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보살 대갈, 보살 눈깔, 이래 안 합니까?"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4] 둔황 모가오굴
오창학(ohmadang) 기자
그리운 둔황

둔황(敦煌). 찬란한 사막의 횃불.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에 둘러싸여 완연한 사막의 복판에 놓인 이 오아시스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 삼위산에서 바라본 둔황 전경. 모래 사막들 뒤로 넓게 펼쳐진 녹지가 보인다.
ⓒ 오창학
한무제의 한서사군 이후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내어 흉노의 남하를 막고 대상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구인 서역도호부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동서 교류의 전진기지 된 곳.

옛이름 사주(沙州)의 의미처럼 모래에 둘러싸인 채 고비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견뎌내는 이곳은 대상들과 수도승, 외국의 사절들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실크로드 여행에서 중요한 장소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누란왕국으로 나아가거나 톈산산맥 남쪽 기슭으로 가기 전 숨을 고르던 곳이다. 우리도 막하연적 사막을 건너 투루판으로 가기 전 침착한 숨을 고르며 며칠을 머물게 될 것이다.

▲ 멀리 보이는 삼위산과 명사산의 전경. 4세기경 모가오굴을 처음 굴착한 악준은 저 사이에서 나오는 빛을 보았다 한다.
ⓒ 오창학
차를 몰아 모가오굴(莫高窟)을 향해 나아간다. 시내를 벗어나 조금만 외곽으로 나서면 금세 이곳이 사막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강수량 40mm, 증발량 1300mm라는 수치가 아니어도 둔황의 바삭바삭한 느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천상 모래의 땅이다.

둔황 동남쪽으로 20㎞가량을 이동하니 전방 왼편에 삼위산, 오른편에 명사산이 나타난다. 4세기경 삼위산과 명사산 사이에서 나오는 빛줄기를 보고 처음 막고굴 석굴을 조성했다는 악준(樂俊)은 이쯤 거리에서 빛을 느꼈으리라.

자연 속의 대화랑 모가오굴

▲ 모가오굴 앞에서 선 파라곤(좌)과 백구(우).
ⓒ 오창학
모가오굴은 4세기 이래 밍사산 절벽 1.6㎞를 따라 조성한 석굴군이다. 474개의 석굴 안에 4천기가 넘는 소상과 연면적 4만5천㎡가 넘는 벽화가 소장되어 있다. 1미터 폭으로 나열했을 때 45㎞에 달하는 대화랑이 저 굴 속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 4500만 제곱미터의 벽화가 있는 자연 화랑.
ⓒ 박재익
내게 이 절벽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인류사에 찬란히 빛나는 예술작품으로 가득해서, 20세기를 찬란하게 한 둔황학의 문적들이 발굴된 곳이어서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도처로써, 거주민과 실크로드를 오갔던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오롯이 배인 곳이어서다.

한족 아버지와 티벳 여인 사이에 태어나 정신적 물질적 충족을 위해 어려서 사미계를 받은 한 여인, 면세 혜택을 노리고 사찰에 땅을 담보 잡힌 채 농사를 짓던 지주의 이야기, 민방위 소집 후 무기반납을 안 했다가 감옥에서 갇힌 아들을 위해 땅을 팔던 늙은 과부의 이야기. 모가오굴엔 이런 민초들의 이야기가 아롱져 있다.

그리고 먼 길을 달려온 한국인으로서 갖는 또 한 가지의 애정이라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축약본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혜초 스님이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순례하고 육로로 귀국할 때 거쳐간 장소임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 모가오굴 입구.
ⓒ 박재익
외국인은 해당 언어 해설자 비용을 추가해 따로 표를 끊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 일행 6명 외에 기차로 여행 중인 중년부부 한 쌍이 같이했다. 은연 중 단체관광이 아닌 기차를 이용한 '자유로운' 여행을 강조하는 남편분께 살며시 미소로 답했다. 후훗… 우리가 한국에서부터 차를 달려 이곳에 닿은 사람들임을 아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까?

우리 앞에 나타난 남자 해설자는 영락없이 '날아라 썬더보드'의 등장인물 중 하나와 꼭 닮았다. 그런데 그의 한국어 발음이 힘겹다. 베이징에서 1년간 한국어를 익혔다는 그의 발음을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왜 이런 유명유적지 한국어 해설자가 조선족 교포가 아니라 한족일까에 대해 우리끼리 말들이 오갔다. 소수민족의 연구 성과를 등한시하는 중국의 풍토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중지를 모았는데, 조선족인 철봉씨의 말은 조금 다르다. 아마 돈이 되질 않아서 조선족 해설원이 이곳을 꺼렸을 것이라 했다. 철봉씨도 돈 때문에 초등학교 교원을 그만두고 관광안내원의 길로 나섰던 만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기 울리 맛고오굴 상징입니다. 살진 직고 일리로 오십시오우."

해설자는 저만치 떨어진 96굴의 9층 누각을 가리킨다. 굴에 들어서기 전 모든 촬영기기는 반드시 맡기고 들어가야 하므로 먼저 기념사진을 찍어두고 오라는 말이다. 누가 작렬하는 둔황 여름 햇살 아래 반복되는 구간을 걷고 싶겠는가만은 인간적인 이해와는 별개로 뒷입맛은 쓰다.

문화재에 관한 몇 가지 단상

▲ 막고굴의 상징 북대불전 9층누각.
ⓒ 오창학
둔황 막고굴의 상징 '북대불전'은 9층의 탑형식인데 누각 뒤로 높이 35m의 대불이 세워져 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석불이었는데 세계 2, 3번째인 아프카니스탄 바미안 석굴의 동대불(45m), 서대불(38m)이 탈레반 정권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석불로 등극한 셈이다.

역사라는 게 참 묘해서 불과 40여 년 전에 문화재에 대해 탈레반보다 더한 짓을 감행했던 중국이 이제 와 '문화'와 '문화재'를 거론하며 세계에 실크로드 유적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 정비된 막고굴의 굴들. 저 안에 촬영도구를 소지한 채 입장할 수 없다.
ⓒ 박재익
많은 굴 중 우리에게 허용된 굴은 10여 개뿐이다. 120위안어치 구경치곤 너무 소략하다 싶었지만 참관할 수 있는 굴의 양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비전문가적 입장에서 어둠 속 전등에 의지한 관람이 얼마만큼 감동을 줄지는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혜초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장경동이 있는 17호굴과 신라승탑에 대한 지도가 있다는 61굴, 조우관을 쓴 해동인의 그림이 있는 237굴, 332굴. 그리고 고구려의 쌍영총 수렵도와 유사한 수렵도가 있는 249굴만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게 통했는지 중 17, 237, 249굴이 포함되어 있다.

