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2005)..........'에 해당되는 글 78건

  1. 2006.06.27 13. 신실크로드의 요충지 우루무치
  2. 2006.06.27 12. 키질 석굴과 조선조고 화가 한락연
  3. 2006.06.27 11.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4. 2006.06.26 2005 실크로드답사

13. 신실크로드의 요충지 우루무치

40개국 기업들 집결한 국제물류 중심지

≫ 만년설로 덮인 톈산 산맥의 봉오리들이 구름 사이로 보이고 있다. 톈산 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우루무치는 쿠처에서 하늘길을 이용해 가려면 이렇게 높다란 톈산을 지나야 한다. 이윽고 몽골어 ‘아름다운 목장’ 이란 뜻의 우루무치가 나타난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문명의 명멸 역사이며, 그 중심에는 늘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피를 공급하는 심장과 그 공급로인 혈관의 관계처럼, 도시의 성쇠에 따라 길의 여닫임이나 소통이 결정되곤 한다. 옛날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고, 낙타 등에 업혀 사막을 지나며, 돛배에 실려 바다를 가르던 그 전통적 실크로드 시대에는 물론이거니와, 기차와 기선, 비행기로 지구가 땅·바다·하늘의 입체적 교통망으로 뒤덮인 오늘의 신실크로드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실크로드와 도시의 관계는 서로 맞물리는 변증법적 관계다. 그러한 관계의 역사적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보통 쿠처에서 카슈가르로 서행하는 오아시스로 답사의 상궤(常軌)를 벗어나 딴 길로 찾아간 곳이 바로 신흥 도시 우루무치다.

1884년부터 우루무치는 신장의 심장부로서 톈산 이북 초원로의 관문이 됐다

7월24일 오후 2시40분, 타림분지의 뜨거운 지열이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속에 우리 일행을 태운 서북항공 소속 40인승 소형 비행기는 사뿐히 쿠처공항을 이륙했다. 곧바로 기수를 동북쪽으로 돌리자 만년설을 머리에 인 중중첩첩의 텐산 산맥 묏봉오리들이 손에 잡힐 듯 발 아래로 스쳐지나간다. 동전닢 만한 오아시스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이윽고 듬성듬성 숲이 우거진 초원 한가운데 햇빛에 번뜩이는 고층건물과 공장 굴뚝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곧 우루무치다. 공중에서 봐도 현대적 면모를 갖춘 신흥 도시임을 이내 알 수 있다. 여기까지 비행에는 한 시간 10분이 걸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고산 초원지대라서 그런지 기온이 30도를 약간 웃돈다. 여러 날 50도에 가까운 열사 속을 누비며 부대끼던 우리에겐 사뭇 시원하게 느껴졌다.

915m 고산의 ‘아름다운 목장’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의 우루무치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로서 텐산 산맥의 북쪽 기슭, 우루무치강안의 해발 91의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준가리아 분지의 서단 초원지대로서 여러 종족계통의 유목민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전한이 타림분지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 둔황에서 하미를 통하는 이른바 텐산북도가 뚫려 이곳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7세기 이곳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정주(庭州)에 북정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다. 당시 이곳은 윤태현(輪台縣)의 소재지였다. 8세기 중엽 당세력이 물러나자 위구르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약 천년 동안은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

≫ 우루무치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구도로써 해발 915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50도를 웃도는 투루판과 쿠처 등과는 달리 고산 초원지대인 우루무치는 서늘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와 영국 등 서구세력들의 눈독과 만청의 서진정책은 더 이상 이러한 ‘무풍’을 허용하지 않았다. 18세기 중엽에 청나라는 준가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텐산 남쪽 기슭의 카슈가르 칸국을 병합하고, 우루무치에 안서제독을 주둔시키면서 이름도 ‘이끌어 깨우치게 하다’라는 뜻의 ‘적화’(迪化)란 비칭으로 바꾸고, 회교를 배척하는 정책도 단행했다. 이에 격분한 무슬림들이 19세기 중엽 대규모 반청독립운동을 일으켜 일시 우루무치를 장악했다. 당황한 청정부는 흠차대신(欽差大臣) 좌종당(左宗棠)을 급하해 무력으로 이 운동을 진압하고, 1884년에는 준부(準部)와 회부(回部)를 합쳐 신장성을 만들고 우루무치를 성도로 삼았다. 이때부터 우루무치는 신장의 심장부로서 텐산 이북의 초원로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4년 위구르족과 카자흐족이 주동이 되어 쿠처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지만 얼마 못 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군이 진주해 정권을 넘겨받은 후 1955년에 지금의 위구르자치구를 설립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고 거리 이름부터가 신식 느낌을 주는 해방로와 인민로가 교차하는 남문 바자르(시장)로 향했다. 거리엔 형형색색의 얼굴이나 옷 모양을 한 사람들로 붐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에는 위구르족말고도 카자흐, 타지크, 회족, 한족, 몽골족 등 13개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실로 ‘민족의 십자로’란 말을 실감케 한다. 그만큼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나 1906년 3만9천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208만명으로 무려 53배나 늘어난 셈이다.

