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사막에서 증발해버린 2호차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20] 우웨이에서 내몽고 고비사막 바단지린 속으로
오창학(ohmadang) 기자
▲ 우웨이 시가지 전경.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도시의 풍경이다
ⓒ 오창학
드디어 사막으로!

우웨이(武威). 한무제 때 곽거병의 대군이 이 일대를 점령했다. 이 때 설치한 한서사군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둔황(敦煌) 중 동쪽 첫 번째 도시가 여기 우웨이다. 당나라 때 '서늘한 도시' 양주(凉州)라 불렸던 이곳은 고선지 장군의 아버지 고사계가 장교로 복무한 하서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다.

늦은 아침의 햇살이 이토록 따가운데 고구려의 패망으로 먼 이국에 끌려와 여기 먼 사막 서쪽에 배치되어야 했던 그들의 삶이 눈물겹다. 이미 네모반듯한 현대 도시로 변한 우웨이에서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지만 그저 그들이 숨쉬고 머물렀던 곳이라는 느낌만으로도 감회는 남과 같지 않다.

이후 당의 세력 확장에 따라 고사계는 더 서쪽 지역으로 이동해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에 이르고 아들 고선지 또한 무관으로서 서역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우리 일행도 그곳에 닿게 될 것이다.

오전 10시까지 늘어지게 자서인지 몸 상태가 어제보다는 한결 낫다. 내가 잠든 사이 다른 일행은 박물관을 다녀오고 산책을 하며 알찬 아침을 보낸다. 일행의 집결을 기다리며 차량을 점검한다.

▲ 출발 전 차량점검. 매일 빼놓을 수 없는 통과의례다.
ⓒ 오창학
요 며칠의 무리 때문에 더러워진 에어크리너도 털어냈다. 엔진오일의 양도 줄어 있어 800cc가량을 보충했다. 한국에서 광오일이 아닌 합성오일(앰스오일)로 채웠던 탓에 중도 교환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만 소모되는 양에 대처할 보충오일 정도만 준비해 온 것인데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느 시점에서 중국의 광유로 교체해야할 지 모르겠다.

냉각수와 브레이크 오일, 엔진 누유 여부, 각종 벨트들, 타이어 공기압, 전조등, 하체 차동축과 서스펜션, 계기반의 상태를 살펴본다. 매일 아침 반복하는 일임에도 오늘은 각별히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드디어 사막으로 향하는 날인 것이다. '황량함' '죽음' '절대고독' 뭐, 이런 그럴싸한 단어들이 풍기는 겉멋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온전한 실크로드의 유적이란 오직 삭막한 사막 뿐인 탓에 꼭 가고 싶었던 곳이다.

일단 우웨이에서 장예 거쳐 주취안에 이르는 하서주랑 길을 버리고 네이멍구(內蒙古) 고비사막인 '바단지린(巴丹吉林)' 지대로 들어가려 한다. 이후 네이멍구 자치주의 아라싼여우치(阿拉善右旗)를 거쳐 내일 하서주랑으로 다시 들어와 만리장성의 서쪽 끝 지아위관(嘉峪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차량과 적재물 점검이 끝나고 차를 몰아 숙소 인근의 가게로 갔다. 오늘 찬거리와 생수를 구입한다. 두 차 모두 20L 물통이 실려 있지만 행여나 싶어 30여 개의 생수를 또 구입했다. 사막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믿을 건 물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식량(햇반과 라면, 통조림 등)이 고스라니 실려 있으니 물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다.

차량이 두 대여서 위성전화기는 준비하지 않았다. 상황이 좋다면 한 대가 다른 한 대를 견인하면 될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한 대가 빠져나와 구조를 요청하면 될 것이므로.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두 대 모두 고장이 나거나 탈출할 수 없는 지형에 갇힌다면?

물을 지고 장정 둘이 구조요청을 향해 떠나고 나머지는 조난지점을 이탈하지 않는다. 만약 인근 오아시스나 도로까지 겨우 100Km 거리라면 사막에서의 1일 물 소요량이 2L, 빠지는 모래 사막이 아니라면 1일 20Km까지의 행군이 가능하고… 그러면 구조요청일까지 총 5일 소요, 물은 10L가 필요하다는 얘기. 물 10L와 5일치 식량을 지고 사막을 걷는다… 흠. 에라, 그냥 길에서 100km 이상은 절대 벗어나지 말자.

우웨이에서 다시 만난 김일제

▲ 신라왕족의 조상이라는 김일제의 석상
ⓒ 오창학
우웨이를 떠나기 전 인민공원에 섰다. 김일제 석상이 있어 깜짝 놀랐다. 한무제가 격파한 흉노의 아들이 김일제. 금인제천의식 때문에 무제가 김씨 성을 주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그. 신라 문무왕비의 내용을 믿는다면 그들은 흉노족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다. 뤄양의 백마사에서, 그리고 시안의 무릉 근처 김일제의 묘에서 가졌던 의문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이 곳 우웨이는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의 활동무대였다. 휴도왕이 이웃 흉노왕인 곤사왕(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자 김일제 형제와 그의 어머니는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는데 일제의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 이 때 그의 나이 14세였는데 무제가 잔칫날 말을 검열할 제 말을 끌고 어전 앞을 지나던 수십 인이 왕의 후궁들을 흘끔거렸으나 뚝심있고 선 굵은 김일제만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지.

용모가 엄숙하고 훤칠한 데다(키가 8척 2촌) 일제가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찌고 훌륭한 지라 무제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출신을 물었단다. 이에 일제가 자신의 내력을 밝히니 무제가 기특하게 여기고 군마를 관리하는 마감(馬鑑) 벼슬에 임명했다. 이후 무제를 암살하는 자객을 한 눈에 알아보고 저지함으로써 무제의 총애를 얻고, 훗날 '투후'벼슬에까지 봉해진다.

이후 그들의 후손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신라왕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오늘날엔 꽤 설득력을 얻고 있는 설이어서 이국에서 만난 석상 하나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다.

우웨이의 김일제 상은 한반도에서 온 나그네의 생각을 읽는지 못 읽는지 말지기를 하던 때 모습 그대로 인민 공원을 지키고 있는데 그 뒤로 청동분마상(靑銅奔馬像)이 우뚝하다.