16, 17호굴이 1층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17굴은 16굴의 '곁방'이다. 1900년 어느 봄날 16굴을 수리하던 도사 왕원록(王圓籙)이 모래로 막은 벽을 허물기 전까지 사방 3m의 방을 가득 채운 고문서들은 1000년 세월을 먼지로 존재해 왔다.

그러다 왕 도사가 고문헌들을 발견해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구 열강의 탐험대가 접근했고 은화 몇 닢에 자료들을 사들여 보낼 수 있는 만큼 본국으로 보내게 된다.

17호굴을 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이 굴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아 2만여 권이나 되는 고문서를 3주 만에 독파하던 때의 사진. 책에 열중하는 그의 사진을(동료사진작가 누에트가 찍음) 처음 접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 13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가 하루 1000건의 문서를 검색하고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문헌들을 분류할 때 발견한 것이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17호굴 근처의 박물관에선 영국 탐험가 스타인과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 러시아 고고학자 올덴부르그, 미국의 고고학자 워너 등 흔히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불리는 열강 탐험대의 문화재 탈취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해설원도 이곳에선 비난의 어조가 더욱 높아진다.

후안무치. 본시 제왕은 부끄러움이 없다더니 이 나라도 '제왕'의 기질이 있어서 그런가? 왕 도사의 문헌발견 보고에도 운반비용의 문제를 들어 방치했던, 그러다가 결국 열강이 다 뜯어나고 남은 자료나마 가져갈 때 쓸만한 자료들을 관리들이 앞다투어 가로챘던 이 나라가 열강의 약탈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낯이 두껍든 과거의 잘못이 어떠했든 지금 정신을 차리고 원주인이 문화재의 반환을 원한다면 돌려주어야 한다. 당시 문화재 반출의 목적이 보존을 위해서였든 연구를 위해서였든 이제 원래 주인이 문화재를 보존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

"우린 그런 민족 아닙니다"

서울에도 여기 둔황의 유물이 있다는 해설자의 말에 임시동행한 그 중년 한 분이 그런다.

"우리가 훔친 게 아녜요. 우린 그런 민족 아닙니다."

맞다 우리는 도둑이 아니다. 당시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둑질한 장물은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의 탐험대가 세 차례에 걸쳐 둔황과 실크로드의 다른 지역에서 챙긴 문화재 중 1/3에 달하는 분량이 조선총독부로 넘어오게 되었고, 해방을 통해 고스란히 우리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벽화 60여점을 포함해 1700여 점의 크고 작은 유물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력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는 반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993년 고속철도 사업의 미끼로 미테랑이 의궤 한 권을 들고와 '고맙게'도 '영구대여'해 준 것을 빼고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정작 그 프랑스는 2차 대전 당시 빼앗긴 모네의 그림을 1994년 독일로부터 돌려받는 것을 필두로 나머지 27점의 작품도 모조리 되찾아 자기네 약탈문화재의 완전한 회복을 꾀하고 있다.

굳이 외규장각 도서 이외에도 7만 점이 넘는 해외 반출 문화재의 조속한 반환을 위해서는 우리부터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얻게 된 실크로드의 유물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우리마저 우리가 욕해 마지않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태를 뻔뻔하게 본받을 순 없지 않은가.

▲ 석굴.
ⓒ 박재익
문화재의 '약탈'과 '반환'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얽히더니 다시 석굴의 회화들을 접하는 순간 명정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259굴의 4세기 보살상은 높은 코와 치마양식으로 볼 때 중국인이 아니고 이슬람식 천정(중앙아시아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게 이채롭다. 흙으로 만든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는데 단순히 중국인을 위한 장식적 의미이다. 둔황이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지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설자는 보살의 미소를 '모나리자의 미소'에 견주어 설명한다. 이제껏 중국의 곳곳을 돌아 여기에 이르기까지 웃는 모양은 모두 '모나리자', 반나체의 여인상은 '비너스'에 견주어 설명들은 탓에 식상한 느낌이다. 그의 한국어를 알아듣기가 어려워 무시하고 지나친 탓에 잘못 들었는데 굴을 나오면서 철봉씨가 그런다.

"그란데 저 친구 누한테 한국말을 배왔는지 모르겠어요(철봉씨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왜요?"
"자꾸 보살 대갈, 보살 눈깔, 이래 안 합니까?"


하하하. 많이 웃었다. 기회 봐서 말을 해 주어야 할 텐데.

삶과 생활의 공간 모가오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 각국의 사신들이 유마거사에게 설법을 청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에 조우관을 쓴 해동 왕자의 모습이 보인다.

"실라 완자님이 조일 잘 생기셨솝니다."

한족 해설자가 조우관을 쓴 인물을 전등으로 가리키며 농담을 한다. 해동의 왕자가 중화의 땅에 사신으로 와 조아리는 모습에 대한 우리 팀의 평가는 '실크로드 교역사의 한 축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대의 아픈 그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로 다시 엇갈렸지만 저 그림이 사실도라기 보다는 일종의 관념도며 상상화이리라는 점엔 의견을 모았다.

428굴. 인도 비천상이나 불상을 보다가 벽 하단에 그려진 천 명의 공양주 그림에 눈이 멎었다. 이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진 상태. 와락 반가움이 인다. 이 순간 굴이 죽은 회화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으로 돌아온다.

96굴에서 본 '도독부인 아무개가 일심보양(一心保襄)하다'와 148굴 '당 대종(大宗) 11년(775) 이대빈 상인 시주'라는 글귀와 연관해 미소 짓게 한다. 신앙도 예술도 결국은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곳은 민초들의 염원이 묻어있는 생활의 장소다.

▲ 둔황의 상징 비천상.
ⓒ 박재익
모가오굴을 나오는데 '비천상(飛天像)'이 서 있다. 북대불 9층 누각이 막고굴의 상징이라면 둔황지역 석굴 벽화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천상은 둔황의 상징이다. 천가신(天歌神) 건달바와 천악신(天樂神) 긴나라가 합쳐져서 남녀 구분이 없고 둘 사이 기능이 통합된 존재. 구름의 도움은 받되 구름에 의지하지 않으며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과 채색 허리띠에 의지하여 하늘을 난다.