다음날, 우리는 신장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사전에 연락이 있어 이 박물관 연구원인 쟈잉이(賈應逸, 여) 교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쟈 교수와는 1년 전 한국 중앙아시아연구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만나 안면을 익혔다. 박물관은 10월1일 개관 50주년을 앞두고 신관 신축공사가 한창이어서 전시실은 일부만을 공개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쟈 교수의 친절한 안내 속에 전시품들을 돌아보고 대략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자치구의 종합 박물관으로서 구내 주요 출토품들은 거의 다 모아 전시해놓고 있다. 소장품만도 3만 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관심거리는 문명교류와 관련된 유물들인데, 그 양이 적지 않다. 하미에서 출토된 두 귀 달린 채도항아리를 비롯해 페르시아계 유리그릇, 알타이계 구리솥, 시베리아계통의 토기, 북방계의 석관묘 등이 그 대표적 유물들이다. 눈길을 끈 것은 누란에서 출토된 ‘잠자는 미녀’를 비롯한 여러 점의 미라다. 이 미라에 관해 쟈 교수는 이집트 미라는 약물처리를 한 것이나, 신장 것은 자연건조된 것이므로 응당 구별해서 ‘건사’(乾死)라고 이름해야 한다고 일리 있는 주장을 한다.

≫ 쿠처에서 타고온 비행기에서 바라본 우루무치 시내의 모습.

100년새 인구 53배 늘어 200만명

돌아오는 길에 시 중심에 자리한 훙산공원 앞을 지났다. 붉은색 암괴로 이루어진 산이라고 해서 ‘훙산’(紅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해발 1391m 높이의 산 정상에는 우루무치의 상징이라고 하는 9층 진룡탑(鎭龍塔, 1788년 세움)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이 산은 한 마리의 용이었는데, 우루무치에 대홍수를 일게했음으로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화나서 머리 위에 탑을 세워 용을 진압했다고 한다. 그 탑이 바로 이 진룡탑이라는 것이다. 서왕모의 전설은 여기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10km쯤 떨어진 텐산 산맥의 두 번째 고봉인 보고타봉(博格達峰, 해발 544)의 중턱(해발 1980m)에 있는 고산호 천지에도 그녀에 관한 애틋한 전설이 깃들여 있다. 둘레가 11km나 되는 이 천연호수는 우리네 백두산 천지보다는 작지만, 이름도 같거니와 다 같이 성산으로 추앙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호수는 서왕모가 목욕하는 곳이고, 그 동서에 있는 작은 못 두 개는 발을 씻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3천년 전 주나라 목왕(穆王)이 여덟 필 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쪽 지방을 주유할 때 서왕모가 성대한 환영연회를 베푼 장소인 요지(瑤池)가 바로 이 천지라고 한다. 이렇듯 이곳 우루무치는 신성한 기운이 서린 고장이다.

한국 기업들·한글학교 ‘한류’ 구심점

≫ 우루무치 시가
그러기에 오늘은 백년 전 서양 탐험가들이 ‘찌들대로 찌든 지저분한 거리’라고 묘사했던 치욕을 말끔히 가셔내고 일약 현대적인 신흥 도시로 발돋움한 것이다. 석유와 석탄, 철광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갈무리하고, 강철과 전력, 시멘트와 방직 등 중공업과 경공업의 여러 분야를 두루 망라하고 있으며, 여기에 사통팔달된 교통망을 겸비하고 있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도는 물론, 이미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까지 잇는 철도가 개통되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해 주변 8개국과의 항공로도 일찌감치 열리고 있다. 해마다 20조원 이상이 투자되는 서부대개발사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우루무치는 올해 12%의 고성장률을 기록한다고 한다. 이러한 굳건한 경제적 및 문화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지금 막 유럽까지를 겨냥한 국제물류센터를 건설 중이라고 한다. 그들의 야심 찬 구호는 ‘경제 실크로드의 선점’이다.