▲ 마답비연상. 지금의 실크로드 전역에 관광지 상징으로 조상되어 있는데 이곳 우웨이가 본산지이다
ⓒ 오창학
우웨이를 대표하는 상징이 청동분마상이다. 비록 란저우의 간쑤성 박물관에 있는 실물을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본고장에 우뚝 선 모형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말의 빠름을 강조하기 위해 제비를 밟고 있는 모습이어서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이라 하는데 1969년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로 방공호를 파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하늘에 가득 그의 목청이 울릴 듯, 입은 포효하고 발동작은 거세다. 왼쪽으로 살짝 뒤틀린 목은 역동적이다. 조형적 아름다움이야 그렇다 쳐도 제비를 밟고 뛰는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말의 빠름을 강조한 고대인의 재치가 상큼하다. 공원 높은 대(臺) 위에 뛰는 말이 하늘을 날고 있다. 그야말로 고대인들이 간절히 원했던 천마가 저기 있다.

▲ 진창(金昌)에서 수박을 파는 농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그의 이마에 삶의 골이 깊다
ⓒ 오창학
14시 드디어 우웨이를 벗어났다. 쫙 빠진 고속도로를 달려 융창(永昌)을 지나쳐 진창(金昌) 가는 길로 오른 때가 15시30분. 전형적인 시골 소도시인 진창에서 바단지린 사막 진입로를 못 찾고 헤매다 수박을 샀다. 1근에 얼마로 해서 9근짜리(중국 농산물의 1근은 500g. 여기는 수평저울에 무게를 잰다) 8근짜리 두 개를 4.5위안에 샀다.

낡고 때 묻었지만 목까지 단추를 가지런히 잠근 농부.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수확한 산물을 이 값에 넘기는 그에게서 삶의 무게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무언가를 싸게 사서 마음이 아픈 건 또 무슨 감정이냐. 16시45분 물어물어 진창을 떠났다.

▲ 고비사막 진입 전의 오아시스 지대
ⓒ 오창학
한참을 달리다 보니 슬슬 사막 냄새가 풍긴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뻗은 길이 비로소 사막으로 통하는 관문인양 뻗어있다. 한 무리의 양떼가 지나간다. 이곳에선 차가 길의 주인이 아니다. 날은 찌고 따가운데 그늘 밑은 제법 쉴만하다.

잠시 차를 세우고 일들을 봤다. 무슨 일을 봤냐고 묻지 마라. 무슨 일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 하지 마라. 남자들은 알아서 차 주위에 포진하고,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 이제 사막 속으로!
ⓒ 오창학
아직은 차가 도로 위에 있다. 시안 이후 우웨이까지 따지고 보면 사막 아닌 길이 있었겠냐만 푸석한 모래층이 깔렸다고 다 사막일 수 있으랴. 수분의 마르듯, 그렇게 상념도 증발할 것 같은 공간, 그곳이 사막이다.

사막의 배 낙타

아라싼여우치까지는 지도상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이대로 달리면 된다. 눈은 지평선에 머물고 운전대를 잡은 손은 고정되어 있다. 차는 100Km 속도를 유지하는데 좌우의 풍광은 멈춰선 채 그대로다.

아.......사방이 불타는데, 지평선 근처엔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피는데 꾸물거리는 장애물이 얼핏 보인다. 낙타다. 수십 마리의 낙타가 풀(엄밀히 말하면 가시나무)을 뜯다가 도로를 넘어 다른 쪽으로 몰려 간다. 이 녀석들이 놀란 것인지 반가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에 제법 익숙한 표정이다.

▲ 사막에서 조우한 낙타. 쇠로 지은 우리들의 낙타가 진짜 낙타와 마주했다
ⓒ 오창학
도대체 무슨 생명이 있을까 싶은 곳에 이 녀석들이 있다. 다리는 굵고 발바닥 표면이 각질화 되어 있다. 또한 넓어 모래에 잘 빠지지 않으며 모래의 뜨거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이중 눈꺼풀에 개폐가 가능한 콧구멍. 게다가 귓구멍 주위의 털도 길다. 튼튼한 혀와 이는 사막의 가시풀인 타마클리스를 먹을 수 있다. 인간의 피부엔 닿기만 해도 생채기가 나는 저 풀을, 아니 가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

단번에 100리터의 물을 먹고는 물 없이 3일에서 일주일을 견딘다. 인내를 뽑아내면 20일까지도 생존한다. 단봉낙타는 타기에 좋고 쌍봉낙타는 짐을 실어 나르기에 적당한데 200kg의 짐을 지고 매일 30km씩 일주일을 행군할 수 있다. 바로 이곳 고비사막이 쌍봉낙타의 고향이다.

우리의 철낙타 백구와 파라곤. 바퀴는 굵고 표면은 각질화 되어 있다. 또한 홈은 깊어 모래에 잘 빠지지 않으며 뜨거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75리터의 연료를 마시고 보급 없이 600km를 달릴 수 있다. 400kg의 짐과 5인의 사람을 태우고 끝없이 행군할 수 있다. 출생지는 다르지만 이들은 이곳을 위해 태어났다.

차를 가로막은 낙타가 느리게 되새김질 하며 눈을 꿈뻑거린다. 백구도 거친 숨을 고르며 응시한다. 서로를 알아본 탓일까? 권태를 되새김질하는 저 낙타만이 이곳의 생명체다. 물론 방목한 낙타들의 수를 헤아리러 얼마 만에 한 번씩은 사람이 나타날 게다. 이곳은 시간이 멈추어진 세계. 오늘이 어제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곳이니 뜻밖의 조우가 반가웠을 터.

다시 달리는데 무전기(CB) 교신이 되지 않는다. 거리가 가까운 데도 먹통인 것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가보다. 차창으로 팔을 빼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신호를 보낸다. 주행 중일 때 무전기를 점검하라는 신호.
"채널이 돌아갔었네요"
금세 대답이 온다.

고마운 녀석이다. 무슨 일인지 교신거리가 채 200m도 되지 않고 있지만 차량 2대가 한 몸으로 묶일 수 있도록 만든다.

