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농업투자 이야기☜


▒ '죽음의 땅'에서 일궈낸 생명의 포도

2007.11.1)(2007.11.1)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르판을 가다

갓 딴 포도를 운반하는 아만샤의 위구르 중년인. 아만샤에서 포도 재배와 수확은 철저한 공동 작업에 의해 이뤄진다.

투르판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30여㎞ 떨어진 토욕구 유적지. 화염산 자락에 위치한 토욕구는 불교, 마니교,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사막의 여름은 뜨겁고 황량하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사막 위를 걷다 보면 발아래 짓밟히는 모래가 천근 쇳덩어리마냥 육중함으로 다가온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앙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걷는 느낌이 딱 이러하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땅' 타클라마칸 사막. 타클라마칸의 가장 최북단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 투르판은 죽음의 땅을 지난 여행자에게 복음과 같은 곳이다. 위구르어로 '팬 땅'이란 뜻을 지닌 투르판은 총면적 5만㎢ 중 80%인 4만㎢의 고도가 해면보다 낮다. 투르판 남쪽에 있는 아이딩호의 수면은 해발 -154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392m의 사해 다음으로 저지대다.

여름 평균 기온이 50℃를 오르내리고 지표면은 최고 83℃까지 올라가는 불의 땅. 연평균 강수량은 16.6㎜에 불과하고 증발량은 강수량의 180배인 3000㎜에 달하는 건조한 모래의 땅. 멀리 톈산산맥에서 찬 공기가 몰아쳐 내려와 지난 2월에는 강풍으로 달리는 열차가 탈선하여 3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친 사고까지 일으킨 바람의 땅.

투르판은 중국에서 가장 낮고, 가장 덥고, 가장 건조한 땅이다. 이런 혹독한 자연 환경을 지녔지만, 투르판은 돌궐어로 '풍요로운 땅'이라고도 불렸다. 그 이유는 척박한 자연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 투르판인들이 건설한 인공 지하수로 '카레즈'가 내린 축복에 있다.

한삽 한삽 흙파서 만든 5000㎞의 피와 땀

투르판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톈산산맥. 톈산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은 카레즈를 통해 투르판 곳곳에 이른다.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역사(役事)라 불리는 투르판 카레즈. 오직 원시적인 도구로 건설된 인공 지하수로이다.

1년 내내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톈산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은 카레즈를 통해 투르판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카레즈는 페르시아어로 '지하수'에서 유래된 말로,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2000여 년 전부터 건설된 것으로 추측되는 카레즈는 고대 투르판인들이 간단한 삽과 곡괭이로 한 삽 한 삽 지하 땅굴을 파서 만들어진 대역사다.

극심한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카레즈를 고안한 투르판인들은 한 사람이 모래를 파고 다른 사람이 바구니에 흙을 옮기며, 지상에 있는 사람은 지하로 뚫린 구멍으로 바구니를 두레박에 담아 퍼올렸다. 이렇게 극히 원시적인 방식으로 건설된 지하수로는 총연장 길이가 5000㎞로, 베이징에서 항저우에 이르는 대운하(3200㎞)보다 훨씬 더 길다.

오늘날 확인된 것만 해도 1000여 갈래에 이르는 카레즈는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서 물의 증발을 최소화했다. 모래와 강풍의 위협까지 수질을 보호하여 투르판을 옥토로 변모시켰다. 톈산산맥에서 흘러온 질좋은 물은 1년에 맑은 날이 300일 이상으로 강렬한 태양이 작열하고,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268일인 투르판의 자연환경과 더해서 과일의 '여왕'인 포도의 재배를 가능케 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카스피해를 기원지로 꼽는 포도는 기원전 2세기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투르판 일대에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300여 가지에 이르고 포도나무 평균수명은 150년이나 된다. 9월 23일 중국 국영 <CCTV>는 "투르판의 포도 재배 총면적은 24만무(畝)에 달하고 한 해 총생산량은 50만여 톤에 달한다"면서 "생산되는 포도는 껍질이 얇고 육질은 풍성하며 당도는 최고 25%에 달하는 강한 달콤한 맛과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고 보도했다.

척박한 자연을 이겨낸 투르판인의 달콤한 포도

어머니를 도와 포도 따기에 바쁜 한 위구르인 소녀. 8, 9월 포도 수확기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농사일에 바쁘다.

포도는 아만샤 주민들의 노력과 희생의 대가이다. 오늘의 풍요를 이루기 위해 주민들은 각고의 피땀 어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달 초방문한 투르판시 피찬현 루크춘진 아만샤촌도 전형적인 포도 재배 마을이었다. 아만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일부인 쿰탁 사막과, 손오공이 요괴의 방해로 불이 타는 투르판을 파초선으로 부쳐서 만들어졌다는 설화가 깃든 화염산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투르판의 포도를 떠올리면 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6㎞ 떨어진 포도계곡을 연상한다. 화염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길이 8㎞, 폭 2㎞에 달하는 포도계곡은 투르판의 대표적인 포도농원이지만 관광객을 위한 명소일 뿐이다.

