하고 분명하게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곧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백두산 천지.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라는 언급이 성호사설에도 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祖宗)이다…철령(鐵嶺)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정간(正幹·본줄기)이고, 그 중간에 있는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갔다…왼쪽으로는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대간과 더불어 그 시종을 같이 하였다…오른쪽 산맥은 지리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대체로 그 일직선의 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에 이름을 붙인 것도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성호사설, 천지문, 백두정간).

이러한 백두대간 남류설에 기초한 성호의 산악관은 이후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저술로 운위되고 있는 산경표(山經表)와,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극명하게 잘 반영되어 있다.

또 숭양(崇陽) 김선신(金善臣)의 두류전지(頭流全志) 편목에도 1 두류조종보(頭流祖宗譜) 2 두류신기(頭流身記) 3 두류자손록(頭流子孫錄) 4 두류족당고(頭流族黨攷) 등으로 분류하고 두류조종보에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기술하고 있는 내용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진심으로 우리 국토를 아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 이론상으로만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진부령 종착지에 이르는 남한 지역의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통하여 직접 발로 밟아 가면서 체험적으로 이해해 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류산(頭流山·頭留山)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산사상이 담겨있는 결코 소홀시할 수 없는 지리산의 주요 일명이라 본다.

/글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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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봉화산 르포

‘대간의 비백(飛白)’ 지나 백운산 중재까지

▲ 치재에서 출발하여 고남산을 향하다 바라본 백두대간.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포레스트 카트의 자전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작은 나무’가 엄마 아빠를 차례로 잃은 다음 산으로 들어가면서 체로키 인디언인 외할아버지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서도 이 말은 옳다. 우리는 종종 임계점을 넘은 육체적 피로의 정신적 치유 능력을 경험하곤 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훨씬 더 생리적이고 때로는 성(性)적이까지 하다.’

▲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향하는 취재팀.
일본 알프스의 산마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 문단의 기인 마루야마 겐지의 말이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그러나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냉소를 내장한 그의 언어는 ‘거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통조림처럼 가공된 자연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러나 사실 자연을 표현하는 데 상투적 표현에 기대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판에 박힌 감탄사를 남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다. 그래서 나는 백두대간 종주기를 쓰면서 독자와 공모자의 관계이기를 희망한다. 진정한 공모자라면, 영화에 나오는 은행 강도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눈빛만으로 액션의 타이밍을 찾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빛을 나눌 것인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산행의 고통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나는 20kg에 가까운 배낭을 지고 마냥 즐거워하는 대간 종주자를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난동이라도 부릴 그 고통을―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즐긴다. 왜?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니 ‘성취감’이 하는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종의 ‘중독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중독자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최소한, 엄살스런 느낌표나 낯간지러운 감탄사만 떼내도 우리의 공모는 성공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없는 듯하나 분명히 그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비백(飛白)이라는 것이 있다. 붓글씨의 획에 드러난 흰 자국을 말한다. 두번째 구간의 출발점인 고기리 삼거리에서 수정봉으로 오르는 초입인 노치 마을까지가 바로 대간 등성마루의 비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산줄기는 거의 지워져 있다. 하지만 대간 마루로서 분수령의 지위는 잃지 않는다.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길의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끝내는 낙동강에 몸을 섞을 것이다.

대간 길은 고기리 삼거리에서 운봉쪽으로 1km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운천초등학교 왼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노치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 뒷산을 보면 랜드 마크처럼 선 네 그루 우람한 소나무가 보이는데, 그것을 기준 삼아 고샅길로 들어서면 ‘노치샘’이라고 쓰인 마을 샘이 나온다. 여름이라면 오아시스처럼 반가울 샘이다.

어쩌면 대간 종주자들끼리의 연대감은 한 물을 먹은 데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공동 우물을 쓰는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은 아직도 1세기 전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백두대간 종주자라면 무작정 걷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우리 고유 정서의 복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지 싶다.

