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올 수 '있는' 사막 '타클라마칸'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2] 타클라마칸 너머 쿠차 가는 길
오창학(ohmadang) 기자
쿠차를 향하여

▲ 1호차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는 나리님과 자포님. 겨우 만난 일행과 다시 이별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 오창학
손을 흔들어 주는 나리님과 자포님. 겨우 만난 일행과 다시 이별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오전 9시 출발 예정이었으나 근 10시가 다 되어서야 투루판의 숙소를 뜬다. 어젯밤 늦게 해후한 2호차 일행을 남겨둔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2호차 팀은 우루무치에 들렀다가 하미에서 차를 찾아 합류할 계획이건만 왜 이렇게 방정맞은 생각이 드는 것일까.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나리님과 자포님을 뒤로 하는데 그만 가슴이 뻐근하다. 눈두덩도 불콰해진다. 만나겠지, 다시 만나겠지.

▲ 투루판에서 투커쑨 가는 길. 이곳을 건너면 타클라마칸으로 넘어서는 산맥에 닿는다
ⓒ 오창학
투루판을 벗어나자마자 길이 어설퍼진다. 우루무치 쪽을 향하다 꺾어져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투커쑨(托克遜) 가는 샛길로 들었더니 이 모양이다. 마을 어귀의 나무 그늘에 내놓은 침대 위에선 위구르 꼬마 형제 둘이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일그러진 포장길에서 털럭거리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한 시간 남짓 달리니 타클라마칸으로 들어서야 하는 진입로의 산들이 보인다. 마이너스 고도에서 해발 1700m까지 단숨에 오르는 길이다. 산세가 만들 수 있는 모든 빛깔과 형용이 다 모인 산길. 붉게 지글거리는 흙덩이산을 도는가 싶으면 눈앞에선 검게 그을린 뾰족 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엔 가슴처럼 봉곳봉곳한 돌덩이 산들이 굽이친다.

'돌아올 수' 있는 '사막 타클라마칸'

▲ 타클라마칸으로 들어가는 산맥 주변 풍경. 다양한 빛깔과 형용이 어우러진 길
ⓒ 오창학
산을 오를 땐 무척 가팔랐는데 타클라마칸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곳은 완만한 내리막이다. 그만큼 투루판의 지대가 낮았고 이곳 사막은 높게 펼쳐져 있다는 말이렷다. 투커쑨에서 314도로로 접어든 후 내쳐 달려 오후 한 시엔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사막 사이로 훤하게 뻗은 1급 도로여서 평균속도 120km를 꾸준히 유지한다.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Taklamakan). '타클라마칸'은 투르크어로 '돌아올 수 없는 땅'을 뜻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유사(流沙), 즉 '흐르는 모래'라 불렀다. 바람에 따라 끝없이 움직이는 사구 때문일 것이다.

동서 2000km, 남북 600km로 한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며 카라부란(Kara Buran)으로 불리는 살인적인 모래폭풍이 휘감아 도는 이곳은 과연 경외의 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1908년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이 "아라비아 사막은 타클라마칸에 비하면 길들여진 것"이라 말했을까.

그러나 막상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선 지금 여간 낙심이 아니다. 망망대해를 연상케 하는 사막과 천지를 녹일 듯 작열하는 태양은 여전하지만 그 모래 위로 뻗은 일직선 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한 사막은 그저 차창에 스치는 풍경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저 사막으로 내려서지 않는다면 타클라마칸의 고난과 위험은 단지 과거에 머물 뿐. 그렇다고 지금 도로를 벗어나 사막으로 들어설 수도 없다. 카슈가르까지는 최대한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야 한다. 원치 않아도 사막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든 있을 것이다.

타클라마칸 최대의 고난, '배설하기'

오늘날 타클라마칸에서 겪어야 할 최대의 고난과 모험은 생리욕구의 해결이다. 차에 오른 후 서너 시간째 먹지도, 싸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달리고 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사막에서 용변의 수줍음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아예 사막으로 들어갈 길조차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치 선정이 중요하다.

▲ 사막에서 오줌누기. 사막의 강풍으로 인한 와류현상으로 봉변을 보지 않으려면 차체를 방호벽 삼거나 안전한 하천 터널을 이용해야 한다. 오늘날 타클라마칸에서 겪는 가장 큰 고난은 배설하기다
ⓒ 오창학
지금 눈앞에 최적의 위치가 보인다. 급하게 차를 갓길로 붙여 세운다. 따로 하천이 없는 사막인지라 적은 비도 급작스레 범람을 유발할 수 있기에 도로 밑 곳곳에 수로를 내었다. 그 아래라면 주변의 시선과 철조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큰 축복은 바람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아, 오줌을 눌 때 불어닥치는 사막의 강풍. 그 뜻하지 않은 액체의 와류. 그 뒤의 일은 차마 생각하기도 싫다.

비록 먼저 이 길을 갔던 사람들의 선 굵은 배설흔적을 인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도로 밑 하천 터널은 '그 뜻하지 않은 와류 현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백구에 탑승한 네 명 중 유일한 여자인 아내에게 그 푸근한 안식처가 할당되고 남자들은 되는대로 차체를 방호벽 삼아 일을 치른다. 사막에서 얻는 귀중한 평안의 시간.

14시 30분. 허석(和碩)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투루판으로부터 280km를 달려왔다. 나름대로 순조로운 운행이다. 그래서 보스톤 호(博斯騰湖)에서 야영하려던 계획은 접었다. 몽고어로 '서 있다'는 뜻인 이 호수는 사막에 있는 거대한 바다 같은 곳이다. 만약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정이 늦어지게 되면 무리하게 야간운전을 하지 않고 보스톤 호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쿠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것 같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더이다

▲ 점심을 위해 들어간 도시의 식당에서 돋보기로 메뉴판을 읽는 교수님. 삼십 대 후반의 청년이 어느 새 이런 연세가 되셨다
ⓒ 오창학
이 작은 도시는 아무래도 유전 때문에 급조된 도시 같은데 대부분 한족 위주다. 식당 역시 한족 식당에 들었는데 도시의 작은 규모치고는 시설이 좋다. 그런데 음식을 시키려니 에릭님의 부재가 몸으로 다가온다. 중국 전문가답게 우릴 위해 알아서 모든 음식을 선정해 주셨는데 이젠 철봉씨에게 재료와 조리 방법을 물어가며 우리가 직접 메뉴판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교수님께 우선 메뉴판을 드렸는데 잔뜩 찌푸리며 들여다보시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신다.

"푸하하하!"

우린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만다. 돋보기(돋보기 안경이 아니라 진짜 확대경)를 꺼내 메뉴판을 읽으시는 것이다. 웃음이 나긴 나는데 한 편으론 코끝이 시큰하다. 아아, 그 젊고 기운차던 교수님도 어느덧 이런 때가…. 15년 전 교수님을 처음 뵙던 때만 해도 30대 후반의 젊은이였던 분이 어느새 확대경 없이는 메뉴판도 읽지 못하는 연세가 되셨다.

그래 내가 깜빡하고 있던 부분이다. 이런 거친 여행에 주저 없이 동참하시고 줄곧 꿋꿋하게 동행하셨기에 늘 마흔 이전의 교수님 모습으로만, 그리고 나와 같은 상태일 것으로만 여겼다. '조금 더 신경을 써 드려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무심할 것 같아 두렵다. 운전시키고, 아무 음식이나 드시도록 강요하고, 내 의견이 맞다고 우기고…. 그래도 교수님 제 맘 아시죠. 교수님 존경하는 거. 다만 여기가 사막이어서인 거.