그와 달리 투르판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60여km 떨어져 있는 아만샤는 극소수 공무원과 공안을 제외한 주민의 99% 이상이 위구르 사람인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아만샤에서 포도는 수백여 년 전부터 재배되었지만 오랫동안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레즈의 물줄기가 아만샤까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

투르판 일대에서도 빈곤한 농촌마을로 손꼽혔던 아만샤가 오늘날 같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건 20여 년 전부터였다.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숨죽여 살아오던 마을 주민들은 개혁개방정책 이후 토지 사용권이 집안 가족 수에 따라 분배되자 가난을 몰아내기 위한 사업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공동 투자와 작업을 통해 아만샤까지 물파이프를 연결하고 발전기를 구입하여 카레즈의 물을 아만샤까지 원활하게 공급했다. 아블릭 파하티(43)는 "온 주민이 가난을 이겨내고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다"며 "지금은 사시사철 공급되는 물 덕분에 쿰탁 사막 바로 앞까지 포도농원을 일구었다"고 회고했다.

"우리 주 수입원은 포도,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건포도로 만들기 위해 건조동에서 갓 딴 포도를 널리는 작업을 하던 우마르(63)는 "지금도 아만샤 사람들은 포도 재배기나 수확기에 주민간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 서로 농사일을 도와준다"고 말했다. 자식이 없어 3무의 토지 사용권을 분배받은 우마르는 "마을에서 비교적 가난한 소농에 들지만 한 해 수입이 1만 위안(한화 약 120만원)에 달한다"면서 "수확철에는 일거리가 많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의 수확을 도와주면서 부수입을 올린다"고 말했다.

관광객을 상대로 민박을 운영하는 하와 한(38)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민박을 하지만 주 수입원은 여전히 포도 재배에서 얻는 소득"이라며 "포도는 신이 투르판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최고의 선물이다"고 자랑했다. 그는 "투르판 위구르인들의 소득 수준은 신장자치구에서도 최고 수준"이라며 "안정된 경제 기반을 지녀서인지 다른 지역 위구르인보다 타 문화에 대한 포용성도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신장 시간 아침 6시부터 시작된 고된 포도 널리기 작업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우마르. 아만샤에서 여성은 포도 따기, 남성은 운반과 포도 널리기로 분업 작업을 한다.

투르판에서 생산된 건포도량은 12만 톤을 초과했다. 투르판 건포도는 발달된 물류 덕분에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있다.
ⓒ 신화통신

투르판 포도는 위구르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뿐만 아니라 투르판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난 6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올해 투르판 포도 수확량이 대풍년을 이뤄 건포도 생산량이 12만톤을 웃돌았다"면서 "우수한 품질의 건포도는 중국 각지 뿐만 아니라 미국·호주· 러시아 등지까지 팔려져 나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CCTV>는 "투르판 포도주는 전국적으로 아직 많이 유통되지는 않지만 생산업체는 11개에 달한다"면서 "지속적인 투자와 발전이 이뤄진다면 중국 포도주 산업의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카레즈의 맑은 물과 맛이 빼어난 포도의 향기가 깃든 투르판 포도주를 찾는 이가 중국 내에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왕한이 '야광 잔에 가득 담긴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시려니 비파 소리 말을 재촉하네. 그대여, 내 취해서 사막에 쓰러져도 비웃지 말게(葡萄美酒夜光杯, 欲飮琵琶馬上催, 醉臥沙場君莫笑)'라 읊었던 투르판 포도주. 건포도와 함께 세계인의 식탁 위에 놓일 날을 꿈꾸고 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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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인터뷰]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저자 오창학 시민기자
김준희 (thewho)
자동차를 몰고 실크로드를 다녀온 오창학씨.
ⓒ 오창학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오창학(36)시민기자의 직업은 교사다. 그는 대전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오마이뉴스에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라는 제목의 기사가 연재될 당시에, 그의 직업이 국어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이건 일종의 선입견 같은 것이었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를 읽다 보면, 자동차에 대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지식에 감탄하게 된다. 중국을 자동차로 여행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차종이 좋은지, 어떤 차종이 좋지 않은지 등에 대해서 꼼꼼하게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여행 도중에 차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도, 그는 어느 부분의 문제일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한다. 아이솔레이터, 인버터, 써머스텟, 워터펌프 등의 전문용어(?)가 수차례 등장한다. 오창학 기자가 국어교사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동차에 대한 많은 지식과 국어교사, 이 두 가지는 왠지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자동차를 끌고 중국으로 떠난 국어교사

사실 오창학 기자는 오래전부터 사륜 구동을 동경해왔다. 프라이드를 몰던 98년부터, 길거리에서 무쏘를 마주치면 한참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AT 타이어가 장착된 사륜 구동 무쏘, 이놈을 끌고 다니면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곳이든 갈 수 있지 않을까. 사륜 구동에 대한 오창학 기자의 로망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자동차로 달리기 위해서 드디어 2005년 8월에 무쏘스포츠를 구입한다. 사륜 구동 지구여행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2006년 7월에 약 40일 동안 이 무쏘를 가지고 텐진에서 카슈가르까지, 중국을 횡단하는 엄청난 모험의 길을 떠나게 된다.

오창학 기자가 자동차로 여행한 코스
ⓒ 오창학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에 대한 지식 못지않게, 자신의 차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창학 기자를 인터뷰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관심이 있으면 지식도 따라오는 법. 그는 언제부터 자동차에 그렇게 많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을까?