지금 우루무치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하는 수출의 기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미국과 일본 등 40여개 나라 1,300여개 회사가 진출해 이 기지를 차지하려고 앞다투어 경쟁을 벌이고있다. 우리 나라도 여러 기업들이 들어와 경쟁에 당당히 합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1년에 문을 연 ‘한글학교’는 우리의 문화홍보는 물론, ‘한류’를 이끌어가는 구심역할을 하고 있어 흐뭇하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실크로드, 즉 신실크로드가 잉태하고 있는 잠재력과 분출하고 있는 활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은 비단 우루무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일행이 따라가는 길의 곳곳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신장성의 주인들

아리안족 이어 7세기 위구르인 차지
한·카자흐·만주인 등 13개 민족전시장

≫ 우루무치 시내 남문 바자르(시장)에서 한 상인이 양고기를 굽고 있다.
실크로드 역사의 주무대였던 신장성(동 투르키스탄)에는 지금도 무려 13개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8세기 이후 지역의 주인공이 된 투르크 계통의 위구르족과 정치·경제적 실권을 쥔 한족을 비롯한 카자흐족, 회족, 키르키즈인, 몽골인, 타지크인, 타타르인, 만주인, 투르크멘인,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으니 가히 민족 전시장이라 이를 만하다. 공용어는 중국어지만, 각 민족들의 언어 또한 각기 달라 신장 지역은 여전히 복합 문화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2000여 년 전 동 투르키스탄 민족구성이 오늘날과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위구르족이 다수인 현재와 달리 실크로드 교류사가 서막을 열었던 당시에는 둔황 부근부터 타림분지 일대까지 유럽, 인도, 이란인의 선조인 아리안계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서를 보면 기원전 2세기께 타림분지 일대는 이란·아리안 계 민족이 만든 50여 개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후대 실크로드의 지배권은 흉노족과 중국 왕조의 손아귀에 넘어가지만 이 지역의 고대 아리안 인들은 독특한 동식물 문양, 연주문 따위의 독창적 양식의 공예미술을 만들며 실크로드 교류 문화사의 여명기를 이끌었다. 일본의 실크로드사 권위자인 나가사와 가즈도시는 명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에서 “세계 고대사의 여러 변화는 중앙아시아의 아리안족이 곳곳의 원주민 문화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 계기를 만들었다”까지 단언하고 있다.

이후 실크로드 교류사를 발전시킨 민족은 흉노와 월지족이다. 실크로드 교역로를 개척한 장건의 서역행도 중국 간쑤 지방의 하서회랑에 있던 월지족과 이들을 파미르 고원 서쪽으로 쫓아내고 신장성 일대에 대판도를 구축한 흉노와의 민족 전쟁을 업고 기획한 것이다. 흉노는 중국의 비단을 얻어 파미르 서쪽 국가들의 물품과 교역하는 등 실크로드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고, 월지족은 이후 인도대륙에 쿠샨 왕조를 세워 불교를 서역과 중국에 전파하는 주역이 된다. 텐산산맥 북쪽에서 남하해온 투르크(위구르)인들은 뒤늦은 7~8세기 이란 아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실크로드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후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오스만·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 유럽대륙의 역사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천부적 상인이던 소그드인들 또한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고대 중세 실크로드 교류사에 큰 자취를 남겨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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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키질 석굴과 조선조고 화가 한락연

상처입은 고대문화 되살린 ‘중국의 피카소’

▲ 둔황 석굴, 룽먼 석굴, 윈강 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이자 으뜸으로 꼽히는 키질 석굴읮 전경. 쿠처 시내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인 밍우타그산 절벽에 벌집처럼 굴이 뚫려 있다. 쿠처 왕족 출신의 명승인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이 맞은편에서 건너다보고 있다. 둔황석굴처럼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돼 그저 눈으로만 둘러볼 수 밖에 없다.

쿠처는 석굴로 이름난 고장이다. 부근에만 10여곳의 석굴이 널려있어 신장 지역 전체 석굴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그중 키질 석굴은 단연 으뜸이며, 둔황·룽먼·윈강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굴을 만든 시기가 가장 오래고, 내용물에도 동서 교류적 요소가 많다는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뿐만 아니라, 1만여 ㎡에 달하는 벽화의 예술적 가치는 둔황 석굴과 비견된다거나 심지어 더욱 높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키질 석굴이 더욱 뜻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 실체와 진가가 한겨레붙이의 노력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흥분된 심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쿠처와 바이청(拜城)을 잇는 ‘고배로(庫拜路)’를 따라 서쪽으로 67km 떨어진 수게트(蘇格特) 계곡까지 한 시간쯤 달려갔다. 깊숙한 계곡 오른쪽엔 무자르트강(木札爾特江)이 황량한 츠르타크산(却勒塔格山)을 끼고 아득히 흘러가고, 왼쪽으론 깎아지른 듯한 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 절벽이 2km나 쭉 늘어섰다. 절벽에 벌집처럼 뚫린 것이 유명한 키질 석굴이다.

