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걸으라, 네 뼈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으니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8] 둔황에서 투루판 가는 길... 2호차의 좌절
오창학(ohmadang) 기자
사막에 있어도 사막이 그립다

아침. 막하연적(莫賀延磧)을 관통해 이동하는 방법을 접고 둔황에서 류위안(柳園)까지 나가 312도로를 타고 하미(哈密)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어제 정비소에서 써머스텟을 손 봤지만 차량의 상태가 검증되지 않아 위험수를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오전 8시 30분. 숙소를 나서 류위안 가는 도로에 올랐다. 장장 120km에 달하는 사막 도로. 이 길에서 교수님이 백구의 운전대를 잡으셨다. 어제 포기했던 사막횡단을 생각하면 오늘 운전하고픈 의욕이 없다.

▲ 사막횡단의 길을 접고 포장도로를 따라 우회하기로 한 날. 교수님이 운전대를 잡으셨다
ⓒ 박재익
교수님께서 살살 심사를 긁으신다.
"오 대장이 저런 사막길을 달렸어야 하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다. 어제 건너지 못한 막하연적은 오래도록 응어리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길 놔두고 꼭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 없잖소?"
"좋은 길 놔두고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전 이 길을 떠난 것입니다요."
"그런데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난 어제 좀 무섭더라고. 사막에서 차가 빠지면 어쩌나 싶어서…."
"안 빠진다는 걸 보여드리지요."

▲ 아아....사막에 있어도 나는 사막이 그립다
ⓒ 박재익
순박한('어리석은'의 이음동의어) 나, 기어이 교수님으로부터 운전대를 넘겨받아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사막으로 뛰어든다. 무전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도로 위의 2호차와 나란히 주행한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린 아이처럼. 아... 사막에 있어도 나는 사막이 그립다.

류위안을 지나 312도로에 진입하다가 닝샤후이주(寧夏回族)자치구 출신의 청년을 태웠다. 진입로에서 음식봉지를 들고 차를 세우던 청년. 우루무치의 따반청에서 오던 중 화물차가 고장이 나 먹을 것을 사러 나왔단다. 일행들은 도로가에서 차를 고치는 중이라 하고.

▲ 신장 가는 길. 사막으로 이루워진 황무지뿐임에도 변화무쌍한 얼굴이다
ⓒ 박재익
얼굴이 거무잡잡하고 눈이 큰 청년은 순박해 보인다. 청년의 성은 '리(李)' 뒤에 나란히 앉은 아내의 성도 '리'라 소개하니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는다. 하미과를 싣고 닝샤(寧夏) 가던 중이라는 그. 따반청에서 하미까지의 도로상태를 물었더니 지금처럼 좋은 길이라기에 적이 안심이 된다. 어차피 사막을 넘는 게 아니라면 빨리 목적지에 가 보자는 마음으로 아예 투루판까지 820km의 길을 오늘 하루 여정으로 잡은 터라 도로 상태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내친김에 따반청에서 왔으니 '따반청 꾸냥(達坂城姑娘)'을 알겠다 물었더니 자신은 신장 노래는 하나도 모른다 한다. 그래서 철봉씨에게 아느냐 물었더니 아예 노래로 화답한다.

"따반청 돌길은 단단하고 평탄해
수박은 크고 달아요
저기 가는 아가씨 머리칼은 길고 두 눈은 맑고 예쁘구나

그대여 시집 갈 땐 다른 사람 말고 부디 내게 오구려
백만금 재물과 혼수를 자지고 자매와 함께 마차를 타고 내게로 오구려"


물론 중국어로 불렀다. 내용이 이렇다는 것이고. 1950년대 하방(중국에서 당원과 국가공무원을 농촌과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케 하고 도시의 학교 졸업생들을 변경지방에 배치하여 그곳에 정착케 함으로써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벽을 헐고 지식인집단으로 하여금 낙후된 변경지방의 농촌 근대화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운동)된 베이징 음악가 왕뤄빈(王洛賓1913-1996)이 작사·작곡한 민요로 지금은 신장성 제일의 민요가 되었다.

'리'가 내렸다. 그와의 대화 그리고 철봉씨의 노래로 사막을 건너지 못해 굳었던 마음이 풀렸다. 그래 사람은 우울할 때 대화를 해야 해.

내겐 아직도 동투르키스탄인 신장웨이얼 자치주

▲ 싱싱사 요금소. 신장웨이얼 자치주로 넘어가는 경계라서 위구르 문자가 함께 적혀 있다
ⓒ 오창학
얼마가 가다 도로 요금소에 닿았는데 간판을 보니 '싱싱사(星星峽)'이다. 그 옆에 난생 처음 보는 문자가 병기되어 있다. 위구르 문자다. 드디어 간쑤성(甘肅省)을 벗어나 신장성(新疆省)에 접어드는 기점에 선 것이다.

중국 전체 면적의 1/6, 한반도의 크기의 7배가 되는 황무지 땅. 성도(省都)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대표적인 민족인 위구르(웨이얼)족을 비롯해 47개 민족 1680만명이 살고 있는 곳. 만감이 교차한다. 내 머릿속에서 이 황무지는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이다. 그러나 현실은 신장웨이얼(新疆維吾爾) 자치주로 존재한다.

본시 투르키스탄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중앙아시아라 할 수 있는데 파미르 서편의 서투르키스탄은 구 소련의 붕괴로 여러 나라로 독립되어 있지만 파미르 동편의 동투르키스탄은 여전히 중국의 지배에 놓여있다. 새로 얻은 영토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으로.

▲ 신강(新疆). 청이 중가리아를 복속하여 얻은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으로 내게는 여전히 동투르키스탄의 땅이다
ⓒ 박재익
청나라가 북방 몽골초원과 텐산산맥 일대의 유목국가 중가리아를 강제 복속하여 얻은 영토이다. 지배와 수탈에 맞서 투르크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한 1864년 봉기로 10년간 독립국을 선언했었지만 청에 진압되었다. 그 후 1944년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세워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도 '중화인민공화국'에 흡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지금도 위구르족 독립 운동의 기운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중국의 통제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으며 이곳의 천연가스와 석유는 더더욱 중국이 동투르키스탄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꾸준한 한족화 정책이 진행되어 한 때 75%를 넘던 위구르 족의 비중은 45%에도 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반목을 빗대어 위구르족은 이렇게 말한다.

"위구르족은 어머니가 낳고 한족은 기차가 낳는다."

중국이 변경 지대를 향한 철도와 도로 확충에 열을 올리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은 아닌가보다.

오후 2시. 둔황으로부터 400km를 달려 하미에 닿았다. 하미과의 본고장에 왔으니 하미과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2.5위안짜리 하미과 한 통을 곁들여 점심식사를 한다. 원래 이곳에서 300여km 더 가야하는 싼싼(善善)현이 원산지이나 청대에 황궁에 진상품으로 올리면서 하미지역의 과일이라 '하미과'라 둘러댄 것이 이름의 유래다.