"하하하. 해박한 지식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관심'은 많은데 소질이 부족한지 '지식'이 따라주질 않네요. 차량에 관한 이론적 관심에 반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곤 타이어나 에어크리너 교체, 오일점검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애정이 있으면 보인다고 자동차의 능력이나 상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죠. 정비능력이 없다는 것이 제 커다란 약점입니다. 여행을 준비하며 쌍용정비소에 찾아가 견학 겸 실습 시간도 갖고 했는데 이 방면엔 재주가 부족하더라고요. 천상 샌님이었죠."

역시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꾸준한 관심과 애정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빠리-다카르 랠리 등의 영상을 볼 때면 쿵쾅쿵쾅 심장이 뛰곤 했단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그것과 비슷한 꿈을 꾸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상상하는 거의 모든 지형을 극복하는 사륜 구동의 매력, 여기에 빠진 만큼 그는 또 다른 장소로 무쏘를 끌고 떠나지 않을까. 그에게 다음 여행장소는 어디인지를 물어보았다.

"흠, 이건 사실 비밀인데. 다음 여행지는 호주입니다. 심슨사막과 그레이트 빅토리아사막을 가로질러 동서 횡단한 후에 그레이트 샌디사막을 가로질러 북상한 후 걸프 사반나 지역을 횡단해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대륙횡단, 일주 여행입니다."

역시 어려운 지명들이 튀어나왔다. 웬만큼 여행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보지 못했을 장소들이다. 첫 번째 여행지인 실크로드, 그리고 두 번째 여행지인 호주, 이 두 장소에는 사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거친 자연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실크로드 다음에 호주의 사막으로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사막
ⓒ 오창학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첫 여행지인 실크로드는 '길', '사막', '역사', '사람'의 주제가 모두 모인 매력적인 장소였기에 선택된 곳입니다. 반면 두 번째 여행지인 호주는 섬 하나가 대륙을 이루는 독특한 곳이죠. '길'과 '역사'적인 측면이 부족하지만 대륙전체가 국립공원이며 황무지라 해도 될 만큼 거친 야생의 자연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자신의 사륜 구동을 가지고 그런 원시자연을 누비는 기분은 과연 어떨까. 언제 호주로 떠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한다. 우기를 비켜가려면 7~8월에 가야한다. 하지만 그는 겨울보다 여름에 시간을 내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한다. 이르면 내년 여름, 어쩌면 2~3년 후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실크로드 횡단이라는 큰 여행을 마친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천천히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에 가 있지 않을까?

인문계 고등학교 국어교사이기 때문에 여름방학에도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큰 여행을 앞에 두면 누구나 갈등을 겪게 된다. 꿈을 이룬다는 벅찬 기대감과 함께, 현실에 등을 돌린다는 점이 부담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실크로드 여행 때도 그에게는 이런 문제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교직생활 시작 후 딱 두 번째로 쉬어보는 방학이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조치를 취해 어렵게요. 그렇지만 출발을 미루고 싶진 않았어요.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의 계획을 세운 이후 온통 '영혼'을 팔아버린 것처럼 빠져버려서 얼른 끝내버리고 싶더라고요. 제 스스로 자신의 열망과 가능성을 빨리 확인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으면 싶었던 거죠. 다만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며 실행에 옮겨야 되나 갈등했었는데 그때 아내의 격려와 '펌프질'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 책에 썼던 그 유명한 대사 있잖아요. '당신의 인생에서 서른다섯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갈등을 접었던 거죠."

용기 준아내의 한 마디

그렇게 중국으로 떠났다. 2대의 무쏘에 가이드까지 7명의 인원이 나누어 타고 함께 텐진에 부터 자동차여행을 시작했다. 중국의 낯선 도로와 표지판도 문제이지만, 매 순간마다 차량의 상태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7명의 인원이 함께 이동하다 보면 팀원들간의 불화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었을까?

"왜 없었겠습니까. 친한 사람들도 여행 후 얼굴 안 보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잖아요. 성향과 생각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다 보면 뜻이 안 맞을 때가 많기 마련이지요. 심지어 음식점에서 메뉴 선정하는 사소한 문제에서도 대립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른 노선 선택과 숙소 선정, 체류 일정 등 부딪히고 조율해야 할 부분이 많았지요.

그렇지만 말 그대로 사소한 부분이고 외딴곳에 동떨어져 길을 헤쳐나가야 할 입장이다 보니 서로 의지하고 화합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외부의 어려움이 클수록 내부의 결속이 더 강해지더라고요. 자동차 고장으로 이별과 만남을 거듭할 때 일행들과 조우할 때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사막을 달리는 두 대의 무쏘
ⓒ 오창학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무쏘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리는 장면이다. 비포장도로인데다가 주변에는 식당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여관도 없다. 그냥 달리다가 '볼 일'이 있으면 세워서 볼 일을 본다.

달리다가 해가 지면 그곳에 텐트를 설치해서 야영하고, 식사는 빵과 꿀물, 컵라면으로 때운다. 그리고 또다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달린다. 오창학 기자도 이 지역이 가장 인상에 남지 않았을까. 어느 지역이 가장 힘들었는지, 그리고 어느 곳이 가장 좋았는지를 물어보았다.