3년간 옥고 뒤 선생은 평생 소원인 석굴 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 상처입은 고대문화 되살린 ‘중국의 피카소’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2> 키질 석굴과 조선족 화가 한락연
정문에 들어서니 눈에 띄는 것이 1994년 세운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청동 좌상이다. 그는 쿠처에서 태어나 불교의 불씨를 지핀 뒤 장안에 가서 경론 74부 300여권을 번역하고 불교 삼론종의 조사가 된 명승이다. 이 인자한 명승은 마냥 깊은 사색 속에 찾아오는 손들을 반겨 맞으며, 바른쪽 석굴군으로 안내한다. 석굴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236개나 된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300개가 넘을 것이라고 하는데, 벽화 석굴은 75개다.

이 석굴군은 3~9세기 약 600년 동안 여러 왕조시대 다양한 내용으로 조성되었다. 벽화는 부처의 본생과 본행, 교화와 공양을 주제로 한 내용이 핵심이다. 벽화 기법에서는 어느 석굴벽화보다도 서역기법을 많이 받아들이고, 중원기법을 가미해 특유의 쿠처풍 도상을 그려냈다. 그러나 소승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불교가 7~8세기에 이르러 대승에 편중되자 벽화 미술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다.

발굴된 236개 포함 300개 넘는 석굴

▲ 쿠처 시내에서 키질 석굴이 있는 수케트 계곡까지 가는 고배로. 황량한 돌산 풍광이 끝나면 푸른 숲과 맑은 강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난다.

안내하는대로 9동만을 둘러봤다. 여기도 러시아나 독일, 일본 등지에서 온 도굴꾼들에 의해 뜯기고 할퀸 자리가 곳곳에 역력하다. 천년을 넘긴 벽화들이지만 그렇게 색조가 선명하고 형상이 또렷할 수 없다. 탐방 내내 특별히 유의한 것은 교류상을 보여주는 벽화들의 실물 확인작업이다. 천장의 비천상을 비롯한 천궁기악도 중의 각종 서역악기와 페르시아식 연주무늬 등 하나하나 활발했던 문명교류상을 여실히 입증한다. 17동 주실 벽화는 마름모꼴 격자 속에 본생담을 그려넣은 특유의 벽화 미술로서 눈길을 끌었다. 6세기 중국 북제시대 미술에 나타난 이른바 ‘조의출수(曹衣出水)’ 기법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명화가 조중달(曹仲達)은 육체적 미감을 살리기 위해 의상 무늬를 인체 구조에 따라 변화를 줌으로써 마치 물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의상이 몸에 밀착된 기법을 창안했다. 이 ‘조의출수’는 그후 중국 불화의 중요한 의상기법의 하나로 전승되었다.

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멎게 한 곳은 10동이다. 원래 선방으로 벽화는 없었다. 약 2. 높이의 주실은 방형이고 창문과 벽난로터가 있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자(題字)가 길이 3.3, 폭 1.9의 북면 상반부에 세로로 새겨졌다. 글자의 크기는 평균 8~10mm이며 새김 깊이는 0.m 정도다. 그리고 주실 한가운데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갸름한 나무받침대에 놓여있었다. 제자와 사진의 주인공은 중국 조선족 출신의 화가 한락연(韓樂然)이다. 글자는 조수였던 천탠(陳天)이 새겼다고 한다.

▲ 쿠처 시내에서 키질 석굴로 가는 길목에 대협곡을 지나 만난 염수계곡. 원래 바다였던 곳이 융기해 육지로 변한곳으로 하얀 가루의 맛을 보니 실제로 짠맛이 났다.


제자의 원문은 이렇다. “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지은 신장문화보고(寶庫)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와서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우리나라 여러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벽면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趙寶琦), 천탠, 판궈챵(樊國强), 쑨비둥(孫必棟)을 데리고 두 번째로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正附) 번호(‘韓氏編號’ㅡ필자)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파리 유학·반파시즘·항일운동·비행기 추락사

이 제자에서 키질 석굴에 대한 화가의 각별한 애착과 투철한 선구자적 역사문화의식, 그리고 외래 도굴꾼들에 대한 의분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 키질 석굴 10호굴 한쪽에 놓여 있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의 자화상(1935년작).
한락연은 필자의 고향 대선배다. 1898년 중국 얜밴 룽징(龍井)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광우(韓光宇)고 어릴적 이름은 한윤화(韓允化)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인 윤화는 소학교 졸업 뒤 전화국과 세무소에서 말단 사환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3.1운동 여파로 ‘룽징 3.13’ 반일시위가 일어나자 몰래 태극기를 그려 시위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시위에 앞장선다. 이를 계기로 세상사에 눈뜨기 시작한 청년 광우는 소련 연해주를 거쳐 상하이에 갔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그림에 소질이 많았던 선생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1920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주경야독한다. 생활고와 바쁜 사회활동 와중에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24년 1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2수재’란 제목 아래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 한광우가 4년간 줄곧 우등 성적으로 중국 최고 미술학교를 졸업했다는 기사를 번듯하게 싣고 있다. 그는 졸업하자 중국 동북지방 펑탠(현 선양)과 하얼삔, 치치하르 등지로 가서 위장직업이긴 하지만, 미술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행하는가 하면, 공원 감리도 하고,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항일구국의 투지에 불타는 열혈청년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었다.