▲ 노치샘을 출발하여 대간 등성마루로 오르는 취재팀.
노치샘에서부터 대간 길은 수정봉을 향해 키를 높이면서 노치 마을의 당산 소나무를 지난다. 아름이 넘는 건강한 육송인데도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운치 있게 휘어져 있다. 소나무 앞에서 잠시 몸을 돌려세워 만복대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줄기들을 바라본다. 사실 차례로 지나게 될 수정봉이나 고남산은 백두대간이 아니었다면 동네 뒷산으로 머물렀을 산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서 지리산과 같은 명산과 대간 멧등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낮은 산이 없이는 높은 산도 없는 법. 대간?정간?정맥의 산줄기 체계가 강과 산의 유기체적 관계를 통찰한 결과물이듯, 산의 높낮이 또한 거대한 생명체로서 산줄기의 꿈틀거림이다.

노치에서 수정봉(804m)까지는 1시간 남짓. 수정봉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달리 두루뭉술하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2시간 정도. 그런데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없이 소나무 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소나무 사랑은 신앙에 가깝다. 소나무 얘기만 나오면 우리는 아직도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금줄),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소나무로 지은 집), 소나무의 품에 안겨(관) 사라진다는’, 이제는 거의 생활문화 밖으로 밀려난 얘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소나무가 또 시련을 맞았다. 솔잎혹파리를 거의 제압하고 나자 소나무재선충이라는 더 고약한 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5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소나무재선충은 1988년 부산의 금정산으로 상륙했고, 현재는 포항 지역까지 북상했다는데, 아무튼 더 이상 피해가 없기만을 빌어본다.

초창기 종주자들 길 찾기에 고생했을 구간

▲ 봉화산에서 월경산으로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기우는 해와 함께 시작한 산행이어서 여원재(450m)에서 또 하루 대간 등성이를 베게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꿈결 속에서, 그 옛날 이 고갯마루에서 순절한 한 여인을 생각하면서.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고려 말 왜구의 희롱을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이 산신이 되어 이성계의 전승을 도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여원재 마루에 선 돌벅수 ‘운성대장군’에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대간 길을 잇는다. 여원재에서 시작하는 대간 길은 솔숲에서 열린다. 60~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인공 조림된 숲과는 격이 다르다. 캠프사이트로도 더 없이 좋을 숲이다.
길은 계속 소나무숲 사이로, 오른쪽으로 장교, 가동 마을을 끼고 나들이를 나선 듯 경쾌하다. 때론 농로와 겹쳐지고 무덤을 지나기도 하는 구간이므로 표식기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초창기 종주자들은 길을 이어가는 데 상당히 고심했을 것 같다.

▲ 사치재를 넘기 전 무덤가에서 행복에 겨운 나른한 휴식.
여원재에서 2시간쯤 지나면 고남산이다. 높이도 846.5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다. 반야봉을 비롯하여 노고단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능선과 남원시가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입지적 특성은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한국통신의 중계탑이 대변한다. 괴기스러울 정도의 살풍경이다. 전파도 백두대간은 쉽게 넘지 못하는 모양인지, 광주의 무등산과 합천의 가야산이 이 산에 선 중계탑 덕분에 핸드폰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편리는 자연으로부터 꾸어온 것이다. 자연이 동의한 바 없으니 약탈인 셈이지만.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는데, 동행한 정도전이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했다는 데서 산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성계는 이 산 정상에서 전장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살핀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편안한 길이다.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는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서 경로당은 곧잘 종주자들의 잠자리로 변한다.

매점 할머니는 백두대간 전문가 수준

▲ 봉화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억새밭길.
마을 끄트머리에서 매점을 하는 신순남 할머니(70)는 우리의 행색을 보고 대뜸 이렇게 말한다.

“여원재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수없이 거쳐 갔을 종주자들은 이 할머니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별별 사람 다 보지.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맞나 싶게 잘 차려 입은 신사도 있지만, 거지꼴도 숱하지.”

최고급 호텔과 선술집을 합쳐 놓아야 볼 수 있을 인간 군상이다. 사람을 대함에 층하를 두지 않는 산의 미덕이다.