허석을 나서서 다시 열심히 달린다. 이제 쿠얼러를 지난다. 공작하가 흐르는 석유개발의 전초기지. 6·25전쟁에 참전한 '인민해방군'들을 대거 이주시켜 건설한 도시가 바로 여기다. 그들을 기념해 시내 중심가에 한 손엔 괭이를, 다른 한 손엔 총을 든 동상이 있다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칠 뿐이다.

백구, 주목받다

▲ 쿠차를 200Km 앞 둔 지점. 경찰의 도로 정리로 모두 발이 묶였다. 기다림에 지친 탓인지 사람들이 온통 백구 주변으로 몰려와 구경에 열을 올린다. 와우~ 한국에선 단종된 차가 여기 와서 최신 차량으로 대접받는다. 바로 옆에 일제 사륜구동들이 즐비한데도
ⓒ 오창학
쿠얼러를 지난 지 한참. 오후 6시. 쿠차를 200km 앞둔 지점에서 경찰(公安)이 차를 제지한다. 면허증을 제시하려 하니 검문 때문이 아니고 반대편 차량 통행 때문에 그런 것이니 차를 갓길 공터로 빼란다. 공터엔 우리뿐 아니라 버스며 승용차며 같은 처지의 사람이 버글버글하다.

더운 날씨에 차 안에 있지 못하고 다 나와 있는 통에 빙수 장사만 신났다. 혹시 저 경찰과 가게 주인이 짠 것은 아닐까? 어이없는 상상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지진 않는다. 여긴 중국이니까.

시간이 지나자 자꾸만 사람들이 백구 주변으로 몰려든다. 우리 차 구경하는 모습이야 이제껏 흔한 풍경이었지만 여기선 정도가 심하다. 오랜 기다림 때문에 무료했던 탓일까? 한 무리가 우리 차를 구경하고 지나가면 더 큰 무리가 몰려든다. 차 안에 머리를 넣어 기웃거려도 보고 에어컨 송풍구 앞에 손을 대어 보기도 하며 난리다.

"어디서 왔나?"
"한국"
"앞에 글씨보고 내 알아봤다. 한국차 좋다."
"고맙다."

"어디서 왔나?"
"한국"
"어데 가나?"
"실크로드(絲綢之路)"
"한국차 좋다."
"고맙다."

대략 대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이는 백구 좌우에 정차해 있는 도요타 랜드크루저 EFI 4500을 가리키며 표정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곤 백구를 탕탕 치며 엄지손가락을 바짝 치켜세운다. 하하, 별일이다. 한국에서는 단종되어 버린 차가 7500만 원짜리 일제 신형차보다 후한 대접이라니. 사막을 건넌 당당한 위용 때문인가? 차체에 붙은 스티커와 지붕에 얹은 루프 텐트가 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해서? 하긴 나 역시 무쏘의 외형에 반한 사람이 아닌가.

톈진에서부터 철봉씨는 이 차에 타는 걸 신나 했다. 중국엔 이런 차 없다고, 좋아 보인다고. 그리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내내 백구의 성능과 상태에 흡족해한다. 참고로 철봉씨는 면허가 없다.

잠시 후 차량 통제의 비밀이 밝혀졌다. 일군의 무리가 비상등을 켜고 빽빽 거리며 지나간다. 국빈은 아닌 것 같고 누군가 힘 좀 쓰는 사람 같은데 굳이 두 개 차선을 막으며 저 차들을 통과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 몇 대의 차량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40분 넘게 뙤약볕 아래 길가에 서 있어야 했는가? 오살할 놈들.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다!

가난한 날의 행복

▲ 길가 세차장.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 오창학
오후 8시. 룬타이를 지나고 쿠차가 목전에 있다. 이제 한숨을 돌리며 도로 옆 세차장에서 백구를 씻어낸다. 어제 아이딩 호 들어가며 뒤집어쓴 먼지 덕에 목 속까지 매캐하다. 광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벌이를 찾아 이주해 왔다는 가족이 운영하는 이 세차장은 물 담는 드럼통과 고압세차펌프가 설비의 전부이다. 나머진 아버지, 어머니, 누나의 노동력으로 해결한다. 하긴 세차장에 물 분사기와 인력 외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인지 도로엔 세차장이 가게보다 많다.

벌거벗은 두어 살짜리 막내아들이 세차장을 쏘다니며 가족과 손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가족들이 모두 같이 일할 수 있어서일까? 이들의 표정이 밝아 보기 좋다.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교수님이 수박 한 통을 사 오셔서 같이 나누었다.

타클라마칸의 경고

운전을 하던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새가 운전석을 향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흐르는 공기 때문인지 창문을 비껴 올라 루프텐트 쪽에 부딪힌 것 같다는데 손이 떨려 운전을 못 하겠다며 차를 세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운전자가 소리를 지르며 놀라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가벼운 구박과 함께 운전을 교대했다.

그런데 웬걸 10분이나 지났을까.

"퍽"
"으앗"

기어이 운전석 앞유리를 피로 칠했다. 토마토가 부딪친 것 같은 흔적. 아내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다. 급히 차를 세우고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낸다. 이상하게도 여기 사막의 새들은 도로 좌우를 횡으로 낮게 난다. 기어이 한 마리가 앞유리에 부딪힌 것인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그러니 아까 아내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 쿠차 진입 직전 모래 안개에 휩싸였다. 가시거리 50m도 되지 않는 안개의 주범은 바람이 휘저어 대는 모래알갱이들이다
ⓒ 오창학
타클라마칸 진입 첫날. 너무도 순탄했던 오늘 하루. 그 때문일까 날이 기울고 쿠차에 막 진입하려는 찰라 세상이 부옇게 안개로 덮였다. 그러나 안개가 아니라 바람이 휘저어 대는 모래 알갱이들이다. 사막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너희 길은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보인다. 비록 훤칠한 포장도로로 덮여있지만 이곳은 타클라마칸인 것이다.

반가운 쿠차에 이르다

▲ 쿠차. 시간의 벽을 넘어 장군 고선지나 승려 혜초, 혹은 기생 나리슈카를 골목 어디에선가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다
ⓒ 오창학
오후 9시 40분. 드디어 쿠차에 닿았다. 650km. 꼬박 12시간 만이다. 방풍림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모래 안개가 걷혔다. 대기는 아직도 훤하다. 베이징과 여긴 두 시간 시차가 있지만 중국 전체가 하나의 시간으로만 통일되어 있는 탓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반가운 쿠차. 기원전 1세기경부터 흉노와 한의 각축장이었던 쿠차는 구자(龜玆)국이라 불리며 대상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한 오아시스 북도 최대의 도시국가였다.

"서문 밖 길 좌우에 각각 높이 90여 척의 입불상이 있다. 절은 100여 곳, 승려는 5000여 명, 사람들은 공덕 쌓기를 다투어 한다."

