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서 만난 병령협과 병령사

맥적산 석굴

▼ 운영자 알림: 중국의 오지를 탐험하는 독자 이준만씨의 오지 여행기 그 네번째 입니다. 지난번엔 옥황상제도 놀라 쉬고 갈만한 소삼협과 소소삼협의 비경을 소개해많은 독자분들이 놀라워 했습니다.

이번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실크로드를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병령협과 병령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인터넷상에 실크로드 여행기로 병령사 석굴은 많이 올라오지만 병령협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아울러 이준만씨의 주옥같은 사진들은 '크게 보기'를 클릭해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중국 고대사에서 복희씨[伏羲氏/伏犧氏]는 삼황(三皇)의 첫머리에 꼽는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 또는 신으로서 어렵(漁獵)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한다. 그의 고향 천수에서 복희씨의 사당과 깍아내린 바위 절벽에 새긴 수많은 불교예술을 꽃피운 맥적산 석굴을 구경한 후 우리는 황하에 있는 병령협과 병령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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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란주에서 버스를 타고 류가협댐(刘家峡大坝)에서 내려, 보트를 타고 병령사로 향하였다. 배를 타고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 양쪽의 산들은 나무하나 풀한포기 구경할 수 없는 황무지의 산들뿐이다.

저기서 흘러내리는 진흙들이 황하에 스며들어 물의 색깔이 황토색이어서 황하라는 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황하 주변의 모습들 ☞ 큰 사진으로 보기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7개의 성을 지나가는 황하는 매년 약 45.5만평방km의 진흙이 황하로 유실된다고 한다.

중국의 진흙유실 방지대책으로 제방들을 쌓고 있는데, 2020년까지 그 제방을 모두 쌓으면 매년 4억톤이상의 진흙유실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어느새 병령협에 들어서자, 풀한포기 없는 황량한 바위들이 마치 성곽처럼 높다랗게 솟아있었다. 모두들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찍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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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협 파노라마 ☞ 큰 사진으로 보기

사실 병령사 석굴의 모습보다는 병령협의 풍경에 더 심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병령협은 병령사가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란주에서 북쪽으로 황하를 따라 거슬러 약 110km 에 있는 병령사(柄靈寺)석굴은 서진(西秦) 건홍(建弘)원년(서기 420년, 그 많은 석굴중에서 연대가 정확히 표시된 것은 이곳밖에는 없다.)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현재 석굴은 183개, 크고 작은 돌로된 조상(雕像)은 694개, 진흙으로 만든 것이 82개, 벽화가 900 평방미터, 이 모든 작품들이 당나라 시절, 특히 측천무후 시절에 만든 것이 2/3 를 차지한다.

병령사(炳灵寺)의 최초 이름은 당술굴(唐述窟),강(羌)족어로“귀신굴(鬼窟)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에 용흥사(龙兴寺), 영암사(灵岩寺) 등으로 불리다가 명나라 영락때 장족어로 10만불(十万彿)이라는 뜻의 병령사(炳灵寺)라 칭하고 있다.

이중에서 125번 굴의 석가모니 상이 병령사 석굴중 걸작품에 속한다. 그리고 벽화는 6국(六國)시대의 서북부 지역의 사회풍습, 서민정서, 음악과 춤등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169번과 175번굴은 각각 300원을 주고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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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에는 맥적산 석굴, 병령사 석굴, 둔황의 막고굴, 유림굴, 서천불동굴 등이 있지만, 그중에서 둔황의 막고굴의 단연 으뜸으로 친다. 모두 그 모양들이 다르게 되어 있다.

그중에서 막고굴은 가는 모래입자로 된 토양 때문에 큰 굴을 파고 정중앙에 부조형식의 석가상과 제자상, 넓은 동굴안에는 온갖 벽화로 치장되었지만 맥적산과 병령사는 바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둔황의 막고굴처럼 큰 동굴이 존재하지 않고 바위 표면에 자그마한 굴을 파서 석가상과 벽화를 만들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유림굴은 벽화의 모양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탐험가들이 이 유림굴을 발견하였을 당시, 이곳이 곧 정토의 세계구나 라고 했다.

유림굴의 토양은 막고굴보다 굵은 입자와 약간의 자갈이 섞여 있어 막고굴보다는 큰 동굴을 파지 않고 약간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서천불동굴은 유림굴보다 더 굵은 자갈과 모래로 되어 있어, 굴을 파기에는 무척 힘든 토양을 갖고 있었다.

병령사 안쪽에 있는 모습- 마치 요새나 성곽의 모습을 하고 있다. ☞ 큰 사진으로 보기

그래서 이곳 각각의 굴들이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토양과 밀접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굴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색깔을 덧칠하고 여러가지 조각상도 각기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초기 서진때의 벽화들은 선과 색깔이 매우 거칠고 단순함을 띄었지만, 당나라때 와서는 선이 매우 부드럽고, 색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서하시대나 원나라때의 그림은 그림이 매우 단순하고, 화려한 색깔을 칠하지도 아니하였다.

과연 시대가 흐르면서 불교의 예술이 어떻게 변하고, 서양의 기독교 예술이 가미되면서 벽화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석굴의 안내자들이 설명을 하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과 불교예술에 대한 심미적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었다.

병령사 석굴의 파노라마 ☞ 큰 사진으로 보기

단지 장안을 나와 서역으로 가는 상인들이나 군인들 모두, 무시무시한 사막을 넘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야하는 그들로서는 그들의 안전과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불교에 의지하고, 그 기원이 담긴 염원을 이곳 석굴에 표현하고 또한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곳에서 높다란 대불을 보며 우리의 실크로드 여행에 대한 심도있는 가치가 가득하길 빌어보았다.