본뜻은 서역의 비천과 중국의 선녀, 불교의 천인(天人)과 도교의 우인(羽人)의 특성이 융합된 상으로 지어졌겠으나 이제 비천의 모습은 완연히 중국 향을 머금고 있다. 여러 민족이 경합을 벌였던 이 터전도 이젠 모두의 땅은 아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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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실크로드 비포장길에서 처절하게 깨닫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3] 자위관에서 둔황 가는 죽음의 비포장길
오창학(ohmadang) 기자
'흑산의 현벽장성과 암각화'

자위관을 나서 흑산(黑山)으로 나선다. 자위관에서 서쪽으로 6Km가량 떨어진 쉬안비창청(懸壁長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암각화가 있어 끌리는 곳이다. 그 암각화들 중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이 조련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이 고구려나 신라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니 직접 현지의 근·원경 사진을 촬영해 왔으면 좋겠다고 한 정형진 선생의 권고 때문에 꼭 가고 팠던 장소다.

현벽장성이면 어지간한 여행 안내서에 필히 등장하는 유명 장소인데 아직 도로는 정비 중이고 벌판에 난 길은 미세분자로 구성된 흙구덩이다. 이젠 먼지 속을 달리는 일은 인이 박혀 무감각한데 방금 전 세차를 마친 터라 속은 쓰리다.

▲ 찬청(식당)이 붙어있는 현벽장성 관리사무소에서의 점심 식사. '설개화염산'이란 거창한 이름의 요리를 시켰더니... 설탕 뿌린 토마토였다.
ⓒ 오창학
일단 흑산으로 진입하려면 이유야 어쨌든 현벽장성 입장권을 끊어야 한단다. 내친김에 관리사무소이자 찬청(식당)인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닭볶음과 공기밥, 그리고 몇 가지 음식을 시켰는데, 세월이 다 가도록 도착하지 않는다. 기대가 체념으로 화해 그 체념의 거름으로 절망을 삭일 즈음에 도착한 음식을 보고 박장대소.

이름도 거창한 '눈 덮인 화염산(雪蓋火焰山)' 요리의 실체는 바로 설탕 뿌린 토마토였던 것이다. 하여튼 중국 사람들의 음식 이름 짓는 재주는 알아줘야겠다. 뤄양의 닭발볶음 요리 '봉황의 발톱(鳳爪)'과 어떤 호텔의 푸성귀 음식 '사계풍성(四季豊盛)'에서도 느꼈지만 같은 음식이라도 작명에 따라 접하는 맛이 새삼 다르다.

암각화가 있는 장소는 여기서 흑산 골짜기로 들어가 4Km. 그리곤 도보로 다시 2Km를 걸어야 한단다. 그나마도 중요한 암각화엔 접근 허용이 안 된다는데, 안내인 없이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위치라 하여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을 안내원으로 섭외했다.

▲ 산을 기어오르는 현벽장성.
ⓒ 오창학
흑산으로 진입하며 현벽장성을 발치에서 느끼는데 흡사 성벽줄기가 구물구물 검은 산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가히 '현벽(懸壁)'이라 할만하다. 칼날을 연상케 하는 45도 경사의 능선에 얹혀진 성곽의 원판은 16C에 자위관 서쪽 방어용으로 축성한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 전에 복원해 놓은 지금의 모습에선 어쩐지 보수라기보다는 신축의 냄새가 난다.

▲ 흑산 속에 들어선 백구와 파라곤.
ⓒ 오창학
골짜기에 난 길로 한 2∼3Km쯤 진행했을까? 안내하는 아주머니는 여기에 멈추란다. 더 진행해도 찾을 수 없는 곳이고, 개방하지도 않으니 여기 것을 보아야 한단다. 약속과 달라진 말 때문에 언짢았지만 일단 여기 암각화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 흑산의 암각화. 문양과 패인 정도로 판단할 때 이 모든 게 최근에 조성된 것 같다.
ⓒ 오창학
애걔걔. 암석에 새겨진 그림들의 문양 유형이 고대의 것이 아닌데다 지나치게 선명하다. 아무래도 누군가 진본 암각화의 문양을 이곳에 복제해 놓거나 장난친 것 같다. 발품을 판 보람이 헛되이 되는 순간이다.

▲ 흑산 석각 지대에서.
ⓒ 오창학
신라와 고구려인의 고깔모자는 과연 북방 유목민족의 고깔모자와 관련이 있을까? 이 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은 고깔모자의 문화만 전파 받은 사람들일까, 고깔모자의 전통을 가진 이주민일까? 우리끼리 입을 모아봤지만 소득은 없다. 어차피 눈으로,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니까.

▲ 아주머니는 더 이상은 못 간다 한다. 결국 도록에 나오는 고깔모자 사카족의 석각은 찾지 못했다. 진행방향으로 난 길은 312도로가 뚫리기 전에 둔황으로 향하던 옛 실크로드라 한다.
ⓒ 오창학
앞으로 난 산길을 가리키며 저 길이 지금의 312도로가 뚫리기 전 이곳에서 둔황으로 향하던 옛 실크로드라 했다. 순간 회가 동해 저 길로 이동해 볼까 하는 생각이 인다. 그러나 여기서 둔황은 지금 바삐 출발해도 오늘 안에 갈까 말까 한 곳이고, 이제까지 아주머니의 태도로 볼 때 그리 신뢰할 내용도 아니어서 예정했던 길로 이동하기로 한다.

▲ 안시 가는 길. 이 평탄함이 끝나면 지독한 인내를 요구하는 악몽의 길이 펼쳐진다.
ⓒ 오창학
오후 4시. 자위관을 빠져나가 다시 312도로에 오른다.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싶더니 금세 비포장길로 빠져든다. 지도 상엔 분명 안시까지 도로표지가 있는데? 더구나 아직 건설 중이긴 하지만 그 옆으로 고속도로도 지난다고 표시되어 있고…. 생각해 보니 자위관에서 안시까지의 300여Km 고속도로 공사가 기존의 길을 먹은 것 같다. 그러니 지금 가는 길은 공사 중인 도로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임시로 내 놓은 길이다.

천지사방이 평평한 사막이니 불도저로 쑥 밀면 길이 되기야 하겠지만 과적의 트럭들이 수없이 오가니 길이 길 꼴이 아니다.

'휴게소에 대한 단상'

"화장실 갈 분 계신가요?"