현장은 7세기 쿠차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당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2만의 인구로 구성되었던 반면 쿠차는 10만의 인구였으니 그 규모를 알만 하다. 특히나 당 대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인지라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 연고 때문일까. 처음 보는 사람과 건물임이 분명할진데 아주 오래 떨어져 있던 낯익은 동네에 다시 온 느낌이다. 어디선가 기생 라리슈카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나타날 것 같다. 어스름한 골목 한 편에선 천축에서 돌아오는 혜초가 걷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쿠차의 첫 느낌은 몽환처럼 다가온다.

▲ 쿠차 야시장. 빤미옌과 양꼬치가 일품이다. 아내는 이 와중에도 우리 여행자금 전액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숙소든 식당이든 카드가 통용되는 곳이 적고 ATM 역시 되는 곳이 많지 않아 여정에 필요한 경비를 다 지고 다녀야 하는 탓. 이 많은 돈을 차나 숙소에 두기도 위험하니 이렇게 들고 다닐 밖에
ⓒ 오창학
짐을 풀고 시 중심가에 나섰다. 10시가 넘은 어둠의 공간에 야시장의 조명과 활기가 자리 잡는다. 노점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모래를 양념 삼아 양꼬치와 빤미옌을 시켜 먹는다. 양꼬치는 소금 기름장에 버무린 양 자투리 부위를 꼬치당 예닐곱 개씩 기름 부위와 섞어 꿴 후 후추를 뿌려가며 숯불에 굽는데 의외로 맛이 좋다. 톈진을 비롯한 곳곳에서 양고기 꼬치를 먹어봤지만 이곳의 꼬치는 유독 크고 육질이 좋은 것 같다.

스파게티와 짬뽕의 중간음식이라 할 빤미옌(拌面)도 신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위구르 사람들은 '라타오즈'라 부르는데 맛이 제법 먹을 만하다. 게다가 양천엽과 삶은 땅콩이 특식으로 곁들여진 만찬이라 게눈 감추듯 먹고 있는데 교수님은 당최 종류가 맘에 들질 않는 표정이시다. 하긴 바람 부는 한 데서 모래가 수북한 면과 고기를 맛있다고 먹는 우리 부부가 이상하지. 낮 사이 교수님께 그토록 잘해 드리자 다짐했건만 또 내 생각만 했다.

미어지는 배를 추스르며 뒤뚱거리면서도 또 수박 수레 앞에 멈춰 선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맛과 싼 가격 때문에 과일 중독자가 되었다. 교수님도 과일이라면 매우 흡족해 하신다. 안전한 도착과 몽환적인 쿠차의 밤이 주는 아늑함, 그리고 부른 배가 주는 행복에 젖어 하루를 접는다.

투루판-쿠차 여정


오늘 하루 이동 거리 650Km. 12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길이 좋았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투루판에서 카슈가르까지의 옛 오아시스 북로에 해당하는 길은 전부 포장이 된 상태며 일부구간은 고속도로화 되어 있다. 길에 별도의 휴게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아시스를 지나쳐 갈 때 마을에 진입하거나 길가의 노점상을 이용할 수 있다.

/ 오창학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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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항모, 자오허 고성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1] 투루판 자오허 고성과 아이딩 호
오창학(ohmadang) 기자
사막의 섬 투루판

"투루판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떠 있는 녹색의 섬처럼 보인다. 바닷물 대신 모래와 자갈이 그 섬의 해안가를 씻어내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건조한 사막과 비옥한 땅의 경계선은 해안의 육지와 바다가 구분되듯이 명확하게 경계를 이룬다. 그 섬은 놀랍도록 비옥하여,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 지대를 지나온 여행객이 이 풍요의 땅 투루판에 들어서는 순간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920년대 투루판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밀드레드 케이블과 프란체스카 프렌치의 <고비사막>에 묘사된 모습이다.

투루판(吐魯番)은 서한(西漢)시대부터 오랫동안 서역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요충지로서만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 곳이다. 투루판이란 말이 위구르어로 '비옥한 땅'이란 의미인 것은 위에 묘사된 '그 섬'의 풍요로움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육지와 바다가 구분되듯 사막과 건조한 지대가 명확한 경계를 이룬다는 표현 또한 당시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현재 한족과 위그르족, 회족 등 24만명이 살고 있고 현대식 건물로 번잡해지긴 하였으나 한 발만 외곽으로 딛으면 곧장 2000년 흙과 바람을 접하게 된다.

천혜의 항모, 자오허 고성

▲ 자오허 고성 입구. 과거나 현재나 이곳만이 뭍과 성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때문에 자오허 고성 방어 병력과 시설의 80%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오창학
시내를 나섰나 싶은데 벌써 자오허 고성(交河故城)이다. 글자 그대로 하천이 마주치는 곳에 세워진 성인데, 동·서·남쪽은 약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밑에는 하천이 흐르는 구조이니 성이라기 보단 섬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동물과 다른 부족의 습격을 피해 살기 시작한 원시시대부터이지만 한 대(漢代), 차사국(車師國)의 도읍지가 되며 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다.

가오창 고성과 비교해 독특한 건 건축물 조성방식이다. 가오창 고성처럼 흙벽돌을 쌓아 이룬 것이 아니라 흙을 파내려가 만든 것이다. 한 마디로 도장을 새기 듯 거주구를 양각으로 새기고 불필요 부분을 음각으로 파내 형성한 곳이 여기 자오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주택가, 시장, 절, 관청, 감옥 등의 터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이런 파내려가기식 건축법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가오창 고성과는 달리 사람이 쉬 접근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 버들잎 모양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척의 항공모함을 떠올리게 하는 자오허 고성의 자태. 박물관에 전시된 항공사진을 다시 찍었다
ⓒ 오창학
두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섬처럼 우뚝 선 성의 형세를 대개 버들잎 모양에 빗대나 내 눈엔 노아의 방주나 거대한 군함인양 느껴진다. 박재동 화백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은연 중 항공모함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 기능과 외형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길이 340m, 배수량 10만 톤, 승무원 5700명의 항모와 남북의 길이 1600m, 동서 폭 330m. 거주인구 6000명이라는 자오허 고성의 제원이 갖는 유사성까지.

입구는 단 한 곳. 배로 치면 우현 닻 내리는 구멍쯤에 해당하는 곳이 당시의 출입구로(물론 지금도 이곳이 출입구지만) 병력과 수비 시설의 80%가 몰려 있는 곳이었다. 동문, 서문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양 편의 강에 물 뜨러 내려가는 공간이지 뭍과 연결된 통로는 아니었으니까.

한 무제 때 48년간 혈전을 벌이며 버틴 난공불낙의 천혜지라는 게 믿겨진다. 비록 13세기 원나라의 공격으로 처절한 파괴를 겪었지만 그 당시는 이미 이주화가 시작되어 성 내엔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다. 그러니 구석기 이래로의 불침전함을 가라앉힌 건 원나라의 무력이라 해야 하나, 세월의 힘이었다 해야 하나?

▲ 지금도 그 흔적이 역력한 자오허 고성의 지하 건축물들. 관청이나 금고, 숙직실, 비밀통로 등 그 용도를 알 수 있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 오창학
복원의 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에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비교적 완성된 형태로 남아있다. 독특한 공간에 세 겹의 문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아 혹 금고나 귀중품을 두는 창고 역할을 하는 곳도 있고 관공서의 숙직실과 채광창, 서신을 주고받던 창문까지도 남아 있다.