도깨비뉴스 블로거=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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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오아시스에 피어난 동서양의 길목

[중국발품취재 48] 둔황 모까오 굴과 밍사산
최종명 (lijin)

자위관(嘉峪关)에서 312번 국도로 따라 안씨(安西)를 지나는 길은 정말 사막 한복판을 달린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저 황량한 벌판뿐. 다시 안씨에서 서남쪽으로 두 시간 더 달리면 둔황(敦煌)이다.

둔황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정말 ‘이 멀리까지 왔구나’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 찬란한 교류를 꽃 피우고 실크로드라는 반짝이는 이름까지 얻게 된 곳. 둔황이야말로 실크로드의 상징이 아닌가.

쉼 없이 흩날리는 사막 모래는 여전히 그 옛날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버스 차창에서 바라보노라니 이런 황폐한 토지 위에서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싶은 상념에 젖었다.

국도에서 둔황 시내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 최종명
둔황

터미널에 도착해 지도 한 장을 사고 거리를 거닐었다.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둔황 시내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도시다. 외국 관광객들이 주로 집결하는 밍산루(鸣山路)를 거쳐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페이톈(飞天) 시장에 갔다.

공예품을 파는 시장은 정말 이곳이 둔황이구나 하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실크로드와 낙타, 그리고 둔황 석굴의 불상을 직접 현장에서 새겨 파는 것이 아주 신기하다. 거리의 예술가들이 너무도 많다.

거리에서 은근하게 들려오는 악기 소리가 흥미를 끈다. 가만히 보니 바로 쉰(埙)이다. 동그란 돌에 대여섯 개 뚫린 구멍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주 달콤한 악기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쉰으로 대장금을 연주하고 있다.

둔황시 페이톈시장 공예품거리에서 파는 나무 조각품으로 낙타와 실크로드, 둔황석굴을 주제로 해서 인기가 많다
ⓒ 최종명
둔황

둔황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씽피쉐이(杏皮水)가 참 시원하고 맛있다. 맥주도 한잔에 샤오츠(小吃) 요리 하나로 허기를 채우며 오후의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가게 주인인 할아버지는 돈만 받고 아주머니는 요리만 하고 청년은 부지런히 주문을 받고 요리를 나르고 한다.

다 좋은데 맥주가 10위안이나 한다. 자리값 치고는 좀 비싼 편이다. 햇살이 저물어가니 야시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서역이 가까워서인가. 도대체 현지시각으로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지질 않는다. 여전히 대낮이다.

둔황의 특산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수
ⓒ 최종명
둔황

7월 1일 오전 내내 호텔에서 빈둥거렸다. 좀 쉬고 싶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야 게으름을 떨칠 수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잘못하다가는 일사병에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 사막 벌판을 한 시간가량 달려 세계적 보물이라는 둔황석굴 모까오굴(莫高窟)에 이르렀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참 많다. 역시 세계문화유산. ‘모까오’라는 말은 ‘사막의 높은 곳’이라는 말로 모까오(漠高)라 하다가 漠와 발음이 같은 莫로 변형돼 불리게 됐다.

안타까운 것은 입장료가 160위안으로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 중국에서 가장 비싸지 싶다. 게다가 가이드가 붙으면 20위엔을 더 내야 한다. 카메라, 캠코더는 물론이고 가방조차도 못 가지고 들어가게 한다. 가방을 맡겨야 하고 그러면 다시 보관료를 내야 한다. 거의 강매 수준이다. 간혹 가이드에게 특별요금을 내면 더 많은 곳을 관람도 시켜준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사기에 가깝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관람해, 꽤 감명 깊었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는데 막상 혼자 와서 보니 막막하다. 그럼에도, 공개된 3곳의 큰 석굴과 웅장하고 세밀한 불교문화를 호흡하기에 나쁘지 않다.

그 외 많은 동굴은 다 나무문으로 막았고 자물쇠로 굳게 닫아걸어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처음 이 석굴이 발견됐을 당시에는 석굴의 석상이나 벽화가 그대로 노출돼 있었는데, 문화재 보호 차원이겠지만 입구를 시멘트로 꽉 발라놔서 섬찟할 정도다. 아직도 연구 중이고 보존의 필요가 있으니 그렇긴 하겠지만 굉장히 난감했다.

160위안이나 하는 둔황 석굴 입장권
ⓒ 최종명
둔황

중국 3대 석굴인 윈깡석굴(云冈石窟)이나 룽먼석굴(龙门石窟)에서 느낀 감동이 이어지지 않는 듯해서 서운했다. 약간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산과 강과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룬 불상들이 돋보이는 룽먼이나 은근한 자태와 영롱한 채색이 아름다운 윈캉에 비해 그렇게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지나친 통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여 개의 동굴이 있다고 해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부르는 이 석굴의 역사적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크로드의 허씨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에 자리잡고 십육국(十六国)과 북조(北朝), 수(隋), 당(唐), 오대(五代), 서하(西夏)와 원(元) 나라를 거치며 한편 군사적 요지이면서 동서양의 교류 거점으로 수많은 숭불정책의 상징이던 곳이 아닌가. 기원전부터 흉노(匈奴)와 토번(吐蕃)도 이곳을 도모했으니 말이다.