중국의 물가가 한국에 비해 많이 싸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음식, 특히 과일 먹을 땐 여실히 느낀다.

2호차 파라곤, 다시 멈춰서다

▲ 하미를 나서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 상태가 좋다. 이 추세면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투루판에 도착할지 모른다
ⓒ 오창학
오후 3시에 다시 하미를 뜬다. 투루판까지 이제 400여km 남짓. 도로상태가 지금까지와 같다면 오늘은 해 지기 전(어차피 밤 9시가 훌쩍 넘어야 어두워지니까)에 투루판에 도착할 것 같다. 아직까진 어제 과열되었던 2호차도 별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

하미를 떠난 지 1시간. 얼푸(二堡) 요금소 지나 20km 지점, 그러니까 하미로부터 80km 지점을 지나는데 뒤의 2호차가 스르르 멈춘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정차인가? 거리가 멀어져 무전이 되지 않는다. 1호차를 돌려 2호차가 정차한 곳으로 접근했다.

▲ 다시 2호차 파라곤의 과열. 지표온도가 62도까지 올라가는 신장의 사막구간에서 발이 묶였다. 에릭님처럼 손수건으로 피부를 가리지 않으면 데인 듯 따가운데 정비담당인 자포님은 염려와 고민으로 아무 감각이 없다
ⓒ 오창학
이미 2호차의 보닛을 열고 있는 자포님의 표정이 어둡다. 김을 뿜으며 냉각수가 넘쳐흐른다. 다시 엔진과열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둔황에서 써머스텟을 손 본 건 소용없는 짓이었나 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엔진이 식기를 기다리는 일. 그 다음은? 하미로 다시 돌아가 정비를 할 것이냐, 아니면 싼싼까지 진행해 거기서 정비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온 길을 되짚어 가야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아직도 200km가 넘게 남은 싼싼보다는 80km의 하미가 더 가깝다. 도시의 규모로 봐도 하미쪽이 훨씬 크니 제대로 된 정비소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력운행은 엔진을 더 상하게 할 것 같아 견인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거리가 좀 있는지라 1호차에 견인줄을 걸어 운행하는 건 불편할 것 같아 아예 하미에서 견인차를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하미에 도착해 정비소 찾는 시간도 줄일 수 있고.

다행히 휴대전화가 터진다. 사막을 가로질러 놓은 도로인지라 송신소 가까운 곳은 통화가 되는데 어떤 곳은 되지 않는다. 되다가도 도로 아래로 내려서면 통화가 끊기는 곳이 많다.

살을 꼬집는다고나 할까. 따끔따끔하게 때린다고나 할까. 햇살 아래 몇 분을 서 있으면 얼먹은 사람처럼 벙벙해진다. 온도계를 땅에 내려놓으니 지표면 온도가 62도까지 올라간다. 역시 신장의 햇살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불에 데인 듯 따가운 지경인데 정비담당인 자포님은 걱정이 깊어 아무 감각이 없다.

▲ 견인차라고 온 게 구형 승용차다. ‘견인차’에 대한 의사소통의 문제였을까. 우리가 기다린 건 ‘견인 가능한 차’가 아니라 ‘견인 전용 차량’이었다. 이럴 것이었으면 사막 뙤약볕을 견디며 2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1호차로 끌고 갔을 것이다
ⓒ 오창학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견인차의 도착을 기다리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전화를 다시 해도 가고 있는 중이라는 대답뿐. 2시간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견인차가 왔다. 세상에… 기껏 견인차랍시고 달려온 게 우리 나라 포텐샤급 구닥다리 승용차다.

이걸 도대체 문화적 차이라고 해야 하나 황당무계라고 해야 하나. 저거에 끌려갈 마음이었으면 처음부터 1호차로 끌었지 이 뙤약볕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겠나 말이다. 소위 '레카차'를 요구한 것인데 기사 말에 의하면 하미 어디에도 그런 '레카차'는 없단다.

우리의 실망스런 시선을 몸으로 느꼈던지 '견인차'를 표방한 승용차 운전자가 말한다.

"엔진을 힘 있는 것으로 바꿔서 문제없습니다."

▲ 견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힘 있는 엔진’을 가진 견인차가 과열로 퍼졌다
ⓒ 오창학
이 말이 무색하게 견인한지 20분이 되지 않아 '힘 있는 엔진'을 가진 견인 승용차에서 연기가 난다. 과부하 때문에 엔진이 과열된 것이다. 산 넘어 산, 물 건너 물이다. 도대체 오늘 일진은 왜 이러는가. 이러다 1호차가 저 두 차를 끌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운데 승용차 운전자가 우리 물통을 가져다 열심히 엔진을 식힌다.

마음이 답답하다. 사막횡단과 오지탐험이라는 거창한 계획은 고사하고 포장도로조차 운행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젠 어찌해야하나… 기일을 정해놓고 길을 움직이는 게 이토록 부담스러울 줄이야. 여기서 구멍 나는 일정은 뒤 일정에 줄줄이 차질을 초래할 게다. 차량의 문제로 이제 얼마의 시간을 지체해야할지, 또 남은 타클라마칸 구간과 아얼진산, 그리고 고산지대인 칭하이성은 과연 무사히 지나게 될지….

▲ 하미의 정비소에선 실린더 개스킷 문제로 진단한다. 제발 이번엔 오진이 아니기를.....
ⓒ 오창학
저녁 7시 50분, 정비소에 도착했다. 역시나 여기에서도 여러 명의 정비사들이 에워쌌고 그 중 우두머리가 진단을 내린다. 엔진 실린더의 개스킷이 파손되어 그렇단다. 매우 자신 있는 말투다. 그래서 더 못 믿겠다. 이들은 대체 자신 없을 때가 없다.

중국인 기술자의 말대로 개스킷 문제였으면 좋겠다. 우루무치에 쌍용 엔진을 취급하는 부품업체가 있으니 그 쪽에서 조달하면 되고, 안 되면 만들어 쓰면 된다 한다. 제발 이번에는 2호차의 엔진 문제가 완전히 잡히기를.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은데 걱정이 많다.

일어나 걸으라, 너의 뼈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으니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하미역 근처에 숙소를 잡아 들어왔다. 계산대에서 아침식사가 8시부터 10시까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대개 6시부터 8시까지였는데 여긴 왜 이리 늦지? 그런데 가만 보니 퇴실시간도 오후 2시다. 다른 데 보다 2시간이나 늦다.

오호라! 생각해보니 여긴 신장이다. 신장은 베이징과 2시간의 시차가 나지만 중국은 원칙적으로 베이징 시간을 표준시로 정해 전국을 통일하여 쓰고 있으니 아침 시간대가 이렇게 늘어지는 것이다. 이런 표준시 정책에도 신장사람들은 신장 시간을 쓰기도 한다는데 시간표현에 유의할 일이다.