너무도 놀라운 건 벽 사이에 뚫린 굴이 고창고성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라는데 과연 믿어도 될까 싶다. 설마 그 시대에… 여기서 거기가 어디라고….

▲ 자오허 고성에는 아이들의 떼무덤 유적이 있다. 마치 제주 북촌의 아기 무덤처럼......
ⓒ 오창학
자오허 고성과 제주의 아이 떼무덤

200여명의 아이가 묻혀있는 떼무덤이 있다. 연유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만이 있을 뿐인데,

1.당나라와 전쟁 때 후손들이 노예의 삶을 사는 걸 막기 위해 모두 묻었다.
2.전염병이 돌았다.
3.북쪽 대사원을 향해 누워있음으로 볼 때 통치자의 제례의식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4.뒤의 무덤이 어른들의 무덤인 것으로 보아 여긴 아이들의 공동묘지였다.

등이 자오허 고성 안내원이 제시한 설이다. 이 중 4번의 추측이 개연성 있고 가장 평안하지만 한 구덩이 안에 20여 명의 아이가 함께 묻힌 사실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 떼무덤 앞에서 제주도 대정 근처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와 북제주 북촌 마을의 옴팡밭 옆 아기무덤을 떠올리고 만다. 여긴 머나먼 서역의 땅이라고, 지금으로부터도 아마득한 먼 과거의 영역이라고 도리질 해보지만 어느 곳에 있든 언제를 살든 한국인은 한반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인가 보다.

▲ 자오허 고성
ⓒ 오창학
1991년, 막 스무 살이 되던 해 배낭을 메고 물어물어 찾았던 그 곳. 4·3의 얼룩과 분단의 비극이 만들어 놓은 백 몇 십 개 봉분으로 아롱져 있었던 백조일손지지와 4·3의 문제를 정면으로 그려내 한국문학사에 획을 그었던 현기영 <순이삼촌>의 배경지인 북촌.

북촌의 400여 명이 넘는 마을 희생자들 중 어린 아이는 따로 학교 동편 언덕에 묻혔다. 아기의 혼백은 저승으로 가지 않고 까마귀가 가져간다하여 따로 무덤을 만들지 않는 제주의 풍습 때문이었다.

자오허 고성의 아기 떼무덤은 어쩜 그리도 그곳과 닮아 있을까. 그냥 이곳은 공동묘지였기를, 단지 천수를 누리지 못한 어린 영혼이 묻히는 안식처였기를…. 우리처럼 아픈 기억을 가진 슬픔의 장소가 아니기를.

폐허가 주는 무궁한 상상력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사람마저 바삭한 흙으로 건조시키려는 태양을 핑계로 아기 떼무덤의 상념을 접고 허위허위 자오허 고성을 나선다.

▲ 투루판의 여인들
ⓒ 오창학
투루판이 더위로 악명을 떨치는 연유는 이곳이 중국에서 표고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투루판 면적의 대다수가 해수면보다 낮기 때문. 그 낮은 부위 중에서도 바닥에 해당하는 아이딩호(艾丁湖)는 해수면보다 154m가 낮은데 이스라엘 사해의 -392 이어 두 번째로 낮은 곳이다. 투루판에 왔으니 이 역사적인 지점이나 한 번 밟아보고 싶다.

자오하 고성에서 20Km를 이동해 아이딩호 인근의 마을에서 철봉씨가 길을 묻는다. '아이딩호'라는 말에 질문의 의도는 알아 답변해 주는데 위구르어다. 내용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그의 손가락을 통해 진행 방향만 눈치챌 뿐이다.

"이젠 철봉씨가 유명무실이네. 각자 갈 길 가죠."

아내가 농담을 던진다. 조선족 안내원 철봉씨의 통역이 전혀 먹히지 않는 지대에 들어선 것임을 실감한다. 이곳이 중국령 동투루키스탄이다.

-154m를 찾아서, 아이딩호 가는 길

▲ 아이딩호로 들어가는 끝없는 외길
ⓒ 오창학
이렇게 손가락질 답변을 따라 움직이기를 여러 차례 드디어 아이딩호를 향한 외길 비포장 도로를 발견했다. 먼지가 눈처럼 쌓인 길을 가르며 들어가니 GPS의 고도계가 조금씩 낮아진다.

-136m. 더 가면 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도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길은 끝을 보이지 않는다. 혹시 여기가 -154m의 정점은 아닐까? GPS의 오차 범위 내에서 이 정도 차이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저 만치 산맥이 보이는 지점에서 진입을 멈췄다. 굳이 끝을 봐야겠다는 욕심 같은 것은 없다. 이제 말라버린 물이 주는 환상만 있으면 된다. '아이딩'은 위구르어로 '달빛'이란 소리니 내가 찾는 호수는 실은 '달빛 호수'가 되겠다만 이제 달빛 같은, 혹은 달빛을 튕겨낼 물을 찾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저 이 푸석푸석하고 단단한 지표를 호수의 꿈이라 이를 수밖에.

▲ -136m지점에 멈춰 선 백구. -154m 지점이 있기는 한 것일까? ‘달빛 호수’라는 아이딩호 대신 푸석하고 단단해진 모래의 바다만 감상하다 나왔다
ⓒ 오창학
나오면서 길 옆의 버려진 마을지대에 들어가 보았다. 글이나 물품으로 볼 때 불과 십 년 안쪽에 마을이 빈 것 같은데 언뜻 보기에 수백 년 유적지 같은 인상이다. 이곳의 흙을 말려 만든 벽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빛을 띤다.

다시 2호차의 수난

이제 막 투루판을 향해 들어오려는 찰라 2호차의 에릭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수리된 2호차를 몰고 오다 하미 출발 110Km 지점에서 차가 퍼졌는데 이젠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다 한다. 철봉씨에게 우루무치에 쌍용차나 벤츠 엔진을 수리할 수 있는 업체가 있는지 알아보라 했지만 전혀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투루판 동북쪽 골짜기에 수로를 따라 200종의 포도가 심겨졌다는 포도구(葡萄溝)로 가려는 계획을 접었다. 이 상황에 포도 뜯으며 춤추는 무희나 구경할 기분은 아니다. 그래도 못내 아쉬움은 남는데 10년 전에 다녀오신 바 있는 교수님께서 위무의 말을 남기신다.

"포도구 가봐야 악사나 몇 있고 맨 포도나 팔려 하지 별 거 없더라고."

다들 이구동성으로 "아마 그럴거야"라며 머리를 주억거린다. 그야말로 '여우의 신포도'다. 일단 숙소로 긴급히 돌아와 대책을 세운다. 쌍용차 해외지사 현황과 정비 지점망을 확보한 후 떠났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동부 중심지가 아니라 주로 서부 오지 쪽으로 움직이는 지라 정비망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 했다.

한국의 쌍용 본사에 연락을 하니 이번 주가 전체 휴가 기간이어서 해외 담당자와 통화할 수가 없다. 재수 없는 과부는 봉놋방에 누워도 고자 곁에 눕는다더니….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어 당직자의 성의 있는 응대로 쌍용 상하이 지사의 김기용 부장님 번호를 알아냈다.

이 분 역시 자기 일처럼 신경을 써 주신다. 무쏘가 중국에 흔한 차종이 아니어서 부품공급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하미'에 있는 지정 정비업체에 미리 통보를 해 조치하겠다 한다.

