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남원 문화

전란의 아픔과 사랑 노래 가득한 곳
백두대간으로 인해 문화현상도 다양해져

남원에는 전란의 아픔과 사랑의 노래가 가득하다. 그것은 백두대간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 크다. 남원을 예전에는 ‘고룡(古龍)’이라 했다. 그러다 통일신라 685년에 5소경 중 하나인 남쪽 지방의 서울이라 하여 남원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 흥부가 태어났다는 전북 남원시 동면 성산 마을 입구에는 흥부부부가 박타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더워, 추워’와 ‘더버, 추버’

남원에는 2개의 큰 물줄기가 있는데, 그 분수령이 백두대간이다. 하나는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요천이고, 다른 하나는 운봉, 산내, 마천, 산청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만수천이다.

만수천의 발원지 덕산저수지 옆에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으로, 비가 와 왼쪽에 떨어지면 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는 비는 운봉으로 흘러간다. 마을 가운데에서 물의 흐름이 갈라진다.

마을의 몇 집은 주천면과 운봉읍의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주방이 있는 아래채는 운봉에 속하고, 안방은 주천면에 속한다. 아침은 운봉에서 먹고, 잠은 주천면에서 자는 희한한 풍경이 생긴다.

노치 마을에서 여원재, 고남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의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

사용 어휘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시내에서는 ‘더워, 추워’라고 말하는 반면에 동부권에서는 ‘더버, 추버’라고 한다. 이것은 옛말 ‘다, 다’의 ‘’이 전라 방언에서는 ‘ㅇ’으로 변한 반면 경상방언에서는 ‘ㅂ’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의 아픈 상처 만인의총과 오리 노래탑

백두대간을 경계로 한 남원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가 있다. 남원은 지리적 여건상 군사 요충지여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싸움이 잦아 산성이 많은데,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대표적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정유재란 때의 만인의총, 근대에 들어서는 동학농민전쟁, 현대에 와서는 6.25 때의 빨치산 등 전란의 아픈 상처나 호국의 몸부림이 유난스러웠다.

▲ 전남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워졌던 황산대첩기념비. 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쪼인 뒤 조각났다.

정유재란 당시는 남원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이 치열했다. 남원은 전라도 관문으로 왜군이 북상하는 데 꼭 확보해야만 하는 매우 긴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패배한 것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 정유재침 시에는 전라도 지방을 점령한 후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은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남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남원 사람들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전라 병사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병사, 그리고 성안에 있던 주민 등 총 10,000여 명이 죽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 곳에 모아 합장했는데 이것이 만인의총이다.

왜군은 남원성 싸움 후 성안에 남아 있던 도자기 기술자인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도공, 목공, 인쇄공 등 손재주를 가진 모든 사람을 납치해 갔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가서 조선의 도예 기술이 끊길 정도였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도공들은 대한해협을 지나 큐수 남단, 지금은 가고시마로 불리는 사쓰마 해변에 도착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심수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 1.일본 텐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시습 초상. 2.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 3.동학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

그들은 400년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어 오면서도 혈통과 한국의 얼을 꿋꿋하게 간직해왔다. 그동안 그리움이 사무쳐 고향을 잊을 수 없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임을 나타내는 단군 묘인 다마야마궁(玉山宮)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14일이 되면 큰 제사를 올리는데, 이 때 우리 음 그대로 망향의 노래 ‘오리 오리소서’를 부른다. 이 노래는 ‘새로 돌아오는 내일은 오늘과 같이 화평한 날이 되게 해달라’는 송축의 노래로 평민층부터 궁궐에서까지 부르던 노래다.

오리 오리쇼셔
일에 오리쇼셔
졈그디도 새디도 마시고
새라난 식에 오리쇼셔
(오늘이 오늘이소서 / 매일 오늘이소서 /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 (날이) 새거든 / 주야장상 오늘이소서)
-<양금신보>

이성계의 황산대첩비와 여원재

운봉을 지나 인월로 조금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 마을이 있다. 비전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과 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이 곳에서 섬멸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그 때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크게 격파했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황산대첩비 건너편 높은 산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인 바래봉이 있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생긴 것이다. 바래봉 아래에는 운봉목장의 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국적인 풍경이다.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해발 485m의 여원치가 있다. 황산대첩시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았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노파가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 부르게 됐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남원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은둔 포교지이자 수행지이기도 하다.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은 최제우가 동학경전을 편 곳이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동학이라 고치고 유·불·선, 인내천을 주창했다.

춘향전과 흥부전도 백두대간이 풀어냈다

▲ 창극 춘향전의 한장면.
산이 깊으면 품어내고 싶은 것도 많은가 보다.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지리산이 굽어보는 남원은 문학의 고장이다. 예전에는 구례도 남원에 속했는데, 백제 시대 때 이곳 이야기를 노래한 ‘지리산가’가 있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서 살고 있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뛰어났다. 이런 소문을 들은 왕이 궁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 여인은 ‘지리산가’를 지어 부르고 죽었다. 결국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아내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춘향전은 고대소설의 대표작이며. 판소리 12마당의 하나다. 춘향전은 처음 판소리로 생성되어 불리다가 나중에 소설로 정착됐다. 원각사(圓覺社) 이후에 창극이 됐으며, 그 뒤 신소설, 희곡, 연극, 영화, 시나리오, 뮤지컬, 오페라의 대본 등 다양한 장르로 개작됐다.

