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녀가 비단 제조술 팔아넘겼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6] 카슈가르에서 호탄까지
텍스트만보기 오창학(ohmadang) 기자
▲ 정든 카슈가르를 빠져 나오며
ⓒ 오창학
정든 카슈가르를 떠나다

겨우 2박 3일 머문 곳이지만 카슈가르에 정이 들었다. 하긴 이번에 다닌 이 땅의 어느 길인들 정들지 않은 곳 있으랴마는 이번 여정의 서쪽 끝에 대한 감정은 또 남다르다. 다시 오리라. 그러나 그땐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겠지.

오늘 이후의 타클라마칸 사막 남로 여행은 그야말로 '주파'가 될 것이다. 오늘은 호탄까지 500여㎞를 주행할 예정. 대략 8시간이 걸릴 길이라는데 넉넉잡고 12시간 이내에 호탄에 닿는 것이 목표다. 사전에 조사한 바로는 치에모까지 도로가 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니와, 숙소에서 미리 알아본 바로도 도로 사정은 좋은 편이라 하니 오늘 안에 호탄에 닿는 것은 큰 무리가 없겠다.

오전 9시. 잠에서 깨고도 2시간이나 어기적거린 후의 출발이다. 미련이 많았나 보다. 카슈가르 벗어난 외곽의 '낭(饢)' 파는 노점 앞에서 차를 멈췄다. 길 사정도 모르고 소요시간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내식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 위구르인의 주식인 낭. 피자판처럼 넓고 얊은 것과 빵처럼 두툼한 것이 있다. 차내식으로 쓰기에 유용하다
ⓒ 오창학
'차내식'. '기내식'에서 따온 우리끼리의 신조어다. 이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란 다음 목적지까지 진이 다하도록 이동하는 것.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밥 먹을 식당을 찾아 헤맬 여력이 없거나 식당이 아예 없는 경우도 다반사. 설사 식당이 있다 해도 위험한 야간 운전을 피하려면 식사 시간을 아껴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때가 있으므로 차 안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오늘같이 사막 도로로 먼 거리를 움직이려면 음식 준비는 필수다. 먹든 안 먹든 간에. 그런 때 위구르인들의 주식인 '낭'이 비상식량으론 제격이다. 무엇보다도 상하지 않는다는 점과 조금 먹고 물 마시면 배 안에서 불어버린다는 점, 굳이 끼니라 여기지 않고 간식처럼 주섬주섬 편의에 따라 언제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외로운 캐러밴

▲ 끝없는 사막지대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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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지대를 빠져나오면 마치 이제까지의 풍경은 신기루였던 양 사위는 삭막한 사막으로 가득 찬다. 그 가운데 오직 앞으로만 뻗어 있는 길. 1일 3교대 운전방식을 오늘부터 1인 100㎞ 운전방식으로 바꿨다. 내가 먼저 100㎞를 주행하면 아내가 그 다음 100㎞를, 그러면 다시 교수님이 100㎞를 이어받아 주행하는 방식이다. 500㎞ 남짓한 오늘 같은 거리라면 교수님이 두 번째 운전석에 앉을 때쯤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두 번만 운전석에 앉으면 된다.

철봉씨는? 타클라마칸에 발을 딛은 이래 철봉씨의 존재감이 없다. 내비게이션은 이미 먹통이 된 지 오래. 아예 켜지도 않았지만 지도조차 꺼낼 일이 드물다. 그냥 길을 따라 직진, 직진. 간혹 나오는 갈림길은 도로표지판만으로도 헛갈릴 일이 없다. 그러니 숨가쁘게 지도와 대조하며 길을 찾던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은 이로써 끝이다.

길에서 만나는 위구르인들은 중국어를 모른다. 당연 통역 역할도 끝이다. 철봉씨는 운전면허가 없다. 중국 면허를 받지 못한 것이야 교수님도 마찬가지이지만 철봉씨는 아예 운전 자체를 할 줄 모른다. 그러니 운전 교대 대상에서도 열외.

아내가 그런다. 철봉씨가 우릴 안내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철봉씨를 여행시켜주고 있으니 돈을 받을 쪽은 우리라고.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아직은 운전이 지겹지 않다.

▲ 길. 사막 사이로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막의 큰 미덕은 이런 단조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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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아직은 순탄하다. 좌우의 풍경은 삭막한 모래의 바다이지만 그 사이로 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진다. 사막 열기로 끈적거리는 노면 위에서 바람에 실린 모래들만이 유일한 벗이다. 사막의 큰 미덕은 단조로움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지겹지 않은 변화가 있다. 모래의 알갱이 크기도 지평선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한다. 백구의 속도계는 시속 80을 가리키는데 정작 우린 시간에 갇혀 멈춰 서있다.

이렇게 끝도 없는 사막도로를 달리다가 먼발치에 초록의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오아시스에 닿았다는 표지다. 비록 달랑 차 한 대로 사막을 건너지만 마음은 어느새 대상이라도 된 듯싶다. 먼 거리를 달려 다음 오아시스에 닿았을 땐 그 느낌이 더욱 강하다.

원래 캐러밴(대상)은 페르시아에 어원을 둔 말로 '군대'라는 뜻이다. 지역과 목적에 따라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편성할 때 일정한 규칙은 있다. 낙타 20마리가 최소 단위로 이를 1연이라 부르고 1연은 몰이꾼 한 명이 책임지는 낙타의 수로 2연을 1파라 한다. 5파를 1정방이라 했으니 200마리가 1정방이 되는 셈이다.

대개 200~300마리의 낙타로 한 대상이 편성되는데 그 중 3/4 정도는 교역품을 싣고 나머지는 식량과 물을 싣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두가 낙타를 탈 수 있지만 전 노선에 걸쳐 타는 사람은 대상의 우두머리와 요리장뿐이다.

우리 '철낙타'를 탄 대상은 일행도 없고, 교역품도 없이 모두가 전 노선에 걸쳐 탑승해 움직인다는 차이는 있지만 사막을 지나는 심회야 그 옛날 그들과 다를 바 없다. 대상들이 도중에 머무르는 쉼터를 대상관, 즉 캐러밴 사라이라 하는데 오늘 우리의 캐러밴 사라이는 호탄이다.

오아시스 사람들

▲ 오아시스. 자동차가 있는 몇몇 풍경을 빼면 그 옛날 캐러밴이 다니던 모습이 별 차이가 없다. 시간이 멈춘 초록의 정거장이다
ⓒ 오창학
앞에서 단조로움 속에 변화가 있다 하였겠다. 그 말을 입증하듯 사막의 경탄이 자칫 지루함으로 바뀔 때면 어김없이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대상들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던 건 이 초록의 정거장들 때문이리라. 과일을 몇 알 샀다. 이번 여행의 큰 즐거움. 매일 매일 과일 당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체험한다. 달고, 신선하고, 싼 과일의 호사. 눈 만큼의 입의 추억도 오래 가리라.

▲ 오아시스 사람들. 여전한 인종, 여전한 언어, 여전한 교통수단을 사용하는 곳 오아시스. 신장 내 대규모 도시 오아시스에 비해 한족의 바람을 덜 탄 곳이다
ⓒ 오창학
오아시스마다 사람을 만난다. 사실 만난다기보단 마주친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걔 중 중국어를 아는 이들은 어김없이 말을 붙이고 싶어한다. 늘 같은 질문.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늘 같은 대답. '한국, 실크로드'.