늦은 밤. 새벽 1시인데 저녁밥 먹은 지는 겨우 3시간이 지났다. 좀체 잠이 오질 않는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겐 이 여행이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아내와 내가 꾸어온 소중한 꿈이고 반드시 성취해야할 젊은날의 희망이므로.

그렇지만 안절부절할 건 없잖은가. 지금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다친 사람도 없고 그저 차 한 대의 엔진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 아닌가. 아직 1호차가 남아있다. 내 누누이 사람들에게 이르지 않았던가. 사람을 죽이는 건 '죽음'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지금은 희망을 꿈꿀 때다.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대의 뼈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으니."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경구를 곱씹으며 잠을 청한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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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사막에 눈물을 떨구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7] 옥문관을 나서 사막으로
오창학(ohmadang) 기자
'진정한 출새(出塞) 위먼관 밖'

내가 가진 지도엔 양관에서 위먼관(玉門關)에 가려면 다시 둔황으로 돌아가 둔황에서 위먼관으로 갈라지는 길만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둔황까지 70Km, 둔황에서 위먼관까지 90Km니 다시 150Km를 에돌아야 위먼관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철봉씨가 입수한 조금 더 자세한 지도엔 양관에서 위먼관으로 직접 사막을 관통하는 도로가 미약하게 표시되어 있다. 아마 비포장도로이거나 좁은 길일 것이다. 설사 사막길이라 해도 80Km가량은 직선횡단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으리라 생각해 직접 위먼관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 둔황을 경유하지 않고 양관에서 직접 사막을 가로질러 위먼관으로 가는 도로
ⓒ 박재익
약간의 고민 끝에 길을 탔는데 의외로 상태가 좋은 도로다. 도로의 중앙은 포장되어 차 한 대가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폭이고 양쪽 갓길은 비포장길로 다져져 있다. 만약 맞은 편에서 차가 온다면 바퀴 한 쪽은 포장노면에, 나머지 한 쪽은 비포장 노면에 걸치고 교행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사막에서 맞은편 차를 만날 턱이 있나. 온 도로를 독점하고 편안하게 몰아간다. 차도 보행자도 감시카메라도, 심지어 굽은 길조차 없는 사막의 아우토반이다.

중간에 오아시스지대를 한 번 관통한 후 몇 차례 방향을 꺾어 위먼관 가는 길에 올라탔다. 얼마를 달린다 싶더니 멀리 위먼관이 보인다. 워낙 먼 거리여서 작은 봉수대인가 싶었는데 차가 가까이 접근할수록 위먼관임을 확신하겠다. 양관에서 길을 달린 지 한 시간.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 위먼관에 도착한 것이다.

▲ 위먼관 가는 길. 거의 위먼관에 닿을 무렵 다시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 오창학
한 낮의 햇살에 아랑곳없는 흙덩이. 더위와 햇살뿐이겠는가. 2천 년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켜온 흙덩이다. 한대 이후 양관과 더불어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던 위먼관. 낮 더위에 노랗게 익은 사방 20여m 높이 10여m의 토성을 넘어서면 비로소 실크로드의 또 다른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옛날에도 위먼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라 하지 않았던가.

호탄 지역의 옥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옥문(玉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관문은 한대에 설치된 것으로 8세기 혼란기의 당대엔 이곳에서 세력을 잃고 둔황 동쪽으로까지 밀려갔다.

▲ 위먼관
ⓒ 오창학
현장은 서역북로를 이용해 인도로 들어갔다가 서역남로를 이용해 당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위먼관을 거쳐 나가 양관으로 들어온 셈이다. 반면 혜초는 바닷길을 이용해 광동지역에서 인도로 들어갔다가 인도를 비롯해 서역 여러 지방을 4년간 순유하고 서역북로를 통해 당에 귀국했다. 그렇다면 귀국 때는 위먼관으로 들어왔다는 말인데 727년 11월 상순에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에 닿았으니 728년엔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쿠차 이후 언기를 거쳐 장안에 들어온 건 확실한데 안타깝게도 언기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경로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위먼관이 지금의 안시(安西) 지역으로 물러난 것은 고선지 이후의 당 쇠퇴기이니 혜초가 지날 수 있는 곳은 지금의 저 관문밖에 없다.

옥문관, 님 그리는 장안 여인의 탄식을 듣다

▲ 위먼관, 2천년 세월을 견디고 오늘도 서 있다
ⓒ 오창학
위먼관에 서면 이태백 자야오가(子夜吳歌) 중 가을 노래(秋歌)가 들린다. 천 년을 넘어선 여인의 탄식 소리.

長安一片月 장안 하늘에 한 조각 달
萬戶搗衣聲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끝없이 불어오는데
總是玉關情 모두 옥문관으로 향하는 정이여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나 오랑캐를 평정하여
良人羅遠征 낭군은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그 먼 세월의 간극을 넘어 '옥문관'에 징병 나와 있는 낭군을 그리워하는 장안 여인의 감정이 진솔하게 묻어난다. 위먼관처럼 복원입네, 보수입네하고 요란한 손때를 묻히지 않은 오래된 폐허만이 간직한 힘이다.

지금은 수비병 대신 검표원이 자리를 대신하는 퇴락한 관문이건만 내게는 여전히 서역으로 나서는 관문이다. 그 때문에 도로를 따라 유원으로 돌지 않고 위먼관을 나서 막하연적으로 들어서려 하는 것이다.

아, 우리는 이번 여행길 내내 몇 번의 경계를 넘었던가. 북방 민족의 터전에 차를 내려 옛 영화의 중심지 뤄양과 시안에 들고, 몽고인들의 사막지대를 지나 옛 중화의 세력권 끝인 위먼관에 이르렀다. 이제 저 문을 넘어서면 또 한 번의 진정한 '출새(出塞)'가 이루어진다.

▲ 위먼관 유물전시관 식당. 둔황 서남부 사막 지대 유일의 휴게시설이다
ⓒ 오창학
새로운 출발에 앞서 단독주택 규모의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식탁 두 개가 놓인 내부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딸은 문 밖 수레에서 기념품과 서적을 팔고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음식을 하며 아저씨는 입장료와 화장실 이용료를 징수하는 위먼관 유일의 휴게 시설이다. 아니 둔황 서남부 사막 지대 유일의 휴게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장실 이용료가 1위안으로 물가 또한 최고가다. 이제껏 5마오(0.5위안)가 표준공시가라 생각했던 처지라 에릭님이 왜 이리 비싸냐 물으니 주인아저씨가 항변한다. 물도 안 나오는 이 외딴 곳에 달랑 떨어져 살며 고생하는 비용은 왜 생각 안 하느냐고.