춘향전의 주제는 사랑이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신분적 제약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흔히 춘향전에 표현된 사상으로 계급 타파나 신분적 저항, 또는 근대적 자각 등을 말하기도 한다.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는 누각이고, 누가 있는 정원을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광한루 앞에는 신선사상이 반영된 영주섬, 방장섬, 봉래섬이 있고, 그 옆에는 유명한 오작교가 있다. 광한루 왼편으로 30여 기의 비석과 춘향사당이 대나무숲 속에 있다.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에 춘향묘와 육모정이 있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을 기리는 춘향제가 매년 5월5일에 열리고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얼픔에 흥보가 살았는디’라고 하여 도계인 인월의 성산리와 아영의 성리가 흥부마을로 알려져 있다. 두 마을에는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성산리에는 제비가 흥부집을 맴돌았다는 마을 뒷산 연비봉, 흥부가 도승의 말에 따라 집터로 잡아 부자가 됐다는 흥부네 텃밭,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짚신을 털며 아픈 다리를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했다는 신털바위, 흥부가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놓았다는 연하다리 등이 있다.

성리에도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있다. 지명으로는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던 중 쉬었다는 화초장바위, 도승이 춘보에게 잡아준 집터인 고둔터, 춘보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고개인 허기재 등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은 흥부지만, 놀부가 차지하는 비중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흥부와 놀부는 각기 다른 인생의 자세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흥부를 도덕적 인물로, 놀부를 반도덕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흥부는 가난을 타개할 의지도 정열도 없이 주어진 운명에만 자신을 맡기는 소극적 인물이고, 놀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적극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남원의 문학·문인-금오신화와 김삼의당과 혼불

▲ 1997년 7월 14일 서울 국립국악원 뒤뜰에서 가졌던 ‘혼사모’ 창립식. 왼쪽부터 김병종(화가), 김수남(사진작가), 김미숙(탤런트), 이기웅(열화당 대표), 안숙선(명창),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김경(종이 공예가), 한풍렬(화가), 김언호(한길사 대표), 전용복(칠 공예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인데, 그 중 남원을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가 있다. 이 작품은 만복사 절에서 양생이라는 노총각과 귀신 처녀가 3일간 사랑을 나눈 이야기다. 귀신 처녀는 왜구의 침입으로 가슴에 한과 슬픔을 지니고 죽은 사람이다. 귀신 처녀와 사랑을 나눈 양생은 처녀를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 처녀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뛰어난 재능을 접어둔 채 방랑하며 세조의 정권을 거부하던 김시습이 한가롭게 사랑 이야기나 다루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풀어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김삼의당(金三宜堂)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남원의 조선시대 후기 여류시인이다. 주로 남원에서 활동한 주부시인으로, 명문거족의 자녀도 아니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도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김삼의당은 일상적인 농촌의 생활을 부부화애의 시, 자연교감의 시, 농촌생활의 시, 세시풍속의 시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풍속사를 10권의 대하소설에 담아낸 혼불을 쓰기 위해 최명희는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 민속학의 보고, 민족어의 산실로 칭송받는 혼불은 남원 사매면 노봉 마을의 몰락해가는 매안이씨 양반가를 지키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양반촌인 매안 마을과 매안이씨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들의 거멍굴이 소설 혼불의 무대다. 사매면 노봉 마을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글 서정섭 문학박사·서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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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지명

피아골은 피(血), 뱀사골은 뱀(蛇)과 무관한 지명
둘 모두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이름 유래했을 것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꽃을 꾸몄으니 /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조선 중종 때 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지리산의 삼홍소(三紅沼)를 보고 이 시를 읊었다. 읊는 이의 마음까지도 붉게 만드는 이 시는 지리산 단풍의 멋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 주고도 남는다.

▲ 단풍이 좋기로 유명한 피아골. 그러나 피처럼 붉다는 뜻의 이름이 아니다.

피아골 속의 마을과 고개

지리산 피아골의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外谷) 마을이 바로 그 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갖가지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 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燕谷), 가락골(楸洞), 중터(中基), 조동(助洞)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 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옛날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짚신을 끌고 오가던 가느다란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院基)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을 만난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稷田溪谷)이라고도 한다. 6?25 전후에 빨치산의 본거지이기도 했고, 영화 ‘피아골’의 주무대이기도 해서 우리 귀에 그 이름이 생소하지 않다.

세간에선 이곳이 임진왜란 때 많은 살상이 있었고, 한말의 격동기, 여순반란사건, 6?25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피와 관련 없는 피아골

그러나, 피아골을 피(血)와 관련지어 땅이름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6?25동란 같은 때 피(血)를 본 곳이라고 해서 피아골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이 곳이 엄연히 ‘피아골’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피아골을 ‘피밭골’이 원이름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경솔하다. 지리산뿐 아니라 전국에는 수십 곳의 ‘피아골’이 있는데, ‘피(稙)’와 전혀 관련 없는 것이 적잖게 있기 때문이다.