오아시스… 입 안에서 궁 글릴 때마다 양성모음의 발성과 마찰음 'ㅅ'의 어울림이 싱그럽다. 허나 이것이 어디 발음만의 느낌이랴. 갈증과 열기를 뚫고 도착해 여기 푸르름을 경험한 이라면 이 단어가 주는 생명감과 신선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한 인종, 여전한 언어를 쓰며 여전한 교통수단을 쓰는 오아시스 사람들은 모습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궁핍도 여전하다는 말이겠으나 그나마 한족의 바람을 덜 탄 곳처럼 보인다. 아직까지는.

▲ 주행 9시간 째 어느덧 호탄이 가까워진다.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도달한다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
ⓒ 오창학
오후 6시. 카슈가르를 출발한 지 9시간째. 이동 거리 450㎞. 중도에 예청에서 점심식사를 거하게 한 시간을 감안하면 꽤 순조로운 진행이다. 이제 호탄이 가까워지고 있다.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도달한다는 평범한 진리. 얼마나 편하게, 얼마나 빨리는 나중 문제다. 내게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다는 것뿐.

호탄의 비단

여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단단오일리크 유적이 있는데 중국 공주가 목화씨와 누에를 숨겨 출가했음을 증명하는 <견왕녀도>가 발견된 곳이다. 중국이 누에고치를 길러 비단을 짜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 중국의 비단 제조술은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 1~3세기까지도 외부세계에 유출되지 않았다.

기원전 53년, 로마의 7군단 병사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동쪽으로 파르티아인을 추격하다가 갑자기 말의 진로를 바꾸어 뒤로 몸을 돌려 퍼붓는 파르티아인의 화살에 붕괴되고(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몸 돌려 뒤 쏘기 자세) 그들을 향해 달려오던 파르티아인들의 깃발, 로마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구름처럼 가볍고 '얼음처럼 투명한' 놀라운 물건"이라 묘사한 비단깃발을 접했을 때가 서방세계에 처음 비단이 알려진 사건일 것이다.

이후 로마제국은 한나라로부터 막대한 비단을 수입하는 나라가 되고 결국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행복론>에서 "비단옷은 신체를 보호할 수도 없고 부끄러움조차 가리지 못하는 옷이다. 비단옷을 입어본 여성들은 마치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그런데 여성들은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상인들을 부추겨 이 옷감을 먼 미지의 나라에서 가져오게 한다"고 개탄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로마인들은 비단을 '세리카'라 하고 세리카를 만드는 곳을 '세레스'라 부르긴 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1세기경 그리스 학자는 비단이 나무껍질에서 얻어진다고 추측했고 2세기 후반에야 세레스인들이 어떤 벌레를 길러 실을 뽑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무지는 중계무역의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 한 페르시아의 방해로 중국과의 직접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무역을 독점한 페르시아와 직거래를 원한 로마 사이의 관계악화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본시 비싼 원가에다가 멀고 험한 길을 넘어온 운송비용에다 다단계의 유통마진과 경유지에서의 관세까지 더해 최종적으로 로마에 닿았을 때의 비단가격은 그야말로 '금값'이 되었으니 상인들로 하여금 그 험난한 길을 오가게 하는 동인이 되기에 충분했으리라.

이런 유통마진을 위해 중계무역의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페르시아의 방해로 중국과의 직접교역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로마인들 사이에 비단(세리카)이 나무껍질에서 만들어진다는 억측만 무성하게 했다.

비단 제조술 팔아넘긴 배은망덕한 왕녀?

고부가가치 산업인 양잠술이 이토록 철저히 베일에 가려있다가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중국의 비단 수출업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 <대당서역기>에 기술된 내용은 이렇다.

옛날 우기국(지금의 호탄)에선 누에고치나 뽕나무를 알지 못했는데 견직술의 습득을 노리던 우기국 왕이 꾀를 내었다지. 중국 공주와의 혼인을 청한 후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엔 비단이 없으니 그 옷을 입으려면 알아서 하시오!"라면 공주를 꾀었다지. 이에 공주가 자신의 머리장식 속에 뽕나무씨와 누에고치를 몰래 감추어 호탄에 보급했다는 것.

이때가 대략 기원후 1~3세기 후한시대의 일. 중국이 몸달아 하며 비밀에 부쳤던 비단 제조술이 배은망덕한 한 왕녀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오아시스 비단길을 통해 빛처럼 빨리 유라시아 일대로 확산되었고 급기야 6세기 중엽에는 로마제국에까지 양잠술과 견직술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로만 남을 수도 있었으나 호탄강 근처의 유적에서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시집가는 왕녀의 머리장식을 시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견왕녀도>라는 목판화 한 점을 발견하면서 나름대로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많이 듣던 그렇고 그런 전설들 같아 믿기질 않는다. '생각 짧은 여인이 남자의 꾐에 빠져 대의를 저버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숙한 서사구조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그랬고 삼손과 데릴라, 하와, 판도라, 왕의 총기를 흐렸던 역사 속의 수많은 여인들이 그랬다. 왜 언제나 원죄는 여인에게 전가되고 남자는 죄가 없는 것일까?

문익점 선생도 목화씨를 붓 뚜껑 속에 숨겼는데, 인도의 경교 신부들이 누에고치를 지팡이에 숨겨 로마로 가져갔다던데, 왜 유독 중국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기밀산업정보는 여인이 덤터기를 써야 했을까. 남자가 지팡이 속에 누에와 뽕나무씨를 숨기면 국제 관문 옥문관에 설치된 엑스레이 투시기에 노출되거나 씨앗탐지견에 걸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찍이 씨앗탐지견을 배치해 놓고 검문검색을 강화했던 탓일까? 조작된 전설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드디어 호탄에 들어서다

▲ 호탄 입성. 드디어 옥의 도시 호탄에 닿았다
ⓒ 오창학
예전에 우기국이라 불렸던 연옥의 고장 호탄은 오아시스 남로의 대표적 도시다. 비단길이 번성할 때 타림분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를 받아들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곳, 인도에서 당나라로 돌아가던 현장이 7~8개월을 머무른 곳이다.

고선지가 처음으로 독립된 부대를 지휘하며 지역사령관을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직책은 진수사(鎭守使). 천가한(天可汗:천자+칸)이라 칭하며 인식을 전환한 당태종의 태도 변혁의 결과이다.

중화 외의 오랑캐도 인면수심의 짐승이 아닌 교화를 통해 계도 가능한 인간이라는 인식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사상을 배경으로 정복전에서 얻은 오랑캐 장수들을 번장(藩將)으로 삼아 기용했기에 고선지나 사사명, 안록산 같은 장수들이 등장할 수 있었을 게다.

▲ 호탄 인민광장에 세워진 구루반두루무와 마오쩌뚱의 상
ⓒ 오창학
그게 비단 1300여년 전 상황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호탄 인민광장엔 구루반루루무와 마오쩌둥의 상이 서 있다.