2호차에 무전을 보낸다. 오늘 길을 가는 방식이 참 단순하다. 한없이 간다. 마냥 간다. 배설할 땐 선다. 그리고 다시 간다.

"예, 많습니다."

2호차의 답변. 사정은 1호차도 마찬가지. 오래들 참았다.

"잠시 휴게소에 서겠습니다."

'휴게소'라 말해 놓고 나도 멋쩍다. 휴게소라는 단어가 주는 고정관념. 화장실, 호두과자, 커피, 휴식…. 그런데 요즘은 이 단어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리고 있다. 휴게소-차가 정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터. 상황이 허락하면 목숨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물 섭취도 가능함.

휴게소에 한 무리의 사람이 버스에서 내린다. 란저우로 가는 침대버스는 안시(安西)를 떠나온 지 12시간이 넘었다 한다. 지도상 거리로는 300Km도 채 남지 않았는데 이 거리를 그렇게 왔다면 도로상황이 대체 어떻단 말인가. 스스로 자위해 본다. 저 고물 버스와 우리 사륜구동이 같을 수 없다고. 우린 훨씬 빠른 시간에 안시를 거쳐 둔황에 이를 것이라고.

우리 일행 중 은근히 세바스찬인 나리님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나름대로 중국의 화장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지만 그와 비례해서 갈수록 정도를 더해간다. 차마, 발 디딜 수 없는…. 아… 이쯤 하자. 나리님은 결국 옥수수밭으로 들어간다. 버스에서 내린 중국인들도 제각각 나름의 장소로 흩어진다.

여행 전 아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화장실 문제였다. 그러나 걱정에 비해 잘 적응하고 있다.

'성불(成佛)하세요'

▲ 해가 지는 저녁 8시 30분. 곡괭이와 삽으로 도로를 닦고 있는 노동자들의 손놀림이 계속된다.
ⓒ 오창학
오후 8시 30분. 해가 낮 사이의 열기를 잃고 땅에 내리는 가운데 아직도 도로건설 노동자들이 바쁜 손놀림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다가 더 저물어 어둠에 자리를 내주면 공사 중인 다리 밑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 것이다. 간혹 공사장 주변의 야전텐트에 든다. 놀랍게 변모한 중국 동부 발전 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다.

도시 노동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700위안. 농민의 일 년치 연봉이다. 짐승처럼 길에서 자고 못 먹는 한이 있어도 터전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야 한다. 먼 타지의 도로 공사 현장에 나서야 한다.

서쪽으로 갈수록 해가 길어지고 있다. 시간을 역류하여 나아간다는 미묘한 쾌감. 역류의 방편이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이어서 그 느낌은 더욱 특별하다. 이제 신장으로 들어가게 되면 베이징과는 꼬박 2시간의 시차가 생길 것이다.

밤. 이젠 해가 졌다. 우리의 진행로를 가로막으며 주행하는 화물차들의 꼬리등이 눈에 가득 찬다. 중국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 실크로드를 일주하고 돌아오겠다던 내 여행 계획을 듣고 주변사람들이 경탄의 말을 아끼지 않을 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모르기는 중국에 도착하고 이날까지도 매 한 가지였다.

그러나 오늘, 지금, 자위관에서 둔황으로 향하는 비포장길에서 처절하게 깨닫는다. 앞범퍼가 땅에 박을 듯 처박혔다가 금세 목이 꺾이며 차 꽁무니를 땅에 대일 듯 튕겨 오를 때마다 내가 벌이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짓인가를 뼈저리게 통감한다. 포탄에 패인 듯한 이 요철 구덩이 길에서 벌써 일곱 시간째. 아마 십칠만 칠천 번쯤 깨닫고 통감했을 텐데 아직도 요동은 여전하다. 이러다 성불하지 싶다.

바로 오른쪽에 도로 공사가 한창인데 막상 차가 다녀야 하는 길은 끔찍한 악몽의 길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과 길 듯 구를 듯 엉금거리는 대형화물차들. 끝없이 지속 되는 구덩이들. 길을 두텁게 덮고 바퀴를 삼키는 밀가루만큼이나 부드러운 흙먼지들. 어느 것 하나 녹녹하고 만만한 것이 없다. 대체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정말 둔황으로 가는 길일까, 아님 이승을 떠나 연옥에 이르는 길일까.

▲ 자정에 도착한 안시 외곽의 기사 식당. 밤새 오가는 화물차들을 겨냥해서 24시간 운영하는 것 같다.
ⓒ 오창학
밤 12시. 결국은 안시(安西)에 닿았다. 20세 때 고선지가 안시(당 대에서는 과주(瓜州)에 유격장군에 제수된 역사의 땅에 들어섰는데 뇌는 잠깐의 휴식과 눈앞에 펼쳐진 음식에 눈이 멀었다. 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육신이여.

이곳에서 묵을까도 싶었지만 어차피 고생하는 것, 내일 하루를 벌기 위해 예정대로 둔황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여기서 둔황까지의 80여km는 포장된 도로이니 무난할 터.

안시에서 둔황 가는 길에 들어서니 차체가 요동치지 않는다. 드디어 포장도로에 오른 것이다. 아… 차가 달리는데도 헤드뱅잉을 하지 않고 내장이 털럭거리지 않는다니. 이젠 그것이 이상하다.

시속 80∼90Km. 둔황으로 가는 길은 순탄… 하지 않다. 낮이었다면 이처럼 순탄한 길도 없겠지. 그러나 사위가 사막인 가운데 펼쳐진 외줄기 검은 도로는 가시거리 50m도 허용치 않는다. 오가는 차가 없어 안개등과 더불어 상향등까지 켜 보지만 반사체 없는 검은 허공이 빛을 먹어버리기는 매 한 가지. 신기한 경험이다. 빛은 어둠을 이기지 못한다.

가끔 있는 도로 위의 장애물들은 감으로 피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치라이트라도 달고 올걸. 지붕 위에 얹은 루프텐트 때문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아 그냥 떠나왔는데 지금은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새벽 3시 둔황 도착. 이젠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역사의 땅 둔황에 이르렀다는 감회를 상회한다. 이런 날의 잠은 달고 깊으리라.

실크로드 여행 경로

▲ 이동경로
ⓒ오창학

인천에서 사륜구동 차량 2대를 선적하여 톈진으로 들어가 뤄양-시안-란저우-우웨이-아라싼여우치-둔황-하미-투루판-쿠차-카슈가르-호탄-치에모-아얼진산-거얼무-시닝-란저우-인촨-후허하오터-베이징-톈진-인천으로 입국.

