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백구 앞 유리가 깨지다
2. 출항
오창학(ohmadang) 기자
▲ 천인호 비지니스칸 선실
ⓒ 오창학
텐진(天津)으로 가는 진천호 선실은 아늑하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침대에 커튼을 드리운 구조이지만 지친 몸 누이고 머릿속을 정리하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할 일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한다. 그러면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는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신념이 객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꿈을 쫓는 사람은 어느새 그 꿈을 닮아가는 법이니까. 오늘의 일이 그 같은 맥락이리라.

이번 여행의 한국 쪽 업무를 도맡아 주었던 K사장과 인천 제3부두에서 만났을 땐 이미 오후 4시 40분. 오후 7시 출항인데 이제야 닿았다. 대전에서 인천에 닿자마자 베이스캠프인 '마스타 지프'에서 타이어교체와 출발 전 마지막 점검을 서둘렀으나 일이 끝났을 땐 이미 오후 4시.

▲ 선적 대기중인 1호차 백구(뒤)와 2호차 파라곤(앞)
ⓒ 오창학
태어나 처음 하는 통관이라 K사장이나 나나 잔뜩 얼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느긋하다. 일단 일행을 여객터미널로 보냈다. K사장과 함께 부두 출입증을 받아 차를 몰고 우련통운에 도착하니 세관 승인서류를 요구한다.

"아…" 이 얼마나 우매한 백성이냐. 통운의 선적 과정에서 통관절차를 거치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들어오기 전 통관부터 했어야 한다니. 문제는 시간이다. 통운을 찾는데 부두를 뱅뱅 돌아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 이마가 깨진 백구. 보닛 오른쪽에 서류를 얹고 작성하고 있었으니 바로 내 머리를 넘겨 백구를 친 것이다.
ⓒ 오창학
백구의 보닛 우측에 통관서류를 얹어 놓고 허겁지겁 기입하는 찰라, 배에서 컨테이너를 하역하는 트레일러들 사이에서 '팍'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 바퀴를 고정하는 고임목 하나가 튀었다. 서류를 작성하는 와중에도 근 20여 미터 거리를 단숨에 날아드는 두툼한 나무토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느꼈다 싶은 순간, 백구의 앞유리 우측에서 유리 으깨지는 소리가 난다.

"으와아아!" 미친놈처럼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 여행을 어떻게 준비했는데… 그깟 유리 때문에… 하늘이 노랗다.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내게 생기는가. 굉음을 내며 이리저리 분주한 트레일러들을 향해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지만 이미 유리는 깨어져 있다. 이대로 차를 싣는다면 톈진에서 이 유리가 수입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터. 안 싣고 수리한다 해도 나흘 뒤 출항하는 배에 실어야 하는데 기간도 문제이거니와 이 모든 절차를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다.

▲ 서해를 넘는 천인호. 원래의 실크로드 노선대로라면 육로로 평양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베이징, 뤄양(낙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제 노선을 밟지 못하고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면서 조국의 분단 상황에 가슴이 미어졌다
ⓒ 오창학
벌써 시간은 5시 40분. 절망으로 가슴을 쥐어뜯다가 정신을 차리니 K사장이 다친 데 없냐며 걱정이다. 그래 목숨 건진 게 어디냐. 저 고임목이 부순 게 내 머리가 아니고 유리인 게 얼마나 다행이냐. 보닛 위에 서류 얹고 작성하는 사람의 머리를 피해 유리만 깨기가 어디 쉬우냐. 그래 난 행운아다 살 길은 있다.

▲ 나와 백구가 몸을 얹은 천인호. 내가 탄 배를 내가 찍을 순 없었고 선 내에 게시된 사진을 찍은 것이다.
ⓒ 오창학
차를 뺐다. 바로 일단 3부두 정문 앞에 있는 세관으로 가서 통관신청을 해 놓고 세관주차장에서 '마스터 지프'에 연락해 유리를 기다리는데 에릭님의 전화. "배 출항이 2시간 지연된답니다" 말했잖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행히 6시가 넘은 시간에 세관에서도 퇴근하지 않고 차대번호, 엔진번호 조회와 휴대품 검사를 마쳐줬다. 검사 와중에도 유리 작업은 진행되어 말끔히 교체. 시간에 쫓기고 절차에 어두워 진땀 흘리고 유리까지 깨지는 횡액을 맞은 하루가 그렇게 갔다. 백구를 입고 시켜놓고 여객 터미널로 돌아오니 힘이 쑥 빠진다. 그래도 일행이 보내는 격려는 안도가 탈진으로 변하는 걸 막는다.