음식값은 당연 갑절이다. 어디 여기 말고 배설할 수 있으면 하고, 먹을 수 있으면 먹어보라는 마음 같다. 이 드넓은 사막에 오로지 이 집 한 채가 독점이니 구매자로선 선택권이 없지. 그냥 취사를 해서 먹을까 했지만 칼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감내하며 먹을 마음이 안 생긴다. 어차피 막하연적에 들어서면 매끼가 취사이니 벌써부터 서두를 이유도 없다.

오후 3시 10분. 드디어 출발. 한(漢) 장성 방향으로 나아가 야단지모성 가는 초입에서 도로를 벗어나 사막에 들어서면 된다. 우습다. 천지사방이 온통 사막뿐인 이곳에서 도로 위는 사막인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사막으로 길 아닌 길을 나서다

▲ 검표원들이 입장료를 요구하며 막아선 한 장성 방향 진입로
ⓒ 오창학
시동을 걸고 위먼관을 벗어나려는데 한 장성 방향 진입로를 검표원들이 틀어막고 이곳에 진입하기 위한 입장료를 요구한다. 무슨 소리? 원래는 위먼관 오는 초입에서 입장권을 샀어야 한단다. 우리가 둔황에서 양관으로 직접 진입했고 양관에서도 사막을 관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매표소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우리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 진입하는 것이므로 한 장성 입장료를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길을 막고 비껴줄 태세가 아니다.

"차 돌려서 우회하겠습니다."

2호차에 무전을 날렸다. 이들과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도 없고 욕심쟁이 같아 밉살스러운 마음도 든 까닭이다.

▲ 사막을 우회해 위먼관을 벗어난다
ⓒ 박재익
애초 왔던 방향으로 차를 돌려 사륜 기어를 넣고 사구를 치고 올라 사막으로 진입했다. 통쾌하다. 사막마저도 길을 따라 움직여야 했던 점이 아쉽던 터에 네 바퀴 굴림 자동차가 한껏 능력을 발휘한다.

지표면이 두툼한 모래로 덮인 연약지반이고 구릉과 구덩이가 많아 차체의 요동이 심했지만 강성스프링과 토션바 그리고 프로콤프 사의 서스펜션으로 튜닝한 하체가 별 무리 없이 받아준다. 먼지를 일으키며 둔덕들을 헤쳐나갈 때 흡사 모래의 파도를 가르는 한 척의 쾌속정이 된 느낌이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잖아?

"오늘날 모험이라는 말은 시대 정신에 맞는, 훌륭하게 상품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관광 산업은 대량으로 생산되는 사이비 모험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모험이란 계획될 수도 없고 예약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모험을 사고 소비한다는 것은 전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모험이란 '모든 게 갖춰진' 여행 서비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진정한 모험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미지수와 불확실함이다."

스펜 헤딘 이래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도보로 횡단한 부르노 바우만이 그랬다. 그의 글을 접하고 십분 공감했더랬다. 그러나 난 그와 같은 전문 탐험가도 아니요, 심지가 굳은 이도 못 되는지라 '예측 가능하고 감내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는 모험'을 계획할 수밖에.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동생이 물었다. 꼭 지금이어야겠냐고. 내년이면 중국 내 자동차 여행이 가능해지고, 또 한 두 해만 더 기다리면 충분한 여행 자금도 생기지 않겠느냐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재에 살고 있지 않은 양 오로지 내일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게는 지금, 바로 여기가 중요하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욕망과 호기심, 표현가능성들과 일치하는 일을 언젠가 한번쯤 해 보기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리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실은 이 또한 바우만의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기도 하다. 내 욕망과 호기심, 표현가능성들과 일치하는 일을 해보기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란 자연 앞에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오직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동원해서야 나는 감히 저 자연 속으로 들어설 마음을 품은 것이다. 사막 300km 횡단에 1박 2일, 혹은 2박 3일을 예상하고 있지만 두 차 모두 각각 20L의 물통과 다량의 생수통 그리고 철봉씨를 포함해 7인이 일주일간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과 부식을 적재하고 있다.

또 백구의 짐칸에는 아이솔레이터를 활용해 분산 충전되는 보조배터리가 부착되어 있다. 인버터(차량용 12V를 220V로 전환시켜주는 장치)를 이용해 촬영기기를 충전하고 노트북을 사용한다거나 실수로 전등을 켜놔도 사막에서 차량이 방전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차량이 2대니 점프선을 이용해 시동하면 될 일이지만 윈치를 사용할 일이 많을 경우 유용하다.

다만 연료가 문제다. 둔황에서 양관 거쳐 위먼관에 이르기까지 150Km를 주행했다. 연료탱크의 1/4이 비었다. 본격적으로 사막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비연료통 한 캔씩을 각각 소모해야 할 모양이다. 애초 계획엔 위먼관 근처의 오아시스에서 한 번 더 가득 채운 후 떠나는 것이었는데 이제 와 보니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달고 다닐 땐 그렇게 짐스럽더니 막상 필요에 닥쳐 예비연료통들을 더 확보해 오지 않은 게 아쉽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아.

다시 포장된 도로에 오른다. 대체 사막의 어디까지 도로가 뻗어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70여Km 떨어진 야단지모성과 주변 오아시스 때문에 만든 길일 게다. 아쉽지만 이제 이 도로를 버리고 북쪽 사막의 모래땅에 바퀴를 넣어야 한다.

메마른 사막에 눈물을 떨구다

▲ 막하연적 사막 횡단 직전 다시 엔진이 과열된 2호차 파라곤. 각혈처럼 냉각수를 토해낸다
ⓒ 오창학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후방의 2호차에서 무전이 온다.

"2호차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급히 차량을 세우고 쫓아가보니 또 엔진 과열이다. 지난 번 고비사막에서 과열되었을 때와 같은 증상이다.

마치 각혈하는 폐병환자처럼 냉각수를 거푸 토해내고 있다. 녀석이 안쓰럽다. 연식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아니 한국에서 과열현상이 생겼을 때 판단을 했어야 하는데 이역만리 타향의 오지까지 끌고 온 것이 무리였다.

냉각수 누수 문제는 아니다. 그 점은 오늘 아침도 분명히 점검을 마쳤다. 써머스텟 문제? 아니면 워터펌프? 라지에터?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의 냉각팬 속도가 정상이니 팬클러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두 번의 과열 모두 사막지대에서, 사륜을 넣고 알피엠을 높여 주행한 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차가 과열될 수 있는가.