매요리에서 또 지워져 버린 대간의 멧등은 운성초등학교(폐교 상태) 옆을 기준으로 가산리 뒷산으로 이어지지만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도 있다. 버들재(유치) 삼거리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가산리 뒷산의 정상(618m)에 서면 모래재(사치)가 눈 아래에 걸린다. 모래재는 지리산에서 출발한 대간이 처음으로 고속도로(88올림픽 고속국도)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간 종주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앞으로 대간 종주자의 수를 파악하려면 이 도로에서 무단횡단 범칙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리산 휴게소쪽으로 갓길을 가다가 지하 통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종주자들의 거의 없지 싶다.

여원재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던 소나무 숲길은 모래재를 지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모래재 오름길을 지나서 억새 능선을 만나면서는 적이 아쉽다. 활엽수림 지대를 걷는 것과 달리 마른 솔잎을 밟는 느낌은 융단을 지나는 것보다 더 푹신하다. 지나온 솔숲에 대해서 나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모습으로 기억해 둔다.

흔하고 흔한 게 소나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산림의 대부분은 참나무림으로 천이(遷移)가 완성돼 가고 있다.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다양성 차원에서 보면 우려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참으로 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이어진다. 남원시 운봉읍 일대다. 그런데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우기도 했고 좌절시키기도 했다.

40km 전구간, 동네 뒷산 산책하는 기분 들 정도로 순해

▲ 백두대간 산마을인 운봉읍 삼산리의 소나무 숲.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의 태조가 될 전기를 마련한다. 고려 말 우왕 3년(1380) 8월, 500여 척의 대선단으로 침입한 왜구는 충청?전라?경상 3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여 9월에 운봉에까지 북상한다. 이 때 아지발도를 우두머리로 한 왜구는 이성계에게 섬멸되는데, 이 전투를 역사는 황산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북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

또한 운봉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다.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가 긴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고, 무겁고 호쾌한 발성의 동편제는 백두대간의 이남 즉 전라도 동북 지역의 운봉에서 태어났다.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가왕(歌王) 송홍록(1780년 경-1863년 경)과 국창(國唱) 박초월(1916-1983)이 태어난 곳인 까닭이다. 최근 남원시에서는 황산대첩비 옆 비전 마을에 이들의 생가를 복원했다. 하산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들러볼 만한 곳이다.

▲ 여원치의 마애불. 임진왜란 때 숨진 여인의 넋이 마애불로 화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복성이재를 지나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을 넘나드는 고개인 짓재(지도에 치재라고 표기돼 있지만 나는 짓재라고 쓴다. ‘치’와 ‘재’ 모두 고개라는 뜻인데 동어를 반복할리 없지 않은가. 고개가 가팔라 갈 ‘之’자로 오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 아닐까)에서 운행을 마치고 막영 준비를 끝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자리에 든다. 옆 텐트에서는 금방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코고는 소리의 주인은 이번 취재에 동행한 진주 산악인 왕현수씨. 만약 잠든 사이에 멧돼지 떼가 짓밟고 지나간다 해도 우리는 그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흘 째 아침. 눈(雪)은 게으른 여자의 성급한 화장처럼 채 땅을 다 덮지도 못하고 그쳤다. 안도와 실망이 교차한다. 늘 이런 식이다. 경치가 좋아서 눈이 즐거우면 다리가 괴롭기 때문이다. 대간 종주자라면 누구나 이런 양가감정에 시달릴 것이다.

짓재에서 봉화산(919.8m) 오름길은 철쭉 꽃밭이다. 봉화(烽火)라는 이름값을 철쭉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철쭉 덕분에 꽃산행지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산이지만 정상 주변엔 갈대만 무성하다. 정상 아래까지 뚫린 임도는 종주자에겐 캠프 사이트, 걷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편안한 정상 조망을 선물해 준다.
봉화산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백운산(1,278.6m) 아래 중재까지는 편안한 참나무 숲길이다. 어제 지나온 길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흔히 종주자들은 이번 구간을 가장 볼품없는 곳으로 친다. 건성으로 산을 대하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오관을 작동시키면 다양한 숲의 표정만으로도 산행은 즐거워진다.