"하하. 이런 질문이 가장 힘들 질문인데요. 매 순간이 힘들었고 모든 곳에서 행복했습니다.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치에모에서 아얼진에 이르는 비포장길이라 말하겠습니다. 아얼진산맥을 넘어 칭하이성 거얼무에 이르기까지의 그야말로 산 넘고 물 넘던 며칠 간의 비포장길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온통 먼지와 덜컹거리는 고원의 무인지대를 차량에 적재한 비품에 의지해 야영으로만 넘어야 했던 그 순간이 잊혀지질 않네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가장 좋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중국여행의 하이라이트, 타클라마칸 사막

그럴 것이다. 사서 고생하러 떠난 사람인 만큼, 가장 힘들었던 때가 가장 좋았던 때일 것이다. 여행이 힘들수록 기억에 많이 남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한동안은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개개인의 입장을 봐주지 않는다. 오창학 기자는 여행을 끝내고 귀국해서 곧 다시 교실에 서야했다. 그에게는 여행의 어려움보다도, 귀국해서 현실에 적응하기가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귀국 후 한 달 이상 금치산자였습니다. 학교 수업이야 짜여진 일정이니 정신없이 살아나갈 수 있었지만 방과후엔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았어요. 더 이상 차를 타고 어딘가를 달리지 않아도 되고, 내일 어디까지 이동해야 할지 어디서 자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러니까 꼭 여행 기간만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네요.

엊그제까지의 먼지 내음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내가 달린 길이 먼 세상의 일처럼 여겨졌어요. 산 너머 먼 무지개 닿은 곳을 보고 온 소년의 마음이랄까요. 결국 '아무것도 없더라'는 결론을 얻었을지라도 다른 소년들처럼 늘 무지개 저편의 세상을 동경만 하고 가슴 태우지 않게 되었으니 늘 뿌듯한 마음으로 살게 되겠지요. 물론 지금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있긴 하지만요."

사막을 달리다가 해가 지면 야영을 한다.
ⓒ 오창학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동경하고 꿈꾸지만, 긴 여행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을 남기게 마련이다. 오창학 기자가 갔던 길은 '개인자격으로는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붙어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어렵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2007년에 '한·중 자동차 여행 자유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창학 기자는 무쏘를 가지고 중국을 여행하기 위해서 많은 절차와 신고, 허가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비용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협정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이제 많은 절차가 생략되고 비용도 줄어들 것이다. 이 협정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한국인이 가져가는 자동차를 개인휴대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절차와 비용이 실제로 얼마나 줄어들 수 있을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2007. 1. 1부로 한·중 자동차 여행 자유화 협정은 발효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초기 단계인지라 시행 단계에서 몇 가지 삐걱거리는 내용이 있는 것 같네요. 제대로 시행만 된다면 특별허가 신청 때 필요한 서류접수비 500만원을 포함해 의무적으로 지정하게 되어 있는 가이드비나 면허신청비, 통관비, 대행비 등등 총 800~1000만원 가량의 경비가 절약될 것 같습니다."

절차와 비용이 대폭 줄어드는 만큼,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자동차로 중국을 누벼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 길을 다녀온 오창학 기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는 훌륭한 여행서이자 안내서,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꼭 한 번 시도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매개로 하는 여행이니만큼 급하지 않게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적어도 일 년 정도는 계획을 묵혀가며 준비과정을 즐기세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현지에 대한 공부를 해 가는 것도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동행이 필요하다면 미리 팀을 만들어서 국내 여행을 진행하며 팀워크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고요. 30~40일 여행도 중요하지만 그 열 배의 기간 동안 준비과정을 즐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2007.09.27 18:25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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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크로드여 안녕~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6 마지막회] 톈진에서 인천으로
오창학(ohmadang) 기자
움직이지 않는 밤 고속도로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통관에 늦을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여행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여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다고나 할까. 차량 사이를 오가며 간식을 파는 이들이 이르기를 왜 그런지 모르지만 매일 밤 반복되는 현상이라 한다. 사고나 특별한 사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교통체증이라는 것인데 그 원인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거북이 걸음으로 한참을 지나 어느 목에 이르니 교통공안이 화물차들을 외곽도로로 유도하고 승용차만을 베이징쪽 고속도로로 빼내고 있다. 매일밤 반복되는 체증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화물차의 시내 진입 시간 제한.

새벽녘 만리장성의 관광지로 유명한 팔달령을 넘는데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아, 이젠 눕고 싶다. 아내는 밤눈이 어두워 야간운전을 부담스러워 하고 교수님께선 베이징에서 내리셔야 하는 터라 아직은 혼자 버티는 수밖에 없는데,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비몽사몽인 가운데 드디어 베이징에 이르다. 기숙사에 들러 짐을 챙겨 내일 한국으로 들어가셔야 하는 교수님을 내려드린다. 톈진에서의 만남이 그러했듯 우리 이별 또한 별 준비 없이 치러졌다. 한 달이 훨씬 넘는 시간을 한 평도 되지 않을 백구의 차내에서 함께 했다. 함께 먹었고 함께 굶었으며 같이 덜컹거렸던 시간들…. 무사히 내려드렸다는 안도와 이젠 함께 하는 일정이 끝났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베이징을 벗어난다.