19세기 중후반, 야꿉 벡의 10년 치세가 끝나고 다시 신장의 지배권이 청에 돌아가기는 했으나 청 역시 20세기의 벽두에 무너지고 신장은 한족의 지배체제하에 놓인다. 이 시기를 거치며 '민족'의 의식이 싹 튼 위구르인들의 봉기로 국공내전이 한창인 1944년에 독자적인 임시정부를 세우고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그러나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1949년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부르한 샤히디는 현실적인 세력의 우위 때문에 중국과의 연합을 선언했고, 당시 부주석인 이사 유숩 알프테킨은 이를 반대하다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동투르키스탄'은 명실 공히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신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민광장의 저 동상은 바로 이런 병합이 너무도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위구르인과 소수민족들에게는 축복임을 과시하고 있는 상징이다. 병합 후 '잘 살게' 된 것에 감사하기 위해 여기 타클라마칸의 외진 곳에 사는 위구르족 구르반 노인이 나귀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한다. 마침내 민족의 은인 마오를 알현하자 마오는 굳게 그의 손을 잡아준다.

그때의 일을 기념해 신장 내 여러 곳에 저 구르반 노인과 마오의 동상이 선전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럴까? 위구르인들이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 호탄 사람들
ⓒ 오창학

표면적으로 보기에 위구르인들은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적응한 듯하다. 오성홍기가 날리는 인민광장의 풍경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을까. 반바지 반소매도 걸치지 않으며 남자가 외출할 땐 반드시 모자를 써야 하는 이들. 여자도 결혼 후엔 두건이나 면사(面紗)를 쓰고 그들의 성지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를 올리는 이들. 이들은 '아직' 중국인이다. 아니, '이젠' 중국인이다.

카슈가르에서 호탄까지


카슈가르-예청-호탄에 이르는 길. 521㎞ 주행, 10시간 소요.

1급공로는 없으나 전 구간 포장도로이고 노면상태는 구간마다 차이가 있음. 시속 100㎞ 이상은 무리. / 오창학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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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 이발사에 내 머리를 맡기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5] 카슈가르 바자르 둘러보기
오창학(ohmadang) 기자
카슈가르 고성

▲ 카슈가르 고성의 전경. 입장료가 있긴 하나 카슈가르의 오랜 주택구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고 대부분은 내부에 가게를 운영해 살고 있다
ⓒ 오창학
사막 모래의 특성 때문일까? 고비도 그랬지만 타클라마칸 주변의 집들은 그 지은 연대를 알기가 어렵다. 1년 된 집도 100년 같고 100년 된 집도 1년 같다. 그러나 카슈가르 고성이라 불리는 구시가지 주택구는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향취를 물씬 풍긴다. 이제 자동차가 나귀를 누르고 현대식 건물들이 그득한 고도에서 그나마 카슈가르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교묘하게도 이런 장소를 관광지화 해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서는 입장료를 받는다. 주민이 거주하는 전통 공간. 우리의 하회마을이나 낙안읍성쯤 되는 발상이다. 위구르 안내원을 앞세우고 다니는 골목의 정취가 더욱 정겹다.

그러나 골목의 끝, 사이사이로 그녀가 안내하는 곳을 따르다 보면 결국 어떤 종류의 가게로 들어서게 된다. 소소한 기념품, 인근 유적에서 발굴했다는 골동품(믿을 수 없다), 카슈가르의 특산 양탄자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 고성 안 풍경. 우측 하단 사진이 양탄자 판매점 대문이다. 주인아주머니와 사진을 찍자고 청하니 자기 가게의 번호(349번)가 보이게 찍어 달라기에 원대로 한 컷
ⓒ 오창학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는 게 지겨워 상점 안으로 들어서는 건 건너뛰고 골목만 구경할 수 없겠냐 요청한 상태였지만 카슈가르의 양탄자와 칼에 대해서만큼은 진한 동경을 품고 있던 터라 양탄자 가게 안내를 부탁했다. 칼은 어차피 귀국 시에 통관이 어려울 터이므로.

물론 경제적 여력도 문제이거니와 백구에 실을 수 있는 더 이상의 공간도 없어 큰 양탄자 따위는 언감생심. 그저 여기 사람들이 기도할 때 쓰는 자그마한 방석용 양탄자를 몇 점 사서 나섰다. 수작업으로 만들었다는 말 운운은 귓등으로 들었다.

카슈가르의 바자르(일요시장)

▲ 카슈가르의 바자르(일요시장) 풍경
ⓒ 오창학
운이 통하는지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바자르(시장)가 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실은 운이라기보다는 바자르를 보고 싶어 일부러 일요일을 카슈가르에서 맞도록 일정을 진행한 노력의 공이다. 카슈가르 인근의 모든 사람과 타림분지 내의 모든 물산이 모인 것 같다. '국제무역시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상설무역시장 앞 모든 도가는 금세 거대한 시장으로 변하는 진풍경을 접한다.

뜨거운 햇살에 살 섞는 장사치의 호객소리가 순풍이 되어 사막 곳곳에서 운집한 사람의 물결 사이를 표류한다. 특별한 구매 목적을 갖지 않는 단순한 소요. 나는 그들을 구경하고 그들은 나를 구경한다.

사람 사는 곳이란 어디나 그런 내음을 풍기는 것일까. 바자르는 단순히 물건이 거래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네 5일장처럼 정보가 오가고 반가운 얼굴들이 마주하는 교류의 장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는 풍경과 진득하게 나누는 흥정에는 정겨움이 담겨 있다.

바자르의 먹거리

▲ 바자르의 상인들. 이들은 정말 거래를 원해서 이곳에 앉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래된 습관일까
ⓒ 오창학
영락없는 우리네 시골 장터의 풍경. 무좀과 신경통에 좋을 것 같은 말린 지네와 각종 벌레를 파는 이, 장식 괭이날 몇 점과 손도끼날 서너 개를 펼쳐 놓고 팔리길 기다리는 사람, 푸대 하나가 차지 않을 과일 얼마를 펼쳐 놓은 촌로, 한 사람이 끈으로 돌린 숯돌에 칼날을 가는 장인…. 참 다양한 인간군이 다양한 물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 빙수 아저씨. 간이 극장처럼 TV로 영화를 상영하고 주문에 따라 얼음을 긁어 빙수를 만든다. 솜씨가 현란하다
ⓒ 오창학
물건을 파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잡는 풍경이 있다. 마치 간이 극장처럼 텔레비전 한 대를 먼 발치에 두고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영화를 시청하는 빙수 가게의 모습. 위구르말로 더빙된 오래된 중국영화가 돌아가는 사이 주인 사내는 옆에서 얼음을 긁어 빙수를 만든다.

긁은 얼음에 우유와 시럽 같은 감미료를 넣고 머리 높이 만큼이나 그릇의 내용물을 털어 올리면 곧 잘 녹은 빙수가 된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손님들에게 내놓기 무섭게 다시 작업에 들어가는 그 솜씨가 현란하다.

▲ 바자르의 먹거리들. 맛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음료와 어디 가나 빠지지 않는 단 과일, 그리고 일종의 카슈가르식 순대까지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 오창학
더운 날씨를 이용해 성황을 누리는 업종이 어디 빙수뿐이랴. 이름을 알 수 없는 음료도 성업이다. 몇 발짝 건너 하나씩 위치해 있는데 소다수 같은 물을 함박이나 양동이에 얼음과 함께 담아 500cc쯤 되는 유리 잔에 그득 부어 판다. 원재료라고는 거의 물과 얼음뿐이어서인지 가격도 저렴하다. 한 잔에 우리 돈 40원 가량.