2호차에 그대로 말을 전했다. 그렇지만 지정 정비업체로 들어가기 전 원래 수리를 담당했던 하미의 정비소에서 이 문제를 책임진다니 그곳으로 차를 보내고 2호차 팀원들은 다른 방편으로 투루판을 향해 떠나겠다 한다.

▲ 위구르족 전통 춤. 감동보다는 어째 박제의 냄새가......
ⓒ 오창학
일이 일단락되니 속이 약간이나마 풀리나 보다. 숙소에서 저녁을 먹는데 민속춤 공연이 눈에 들어온다. 규모와 의상의 정밀도로 볼 때 약간의 어설픔은 있지만 동작이 격하고 음이 빠르다. 정말일까? 저들은 저토록 정열적인 춤을 추었을까. 남녀의 연정을 형상화한 춤이 많다. 어디까지가 전통춤이고 어디까지가 현대적인 안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투루판의 밤, 그리고 해후

▲ 투루판의 밤 풍경. 시골스럽고 푸근하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야외 극장이 만들어지고 양외 당구장도 성업이다. 비가 없는 지역이니 가능한 일이다
ⓒ 오창학
저녁을 먹고 2호차 일행이 당도할 때까지 투루판의 밤거리를 소요한다. 워낙 더운 지대다 보니 밤 깊은 시간이 놀기에 제격인가 보다. 사람이 많다. 흑백 텔레비전 하나를 놓고 야외영화관이 운영되기도 하고 야외 당구장이 성황이다. 여기만의 특징인지 중국 전체가 그런 것인지 유료로 키 재기를 해 주는 곳이 많다.

23:40분. 초주검이 된 2호차 일행들이 투루판 숙소에 도착했다. 차가 멈춘 후 태양 아래 고생했던 무용담, 암담한 심경과 구난, 자포님이 모친 병환으로 귀국할 뻔 했던 일 그리고 이곳으로의 이동 과정들. 고작 이틀만의 해후임에도 해줄 말도, 들어줄 말도 많은 만남이 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날이 밝으면 우린 예정대로 쿠차를 거쳐 카슈가르로 향하고 2호차 일행은 우루무치로 향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차가 빨리 수리되어 카슈가르에서 만날 것이고 늦어질 경우 타클라마칸을 횡단하는 사막공로로 뒤쫓아와 치에모에서 합류하게 되겠지. 만나자마자 이별. 그렇기에 더욱 안타까운 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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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폐허, 가오창 고성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30] 투루판 가오창 고성과 카레즈
오창학(ohmadang) 기자
▲ 천 년 넘는 세월을 흙덩이 폐허로 견뎌온 가오창 고성. 보이긴 하나 가질 수 없는 그 무엇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 오창학
아스타나 고분군을 나서 얼마 이르지 않아 가오창 고성(高昌故城)에 이르렀다. 옛 고창 왕국의 도읍으로 후한 멸망 이후 번성했던 곳이다. 장신구를 사라며 달려드는 위구르족 꼬마들의 벽을 뚫고 입구에 들어서니 작렬하는 햇살 아래 흙무더기 유적들이 펼쳐진다. 이제는 과거가 된 땅. 더구나 허물어진 형체로 남은 과거는 묘한 매력을 갖는다. 눈에는 보이는데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220만㎡나 되는 유적은 꽤 넓어 보인다. 쪼잔 하지 않아서 좋다. 둘러보기만 해도 십 리가 족히 넘고 직선 왕복이래도 최소 오 리 이상이다. 여느 때라면 십 리건 십 킬로건 문제될 바 아니겠지만 여기는 투루판! 그것도 여름날의 투루판이 아닌가. 가히 살인적인 날씨. 혀를 빼어 물고 씩씩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보지만 금세 후들거린다.

'덥다'는 표현으론 2% 부족하다. '뜨겁다' 혹은 '따갑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린다. 먼지 폴폴 날리며 몇 발짝 떼었다가 갈등한다. 과연 저 끝에 갔다가 쓰러지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까. 교수님의 눈은 자못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아내는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산 숄을 뒤집어쓰고 태양을 막는다. 독한 여인, 얼굴은 벌건데 덥다는 내색 한 점 없다.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

▲ 여름날의 고창고성은 걸어서 보기에 다소 무리가 따른다. 나귀 마차가 있어 유용한 교통수단이 되어 주는데 십여 명씩 태우고 뛰어야하는 나귀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 오창학
이 갈등의 순간을 놓칠세라 위구르족 젊은이와 소년들이 따라와 나귀를 타라며 흥정을 붙인다. 4명 100위안, 그래 좋다 4명 80위안. 제법 되바라진 이들이다. 갈등. 걷자니 용기가 안 나고, 그렇다고 이 더위에 저 연약한 짐승이 끄는 마차에 오르는 것도 마뜩찮고...

소년의 흥정가는 더 내려간다. 중국에서 터득한 흥정법 둘. 첫째, 집착하지 말 것. 내 눈빛이 자기가 가진 상품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값은 알아서 적당하게 내려선다. 둘째, 구매한 이후 남과 비교하지 말 것. 남 가슴을 아프게 하든지 자기가 아프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므로. 어차피 재화란 자신이 부여한 만큼의 값어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금강석이 비싸지 않다면 단단하고 투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박힌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시시덕거릴 수 있을까. 물건 값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인 가격만큼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

마차를 포기하고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입이 방정이지.
"싼스콰이(30위안)!"
안 탈 요량으로 내가 이 가격을 불렀다. 중국어 초급과정도 다 떼지 못한 주제에 숫자는 넙죽넙죽 잘도 주워 삼킨다.
"커이, 싼스콰이(좋아, 30위안)"
그런데 소년이 쾌히 승낙한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마차를 타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이미 정원이 초과된 마차에 오른다. 나귀를 모는 위구르 사내는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을 흉내 내고 싶은가 보다. 십여 명이 걸터앉아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마차를 질주시킨다. 수 없는 채찍질이 오가고 보얀 먼지를 단 채 나귀가 달린다.

밍사산에서의 낙타도, 고창고성의 나귀도 유쾌한 경험을 만들지 못하는구나. 교수님의 입에서 탄식처럼 나온 한 마디.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
결국 마차에 오른 우리도 공범인 셈이다.

▲ 가오창 고성의 사람들. 더위에 지친 우리는 벽이 제공하는 그늘을 따라서만 움직인다. 과거를 더듬는 일행의 표정이 제각각인데 이 와중에도 돈 셈에 열중하는 아내의 열의가 대단하다
ⓒ 오창학
나귀마차의 종착점은 대사원 근처. 대사원은 현장이 한 달 간 머물며 설법한 곳으로 일종의 고창고성 중심가다. 외성, 내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곳에 넘어가 보고, 옛 흔적을 머릿속에서 복원하며 더듬어 보는 일행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교수님은 오늘 유난히 맥을 못 추신다. 벽을 주는 그늘에 콕 갇혔다. 철봉씨는 그래도 팔팔하다.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도 난생 처음 신장에 와 보는 철봉씨는 신장의 새 구간을 넘어설 때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자랑을 한다. 그의 교포친구들 모두 '새로운 강역'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늘 속에서 돈을 헤아리며 셈에 열중하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다. 대단하다. 저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나 말고도 저토록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 아름다운 폐허 고창고성
ⓒ 오창학
고창고성은 폐허가 된 채 오랜 세월 자연으로 존재했다.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은 흙벽돌은 주위 농부들의 비료로 쓰였고 벽화의 밝은 안료 역시 강력한 거름이라고 믿어진 채 밭에 뿌려졌다. 건축물의 목자재는 이미 땔감으로 사용된 지 오래였고 고대 도시의 유적 곳곳은 경작지로 활용되었다.