사막에서 사라진 2호차

한참을 달리는데 왼편으로 길 같잖은 길이 사막 깊은 곳으로 뻗어있다. 주변은 온통 모래뿐, 지형지물이 없으니 지도와 대조하지 못하겠다. 네비게이션 상의 위성 좌표로 분간을 해 보려다 까뭇 잠든 철봉씨를 깨우기 난처해되는 데까지 가보자 맘먹고 달렸다.

▲ 오아시스에서 길을 묻는 사이 2호차가 사라졌다
ⓒ 오창학
18시14분. 이게 아닌데 싶은 곳까지 달려오니 너덧 가구 사는 것 같은 오아시스가 보인다. 차를 세워 나무 그늘의 사내에게 아라싼여우치 가는 길을 물으니 방금 전에 지나쳐 왔단다. 아까 지나쳐 온 갈림길의 좌표가 위도 39도 9분 5초, 경도 112도 34분 0초. 화얼원을 20Km 지나쳤다. 다시 차를 돌려야 한다. 무전으로 2호차를 부르니 침묵. 또 채널이 돌아갔나 생각하는데 2호차가 보이지 않는다. 길을 묻는 사이 2호차가 우릴 앞질러 간 것이다.

서둘러 2호차가 사라진 길로 쫓아갔다. 처음엔 그냥 속도내서 따라가면 만나려니 했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도 외줄기 뿐인 이 길에서 앞지른 2호차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론 한 팀의 차가 보이지 않으면 속도를 줄이고 주행하든가 정차해서 기다릴 텐데 가도가도 만날 수가 없다니.

▲ 외줄기뿐인 이 사막의 길에서 2호차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냐.
ⓒ 오창학
혹 이곳에 4차원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어 그 곳으로 증발된 것은 아닐까? 날 놀리려 보이지 않는 구릉 뒤에 숨었나? 별 해괴망측한 상상을 다 한다. 아무리 무전을 해도 답신이 없다. 하긴 주행 중엔 도달거리 200m도 되지 않는 차량용 생활무전기(CB)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차를 잡아낼 리 만무하다.

혹 어딘가에 전복된 것은 아닐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아무 일도 생긴 게 아니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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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정한 목표는 '무사귀환!'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9] 병령사 석굴에서 우웨이(武威)까지
오창학(ohmadang) 기자
▲ 병령사 석굴 계곡.
ⓒ 오창학
십만 부처의 땅 병령사 석굴

병령사(빙링쓰) 입장료는 60위안. 169굴과 172굴을 보려면 따로 300위안을 더 내야한다. 그래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배 타고 예까지 왔는데 보기 싫으면 그냥 가라는 똥배짱. 수백 위안을 들여 50분 가까이 쾌속정으로 날아왔는데 입장료가 비싸다고 발길 돌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참 멋있는 놈들이다.

옛 실크로드는 지금의 물 아래 잠겨있다. 4∼5세기 북위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향후 1000여 년 넘게 황하유역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곳이다.

지금의 '병령(炳靈; 빙링)'은 송대에 붙여진 명칭으로 '선파병령(仙巴炳靈)', 즉 '십만 미륵부처님의 땅'이란 티벳어를 음역한 것이다.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천불동(千佛洞)'인 셈인데 현재는 183개의 석굴이 황하기슭을 따라 약 2Km가량 펼쳐져 있다.

송(宋)대에는 토번(吐蕃; 티벳)이나 서하(西夏)의 침입에 대처하는 요충지였던 까닭에 공양객이 줄을 이었고, 석굴의 개보수 또한 활발했다.

황하의 물줄기가 얕았던 까닭에 이곳을 통해 황하를 건넜던 실크로드의 상인들도 여기에서 무사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 아내는 참 절을 잘 한다. 작은 나무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심성, 그것이 신앙일 게다
ⓒ 오창학
아내는 참 절을 잘한다. 딱히 '신도'의 허울을 쓰고 있지 않으면서도 서낭당이든 절집이든 기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손 모으길 주저치 않는다.

무언가에, 누군가에 고개를 숙이는 일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진 데, 내겐 왜 그토록 어렵기만 한 걸까. 유홍준 교수의 글이던가? 하찮은 나무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고.

아내에게 무엇을 빌었느냐 물었다.

"비밀."

무엇이면 어떤가, 설마하니 자기 혼자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 병령사 석굴의 소불상들
ⓒ 오창학
사암재질의 석벽을 따라 잘 만들어진 순회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석굴과 불상들을 손에 닿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철창과 테두리 속에 갇혀 있지 않아 보기 좋다. 덕분에 훼손의 시일이 앞당겨질지는 모르지만.

몇 걸음 걸었나 싶을 때 171굴의 당(唐)대 석조대불과 만나게 된다. 병령사 석굴의 상징인 27m의 떡대가 시선을 압도한다. 몸통 위쪽은 석벽을 쪼아 만든 것이고 하체는 진흙으로 만든 조소이다.

▲ 171굴의 대불. 병령사의 마스코트다
ⓒ 오창학
그 옆으로 굽이굽이 난 계단은 169굴에 오르는 길. 물론 300위안을 바친 자에게만 허용되는 천국의 길이다.

저 굴에서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최소 420년경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곳 병령사 석굴 중 가장 큰 굴이고, 그만큼 가치 있는 다량의 벽화와 불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 북쪽의 172굴은 북주 이후 시대별로 중수되었고 내부에 목조 삼세불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 300위안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

▲ 병령사 계곡에서 있었던 일. 사건 전개 순서는 좌에서 우로.
ⓒ 오창학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내 눈은 계곡 속에 있는 사륜 구동에 고정된다. 참 낡은 차종이다 싶고, 이 협곡 사이로 관광객을 태우고 나돌아다니는 게 신기해서 한참을 보는데 차가 고장이 난 모양이다. 보아하니 러시아제 우아즈(UAZ)의 중국 카피판 같은데, 엔진부에 손잡이를 붙여 경운기 발동하듯 시동을 거니, 언제 적 유물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한 무리의 중국 관광객들이(운전자까지 무려 10명이다, 차 한 대에) 재잘거리며 다른 차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났다 싶을 때 멀리는 구조차가 달려온다. 관광객들이 반갑게 올라탄다. 차는 유유히 온 길을 되짚어 질주한다… 싶었는데, '빵!'