객지 나와서 조심해야 할 게 물 갈아 마시는 것. 더구나 수백 명이 마신 유리잔에 다시 물을 부어 파는지라 위생상의 꺼림칙한 면도 있으나 그 맛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해 한 잔을 나눠 마셨으나…. 어떤 맛인지 감지할 수 없다는 게 그 음료의 특징이다.

시장의 모습이 모두 그렇듯 카슈가르의 바자르에도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즉석에서 잘라 파는 과일은 물론이요 영락없는 카슈가르식 순대, 양꼬치 구이, 그리고 낭과 각종 빵들. 어떤 것은 기대감으로, 어떤 것은 두려움으로 손을 댄다.

약 700만 명으로 신장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위구르족은 돼지고기, 동물의 피, 늙어 죽거나 병사한 고기는 먹지 않는다. 남신장과 북신장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낙타, 양, 소 등의 반추동물은 먹고 통발굽 동물인 말, 노새, 나귀 등은 먹지 않는다.

▲ 거리의 악사. 소음 비슷한 그의 가창은 훌륭한 구걸의 방편이다
ⓒ 오창학
여기 거리의 악사가 있다. 그의 연주 솜씨나 음색을 보니 '음악'과 연관한 사람은 아니고 구걸의 한 방편으로 노래와 연주를 택한 듯하다. 악보판을 크게 세워두고 괴상한 소음 비슷한 연주를 하다가 누가 동전이라도 넣어줄 양이면 두 손을 모아 눈을 찡긋하는 몸동작이 제법 익살스럽고 노련하다. 계속 같은 구절만 반복되는 그의 노래와 수없이 반복되는 그의 합장 인사를 한참이나 구경한다.

신장 지역에서 느낀 건데 여기 사람들에겐 적선이 하나의 문화요 생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의 교리 때문일까? 길거리나 사원 앞에 돈통을 앞에 둔 걸인의 표정은 비굴하지 않고 그 안에 돈을 넣는 이들의 표정도 오만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흔쾌히 걸인에게 선을 쌓으며 결코 나무라거나 지저분하다는 눈빛을 갖지 않는다.

국제무역시장의 할머니

▲ 국제무역시장의 화려한 틈새에서 무료하게 채소 몇 단을 놓고 하루를 기다리던 할머니.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에서도 꼭 저런 할머니만 눈에 들어와 가슴이 아팠다
ⓒ 오창학
국제무역시장 번드르한 길바닥에 노파 한 분이 시든 채소 몇 단을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저 노파는 자식이 없는 것일까? 사막 어디에나 가난의 모습이 넘쳐 흘렀지만 이런 장면은 눈에 쉬 잊혀지질 않는다.

한국에서도 재래시장에 가는 게 두려웠다. 다 팔아도 만 원이 안 될 것 같은 푸성귀 한 단을 놓고 하루를 기다리던 할머니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내가 사주겠지만 다음은, 그다음은? 그 할머니는 내가 사 주더라도 다른 할머니는, 또 다른 할머니는?

피한다고 보이지 않고 안 본다고 안 보이는 현실은 아니었지만 나는 무거웠다. 여기 카슈가르의 시장에서 또 무거운 마음이다. 한참을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왔는데 어여쁜 소녀 둘이 채소 한 단씩을 사 준다. 어딜 가나 이런 마음씨의 사람들이 있다.

카슈가르의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다

▲ 거리의 이발사. 장날에만 성업하는 업종인데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 오창학
집 떠난 지 이제 한 달이 다 돼 간다. 참 무던한 시간이 구물구물 흘러갔음을 내 머리칼과 수염을 통해 알겠다. 수염은 여행의 기록처럼 방치하고 싶지만 엉거주춤한 머리는 좀 다듬고 싶다.

시선을 한참 붙잡아 둔 진지한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었지만 그 옆의 익살스러운 이발사가 사람을 잡아끈다. 까짓것 머리끝만 살짝 치는데 누구면 어떠랴 싶어 머릴 맡겼다. 시장 사람들은 새 구경거리에 난리가 났다.

외국인의 머리를 다듬는 카슈가르 이발사의 가위질에 평소보다 과장된 동작으로 한껏 멋이 실리고 있음을 느끼겠다. 그러면서 연신 주변의 구경하는 사람들과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는다. 철봉씨는 위구르 말을 모르니 통역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무언가 자랑의 말임을 짐작할 뿐이다.

ⓒ 오창학
두상의 모양이야 어찌 변하든 카슈가르의 이발사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주게 되어 기분이 좋다. 이 양반이 가정에 돌아가 풀어놓을 한 보따리 이야기 거리가 생겼다.

머리를 깎고 값을 치르려 가격을 물으니 이발사가 5위안을 부른다. 그러자 주변의 구경꾼들이 왁자지껄 몇 마디를 쏘아부친다. 이발사가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편다. 2위안. 이 추억의 순간에도 어리숙한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고픈 욕심은 있었나 보다. 그의 수줍은 웃음이 순박하다.

바자르에서 카슈가르의 하루가, 실크로드의 어느 날이 저문다. 반갑다 사람 내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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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에 향비묘는 없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4] 타클라마칸의 심장 카슈가르
오창학(ohmadang) 기자
카슈가르(Kashgar, 喀什). 대상들이 파미르고원을 넘기 전 숨을 고르는 장소.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은 여기서 장안에서 데려온 낙타를 돌려보내고 짐을 야크에 옮겨 실었다.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도시국가를 형성하였고 한대에는 소륵국(疏勒國)이라 불렸던 땅에서 늦은 눈을 뜬다.

파미르를 넘어 소그디아나나 비잔틴제국으로 가거나 야프칸드로 내려가서 인도 서북부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부의 도시였고 그만큼 침 흘린 세력도 많았던 한의 도시였다. 당의 지배기를 거쳐 11세기 이후 투르크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티무르왕조 지배기 이후 16세기에는 카슈가르 한국의 수도가 된 땅. 그리고 다시 청에 정복당했으나 19세기엔 반청(反淸)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던 곳.

숙소에서 바라보는 거리는 예전의 영화를 찾을 길 없지만 지금도 많은 여행자들로 붐비고 변방무역의 기지로 성업중인 곳이다. 행정적인 성도(省都)는 텐산산맥의 우루무치임에도 신장 웨이얼 자치주의 정신적 중추역할을 하는 곳으로 여전히 타클라마칸의 심장으로 남은 곳이다.

카슈가르의 첩보전

▲ 카슈가르에 있는 동안 숙소로 정한 셔만호텔. 19세기 러시아 영사관이었던 곳으로 지금 치니바그 호텔로 쓰이는 영국의 영사관과 더불어 영・러 냉전체제하의 중앙아시아 패권다툼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 오창학
카슈가르에 오면 꼭 머물고 싶은 곳이 있었다. 지금은 치니바그 호텔의 고급레스토랑이 된 영국영사관 건물과 셔만 호텔의 민속춤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는 옛 러시아 영사관이 바로 그곳이다. 때문에 여기 셔만 호텔(色滿賓館)을 미리 예약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북진 정책 사이 대립은 흡사 과거 미소 냉전체제를 방불케 할 만큼 살벌했다.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었는데, 1885년 영국함대가 우리나라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것도 이런 냉전의 산물이었다.