발굴된 492개의 석굴과 4만5천 제곱미터의 넓이에 수많은 불상과 벽화가 화려한 빛깔을 띠고 있다. 불교예술이 꽃 피던 당나라 시대 작품들은 아주 화려한 채색으로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각종 문서를 보관하던 기능도 있었는데 제17굴인 장경동(藏經洞)에서는 신라 승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됐다. 아쉽게도 20세기 초 프랑스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伯希和)가 수집(?)해 갔다.

▲ 제96호굴 9층 누각 모습으로 둔황에서 가장 높은 석굴
ⓒ 최종명
둔황

펠리오는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이란어 등 무려 13개 국어를 소화하는 언어 천재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越南) 하노이(河内)의 중문과 교수로 있던 1906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약 2년 동안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사하는 도중에 둔황에 이르렀다. 장경동에 있던 6천여 권의 문서와 만난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 자료를 토대로 10여 년이 흐른 후 프랑스 파리에서 둔황석굴의 역사적 가치를 소개한 도록(图录)을 발간했다. 모까오굴은 남북으로 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굴이다. 막혀있는 동굴, 그리고 일련번호가 줄줄이 붙여져 있는 굴 속에는 펠리오가 다 가져가지 못한 진귀한 예술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높은 석굴인 9층 높이의 제96석굴(第96窟) 앞에서 한참 역사의 장구함을 느끼며 쉬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 밍산루(鸣山路)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호텔이 즐비하다. 길거리에 서양 레스토랑 분위기가 산뜻하다.

존스 인포메이션 카페(John’s Information Café). 이곳은 세계적 여행가이드 북에도 소개된 곳이다. 서양사람들 입맛에 맞는 그런 곳이니 당연하다. 실크로드 노상에 일종의 연쇄점처럼 몇 군데 있어서 여행가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차가 오가는 길에 있어서 약간 소음이 있긴 하지만 야외식당이고 답답하지 않아 좋다. 테이블마다 장미 한 송이씩 자리 잡고 있으니 더 좋다. 치킨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값도 싸고 주인도 친절하다. 편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쉬었는데, 역시 문제는 현지 시각으로 밤 9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노을이 진다는 것이다. 실크로드 선상에서 보는 노을은 너무 붉어서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금세 어둠이 몰려 온다.

다음날도 늦게 점심을 먹고 밍사산(鸣沙山)으로 갔다. 둔황(敦煌)에서 남쪽으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졌으니 아주 가깝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20분이면 도착한다.

밍사산은 사람들이 사막 모래를 밟으며 지나가면 ‘모래가 흐르는 소리’를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산도 꽤 높다. 동서 40킬로미터, 남북 20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에 우뚝 솟은 산이다. 해발은 1650미터 정도이나 가까이 가서 보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등산로가 보이기도 한다. 너무 더워 감히 오를 생각을 못했다.

▲ 밍사산 사막의 오아시스인 밍사산 위에야취엔, 햇살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그늘이 인상적이다
ⓒ 최종명
밍사산

밍사산에는 위에야취엔(月牙泉)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밍사산에 둘러싸인 작은 샘인데 그 생김새가 초승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에야(月牙), 달과 이빨? 초승달을 말한다.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샘으로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호감을 준 이 위에야취엔은 아쉽게도 최근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인공적으로 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고 한다.

초승달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마도 저녁 무렵이나 밤에 와야 할 듯싶다. 이곳의 석양이나 밤은 정말 장관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요조숙녀의 입술(窈窕淑女的嘴唇) 같은 위에야취엔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둔황에 가면 꼭 밤에 가는 것이 좋겠다. 저녁 6시 티켓을 예매하지 않았다면 하루 더 묵으며 밤새 사막에 머물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위에야취엔
ⓒ 최종명
오아시스

파란 하늘과 양념 같은 약간의 흰 구름, 그리고 온통 사막으로 덮인 위에야취엔이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신기하다. 앙상한 가지만이지만 줄기차게 꿋꿋해 보이는 나무 몇 그루도 이곳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10위엔 아끼느라 장화를 빌리지 않고 사막을 걸었더니 신발 속에 잔뜩 모래가 들어갔다. 온몸이 찌는 듯한데 발바닥까지 완전 사우나 버금, 아니 그 이상이다.

밍사산(鸣沙山) 역시 관광지라 낙타와 모터 자동차를 탈 수 있다.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꽤 영화적이다. 고등학교 때인가 본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인가. 막 그런 장면이 연상되고 그랬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 사막과 낙타 밍사산
ⓒ 최종명
밍사산

사막과 초원에서 모터 자동차를 탔다고 하니 ATV라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좀 있다. 뭐 그냥 ATV라 해도 되겠지만, 까칠해서 우리말로 바꿔본다고 한 것이 모터 자동차인데, 사실 꼭 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ATV(all terrain vehicle)라 하니 아마도 온 동네, 사막이나 초원 등 지형을 극복하고 잘 달리는 차량이겠다.

중국에서는 ‘全地形越野摩托车’이는 긴 이름으로 부르는데 관광지마다 그저 모퉈처(摩托车)라고 많이 통용하고 있어서 그냥 모터자동차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摩托车’라고 하면 보통 오토바이를 이르는데, 개인용 차량의 통칭처럼 됐으니 그냥 그렇게 써도 무방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말에는 ATV를 뭐라 할까. 사전에 찾으니 ‘산악오토바이’라 한다. 가만 보면 오토바이보다는 자동차에 더 가까운데 왜 그럴까. 하여간 어쩌다 편하게 ‘모터자동차’라고 하니 더 편해서 그렇게 쓰는 것이니 알아서 ATV, 또는 산악오토바이 등으로 이해하면 될 듯.