협곡의 양 벽이 메아리쳐 울린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흡사 소총 발사음 같다. 출발한 지 겨우 200여m. 이제 그 관광객들의 운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잘거리며 협곡을 걸어 나온다. 계곡엔 주인 없는 차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늘 우아즈의 체면이 영 아니다. 덕분에 내 눈은 즐거웠지만.

▲ 척박한 알모래 위에서. 간쑤성에서 부턴 햇살과 친해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 오창학
계곡으로 내려가서 병령사를 올려다본다. 위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자동차 여행에서 느낀 점.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과 차문을 열고 내려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사뭇 다르다. 절충이 필요하다.

이왕 내려선 것, 출구까지 계곡을 따라 걷는다. 언뜻 보아선 계곡 위로 올라설 길이 보이지 않는데 어차피 이 끝은 출구와 만나겠지 하는 마음이다.

피부가 바삭바삭하고 발등이 따끔거린다. 이곳 간쑤성에서부터는 햇살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우웨이에 닿으면 내일은 네이멍구(내몽고) 고비 사막으로 들어갈 텐데 그 곳의 태양은 또 어떨까?

배변의 추억

▲ 문이 없는 중국식 화장실. 이럴 때 아는 사람이 들어선다면? 그래도 다행히 칸막이는 있다
ⓒ 오창학
병령사를 나서는데 속이 좋지 않다. 일찍이 자포님은 속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는데, 내게도 신호가 오는가 보다. 요금을 내고 들어선 화장실이라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재래식에 문 없는 화장실이다.

올림픽을 앞둔 중국의 열성으로 대도시는 수세식에 문 달린 화장실이 대세인데, 이런 유명 관광지의 화장실치고는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굳이 이런 유형의 화장실이 거북스러워하는 성격은 아닌데, 다만 여기서 일행과 마주칠까 하는 염려가 쾌적한 배변을 방해한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철봉씨, 에릭님, 자포님, 나리님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교수님은 내 은사님이고 우리 부부의 주례선생님이신데, 굳이 이렇게 원초적인 모습까지 공유하고 싶진 않다.

아니 천 번을 양보해서 내가 이럴 때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것까지는 감내할 수 있다고 치자. 혹여 교수님 일 보시는데 제자인 내가 들어선다면? 거참…,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도 이 화장실은(사실은 '변소'라는 이름을 써야 정확한 어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옆 칸막이가 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아는 사람과 서로 엉덩이 사이로 떨어지는 배설물을 확인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여행은 참으로 작은 부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친다. 퍽도.

'무사귀환'이 여행의 목적이라니...

병령사를 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 류자샤 선착장으로 왔다. 주차해 둔 백구에 다시 오른 시간이 오후 5시 20분. 다소 늦은 시간이지만 우웨이(武威)까지는 달랑 277Km니 해 있을 때 안 들어가겠나 생각하며 시동을 켜려는데…, 어라? 차량의 시계가 이상하다.

대시보드의 전자시계가 한 시간 빠르게 돌고 있다. 길 떠난 지 13일. 중국 땅을 밟은 지 11일. 그간 차 안에서는 시차를 적용하지 않은 채 지낸 것이다. 손목시계는 이 땅의 경계에 들어서며 현지 시각으로 맞추었건만 차 내 시계는 여태 한국 시각이었다니.

백구 안의 공간은 여전히 익숙한 고국의 영역이었던 탓이다. 손에 익은 계기판과 항상 모국어가 통하는 공간. 차창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다.

떠나왔으면서도 여전히 부여 쥐고 있는 자기 공간. 버리지 못하는 아집. 서둘러 시간을 돌렸다.

▲ 우웨이 가는 312 도로 상의 백구. 이 모든 길이 지도상엔 고속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 오창학
지도상엔 란저우에서 우웨이까지의 312도로는 곧게 뻗은 길이었고 전 구간 고속도로로 표시되어 있어 마음을 놓았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이렇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지도의 내용을 쉽게 믿는다.

▲ 해발 1900~2500m 사이 도로 위에서 맞는 저녁 햇살
ⓒ 오창학
19시 25분. 용천사 요금소를 지나 달리는데 현재 고도 해발 1915m. 공교롭게도 꼭 지리산 천황봉 높이에 도로가 걸려 있다. 서서히 해가 기운다.

그토록 피하려 한 야간운전이지만 결국은 또 하고 있다. 대체로 고원을 여러 개 넘어 잘 뚫린 길인데 구간, 구간 누더기 길이 많아 가로등이 없는 곳에서 전조등만으로 이걸 파악하지 못해 처박히듯 덜컹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속도로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속 90∼100Km로 달리던 중에 아무 경고 없이 20여m짜리 비포장 구간이 나타난다. 고속도로 한 차선을 달랑 간이 공사표지판 표지로 막아 놓은 경우도 흔하다.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전복의 우려가 있다.

차 안이 고요에 싸였을 때 뒷열 왼쪽에 앉은 아내가 말한다.

"안전. 무사히 이 일정을 마치게 해 달라고."
"응?"

운전석의 내가 되묻는다.

"아까 병령사에서의 기원?"

그렇구나. 결국 그렇게 됐다. 애초 예상한 대로, 이번 여행을 통해 한민족의 발자취를 더듬고 대자연의 장엄함을 한껏 느껴보겠다는 따위의 포부보다 탈 없이 돌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더 크다. 이제 진정한 목표는 '무사귀환'이 된 것이다.

우웨이 도착이 가까워지자 모래 바람이 거세게 차를 밀어내고 있다. 도로 위를 스멀스멀 넘어가는 모래들이 느리게 이쪽을 흘끗거린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쭉 뻗은 방풍림들이 바람에 사정없이 머리채를 휘둘리고 있다. 한밤중에 도착한 우웨이의 느낌은 더없이 스산하다.

숙소를 찾아 헤맬 때 껄렁해 보이는 젊은이들, 그리고 무력과 음산에 절은 눈빛의 사내들. 아, 이 우울의 근원은 무엇일까?