그런 까닭에 1904년 이곳에 당도해 수개월 간 발굴 작업을 진행한 독일탐험대의 르콕마저 발굴유물과 벽화의 싹쓸이 행위를 '보존'으로 합리화 하는 것이다. 이는 여기 투루판 뿐 아니라 동투르키스탄(신장)을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 일대 전체가 유적과 관련한 '약탈'과 '보존' 사이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맞다. 서양인들이 발굴과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유물들을 챙긴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보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물론 르콕처럼 똥오줌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뜯어가 버린(베제클리크 천불동처럼)과격함이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들이 실크로드사 연구와 유물 보존에 공을 세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존'하다가 원주인이 달라면 이제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간의 보관료나 노력이 아깝다면 마땅한 비용을 청구하면 될 것이고. 영구적인 '보존'을 꿈꾸니 '약탈'이란 소릴 듣는 것이다.

고창고성의 흙벽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현장이 설법한 대사원. 복원의 공이기도 하지만 고창고성의 유적 중 그나마 흔적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 오창학
궁전 부근 절터에서 인도식 복발탑(覆鉢塔)이나 방형탑의 흔적이 있는데 이 장방형의 돔사원이 현장법사가 한 달간 머물며 인왕경을 설법한 곳이다. 현장이 이곳에 도착한 때는 629년이거나 630년의 어느 때였을 것이다.

당시의 불심 깊은 왕 국문태는 현장이 계속 고창에 남아 설법해 주기를 원했다.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봤지만 구법을 향한 현장이 움직일 리 있나. 현장은 비장의 무기, 단식투쟁으로 떠나고자하는 의지를 관철시킨다. 마지못한 왕은 현장으로부터 천축에서 돌아올 때 삼 년을 체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놓아준다.

그러나 역사란 무상한 것이어서 현장이 돌아올 땐 고창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당에 정복되어 있었다. 고창국 멸망 후 651년 당태종이 보낸 소정방에 의해 서돌궐이 패망하는데 9년 뒤 동쪽 끝 한반도의 백제마저 당의 군대에 짓밟히게 되는 것이다.

▲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서역의 고창고성이 무너지고 얼마 안 있어 동쪽의 백제도 무너졌다. 강대국의 대외팽창 야욕은 시대를 넘고, 지역을 초월해 지금도 계속된다
ⓒ 오창학
이런 까닭에 이역만리 서쪽 변방국의 역사가 어째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고향 가는 길에 지나치는 황산벌에서의 정회와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하다. 정결한 여인의 몸에 내 놓은 생채기를 통해 여인의 아픈 과거를 두고두고 곱씹어야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 고창고성
ⓒ 오창학
고창고성의 이런 황폐함이 7세기 당의 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13세기 원에 의해서라지만 여기 흙벽으로 서 있는 고창고성의 흔적과 덩그러니 남은 부여 정림사지의 탑이 주는 교훈은 같다.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강대국 정복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가르침.

그런 관점에서라면 고구려 유민 장수 고선지를 바라보는 눈도 다소 어둡다. 소정방이나 고선지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 입장에선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괴수가 아니었겠나. 나는 고선지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가.

가뜩이나 폭염으로 뇌가 뜨거운데 또 무거운 상념 하나를 보탠다. 옛 성에서의 기억들을 뒤로 하고 백구에 올랐다. 이제 투루판 시내로 차를 몬다.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지의 산물, 카레즈

▲ 카레즈 박물관의 지상 전시물
ⓒ 오창학
카레즈(Karez) 박물관에 들렀다. 흔히 투루판에 오면 들르는 정통 카레즈 박물관은 아니고 숙소 가는 길에 있는 소박한 곳이다. 카레즈는 봄부터 여름까지 톈산(天山)의 눈 녹은 물이 지표면에서 증발되지 않고 거주지까지 흐르도록 파놓은 지하수로를 일컫는다.

만약 톈산 산맥의 눈 녹은 물과 여기 카레즈가 없다면 유명한 투루판의 포도 경작은 물론이요 인간의 생존여부마저 불투명하였을 것이다.

카레즈는 투루판 뿐 아니라 하미에도 약간이나마 존재하며 주로 여기와 같은 건조지대인 이라크, 터키, 아프카니스탄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수로양식인데 원조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투루판에 현존하는 카레즈는 주로 청대에 보수된 것으로 물길 2000여 개, 총연장 500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생각게 하는 시설이다. 그러나 이 역시 환경파괴와 인구증가로 고갈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거듭 시험해야할 때가 올 지도 모르겠다.

▲ 지하의 물은 시음이 가능할 정도로 깨끗하다. 지하 십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깊이에 뚫린 수로는 더위에 지친 투루판에서 훌륭한 피서지다
ⓒ 오창학
지상엔 모조로 카레즈 우물의 모습과 작업 과정, 작업 도구 등을 전시해 놨고 지하엔 실제 흐르고 있는 카레즈를 볼 수 있도록 꾸며 놨다. 지하수로에 다다르니 땅굴처럼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내내 투루판의 태양에 익은 몸을 한껏 식혀준다. 카레즈의 구조를 직접 볼 수 있어 의미 있는 곳이지만 피서지로서도 최적의 공간이다.

카레즈의 싸늘한 한기를 아쉬움으로 남기고 나서는데 입장할 때 만났던 잘 생긴 위구르인 사내가 따라 붙는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란다. 한국관광객을 상대하는 가이드가 꿈인 그의 한국동경이 만만치 않다. 이곳에서도 한류의 바람을 느낀다.

카레즈 박물관을 나서는 길에 위구르 노인에게서 포도를 사 즉석에서 베어 문다. 투루판을 흔히 최열(最熱), 최저(最低), 최한(最旱), 최감(最甘)의 땅이라 말하는 연유를 알겠다. 투루판의 악명 높은 더위(최열)와 해수면보다 낮은 고도(최저), 그리고 건조함(최한)이야 익히 들어 알고, 체험해 알았는데 이제 먹어보니 포도의 맛 또한 가히 환상이다(최감). '최열'과 '최한'이 빚어낸 부산물이 '최감'이 되는 셈이다

21세기 신장, 양고기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 투루판 시내의 풍부한 먹거리. 21세기 신장에선 양고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도 좋다
ⓒ 오창학
낮 사이의 폭염이 거짓인 듯 저녁은 그런대로 시원한 느낌이다. 습도가 적으니 한국의 여름밤과는 다른 맛이 난다. 끈적거림이 없어 살겠다. 야시장을 보며 느긋하게 투루판 시내를 배회하고 숙소 근처 식당에 앉는다. 일종의 화꿔 뷔페인데 원하는 만큼 내용물을 가져다 넣고 먹은 만큼만 돈을 낸다.