톈진을 향하는 도로에서 더 견디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어제의 수면부족과 오늘의 무리한 운행이 사정없이 눈꺼풀을 내리 누른 탓에 차가 차선 두어 개를 쉽게 넘나든 탓이다. 와락 무서움증이 일었다. 출국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 다행히 여명이 들 무렵이라 잠시 눈을 붙였던 아내가 운전대를 넘겨받는다.

부부라도 오랜 시간을 여행하다 보면 의견 대립도 있고 의가 상하는 순간도 있기 마련인데 길다면 길었던 이번 여행에선 단 한 번 마음 상한 기억이 없다. 위험하고 고된 여정인 탓일까? 차라는 한정된 공간에 매인 처지이기 때문일까? 오히려 서로에 대한 의지와 신뢰가 더 깊어진 것 같다. 백구의 뒷좌석에 죽음처럼 몸을 뉘이며 입술 안으로만 웅얼거렸다. 당신이 옆에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 다시 돌아온 톈진. 단 며칠의 인연이었건만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다
ⓒ 오창학
정말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차는 어느새 톈진의 숙소에 들어서고 있다. 창밖으론 아침 기운이 훤하다. 아, 무사히 당도했다. 보람 있고 알찬 여행도 좋지만 제발 아무 일 없이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빌었던 기도의 뭉치를 뚫고 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떠날 때처럼 우릴 반기는 샤마저우(下馬酒)는 없었지만 서로가 얼싸 안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사정상 일찍 귀국해야 했던 나리님과 새벽녘 헤어진 교수님의 부재가 훵하다. 나와 아내, 그리고 에릭님과 자포님, 그리고 철봉씨. 서로의 표정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해냈는지 알겠다. 이제 나는 품었던 사막에 대한 꿈을 접고 일상에 매진할 수 있을까?

톈진항 해관에 들어가 차량을 입고시켰다. 서둘렀음에도 너무 빠듯하게 도착한 탓에 인천 가는 배편의 차량 선적 칸에 여유 공간이 없다. 별 수 없이 컨테이너에 넣어 보낼 수밖에.

▲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백구와 파라곤. 먼 길을 함께했던 벗이 잠시 휴식을 취할 공간이다
ⓒ 오창학
해관(세관) 직원들이 차량과 적재품 검사를 하고 차량을 컨테이너에 넣는데 가슴 한 편이 묵근하고 눈이 뜨겁다. 수고했다. 백구, 그리고 파라곤.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 길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함께 했던 시간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같이 달렸던 그 먼 길들 잊지 못할 것 같다.

▲ 아내와 에릭님, 자포님은 차량과 함께 다시 배편을 이용해 귀국
ⓒ 오창학
다음날 철봉씨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그는 다시 쓰촨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내와 에릭님, 자포님은 선적된 차량과 차량이 선적된 배로 인천을 향할 것이고 난 출근일정 때문에 톈진공항에서 인천으로 향한다.

▲ 내일이 출근인지라 나는 서둘러서 비행기로. 땅에서 쏘다니다 구름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다. 돌아가기 때문인가?
ⓒ 오창학
비행기 안. 마음이 이상하다. 얼마 전까지도 난 저 구름들 밑을 쏘다녔는데…. 아니, 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느낌. 이젠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에 대한 어색함. 무언가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비단 비행기에 실려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 이제 떠돌았던 흔적을 지워야 할 시간
ⓒ 오창학
떠날 때 25시간 동안 넘었던 바다를 돌아올 땐 2시간도 걸리지 않아 건넜다. 인천공항을 뜬 지 3시간이 안 되어 대전에 도착했다. 점심 때까지도 톈진이었는데 저녁 무렵 내일이면 출근을 해야 하는 까닭에 미용실에 들른다.

근 40여일 가까이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밀고 카슈가르 이후 어설퍼진 머리칼도 다듬는다. 일상을 벗어나고자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다.

▲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 오창학
나를 키운 건 8할이 여행. 길에서 많은 걸 배웠고 떠난 자리에서 원래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 한 번 생활인이 아닌 적이 있던가. '여행가', '여행 작가'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부럽다. 난 언제나 생활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그러나 나 스스로 '생활인'의 범주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행이란 일상을 벗어났을 때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여행이 일상이 되어서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수염을 밀고 머리를 다듬는 15분만에 난 일상인이 될 준비를 한다. 사막의 먼지 내음과 바람의 느낌이 아직도 뇌와 심장에 가득한데 이렇게 쉽게 생활인이 될 준비를 마치다니.

▲ 고비사막에서
ⓒ 오창학

▲ 사막에서의 야영
ⓒ 오창학

▲ 칭하이호
ⓒ 오창학

▲ 돌아오는 배에서 아내가 찍은 서해의 갈매기
ⓒ 오창학
여행을 준비했던 지난 일 년 반, 얼마나 설레고 조바심 나던 시간이었던가.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행복했다. 길을 나섰던 지난 40여 일. 고되고 험했지만 가고 싶은 길을 간다는 환희로 가득했다. 이제 다시 생활로 돌아가야 할 시간. 그러나 준비 기간보다, 다녔던 시기보다, 훨씬 더 긴 시간동안 이 여행의 기억을 곱씹으며 행복해 할 것이다. 다시 일상의 탈피를 소망할 때마다 말이다.