사막 위에 앙상하게 가지를 달고 있는 나무, 그늘과 하늘, 구름이 잘 어울린다
ⓒ 최종명
밍사산
네이멍구(内蒙古) 초원에서 탔던 모터 자동차가 재미있었던 기억이 났다. 가격을 흥정(50위안)하고 탔다. 울퉁불퉁한 사막을 넘고 넘는다. 운전사가 운전대를 나에게 건넨다. 부릉부릉 거리며 달렸다. 정말 신난다. 그리고 이게 참 말을 잘 듣다가도 안 듣는다. 사막을 넘어가는데 사막이 어디 똑바른 길이던가. 좌우로 확 기울다가 쓰러질 듯 불안하다.

다시 내려오는 길에 운전사 뒤에서 캠코더를 들고 찍었다. 그저 평범한 길로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물론 가파른 길을 거의 날아서 달리는 장면은 너무 빠르고 위험해 찍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많이 남은 ‘발품 취재’인데 캠코더 고장 나면 안 되니.

이제 다음 여행지 우루무치(乌鲁木齐)로 떠날 시간이다. 버스로 10시간 이상 가야 한다. 미리 밥을 먹고 가야지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한글로 ‘한국여행자들의 여행기록이 있습니다’라고 문 입구에 써 있는 식당이 있다. 테이블이 네 개뿐이다. 정말 2002년 7월부터 한국여행자들이 남긴 방명록이 있는데, 그걸 읽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나라 요리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여행자들의 이야기로 머리가 이미 배부르다.

정작 중국인 주인은 한국말은 못하고 대신 일본어를 좀 하는 듯하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여행 중인 한국 학생을 만났다. 그 역시 혼자 여행이고 다음날 우루무치로 온다고 한다.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이곳은 여행자들이 연락처로 삼고 있기도 하다.

둔황 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한국요리도 팔고 한국 여행객들의 방명록도 있다
ⓒ 최종명
둔황

터미널 부근에 한국에서 단체로 문화탐험을 온 고등학생들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 방명록에 누군가 남긴 메모가 기억났다. 책 속에 파묻혀 있는 것보다 현장체험을 위해 이 먼 둔황까지 온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꿋꿋하게 자라 ‘너희 중 훌륭한 고고학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하며 버스를 탔다. 버스 침대에 누웠다. 이제 우루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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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끝에서 80위엔 때문에 곤욕

[중국발품취재 47]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최종명 (lijin)
새벽에 도착해 잠을 자고 나니 오후 1시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냉큼 쉬엔비(悬壁) 장성(长城)으로 달려갔다. 명나라 시대 만들어진 서쪽 끝 장성이다. 물론 한나라 시대 서쪽 끝 경계는 위먼관(玉门关)이 있긴 하지만,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군사적 개념의 명나라 장성은 이곳에서 끝이 난다.

최근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의 길이를 정확하게 새로 재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토의 개념, 정치적 의도가 명백히 있는 듯하다. 아마도 동북의 하얼빈 및 만주벌판부터 위먼관 너머까지 성곽을 쌓은 흔적을 모두 포함시킬 듯하다. 그래서, 만리장성의 길이를 4천 킬로미터가 아닌 6천7백 킬로미터라거나 심지어 1만 킬로미터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만리장성은 원래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의 조(赵)나라와 연(燕)나라를 비롯해 전국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당시 인구의 1/20이나 되는 100만 명을 동원해 험준한 산악마다 성을 쌓았으니 가히 살인적인 공사가 아닐 수 없다.

강성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우려한 대부분의 왕조는 틈만 나면 성을 쌓았다. 한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쌓은 성곽은 지금에 이르러 만리가 넘는다는 장성이 된 것이다. 동쪽 산하이관(山海关)에서 서쪽 자위관(嘉峪关)까지 이어지는 이 기나긴 산봉우리마다 관문이란 뜻의 관(关)이나 커우(口), 보루라는 뜻의 빠오(堡)나 싸이(塞), 또는 청(城), 타이(台), 러우(楼), 링(岭) 등 약 150여 곳의 방어 태세를 하던 지명이 있다. 그 중 관이라 이름 붙은 곳은 대체로 관청이 있고 군인이 상주하기도 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의 씨엔비 장성에 휘날리는 깃발들
ⓒ 최종명
만리장성

자위관 관청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헤이산(黑山) 북쪽 비탈에 쉬엔비 장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장성 꼭대기에는 망루가 있는데, 관청 외곽에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원래 한나라 시대부터 망루의 형태가 있었는데 명나라 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망루 옆으로 장성을 쌓은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숨이 가쁘다. 섭씨 30도가 넘는 한낮 오후여서 그런지 숨이 차고 덥고 땀도 솟는다. 대신 오를수록 전망이 넓어지니 시야는 훨씬 시원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빛이 감도는 민둥산 헤이산에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잘 어울린다. 생긴 모습이 베이징 부근 빠다링(八达岭) 장성과 사뭇 비슷하다고 해서 서쪽 지방의 빠다링이라 부르기도 한다.

좁은 망루에서 앉아서 쉬고 있으니 여행객들이 몇몇이 올라온다. 외국에 사는 화교 일가족이 여행은 온 듯하다. 덕분에 내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물론 여러 장 찍어주기도 했다. 30분 가량 망루에 머물다 다시 내려왔다. 오를 때는 장성을 따라 올랐는데, 망루를 통과하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편안한 길이 있다. 이 길이 오히려 성곽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에 훨씬 좋다.