여전히 배는 잔잔한 물살을 가른다. 서해는 호수만큼이나 평온하다. 인천에서 톈진까지 25시간의 인내가 필요한데 승선 직전까지의 숨 가쁜 일정들을 돌이켜보고 이제 시작될 여행들에 대한 기대와 구상들을 정리하다 보면 굳이 인내랄 것도 없다.


▲ 공부. 콘센트가 있는 선내 라운지에서 실크로드 DVD 감상. 먹고, 자고, 생각하고, DVD보고, 25시간이 부족하다.
ⓒ 오창학
내 차를 가지고 중국에 가는 것. 선적료 지불하고 배에 차 실으면 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다. 사륜구동을 준비하고 장거리 여행에 맞게 차량을 개조하는 일. 중국 내 차량운행에 필요한 면허와 임시번호판, 그리고 공안부,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공동부처의 운행허가서 발급에 필요한 제반 준비, 임시수출입통관 절차… 녹록치 않은 준비과정과 기간. 출발 당일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절차들. 막대한 경비. 낯설고 험한 지역에서의 운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가 방학 내내 자리를 비운다는 것. 보충수업 부담을 다른 분께 전가하고 학급의 아이들을 남겨둔다는 것은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복잡함, 생활, 현실, 굳이 지금이어야 하나? 조금 더 안정적인 지위를 가졌을 때, 조금 더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그런 때 하면 안 되나? 그런 고민 사이에서 질척일 때 아내가 말했다. 당신 인생에서 서른다섯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현실의 벽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이 배 안에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내의 격려와 의지 덕이다.

실크로드 1만4000Km 답사 계획 노선

▲ 예정노선

제1일: 인천항
제2일: 천진(톈진天津) 당고(塘沽)항 도착
제3일: 톈진-바오딩(保定)- 타이원(太原) - 린펀-허우마(후마)-윈청(運城)- 싼먼사(三門峽)
제4일: 싼먼사(삼문협) - 시안(西安)
제5일: 시안(西安 )
제6일: 시안-센양(咸陽) -바오지(玉鷄)-톈수이(天水)
제7일:톈수이-통위(통웨이通渭)-정서(딩시定西)-난주(란저우蘭州)
제8일: 란저우-융덩(永登)-구랑-우에이(武威)
제9일: 우에이(무위)-진창(金昌)-아라사여우치(阿拉善右旗-바단지린사막巴丹吉林 沙漠)
제10일: 바단지린사막-바단지린 사막
제11일: 바단지린사막- 주취안(酒泉)-자위관(嘉峪關)
제12일: 자위관(嘉峪關)-안시(安西)-둔황(敦煌)
제13일: 둔황(敦煌)
제14일: 둔황-고비사막-하미(合密) 방향으로 이동
제15일: 고비사막-하미
제16일: 하미-싼싼(선선)-투루판
제17일: 투루판-쿠얼러 캠핑
제18일: 쿠얼러-룬타이- 쿠차
제19일: 쿠차-악수(아커스)-카스
제20일: 카스
제21일: 카스-피산- 호탄(허티엔)
제22일: 호탄-우전(위톈)-민펑
제23일: 민펑- 치에모-노챵(뤄챵)
제24일: 노챵- 망암 캠핑
제25일: 망암 - 더링하(德令合)
제26일: 더링하-우란- 칭하이(靑海)호수
제27일: 청해호수 - 시닝(西寧) - 평안 - 란저우
제28일: 란저우 -바이인(白銀)- 은촨(銀川)
제29일: 은촨
제30일: 은촨-우하이(烏海)-린허(臨河)-우위안(五原)-바오터우(包頭)
제31일: 바오터우-후허하오터(呼和浩特)-청수이허(淸水河)-다둥(大同)
제32일: 다둥(大同)-톈진(天津)
제33일: 천진
제34일: 천진 출발
제35일: 인천항 도착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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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사막에 가고 싶었다
1. 프롤로그
오창학(ohmadang) 기자
▲ 8.10일 타클라마칸을 뒤로하고 아얼진 산을 향해 나가던 날
ⓒ 오창학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모든 것을 한 입씩 물어뜯어 보라.
또 가끔 도보 여행을 떠나라.
자신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치라. 거짓말도 배우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라.
돌들에게 말을 걸고
달빛 아래 바다에서 헤엄도 쳐라.
죽는 법을 배워 두라.
빗속을 나체로 달려 보라.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흐르는 물 위에 가만히 누워 있어 보라.
그리고 아침에는 빵 대신 시를 먹으라.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