속이 상한다. 이 여행을 위해 1년 반을 준비했다. 고비사막을 지나고 타클라마칸을 일주해 아얼진 산맥을 넘는다. 티베트 아래 '하늘길'로 진행해 내몽고 땅까지 아우르는 중국 구간 실크로드를 일주하겠다는 계획. 이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내 30대의 정점에서 긋는 삶의 획이다. 그러한 여행의 중심에 무보급 막하연적 사막 횡단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 꿈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발목이 잡혔다. 엔진이 과열되어 결함이 생긴 차를 끌고 사막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물러나야 할 것인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엔진 열이 내리고 다시 주행 가능하다 해도 이 상태론 사막의 모랫길을 헤쳐 나갈 수 없다. 반드시 다시 과열될 것이다. 양관 근처 사막에서 새삼 느꼈지만 자력이동이 아닌 견인으로는 사막의 사구를 오를 수 없다. 그렇다면 사구 하나 오를 때마다 1호차가 먼저 올라 2호차를 윈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 사막을 노려보는데 눈이 뜨거워진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막하연적 사막 횡단의 꿈을 접어야 한다
ⓒ 오창학
만약 사막의 정 중앙에서 2호차가 퍼진다면 이 모랫길을 헤쳐 견인하는 동안 1호차도 과열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대지온도 62도, 시동 꺼진 차내 온도 42도. 이 가운데 정비를 담당하신 자포님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차량의 열기를 식히느라 동분서주한데 나는 백구 뒤에서 사막만 노려보고 있다.

2호차 파라곤의 엔진 열은 다행스럽게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 그런데 내 눈은 자꾸 뜨거워진다.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돌아서야 한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다시 둔황으로 돌아가 차량을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시도할지 문제는 그 다음에 결정할 일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둔황을 향해 차를 돌리는데 아내가 위로의 말을 한다.

"좋게 생각해요. 어쩌면 저 고장의 의미가 어떤 계시였는지도 모르잖아."
"…."
"사막에 들어서기 직전에 차가 고장이 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만약 사막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면…."
"…."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행에 대한 내 열정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는 사람이기에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고맙다.

▲ 둔황의 정비공장에서 점검 중인 파라곤. 써머스텟 이상으로 진단이 나왔는데......
ⓒ 오창학
사막의 포장도로 100Km 가량을 달려 둔황 시내에 있는 정비소로 들어왔다. 외국 차량에 대한 호기심까지 더해 필요 이상의 인원이 달라붙어 내린 진단명은 '써머스텟 이상'이었다. 이것이 기능하지 못해 냉각수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탓이란다. 그래서 아예 써머스텟의 개폐막을 뜯어버리는 것으로 조치를 했다.

이제 이것으로 2호차 엔진과열을 고친 것일까?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까? 사막을 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312도로를 타고 하미로 가야 하나. 고민의 시간은 밤으로 미룬다. 아직은 오늘 넘지 못한 사막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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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사막...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6] 둔황 양관에서
오창학(ohmadang) 기자
▲ 출발준비. 양관, 위먼관을 들러 막하연적 사막을 통해 둔황을 떠나는 날이다
ⓒ 오창학
이제 둔황을 떠야하는 날이기에 아침이 소란스럽다. 차량 점검하랴, 물 실으랴, 비상식량과 부식물 점검하랴, 짐칸 뒤 현창 위에 예비연료 확인하랴 7명 모두 맡은 역할대로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은 그냥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양관(陽關), 위먼관(玉門關)을 거쳐 막하연적 사막에 들어가야 한다. 내일이나 모레쯤은 무사히 사막을 건너 하미에 닿아 있을 것이다.

차량의 차고를 높이고 다목적 타이어(AT타이어)를 끼우고 윈치를 적재하고 전후 차동제한장치(ARB)까지 설치하며 튜닝에 힘쓴 이유가 다 오늘을 위함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양관과 위먼관까지는 조악하나마 사막 사이로 도로가 이어져 있어 걱정이 없다. 그러나 위먼관을 나서면 약 300km 이상 길 없는 사막을 온전히 건너야 한다.

둔황에서 120km의 유원을 거쳐 다시 유원에서 하미까지 300여km 가량 이어지는 312도로를 버리고 사막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하미에 닿는 계획이다. 바로 이 노선이 과거 현장과 혜초가 밟았던 길이거니와 비록 낙타와 말 대신 자동차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만 마음만은 그 옛날 구법승과 대상의 느낌을 느껴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사막을 향해 떠나는 지금이 순간까지도 사막구간 300여 km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아는 정보라곤 7세기 무렵 현장이 이 사막을 지나며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 내용과 차가 움직일 수 있는 위먼관 근처의 사막지형에 대한 정보뿐.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검토해 봐도 사막 표면의 상태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누가 그 곳을 지났다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중국 내에서 조차 그 구간에 대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게시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니 막상 부딪힌 후 내 눈으로 판단해야할 일이다.

혹여 차가 지날 수 없는 부드러운 모래땅은 아닐까? 와디나 산맥에 의해 가로막히지는 않을까? 차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연료는 충분할까? 별의별 걱정이 꼬리를 물지만 오히려 적당한 두려움이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서 좋다. 부딪혀 보는 거다. 어차피 이 날을 대비해 작년 한 해 만만의 준비를 했고 유사시 312도로와 둔황-투루판 간 기찻길 방향으로 대피할 계획까지 다 수립되지 않았나. 이젠 행동하는 일만 남았다.

▲ 영화세트장으로 되살아난 둔황 고성. 1987년 건설되었다.
ⓒ 오창학
차량과 대지에 채찍질하듯 내리쬐는 햇살이 아침을 조롱하는 것 같다. 도로 위로 피어오르는 가르며 양관으로 이동한다. 둔황 시가지를 빠져나와 사막 외길로 30여km쯤 달려왔을까? 밍사산 끝자락이 보일 때쯤 왼편에 둔황고성이 보인다. 일본소설 <둔황>을 영화화하기 위해 1987년 중일합작으로 송(宋)대의 성곽을 촬영장으로 복원한 곳이다.

중국영화 <신용문객잔>과 우리 드라마 <해신>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증이 제법 잘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어 들러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으나 그냥 지나쳤다. 진품이 앞에 있어 마음이 급한데 지금 '모조품'에 눈 돌리랴 싶은 마음이다.

겨우 흙벽으로 남았을 양관과 위먼관은 내게 큰 의미를 갖는다. 자위관에서 느낀 변방요새의 감회 못지않게, 아니 더 극명하게 세상과 세상을 가르는 지경. 더욱 외진 변방의 정회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금 가는 양관과 위먼관이기에 20세기 둔황고성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 양관가는 길. 이렇게 양관까지 70여 Km가 곧게 뻗은 길이다
ⓒ 박재익
사막, 사막, 사막... 아까도 사막이었고 지금도 사막이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오로지 시야가 가리지 않는 평지의 삭막한 땅이다. 그 사이로 검은 아스팔트가 호스처럼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가는 동안 점점이 봉화대를 발견한다. 그 예날 최전방 양관과 위먼관에서 포착한 이상 징후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최단거리 통로가 맞나보다. 잠시 차를 세우고 올라가 보니 봉수대는 짚과 흙을 섞어 켜켜이 쌓은 무더기임을 알겠다.