▲ 씨엔비 장성 자위관 북쪽 헤이산 기슭에 있는 장성 망루
ⓒ 최종명
자위관

한참 내려오다가 다시 망루를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망루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수건을 둘렀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모양과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자세가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전문가 냄새가 났다.

중국 각 왕조에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했고 실크로드의 옛길이기도 하다. 평지로 내려오니 최근(2005년)에 만든 ‘쓰처우구다오(丝绸古道)’ 전시 조소(雕塑)들이 있다. 비단길, 실크로드와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의 석상인 것이다.

▲ 현장법사 씨엔비 장성과 자위관과 그리고 실크로드와 관련 있는 역사적 인물 7명을 조각해 둔 곳
ⓒ 최종명
현장법사

서역으로의 통로를 개척한 한나라 시대의 여행가인 장건(张骞), 흉노족 토벌 무장인 한나라 무장들인 곽거병(霍去病)과 후한 시대의 반초(班超), 불법을 구하러 간 현장(玄奘), 동방 여행가 마르코폴로(马可波罗), 그리고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임칙서(林则徐)와 서역의 반군을 평정한 좌종당(左宗棠) 등 7명의 인물들, 그리고 5명의 수행원, 말 2필, 낙타 2마리와 마차 1대가 함께 조각돼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짜 낙타가 서 있다. 장성을 배경으로 낙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역시 기념사진 찍기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이다.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낙타 한 마리. 누군가 자기를 타 줘야 저녁 끼니를 때울 텐데 하며 무심하게 서 있다.

쉬엔삐 장성 남쪽에는 자위관(嘉峪关) 관청(关城)이 있다. 표를 사고 관청 앞 호수를 지나 걷다 보니 한 건물 옆에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늘 가을에 만나던 코스모스를 만나니 고향이 그립다. 벌써 발품취재가 2달이 넘었던가.

관청에 도착하니 마침 관청에서 의식이 준비되고 있다. 멀리 전쟁을 떠나는 장수를 환송하는 행사인 것이다. 재미있는 행렬이기도 하고 여행객 중에서 뽑아 장군과 부인으로 분장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피리도 불고 낙타도 등장하고 전통 복장까지 겸비했으니 나름대로 잘 갖춰진 행사였다.

관청 의식을 위해 도열해 있는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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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관청 안을 한 바퀴 돌아 문 밖으로 나가더니 행렬이 멈췄다. 부인들이 바친 환송 술잔을 받아 마시고 말을 타고 전쟁터로 가는 의연한 모습이 연출된다. 장군과 부인 역을 맡은 여행객은 남자와 여자 모두 잘 생기고 예쁘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주 자연스레 포즈도 취한다. 좀 친해져 볼까 했는데 대신에 말수가 적고 약간 낯을 가리는 통에 아쉬웠다.

▲ 관청 의식 행렬 자위관 관청 의식에 참가해 낙타를 타고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여행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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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자위관(嘉峪关) 관청은 명나라 시대인 홍무 5년, 1372년에 세워졌다. 외성(外城)과 내성(内城) 그리고 옹성(瓮城)으로 구성돼 있다. 성벽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며 그 모습이 사뭇 웅장해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关)’이라 하며 변방의 요새(连陲锁钥)라고 불린다.

관청 성곽에는 작은 길이 있어 걸어 다니면서 이곳 저곳 성 안의 구조를 지켜볼 수 있다. 주변이 온통 벌판인지라 멀리 눈 덮인 설산이 한눈에 보이기도 하고 서쪽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 길과 도로도 보인다.

자위관 관청 성곽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쏘는 곳이고 성벽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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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성곽 위에 활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서 봤더니 그 옆에 장사꾼이 앉아 있다. 화살 10개를 성곽 아래를 향해 쏘는데 10위엔을 받는다. 짚으로 사람 모형과 과녁이 있다. 활 쏘는 연습장인 셈인데 아래를 향해 쏘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이나 옛 병사들의 전쟁 장면을 연상할 수 있을까. 날씨가 더워서인지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도 숨가쁘다.

관청 내에는 재미난 볼거리가 많은데 그 중에 지스옌밍(击石燕鸣), 즉 돌을 치면 제비 우는 소리가 난다는 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제비 한 쌍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숫제비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암제비가 성벽에 스스로 부딪혀 죽었다 한다. 그 이후로 제비가 앉았던 돌을 치면 제비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사람들도 제비는 길조라 여겨 장군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 돌을 치면서 무사기원을 했다고 전한다.

관청 내 작은 사당이 있어 들어갔다. 산하이관과 마찬가지로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형이 있어 당시 분위기를 살려두고 있다. 회의실 벽에 호랑이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호랑이야말로 용맹의 상징이니 이 변방의 요새를 지키는 자위관 관청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하겠다. 관우의 사당도 있다. 신의 경지로 서민들의 우상인 관우야말로 전쟁의 와중에 목숨이 위태한 병사들에게 위로가 될 존재일 것이다.

자위관 관청에서 장군 복장을 하고 사진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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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땡볕이 서서히 지고 해가 저물어 간다. 관청을 나서다 말고 갑자기 장군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별 이유도 없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옛날 군복을 입고 내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했다. 10위엔을 주고.