이번 산행의 전구간(약 40km)은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게 할 정도로 순하다. 곧추선 백운산과 이어질 덕유산에 앞선 숨고르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즐거운 하산길을 위한 정보 쪽지>

행정리 마을숲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 받아

일찍 산행을 끝냈거나 하루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기 좋은 동네가 운봉읍 일대다. 아직도 옛 풍정이 그윽하다. 동구마다 정자가 있어 여름철 잠자리로 삼을 만하고, 요즘 같은 때는 동네 경로당에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이 일대에서 둘러볼 만한 곳은 운봉읍의 황산대첩비와 송홍록?박초월 생가, 아영면의 흥부마을(복성이재 아랫마을인 성리가 바로 그곳. 동면의 성산리에서 쫒겨난 흥부가 이곳에 와서 부자가 된다) 등이 있다.

하지만 진짜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마을숲이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의 마을숲은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 유한킴벌리에서 공동 제정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숲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행정리 맞은편 삼산리의 소나무숲도 일부러 들러볼 만한 곳이다. 땅을 하늘로 아는지, 굽고 뒤틀린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리지어 승천하는 용 같다.

/글 윤제학·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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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지형지질

능선과 계곡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한 이유?
태평양판 횡압력 받아 생긴 균열이 집중 침식된 탓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그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달리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일구어놓고, 남해 바다에 이르기에 앞서 마지막 여세를 몰아 다시 한 번 힘차게 용솟음하며 이 땅에 또 하나의 명산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지리산이다.

여인네들 치마 주름처럼 아름답게 휘감아도는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 유장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태고의 생기를 잃지 않은 원시림, 선계를 드러내듯 장엄하게 펼쳐지는 운해…. 자연의 형상으로서 지리산은 더할 나위 없이 중후하고도 장엄한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 하늘에서 본 지리산. 지리산의 능선과 계곡은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해양 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경계 상에 위치하여 경남 함양군·산청군·하동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산지 둘레가 약 300km를 넘는 약 800여 리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국립공원 면적 485㎢)을 아우르고 있다. 또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노고단(1,507m)까지 약 45km 장장 100리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은 주능선이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 준봉을 20여 개나 거느리고 있어 과히 남녘의 지붕이라 할 만하다.

20억 년 된 편마암층이 거대한 육산(肉山) 형성

지리산의 산세를 보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기암괴석이 별천지를 연출하는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등의 산세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산릉으로 이어져 부드럽고 유려해 보이는 산세는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은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지리산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석인 편마암에서 찾을 수 있다. 암석의 절리에 따른 풍화의 발달이 탁월하여 절리면을 따라 복잡한 형태를 이루는 화강암 지형과는 달리, 편마암은 암석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단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지리산에서는 수분의 침투가 쉽지 않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된 설악산 등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독특한 기암절벽 등의 경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리산 일대를 이루는 편마암은 그 형성 연대가 약 20억 년~18억 년 전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땅덩어리 가운데 하나인 영남지괴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편마암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평적으로 표층에서 침식과 풍화를 받아 산지 전 사면에 걸쳐 일정한 두께의 피복물이 쌓였기 때문에 지리산의 토양은 층후가 두터운 편이다. 따라서 기반암의 노출이 적은 가운데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평탄한 느낌을 주어 거대한 육산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지리산 일대에 식생의 안착을 보다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밀도와 영속성을 높여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루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리산지 가운데 화강암이 관입한 악양과 청학동 등 일부 지역은 심층 풍화를 받은 기반암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다양한 암석지형을 띠고 있기도 하다.

2300만 년 전 횡압력 받을 때 지리산도 융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동서로 밋밋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주능선 자락에는 남과 북으로 15가닥의 지능선이 펼쳐져 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계곡들이 발달해 있다. 그런데 그 능선과 능선 사이로 발달한 계곡, 즉 북으로 달궁계곡, 심원계곡, 뱀사골계곡, 백무동계곡, 칠선계곡과 남으로 피아골계곡, 천은사계곡, 화엄사계곡, 선유동계곡이 놓인 방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제외한 지능선들과 그 사이의 계곡들 모두 한결같다. 어떤 연유일까?