지긋지긋하면서도 매력적인 나라 중국이여 안녕, 나의 실크로드여 안녕~
오늘로써 지난 2006.7.14일부터 8.21일까지 38박 39일간 제 차를 몰고 누볐던 14,000Km 실크로드 여정을 마칩니다. 그간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를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더 생생하고 유익한 정보를 엮은 단행본이 7월 중 출간될 예정입니다. 자동차 여행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들은 지면을 통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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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미모라니...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5] 후허하오터 왕소군묘와 다퉁 윈강석굴
오창학(ohmadang) 기자
▲ 독특한 후허하오터 거리
ⓒ 오창학
어제 바오터우의 싸라치를 떠난 이후 꿈의 대화를 나누며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3시. 베이징 가까운 휴가지라서인지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온 시내를 떠돌았다. 심지어 텐트를 치고 잘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심을 벗어나 야영지를 몰색하다 보면 분명 날이 밝을 터. 새벽 거리를 누벼 가까스로 찾아낸 숙소에서 시신처럼 눈을 붙인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성도 후허하오터. 몽골어 '후트 호트(푸른 도시)'를 음역한 지명이다. 16세기 이 도시가 형성되면서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푸른 벽돌로 쌓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 그런 특색을 살리려는 것일까? 오늘날에도 예스러운 건축물에 황금칠을 한 돔형 장식을 얹어두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촌스러우면서도 나름 특색 있는 도시다.

이 지역 특산물인 우유와 치즈로 아침을 해결했다. 간밤의 고된 운전으로 모두가 몸을 추스르지 못하던 그 때에도 거리를 스케치하고 아침 끼니를 조달해 온 이가 에릭님이다. 여행 내내 경탄해 마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이 양반 삶의 에너지는 어디가 바닥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후허하오터의 간판스타 왕소군

▲ 왕소군 묘 청총(靑冢)
ⓒ 오창학
후허하오터의 간판스타는 단연 왕소군(王昭君). 호텔 이름도, 상가나 거리 명칭도, 공연의 제목도 온통 왕소군으로 가득하다.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그녀는 한 원제(元帝)의 궁녀로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족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와 혼인한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여인의 조공이 80여년 간 전쟁억제 기능과 아울러 '야만족'에게 중화문명의 메신저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만큼의 터를 차지하며 그녀의 흔적이 남을 수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와 그 사이 창작된 무수한 문학과 공연의 소재가 되었던 사실을 설명하기엔 무언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에 너무 관대하기 때문이겠지. 강도짓을 해도 미녀라면 용서가 되는 세태라는 게 어디 현 세대에 국한 될 것인가. 그녀의 아름다음에 대해선 믿어지지 않는 뒷얘기들이 많다.

원제가 궁녀 중 하나를 흉노왕에게 보내려 할 때 초상화로 감정해 가장 인물이 떨어지는 여인을 보내고자 했는데 화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못나게 그려진 탓에 그녀가 간택된다. 헌데 막상 하직인사를 하러 나타난 그녀를 보니 절세가인이 아닌가. 그래서 속이 상한 원제가 화공을 처형하고 눈물로 소군을 보냈다던가.

소군이 궁궐을 떠날 제 비파를 타며 이별가를 부르는데 날아가던 기러기떼가 그 소리를 듣느라(혹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낙안(落雁)'이란 별호가 생겼다는데 대체 어느 정도의 미모가 기러기를 혹하게 할 수 있을까. 이 놀라운 동양적 비유의 아름다움이여.

소군의 북방행은 아마도 그녀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을 게다. 평생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 채 3천 궁녀 중 하나로 살아가기보단 타향의 소실자리일 망정 왕후의 삶을 소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게 어디 맛난 밥과 고운 옷에 그치겠는가.

그래도 미인을 보내는 중국인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어서 거친 이국 생활을 애틋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 봄이 온들 봄 같지 않구나)', 이백의 시구로 길이 남는 이 표현도 그를 이름이 아니겠나. 그러나 그녀가 죽어 묻힌 무덤엔 가을에도 봄빛을 닮은 풀이 무성히 자라나 청총(靑塚)이라 부르고 있으니 고향땅에 대한 아쉬움이 한으로 남았나보다.

▲ 왕소군 동상과 초상
ⓒ 오창학
높이 30m가 넘는 그녀의 무덤 앞에는 말을 타고 선우(흉노왕의 통칭)와 함께 거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처음에 시집 간 호한야 선우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3년 만에 죽고 호한야선우 정실 부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자식을 낳고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으니(<후한서>에는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죽었다고도 나온다) 왕소군의 옆의 사내는 과연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복잡한 생각일랑 말자. 이 동상이야 사람들의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관광소품일 따름이고 당시엔 그들 나름대로 뭔가가 있었겠지.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소군 옆의 남자 동상은 과연 누구일까? 호한야 선우일까, 그의 아들 부주루 선우(復株累 單于)일까.