사막의 모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밤 10시 50분. 숙소에 닿았다. 오늘 총 주행거리 372Km. 그 중 류자샤에서 이곳 숙소까지의 280여 Km를 주행하는 데만 5시간이 소요되었다. 방에 짐을 던져 넣자마자 식당을 찾아 우웨이 골목을 누빈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만난 중국식 뚝배기 돼지 사골. 맛은 기가 막혔지만 며칠째 좋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장 때문에 몇 술을 뜨고는 수저를 내렸다.

▲ 맛이 일품인 우웨이의 뼈다귀탕 뚝배기. 그러나... 이 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 오창학
"오늘 늦게 닿았고 내일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오전 11시까지 자유시간을 갖고 출발하겠습니다."

아직 식사 중인 일행에게 일정을 말했다.

"대장님이 아프니 그제야 휴식 시간이 생기는군요."

자포님의 반응이다. 이어지는 에릭님의 한 마디.

"꼭 그렇게 시간을 정해 '몇 시까지 모여라' 할 필요 있나요? 무슨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그만 서운한 마음이 일어 발끈하고 말았다. 패키지든 아니든 하나의 조직체로 모인 단체는 조율이 필요한 것이고 명목이나마 내가 '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면 그 역할을 해야 할 이는 나 아니냐. 그러니 일정에 맞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 졸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래서 어떻고, 저래서 어떻고 하면 난 어쩌란 말이냐. 뭐 대충 그런 요지의 감정 표출이었다.

명치끝이 싸하다. 내가 내게 지고 말았다는 생각. 기어이 속 좁은 티를 내고 말았다는 자괴. 그간의 서운함이 기어이 터진 게다.

탐험대장은 35세의 내세울 것 없는 젊은이. 대원은 52세의 교수님, 46세의 중국 전문가, 46세의 전직 사업가, 45세의 현직 사업가. 남들에게 지시하고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처지에만 있었던 분들이다.

그나마도 나와는 10년 이상의 터울. 더구나 나 또한 이 길이 초행길이니 지도력이란 게 발휘될 리 만무했다. 일정의 1/3을 지나는 동안 내내 꽁 해왔던 부분이 터진 것이다. 식당 안에 찬 기운이 내려앉는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막의 모래에서 차가 빠져나오는 방법은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일이다. 공기를 빼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람이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져 헤맬 때 즉시 자존심과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야 한다. 그래야 둘 다 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잔뜩 팽팽해져 있다. 다행히 에릭님과 자포님이 물러나 주신다. 꼭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그런 의미로 들렸다면 미안하다고. 바보. 이 밴댕이 소갈딱지야. 아…, 나는 왜 이토록 범상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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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정에 몸 싣고 수면 위를 날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8] 란저우에서 빙링쓰 이르는 길
오창학(ohmadang) 기자
아침 9시의 란저우. 기온 30도. 해발 고도 1500m. 한 낮이 오는 것이 두렵다. 고지대에서도 이러니 사막에 들어갔을 때의 더위는 어떨까? 그래도 간쑤성 깊숙이 험지로 들어서는 시점에서 심리적 안정을 되찾다. 드디어 백구의 예비타이어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 황하를 끼고 길게 뻗은 란저우.
ⓒ 오창학
시안에서도 같은 종류, 같은 규격의 타이어 구입에 실패하고 걱정이 컸다. 란저우가 간쑤성의 성도이고 중국 서북부 최대 공업지대라고는 하나 척박한 황무지에 길게 위치한 소도시 규모여서 타이어구입에 대해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사방이 온통 황무지니 AT타이어의 구입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이 결실을 얻었다.

철봉씨가 인터넷으로 BF타이어 란저우 지점을 알아내어 연락하고 타이어를 수배한 결과 긍정적 답변을 들은 게 어제. 현재 백구의 발통에 끼워진 BF 255/70R16의 규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사한 BF 245/75R16이 있다는 것이다. AT타이어 계열에서 지름 5mm라면 무시해도 좋을 차이이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모든 것이 어제 이동하는 차 속에서 전화로 이루어졌다.

▲ 드디어 란저우에서 백구의 예비타이어를 달다. 어렵게 찾은 BF 대리점.
ⓒ 오창학
란저우를 둘러보는 일은 여정 후반에 내몽고 자치주로 들어서기 전 경유할 때로 미루고 지금은 타이어부터 확보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예정대로 병령사(炳靈寺:빙링쓰)로 이동한 후 다시 우에이(武威)까지 가면 원래의 일정에 차질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비타이어를 확보하고 나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 사막 횡단을 앞두고 조바심치던 마음이 금세 누그러진다. 이제 달리는 일만 남았다.

란저우를 빠져 나가다가 황하 공원엘 들렀다. 시짱(西藏)자치구에서 발원한 황하가 처음으로 지나는 대도시 란저우 명성에 걸맞게 장마 뒤끝에나 볼 수 있는 일렁이는 황톳물을 직접 접한다. 허베이 나서며 어디선가 보았을 터이고 뤄양 지나오는 길엔 분명히 보았던 그 물을 지금 다시 보고 있다.

내 여정과 꾸준히 함께 한다. 하긴 발해만까지의 5464Km 물줄기에, 면적으로도 중국 면적의 7.8%를 차지한다면 황하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황하 아니겠는가. 그런 황하이건만 내 다시 이 길을 나서면 둔황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돌아 시닝에 닿을 때까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 황하 제일교 '중산교'와 황하 모친상
ⓒ 오창학
일렁이는 물살을 가로질러 1907년 외국자본으로 건설한 황하제일교 ‘중산교(中山橋)’가 걸려있고 그 앞에 황하모친상이 조각되어 있다. 황하는 중국이라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친이라는 뜻? 혹자는 이 석상에서 어머니 같은 황하의 자애를 읽고, 혹자는 범람 없는 자애를 갈구하는 인간의 두려움을 읽는다.