1929년 선생은 좀더 큰 포부를 안고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역시 식당 잡부로, 신문사 촬영기자로 일하면서 파리의 국립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해 천부적 화재(畵才)를 다듬질했다. 유학기간 피카소처럼 거리화가란 명성을 얻기도 했고, 유럽나라들을 주유하면서 국제 반파시즘 운동에도 가담했다. 1937년 유럽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한과 충칭, 시안 등지를 전전하면서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작품활동과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40년 시안에서 국민당 당국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도 ‘다리 위에서’를 비롯한 수채화 40여점을 그린다. 출옥 후 란저우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평생 소원이던 석굴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둔황 천불동에 두 번이나 가서 <뇌신(雷神)>같은 모사 수작을 남겼으며,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학술논문까지 발표한다. 그리고 46년과 47년 두 차례에 걸쳐 키질 석굴을 탐방해 불후의 공적을 세운다. 키질 가는 길에 투르판에 들러 고창성과 아스타나 등 유적에서 미라를 비롯한 유물 여러 점도 발굴해 학계를 놀래게 했다. 47년 7월 30일 국민당 257호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를 이륙해 란저우를 향하다가 가욕관 상공에서 ‘기후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것이 선생의 마지막 길에 관한 보도 전부다.

▲ 한락연이 모사한 키질 석굴의 비구승 벽화.
그의 50평생은 헐벗고 굶주리며 나라를 잃고 서러워하는 사람들과 같이 해온 역정이다. 키질 석굴에서의 나날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선생은 의약품을 한 보따리 가지고 와서 200여명의 환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빡빡한 일과 중에서 자유시간만 되면 주민들과 한덩어리(‘合樂一團’)가 되어 노래부르고 호금 타며 춤추는 즐거움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이 그린 화폭에도 이러한 고상한 인간미가 배어있다. 지우들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늘 한글 서적과 일본의 조선 침략사 같은 책을 지니고 있으면서 고국에 대한 사랑과 망국의 한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벽화 모사와 미라 발굴 등 불후의 공적

선생은 중국 내서만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65점의 유작(키질 석굴 모사품은 29점)을 남겼다. 그는 서구의 사실주의·인상주의 화풍과 동양 전통의 필묵(筆墨)화풍을 조화시켜 화면의 층차가 분명하고, 입체감이 넘치며, 색조가 묵직하면서도 명쾌하고, 지역특색이 선명한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벽화의 모사화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려 ‘유작마다 국보’(‘件件遺作是國寶’)라는 절찬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1993년과 2005년 두 차례 유작전시회가 열렸으며, 올 8월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기도 했다. 한 선생은 ‘중국의 피카소’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역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의 귀감이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관능적 자태·몽환적 색·빛의 조화…서역 중원 기법 섞인 특유의 화풍

키질 석굴벽화의 특징

▲ 키질 석굴의 38굴 주실벽에 있는 석가 본생도 벽화.
3세기 말부터 8세기 중엽까지 그려진 키질 석굴 벽화들은 실크로드 답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회화 작품들이다. 가을 하늘빛 같은 깊은 블루톤 색채, 칼칼한 선으로 생동하는 인물상들의 육감적 자태는 단연 중앙아시아 벽화 미술의 고갱이라고 할 만하다.

둔황 벽화가 세밀한 선묘로 중국인 얼굴 등을 묘사하는 중화 스타일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키질은 이란·인도 미술의 역동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서역 양식의 전형이다. 인도 간다라와 아프간 바미얀을 거쳐 들어온 그리스·로마, 인도, 이란풍 묘사법과 색채감각이 쿠처의 지역성과 만나 새로운 벽화 양식을 만든 것이다. 중국 본토나 둔황에서 보기 힘든 관능적인 여인상, 푸른빛 화불 따위 도상들은 명백히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질 벽화들은 소재 또한 전생도, 본생도, 인연도 등 석가의 생전, 전생 설화를 담은 것들이 많다. 부처가 전생 자기 몸의 일부나 전부를 짐승의 먹이로 내어놓는 희생적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곧 지극한 인내가 요구되는 사막지역 대상들의 삶을 다르게 암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전생도, 본생도의 주요 장면 등을 석실 천정의 마름모꼴 윤곽 안에 넣고 표현한 것은 키질에만 주로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 장인들이 유난히 빛의 표현에 민감했다는 점이다. 라피스라줄리(청금석)라는 몽환적인 푸른색 안료를 즐겨 쓰고, 중국과는 다른 붉은선의 명암 표현을 쓰면서 빛과의 조화를 의식한 것은 불, 빛을 중시한 이란 문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런 특징은 쿠처가 서역북도의 중요한 길목이자 거점인 까닭에 인도, 이란계 출신 사람들의 왕래와 정착이 잦았던 데서 비롯한다. 7세기 중엽 이슬람을 피해 다수의 이란 사산왕조 귀족들이 쿠처로 망명했으며, 이슬랍 압바스 왕조는 이후 이곳을 직접 침공한 적도 있었다.