▲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북사면. 지리산의 산세가 완만한 산릉을 이룬 것은 암석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단단하여 침식에 강한 편마암으로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대륙지각은 북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해양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지각에 많은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다. 이는 얼음을 쇠망치로 내려치면 깨지기에 앞서 얼음에 금이 가듯이 한반도가 속해 있던 대륙지각 또한 태평양판에 의해 막대한 횡압력을 받게 되면서 지각의 여러 곳에 단열선, 즉 금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금이 간 주 방향이 북동~남서 방향을 이루었던 것이며, 이 금이 간 자리로 빗물이 흘러 지표를 깎아내어 하천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 발달한 단열선 위로 흐르던 하천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산자락을 깎아내기 시작하여 지금의 깊은 골짜기를 이루었다.

특히, 2300만 년 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팽창하면서 한반도 지각을 밀어붙이자 횡압력을 받은 한반도는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 작용의 영향으로 융기하게 되었다. 이때 한반도 땅덩어리는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하여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동고서저의 경동(傾東)지형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백산맥 군(群)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 또한 이 당시 전체적으로 융기하여 높이 솟아올랐다. 지리산의 능선 곳곳에 평탄하게 남아 있는 고위평탄면들이 그 증거가 되는데,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백산맥의 형성과 함께 지리산 일대의 지반의 융기는 하천의 물길을 더욱 급하게 만들어 지금의 깊은 골짜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지리산 남사면의 법천계곡. 지리산 북족에 비해 일조량이 강하여 동결과 융해에 따른 기계적 풍화 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암설과 괴력 등이 많다.

지리산은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동서 약 45km의 주능선을 경계로 남과 북 사이에 기후, 식생, 지형 등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일차적으로 주능선을 분수령으로 북쪽과 동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남과 서쪽의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수계가 구분된다.

주능선 경계로 남북간 지질과 기후 큰 차이

그리고 남북 간에 기온과 강수량 등에서 있어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연평균기온을 보면 남쪽은 13℃, 북쪽은 12℃를, 여름철(6-8월) 평균기온은 남북 모두 24℃인 반면 겨울철(12-2월)은 북쪽이 0℃ 이하이나 남쪽은 영상을 유지하여 남쪽이 더 높은 기온을 보인다.

지리산의 연간 강수량은 약 1,200mm로서 여름철에 강수량의 60% 가량이 집중된다. 특히 여름철 남쪽 사면에는 남해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주능선의 남쪽 사면에 부딪히며 지형성 강수를 일으켜 1,600~1,800mm에 달하는 막대한 비를 퍼붓기도 한다. 그래서 섬진강 상류에 해당되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최다우지에 속한다.

반면, 북사면은 여름철 비가 적은 데 비하여 겨울철 북서계절풍 의해 눈이 많이 내리는데, 그 양이 남쪽에 비해 월등히 많다. 철선계곡과 한신계곡은 겨우내 약 12m 정도의 적설량을 보이는데 이듬해 5월경에야 완전히 녹는다.

▲ 집중호우로 인해 폐허가 된 피아골 하류(98년). 남해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지리산 주능선의 남쪽 사면에 부딪히며 지형성 강수를 일으켜 1,600~1,800mm에 달하는 막대한 비를 퍼붓기도 한다.

일조량 또한 남쪽이 북쪽에 비해 더 많은데, 기온과 강수량을 포함한 이러한 기후 특성은 지리산의 식생의 남북간 분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지리산의 수직적 삼림분포는 해발고도 1,300~1,400m에서 온·한대림의 경계고도를 이루는데, 북사면의 경우는 1,300m에서, 이보다 따뜻한 남쪽은 1,400m에서 그 한계를 이루고 있다.