▲ 과거에 황하를 건너던 양가죽 뗏목. 머리와 네 다리를 자른 양가죽에 공기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 오창학
양 통가죽 뗏목을 타고 굼실거리는 황하를 건너는 일단의 관광객들이 보인다. 먼 옛날 실크로드를 지나던 사람들은 저 방법으로 황하를 건넜다. ‘양피화지’라 불리는 저 뗏목은 대나무를 얽은 틀에 양의 머리와 네 발목을 떼어낸 통가죽 공기주머니를 매달아 부력을 얻는다. 일엽편주. 굼실거리는 황하를 ‘건넌다’기 보단 ‘떠내려 간다’ 싶게 출렁이며 밀려가는 양가죽 뗏목이 위태위태하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을 가자하면 한 번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강 황하. 수십 장의 양가죽을 붙이면 가축과 말을 운반할 수 있는 뗏목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의 도강로는 이런 깊고 넓은 곳이 아니었다. 조금 더 북쪽, 소나 말이 건널 수 있는 얕은 장소였다. 오늘 가려는 병령사 위치가 바로 그곳이다.

▲ 황하 공원의 노인들. 예금계좌의 잔고만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 오창학
이 구경 저 구경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공원의 분위기가 한국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평일이니만큼 한가한 노인들이 공원의 주역인 것은 한국과 같다. 그러나 노인들의 흥겨운 놀이터로 변한 이곳은 파고다 공원의 삭막하고 암울한 정경과는 거리가 있다.

저마다의 악기를 가지고 나와 꽤 수준 있는 연주단을 구성하기도 하고 어떤이들은 그 선율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즐긴다. 그들의 표정에서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은 읽을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 은행계좌의 잔고만이 필수요건은 아니다.

▲ 병령사 가는 길. 척박한 모래산에 녹색풀이 보인다. 처절한 산림녹화사업의 결과.
ⓒ 오창학
란저우를 빠져 나왔다. 서남쪽 100Km 지점의 병령사를 보기 위해 선착장이 있는 류쟈샤(劉家峽)로 향하는 중. 병령사를 보고 다시 류쟈샤로 나와 우에이(武威)로 향할 것이다. 그래도 우에이까지는 달랑 277Km여서 마음은 편하다.

병령사 가는 길은 모래와 먼지로 이루어진 고봉준령의 척박한 땅이다. 풀 몇 포기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삭막한 풍경이 계속된다. 그나마도 푸른 빛을 볼 수 있는 건 서부대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처절한 산림녹화 노력의 결과 때문이다. 대체 여기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까.

▲ 병령사 가는 길에 만난 양치기 사내. 정말 가난이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았으면......웃음이 해맑다.
ⓒ 오창학
11시 20분. 해발 1630m의 반산(半山)을 통과하는데 도로 한 켠을 차지하고 한 무리의 양 떼가 간다. 아, 비로소 서역 땅에 다가서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서역’이라 칭해야 할 지 모르겠다. 햇살에 그을린, 궁기 짙은 얼굴과 허름한 옷매무새의 목동은 사진기 앞에서 순박하게 웃는다.

그에겐 이 한 무리의 양떼가 재산의 전부일지 모른다. 처절한 가난이다. 양 한 마리에 200위안. 한화 2만5000원. 30마리라 쳐도 그가 가진 재산은 75만원이 전부다. 그의 선대에도 그렇게 살았고 그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어쩌면 그의 후대에도 이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양 30마리를 금전 얼마로 치부해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오만한 이방인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60년대의 한국을 본 서구인이 자동차도 냉장고도 없이 살아가는 ‘처절한 가난’을 동정한다면? 그래 자동차와 냉장고가 있으니 퍽도 행복하였겠다, 당시 서구인들은.

정작 그는 양 30마리라도 그로부터 식량을 얻고 가죽을 얻어 한 생을 살다 가면 그뿐이라며 자족해하는지 란저우 도심에 있는 이들과 비교하며 신세를 한탄하는지 속내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내가 개방화된 주변 현실과 견주며 스스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하는 바람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해맑게 웃는 양치기 사내의 얼굴이 찡해서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한 구절을 떠올린다. 인생행적이 그 모양인 양반이 시는 어째 이리 가슴을 파는 게야.

한참을 달리는데 GPS의 고도계는 현 위치가 2145m임을 표시한다. 이곳에도 드문드문 황토벽돌집들이 보인다. 농토도 변변한 초지도 없는 이 고원지대에 저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일까?

란저우에서 80Km 떨어진 류쟈샤(劉家峽)까지는 약 1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유람선 타는 곳 찾다가 세월 다 갔다. 댐 가는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오고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고...‘여기가 아닌게벼, 아까 그 산이 맞네벼.’ 백제의 국운을 걸고 출정한 계백이 제대로 황산벌을 찾지 못해 전투에 패했다는 우스개 소리에 등장하는 대사. 이 말을 연신 되뇌이며 웃었다.

▲ 맛,양,가격이 삼위일체가 되어 흡족했던 류쟈샤(유가협) 선착장 근처 음식점
ⓒ 오창학
그래도 헤맨 덕에 우연찮게 괜찮은 식당을 발견했다. 중국식 자장면과 볶음밥이 일품인 이 집은 밥 큰 그릇이 4원으로 맛과 양, 가격이 모두 환상이다. 겉도 허름하고 실내도 우리네 옛 복덕방 같은 구조인데 썩 괜찮은 점심을 챙겼다. 모두가 인터넷에 알리자고 흥분하는 통에 덩달아 사진 한 컷을 찍는다.

나리님과 자포님은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2호차 탑승인데다 방 짝꿍으로 연이 닿은 까닭에 따쿵따쿵하며 재미있는 사건을 많이 만들고 다니신다. 자포님이 이 식당에서 생마늘을 먹고 표정을 숨기니 나리님이 냉큼 따라 먹고는 금세 울상이다. 애써 표정을 숨긴 자포님도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상대를 골탕 먹일 수 있다면 자기희생 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저 불굴의 의지.

이 두 분의 화법도 극명한 특징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입에 안 맞는 요리가 나왔다 하자.

나리식 화법: “음, 맛있어는 보이는데 오늘은 입맛이 안 땡기네.”
자포식 화법: “난 느끼한 게 정말 싫어! 이걸 어떻게 사람이 먹지.”

그러나 난 ‘자포식 화법’이 좋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에 가까워지며 에둘러 말하는 방법은 화자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는 고로.