먼저, 피아골이란 땅이름을 가진 곳(주로 골짜기)을 둘러보자.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마명리, 이동면 도평리 / 전북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 삼계면 덕계리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 순창군 동계면 수장리 /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소사리 / 서산군 지곡면 연호리 /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어의곡리 /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장재리, 내속리면 상판리 /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피아골과 비슷한 피아실, 피실(稷谷) 등의 땅이름이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고사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등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피를 꼭 ‘피’라는 음(音)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땅이름에서는 ‘비’가 격음화해서 ‘피’가 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핏재(稷峙) 마을을 한 예로 들어보자. 이 마을은 원래 ‘빗재’라는 고개 밑에 있어 ‘빗재’로도 불리는데, ‘핏재’는 ‘빗재’가 격음화한 것이다.

▲ 뱀사골. 밴(가파른) 샅골(사이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쉽다.
‘핏재’는 ‘피(血)의 재’처럼 느껴졌던지 한자로 혈치(血峙)가 되었다. 이 혈치는 다시 설치(雪峙)로 구개음화되어 핏재 마을에서 단양읍 가칠미(佳山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붙어 있다. 주민들은 설치의 ‘설(雪)’이 ‘피’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지 않고, 고개가 높고 응달져서 눈이 잘 녹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고개는 ‘피티재’로도 불린다.
·빗재 > 핏재 > 피티재
·빗재 > 핏재 > 血峙 > 雪峙
‘빗재’는 ‘빗긴(橫, 斜) 재’의 뜻이다. ‘빗’은 땅이름에선 거의 ‘비탈’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지명에서의 ‘빗은’ 지형이 바로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닌 기울어진 상태를 많이 가리키고 있다. 이 ‘빗’이 파생시킨 ‘빗나감’, ‘비탈(비알)’, ‘비스듬히’, ‘빗기다’, ‘빗금’ 등의 말들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빗’에서 나온 ‘비알’이란 말은 ‘벼랑(별+앙)’과 거의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밸’, ‘배랑’, ‘빌’, ‘비랑’ 등의 방언으로도 옮겨갔다.

그렇다면, 옛 지명 중에 ‘빗?골(비?골)’이라는 곳을 여럿 볼 수 있는데, 이 뜻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가 있잖을까. 그리고, 이것이 ‘비아골’로 음(音)이 쉽게 변해갈 소지가 있다는 것도. 또, 한 발 더 나아가 앞의 설명에서 ‘빗재’가 ‘핏재’로 변한 것처럼 ‘피아골’까지 옮겨갈 수 있다는 것도.

전국에는 ‘비아골’이라 하는 곳이 무척 많은데, 비탈 심한 골짜기의 뜻으로 붙은 것이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지명(비아골)을 ‘피아골’로도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경북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영덕군 남정면 남호리,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 등에 있는 골짜기인 ‘비아골(비앗골)’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20년 전에 출판한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저서에선 지리산의 피아골을 ‘피밭골’에서 나왔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설명한 일이 있다. 그러나, 현지답사나 문헌 자료 등의 조사를 통해 이와 유사하거나 똑같은 지명이 많음을 보고, 지금은 그 설명이 백번 옳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지리산 일대에는 40여 곳에 뱀 관련 지명이 깔려 있다. 지리산에서 모은 뱀 지명들을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북서쪽(전북 남원쪽) : 비암쏘(산내면 대정리, 덕동리, 부운리 등 여러 곳) / 뱀사골(산내면 부운리) / 비암등(동면 서무리).
남서쪽(전남 구례쪽) : 비암재(巳浦?산동면 관산리) / 뱅모링이(산동면 이평리) / 밴들(산동면 계천리) / 비암새(토지면 내동리) / 비암바위(토지면 외곡리) / 비암바위(광의면 수월리).
북동쪽(경남 함양쪽) : 배암날모랭이(마천면 군자리) / 배암골(휴천면 태관리, 함양읍) / 뱅목안(휴천면 금반리).
남동쪽(경남 산청?하동쪽) : 뱀밧골(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 뱀거리몬댕이(시천면 동당리) / 배양이(삼장면 내원리) / 배암다리(삼장면 대포리) / 배암다릿걸(삼장면 대포리) / 뱅이재(삼장면 대포리) / 배암머리(삼장면 홍계리) / 배암사재(=뱀사재 :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 뱀몬당(하동군 화개면 탑리)

재미있는 것은 지리산이 3개 도에 걸쳐 있는 산이어서 뱀 지명이 산 덩어리를 가운데 두고 각각 그 고장의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뱀소’라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전라도쪽에서는 ‘비암쏘’나 ‘비얌쏘’로, 경상도쪽에서는 ‘뱀소’, ‘배암소’로 많이 불리고 있다.
지리산의 여러 뱀 지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은 뱀사골이다. 지리산 삼도봉(三道峰)을 시작으로 북쪽의 남원시 산내면을 거쳐 함양군 휴천면쪽으로 장장 80리를 임천강 지류와 함께 구불구불 이어나간 이 깊숙한 골짜기가 뱀사골이다.