7월 14일~8월 21까지 39일간 14000Km구간을 답사하였습니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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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비웃지 마라'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2]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
오창학(ohmadang) 기자
▲ 자전거를 탄 사막의 양치기 아저씨
ⓒ 오창학
다시 하서주랑으로

엔진의 열이 식기를 기다리는데 자전거를 탄 양을 치는 아저씨가 다가온다. 참 이 동네는 우리 기를 죽이는 사람이 많다. 아침의 오토바이 출현에 이어 이젠 자전거까지. 이 망막한 사막 어디에서 이들은 나타나는 것일까. 까만 얼굴에 금니를 한 아저씨의 배경 뒤로 점점이 흰 양떼가 보인다.

"얼마나 키워요?"
"많지 않아요. 겨우 100마리."

에릭님의 질문에 그가 답한다. 아마 이것이 그가 소유한 재산의 전부이리라. 사막의 가시를 먹여 키우는 양 100마리. 노숙을 한 것인지 그의 자전거엔 두꺼운 외투가 실려 있다.

양을 치는 아저씨의 출현으로 잠시 주의를 돌린 우리는 다시 엔진에 시선을 붙였다. 해결책 없는 고민에 빠진 사이 철없는 아내는 사탕봉지를 들고 양치기 아저씨와 사진을 찍느라 희희낙낙이다. 기계의 원리를 안다면 아내가 과연 저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그래 모르면 뱃속은 편하지.

시간이 흐르는 사이 다행히 엔진 온도계가 정상치까지 내려왔다. 일단 출발해 본다. 부디 별 일 없기를 바라면서.

▲ 아라싼여우치에 들어서며. 지도에 표기된 비중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도시. 몽골인의 땅이다
ⓒ 오창학
오전 11시 40분. 차량 과열지점에서 60Km를 달려 아라싼여우치(阿拉善右旗)에 닿았다. 마을 초입의 주유소에서 예비 연료통을 채운다. 처음 실크로드 일주 계획을 세울 땐 20L 연료통 5개를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출발할 땐 수납할 공간 때문에 2개로 줄였다. 둔황에서 하미까지의 막하연적 사막 횡단이 염려스럽기는 하지만(우회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완전한 사막 지대를 통해 하미에 이르는 계획이다) 평상시의 비상연료 목적이라면 문제가 없을 게다.

예비 연료통을 현창(縣倉;공중에 매단 곳간)에 얹었다. 백구 짐칸 위에 제작해 붙인 선반을 '현창'이라 명명했다. 고향 친구의 이름이다. 처음 여행 계획을 밝혔을 때 그도 함께 떠나고 싶어했다. 결국 삶으로부터 이만큼의 시간을 만들 수 없었던 현창은 후원금을 내 주며 여행의 성공을 빌어주었다.

고마운 건 그가 내민 현금이 아니었다. 내 여행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친구. 내 여행의 성공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머리는 하늘을 동경하는 생활인의 승리라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백구 등짝에 매달린 '현창'은 늘 내 궤적과 함께 한다.

아라싼여우치는 의외로 작다. 사막 한 복판에 있는 마을로는 상당한 규모이겠지만 지도에 크게 표기된 지역이라 가졌던 기대에 비하면 시골 소읍의 규모이다.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몽골인 모습이 완연하다. 그러나 중국의 땅이다. 아직 관광객에게 개방을 허용하지 않은 지역이어서 인지 사람들이 관심이 많다. 길을 묻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차안을 구경한다.

먼지 피해 차에서 식사 해결

▲ 용수산을 넘어 다시 하서주랑으로
ⓒ 오창학
변변한 정비소를 찾지 못해 화물차용 정비부품들이 어지러운 가게를 찾았지만 2호차의 엔진과열 따윈 신경도 쓰려하지 않는다. 겨우 40여 분을 머무르곤 아라싼여우치를 빠져 나왔다.

먼지 날리는 비포장길 100여km. 에어컨과 외부공기유입차단장치의 위대함에 새삼 고개를 숙이게 하는 구간이다. 간간이 트럭이 지나는데 대개는 창문을 열고 있다. 에어컨 없이 안개보다 자욱한 먼지를 뒤집어쓰는 중국 운전자의 인내는 더욱 위대하다.

장예(張掖)를 약 25Km 남겨 둔 비포장길에서 계란과 감자로 간단한 점심을 때웠다. 백양 나무 그늘과 수로가 있어 점심 장소로 삼았는데 그 길로 차가 한 대라도 지나칠 양이면 온통 분진 같은 먼지가 넓게 퍼진다. 식사시간마저도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안에서 각자 해결해야만 한다.

오후 2시 20분. 2300m의 룽서우산(龍首山)을 넘었다. 드디어 마쭝산맥을 넘어 하서주랑으로 복귀한 것이다. 산을 넘자마자 다시 고속도로.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복도답게 탁 트인 전망이다. 오직 왼쪽의 치롄산맥이 우리와 함께 달린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맥은 흡사 수묵화의 정경이다.

이 교통로, 제국의 목구멍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길 위에 뿌려졌던가. 장건의 서역 파견 이후 서한은 흉노와 수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기원전 127년 한무제는 장군 위청에게 3만 기병을 주어 내몽고 지역을 점령토록 했고 기원전 121년에는 곽거병에게 기병 1만을 주어 하서 지역을 점령했다.

200Km가 넘는 고속도로 구간은 탄탄대로였지만 2호차 과열을 막기 위해 시속 100Km로만 꾸준히 유지한다. 2호차 파라곤은 비포장 험로를 지나고 산을 넘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다행히 별 탈 없이 견뎌주고 있다.