▲ 길고 지루한 흥정. 결국은 모두의 승리로 끝난다. 류쟈샤 댐의 수면 위를 나는 쾌속정.
ⓒ 오창학
식당을 나서 차를 선착장 주차장에 대고 병령사까지의 배편을 알아봤다. 개인소유의 모터보트를 소유한 업자들이 각다귀처럼 달라붙는다. 길고 지루한 흥정의 시작. 선착장에서 병령사까지 유람선으로 편도 3시간, 자신의 쾌속정으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며(실제로는 45분) 가격을 제시해 온다.

육로로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 긴 자동차 여행에서, 더구나 온통 황무지와 사막지대를 관통하는 여정에서 물 위를 편안한 배편으로 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끝내 흥정에 매달리고 있다.

더 받고자 하는 자와 덜 주고자 하는 자의 줄다리기. 처음엔 금전을 아끼고자 시작한 ‘놀이’가 급기야는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다. 배 주인은 500위안을 고집하고 우린 300위안에 선을 그었다. 실은 여섯 사람이 배 한 척을 빌리는데 그 가격이면 적정가라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오기로 ‘차라리 안 타고 말어’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마음을 비우니 금방 길이 보인다.

9인승 쾌속정에 철봉씨까지 우리 7명을 태우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남은 두 좌석에 다른 손님을 합승시키는 조건으로 400위안에 합의를 봤다. 흥정이라는 게 어차피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게임 아닌가. 어쩌면 양자 모두가 이기는 게임일 수도 있고. 서로가 합당하다 생각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흥정이니까.

쾌속정 주인 아저씨 나이 겨우 36세. 다들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액면가는 영락없이 50대인데 30대라니. 우리식 나이를 감안한다 쳐도 나보다 겨우 2살이 많은 사내다.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었다. 또 한 번의 문화적 충격. 얼굴 나이와 실제 나이는 무관하다. 간쑤성 이후의 서쪽 사람들은.

쾌속정은 해발 1745m의 수면 위를 스치며 날아간다. 그야말로 물 찬 제비다. 주인은 길고 지루했던 흥정의 후휴증이 없는지 배를 지그재그로 몰며 재롱도 피운다. 좌우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무더운 이 날씨에 제법 상쾌한 체험이다, 생각한 순간 기억을 잃었다.

운전에 대한 부담 없이 남이 끌어주는 교통수단 위에 오르니 긴장이 풀렸나 보다. 선창에 머리를 짓찧으며 넋을 잃고 졸다가 눈을 뜨니 탁 트인 전경에 잠이 확 깬다.

▲ 병령사(빙링쓰) 선착장 앞 전경. 졸다 깨어 보니 어느덧 선경이다.
ⓒ 오창학

류쟈샤 선착장을 떠난 지 45분. 드디어 병령사 선착장에 닿은 것이다. 류쟈샤 선착장의 선주들보다 더 집요한 장신구 판매상들이 먼저 맞는다. 그들 키 너머로 병령사 선착장의 풍광이 눈에 가득 찬다. 푸른 하늘을 괸 백옥루 남은 기둥들. 물을 건너 다다른 사원이어서일까 사바세계를 넘은 하나의 선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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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500m에 펼쳐진 도로를 달리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7] 시안에서 란저우까지의 700Km
오창학(ohmadang) 기자
또 아침 일찍 짐을 꾸린다. 드디어 시안을 떠나 서역으로 향하는 본 궤도에 오르는 날이다. 시안에서의 며칠이 숨고르기 기간처럼 느껴진다. 많은 문화유적 덕에 근교를 숨 가쁘게 뛰어다녀야 했지만 근거지를 두고 움직인다는 안정감이 그런대로 먼 길을 앞둔 나그네에게 그런대로 힘이 되었다.

백구(1호차)와 파라곤(2호차) 모두 시동음이 실하다. 오늘 이동해야할 거리가 시안에서 란저우까지 700Km나 되는 길임을 아나보다. 312도로를 타고 해발 1500m가 넘는 황토고원지대를 지나야하는데 노면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도착 시간을 예측할 수가 없다. 만약 오늘 중으로 도착 못 한다면 무리한 야간 운행을 진행하지 않고 핑량(平凉) 쯤에서 자기로 했다.

▲ 개원문 실크로드 조형물. 서역 상인들이 장안을 떠나는 모습
ⓒ 오창학

과거 실크로드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은 성의 서쪽 통로인 안정문(安定門)을 통해 나갔다. 우리도 그 길을 통해 서쪽으로 나선다. 서안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이 보인다. 한 바리의 짐을 싣고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서역 상인들의 군상이 서 있다.

차에 바리바리 짐을 챙겨 올라탄 우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제껏 인천에서부터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왔고 이미 한반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노선을 밟아 예까지 이동한 터. 그러나 막상 과거 동서문물교류의 최대 기착지 장안을 벗어나는 지점에 서니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설레임이 있다.

거창하게 ‘탐험’이라는 제목을 붙인 우리 팀 깃발을 내어 기념촬영도 하고 아침 해를 등진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들을 훑는다.

“당신들도 서역을 향해 나서나 보지요?”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 중 다소 젊은 상 하나가 말을 건다.
“그렇습니다.”
환영 속의 내가 답한다.

“어디서 오셨소?”
역시 환영 속에서 석상이 묻는다.
“해동국.”
“해동국 어디? 신라, 고구려, 백제? 아니면 남? 북?”
“해동국.”
석상 속 젊은이는 빙긋이 웃는다. 내 대답의 의미를 알았다는 모양.

사내의 웃는 모양이 낯익다.
“혹시 나다이 반다크?”
내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 속 주인공에 대한 각인작용이 컸나보다.

▲ 실크로드 조형물 앞에 선 6인의 탐험대원. 이름 참 거창하다.
ⓒ 오창학

나와 환영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는 소그드족 상인이다. 페르시아나 아랍상인과 더불어 실크로드를 주름잡던 상인으로 작은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상인이었음에도 이들의 상업활동은 눈부셨다.