뱀사골은 뱀과 관련 없을 듯

지리산에서 피아골과 함께 잘 알려진 뱀사골은 대개는 뱀(蛇)과 결부지어 그 지명을 설명한다. 흡사 왕뱀이 기어가는 모습을 닮아 그렇다거나 뱀이 많아서 그렇다거나.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서 다른 면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뱀이 많아서 뱀 자가 들어간 이런 땅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뱀 자를 취한 지명 중에는 뱀과는 전혀 무관하게 붙여진 것이 많음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뱀사골도 뱀과 관계없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뱀의 골짜기란 뜻이라면 ‘뱀골’이 되어야 하는데, 하필 뱀의 뜻처럼 들리는 ‘사’가 또 들어간 ‘뱀사골’이 된 것은 쉽게 의문을 풀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전에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지만, 심하다는 뜻의 ‘배다(베다)’가 있다. 예를 들어 ‘비탈이 배다(베다)’라고 하면 비탈이 매우 심하다는 뜻. 따라서, ‘된 비탈’이나 ‘밴 비탈’이나 뜻은 거의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탈이 심한 골짜기는 ‘밴골’이 될 수가 있다. 이 ‘밴골’은 ‘뱅골’이나 ‘뱀골’로 들릴 수 있고, 또 그렇게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놓고, 뱀사골을 거꾸로 풀어 올라가 보자.

뱀사골<뱀샅골<밴샅골(밴+샅+골)
‘샅골’을 ‘샅(사이)의 골짜기’로 보고, ‘밴’을 ‘심한(대단한)’의 뜻으로 보면 ‘밴샅골’은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가정을 우리에게 요구하고도 있지 않은가.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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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 지리산 풍수⑥

지리산은 천하의 대명당이 산재한 곳
고종 때는 지리산에서 일본으로 간 맥 끊으려 시도하기도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서 시작한 산줄기 중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와 백두산이 되었다. 여기에서 곤륜산은 중국전설 속에 나오는 산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중국 티벳고원 부근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산이다(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월간山 2004년 3월호~6월호에 연재한 박용수의 ‘곤륜산을 다시 생각한다’ 참고).

▲ 청학동의 산형을 나타낸 수많은 청학동도 중 하나.
조선시대 중기의 지리학자인 이중환(靑華山人 李重煥·1690-1756) 선생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의 팔도총론(八道總論)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곤륜산(崑崙山)의 한 산줄기가 대사막(大沙漠·고비사막을 지칭) 남쪽을 지나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醫巫閭山·중국 요령성에 있는 산)이 되었고, 여기에서 크게 끊어져 요동(遼東)평야가 된다. 평야를 지나서 다시 일어나 백두산이 되는데,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고, 두 강을 사이에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寧固塔?중국 길림성에 있는 지명)이 되었으며, 뒤쪽으로 높게 뻗은 일맥이 조선 산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다 건너 한라산, 오키나와까지 맥 이어져

우리나라 산맥체계인 백두대간을 거론하는데 필자나 이중환이 중국의 곤륜산을 거론하는 이유는 산줄기를 따라 근원을 찾기 위함이지, 과거의 모화사상 때문이 아니다. 중국 역대 왕조의 국경개념으로 보면 곤륜산이나 백두산은 만리장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지리학에서는 산맥이란 말을 익히 사용하지만, 전통풍수지리에서는 간룡(幹龍·큰 산줄기)이란 말을 사용해왔다.

아래 그림은 풍수지리학의 백과사전격인 <인자수지(人子須知)>(중국 송의 徐善繼 형제가 지은 풍수서적)에 나오는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幹龍總覽之圖)’다. 이 지도를 보면 앞서 거론한 곤륜산의 그림과 산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또한 제목 중의 간룡이란 말이 있듯이 풍수지리학에서는 이미 ‘간룡’이란 용어를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이란 말 대신에 ‘용(龍)’이란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 산이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산줄기가 상하좌우로 기복을 하고 굴곡을 하면서 천변만화하여야 좋다는 뜻에서 단순히 정적인 뜻을 가진 산이란 말 대신에 그렇게 부른다.
또한 맥의 의미는 용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용이란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산세를 뜻하는 반면에 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움직이기 기세(氣勢)의 의미를 두고 있다. 따라서 풍수지리에서는 용 또는 맥이란 용어와 함께 용맥(龍脈)이라는 용어를 곧잘 사용한다.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에서 일단 끝이 난다. 지리산에서 더 작은 단위로는 호남정맥으로 이어져 있는데, <택리지>에 의하면 월출산(전남 영암)에 이어 해남의 산으로 이어지며 섬을 따라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에 이어지고, 유구국(琉球國?현 일본의 오키나와)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한국의 백두대간이 멈추는 지리산은 천하의 대명당이 산재하고 있다. <택리지>를 보면 ‘고어왈천하명산승점다(古語曰天下名山僧占多·천하의 명산 중에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역시 지리산에도 유명한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리산 산자락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전북 남원), 화엄사(전남 구례), 연곡사(구례), 쌍계사(경남 하동), 법계사(하동), 벽송사(경남 함양) 등의 명찰이 있다.