▲ 사막에 간간이 보이는 봉수대
ⓒ 오창학
현장법사가 갈증으로 죽음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구해준 이가 혹 이 봉수대의 초소장이 아닐까도 의심해 본다. 그러나 하미(이오)에 이르는 동안의 다섯 망루라는 게 봉수대와 혼용된 것인지를 알 길 없으니 이곳과는 연고를 생각함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리라. 20세기 초 그 길을 탐험한 스타인은 현장이 쓰러졌던 다섯 번째 망루 부근이 하미 도착 전 190km라 하였으니 현장과의 연관성은 더더욱 찾을 길 없다.

▲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사막. 사막 가운데 있는 마을의 어귀를 알리는 문이 보인다
ⓒ 오창학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지평선을 향해 달린 지 70여km. 양관 직전에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황토흙을 건조시켜 어긋나게 쌓아 통풍이 잘 되게 한 포도건조장도 지나고 온통 방풍·방사림으로 뒤덮인 녹색의 지대를 지나니 황량한 사막 초입에 나타나는 옛 요새의 위용.

양관(陽關). 이 황량한 벌판을 바라고 그가 묵묵히 서 있다. 여기서 옥문관까지 이어지는 경계선이 진정한 한나라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의 서쪽 영역을 흔히 '서역'이라 이른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마저 살아서 건넌 자들이 양관에 도착하면 비로소 중국에 도착한 것이 된다.

▲ 양관. 테마공원으로 복원되어 있다
ⓒ 오창학
어쩌면 누란이 보일 것 같은 전경. 불룩한 고지대에 옛 흔적이 남아있다 엄밀히 말하면 양관의 옛 흔적은 다 바스러져 흙으로 남았고 고지 위의 저 축조물은 봉수대이다. 봉수대만으론 썰렁했던지 양관의 모습을 테마공원처럼 잘 복원해 놓았다.

장안을 떠난 대상대가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에 이르면 타클라마칸을 우회하기 위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북쪽 길은 사막을 건너 3주 거리의 하미를 거쳐 톈산산맥 남쪽 기슭의 오아시스 도시들인 투루판 쿠차 악수 튬슉 카슈가르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흔히 '천산남로' 혹은 '서역북로'라 한다. 남쪽 길은 티벳 북쪽의 산맥과 사막 가장자리 사이 오아시스들 즉 미란, 엔데레, 니야, 호탄을 지나 카슈가르로 이어지는데 이 길 '서역남로(오아시스 남로)'라 부른다.

이곳 양관으로 나가게 되면 서역남로에 이르는 것이고 위먼관으로 나간다면 서역북로에 접어드는 것인데 결국 두 길 모두 카슈가르에서 만난다.

우리의 여정은 사막 북쪽 길을 통해 하미, 투루판을 거쳐 카슈가르에 이른 후 오아시스 남로를 역류해 카슈가르-호탄-핀펑-치에모-뤄창까지 오되 둔황으로 들어오지 않고 '하늘길'이라 불리는 티벳 쪽 실크로드를 향해 아얼진산을 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로되 벌써 1/3을 넘겨 움직였다.

▲ 양관의 봉수대 유적. 저 멀리 고비 너머 타클라마칸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 오창학
붉은 모래 언덕의 유적을 보고 있노라니 "서쪽 양관에 나가면 아는 사람이 없으리니." 이 한 귀절이 절실하다. 시안을 떠나올 때 왕유의 이별가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를 떠올리긴 하였으나 그 글귀가 이곳에서 이토록 절절하게 애를 끊을 줄 몰랐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 아침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우니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에 푸릇푸릇 버드나무빛 싱그럽다
勸君更盡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술 한잔 다 마시게
西出陽關無故人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가 없으리니


왜 양관에 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 시가 새겨져야 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특히나 우린 시안을 나서 이별장소인 위성(渭城)을 거쳐 육로로, 육로로 차를 몰아 여기 양관에까지 도달한 이들이 아니겠나. 더구나 최초 출발지는 장안보다도 먼 한국이다.

▲ 한반도 인천을 떠난 차가 4000Km를 달려 양관에 닿았다
ⓒ 오창학
비록 장안(시안)을 떠나올 때 술 한 잔 받은 처지 아니나 서쪽 양관에 나서면 아는 이 없으리란 건 알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예까지 그리 먼 길을 달려 막상 황량한 가운데 놓이니 쓸쓸한 감회가 가득하다.

▲ 양관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쪽 사막. 이대로 향하면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고 그곳엔 누란왕국의 유적이 있다
ⓒ 박재익
이 문을 넘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면 누란 왕국이다.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사막 저편에, 지금은 모래 속에 잠든 왕국 누란이 있다. 오아시스 남로 상에서 중계무역으로 번영한 도시인데 교통의 요지라서 부를 얻었던 만큼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에 바람 잘 날 없었다. 중국과 흉노사이에서 힘겹게 양다리 외교로 명을 이어야했던 안쓰러운 역사.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가 언제나 깡패들의 편이 아닌 적 있었는가.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군대에 굴복한 누란왕은 한나라 장수 앞에 끌려와 한나라의 부하가 될 것을 서약하고 장남을 인질로 빼앗긴다. 그러나 한의 군대가 철수하기 무섭게 흉노가 쳐들어와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급기야는 흉노의 강압에 못 이겨 흉노와 한나라의 싸움에 출병한다. 불행한 누란왕은 전투에 패하고 장안으로 압송되는 운명을 맞는다.

아, 이것이 어디 변방 오아시스 도시들 중 누란에 국한된 운명이었겠으며 고대 2100년 전 이야기에 머무르는 것이겠는가. 누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약탈의 역사는 계속된다.

▲ 양관을 나서 위먼관으로
ⓒ 박재익
변방에 선 황량함과 역사 반복의 슬픈 상념을 털고 양관을 떠난다. 차 머리를 위먼관에 두고 힘차게 가속패달을 밟는다. 사막의 모래를 무겁게 튕겨내는 바퀴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위먼관-하미 구간 막하연적 사막 횡단 계획도

▲ 막하연적 횡단 계획도

둔황에서 양관으로 70Km 이동 후 사막구간 도로를 통해 위먼관으로 80Km이동.

위먼관에서 숨을 고른 후 현장법사가 넘었던 막하연적 사막 진입. 약 300여 Km 구간을 1박2일, 혹은 2박3일 소요로 하미까지 횡단할 예정임.

연료부족 및 차량 결함, 장애물 출현 시 기차길이 있는 오아시스 지대로 진입하여 312도로를 타고 하미에 도착할 계획.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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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사산에선 모래도 울고, 낙타도 울고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5] 둔황 싼웨이산과 밍사산
오창학(ohmadang) 기자
돌과 바람의 싼웨이산

모가오굴(莫高窟)을 나서 싼웨이산(三危山)으로 향한다. 사실 향한다 만다 할 것도 없는 게 모가오굴이 있는 밍사산 절벽을 나서면 싼웨이산의 험준한 자태가 앞을 막아선다. 동서로 수십 리에 걸쳐 있지만 주봉이 바로 밍사산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이 바위산의 자태를 나 몰라라 하고 둔황 시내로 들어가느냐, 산으로 향하느냐만 결정하면 되는데 산 쪽으로 방향을 두는 차는 없다.