그런데 육체가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누가 말했나? 이 복잡한 상념도 생리적 신호 앞에 일순 물거품이 된다. 어제 무리하게 밀어 넣은 한국음식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낸다. 유명관광지이니만큼 화장실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문 없는 재래식이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접할 때마다 대략 난감이다. 이번에도 그저 아는 사람이나 안 만났으면 하고 웅크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철봉씨가 들어온다. 멀뚱멀뚱하게 두 사내가 나란히 앉아 공통의 관심사에 골몰해 있다. 그래도 앞 뒤로 앉는 구조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옆에 앉은 사람이 교수님이 아니어서 그게 어디냐 싶다.

해바라기에 집착하는 아내

▲ 몽골초원
ⓒ 오창학
소군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저 무덤이 소군의 무덤이 맞든 아니든 그녀의 흔적을 둘러봤으니 속풀이는 했다. 이제 다퉁(大同)의 윈강(雲崗) 석굴을 향해 최대한 빨리 가야한다.

고속도로에 올라 북상하는데 주변 풍경이 녹색으로 바뀌어 있다. 후허하오터 북쪽 90Km 떨어진 사라무런 초원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네이멍구답게 초록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지니 마음이 시원하다.

▲ 풀밭 위의 점심
ⓒ 오창학
고속도로를 벗어나 다퉁가는 지방도를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점심참. 허기진 배를 쥐고 정착할 곳을 찾다가 확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았다. 길을 내려 차로 내를 건너니 낙원 같은 풀밭이 펼쳐진다. 단촐하면서 신속하게 점심준비. 그래봐야 햇반에 라면이지만 워낙 간절했던 음식들이라 입 안에 침부터 고인다.

모래바람 흩뿌리고 사방 천지가 바위 아니면 모래인 곳에서 먹는 식사도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초원지대의 나무 그늘에서 음식을 펼치니 완연한 소풍의 경지다. 그간 2호차와의 분리로 맛볼 수 없었던 한국산 비상식량이 즐비하고 현지 구입한 풍성한 과일을 곁들이니 극락이 따로 있을소냐. 아, 남은 여정이고 뭐고 이 꿈 깨지 말았으면.

▲ 단체사진. 시작할 때의 두려움과 설레임이 물러난 자리에 감동과 여유가 자리했다. 그래도 끝까지 무탈하기를
ⓒ 오창학
아내는 이번 여행 내내 해바라기에 집착한다.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꽃 사진을 찍어 달라고 보챈다. 자기 사진길 두고 왜 날 귀찮게 하나 싶다가도, 그래 남편의 솜씨를 믿는 아낙의 마음이겠지 싶어 그러고마고 했다. 하지만 사방 천지에 흔한 해바라기를 두고도 사진 찍자고 차를 세우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어서 이제까지 왔다. 그런데 풀밭 옆에 떡 하니 해바라기 밭이 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나름대로 해바라기의 환상과 함께 키운 시를 떠올리며 피사체를 응시한다. 그러나 파인더 안의 해바라기는 고흐의 것처럼 강렬한 빛으로 도열해 있지도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해를 향하지도 않는다. 그냥 열 맞춰 서 있는 군상을 찍을 뿐이다. 색채를 살리기 위한 조작법도 모르겠고 배경을 잡을 곳도 딱히 없어 무념 속에 셔터만 누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 미안하다. 여인의 몸으로 힘든 여정이었을 텐데 아낸 늘 나만 챙겼다. 환경으로부터 상황으로부터 힘들 때도 아낸 늘 내 편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소원하던 해바라기 사진 한 장을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남편을 따르고 믿어주는 아내가 고맙다.

단체사진을 찍는다. 실크로드 역사 탐험대 깃발도 들고 우리 동호회 깃발도 들고 흔적을 남기는데 어쩐지 아릿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젠 이 여행도 끝인가? 어쩌면 지금이 여행 마지막 단체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 분명 사람 번잡한 윈강석굴(雲崗石窟)에서 여럿이 모여 촬영하기가 여의치 않을 테고 그러면 내일쯤엔 톈진에 닿을 텐데….

두어 시간을 넘게 뭉그적 거리고서야 정리되었다. 그만큼 이 소박한 행복에 대한 미련이 컸음이리라. 설사 윈강석굴을 포기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 초록의 빛과 포만감 속에서 헤매이고 싶다.

네이멍구 녹지대에서 점심을 끝낸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산시성(山西省) 다퉁에 접어들었다. 길을 잘 못 탄 것인지 원래 그런 건지 다퉁 시내를 지나는 길이 온통 오프로드다. 우리가 '도강'이라 표현한 진창길도 여럿이고 거리에는 석탄의 잔재가 여기저기 보인다.

목석이 아닐진대 감흥이 없을까

▲ 다퉁의 운강석굴
ⓒ 오창학
시 외곽으로 움직여 드디어 윈강석굴에 도착했는데 마음이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에겐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라더니 오늘 내가 그 짝이다. 용문석굴, 막고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역사적인 곳에 섰는데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다.

용문석굴에서 느낀 재중신라인에 대한 애잔함과 막고굴에서 느낀 고대인의 숨결, 그리고 근현대사에 얽힌 살아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준 그 감동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저 1㎞ 내외의 사암(砂巖) 절벽에 빼곡히 들어찬 50여 굴의 위용만 가득할 뿐이다.

북위 시대 축조되었고 용문석굴보다 앞선 초기 형태를 띄며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구심으로 불교를 택하였음 등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머리와 가슴이 이렇게 별개일 수 있다니.