또한 옛말에 지세가 뛰어나 선비가 많이 배출한 좋은 고을을 꼽을 때에 ‘경상도는 좌 안동 우 함양이고, 전라도는 좌 남원 우 장성’이라는 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네 고을 중에 남원과 함양이 지리산 자락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시 지리산 지역은 명당이 많은 길지(吉地)임이 증명된다고 할 것이다.

‘맥 끊으려 하자 지리산 울었다’

지리산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당한 적도 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인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 의하면 지리산의 맥을 끊으려고 시도한 대목이 나온다.

‘안영중(安永重)이란 이가 광무 5년(1901년)에 고종과 독대하고 『지리산의 산맥이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이 되니 지리산의 맥을 끊으면 일본이 스스로 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고종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안영중을 양남도시찰사(兩南都視察使)로 임명하였고, 많은 장정을 동원하여 운봉(현 남원시 운봉읍)으로 뻗은 산맥을 끊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한 시기가 겨울철인데다가 암반이 나오고 물도 솟아올라 삽으로 팔 수가 없었다. 이 때 관찰사인 조한국(趙漢國)이 누차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있다가 안영중이 산의 울음소리를 듣고 두려움을 느껴 중지하였다.’

이 기록과 함께, 이 때에 지리산이 3일 동안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매천야록>은 재야학자가 관찰에 의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오전(誤傳)도 있어 전적으로 신빙할 수는 없으나, ‘지리산맥 끊기’사건은 당시에 황현 선생이 운봉에서 가까운 구례에 살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다. 당시의 사건 현장은 고기리(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 너무 오래되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 삼신봉에서 내려다본 청학동계곡.
지리산 청학동은 어디인가

한편 지리산에는 유명한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여러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택리지> 산수편에 나온 청학동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면,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온다.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며,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溪)로 근래에 비로소 인적이 조금씩 통한다.’
이중환 선생도 청학동에 대한 말은 들었으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며, 물론 지금도 청학동의 확실한 소재를 모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청학동은 이상향으로서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폭포가 있고, 폭포를 지나면 석문이 나오고, 석문동굴을 따라 수십 리 들어가면 주위가 넓은 평야지대의 별천지가 있다. 이곳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오래 산다고 하였다. 청학동에서 특히 인재가 많이 날 것이라고 전하는데, 청학동도(靑鶴洞圖)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이름과 장소가 신비로워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도처의 마을에서 각기 청학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이른바 ‘도인촌(道人村)’이라고 알려진 청학동은 매스컴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어린이 서당교육으로 인기가 높다.
다음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명당결(明堂訣)>이라는 책의 말미에 실린, 조선 초기의 무학대사가 지었다는 청학동기 원문을 소개한다.
靑鶴洞(又無學論)
余遊於方丈山, 入于靑鶴洞, 草宿數三, 而夜觀天象, 晝觀山勢. ?然嘆曰, 美哉, 山水之美也. 大哉, 星辰之應也. 余未曾聞於大仙師, 天下山水第一美者, 唐國洛陽?京山水, 次則朝鮮三神山云. 故數年逼(逗의 오기)?於蓬萊, 數年逼(逗의 오기)?於臨海之間, 而未見方丈山. 故恒是營營, 今來觀之焉, 可謂天下明山也. 幽同抱大作聖君之象, 案山羅烈(列의 오기)重重, ?臣烈(列의 오기)侍之象. 以理言之, 聖帝明王之朝, 忠臣達士, 世世而出矣. 倉庫文昌, 特立其方, 文章名筆, 達人賢士, 運回則世世無數而富貴功名不可勝數也. 壽井在內, 老人星在天爲案, 人人其壽, 可期百世, 福德星左右特立, 孝子道學之士, 世世多出. 靑鶴左右之翼, 引作龍虎回抱, 而水口明?(?), 昭然應矣. 家家人人本外孫, 不可勝數而多矣. 若非運回, 則豈能然哉 運到何時. 申午數運, 未及開闢運, 是也. 開闢何時.「合三爲三, 一人一止, 人來兎走之年,」 是也. 雖然入此種裔, 在三十六姓, 俱入大昌, 其外各姓, 無非大昌之地, 豈不美哉, 豈不美哉. 仙鶴出谷, 柳之吉地, 物各如右, 不記山形, 以木體入首, 以鶴形作局. 故世人謂之靑鶴云. 白雲三峰爲案, 以子坐壬坐爲基, 木姓以水星爲基, 水姓以金爲基, 火姓以木爲基, 三十六姓皆有定基, 勿失理而爲之, 可也. 我東方首基也, 疾病不入, 凶年不入, 兵革不入矣. 豈有如此勝地乎? 然後世之人, 能識此山者無幾矣. 或有知者, 富者吝其財而不入 貧者無其財而不入 雖欲入者未指示之人而不入 愚者不入 多疑者不入 不知者不入 無福者知而不入 若非積善積德之人, 豈可得此山入乎. 李蒼(?)之後, 天下大勢, 爭雄於靑邱一片之中矣. 畿西畿東湖南湖北, 安能平安無事乎? 後世人, 勿爲泛於此山, 可也. 草宿三日, 遂拜山而去焉.