지금 키질 석굴에서는 벽화 본래의 환상적 이미지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투루판과 마찬가지로 키질의 걸작들은 20세기 초 독일의 르콕과 일본 오타니 탐험대 등이 떼어가 버렸다. 예배·공양자 상, 마하가섭의 두상, 여신과 주악천인상 등의 벽화 걸작 상당수는 독일 국립 베를린 박물관, 일본 도쿄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오타니가 키질 석굴에서 절취해온 7세기께 벽화 본생도 단편이 전해진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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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서역정벌의 영웅’ 고선지 장군 유적은 어디에…

▲ 쿠처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고대 불교 유적지 쑤바스 고성. ‘물의 원천’ 이란 뜻의 쑤바스는 톈산산맥에서 녹아내린 얼음물이 강줄기를 타고 와 성 한가운데를 관통한 데서 비롯됐다. 성은 문화혁명 때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외벽만 남아있다.

오후 6시 10분 투루판을 떠난 열차가 밤새도록 달려 쿠처역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6시였다. 거리 상 별반 멀지 않지만, 텐산 산맥의 남쪽 기슭을 구비구비 돌아가다보니 꼬빡 하룻밤이 걸렸다. 기차가 떠난 지 30분쯤 지나자 갑자기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철로 옆에 늘어선 갈대가 심하게 휘적거린다. 지도를 찾아보니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노풍구(老風口)’다. ‘늘 바람이 부는 어귀’라는 글자 뜻처럼 이곳에서는 보통 초속 20~30m, 심할 때는 사람까지 날려보내는 초속 60~80m의 강풍이 몰아치곤 한다. 텐산 산맥에서 일어난 서북풍이 허허벌판 사막에 이르러 무시무시한 강풍으로 돌변하는 자연현상 때문이다. 옥문관 지나 맞닥뜨리는 ‘악마의 늪’ 백용퇴나, 둔황에서 하미 가는 길에 펼쳐지는 ‘죽음의 사막’ 막하연적과 필적되는 험지다. 오아시스의 한때를 편히 보낸 길손들에게 다음 오아시스 안착을 위해 신이 내린 시련의 ‘통과의례’다.

한여름인데도 고산지대라 산기슭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엔 살얼음이 끼고 차창가엔 서릿김이 감돈다. 고산지대를 지나면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이어 백양나무 우거진 오아시스들이 점점이 눈에 띄는 텐산 남도는 자고로 서역을 가는 주 통로다. 시간에 쫓겨 밤 기차 여행을 하다보니 모든 비경들을 맛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이윽고 어스름 속에 쿠처 시가지가 드러났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고 가옥은 장려하기만 하며’, 1천 넘는 행상(行像: 불상을 모신 행렬)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옛 명성에 비해 작은 현 소재지인 오늘날 쿠처는 너무나 초라하다.

혜초, 고선지 그리고 악무의 전래로 쿠처는 겨례사의 일부라 하겠다

쿠처(庫車)는 한나라 이래 줄곧 ‘구자(龜玆)’로 불리웠다. 원나라 때 회골어 역음으로 ‘곡선(曲先)’이나 ‘고선(苦先)’ 같은 이름이 생겼고, 청나라 건륭제 때 지금 지명으로 바꿨다. 중국 사서에는 기원전 1~2세기께부터 ‘구자’란 이름이 등장한다. <한서>‘서역전’을 보면, 구자는 인구 8만 1천여명에 군사 2만여명을 보유한 서역 36개국 중 9대국의 하나였다. 장안에서 7480리 떨어진 연성(延城)에 도읍한 이 나라는 일정한 국가체제도 갖추고 쇠를 녹여 야금하는 법도 알았을 정도로 발달한 나라였다. 오아시스 육로의 지정학적 요지에 자리잡은 까닭에 한 왕조는 시종일관 이곳을 중시해 왔다. 흉노가 이 지대를 위협하자 기원전 60년 동쪽으로 350리 떨어진 오루성에 첫 서역도호부를 설치해 내침에 대비했다.