신장에선 음식 때문에 고생할 거라 한 이가 대체 누구야. 신장에 왔으니 양고기 요리도 좀 먹고 그러고 싶지만 막상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 한족 덕분에(?) 풍부한 먹거리가 기다리는 투루판. 이제 21세기 신장에선 양고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도 좋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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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땅 투루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희망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9] 하미에서 투루판까지
오창학(ohmadang) 기자
▲ 하미에서 투루판 가는 길. 길은 곧게 하늘로 뻗어있는데 바람이 심하다
ⓒ 오창학
백구, 홀로 되다

이젠 완연한 혼자다. 1호차 백구만 하미의 숙소를 나섰다. '자유롭다'고 말하기엔 외롭고 우울한 정도가 깊다. 2호차는 정비소에 묶여 잘하면 오늘 늦게, 어쩌면 내일이나 수리가 될 것 같다.

2호차의 팀장이신 에릭님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호차 먼저 출발하라고. 투루판에서의 일정이 2박3일이니 기다리고 있으면 곧 합류하겠노라고, 모든 이들에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원래부터 1호차에 탑승하고 있던 나와 아내 그리고 교수님과 안내원 철봉씨는 투루판을 향해 출발하고 2호차에 탑승해 있던 에릭님과 자포님, 나리님은 하미에 남았다.

이들을 두고 떠나는데 마음 한 켠이 이상하다. 어차피 잠시 후엔 만날 텐데 하며 자위해 보지만 이 헤어짐이 장기화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습관적으로 켜 두었던 무전기를 끈다. 아, 이젠 혼자지…. 침묵하는 무전기가 어색하다.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어제 가다 만 익숙한 길이어서 차는 수월하게 움직였다. 길은 곧게 뻗은 일직선. 아스팔트의 까만 선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길 가의 표지판 '녹색통로(綠色通路)'는 이 길을 이르는 말이리라.

길은 평탄한데 강풍이 분다. 차가 좌우로 심하게 쏠린다. 흡사 바람 부는 날 영종대교를 주행하는 느낌. 불안을 느낀 아내가 운전대를 내게 넘긴다. 시속 80~90Km를 유지하며 저속운전하는 방법밖엔 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투루판, 우루무치를 비롯한 이 일대가 풍력발전소가 많은 곳이다.

드넓은 똥밭, 엔돌핀의 미이라들

갓길 없이 일 자로 곧은 도로에 모처럼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차 안에 있은 지 벌써 3시간, 이제 신호가 올 때도 됐다. 차를 세우고 각자 위치를 잡는데 아무리 노상방뇨가 익숙해졌어도(후안무치라 욕하지 마시길. 만일 화장실을 찾아 소변을 봐야 한다면 하루에 두 번, 혹은 한 번도 어렵다) 바로 옆에 차가 지나는 마당에 좀 민망하다 싶어 도로 아래로 내려섰다가 깜짝 놀란다.

오! 드넓은 똥밭이여. 전후좌우 간격 1m, 혹은 50cm간격으로 배설물이 가득하다. 똥의 미이라들. 이미 다 말라 바삭바삭해 본연의 향도 색도 잃은 과거의 자취들. 설사 어제 나온 신선한 것이라 해도 신장의 태양 아래선 금세 이 모양으로 변하리라.

▲ 간만에 나타난 정차공간 옆 똥밭. 엄청난 밀도를 자랑하는데 사진에 별반 성글어 보이지 않는다
ⓒ 오창학
인지상정. 이 수많은 똥의 주인들이 겪었을 공통의 과정을 떠올려본다.

'기분 좋게 차를 타고 가는데 살살 신호가 온다. 한 시간을 참아 봤는데 이젠 안 될 것 같다. 염치 불구하고 아무데라도 서서 일을 치르고 싶은데 갓길이 없는 상황에서 도로를 막고 차를 세웠다간 사고로 이어질 터. 다시 한 시간을 참고 자리를 찾아 운전을 계속한다. 드디어 괄약근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고 식은땀이 이마와 뺨을 흠뻑 적실 때 저만치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미친듯 뛰어내려 아직 잠식되지 않은 터를 찾아 시원하게 흔적 하나를 남긴다'.


뭐 이런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겠나. 이 많은 똥미이라들은 고통받던 중생의 시원한 흔적이 되는 셈. 굳어진 엔돌핀이야. 그리 생각하니 똥밭에서 오줌을 누는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배설 앞에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공평했으리라.

다시 길을 간다. 둔황 이후의 길에선 운전이 즐겁다. 갈림길에 대한 고뇌도 없고 혼돈 그 자체인 중국의 교통상황에 대한 우려도 없다. 눈은 항상 지평선 쪽에 닿아 있고 발은 그냥 가속패달 위에 얻은 채 그대로다.

추월 때마다 방향지시등을 켜고 주행하는 승합차 한 대를 발견하고 마음이 밝아진다. 중국에도 방향지시등을 켜는 차가 있다! 운전자가 보고 싶어 일부러 그 차를 추월해 본다.

가족들인 것 같은 일군의 사람들이 승합차 안에 있다. 외국인 차량임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도 답례. 보닛 위에 한글로 된 역사탐험 부착물을 붙인 게 잘 한 것 같다. 한류의 영향인지 한글을 보고 반가워 할 때가 많다.

싼싼(善善)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승합차와 함께 왔다. 서로 추월할 때마다 인사를 나눴으니 열 번도 넘게 눈인사를 나눴으리라.

신장 따판지

▲ 싼싼의 길가에서 들른 음식점. 신장 따판지를 맛있게 먹었다. 우락부락한 회족 주방장은 솜씨도 있고 싹싹하다
ⓒ 오창학
13시 20분. 싼싼 시가지에 들어 처음 발견한 길가 음식점에 차를 세웠다. 2호차와 분리되어 움직인 후 일어난 첫 번째 변화다. 음식점을 찾아 음직이지 않게 된 것. 교수님이나 나나 갈 길 남겨두고 어딘가에 머뭇거리는 일에 대한 부담이 크다. 그러니 빨리 먹고 움직이자는 속.

그러나 빨리 먹고 일어나자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신장 따판지(大盤鷄)를 시켰더니 닭 한 마리가 더디게, 푸짐하게 요리되어 나온다. 식당 옆 좌판에서 파는 과일들, 이보탕 (1위안), 홍성쉐이 (1.2위안), 하미과 (1.8위안)를 사다가 잘라 달래서 곁들이니 이만한 만찬이 없다.

결국 푸짐한 음식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놓으려니 하미에 남겨진 2호차 분들이 눈에 밟힌다. 왜 같이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까. 친절하게 메뉴를 점검하고 음식을 선정해 주던 에릭님, 맛있게 드시며 개개의 음식에 대해 품평하고 식사를 풍성하게 한 자포님 그리고 시끌벅적 한껏 흥 나는 분위기를 연출하던 나리님.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지. 그렇담 이 여행에서 그리고 이 순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2호차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선다. 이제는 정말 혼자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럿이 함께하는 혼자다.

사실 신장에 들어서며 은근 음식에 대한 걱정을 했더랬다. 소문에 듣자하니 신장에 가면 온통 '낭(위구르족의 전통 밀가루빵)'과 '양고기'로만 매 끼를 채울 줄 알았다. 누구의 표현대로 '양기름에 비빈 밥… 아니면 밥에 양기름을 비빈 것'들만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없어도 그 외의 음식은 선택할 만하다.