관청 밖으로 나와 장성박물관 옆에 웅관서화원(雄关书画院)이라는 팻말이 붙은 집이 보였다. 집 벽이 고풍스러워 살짝 시선을 옮겨봤다. 그 앞에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끄는 석상과 마차를 끄는 말의 석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각각 얼뉴타이강(二牛抬杠)과 따구루처(大轱辘车)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석상들은 춘추전국시대의 농경생활 모습을 구현한 것이라 한다.

특히, 구루(轱辘)에 관심이 많이 갔다. 발음이 구루? 그렇다. 구루마는 우리가 일본어에서 온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말이다. 구루의 뜻 역시 ‘구르는 바퀴’이다. 우리가 쓰던 말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한자문화권 내에서 그 발음의 유사성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하여간 ‘구루마’와 ‘구루’의 연관성이 재미있다.

▲ 따구루처 춘추전국시대 농경생활의 모습을 재현해 둔 말과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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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호텔로 돌아왔다. 2층 식당에서 오랜만에 체력 보강을 위해 60위엔을 투자했다. 고기요리 하나, 두부와 채소로 만든 국, 볶음밥을 시켰다. 깔끔한 고급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은 적이 언제였던가. 혼자 여행하는 도중에 맛 있는 식당에서 먹기가 좀 어색한데, 호텔이면 조금 마음이 편하긴 하다.

깔끔한 호텔이어서 잠 자는 것, 밥 먹는 것 다 좋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날이다. 체크아웃에 문제가 발생했다. 29일 새벽 그러니깐 정확하게는 5시30분에 체크인을 하고 하루 호텔비용 190위엔과 야진(押金)을 포함해 300위엔을 달라고 해서 줬다. 아침 포함이니 식사 쿠폰도 한 장 받았다.

갑자기 80위엔을 더 내라는 것이다. 이틀 숙박비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중국 호텔에서 야진을 챙기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아침도 하루만 먹었으니 호텔 측 잘못이라 주장했다. 호텔 매니저가 오더니 죽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침 지갑에 돈도 없기도 했지만 하는 짓이 얄밉기 그지 없다. 말투도 80위엔을 내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못나간다는 둥 협박이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저녁 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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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그런데, 버스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다. 그래서, 일단 배낭을 메고 호텔을 나오니 매니저가 따라온다. 배낭을 잡길래 터미널에 가서 주겠으니 따라오라고 하고 택시를 탔다. 도망 가면 신고하겠다고 한다. 지갑을 보여주며 100달러 밖에 없으니 거슬러 달라고 하니 잔돈이 없으니 다시 호텔로 가자고 한다. 티켓을 보여주며 시간이 없다고 맞불을 놨다. 터미널에서 돈을 찾아서 주고 말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공교롭게도 ATM이 없다. 매니저는 다시 은행으로 가자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참 나 원. 보통 화 내는 일이 없는데 완전 남의 사정은 통 배려하지 않으니 답답했다.

일단 버스에 탔다. 따라 오길래 계좌번호를 주면 둔황에 도착해서 송금해주겠다고 하니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컥. 그러더니, 100달러를 주면 거스름돈을 송금해주겠다고 한다. 나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신뢰가 없어진 것 아니냐고 한 말은 매니저가 택시 타고 오면서 한 말이다.

일부러 80위엔을 떼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시간만 넉넉하면 요모조모 따져서 호텔의 과실을 이해시키거나 할 텐데. 하여간 난감했다. 매니저는 버스 출발을 막고서는 계속 생떼다. 버스는 출발하는데 계속 말다툼이었다. 핸드폰 번호와 이름도 적어주고 전화하면 송금해줄 테니 믿어라 했는데도 혼자 화를 내고 난리를 피더니만 그제서야 버스에서 내린다. 이 정도였다면 좋았는데, 내리면서 욕을 한다. ‘한궈런 뻔단(韩国人笨蛋)’, 대충 ‘한국 사람 XXX’ 정도다.

중국에서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욕 먹을 정도로 잘못한 것은 없는데, 참 80위엔 때문에 자위관에서 별 경우를 다 당한다. 나로 인해 한국 사람 욕까지 대표로 들었으니고개 들기도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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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남단 해발 4000m 치렌산맥을 넘어
[중국발품취재 46] 칭하이성 씨닝에서 깐수성 짱예까지
최종명 (lijin)

6월 28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에 가니 25인승 규모 버스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버스 지붕 위에 짐을 싣고, 묶는 작업이 한창이다. 중국에는 갖가지 크고 작은 버스들이 있는데, 이렇게 좀 작은 버스는 짐을 지붕 위까지 싣는다.

칭하이성(青海省) 씨닝(西宁)에서 깐수성(甘肃省) 짱예(张掖)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 있는 것이 아주 다행이었다. 일정을 짜면서 공교롭게도 씨닝 다음 코스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우루무치로 방향을 잡았는데, 만약 이 길이 없다면 다시 란저우까지 동쪽으로 갔다가 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 상에도 높은 산이 2개나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과연 제대로 교통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하루에 단 한 대이지만 분명 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기뻤다. 비용도 줄이게 되며 색다른 여행 길이라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전날 지도를 펴놓고 과연 이 길을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거듭 고민 끝에 227번 국도인 닝짱꿍루(宁张公路)를 타기로 하고오전 7시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했다. 씨닝에서 짱예까지 347km 밖에 안 되는, 중국에서는 아주 짧은 국도이긴 해도 8~9시간 가량 걸릴 정도로 가파른 산을 넘는다 하고 중형 버스라 다소 걱정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비가 약간 내리는 207번 국도를 달리자마자 바로 가파르게 산을 넘기 시작했다. 드디어는 거의 해발 3000m에 이른다는 라오예산(老爷山) 부근 능선을 넘는다. 거의 수직으로 오른다 싶을 정도다.