▲ 고선지 장군이 서역으로 출정하기 전 통과했던 ‘구자고성’이 옛 영화는 사라지고 잡풀만 무성한 채 달랑 ‘구자고성유지’라는 비만 남아있다.

신의 거처 같다던 왕궁의 옛 명성은 가고

그 무렵 오손으로 시집간 한나라 공주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 왕 강빈은 1년 동안 장안에 머물며 한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쿠처가 후한 초 혼란기를 틈타 흉노에 붙으며 한을 이반하자 후한 화제는 73년 반초를 파견해 서역을 평정하고 구자를 다시 복속시켰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경제적 부를 누리다 당대에 이르러 안서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쿠처는 서역 경영의 핵심부 구실을 했다. 동서문명 교류에 크게 기여한 쿠처의 역사와 문화는 멀리 떨어진 한반도까지 밀려갔다. 혜초와 고선지를 비롯한 선현들이 그곳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고, 그곳 악무가 동방으로 전해졌으니 쿠처야말로 우리와 오랜 인연을 맺고 겨레사의 외연권(外延圈)에 들어있는 일원이라 하겠다.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 인도에 구법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이던 신라승 혜초는 쿠처에 도착한다.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유일하게 행적의 시간을 밝힌 곳은 이곳 뿐이다. 스님은 여행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소륵(오늘의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대도호부가 있는,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 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 승려들은 대승법을 행한다.” 그는 이어 당시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조군(趙君)이며,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법을 행하는 절이 두곳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간략한 기록이지만 혜초의 여행기는 8세기 쿠처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 ‘서역정벌의 영웅’ 고선지 장군 유적은 어디에…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쿠처는 기원전 1세기 전한 때 불교가 들어온 이래 서역에서 불교가 가장 흥성한 나라였으며,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도 기여했다. 초기 포교시대인 2~5세기 주로 북인도에서 소승 불교가 들어와 유행했으나, 7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고 대신 대승법이 들어와 중국에 전파되기에 이른다. 혜초의 기록에서 하나 밝혀야 할 점은 조군에 관한 사실이다. 당시 안서도호부 절도사(종2품)는 친왕인 두섬(杜暹)이었으나 명의일뿐,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부도호인 조군이 대행했다. 그래서 혜초는 조군을 절도사로 알았던 듯하다. 어쨌든 기록상으로 혜초는 이역만리 쿠처에 간 최초의 한반도 사람이다.

혜초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 한반도와 쿠처간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고선지다. 그 인연은 혜초보다 더욱 끈끈하다. 고선지가 어디서 출생했는가는 미지로 남아있으나 어릴 적 안서군 중급 장교였던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3만 안서군이 주둔하던 쿠처에서 시간을 보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약관 20세에 아버지와 관품이 비슷한 유격장군에 발탁된다. 중국 사서는 음보(蔭補:조상 덕으로 벼슬 자리를 얻는 일)에 따른 발탁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출중한 용모와 무예, 지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고선지는 불과 11년 사이(740~751년)에 절도사로 승격해 다섯 차례 대군을 이끌고 전쟁사에 보기 드문 서역원정을 단행한다. 그런데 그 출발지와 개선지가 그가 패전한 탈라스 전쟁을 빼고는 모두 쿠처다.

‘왕오천축국전’ 에서 유일하게 시간 밝힌 곳

고선지는 명실상부한 ‘파미르의 주인’이었다. 그의 서역원정으로 파미르 고원 이동에서 당 제국의 경영권이 확보됐다. 원정을 계기로 오늘날 중국 서부 변경이 확정되는 역사적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제지술 전파를 비롯한 동서문물 교류가 촉진된 것도 고선지 원정이 낳은 불후의 산물이다. 여기에 더해 겨레사에서도 그 지대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게 된다. 고선지는 당의 무장이기에 앞서 고구려 땅에 태를 묻은 고구려인의 후손이었다. 망국유민의 한과 설움을 오직 무를 닦는 정열로 승화시켜 마침내 당대 으뜸가는 용장으로 성장했다. 몸은 비록 이역땅에 두고 있었지만, 위대한 고구려인의 얼과 슬기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신라 유물 곳곳 교류 흔적