청학동(무학론·무학대사의 글)
내가 방장산(현 지리산)에 놀러갔다가 청학동에 들어갔다. 3일 동안 풀밭에서 잠을 자면서 밤에는 천상(天象·별자리)을 보고 낮에는 산세(山勢·산의 기세)를 보았다. 아! 감탄하면서 나는『아름답구나. 산수의 아름다움이여. 위대하구나. 성신(星辰)의 응함이여』라고 말하였다.

내가 대선사(大仙師)께 들은 적은 없지만, 천하의 산수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당나라 낙양(주, 동한, 당 등 중국 여러 왕조의 수도였으며, 현 하남성 낙양현)과 변경(?京?후량과 북송의 도읍으로 현 하남성 개봉현)이요, 그 다음은 조선의 삼신산이라 하기에 몇 년간은 봉래산(삼신산 중의 하나로 금강산의 별칭)에 다가가 머물고, 몇 년간은 임해산(삼신산 중의 하나로 한라산의 별칭) 사이에 다가가 머물렀으나, 미처 방장산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오락가락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천하의 명산(明山)이라 할 만하다. 그윽하게 돌아 쌓아 성군의 형상으로 크게 만들어, 안산(案山)이 거듭거듭 늘어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은 여러 신하들이 모시고 늘어선 형상이다. 이치로 말하자면, 성스럽고 밝은 제왕의 조정에 충성스런 신하와 뛰어난 선비가 대대로 나오는 것이다.

창고사(倉庫砂·산의 모양이 등변사다리꼴 모양의 산)와 문창성(文昌星·산의 모양이 붓끝처럼 생긴 산)이 제 자리에 빼어나게 섰으니 문장가, 명필, 달인, 현사가 시운이 돌아오면 대대로 수없이 많은 부귀공명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수정(壽井·노인성 별에 상응하는 청학동에 있다는 지명)이 안에 있고, 노인성(남극 부근에 있는 별자리로 2월 무렵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잠시 보이는 별로 용골자리에 위치하며, 고대 천문학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는 별이라 하여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믿었다. 일명 남극성(南極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도 함)이 하늘에서 안대(案對)가 되니, 사람마다 그 수명이 100세를 기약하고, 복덕성(福德星·목성을 이르는 말로 길한 의미임)이 좌우로 특별히 뛰어나니, 효자와 도학하는 선비가 대대로 많이 나온다.

청학의 좌우 날개가 길게 뻗어 좌청룡과 우백호가 되어 둘러 싸안고, 수구(水口·물이 나가는 곳)를 잘 얻어 밝게 응한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본손(本孫)과 외손(外孫)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만약 운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시운이 언제 이를 것인가? 신(申·낙서수로 2를 뜻함)과 오(午·낙서수로 9를 뜻함)의 숫자 운인데, 아직은 개벽(開闢) 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

개벽은 언제인가? ‘合三爲三一人一止人來兎走之年(합삼위삼일인일지인래토주지년)’의 해다. 비록 이곳에 여러 성씨가 들어와 모두 크게 창성하게 되고, 그밖의 각 성씨도 크게 창성하지 않음이 없는 땅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선학이 골짜기에서는 유(柳)씨의 길지로서 물형(物形)이 각각 다음과 같으니, 산의 형태를 모두 기록하지 못하지만, 목체(木體·산이 솟고 산봉우리가 원형 모양인 산)로 입수(入首)하여 학 모양의 국을 이루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청학’이라고 일컬으면서 말하기를, 백운산(白雲山·전남 광양)의 3개 봉우리를 안대(案對·정면으로 보이는 산)로 삼고, 자좌(子坐·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24방향 중 하나로 정남향)와 임좌(壬坐·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남향에서 남쪽으로 15도 기운 방향)로 터가 된다.

목성(木姓)은 수성(水星)을 터로 잡고, 수성(水姓)은 금성(金星)을 터로 잡고, 화성(火姓)은 목성(木星)을 터로 잡아, 36개 성씨가 모두 정한 터가 있으니, 이치를 잃지 않도록 해야 되며,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터이니 질병이 침입하지 못하고, 흉년이 침입하지 못하며, 병화가 침입하지 못한다. 어찌 이와 같은 승지가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 사람은 이 산을 제대로 알아보는 자는 거의 없다. 간혹 아는 자가 있어도 부자는 자기 재물에 인색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재물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감히 들어가고 싶어도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의심이 많은 자도 들어가지 못하며, 지혜가 없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복이 없는 자는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선을 쌓고 덕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산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조 창업[李蒼] 이후 천하의 대세는 청구(靑邱·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 일대에서 자웅이 다투니, 기서(畿西·경기 서부), 기동(畿東·경기 동부), 호남(湖南·전라도), 호북(湖北·충청도) 지역이 어찌 평안하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은 이 산을 널리 알리지 말아야 된다. 3일 동안 풀밭에서 노숙하고 마침내 산에 절하고 나왔다.