▲ 호텔 내부의 그림 전시 판매대
ⓒ 오창학
말이 영사관이지 합법적 외교기구를 통해 청의 신장진출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와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신장 지역 무단 점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신장 내에서 러시아와 영국 영사관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필요하면 어디든 점령하고 보는 강대국 깡패근성은 미국이 잘 대물림해 쓰고 있다.

1908년 일본 오타니 고즈이 백작의 西本願寺(서본원사)에서 파견된 두 명의 학승이 불교 전래 경로를 탐사할 목적으로 신장, 즉 중국령 중앙아시아에 발을 디뎠을 때 이들에 대한 첩보가 즉각 영국과 러시아 영사관에 수집되었다. 1902년에 파견된 오타니의 1차 탐험대는 그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았으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명실공히 아시아의 열강으로 떠오른 뒤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이 각 오아시스마다 심어놓은 인도 상인들의 조직망 악사칼(흰수염이라는 의미로 '장로'를 뜻함)들이 수 주일 동안 일본 탐험대를 미행하며 감시했다. 러시아 영사관에선 그들 중 타치바나 즈이초는 일본 해군장교이이고 노무라 에자이부로는 육군 장교라는 정보를 영국에 넘겨준다.

이후 이들이 고고학자인 동시에 일본의 정보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을 내린 영국 정보부는 동경주재 영국대사를 통해 외교적 경고를 보냈지만 외무대신 코무라 백작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에게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이거야 말로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정보요원의 스파이 행위가 밝혀졌을 때 정부가 '그들에게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방법. 100년을 넘게 내려온 역사적 전통이었을 줄이야.

이제 그 역사 속 장소들은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곳에 묵는 사람들 중 몇이 당시의 치열했던 열강 사이 암투를 기억할 수 있을까.

▲ 독일의 실크로드 여행 트럭(위), 셔만 호텔의 전통 가무단(아래)
ⓒ 오창학
여기 셔만 호텔에선 새로운 단체객이 올 때 전통악기 연주와 춤으로 환대한다. 물론 우리를 위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정겹고 반가운 느낌이다. 숙소 마당에 독일여행자들의 트럭이 있다.

벤츠의 트럭을 토대로 장거리 캠핑 여행이 가능하도록 개조한 차량이다. 20여 명 가까이 되는 단체객이 항공편으로 우루무치에 닿으면 이 차로 실크로드 육로를 운행한다. 많은 시간을 요해서인지 대개 60~70대 노년층으로 여행단이 구성되어 있다.

첫 여행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차후에 있을 내 자동차 지구여행에 불을 지피는 순간이다. 더 늙기 전에 실행해 봐야지. 한반도에서 육로를 통해 대륙의 끝까지 여행해 볼 테다. 트럭에 다 같이 타서 다니는 것 말고 내 아내와 둘이서 내 차로.

긴 마라톤의 반환점에 서다

어제의 늦은 취침 탓에 오전 11시가 다 되도록 늑장을 부린다. 여행도 일과 마찬가지여서 일주일에 하루는 휴식을 취하는 일정으로 잡아야 하는데 내겐 카슈가르가 그런 곳이다. 과거 대상들이 가진 숨고르기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거리로 보나 의미로 보나 우리 여행의 반환점을 기록하는 곳이다. 비록 지나온 길을 다시 밟아가는 과정은 아니지만 여기 이후로의 여정은 소위 '귀로'가 될 것이다.

2호차 팀은 사륜구동을 임대하여 오늘 타쉬구얼간에 오르려 한다. 우리 1호차는 하루를 더 머문 후에 예정대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길(오아시스 남로)을 관통해 아얼진을 넘게 될 것이다. 숙소에서 개인정비와 2호차 팀의 출정이 준비되는 사이 나와 철봉씨는 백구의 정비를 위해 수리창(정비소)을 찾아 나섰다.

어제 야간 주행 중 손상된 옆거울과 돌을 뭉개 의심스러운 하체부위를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7000Km를 넘게 달려온 시점에서 한 번쯤 정밀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인구 35만이 거주하는 타클라마칸 최대 도시답게 맞춤한 정비소가 있다.

카슈가르의 정비공들, 백구를 만지다

▲ 정비소의 전직원이 백구에 매달린다. 내겐 여러 차례 겪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겐 흔치않은 구경일 것이다
ⓒ 오창학
정비소 입구로 차를 몰아 들어가니 언제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백구 주변에 포진. 이리저리 살피고 차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한국의 인천에서 출발해 톈진에서부터 달려왔다 하니 경탄의 눈길을 보낸다.

옆 거울 하나를 부착하는데 정비소 사장님이 직접 나섰고 거의 전직원이 참관. 10대 소년도 몇 보인다. 이 중 대부분은 일종의 견습생으로 임금 없이 배우는 사람일 게다.

당연히 무쏘스포츠의 옆거울에 딱 맞는 부품이 있을 리 없다. 다른 차량의 거울을 집어넣고 접착제로 붙여버리는 응급처치를 했다. 그래도 한쪽 눈이 감겼다 떠진 것처럼 후련하다. 유리닦이물과 부동액도 보충했다.

이번 여행의 성과라면 사소한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은 점이라고나 할까. 사막의 먼지가 유리에 붙을 때 이 한 방울의 유리닦이물이 없다면 얼마마다 한 번씩 내려 걸레질을 해야 한다. 생수를 넣어 사용하던 터에 꽉 채운 한 통의 유리닦이물은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 정비소에서의 차량 점검. 카슈가르의 정비소.
ⓒ 오창학
하체를 점검해보니 다행히 파손되거나 의심되는 부위는 없다. 어젯밤의 충격에도, 그간의 험난한 길에도 잘 견뎌 준 것이다. 그런데 뒷바퀴 기어통에서 누유증상이 보인다. 파손에 의한 충격은 아니고 단지 조금 새는 것이니 조치를 하겠다 한다.

기어통 뚜껑을 따서 내부의 오일을 대야에 받은 후 뚜껑부위에 장판 같은 판을 대서 오린 후 접착하더니 다시 조립하고 꺼냈던 오일을 넣는다. 일종의 장판 개스킷인 셈. 그런데 어지간하면 오일을 새 것으로 넣지 꺼낸 오일을 다시 넣는담.

엔진오일이야 합성오일이니 큰 염려 없이 버틴다지만 아얼진을 넘기 전에 교체하려 했던 공기정화 필터와 오일 필터는 하미의 2호차에 실어 둔 탓에 교체할 수 없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별 수 없이 공기정화필터나 한 번 더 꺼내어 털어냈다.

반환점이라서일까? 이제 본격적인 사막 남쪽의 길과 아얼진 산을 남겨두고 있어서인가. 차량정비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정비소 내 세차장에 백구를 맡겼다. 위구르 아주머니 한 분이 세차를 한다. 굳은살 가득한 맨발에 치마의 허리를 드러내며 세차에 열중하는 아낙의 모습에 찡한 마음이 인다. 참 숱하게 겪은 궁핍의 흔적 앞에서 나는 지나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다.