- 엘렌 코트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


ⓒ 오창학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오아시스를 하나씩 담고 산다. 때론 모래 언덕 하나만 넘으면 오아시스에 닿으리라 생각하고 오늘을 넘기면 희망찬 내일이 기다릴 것이라 자위하며 힘든 하루의 땡볕을 견딘다. '인생'이란 황무지에서 역설적이게도 타클라마칸 사막은 내게 오아시스였다.

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키메라'(Chimera)를 많이 떠올렸다.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 용의 엉덩이와 꼬리를 지닌 그처럼, 하나의 몸 안에 두 개의 영혼을 담고 사는 나는 인간 키메라였다.

삶의 구심력을 놓칠세라 끝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 나와, 원심력에 편승해 자꾸만 삶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나. 허나 사람의 허울을 쓰고 숨쉬는 자, 키메라 아닌 이 그 누구랴. 누군들 현실 반대의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랴. 그런데도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인생은 항상 선택의 문제였다. 최선과 차선, 그 최선 안에서의 또 다른 최선과 차선. 위태위태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업도 직장도 인간관계도 늘 하나의 선택을 강요했다. 또 다시 선택의 문제에 직면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떠남을 택하기엔 동기 요인이 너무 미약하다. 누구처럼 일생일대의 변환을 꾀할 시기에 직면한 것도 아니며 직업이나 인간관계가 떠남을 강요할 어떤 처지에 놓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 가지 이유로도 막지 못할 큰 핑계가 있었다.

'떠나고 싶다.'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 타클라마칸
ⓒ 오창학
사막에 가고 싶었다. 1박2일짜리 낙타 사막패키지 말고 전인미답의 모래더미 속에 홀로 있고 싶었다. 입 속에서도 머릿속에서도 연신 '타클라마칸'이란 단어가 맴돌았다. 길을 떠나고 싶었다.

한두 시간에 닿는 그런 길 말고, 검고 찐득한 타르가 곧게 깔린 그런 길이 아닌 오직 바람과 시간만이 동행해 주는 그런 먼 길을 떠나고 싶었다. 그때부터 '실크로드'란 단어가 맴돌았다. 때로 '비단길'이라 고쳐 불러 봐도 다시 '실·크·로·드'라 되뇌게 되는 그 길이 가고 싶어졌다.

역사 위에 길을 내고 사람의 삶과 문화와 문명이 소통했던 그 곳은 더 이상 캬라반 행렬이 이어지는 몽환의 길이 아님을, 사막과 고봉준령으로 막아서며 인간의 발길을 막아서던 과거의 길이 아님을 안다.

북경에서 우루무치까지 고속도로와 철로가 뚫려 유적이란 유적엔 관광객이 들끓고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조차 석유를 파먹기 위한 직선 종단도로가 뻥하니 뚫린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 둔황의 무명 봉수대
ⓒ 오창학
그러나 내 의식 속의 실크로드는 여전히 대상들의 낙타 방울 소리가 은은하고 먼지 폴폴 날리는 그런 길이었다. 변화한 21세기 실크로드에서 천 년 전, 혹은 이천 년 전 흙내음을 맡아보고 싶어졌다.

▲ 7.14일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길을 나서다.
ⓒ 오창학
2006년 7월 14일.