이 청학동기는 누구의 글인지, 그리고 혹시 모종의 의도성이 있는 글인지는 모르지만, 내용중에 ‘合三爲三一人一止人來兎走之年(합삼위삼일인일지인래토주지년)’은 개벽의 시기를 알려주는 대목인데, 독자분의 고명한 해석을 기대한다. 필자는 다만 ‘미래의 언제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최명우(崔明宇)·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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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 지리산 식생⑤

남한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많은 식물종 자란다
고산·특산·멸종위기·빙하기 잔존식물이 풍부하게 분포

지리산은 남한의 어느 산보다 덩치가 크다. 백두대간의 시원인 백두산의 웅자를 닮으려는 듯 대간의 끝자락에서 크고 너른 품을 뽐내고 있는 것인데, 남한 백두대간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 촛대봉(1,704m), 명신봉(1,652m), 칠선봉(1,57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 1,500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장장 45km에 이르는 주능선을 형성하며 솟아 있다.

이 주능선은 한반도 산줄기의 뼈대를 이루는 대간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남하하기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을 아우르고, 소백산, 덕유산을 거쳐 숨 가쁘게 달려온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러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남은 기운을 모아 마지막으로 긴 능선과 높은 봉우리들을 우뚝우뚝 솟구친 후 그 여력을 낙남정맥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산세가 웅장한 만큼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도 다양하다. 산자락을 포함해서 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남한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식물종이 이 지역에 자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서울 근교의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 800m급 산에 700~800종의 식물이 자라는 것에 비하면 두 배쯤 많은 숫자다.

이름부터 지리산과 관련된 식물이 많다

지리산 식물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가 1913년의 조사를 바탕으로 1915년에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통해 470여 종을 기록한 후, 1935년과 1961년에도 일본인에 의한 조사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조사보고는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5년 이창복 박사가 우리나라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824종을 보고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리산 식물이 연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거나 채집되어 우리말 이름에 ‘지리’ 또는 ‘지리산’이 붙은 것만 꼽아 보아도 많다. 지리고들빼기, 지리괴불나무, 지리대극, 지리대사초, 지리말발도리, 지리바꽃, 지리사초, 지리실청사초, 지리오리방풀, 지리터리풀, 지리강활, 지리산고사리, 지리산김의털, 지리산바위떡풀, 지리산숲고사리, 지리산싸리, 지리산오갈피, 지리산하늘말나리, 지리산괴불나무 등이 그것이다.

또한, 학명에 ‘지리산’을 뜻하는 말이 붙은 것도 여럿 있다. 한국특산식물인 누른종덩굴의 종소명은 ‘chiisanensis’인데, 이것은 ‘지리산의’ 또는 ‘지리산에 자라는’이라는 뜻이다. 지리산 반야봉 부근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런 학명이 붙여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물은 이후에 지리산 외에도 강원도 등지의 높은 산에서도 발견, 기록되었다.

우리말이나 학명에 지리산을 뜻하는 말이 붙지는 않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알려진 식물들도 있는데, 모데미풀, 노각나무 등이 그것이다. 모데미풀은 지리산 운봉 근처의 모데미에서 처음 발견되어 1935년에 일본인 식물학자 오위에 의해 한국특산속 식물로 발표된 것으로서, 지리산 외에도 광덕산, 점봉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한라산 등 높은 산의 계곡과 능선 숲속에 분포한다.

노각나무는 1909년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에 의해 신종으로 발표된 나무로서, 한때 북미 동부 지역의 것과 동일하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북미의 것과는 다른 한국특산의 변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지리산 일대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덕유산, 소백산까지 올라가 분포하며, 이 지역과 동떨어진 평안도에도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많다. 특산속인 모데미풀은 물론이고, 히어리, 세뿔투구꽃, 지리터리풀, 노각나무, 세모부추, 노랑매미꽃, 누른종덩굴, 산앵도나무, 구상나무, 금마타리 등의 특산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히어리는 송광사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송광납판화라고도 하는 낙엽성 떨기나무로서, 남부와 중부 지방의 산지에 드물게 분포한다. 지리산에서는 화엄사계곡, 장당골 등지의 해발 300m 이하의 지역에서 발견된다. 노란 꽃이 이른봄에 잎보다 먼저 피어, 생강나무와 같은 시기에 같은 색깔 꽃이 피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생강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노랑매미꽃은 중부 이북에서 자라는 피나물을 대치하며 남부 지방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잎이나 줄기를 꺾으면 핏빛 즙액이 나오므로 지역에서는 ‘피나물’이라고도 부르지만, 식물도감에서 피나물이라 부르는 식물은 따로 있다. 세계적으로 지리산 등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므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꽃이 피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오래 가고 어디서나 잘 살므로 원예식물로 개발할 여지가 많다. 지리산 여러 곳에 자라고 있고 개체수 또한 아직까지는 많은 편이지만, 지리산의 귀중한 식물로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등은 법으로 보호하는 식물

지리산의 식물 가운데는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멸종위기식물들도 있다. 자연환경보전법에 의해 보호야생식물로 지정된 세뿔투구꽃, 히어리, 기생꽃, 자주솜대, 가시오갈피, 깽깽이풀, 천마 등이 분포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법이 바뀌더라도 천마를 제외한 다른 식물들은 계속해서 멸종위기식물로서 지정되어 보호받게 될 전망이다.