따판지 요리를 해준 주인 사내는 흡사 역도 선수같이 우락부락한데 살갑고 싹싹하기는 여자보다 더하다. 흰모자를 쓰고 있어 회족이냐 물으니 맞단다. 옆 식당의 위구르족 여인과 아는 체를 한다.

몸은 갸날펐으나 눈이 크고 예쁜 호리호리한 얼굴이다. 여러 인종의 땅, 이곳은 신장인 것이다. 이제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위구르인 중심이겠지만 톈진에서 여기까지의 인종 변화로도 신기하기만 하다.

불의 땅, 투루판

▲ 투루판의 상징 화염산에 앞에 선 백구. 손오공이 화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이 산은 10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마치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린다
ⓒ 오창학
15:30 싼싼을 떠난 지 한 시간이 넘어 투루판에 닿았다. 과거의 지명은 '화주(火州)' 그야말로 불의 땅이다. 붉은 사암으로 형성된 산과 토양 때문일까. 이 땅은 더 붉게 타는 것 같다.

투루판 진입 32Km 전 베제클리크 천불동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계곡으로 진입 5.5Km를 더 가니 천불동. 또 약탈 운운하며 벽화 없는 빈자리 앞에서 열 올릴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아 이 석굴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베제클릭이 위치한 실제 지형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베제클릭을 나와 큰 길에서 8km정도 진입해야 고창고성이 나오는데 그 바로 직전 좌측에 아스타나 고분군이 있다. 중국어로는 어쓰타나(阿斯塔那) 구펀췬이지만 이 역시 음차이니 내겐 그냥 '아스타나(Astana)'다. 위구르 어로 "영원한 휴식"이란 뜻인데, 고창성에 살다간 귀족들의 공동묘지다.

▲ 아스타나 고분군의 입구 건물.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고분군으로 나가기 전 십이지상이 서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오창학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허허 벌판에 무덤들만 있었다는데 지금은 버젓한 건물로 입구가 치장되어 있다. 이곳을 찾은 이는 우리 단 네 명 뿐이다. 조성된 담장을 벗어나면 이내 그냥 허허 벌판인 묘역이다. 그 중 몇 개의 묘를 개방해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놨다.

묘역에 들어섰는데 투루판 더위의 악명을 증명하려는 듯 태양은 한층 가열차다. 살도 따갑고 숨도 가쁘다. 몇 분이라도 양지에 서 있으려면 까뭇거리는 정신을 여러 차례 추스러야 할 지경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구 옆에 투루판 기후표가 크게 걸려있기는 했다.

▲ 더위가 가득한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 오창학
연 평균 강수량 16mm, 증발량 3000mm. 1월엔 -24도까지 내려가고 7월엔 50도까지 오른다. 매표원의 말로는 오늘이 48도란다. 어쩐지…. 오늘 태양, 아니 여기 태양 예사롭지 않다 했다. 사방이 분지이어서 갇힌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곳. 그래서 뜨거운 사막 지대 신장 내에서도 가장 뜨겁다는 곳이 여기 투루판이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 고분군

▲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내려가는 통로. 묘실을 보고 다시 이 계단을 오를 때의 느낌이 새롭다
ⓒ 오창학
열기로부터 도망치듯 묘실로 파고든다. 비스듬히 나 있는 계단은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난 통로다.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기분까지는 아니어도 지하 무덤으로 들어가는 공간은 을씨년스럽다.

부부 미이라 한 쌍이 좌우로 전시되어 있다. 그 을씨년스러움의 근원은 이들 때문이었을까. 진짜 무덤에서 만나는 미이라는 박물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곳의 건조한 기후가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는다. 덕분에 영혼이 떠난 육신은 '전시물'로 무덤을 지킨다. '영원한 휴식'의 장소에서 '휴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깝다.

경망스럽게도 죽음은 늘 내 주변 한 발치께서 서성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주실만큼이나 미약하고 가볍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겪은 혈육친지와 지인과의 이별. 안타깝게도 죽음엔 서열이 없었다. 열 일곱, 스물 여덟, 마흔 아홉, 일흔 여섯.

교통사고 후 대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빚이 많은데…." 한 마디를 마치고 긴 잠에 빠지셨다. 회복불가능이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구급차 안에서 굳어가는 아버지의 몸을 느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열흘 사이의 이별, '몸'이 '물체'로 변하던 때의 느낌.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7년 넘게 산소에 들를 적마다 눈물을 보였더랬다.

▲ 사막의 건조한 기후로 자연 미이라가 된 부부가 좌우에 누워있다. 죽음에 대한 상념에 아내를 건드리니 화들짝 놀란다
ⓒ 오창학
이제 '물체'로 남아 유리관 속에서 전시물이 된 저들이 더욱 안타깝다. 아내도 어떤 느낌이 있는 것일까? 무덤 안에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혼자 산다던 여인.

참 집요한 내 꾐에 넘어가 혼인하게 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운다. 왠지 자기가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아 슬퍼졌단다.

늙고 힘없어, 그저 사방에 켜켜이 쌓인 옛 추억이나 갉아먹으며 살아야 할 때 그 때 자신의 옆에 내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냐고, 그래서 울음이 나왔단다. 어이없는 기우라며 웃음으로 일축했지만 내심 내 가슴도 울었더랬다. 항상 죽음은 현실의 문제였으므로.

그래서였을까? 연애 시절의 종지부를 찍고 부부로 살자고 보낸 서신도 이런 짧은 글이었다.

"不求同年同月同日生 但願同年同月同日死(한 날 한 시에 나기를 구하진 못하였으나, 다만 바라옵기는 한 날 한 시에 죽는 것이라)"


<삼국지> 도원결의 서약 중 한 글귀다. 그리 될까? 우린 어느 한 쪽이 불행하지 않도록 같은 날 같은 시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죽어서도 함께 있는 저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내와 저렇게 한 곳에 묻힐 수 있을까? 이런 상념으로 앞에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쥔다.

"꺄악!"

돌아온 대답은 외마디 비명. 으스스한 묘실 기운에 긴장해 있던 아내가 비명으로 화답한다. 동상이몽이다. 참 분위기 깨짐이다.

▲ 무덤 주인의 고향에 자랐다는 남방지역의 식물과 새. 그는 죽어서라도 고향에 갈 수 있었을까
ⓒ 오창학
또 다른 무덤엔 부장품으로 그린 벽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무덤 주인의 원래 고향은 남방 지역이었으나 타관인 이곳에까지 흘러들어와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기에 생전에 그리워하던 고향의 나무와 풀 그리고 새들을 벽화로 꾸몄다. 죽어서나마 넋이 고향으로 가라는 배려였지만 그는 고향을 다시 갈 수 있었을까.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다.

무덤 두어 개를 더 보고 밖으로 나왔다. 교수님은 예외 없이 이 부근 전설과 신화, 지역정보에 관한 책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바쁘시고 아내는 언제나처럼 장신구 판매대 앞에서 안광을 밝힌다.

나는 공원 내 설치된 십이지상 앞에 서성인다.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사시고, 아내는 더위에 질렸는지 매점 아가씨가 쓰고 있는 두건을 샀다. 나는 같은 띠인 쥐 석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의 상념을 뒤로 하고 우린 제각각 여행의 일상으로 돌아선 것이다.

하미-투루판 여정도


2호차와 분리된 여정이 시작되어 하미에서 투루판에 이르는 420Km 주행. / 오창학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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