2만6000톤 육중한 '천인호'가 천천히 인천항 부두를 밀어낸다. 녀석의 선실엔 내가, 배 아래 선적칸에 '백구(白狗)'가 실려 있다. 1만6200마력 엔진의 두툼한 진동 사이로 백구도 120마력 작은 심장을 고르며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2.4톤 작은 몸에 우릴 태우고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

백구! 긴장하라. 드디어 우린 길을 나선 것이다.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2년여 가까이 계속해 오던 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의 연재마저 보류한 채 많은 시간을 이 여행의 준비에 매달렸고 결국은 실행에 옮겨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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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체험~
작성자 : 김현종작성일 : 2006.06.20조회수 : 392

5월 20일 7박9일 일정. 우루무치로 향하는 대한항공(KE883)을 타고 실크로드 일정을 시작.하였다. 우루무치까지는 약 5시간 정도 걸렸고 새벽 1시정도 도착한 후 호텔로 이동 한 후 휴식에 들어갔다.

둘째날 오전 천산기슭에 자리잡은 남산목장을 향해 출발했다. 우루무치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지나 푸른 초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말을 처음 타기에 약간의 설레임과 기대로 차 있었다. 초원에 다가가자 말들이 놀랄까봐 버스는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올라갔다.

버스에서 가이드 멘트가 이어졌다. 말타는 시간은 대략 50분이지만 카자흐 민족들은 시간을 잘 안지키기에 중간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하면 빨리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부들이 손님을 붙잡고 자기말에 태우기 시작했다. 손님들과 나는 마부가 이끄는 말을 타고 초원으로 나아갔다. 잠깐 가더니 마부들이 5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돌아왔다. 대략30분이나 걸렸을까... 역시 멘트대로였다. 가이드와 카자흐족 마부들간에 한창 실랑이가 벌어졌다. 시간에 따른 비용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었다.

푸른초원에 말을 타고 달리던 유목민들만 머릿속에 떠올리다가 좀 초라한 모습을 보고 나니 좀 실망스러웠다. 남산목장을 떠나 우무루치 시내 홍산 공원을 올라가 우루무치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말 그대로 붉은 색깔을 띤 산이라서 홍산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민광장을 차창으로 관광 후 유원을 거쳐 돈황을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유원까지 대략 13시간 정도 열차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열차에서는 4인 1실 침대칸으로 굉장히 깔끔했다.


셋째날 아침 8시30분 유원역에 도착했고 유원역에는 또 다른 가이드가 나왔다. 조식 후 유원에서 둔황까지 버스로 이동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은 평원위에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신기루를 볼 수 있었다. 빛의 굴절현상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호텔 체크 인 후 호텔에서 잠깐 휴식을 하고 오후에 다시 일정을 시작했다. 영화 “해신”, “신용문객잔”의 촬영지인 돈황고성과, 양관박물관, 실크로드유적 일정까지...

둔황은 고대 동서양 교류의 요지로 실크로드로 가는 통로였던 곳이다. 기원전 11년 한나라 무제가 이 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동부에서 한족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그 후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이곳 둔황을 거치면서 독특한 둔황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둔황예술'을 창출했다.

넷째날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인 막고굴(돈황석굴)관광은 둔황의 하이라이트다. 1900년에 발굴되어 명사산 뒤쪽에 자리잡고 막고굴은 수많은 벽화와 불상들이 발굴되었다. 1000여점 중 반정도만이 발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아직도 발굴중에 있다.

막고굴의 관람은 이 곳 전문 담당가이드의 통제를 받는다. 보존을 위하여 일체의 조명시설도 없고 가이드가 소지한 대형 손전등에 의지하여 설명을 듣게 된다. 이곳에는 신라의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함께 보관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프랑스로 반출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막고굴을 떠나 사막이며 모래산이라 불리우는 명사산으로 이동하여 낙타를 타고 모래썰매를 체험 한 후 마르진 않는 오아시스이자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월아천을 관광 하였다.


다섯째날 유원역에서 하밀로 좌석기차로 이동 그곳에는 소수민족중 하나인 회족의 왕과 왕비가 매장 되어 있는 회왕릉을 관광한 후 바람소리가 귀신이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하는 마귀성으로 향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바람에 의해 침식된 모래바위가 깍여진 모습은 장관이었다. 언젠가는 이바위들이 다 깍여나갈것을 생각하며 사진에 한 장 담아놓았다. 다시 선선으로 이동 하여 쿠무타크 사막을 관광 한 후 트루판으로 이동하였다.