▲ 역사의 공간 하서주랑. 이 길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는가. 아련한 치롄산맥이 끝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 오창학
자위관을 약 50Km 남겨둔 시점에서 국도로 접어드는데 삼륜차와 화물차, 자전거,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로 버무려진 터라 진행이 더디다. 그러나 어떠랴, 우린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오후 5시 54분. 주취안(酒泉) 근처 주유소에서 다시 주유. 하루에 가득 주유가 두 번이다. 주천. 곽거병이 흉노를 복속 시키고 성공적으로 하서주랑을 확보하자 한무제는 상으로 술 10통을 내렸다지. 허나 전 병사가 먹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정의의 곽거병이 제 입만 챙길 위인도 아니어서 그 술을 샘물에 부어 모든 병사가 나누어 마셨단다. 그래서 생긴 지명이 주천, 술의 샘이다.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때로 역사로 둔갑한다. 그 둔갑은 때로 우연에 의해, 때론 의도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오후7시. 자위관의 숙소에 도착. 정말 오래간만에 해를 보며 목적지에 입성했다. 오늘 이동거리 450Km. 속 불편한 남편을 위해 종일 운전대를 놓지 않은 아내가 고맙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 오창학
다음날 아침. 속이 더욱 악화되어 아침밥을 거르다시피 죽 한 잔을 마셨다. 09:40분 숙소를 나서 1시간여 만에 자위관 성에 도착.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서부종점이고, 고대둔사의 중요한 진이다. 개인적으로 꼭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극(極)’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벽을 친 성곽 또한 묘한 끌림이 있다. 극에 위치한 성곽은 더더욱 매력적이다.

발해만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는 7200Km 장성(흔히는 6000Km라고도 한다). 동쪽 끝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한 장성은 중국 대륙을 둘로 나누며 숨가쁘게 달려 이곳 자위관에 닿는다.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있고 '세계최대의 무덤'이라는 악평도 있으나 인간이 이룩한 엄청난 흔적임은 사실이다.

그 장성의 끝자락에 섰다. 분단의 현실이 아니었던들 나와 백구는 배에 실려 바다를 넘지 않고 압록강을 넘어 산하이관을 거쳐 이곳에 이르렀을 것이다. 다음번 자동차 여행은 반드시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나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내 살아 생전에 중국땅을 통해 백두산에 오르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반드시 육로를 통해, 내 차로 그곳에 이를 것이다.

▲ 자위관. 무엇이든 극에 선 것들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 오창학
자위관은 남으로 치롄산백을 두고 북으로 룽서우산맥과 마쭝산맥을 둔 채 하서주랑의 중간 부를 틀어막고 있다. 동서교통로의 요지이고 실크로드를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으로 항상 400여명의 병력이 상주했던 군사요충지다.

지금의 건축물은 명대에 세운 것으로 옹성이 둘러싸고 있는 광화문과 유원문을 중심으로 내성에 십 수 채의 누각이 있다. 성루 건물에 ‘천하웅관(天下雄關)’이란 현판이 눈길을 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에서 시작한 장성은 이곳 천하웅관에서 끝을 맺는다. 결국 중화인들이 생각하는 ‘천하’는 여기까지였을까?’

ⓒ 오창학
자위관을 둘러보는 몸이 정상이 아니다. 복통이 현기증을 수반하고 몸을 무겁게 한다. 그간 서쪽으로 나아갈수록 제대로 된 끼니를 기약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과 싸고 호화로우면서도 한국에 비해 턱없이 싼 물가가 과식을 유도했던 탓일까? 중국에선 음식을 남겨야 잘 먹었다는 표시고 예의라는데 음식을 버리는 게 죄처럼 느껴져 마구 치워댄 한국의 습성 때문일까? 며칠을 끌어온 속병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날이다.

햇살은 내려꽂히는데 모자조차 무겁게 느껴져 쓸 수가 없다. 그러니 몸은 얼마나 천근만근이다. 얼마나 와 보고 싶었던 자위관인데···.

만리장성에서 떠올린 군대의 기억

조지훈의 시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병이 내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느라 그런 줄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이기에 병의 낮은 속삭임에 귀 기울일 수 없다. 잘 가라 친구. 생각 내키거든 다음에 찾아 주시게. 여정을 마친 후라면 그땐 부담 없이 자네를 대접할 터이니.

▲ 사막을 가로지르는 만리장성.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라면 이 곳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묘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오창학
아픈 몸으로 누대 위엔 오르지도 못하고 성벽에 기대 만리장성을 바라본다. 흔히 보는 석벽의 장성이 아니라 짚과 흙을 개어 켜켜이 쌓은 담장이다. 사막에서의 장성이란 적군의 말과 보급품인 양떼가 뛰어넘지 못할 정도면 족하였을 것이다.

아래로 보이는 전경이 너무 낯익은 모습이다. 대한민국 대부분 남자들이 한 번은 느껴봤을 법한 풍경. 사막을 가로지르는 장벽과 끝없이 펼쳐지는 무인지대의 땅. 그저 ‘삭막하다’는 감정 말고 왠지 눈물겨운 정서에 휩싸인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향을 떠나 멀리 변방에서 선 병사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하루도 이러하였을까?

“헌혈. 그 거무죽죽한 빛깔의 내용물이 비닐주머니에 담기는 걸 보며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겉이야 군복을 입었거나 말거나 머리칼이 짧거나 길거나 속 안의 빛은 여전하다”-1993.8.16 일기 부분

“배가 부르다. 나는 이제 죽어도 좋으리라”-1993.8.20 일기 부분

“숟가락과 컵에 노란 테잎이 붙었다.‘눈병환자 전용’ 벌써 서너 명의 전염자가 나타나고 있다. B연병장 모퉁이 수도꼭지를 사용하는 나는 격리자다.”-1994.8.17 일기 전문

얼룩무늬 군복 속에 검게 그을린 피부 뿐 아니라 내면의 의식까지 변해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무렵, 헌혈하던 날의 기억과 화장실에 숨어 초코파이를 까먹던 날, 눈병이 걸려 단체 속에 있으면서도 격리의 생활을 해야 했던 기억들이 눈에 아린다.

지어낸 얘기처럼 누구나 안고 있는 ‘쵸코파이 한 상자’의 기억과 전역 후 꾸어 대던 ‘재입대의 악몽’처럼 수백 년 전 여기 수비병들도 공통의 기억들이 있었을까? 어딘들 없었으랴.

'취해 사막에 눕다'

이곳 흙의 건축물 속에서 기법의 우아함과 인간 의지의 경이로움을 읽지 못하고 변방 수비병의 아픈 마음만 읽고 간다. 이것이 둔황의 양관과 옥문관을 꼭 가 봐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취해 사막에 눕다. 전장에 살아 돌아온 이 몇이런가.'

▲ 취와사장. 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그대여 비웃지 마라. 예부터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자 몇이더냐
ⓒ 오창학
왕한의 시 ‘양주사(凉州詞)’ 한 장면이다.

葡萄美酒夜光杯 맛 좋은 포두주 야광배에 가득 담아
欲飮琵琶馬上催 마시려니 말 위의 비파소리 재촉한다
醉臥沙場君莫笑 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그대여 비웃지 마라
古來征戰幾人回 예부터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이 몇이더냐.