이건 '구름 언덕'이라는 윈강(雲崗)의 예술품이 조악해서도 아니요, 그 규모가 왜소해서도 아니다. 다만 여행의 막바지에 들른 마지막 경유지에서 느끼는 쓸쓸한 심회가 관심을 다 끌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중으로 톈진에서 통관처리를 하기 위한 준비와 오늘 중으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마음을 다 잠식해서일 수도 있다.

▲ 운강석굴의 불상들
ⓒ 오창학
아무리 그렇다한들 내가 목석이 아닐진대 아무런 감흥이야 없을까. 석굴에 채색된 다채로운 석불들, 5호굴의 대불도 이채롭다. 몇몇 석굴에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낙양 룽먼(龍門)석굴에 봉선사 불상이 그랬던 것처럼 윈강석굴엔 20호 석불이 얼굴마담임을 알겠다.

운강노천대불로 불리는 이 석불은 무슨 마애불처럼 생겼는데 실상은 석굴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왕즉불(王則佛) 맥락에서 조성된 제왕의 풍모 때문인지 권위 있으면서 후덕하고 온화한 미소가 단연 돋보인다.

▲ 20여 분이나 길 안내를 자처해 준 차. 담배 사례도 거절하고 그저 마땅히 할 일을 했다며 여행 잘 하라고 격려해 준다. 주변엔 늘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 뿐이었다
ⓒ 오창학
윈강 석굴을 나서 다퉁 거리를 달린다. 도로에 뚜껑 없는 맨홀이 여러 군데 보인다. 철봉씨는 폐품수집자가 몰래 뜯어간 것이라는데 하루에도 저런 곳에 빠져 부상당하는 사람이 여럿이란다.

'여긴 중국이니까' 하고 넘기려는데 자꾸만 한국 생각이 난다. 맨홀 뚜껑까지는 몰라도 학교 교문이나 남의 집 대문 뜯어가는 도둑 뉴스가 흔한 나라 한국. 곰곰 생각해 보니 이제껏 내가 욕해 마지 않았던 중국의 교통 체계에 이토록 쉽게 적응하고 이제껏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 교통 문화에 단련된 내공 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만하게도 무슨 외계의 행성에 온 양 중국의 교통 문화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 일본 친구가 한국의 버스를 타 보고 경악해 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다.

지도와 도로표지판만 가지고는 고속도로 진입로 가는 길을 찾기가 여의치 않다. 신호 대기 중에 옆 차에 물으니 한참을 세세하게 설명하던 운전자가 자기를 따라 오라며 앞장선다. 그 양반이 자기 가던 길을 버리고 안내를 시작한 지 20여 분. 정말이지 그가 길을 인도하지 않았으면 한두 시간을 족히 헤맸을 것 같은 길을 관통했다.

난해한 길을 다 빠져나올 때쯤 인도하던 차가 서더니 사내가 우리 차 쪽으로 걸어나온다. 혹시 사례를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며 색 안경을 끼고 보는데 사내가 이런 대사를 날린다.

"타지에 출장을 많이 다녀봐서 아는데 저 역시 이런 도움을 받을 때 더 없이 고맙더라고요. 꼭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담배를 권하는데 그 마저도 사양하고 여행 잘 하란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다. 철봉씨 말에 의하면 요즘 중국 사람들도 많이 친절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으면 돈을 요구했을 것이란다.

"이런 사람을 '뇌봉(雷鋒)식 시민이라 합니다."

철봉씨의 말이다. 50~60년대 공산당에 의해 키워지고 선행과 봉사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던 뇌봉은 28살 때 군에서 자동차 수리 중 사망했다. 후에 마오쩌뚱에 의해 뇌봉을 따라 배우자는 운동이 펼쳐지면서 친절, 봉사 시민을 '뇌봉식 시민'이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운동이 만든 결과이든 경제적 여유가 빚어낸 결과이든 순수한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정체가 오늘 밤 안으로 풀릴까?

▲ 베이징 부근 야간 고속도로 정체
ⓒ 오창학
의식이 몽롱해져 간다.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시간은 벌써 새벽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베이징 가는 고속도로다. 2호차 무선에선 자포님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우리 차 안에서도 이 말 저 말이 오가는데 장시간 운전으로 눈꺼풀의 중력을 체감하고 있다.

졸음 속에서 베이징이 가까워졌음을 느낄 무렵 차량들의 속도가 점차 줄더니 급기야 정지한다. 사고라도 난 것인가? 서 있는 불빛이 수 ㎞에 이르지만 이곳에선 내막을 알 길이 없으니 갑갑하다.

1호차 백구와 2호차 파라곤을 둘러싼 채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대형트럭들이 하나 둘 시동을 끄더니 전조등마저 꺼버린다. 사위에 어둠이 내린 채 백구와 파라곤만이 가느다란 엔진음을 그렁이며 빛을 뿌리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이 정체의 원인은 무엇이며 오늘 밤 안으로 풀릴 수 있을까?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여섯 시간 안에 톈진에 닿지 못하면 통관 문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빛 한 점 없는 광막한 고속도로 위에서 갑갑한 마음에 동동거리지만 정지된 대열은 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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