여섯째날 트루판 동쪽 옛 실크로드 시대의 도시인 고창고성을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들어갔다. 삼장법사가 불교경전 구하러 인도 가는중, 이곳에 둘러 1개월동안 인왕경을 강의한 후, 10년후 돌아오는 길에 들렀을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이 성터였는지 알수 없을 만큼 폐허로 변해버렸다. 버스로 10분 이동 후 고창국 귀족들의 무덤인 아스타나 고분군을 관광 후 포도원에서 트루판 포도농가를 방문하였다.


일곱째날 화염산으로 이동하였다. 화염산은 투르판 분지 중부에 걸쳐 있는 동서 100Km, 남북 10Km, 평균 해발 500m의 산지로 지반의 습곡운동에 의해 습곡이 진 붉은 산은 여름철이 되면 지표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타오르는 것처럼 보여 화염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특히 이 화염산은 손오공의 활약으로 유명한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현장법사(삼장법사)와 그 일행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산을 지나기 위해 그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이란 부채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파초선의 주인인 철옹공주와 싸운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화염산은 여름 최고기온이 48℃나 되고 지표면 온도는 70℃를 넘어가기 때문에 계란을 모래에 묻어놓아도 삶아질만큼 중국에서는 제일 무더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여덟째날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항상 멀리서만 보아왔던 천산산맥의 천산천지를 향해 달렸다.

멀리서 바라보는 설산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로 이동한 후 다시 전동카로 이동 후 드디어 천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건조하고 무더운 지역에서 흙먼지를 맞아가며 관광을 하다가 선선하고 푸르른 호수를 보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천지에서 유람선에 올라 한바퀴 돈 후 천지에 발을 담그니 더욱 시원함이 밀려왔다.

천산천지 관광을 마치고 우루무치 신강성 박물관으로 이동 후 미이라를 볼 수 있었다. 이쪽은 미이라가 잘 보존 될 수 있는 고온,건조,염분 등의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져 있어 보존상태가 최상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바자르 시장에서 잠깐 쇼핑을 하고 한식을 먹고 난 후 공항으로 이동하는 걸로 7박9일간의 모든여정을 끝마쳤다.

조금은 생소한 지역으로 중국이라는 느낌보다는 아랍쪽에 온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여행하는 동안 날씨도 좋았고 손님들도 모두 좋았으며, 나 또한 많은 것들을 보고 돌아갈 수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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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중국-베이징, 자금성, 황성의 운치와 멋

자금성, 황성의 운치와 멋

자금성 입장권을 보면 한자로 고궁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다. 한국인들이 통상 부르는 자금성은 밤하늘 별자리에서 그 중심에 위치한다는 자혜성의 첫 글자와 일반백성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글자를 합한 것. 중국인들은 고궁(故宮)이라고 부른다. 자금성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도 베이징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다. 과거에 지위와 계급에 따라 집의 규모나 장식 등의 제재를 뒀던 만큼 중국의 대표 황궁인 자금성은 당시의 건축양식과 기술의 최고를 쏟아 부은 걸작이다.

-주황빛 기와 파란하늘의 낭만
-웅장함 뒤 소소한 재미도 발견
-코스 따라 가는 자금성 이야기


■ 자금성의 대문 - 오문

관광객들이 천안문을 지나 ‘ㄷ’자 모양의 성곽을 만나는데 이곳이 바로 자금성의 대문인 ‘오문’이다. 자금성의 입장권은 오문의 좌측에서 판매하는데 패키지여행에 참가했던 사람이라면 아침 개장시간에 이곳에서 다른 많은 관광객들과 붉은 성벽 아래에 앉아서 기다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본래 오문은 황제가 성벽 위로 나와 조서를 내리고 출정을 명령하거나 개선한 장수를 맞이하던 곳이다.

문이 세 개가 있는데 가운데 문이 약간 크며 이 문은 황제만 드나들었다. 예외적으로 황후가 처음 시집올 때 평생에 단 한 번 이 문을 통해 들어오도록 하며, 황제가 윤허를 내린 경우에 한해 과거에서 장원한 합격자도 통과할 수 있었다. 양 쪽 문은 각각 오른쪽은 황족과 왕족들의 문이고 왼쪽으로 신하들이 출입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표를 낸 후 가운데 문으로 입장한다.