해발 3000m를 넘어 다시 내려가는 길 역시 그야말로 곡예다. 꾸불꾸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져 내려가고 반대편에서 화물트럭은 수도 없이 올라온다. 산세가 ‘투우(突兀)하다’고 하는데, 우뚝 솟았다는 말이겠다. 봉우리들이 정말 하나 같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과 어울리고, 마침 비까지 멈추니 환상적인 모습이다.

그 옛날 실크로드(丝绸之路) 남단 길의 한 갈래라 하는데 어떻게 그 당시 이 험한 산길을 넘었을까 모르겠다. 버스도 지쳤는지 점검하느라 한 작은 마을에서 잠시 멈췄다. 계속 버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브레이크 누르는 소리가 꽤 심하게 들렸는데 다행히 점검하고 나니 조금 나아진 듯하다. 정말 그러고 보니 멋진 산세에 취해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잊었던가 보다.

주변에는 유채꽃(油菜花)도 푸르스름하며 노랗게 피어 올랐으니 더욱 금상첨화다. 칭하이성 곳곳은 그야말로 유채꽃으로 뒤덮인 곳이라 해도 될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지금 버스가 지나는 지역인 먼위엔(门源) 시는 유채꽃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중국 유채꽃 식용유 생산의 40%에 이를 정도로유채꽃밭 천지다.

▲ 유채꽃 노란 유채꽃이 도로변에 엄청 많이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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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버스가 다시 출발. 그런데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이제 9시간 중 채 2시간도 안 지났는데 국도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예전에 한두 번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했던지라 좀 시간이 걸리겠구나 했는데 무려 4시간이나 양쪽 차선을 가로막아 버렸다. 대형트럭이 사고가 났으니 좁은 도로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말 그 옛날 실크로드를 걸었던 사람들은 이런 막막한 기다림의 고통은 없었을 것이리라.

거리로는 그다지 멀지 않지만 대부분 산길이고 고원지대라빠르게 질주하기어려워 9시간이나 걸렸던 것. 게다가 버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 한두 시간은 더 참아야 하리라. 그런데 교통사고로 4시간을 하릴없이 기다렸으니 죽을 노릇이다.

겨우 도로가 풀리고 1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조그만 시골마을 칭스쭈이(青石嘴)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았다. 마침 치린(麒麟)이라는 이름의 식당이 터미널 옆에 있어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치린은 중국 전설 속에 나오는데, 속칭 사불상(四不像)이라 하기도 하는 동물인데 이 시골 구석의 식당 이름이 거창해 약간 웃었다.

▲ 국수 치렌산맥을 넘어가는 길, 칭스쭈이 마을 한 식당에서 먹은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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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렌산맥

어디선가 ‘헬로우’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꼬마 녀석 하나가 신기한 듯 유리창 밖에서 계속 웃고 서 있다.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 먹고 꼬마와 그의 형과 셋이서 함께 놀았다. 이마에 빨간 인주가 찍혀 있는 6살 ‘아이뿌’는 어디서 배웠는지 영어를 몇 마디 한다.

▲ 아이들 치렌산맥 넘어가는 길, 칭스쭈이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 최종명
치렌산맥

꼬마 녀석이 귀여워서 돈을 주니 받지 않는다. 거듭 받으라고 하자, 형이 귓속말을한다. 그랬더니냉큼 받는다. 그리고 뛰어가더니 풍선 껌을 사서 다시 오더니 받으라 한다.

버스에 타고 헤어질 때 다시 뭔가를 주려는데 사양했다. 아마도 먼 길을 가니 주머니 속에 남아 있던 껌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참 인정머리가 있는 녀석이다.

다시 버스는 치롄(祁连) 산맥 남쪽 고원을 달렸다. 오른쪽으로는 해발 4~5000m의 설산이 드러나고 왼쪽으로는 푸른 초원 위에 양떼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약간 낮은 평야지대에는 말들도 있다. 전봇대 사이로 멀리 눈 덮인 설산이 보이고 평야에는 말들이 거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차에서 내려 마음껏 보고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버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달린다. 정말 언젠가는 다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그때는 지프차를 몰고 가는 여행이면 좋을 듯싶다.멋진 광경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양치기들과 대화도 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평지에서부터 초원 능선을 넘어 하얗게 끝도 없이 이어진 설산을 향해 올라가고도 싶다. 두고두고 보고 또 보리라 다짐했다.

▲ 설산과 초원 치렌산맥 설산과 넓은 고원지대인 초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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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렌산맥

버스가 또 멈췄다. 치롄(祁连)현 어뿌(峨堡)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그 아래 파란 하늘을 막고 하얀 구름이 층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 설산이 하얀 눈을 간직한 채 산맥으로 이어져 있고 다시 아래는 푸른 초원 지대이다. 황량해 보이는 도로 위에 서 있는 아주머니와 마을 사람들까지 한 장의 사진 속에는 갖가지 형태로 층층이 연결돼 있다.

▲ 어뿌 치렌현 어뿌마을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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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렌현

주위 산 능선은 온통 양떼들의 천국이다. 산 형태와 무관하게 온통 흰 양털이 반짝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풀이 있는 곳이라면 산을 타넘기도한다. 파란 하늘과 새털구름 아래에서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조용히 풀을 뜯고 있는모습에 눈길이간다.