남북 간의 기후 차이는 식생뿐만 아니라 지형의 차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북쪽보다 여름철 강수량이 많은 남쪽은 지표의 토양 침탈이 보다 빨리 일어나 암괴의 노출이 심하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 비해 일조량이 강하여 동결과 융해에 따른 기계적 풍화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암설과 괴력 등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특히, 화강암이 분포하는 피아골과 청학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북사면은 남쪽에 비해 겨울철 눈이 많은 영향으로 봄철에도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수분 침투가 어려운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표층 풍화가 전 사면에 걸쳐 고르게 진행되어 일정한 두께의 토양층을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식생 발달에 유리한 특성을 지니게 되어 한반도 최고의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룬 것이다. 북사면은 기반암의 노출이 적으며, 계단형을 이루는 남쪽 사면과 달리 산정에서 골짜기까지 직선을 이루는 평활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지리산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고는 다른 산들에 비해 비교적 인위적인 피해를 적게 입은 산에 속한다. 그래서 지리산은 현재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자연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면서 점차 울창한 숲을 이루며 자연성을 되찾게 되었던 지리산은 다시금 그 자연성이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등산로가 깊이 패어나가고, 등산로 주변 식생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희귀 수목과 초본을 몰래 캐가거나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채취하기 위한 파이프라인들이 골짜기마다 어지럽게 널려 있다.

/글 이우평 지리학자·교사


<환경>
섬진강이 북서~남동방향으로 긴 것은
기반암의 주구조선 따라 물길 형성되었기 때문

▲ 좁고 길게 이어진 하곡을 보이는 섬진강.
전북 진안읍 백운면 마이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지리산을 끼고 돌아 흐르는 섬진강은 남도의 동맥이라 할 수 있다. 212.3km의 섬진강 물줄기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어 두 지방의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한다.

본래 섬진강은 일찍이 고운 모래로 유명하여 모래가람, 다사강(多砂江), 사천(砂川)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편, 섬진강은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 자를 사용하고 있어 우리말로는 두꺼비나루가 되는데, 이는 이 강 일대에 전하는 두꺼비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의 가장 큰 지형적인 특징은 다른 하천들과는 달리 북서~남동 방향으로 좁고 길게 이어진 하곡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이 일대의 기반암이 풍화에 강한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유수에 의해 큰 변형을 받지 않은 가운데 기반암에 발달한 주구조선을 따라 하도가 형성·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섬진강의 물이 다른 하천에 비해 매우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 하중으로 실리는 실트류나 점토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맑은 물을 자랑하던 섬진강은 그동안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골재 채취로 인하여 하상이 낮아지면서 바닷물이 역류하게 되자 하구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예부터 풍부했던 재첩, 황어, 은어, 참게, 장어 등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렇듯 문제가 심각해지자 1999년 섬진강을 끼고 있는 구례, 하동 등을 포함한 11개 지방자치단체들은 섬진강 모래 채취를 일시 중단하는 휴식년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섬진강을 살리자’는 사회적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게 되자 2004년 11개 지방자치단체들은 ‘섬진강의 모래 채취를 영구히 금한다’는 내용의 보다 진전된 합의를 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약 30년에 걸쳐 수많은 모래더미들이 실려 나가며 상처투성이가 된 섬진강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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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역사지리

수많은 격전장이자 생명을 보전한 현장
국토의 남쪽을 지키고 수호하는 요충지로 역할

지리산의 역사·지리는 거시적으로 지리산의 자연사와 생태사, 그리고 지리산에 살았던 사람들이 산에 뿌리내리면서 빚어낸 사상사와 문화사, 지리산을 무대로 전개된 전란 및 정치사적 소용돌이 등 유 무형의 역사와 지리적 내용, 그리고 그 변천 과정을 일컫는 광범위한 말이다.

그러므로 지리산의 역사·지리에 대한 접근은 지리산에 관한 문헌사뿐만 아니라 유적 유물 등 현지 역사경관에 대한 총체적인 해독이 병행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다만 지리산의 자연적이고 역사·지리적인 환경조건과 입지 특성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다.

▲ 지리산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이 얽힌 구형왕릉.

지리산의 역사·지리를 푸는 단서로서 산이름의 호칭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에는 대상의 역사적 실상과 이름을 부른 사람들의 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정에서 지리산은 여러 가지 호칭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 보자면,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백두산의 맥이 남으로 흘러내려왔다는 백두대간의 전통적 산맥인식이 드러난 두류산이 있다. 또한 지리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표현인 덕산(德山), 그리고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었다.