자주솜대는 자주지장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한때는 북부 지방의 고산과 남한에서는 지리산 고지대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90년대 중반 이후 설악산, 태백산, 덕유산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지리산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 환경부가 지난 94년 발간한 <특정야생동식물 화보집>에는 섬시호, 홍도서덜취, 큰솔나리 등과 함께 사진을 수록하지 못한 법정보호식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이 식물이 사진으로서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95년으로 이영노 박사 등이 94년 지리산의 식물을 조사할 때 문순화, 송기엽씨가 촬영한 것을 <지리산의 꽃>(평화출판사)에 발표한 것이다. 꽃은 6월에 피고 처음에는 녹색에 가까운 황색이지만 점차 자주색으로 변하는데, 학명의 종소명 ‘bicolor(두 가지 색깔이라는 뜻의 형용사)’도 그런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주색으로 변할 즈음 특히 아름답다. 환경부가 1998년부터 이전의 특정야생식물 지정에 이어서 보호야생식물로 이름을 바꿔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지리산에 이처럼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다는 것은 지리산은 너른 품에 걸맞게 여러 식물이 독특한 모습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방증해 준다. 해발 1,500m 이상의 긴 능선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고산능선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생육하고 있는 식물이 많다. 특히 주능선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이런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특수한 지역에만 적응해 살아가는 식물들로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 모두 능선과 정상부의 보존에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에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서 분류할 수 있는 가문비나무, 참바위취, 산오이풀, 만병초, 흰참꽃, 기생꽃, 회목나무, 땃두릅나무, 네귀쓴풀, 두루미꽃, 자주솜대, 금강애기나리, 구름병아리난초 등이 떨기나무숲, 바위 겉이나 풀밭에 자라고 있다. 이들은 지리산 능선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고, 또한 현재는 개체수가 많은 종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일단 지리산 능선이 생육 불가능하게 훼손된다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식물들이란 점에서 보존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지리산의 특기할 만한 북방계 식물 가운데 하나인 너도바람꽃도 능선은 아니지만, 장당골 상류에서 관찰된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식물 발견되는 고산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에 고향을 둔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잔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을 빙하기 잔존식물이라고 하는데, 가문비나무, 만병초, 기생꽃, 네귀쓴풀, 두루미꽃, 자주솜대, 구름병아리난초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고산이 백두대간에 집중되어 있는 남한의 지형 특성을 고려할 때, 백두대간이 식물 분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다양한 식물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지리산 곳곳에는 습지가 발달해 있다. 대표적인 고층습원으로는 90년대 중반에 발견된 대원사 북서쪽 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 있는 왕등재늪이다. 이 늪은 길이 200여m, 폭 80여m로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숫잔대, 동의나물, 감자개발나물, 애기부들, 세모부추, 방울새란, 닭의난초 등 고산지역의 습원에 오랜 세월 적응해 살아온 습지식물들이 대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리산의 습지는 이것 말고도 몇 곳에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연하천대피소 일대도 습기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대피소 주변에서의 무분별한 야영으로 인해 상당 부분 이미 훼손되었지만, 최근 공단의 보전 노력으로 자연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일대에는 북방계 고산식물인 두루미꽃 등이 자라고 있다.

지리산에서는 아직도 새로운 식물이 간간이 발견되고 있다. 중부 이북 지역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온 식물들이 발견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삼지구엽초, 긴병꽃풀, 흰 꽃이 피는 칡, 흰 꽃이 피는 산오이풀, 유명난초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삼지구엽초는 근래 지리산 중산리계곡에서 분포가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는데, 식물지리학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경기도 가평, 강원도 화천 등지가 주산지로서, 이들 지역에서는 줄기와 잎을 말린 것을 상품화해 팔기도 한다.

유명난초는 아직까지 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옥잠난초속 식물로서 최근 유명산, 제주도 등지에서 보고된 바 있다. 지리산에서는 필자 등이 1999년에 노고단 부근에서 발견하였다. 그 동안 일본의 후지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꽃이 보통 진한 자줏빛을 띤다.

지리산에서 아직도 새로운 식물들이 발견되는 것은 이 산 일대에 분포하는 식물의 전모가 아직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증거인 셈이고, 지리산의 드넓은 산세가 곳곳에 미세기후와 환경을 만들어내 상식으로는 예상하기 어려운 식물분포를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1,500m가 넘는 여러 봉우리들이 연이어진 고산능선이나 이 산봉들이 빚어내는 유장한 계곡들은 남한의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리산만의 특징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환경이 현재까지도 분포상으로 흥미 있는 식물들이 발견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백두대간이 한반도 식물 분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아직 관찰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지만, 백두대간의 여러 산들이 북방계 고산식물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을 잡게 되었다. 지리산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백두대간의 고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http://www.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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