파미르 고원에 2호차 일행을 보내며

2시 40분. 2호차 일행은 타쉬구르칸으로 떠났다. 402년 승려 법현이 여길 넘고 "여름에도 눈이 덮여 있었고 독룡(毒龍)이 있어 한 번 노하면 눈과 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이 날리므로 이를 만나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술회했던 땅. 인도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로로 5000~7000m급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이 고원지대 역시 꼭 답사하고 싶었던 곳이지만 주어진 일정 탓에 나는 예정된 길을 가야 한다. 결국 카슈가르에 다시 와야 할 핑계를 남겼다. 정말 다시 올 수 있을까? 한국과 3시간 시차가 나는 서역 땅까지 자동차로 달려오는 일이 다시 있을까?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두 번 움직이긴 어려운 길이다.

꺼지지 않는 위구르인의 희망, 향비묘

2호차 일행과는 뤄창, 혹은 란저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우린 시앙페이무(香妃墓)라 불리는 아팍 호자의 묘당으로 향했다.

▲ 향비묘라 불리는 아팍 호자의 성묘
ⓒ 오창학
사진 속에서 눈이 아프도록 접했던 그 푸른 타일의 이슬람식 건축물이 눈앞에 서 있다. 현지인들은 '하즈라티(尊者)의 성묘' 혹은 '아팍 호자의 성묘'라 부르나 관광객에겐 시앙페이무, 즉 향비묘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청 건륭제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몸에서 향내가 나는 아팍 호자의 몇 대 손녀를 비로 취했다지. 그러나 향비는 비수를 가슴에 품고 절개를 지키다가 황제 모친의 강압에 자결(혹은 향수병으로 요절)하였단다.

이에 3년에 걸쳐 향비의 시신을 운구하여 이곳에 안치하였다는 것인데 5대 72구의 시신이 누운 관 중 그녀의 것도 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200여 년 전 향비를 운구했다는 오래된 상여도 묘실 입구 왼편에 전시되어 있다.

▲ 베이징에서 카슈가르까지 향비를 운구했다는 상여. 실내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냥 조준 없이 한 컷
ⓒ 오창학
그러나 건륭제의 후비들 중 위구르 출신 여인은 '용비(容妃)'뿐인데 그녀는 1758년 청의 신장 점령 시 정복을 도운 가문의 딸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1788년 55세의 일기로 사망해 황제의 능침이 있는 허베이(河北)의 청동릉(淸東陵)에 묻혔다.

김호동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19세기 말까지 '향비'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다가 이 무렵 신장에 파견된 한인들의 글에 향비가 등장하고 20세기에 들어 더욱 널리 퍼졌다고.

그리고 1858년 카슈가르를 방문한 여행자의 기록에서 그가 카슈가르에 닿기 2년 전 북경에 있는 호자 가문의 후손 시신이 카슈가르로 운구되어 아팍 호자의 성묘에 묻혔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건륭제 후비인 용비이야기와 시신운구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윤색되어 향비 설화가 생긴 것으로 본다.

결국 향비묘는 청에 정복당한 위구르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대리만족 수단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카슈가르에 향비묘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때로 신념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또다른 신념을 부르는 법. 위구르인들에게 향비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 향비묘 뒤쪽의 묘지군. 여기에 19세기 위구르 독립정권을 세웠던 지도자 아쿱 벡의 무덤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 오창학
중가르의 반란이 좌절되고 청에 복속된 이후에도 신장에 몇 차례의 봄은 있었다. 1864년부터 1876년까지 10년 남짓한 기간은 원주민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슬람교도들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봉기해 아쿱 벡을 구심으로 한 원주민 정부를 세웠다.

우수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그의 병력은 한때 중국령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쓸었으나 아쿱 벡의 어중간한 협상책 때문에 허를 찔리고 거기에 아쿱 벡의 돌연한 급사로 10년 독립국 시기는 막을 내린다.

아팍 호자의 성묘 뒤쪽에 있는 여러 무덤 중에 파헤쳐진 무덤이 하나 있는데 위구르 사람들은 그 무덤을 아쿱 벡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청군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위구르인들의 좌절된 독립의지와 영광을 흔적을 부여잡기 위한 또 하나의 향비묘일 뿐이다.

▲ 향비묘 앞의 병 줍는 소녀. 어쩌면 향비는 이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 오창학
향비에 관한 몇몇 초상화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상상화에 불과하다. 향비묘 앞의 기념품 가게에 위구르 여인들을 강렬한 색채로 수놓은 수건들이 걸려 있다. 저들의 형상이 혹 향비가 아니었을까. 다른 한쪽 벽에 플라스틱 병을 줍는 위구르 소녀가 등을 기대고 있다. 순간 향비는 저 아이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건륭제는 이국적인 여인의 향과 외모에 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카슈가르 인민광장의 마오 석상. 웅장하고 장엄한 그의 팔 아래로 카슈가르 사람들이 오간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중국의 영토였다
ⓒ 오창학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인민광장 앞의 마오 석상과 오성 홍기를 봤다. 언어도, 사람도, 문화도 전혀 다른 이역의 땅을 복속시킨 탓에 중국정부의 부담이 더 컸던 것일까. 신장 지역의 모든 도시엔 '인민광장'이 있고 인민광장에 꼭 오성홍기와 더불어 마오의 석상이나 동상이 서 있는데 카슈가르의 것은 유독 크고 장엄하다.

하늘로 높게 든 마오의 팔 아래로 두건 쓴 위구르인들이 지난다. 멀리, 아주 멀리 다른 세상까지 달려왔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중국땅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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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창자를 씹어먹을 고구려 노예놈!"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3] 수바스를 지나 카슈가르까지
오창학(ohmadang) 기자
▲ 쿠차의 아침
ⓒ 오창학
'바람부는 쿠차'

흐린 하늘과 모래 바람이 하루를 연다. 어제 세차한 백구의 몸에 사북이 모래가 앉았다. 2년치 황사를 하룻밤에 겪은 몰골이다.

쿠차의 아침 시장을 지난다. 냉장 시설 없이 양고기를 걸어놓고 파는 풍경이 정겹다. 수바스 고성과 키질 석굴을 보고 카슈가르로 들어갈 계획이라 빡빡한 일정이건만 아침 출발이 다소 늦었다.

주유 중 정차한 차체가 모래 바람에 정신없이 흔들린다. 오늘도 고속주행의 기대는 싹부터 잘렸다. 길거리 오토바이들은 바람에 날릴 듯 비틀거리며 속력을 내지 못한다. 나귀 마차의 주인들도 바람을 피해 짐 위에 바싹 엎드려 있고 오로지 나귀만이 열 지어 가던 길을 간다. 그야말로 자동항법장치가 달린 현대판 교통수단이다.

9시 30분 수바스(蘇巴什) 고성을 향해 나서다. 모래 동반한 강풍으로 눈과 몸이 편치 않다. 톈산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람을 날릴 만치 강하게 부는 길목이라더니 과연 허언이 아닌가보다. 이 모래바람 속에 근 3시간, 80여 km를 헤맨다. 지도엔 수바스 유적이 나와 있질 않다. 한국에서 구입한 실크로드 안내서의 약도는 217번 도로상 천산대협곡 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기에 무작정 217번을 따라간 것이 화근이었다.