'취와사장', 취해 사막에 눕다. 어쩐지 ‘체념’의 냄새가 아닌 ‘결의’의 냄새가 난다. 비장미. 저 마음을 알까?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자 적으니 그냥 술이나 마시고 오늘 눕겠다는 저 마음을. 이곳에 서본 자는 안다. 오로지 그 바삭거리는 모래와 그 먼지 위에 쏟아지는 햇살 아래 서본 자만이 저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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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위관 성루
ⓒ 오창학
자위관을 나와 기념품점에서 아내가 야광배를 샀다. 왕한의 시에서 ‘맛나는 포도주’를 가득 담았던 그 야광배. 빛을 가리고 실험해 봐도 야광은 아닐 성싶다. 이제 서쪽으로 갈수록 길은 험해질 텐데 짐짝 사이에서 저 잔이 무사할까? 두고 볼 일이다. 내 취해 사막에 쓰러져도 그대여 비웃지 마라. 예부터 전장에 나가 살아 돌아온 이 몇이더냐. 내겐 사막이, 그리고 이 여정이 전장이다. 야광배를 짐 속에 고이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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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에서 야영하기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1] 내몽고 고비사막 바단지린에서의 하룻밤
오창학(ohmadang) 기자
다시 2호차를 만나다

아... 한 20여 Km 달린 지점에서 정차 중인 2호차가 보인다. 그러나 우릴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고 다시 주행한다. 제발 만나게만 해달라던 그 간절함이 같은 질량의 분노로 변하는 순간.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가시는 겁니까! 그대로 가면 아라싼여우치 나온답니까!.”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또 흥분했다.

사막이어서일까.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장소라서? 내 몸이 아파서일까. 통증만큼이나 세포가 곤두서서? 그 때문에 사막에서 일행의 안위나 동태를 무시한 행동으로 확대해석한 것일까?

자포님이 다가와 사과를 한다. 대화에 빠져 그만 뒷차를 못 봤다고. 그런데 얼굴을 펼 수가 없다. 어제의 소심에 오늘의 다혈질까지. 이제 들킬 건 다 들켰다.

▲ 고비 사막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백구와 파라곤
ⓒ 오창학

오후 6시 40분 아라싼여우치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애초 아라싼여우치를 지나 야영지를 찾을 생각이었으나 그곳까지 도착하면 해가 질 것 같아 그냥 해가 있을 때 야영지를 찾기로 했다. 사막에 바퀴를 넣는 순간 아까의 일들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 되었다. 만났으니 그만이고 이 모진 곳에 같이 있으니 그 아니 든든한가.

타마리스크의 가시 줄기들이 하체를 긁어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보기에는 평지이건만 굴곡이 심한 지면은 차체를 요동하게 한다. 다행히 지표면이 단단한 편이어서 바퀴가 빠지는 상황은 아니다.

이건 꿈이다. 드디어 내가 사막에 왔다. 한반도에서 백구와 함께 길을 나선 지 보름. 기어이 고비 사막에 함께 섰다.

약 15Km쯤 지나 지대가 평평한 곳에 둥지를 튼다. 위도 38도 58분 55초, 경도 102도 16분 32초. 묘한 경험이다. 이렇다 할 바위 한 줄기, 나무 한 그루가 없다. 이 문명의 이기가 아니었다면 수치로나마 내 머문 자리를 남길 수 있었으랴.

▲ 사막에서의 야영 준비. 공동실로 사용할 스크린 타프가 설치 되고 대강의 진용이 짜진다. 그 시각 사내들이 설영으로 분주한 사이 장부를 정리하는 아내
ⓒ 오창학

지금은 잔잔하지만 언제 불지 모르는 사막의 모래바람에 대비해 차 두 대를 기역자 모양으로 붙이고 그 안에 대형 텐트(스크린 타프)를 친다. 철봉씨까지 포함해 일행 일곱이 모두 들어앉을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다.

1호차 백구와 2호차 파라곤의 지붕엔 루프텐트가 달려 있다. 잠금장치를 열고 루프텐트 뚜껑을 들어 올리면 완성되는 텐트. 바닥에 패드가 깔려 있어 등이 편안하다. 지붕 위에 설치되는 까닭에 야생동물이나 파충류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지면의 냉열기와 습기로부터 보호해 최적의 야외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카펜션'이다.

그런데 2인용인지라 나와 아내, 에릭님과 교수님이 루프텐트를 사용하고 나리님과 자포님은 스크린 타프에서 야전침대를 펴고 자기로 했다. 철봉씨는 자신의 1인용 텐트를 폈다.

▲ 사막의 화장실 설치. 사막에서 지평선 끝까지 가 일을 보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장비다. 앞에 삽이 꽂혀 있다면 내부에 사람이 없다는 뜻. 삽이 없다면 누군가 안에서 일 본 자리를 묻고 있다는 신호
ⓒ 오창학

화장실을 설치한다. 여기는 사막이고 앉으면 그 자리가 사막일 터에 무슨 웬 화장실? 무리 중 성별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아니 설사 동성끼리의 결집체라 해도 큰일 보는 모습을 빤히 노출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시선을 피하려 지평선 끝까지 갈 수는 없잖은가(여기는 일망무제의 사막이다).

이런 때 유용한 설비가 이 화장실이다. 화장실 설치 1단계. 삽으로 땅을 판다. 이 구덩이는 1회 사용 때마다 조금씩 덮일 것이며 내일 이 자리를 걷을 땐 평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화장실 설치 2단계. 화장실을 가방에서 꺼내 던진다. 그러면 알아서 펴진다. 3단계. 팩을 박아 고정한다. 4단계. 화장실 앞에 삽을 박아 표지를 세운다. 화장실 사용 시 가지고 들어가 일 본 자리를 묻을 때 쓴다. 나올 때 가지고 나와 화장실 앞에 다시 박아 세운다.

즉 화장실 앞에 삽이 박혀 있다면 내부에 사용자가 없다는 뜻이고 삽이 없다면 누군가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때는 화장실 주변 범접 금지. 원래는 해변에서 탈의 및 사워 용도로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이렇게 사용하니 실용만점이다.