▲ 당나귀는 쿠처 사람들의 주요교통수단이다. 엄마가 모는 당나귀 수레 위에서 옥수수를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목가적이다.
지금 이곳 어디에도 이 절세의 위인을 기억하거나 기리는 징표는 없다. 그저 흔적 한 점이라도 찾아보는 것이 이번 쿠처 답사의 첫째 바람이었다. 그래서 쿠처의 옛 성벽이 확인되었다는 안내원 말에 솔깃해 이곳의 첫 행선지를 그리로 잡았다. 고선지는 출정 때마다 그 성벽을 넘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소인 고차 반점(庫車飯店)에서 15분 거리의 성터에 도착했을 때 실로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려했던 궁성이 남긴 성벽 유적이 이토록 허술하다니. 길가에서 5미터쯤 떨어진 수풀 속에 ‘구자고성유지’(龜玆故城遺址)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을 뿐, 아무런 관리시설도 없다. 2~3미터 높이의 흙무지가 옥수수 밭 한가운데로 300미터쯤 뻗어가다가 꼬리를 감춘다. 일행의 인기척에 성벽 옆 풀숲 이곳저곳에서 ‘볼일’보던 사람들이 엉거주춤 머리를 내민다. 그래도 장군의 족적을 되밟아 봤다는 일말의 긍지 하나로 이 모든 허전함을 털어버리고 발길을 돌렸다.

쿠처와의 인연 속에는 문물의 오감도 한 몫을 했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유물 중에서 쿠처와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문명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무다. 중국 수나라 때의 구부기(九部伎)나 당나라 때의 십부기에 사용되는 악기들 중에는 서역 악기에 속하는 5현이나 요고, 동발, 공후, 피리, 저, 소 등의 악기가 고구려기와 구자(쿠처)기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그밖에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오현이, 고구려의 집안4호분 벽화와 신라의 비암사 아미타불삼존석상에는 요고가, 신라의 상원사 범종 종신에는 공후가,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피리가 그려져있다. 이 모든 것은 두 지역간의 활발한 악무교류를 말해주고 있다.

▲ 투루판을 저녁에 떠난 열차가 출발한 지 12시간 남짓만인 이튿날 새벽 쿠처 역에 도착하자 중천에 뜬 달이 먼저 반겼다.
또 9세기 대문호 최치원이 저술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는 신라 때 유행한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등 다섯 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가 서역계통의 것이다. 그 중 오늘날까지도 전승되는 산예(?猊)는 다섯 마리의 사자들이 추는 해학적인 춤으로 쿠처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최치원의 묘사에 의하면, 멀리 서방 사막을 지나오느라 털옷은 다 해지고 온몸엔 티끌만 뒤집어쓴 사자가 인덕(仁德)이 배어있는 머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영특한 기개와 재주를 자랑한다. 이런 사자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무형문화유산인 ‘북청사자놀이’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쿠처와 우리는 다같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한동아리의 문명인들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양귀비 홀린 북소리·관능적 무희 실크로드 휩쓴 ‘7∼8세기 한류’

서역 악무의 본산, 쿠처

 

▲ 키질 석굴 77굴 벽화에 그려진 비단을 휘감고 춤추는 여인상.
쿠처는 고래로 서역 음악의 본산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선율과 리듬감각이 남달랐던 쿠처인들의 음악과 춤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중원까지 풍미했으며 우리 전통음악의 산조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7세기 인도 구법 여행 당시 쿠처를 방문했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의 관현 기악 수준은 어느나라보다 명망이 높다”고 칭송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쿠처 키질 석굴 벽화에는 숱한 악기 연주장면이 200군데 이상 묘사되고 있어서 이 지역의 풍부한 음악 전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쿠차 악은 현란한 타악 리듬에 맞춰 비파 등의 현악기와 종적 소 등의 목관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선법은 중국 당나라 시대 폭발적인 ‘쿠차 신드롬’을 낳았다.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쿠차악을 듣는 것이 필수적인 풍습이었는데, 특히 받침대 위에 쿠차의 작은 북인 갈고를 두드리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양귀비와 염문을 뿌린 현종도 갈고 연주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서기록을 보면 현종은 궁정에 3만명 이상 악사와 무용수를 두었는데, 대부분 쿠차에서 왔거나 쿠차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당대 일곱가지 외국음악을 칠조라 일컬었는데, 쿠차악이 가장 번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음악 못지않게 사마르칸드 무희와 쌍벽을 이루었다는 쿠차의 무용수들도 각광받았다. 엉덩이를 비롯한 몸 각 부분의 관능적 이미지, 강렬한 눈매를 부각시켰던 쿠차 춤은 원래 인도의 무용에 바탕한 것 이었으나 점차 율동감이 격렬한 이란풍 호선무를 융화시켜 복합적인 실크로드 춤문화의 주역이 되었다. 7~8세기에는 장안, 사마르칸드 등 실크로드 연변의 주요도시마다 쿠처 궁정에서 파견된 가무단의 순회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쿠차의 가무는 오늘날 한류처럼 실크로드 교역에서 강력한 문화상품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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