중국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여의치 않아 길을 묻기도 어렵다. 도로는 공사로 파헤쳐 놓은 탓에 협곡 몇 개를 우회해야 했다. 지나친 곳을 다시 지나치는 고생 끝에 결정한 것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것. 결국 쿠차로 돌아와 50위안에 택시를 잡아 길 안내를 맡겼다.

▲ 약도 한 장만 믿고 수바시 고성을 찾아 나섰다가 톈산산맥 곳곳을 헤맸다
ⓒ 오창학
'수바스에서 고선지를 느끼다'

이토록 허망할 수가. 택시를 뒤따라 도착한 곳은 쿠차 동북쪽 25km 지점 좌측 산기슭이었다. 도로표지도 없고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라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찾질 못했다. 철조망 안에 '수바스불사유지(蘇巴什佛寺遺址)'란 작은 입간판이 없었다면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모를 뻔했다.

▲ 수바스 유적임을 알리는 표석. 바람 부는 유적 앞의 백구
ⓒ 오창학
'수바스'는 위구르 말로 '물의 원천'이란 뜻이다. 톈산산맥에서 발원해 흐르는 쿠차하(庫車河)가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붙은 이름인가 보다. 바로 이곳에 고선지의 안서도호부가 있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차체를 때린다. 교수님과 아내는 차에서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해 혼자서 유적지에 들어섰다. 허물어지다 남은 벽 사이로 바람이 모래를 감아 올린다. 그때마다 쉰 소리로 바람이 운다. 그 바람 사이로 노성이 들리는 듯싶다.

▲ 톈산산맥을 배경으로한 수바스 고성, 고선지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 오창학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 놈,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노예 놈!"(敢狗腸高麗奴, 敢狗屎高麗奴)

고선지가 하서(河西)로 돌아오자 그의 상관이었던 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이 한 말이다. 4600m 탄구령을 넘어(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는 2500m였다) 소발률국(小渤律國, Gilgit)을 점령하고 당의 세력을 서역에까지 뻗게 한 고선지는 이제 부하가 아니라 상전이 될 처지였다. 질시와 두려움이 변한 분노. '고구려 노예 놈', 나라 잃은 후예가 이국의 신민이 되어 겪어야 했던 수모였다.

톈진에서 예까지 달려오면서도 정리되지 않던 고선지에 대한 마음들. '그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서역 정벌의 당 영웅은 침략당한 도시국가들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곳 수바스의 바람 속에서 갈피를 잡는다. 토번과 아랍, 그는 누가 뭐래도 '고구려 노예 놈'이었다.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한반도 출신의 장수였다.

비슷한 시대 신라인 혜초가 천축국을 순례하고 당으로 귀환할 때 이곳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를 경유했다. 때는 727년 11월. 이 무렵 고선지는 하급 장교로 하서(河西)에 있었고 1차 원정을 마친 747년이 되어서야 서역 정벌의 영웅으로 고선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니 둘 사이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해동의 후손 하나가 이 퇴락한 폐허 속에서 그들의 자취를 동시에 느끼고 있다. 1200여년 실로 멀고 긴 세월의 간극이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한 채 키질 석굴로 향했다. 여분의 음식을 준비치 못했는데 217번 도로를 타는 듯하다가 바이성(拜城) 방면 가는 307번 도로로 가는 70여km 구간은 구릉 사이로 뻗은 길과 황량한 풍경이 전부일 뿐 인적을 찾을 길 없다. 이거 또 아침나절 수바스 고성을 찾던 때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 키질천불동 가는 간판이 보인다.

'키질석굴과 한락연'

▲ 쿠차에서 70여 Km를 달려 키질석굴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백구 아래로 무자르트강이 흐른다
ⓒ 오창학
오후 2시. 유명한 유적지 치고 길이 좁다 싶은 곳을 가다 산을 넘으니 눈앞에 무자르트강이 흐르는 오아시스 풍경이 펼쳐진다. 오랜 행진 끝에 도착한 오아시스.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났던 나그네들의 심정도 이랬을 것이다. 지난 길에 대한 안도와 남은 길에 대한 기대 혹은 염려로 머무는 곳. 그들의 소망과 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이곳 절벽에 저런 석굴을 조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키질석굴 매표소를 지나니 구마라습(鳩摩羅什;Kumarajiva)의 청동좌상이 제일 먼저 반긴다. 사실 반가운 건 내 마음일 뿐이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저 사색에 잠겨있을 뿐.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것 같은 입매는 흡사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표정이다.

▲ 사색에 잠긴 구마라습 청동좌상과 사암재질 석벽에 조성된 석굴
ⓒ 오창학
인도 귀족인 아버지와 구자국(쿠차)왕의 여동생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7세에 불가에 출가한 그가 중국 장수 여광의 포로가 되었다가 장안에 이르러 종국에는 수많은 불경을 번역하고 삼론종(三論宗) 조사(祖師)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표정과 자태에 그대로 녹아난다.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지극한 경지에 오른 중국의 조상(造像) 수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청동좌상의 분위기만으로 그가 번역한 '극락(極樂)' '열반(涅槃)'의 단어들이 연상되고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동아시아에서 친숙한 불교용어는 그의 업적이다.

구마라습의 청동좌상을 오른쪽으로 두고 절벽으로 향하면 벌집처럼 뚫린 무수한 굴이 있다. 가까이서 절벽의 재질을 느끼니 이곳을 '석굴'이라기보다는 '토굴'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신도들이 만졌던 자리가 움푹 패여 있을 만큼 모래가 뚝뚝 묻어나는 바위다.

여기서도 모가오굴처럼 안내원을 고용하고 허용된 몇 곳의 석굴만을 관찰해야 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벽화는 많지 않다. 세월이 그 흔적을 지우기도 했고 이슬람화한 이후 현지인들이 의도적으로 훼손하기도 한 탓이다. 게다가 서양의 탐험가들도 뒤늦게 일조를 했는데 그 뜯겨진 흔적들 앞에선 예외 없이 안내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적한다.

이곳에 오면 반드시 참배하던 당대(唐代)의 8호굴에서 수미산을 형상화하기 위해 벽에 홈을 파고 나무를 꽂았던 흔적을 보았다. 둔황 모가오굴보다 200여년을 앞섰기에 남녀가 구분된 비천상이나 인도 영향을 받은 상반신 나체상 등을 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내심 한 가지 생각에 다른 방들은 주마간산격이다.