지리산이라는 명칭의 역사·지리적 기원을 추적하는 문헌상의 단서로서,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 내용 중에 ‘智異山'이란 표기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 조에는 신라에서 삼산오악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 중, 소사를 지낸다고 했는데, 여기서 지리산은 ‘地理山’이라는 명칭으로 오악 중의 남악에 지정되어 등장한다.

그밖에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이 모두 오악으로 정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조에 이어 조선조에서도 여전히 지리산은 남악으로 지정됐으며, 그 외에 삼각산(중악), 송악(서악), 비백산(북악) 등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에서 국토의 남쪽을 지키고 수호하는 요충지의 산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은 산”

지리산은 지정학적 요충지로 말미암은 격전장이기도 하였지만 지리산 특유의 깊은 골과 풍부한 수원 및 온화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골짝 마다 깃들고 마을을 이루며 생명을 보전한 현장이라는 측면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하황 마을. 원주민의 구성은 임란 등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은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사 이래로 지리산의 전란사를 굵직한 것만 살펴보자.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 지대로서 싸움터의 무대가 됐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고, 근대의 동학민중운동과 건국 이후의 여순반란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장터가 됐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반란에서 시작하여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뼈아픈 역사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한편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도 ‘청학동 변증설’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지적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으니,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 1.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 2. 국가적 요충지로서 지리산의 위상을 대변하는 화엄사 각황전.

피세피병지로서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역사시기에만 보아도 마한으로 거슬러 오른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 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서 입지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 그리고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영주), 금강산(봉래)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졌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그밖에도 의상의 청구기에서 ‘두류산은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무는 세계인데, 산 아래 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공손하다’고 하여 지리산을 불국정토로 보았고, 한편 ‘지리산은 태을(太乙)의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선계(仙界)’라고 하여 신선 세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새로이 유입된 문화 발상지 역할도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동하였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화엄십찰에는 지리산 화엄사 외에 팔공산 미리사, 소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와 보광사, 서산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국신사, 삼각산 청담사, 삭주 화산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지리적 요충지의 주요 교통로 인근에 입지하거나 왕도 주변부의 지방행정 중심지에 입지해 국가의 영토를 수호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 선종 구산선문중 동리산문의 본거였던 태안사 부도지.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 과정도 그러했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 운동은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리산의 호칭으로서 불복산(不伏山), 혹은 반역산(反逆山)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미학적인 견지로 지리산의 역사·지리를 살펴보자면, 서산대사가 지적했듯이 지리산은 한국의 산에서 산세의 장중함(壯)과 후덕함의 대표격이다. 그리하여 덕산(德山)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었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敬)과 의로움(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재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해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뭇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매천 황현 역시 구한말 어지러운 시국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지리산 기슭으로 낙향했는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함으로써 지리산의 올곧은 정신을 떨쳤다.

무엇보다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 산

무엇보다도 지리산은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의 산이었다.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이 남한에서 한라산에 이어 가장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지리산 권역에는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중심지인 고을(邑)만도 1목, 1부, 2군, 5현 등 10여 고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고을들은 지리산을 고을의 진산(鎭山), 혹은 고을의 주산이 비롯되는 조산(祖山)으로 설정했다.

그밖에도 지리산 기슭과 골짜기에 터둥지를 틀고 있는 수많은 전통 마을들을 보더라도 지리산의 지형과 기후적 환경은 사람과 생명을 키우는 어머니의 산으로 대변될 배경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모성적 장소성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은 조선시대 수많은 사대부들의 유람과 기행을 통해 찬탄됐는데, 그 중 일부를 읽어 본다.

‘아, 지리산은 숭고하도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이나 대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옥첩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김종직의 유두류록)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면면이 4천 리나 뻗어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엉켜 모이고 우뚝 일어난 산으로,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 사방의 둘레가 2천 리나 된다. 안음(안의)과 장수는 그 어깨를 메고, 산음(산청)과 함양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와 남원은 그 배를 맡고,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에 달려 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과 곤양은 그 발을 물에 담근 형상이다. 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 된다.’(유몽인 1559-1623의 유두류산록)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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