▲ 싼웨이산을 향해
ⓒ 오창학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산임에도 관광지로서도 유적지로서도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겐 둔황의 꽃 밍사산에 가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싼웨이산 만큼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장소였다.

'삼위(三危)'는 산의 형세가 우뚝 솟았는데 마치 넘어질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대위(大危) 이위(二危) 삼위(三危) 형제가 태양과 달을 난동을 부리는 천구(天狗)로부터 빼앗아 온 후 이 산의 세 봉우리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유래야 어찌되었든 둔황의 옛이름으로 '사주(沙州)'가 귀에 익지만 사서에 등장하는 둔황 최초의 이름은 '삼위(三危)'이니 한낱 돌산으로 보이는 이곳의 중요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위'라는 지명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서경> 순전(舜典)에 "삼묘를 삼위로 보냈다(竄三苗于三危)"하는 구절인데 <좌전>과 <산해경>에도 서왕모와 삼청조(三靑鳥) 이야기와 관련해서도 삼위가 나온다.

그러나 정작 관심을 끄는 이유는 우리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보이는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였다(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는 기록 속 지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진위여부를 떠나 <환단고기>에도 환웅천황은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으로 진출하고 중국의 시조 반고는 삼위산(三危山) 납림동굴(拉林洞窟)로 갔다는 기록이 있으니 한민족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의 선조라는 김일제의 부친 휴도왕이 활동했던 무대가 우웨이 언지산(焉支山)에서 이곳 둔황의 삼위산(三危山)에 이르는 지역이니 이 산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 가파른 산을 오르는 백구와 파라곤
ⓒ 박재익
중국 정부가 나름으로 싼웨이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서인지 또 다른 관광상품의 개발을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원경으로 보기엔 그저 삭막한 돌뿐인 것 같은데 산에 길을 내놓았다. 근경에서 산세만이라도 관찰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잘 됐다 싶어 내친김에 차로 산에 오른다.

좌우의 석벽은 금세 바위라도 쏟아낼 듯 급하고 경사는 가파르다. 길은 좁고 굽은 정도가 급한데 엔진회전수(RPM)를 높여 치고 오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 싼웨산 능선길의 서유기상. 정말 요괴라도 하나 나올 듯한 산세다
ⓒ 오창학
능선에 올라 평탄한 길을 한동안 주행하니 길 한편에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이 세워져 있다. 현장법사의 흔적이 짙은 길이어서일까? 실크로드를 따라 움직이는 내내 서유기 조형물들을 접한다. 아닌게아니라 이런 험준한 지형의 산엔 요괴라도 하나쯤 살 것 같다.

그로부터 1㎞가량을 진행했으나 산정 밑에 사찰 비슷한 건축물을 지어놓고 길을 폐쇄했기에 차를 돌렸다. 내려오는 길에 산 아래 전망이 보이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둔황이 확연히 모래의 땅임을 알겠다.

온통 모래의 사막에 멀리 둔황 시내의 녹지가 신기루처럼 펼쳐 있다. 저 시가지에만도 4만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주변 지역까지 합하면 17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관광 산업으로 인해 둔황은 당 대 이후 최고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다.

육감적인 S라인 밍사산

싼웨이산을 뒤로 하고 다시 20㎞를 달려 시가지로 들어섰다. 도심에서 불과 십여 리 안팎에 있는 밍사산(鳴沙山)을 가기 위해서다. 밍사산은 동서 40㎞에 남북 20㎞의 모래 사구 지대이니 딱히 도심에서 몇 ㎞ 운운하는 것이 우습지만 밍사산의 꽃 웨야첸(月牙泉)이 있는 관광지대를 기점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 도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밍사산
ⓒ 오창학
"아아…."

시가지를 비켜 들어서는데 눈앞에 펼쳐진 모래산의 자태가 육감적이다. 그야말로 'S라인'을 그리며 하늘로 모래가 돌아 쌓였다. 어쩌면 저 거대한 모래무더기가 오아시스 옆에 우뚝 솟을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오아시스가 저런 모래더미 곁에 생겨날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밍사산을 들어서자마자 낙타똥 냄새가 반긴다. 밍사산의 첫대면은 모래산의 자태가 주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지독한 낙타똥 냄새가 안기는 후각적 고통 속에서 시작된다.

밍사산의 낙타

▲ 밍사산의 첫대면은 모래산의 자태가 주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지독한 낙타똥 냄새가 안기는 후각적 고통 속에서 시작된다
ⓒ 오창학
지린내와 구린내가 적당히 섞인 초식동물 특유의 냄새를 비집고 197번 낙타에 올라탄다. 낙타를 타 보기는 난생처음. 모래산을 오르는 일도 역시 처음. 낙타를 타고 모래산을 오르는 일은 더더욱 처음이다. 사구를 돌아 웨야첸에 이르는 2㎞ 남짓한 사막의 '대모험'을 기대하기엔 어쩐지 빈약한 냄새가 나지만.

이내 후회로 가득하다. 이제껏 자동차로만 사막을 지났기에 옛 정취를 살려 낙타로 모래 위를 걷는 느낌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여겼는데 이건 아니다. 사구를 오르는 낙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겹다. 해가 질 무렵의 197번 낙타에게 이번이 오늘 하루 몇 바퀴째 행보일까.

▲ 몰이꾼과 낙타의 거친 숨이 부담스럽다. 남의 고통 덕에 내 육신이 편할 수 있다는 게 그리 편치 않은 낙타 등반
ⓒ 오창학
몰이꾼이나 낙타나 거친 숨을 내쉬는 게 처절하다. 타인의 고통 위에 내 육신의 편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이래야 저들의 생계에 도움이 된다고 자위해 보지만 이들의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마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내 이럴 줄 알고 밍사산에 가면 관광객을 위한 낙타는 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막상 사구를 오르는 낙타행렬에 그만 눈을 빼앗겼다. 흡사 사막을 건너는 캐러밴의 무리인 양 여겨져 값비싼 요금을 치르고 덥석 낙타의 등에 오르고 만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치관이 흔들린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의 이치와 현상에 좀 더 밝아지게 되면 내 신념은 지금보다 더 투명해지고 명료해지리라 믿었었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세상은 더 모르겠고 생각은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어떤 이는 이를 '적응'이라고도 말해주고 어떤 이는 '융통성'이라고도 말하는데 가히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발레리의 말처럼 생각한 대로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살아간 대로 생각하게 될 테니까.