▲ 한락연이 기거한 10호굴의 글. 원래 이곳은 선방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석굴 내는 촬영이 금지되어 화보를 재촬영한 것임
ⓒ 오창학
드디어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연구하며 기거하던 10호굴에 이르렀다. 벽에 남겨진 그의 글귀. 개인적으론 인도인의 모습으로 미륵보살상을 그려놓은 17호굴의 그림보다도 인상적이다. 1946년 벽화를 조사하고 모사하던 때 새긴 글로 제자의 원문은 이렇다.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지은 신장문화보고(寶庫)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를 읽고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와서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우리나라 여러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벽면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趙寶琦), 천탠, 판궈챵(樊國强), 쑨비둥(孫必棟)을 데리고 두 번째로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正附) 번호('韓氏編號'ㅡ필자)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 정수일 교수 번역 인용


1947년 연구 결과물들과 함께 한락연을 태우고 이곳에서 란저우로 가던 군용기가 가욕관 부근 고비 사막에 추락했다. 비행기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 한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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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람들에게 의식주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장사치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시정배 경향을 반대해야 한다"던 그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과 소수민족을 소재로 한 일련의 풍속화를 보노라면 강요배의 그림들이 자꾸 겹쳐진다. 한락연의 그림 중 위구르인들의 경건한 종교의식을 반영한 <길가의 예배>, 혹은 <몽고족 노인>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티벳족> 등 어느 것 하나 눈에 띄는 요란함이나 기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특히 소수민족에 대한 그의 끈끈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 출생 후 항일운동, 9년간의 프랑스 유학, 사회주의 운동, 화가와 고고학자로서의 활동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겨레붙이의 흔적을 본다. 조선의 피였으나 중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마음이 어떠했는지, 룽징에서 혼인한 부인 최신애와 딸 한인숙이 일본군 점령지에 있었던 탓에 중국여인과 다시 가정을 꾸려야 했던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속내까진 알 수 없으나 그가 보인 삶의 행적과 예술세계 앞에서 짠하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10호굴을 둘러보는 동안 조선족 가이드 철봉씨의 표정이 자못 비감하다. 이번 방문을 통해 처음 한락연을 알게 되었다는 철봉씨는 그에게서 어떤 동류감을 느꼈던 것일까.

10여 개 석굴을 둘러보고 입구로 나와 매점에서 컵라면과 과자로 주린 배를 채운다. 아직 바람이 불고 여운이 가시질 않는데 길을 재촉한다. 키질석굴을 나선 시각 오후 4시40분. 오늘은 카슈가르에 들어가야 하는데 오전에 수바스 고성을 찾아 헤매느라 허비한 3시간이 안타깝다.

오후 7시 20분. 홍기파 요금소를 지나는데 이 구간에 비가 내린다. 사막에서 맞는 비라 감회가 새롭다.

'카슈가르 가는 길'

오후 7시 40분. 금세 갠 하늘은 아직도 환하다.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도로 갓길에서 승용차 운전자와 화물차 운전자가 싸우는데 무엇에 격분했던지 승용차 운전자가 자기 차로 달려가 운전석 아래를 뒤적인다. 이런 세상에! 한 뼘이 훨씬 넘는 칼을 집어들고 화물차 운전자에게 뛰어가는 것이 아니야. 놀란 화물차 운전자, 얼른 높은 화물차 운전석 위에 올라 몸을 숨긴다. 흠… 그래 어지간하면 양보하자.

▲ 쿠차에서 카슈가르 가는길. 밤 10시인데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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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다시 말해 밤 10시인데 아직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도로 상태도 그럭저럭 양호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이 추세면 오늘 안에, 늦어도 오늘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카슈가르에 도착할 것 같다. 2호차 일행은 우루무치 공항에서 카슈가르행 비행기를 탄다 하였으니 지금쯤 카슈가르를 향해 날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카슈가르에서 우루무치까지는 1990년대 초만 해도 보통 23일이 걸렸다. 그런 길을 비행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로도 2~3일이면 닿을 수 있게 되었다. 도로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포장된 도로가 전 노선에 깔려있는 셈이다. 소수민족의 편리를 도모한 공사라기보다는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고 무엇보다 경제 기반 사업과 관련한 조처로 이루어진 혜택이다.

도로뿐 아니다. 서기동수(西氣東輸). 서부대개발의 대형 프로젝트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서 간쑤성, 닝샤후이(寧夏回)족 자치구를 거쳐 상하이까지 4212km에 달하는 천연가스 수송 파이프를 까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되어 2004년 8월 이후 타림분지의 5000억㎥의 천연가스를 중국 동부로 수송하고 있다.

이로써 30여 년간 중국은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3000억 톤의 천연가스와 5억 톤의 석유가 신장에 매장되어 있으니 중국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모래사막뿐인 신장웨이얼 자치구를 잃을 수 없을 것이다.

10시가 넘어서면서부터는 급격히 어둠이 천지를 삼킨다. 아까부터 교수님이 운전 중이다. 키질 이래 아내, 나에 이어 교대한 것인데 하필 어둘 무렵 운전을 맡겨 송구스럽다. 이제껏 겪어온 일이지만 어둠이 앉은 사막의 도로는 참 어둡다. 가로등 없는 길이 어둡지 그럼 밝겠나? 그런 차원의 어둠이 아니다. 전조등으로 가를 수 없는 원초적인 어둠이다.

어둠이 부담스럽지만 마음이 급하니 자꾸 과속하게 된다. 평균 시속 120km. 사방이 어둠뿐이지만 그나마 사막으로 뚫린, 차량 소통이 거의 없는 길이기에 무리를 한다.

"아아악!"

모두가 보았다. 바로 눈앞에 들어온 돌의 장벽을. 누군가 차가 고장 나 돌로 위험 표지석들을 쳐놓고선 수리 후 그냥 떠나 버린 흔적이다. 도로 최대의 적이 이것들인데 상향등으로도 발견되지 않다가 목전에서야 보인 것이다.

후두두둑.

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그냥 치고 지나갔다. 바퀴 하나는 돌을 타고 넘고 하체 어딘가는 요란하게 부딪힌 것 같다. 앞부분 하체의 오일 쿨러 부분을 강판보호대로 쌌기에 망정이지 일이 나도 된통 날 뻔했다.

교수님께 교대하자는 말씀을 드려봤지만 계속 하겠다 하신다. 이 사건 이후 뒷좌석에 앉았으면서도 눈 한 번 돌리지 못한 채 전방을 주시한다. 손은 문쪽 손잡이를 꽉 쥐고 있다.

"아아악!"

차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거대한 화물트럭의 후면. 급하게 차가 선회했지만 백구의 오른쪽 옆 거울이 화물차에 부딪혔다. 거울 틀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거울은 깨져서 덜렁거린다. 차를 세우지도 못 한 채 터질 듯 방망이질 하는 심장만 손으로 누르고 있다.

또 누군가가 고장 난 화물차를 길에 방치하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아니면 안에서 자고 있던가. 전지가 나갔던지 비상등조차도 켜지 않은 채 그냥 주행차선 전체를 틀어막고 길에 방치해 놓은 차를 목전에 와서야 발견한 것이다. 먼 타향 객지에서 하마터면 불귀의 혼이 될 뻔한 사건을 겪고 모두 숙연해졌다.

카슈가르 진입을 앞두고 고속도로에서 버스의 대형사고를 수습하는 현장을 지나쳤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여행 내내 웅얼거렸던 주문을 왼다. '제발 무사히….'

▲ 카슈가르에서 2호차 일행 상봉. 며칠간의 헤어짐에도 이산가족의 해후만큼이나 반갑고 애절하다
ⓒ 오창학
새벽 1시. 카슈가르의 셔만 빈관에 도착했다. 비행기 편으로 카슈가르에 닿은 2호차 일행도 비슷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해 상봉했다. 겨우 며칠이건만 흡사 이산가족이 만난 듯 반갑고 애절하다.

2호차의 고장을 두고 여행에 실패란 있는가에 대해 토론도 하고 만두 20여 개를 놓고 늦도록 정담이 오갔다. 어렵사리, 힘들게 만난만큼 나눌 말이 많다. 덕분에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 845km를 주행했다. 참 멀고 긴 하루.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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