▲ 치렌산맥의 양떼들 해발 4000m 이상의 치렌산맥을 넘어가는 중국 227번 국도에서 본 산 능선의 양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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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렌산맥

버스는 어뿌를 지나 치롄산맥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치렌산맥은 칭하이성과 깐수성을 가르는 산맥으로 허씨저우랑(河西走廊, 실크로드 주요도로로 깐수성의 좁고 긴 고원 평야 길)의 남단에 위치한다. 최고봉은 퇀제펑(团结峰)으로 해발 5808m고 산봉우리는 대개 4000m 이상의 설산으로 이뤄져 있다.

버스가 달리는 산 능선은 해발 3000m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 해발고도를 1000m 이상 올라가서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버스는 지그재그로 긴 포물선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양떼가 도로를 가로질러 가고 있다. 당연히 버스는 또 멈췄다. 양떼 주인도 버스 기사도 마냥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끊임 없이 양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으니, 빵빵거린 후에도 또 얼마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도로 끝으로 서서히 비켜선다.

▲ 양떼들 도로를 막고 선 양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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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렌산맥

브레이크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버스도 너무 늦었는지 과속이다. 원래 도착지인 짱예에서 다시 씨닝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다. 버스터미널에서 손님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산맥을 넘어간다. 산맥을 넘으면 민러(民乐)라는 현(县)이 나타나고 1시간 정도 직선도로를 달려가니 드디어 짱예(张掖)에 도착이다. 거의 8시가 다 되어, 14시간만에 도착.

▲ 설산 치렌산맥을 넘어 깐쑤성에서 바라본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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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중국의 국도는 생명 줄처럼 곳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중국 국도는 3자리 숫자로 1,2,3으로 시작되는 3가지 분류가 있다. 1자로 시작하는 국도(1字头国道)는 101번부터 112번까지 주로 베이징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끝까지 이어진다. 그 중 109번 국도는 라싸(拉萨)까지 3901km나 된다.

2자 국도는 주로 남북으로 수직 형으로 된 도로로 201번부터 227번까지 있다. 닝짱 국도처럼 짧은 거리도 있지만 네이멍구(内蒙古) 동북의 씨린하오터(锡林浩特)에서 장쑤(江苏) 동쪽 해변도시인 하이안(海安)에 이르는 3738km나 되는 긴 도로도 있다.

동서를 수평으로 가르는 3자 국도는 301번부터 330번까지 있다. 상하이(上海)에서 네팔 접경지역인 씨장(西藏) 여우이챠오(友谊桥)까지 5476km에 이르는 중국에서 가장 긴 국도도 있다.

227번 국도를 무려 14시간 버스 타고 겨우 짱예(张掖)에 도착해 곧바로 기차 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다음날 티켓이 없다. 원래 짱예에서 하루 묵을 예정이었는데. 다시 새벽 1시 19분 자위관(嘉峪关) 행 밤 기차표를 끊었다. 바로 출발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시간이 서너 시간 남았다. 서민들이 즐기는 민속악기 소리에 이끌려 시내 공원에 가니 노래하고 춤 추는 사람들의 저녁 풍경이 정겹다. 만도린(琵琶)과 두 줄 현악기인 얼후(二胡)를 비롯해 피리인 띠즈(笛子), 태평소라 하는 쒀나(唢呐), 생황이라 하는 따셩(大笙) 등 온갖 서민 악기 연주에 맞춰 민가를 합창하고 있다. 또 그 옆에는 부채 춤을 추면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중국은 도시마다 작은 공원에는 저녁 시간을 맞춰 노래연습실을 열어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 거리 노래연습실 짱예 시내 한 작은 공원에서 서민악기에 맞춰 합창하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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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예

한참 동안 그들의 서민적 정서에 기대 피로를 풀었다. 근처 야시장에서 맥주와 민물가재인롱샤(龙虾)를 곁들여 간단한 요기를 하고 새벽 기차를 탔다.

▲ 맥주와 민물가재 중국의 야시장 별미인 민물가재 롱샤와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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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가재

청두(成都)를 지나 우루무치(乌鲁木齐)로 가는 기차(K453편)인데 자리가 꽉 찼다. 좌석 없이 우줘(无座) 표로 3시간을 더 가야 자위관(嘉峪关)이다.

버스에 이어 또 기차에서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끔직하다. 배낭을 내려놓을 곳도 마땅하지 않을 정도로 만원이다. 통로에 내려두고 잠시 서 있는데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간다.

너무 피곤했던가. 체면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깜박 졸았나 보다. 눈을 뜨니 그 여학생이 옆에 서 있다. 일어나려니 ‘메이설, 따슈(没事儿 大叔)’ 괜찮아요 아저씨라니? 모양새가 영 피곤해 보였는지 그냥 앉아 있으라 한다.

중국에서 자리 양보도받아보고 참 의외이고 기특한 일이다. 스촨(四川)성 청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길이고 ‘벌써 32시간을 앉아왔어요’하며 양보해준 것이다.48시간을 꼬박 가야 하는 기차 여행을 중국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쉽게 말한다. 뭐 이제는 그럭저럭 적응이 되긴 했지만.

자위관에 도착하니 새벽 5시다. 어렵사리 택시를 잡아 타고 새벽에 문을 연 호텔을 찾아다녔다. 30분 헤맨 끝에 간신히 숙소를 찾았다.그리고, 그냥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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