▲ 밍사산의 환상적인 곡선
ⓒ 오차학
낙타는 완만한 모래 언덕을 길게 올라 가파른 모래산의 둔덕에서 일단 멈춘다. 먼 곳을 내려다보며 정상에서의 감회를 맛보고 싶은 자는 이제 도보로 올라야 한다. 정상의 높이가 해발 1600m를 넘는다지만 둔황의 고도 자체가 높으니 육안으로 관측되는 산의 높이는 잘해야 150∼200m. 그나마 낙타가 실어다 주었으니 사람이 제 발로 올라야하는 높이는 70∼80m를 넘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낙타 표 안에는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이용료와 다시 정상에서 낙타 접선장소로 내려오는 모래 썰매 값이 포함되어 있다. 해변 백사장보다 부드러운 모래는 발 딛기 무섭게 허물어져 내린다.

모래산의 경사가 가파른 탓에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는 한 발 한 발이 힘겨운 걸음이다. 계단조차도 모래에 반 너머 묻혀 걸음을 더디게 하지만 그냥 맨 모래 위를 등판하는 것에 비길 바는 아니다.

그 짧은 구간을 오르는데도 숨이 턱까지 찬다. 가만 보니 아내는 더 울상이다. 아예 신발까지 벗어들고 악순이처럼 오르기는 하는데 폐병 환자처럼 가쁜 호흡과 땀으로 범벅된 표정은 가리지 못한다.

▲ 밍사산 정상에 오르는 나무 계단(좌), 어렵사리 올라 주저앉은 아내(우)>
ⓒ 오창학
드디어 모래산 정상. 아내는 털썩 주저앉아 더 오를 곳 없는 느낌을 만끽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밍사산 서부지역과 둔황의 모습이 눈에 가득하다.

명사(鳴沙)는 울지 않고

명사(鳴沙). 모래 우는 산. 누구는 흉노의 시신이 쌓인 곳에 모래가 덮여 산을 이루었기에 그 군사의 원혼이 울어 '명사(鳴沙)'라고도 하고 누구는 모래의 철분성분이 바람에 사그락거리며 운다 하여 명사라고도 한다.

혹은 중국의 군대가 이곳에 숙영할 때 적의 기습을 받고 북을 울리며 전투하던 중 갑자기 불어온 모래 바람에 모두 묻혔기에 지금도 모래 바람이 불면 전장의 북소리를 낸다는 전설도 있다.

조금씩 말은 다르지만 모래 우는 소리는 '한', '애틋함' 뭐 이런 정서에 연원을 두고 있다. 야산의 바위 한 톨에도 전설이 깃드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거대한 모래산에 이야기가 없겠는가.

혹여 모래 우는 소릴 들을까 모래산 정상에서 가만히 귀 기울여 보았지만 사위는 낙타 울음 소리, 사륜 오토바이(ATV)와 사막용 사륜 구동 차량 소리, 심지어는 초경량 비행기의 엔진음까지 버무려져 애틋한 정서는 느낄 겨를이 없다.

이들에 짓눌려 밍사산은 할퀴고 상처받은 몸으로 하루를 난다. 그러나 바람이 주는 치유는 내일 또 날카로운 날을 세우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 밍사산의 석양. 밍사산은 서늘해지는 오후 늦게가 방문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 오창학
해지는 저녁. 소음 속에서도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은 모래 위로 넘어가는 붉은 해의 정경이다. 유난히 아름답다는 밍사산의 석양이기에 저렇게 쉬이 넘어갈까 안타까운 마음이 일지만 자고로 예쁜 꽃은 빨리지는 법.

일몰의 흥분을 뒤로하고 모래산을 내려서는 방편은 모래 썰매다. 잘 미끄러지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대나무 썰매에 궁둥이를 붙이고 올라올 때만큼이나 힘겹게 산을 내려서 다시 낙타에 오른다.

달빛 아래 초승달샘

낙타가 나름대로 잰걸음을 놀려 웨야첸(月牙泉)으로 향한다. 도착했을 땐 이미 밤 9시 30분. 해는 졌고 사위는 어둠에 잠겨 가까이에서 보아도 샘물의 색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월아천, 이름 그대로 밍사산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이처럼 거대한 모래산 지대가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복판에 마르지 않는 호수가 있다는 것이 더욱 신비하다. 이런 신비함 뒤엔 전설이 빠질 수 없어 이 호수의 유래에 대해서도 몇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광재라는 장군이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가던 중에 물이 부족해 헤맬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정병으로 샘이 흐르게 했다. 혹은 둔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천상의 선녀가 슬퍼 흘린 눈물이 샘을 이루어 지금의 웨야첸이 되었다 등.

치롄산맥 물줄기가 둔황 남부에서 스며들어 지하수로 뿜어져 나온다는 밋밋한 설명보다야 한낱 사물이 사물 이상의 것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감성적인 이야기가 곁들여지는 게 낫지.

하긴 전설이 아니고서는 이 가파른 모래산에 둘러싸인 작은 호수가 수천년 간이나 유사(流沙)에 매몰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주변을 둘러싼 모래 언덕의 공기역학 구조가 외곽으로 모래를 날려 보내기에 유사에 의한 오아시스 매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명으로는 궁금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바람 부는 밍사산을 본 사람이면 이 속에 묻히지 않는 샘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인지 안다.

하지만 3000년을 이으며 마르지 않던 샘도 21세기 전 지구적 환경 위기 속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둔황 지역 내의 인구증가와 농업용수의 사용 증가로 지하수가 고갈되고 사막화의 진행이 가속화된 탓이다. 1950년대 4000평의 수면 면적은 1200평으로 10m를 자랑하던 수심은 1.2m로 낮아졌다.

총리의 특별지시로 관개시설을 확충하고 과학적 급수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지만 어쩐지 염려스럽다. 문수보살의 정병도, 선녀의 눈물도 인간이 만든 환경의 재앙 앞에선 힘을 잃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지난 3000년을 견뎠고 지금도 자태를 유지하고 있잖은가. 호수 같은 샘을 보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내 인생의 모래산에도 저런 마르지 않는 샘 하나 있었으면….'

▲ 월아(月牙) 아래 월아천(月牙泉)
ⓒ 오창학
웨야천 옆 녹지대 휴게소에서 먼저 오신 에릭님과 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다. 에릭님이 권하는 이곳 웨야천 특산 시원한 살구차 한 잔. 말린 살구를 넣고 꿀과 함께 끓인 후 식은 다음 시원하게 맥주잔 500cc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는 차다.

"카아∼"

기가 막히다. 천사의 물이다. 술을 하지 못하는 나는 심야시간대에 맥주 광고에서 보여주는 모델들의 그 시원한 표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비유를 통해 표현하라면 모래산에서 내려와 거푸 들이키는 살구차의 뒷맛 같은 느낌을 그들이 표정으로 나타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행복의 기준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할 진데, 오늘 월아(月牙: 초승달) 아래 건재한 월아(月牙泉) 앞에서 살구차 한 잔을 놓으니 행복하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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