■ 건축예술의 결정체 - 태화전

오문을 통과한 후 처음으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자금성에서도 최고의 기단, 최고의 광장,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태화전이다. 넓은 광장을 거쳐서 3층의 기단을 올라야 비로소 앞에 설 수 있다. 태화전은 너비 11칸으로 현존하는 중국 건축물 중 칸수가 제일 많으며 2첨 지붕으로 된 건물이 위용을 과시한다. 지붕의 장식도 황제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제일 많은 10개가 보인다. 태화전 안에는 황좌가 놓여 있고 뒤에는 정대광명이라고 씌어진 현판이 걸려있다.

이곳 광장에서 문무백관이 정렬해 조례를 개최하고 사신을 맞이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례를 치른다. 영화 마지막황제에서 부의가 황제로 등극하던 장소 역시 이곳으로 웅장한 스펙터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기단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 가운데에는 용 9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어도’라고 해 오로지 황제만 다닐 수 있는 길이다.

자금성은 그 웅장한 크기만큼이나 많은 건축자제가 사용됐다. 벽돌만 해도 8000만개에 이른다는데 한 장소에서 모두 생산해 낼 수 없어 각 지역에서 만들어서 운하로 운반했다. 네모반듯하고 쇳소리가 난다고 해 ‘금전’이라고 불리는 벽돌은 주로 대전의 바닥에 이용했는데 지양수성 쑤저우에서 생산한 것이다. 태화전에 깔린 돌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데 대리석이 아닌 벽돌이다. 지금은 제작이 안되고 하나당 약 150만원 상당의 가치를 지니며 주요 재료는 찹쌀, 흙, 먹는 기름, 석회 등이다.


■ 특별시설로 유비무환

자금성 곳곳에 매우 큰 항아리가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목조건물이다 보니 화재의 위험이 늘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시사철 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방화수로 사용했다. 항아리 밑을 보면 겨울에는 얼은 물을 녹일 수 있도록 불을 땔 수 있게 해 놨다.

황제가 머무르는 자금성인만큼 더위와 추위를 예방하는 기초시설 또한 신경을 썼다. 대표적으로 자금성의 벽을 밖에서 보면 두께가 70Cm에서 1M가량 되는데 그 속을 분석하면 벽이 2중 구조로 가운데는 30Cm가량의 공간이 있다. 이 사이에 공기가 머무르기 때문에 보온효과를 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게 유지해준다.

자금성은 황제의 안전을 고려한 설계가 이뤄졌다. 땅굴 파고 자객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벽돌만 해도 10겹을 깔았고, 정원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이 때문 여름에 자금성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햇빛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 곤욕을 치를 수 있다.에 그늘이 거의 없지만 별도의 나무나 부조물 없이 탁 트인 공간이어서 맑은 날 자금성은 주황빛 지붕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 한구석 쉬어가는 여유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곳을 지나 나무도 있고 그늘도 있는 정원에 이르면 이제 자금성 관광의 마지막 코스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길을 따라 바닥에 갖가지 색돌로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꽃, 새, 해, 수레 탄 사람, 농부 등 그림도 가지가지. 흔히 자금성 하면 웅장함만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소소한 볼거리들이 그 공간들을 메우고 있다. 중거리나 원거리에서 볼 때 의미가 없는 단청이나 들보의 조각, 색돌로 만든 그림은 사람들이 자금성을 거닐며 유유히 감상할 수 있다.

자금성에서 제일 많은 것이 무엇일까. 정답은 용이다. 자금성을 거닐다 보면 수없이 많은 용들을 만나는데 정원에 이르면 특히 심하다. 천장에도, 벽돌에도, 기와에도 바닥에도 용 천지다. 자금성의 용은 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숫자를 안다면 가이드들의 좋은 이야기 거리일텐데, 지금까지 그 정확한 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르는 황궁의 북문을 신무문이라고 부른다. 원래대로라면 4방위의 대문은 각각 네 방위를 지킨다는 신성한 동물인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이름에 따라 부르기 때문에 현무문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희제의 이름이 현엽이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신무문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이 문을 나서면 자금성 관광이 끝난다.

베이징 글·사진=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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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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