▲ 고비 사막의 석양.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는 처음 본다. 일망무제의 사막 바다
ⓒ 오창학

오후 8시 30분. 해가 지고 있다. 묘한 일이다. 왜 젊은 사람이 일출보다 일몰의 정경에 더 끌리는지.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감, 휴식에 대한 기대. 그러면서도 저 해는 내일 또 뜨리라는 희망. 뭐 이런 것들이 복합된 감흥 때문일게다.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처음 본다. 처음이 아닌가? 프랑스의 벌판에서 보았던가? 모르겠다. 지평선 너머 일몰에 대한 선험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사유 공간에 저 광경이 처음 각인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늘은 참 별 것 아닌 많은 것들에 감동한다. 파삭파삭하게 건조한 흙, 풀을 가장한 가시 나무, 땅 빛과 똑 같은 보호색의 도마뱀, 매일처럼 지는 해, 푸석푸석한 바람. 그리고 그곳에 선 나.

▲ 뭐니뭐니 해도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 풍성한 사막의 저녁만찬을 여행 내내 그리워하게 될 줄을.....
ⓒ 오창학

에릭님이 손수 요리를 했다. 우웨이에서 장 본 푸성귀와 육류로 그럴싸한 저녁 식탁이 꾸려지고 한국에서 수송해 온 와인잔까지 등장한다.

부른 배로 텐트 밖에 섰는데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의자에 앉아 넋을 빼고 쳐다보다 야전침대를 깔고 아예 누워서 감상한다. 지면의 서에서 동까지가 모두 하늘이고 그만큼의 공간에 빼곡히 별이 열렸는데 손을 뻗기라도 할 양이면 우수수 털어낼까 두렵다.

천황봉 일출을 바라고 지리산 세석평전을 오르다가 별에 머리를 찧을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숙이던 기억 이래 얼마만의 일인가. 이 기억을 오래 남기고 싶어 사진기를 집어 들었는데 감도 1600으로도 별이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그저 이 장면을 가슴에 담을 수밖에.

▲ 야영의 아침
ⓒ 오창학

별구경에 지쳐 더부룩한 속을 안고 루프텐트에 들다. 사막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 천막 소리를 배경으로 잠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 새 아침이다. 사막의 밤을 누가 춥다 하였는가? 잔뜩 긴장해 동계용 침낭까지 챙겼는데 한 쪽 다리만 침낭 속에 넣은 채 반바지차림으로 잤다. 현재 고도가 1390m임을 감안하면 여름철 고비사막의 일교차는 견딜만 하다.

애석하게도 일출은 놓쳤다. 내가 늦은 것인지 해가 얼렁뚱당 솟았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江風索我吟 강바람 날더러 시 지으라 하고
山月喚我吟 산 달은 날 불러 술 마시게 하는도다
醉倒落花前 취하여 진 꽃 위로 거꾸러지니
天地爲衾枕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구나


남송4대가 양만리(楊萬理)의 시가 딱 떠오르는 장면이다. 나리님과 자포님이 텐트를 벗어나 사막 귀퉁이에 야전침대를 펴고 나란히 노숙했다.

▲ 멀쩡한 텐트를 놔두고 자포님과 나리님은 노숙을 감행했다. 전갈이 오가는데.....자포님은 완벽한 노숙자의 용모다
ⓒ 오창학

'취하여 진 꽃 위로 거꾸러지니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다...'

아름다운 말이다. 내가 운영진으로 참여하는 '오프로드 캠핑(http://cafe.daum.net/offroadcamping)'의 깃발 문구이기도 한데 나리님과 자포님의 자태가 딱 그 모습이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은 배경 뒤로 오토바이 한 대가 보인다.

몽골식 양탄자 안장 장식이 얹힌 현지인의 오토바이. 설마 이런 곳에 인적이 있으랴 싶은 곳에 둥지를 틀었건만 이렇게 간단하게 손님이 찾아들었다. 하하. 우리는 이 많은 짐을 꾸려 이토록 요란하게 방문해야 했던 곳을 이 양반은 양떼 풀어놓을 곳을 찾으러 달랑 오토바이 한 대로 움직였다. 지평선 저 쪽에 마을이 있단다.

당신이 있어 사막이 아름다워

▲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같이 있기 때문이다
ⓒ 오창학

아내는 느지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참 지칠 줄 모르고 즐겁다. 아내가 빈 맥주캔을 내 귀에 대어준다. 소라에선 바다소리가 난다지만 맥주캔은 왜?

"사막 소리가 나."
"사막 소리?"

정말이다. 말로 형언키는 어렵지만 모래 쓸리는 소리, 그 모래 위를 지나는 바람 소리, 그 바람 위에 내리는 햇살 소리가 어우러지는 느낌이 분명 사막의 소리다.

"사막이 왜 아름다운지 아나?"

아내에게 물었다.

"물이 있어서?"
"당신이 있어서..."

아내가 까르르 웃는다. 나는 진담인데... 이 황량한 벌판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당신과 함께 하기 때문인데, 무엇을 하든 둘이어서 행복한 건데.

'힘 내라 파라곤!'

▲ 가자 아라싼여우치로
ⓒ 오창학

아쉬움은 남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곳도 우리의 터는 아니기에 짐을 꾸렸다. 아라싼여우치를 향한다. 살포시 빠지는 바퀴 때문에 '4H' 상태로 움직였다. 아라싼여우치를 60여 Km 남겨 놓고 다시 도로에 올랐다.

4륜을 풀고 한껏 가속하려는데 2호차에서 무전이 온다.

"1호차 잠깐만요!"

▲ 아, 제발......과열로 멈춰버린 2호차 파라곤. 완치되었다 믿었던 한국에서의 증상이 다시 도졌다
ⓒ 오창학

아, 이를 어쩌란 말인가. 2호차가 엔진과열로 정차하고 있다. 과열이라니? 오늘 겨우 얼마를 움직였다고. 불안하다. 한국에서 사자평 오를 때 이런 현상을 겪고 나서 엔진 헤드를 비롯해 관계부속을 다 갈았는데 다시 그 증상이 온 것은 아닐까?

내 방정맞은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며 2호차 파라곤에 다가갔는데 울컥울컥 냉각수를 토해내는 모습이 영락없이 그때의 증상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하필이면 사막 중간에서...

아, 아라싼여우치까지만 가면 정비소가 있을까? 정비소가 있다면 이 증상을 잡을 수 있을까? 당장 사막을 빠져나갈 일도 걱정이지만 아직 2/3도 더 남은 이후의 여정이 두렵다.

'힘 내라, 파라곤! 우린 할 수 있을 거야. 해 내야 돼.' 녀석의 몸체를 어루만졌다. 우린 여길 나갈 수 있을까?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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