오죽하면 소그드인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달콤한 언어를 구사하도록 입에 꿀을 발라줬으며 한 번 쥔 돈은 절대 새나가지 않게 손에 아교를 발라 주었다는 말이 퍼졌을까. 오늘날 유태인이나 화교도 이들 앞에선 한 수 접어야할 지도 모른다.

소그드 남자들은 스물이 되면 반드시 외국에 나가 장사를 했다. 중국의 장안에도 1000여명이 머물면서 활동했고 당시 위구르가 지배하던 몽골 등 초원에도 거점을 확보했다. 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유리, 모직품, 보석세공품, 향료, 악기 등을 중국에 가져가 팔고 중국의 비단 등을 서역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중앙아시아 비단길에서 소그드어는 국제 통용어였다.

나다이 반다크, 그와 개원문을 나섰다. 어느 구간까진 내 마음 속 동행이 될 게다. 백구에 실은 짐의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먼지 폴폴 날리는 무인지대를 지날 때마다 그 옛날 그가 낙타로 지났던 흔적을 느끼며 그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

▲ 중국은 지금 도로 공사 중. 거의 모든 도로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과 더불어 행군을 방해하는 2대 장애물.
ⓒ 오창학

중국 전역은 현재 공사 중이다. 동부건 서부 타클라마칸 사막이건 간에 모두 공사 중이다.현재 엄청난 돈을 도로망 확충에 쏟아 붓고 있다. 2004년 말 당시 3만4000km의 고속도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2000년에 비하면 두 배로 늘어난 양이다(17년 전에 고속도로는 없었다). 중국 전역의 도로망은 세계 3번째인 180만km. 이중 44%가 지난 15년 동안 건설된 것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2020년까지 고속도로를 6만8000km로 늘릴 계획이라니 앞으로 10년 이상 온 도로가 공사의 열풍에 휩싸일 것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떠벌렸던 것처럼 중국은 이미 자동차 대량소비시대로 진입했다. 2004년 자동차 내수가 500만대. 미국의 1700만대와 일본의 500만대에 이어 세계 3위였다. 지금 이라면 일본을 제치고 2위의 반열에 올랐을 테고 2010~2015년 사이면 1위의 자리에 등극할 것이다. 2000년대 중국은 자동차 열병에 걸려 있다. 어쩌면1920년대 미국의 모습 보다, 1990년대 후반의 우리 보다도 집착이 깊다.

▲ 유쾌하진 않지만 도로에서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다. 이럴 땐 정신이 바짝 든다.
ⓒ 오창학

중국을 다녀온 누가 그랬다. “중국의 혼란스러운 교통질서에 비하면 사고 참 안 나는 편”이라고. 모르는 소리. 사고 많이 난다. 꼭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다니다 보면 사고의 흔적을 자주 목도한다. ‘교통 질서’라는 개념이 서구 혹은 여타 자동차 선진국과 무척 다르게 적용 되고 있다. 문화의 진보 속도는 물질의 진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도 이런 과도기를 겪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역시 지금 이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비로소 고속도로가 아닌 길을 수백 Km 운전하며 중국의 운전 습관에 대해 마음을 연다. 편도 일차선 뿐인 차도를 대형화물차들이 틀어 막으니 연신 중앙선을 넘어 추월할 수밖에 없다. 추월을 시작하면 맞은 편에서 오던 차는 갓길로 붙어 자리를 내 준다.

“너 중앙선 넘었어? 그럼 내가 갓길로 가지”하는 마음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저편에서 추월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내게 달려올 때마다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반짝이는 짓을 그만둔 지 오래다. 우측으로 붙어 그 차가 지나갈 공간을 내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노란선은 넘어선 안 되는 선’이란 한국에서의 고정관념을 버리면 마음은 한결 여유롭다. 여기는 중국이 아닌가.

▲ 핑량 근처의 황토 고원 지대. 산과 산을 이어 놓은 듯한 길을 끝 없이 간다.
ⓒ 오창학

붕 뜬 느낌으로 한 없이 달린다. 해발 1500m 이상에 펼쳐진 도로의 연속이다. 산과 산을 연결해 놓은 은 아치식 교량을 지날 땐 현기증마저 인다. 좌우 전망은 굽이굽이 계단식 논같이 층진 황토야산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풍경들을 보노라면 벌써 여러 시간째 운전석에 앉아 있는 답답함이 싹 가신다. 목 좋은 장소에선 여지없이 무전이 날아온다.

“사진 한 장 박고 가지요.”
달려가며 보기엔 정말 아까운 전경. 외진 길을 돌아돌아 어렵게 온 보람이 있다.

▲ 중국에서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으신 교수님.
ⓒ 오창학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 천진에 들어온 이래 오로지 여기까지 나만 쥐고 있던 백구의 운전대를 교수님께 넘겼다. 오늘 거리가 워낙 장거리이기도 하고 시안 같은 복잡한 대도시는 지나왔으니 이런 시골길에서 다른 운전자가 적응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싶었다.

임시 운전면허를 발급 받은 게 1호차 내에선 나와 아내뿐이어서 교수님까지 운전 부담을 안겨 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아내와 2교대로 달리려다 보니 메모나 사진 촬영 등 다른 활동에 눈 돌릴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교수님의 ‘무면허’ 운전이 시작된 것이다.(외국인 차량에 대해서도 심심찮게 면허증 검사가 있다. 트인 시골길이나 고속도로에서나 살금살금 가능한 일이다)

▲ 질주, 질주, 질주....그러나 모든 길이 이리 순탄한 것은 아니다.
ⓒ 오창학

한국에서 구비문학 자료 채록 때문에 전국 각처를 사륜구동으로 누비신 경력이 있어서인지 처음 타보는 차종임에도 적응이 빠르시다. 그런데 문제는 적응이 빨라도 과도하게 빠르다는 점. 백구는 나는 듯이 달려 앞 차 옆 차를 추월하고 오로지 앞으로 내달아 꽂힌다. 살짝 천정의 손잡이를 쥐었다. 잔뜩 움추린 가슴으로 한참을 가다가 뒤를 보니 2호차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로밍해 간 휴대 전화가 울렸다. 2호차다. 휴식처에서 합류한 2호차 사람들 표정이 격앙되어 있다. 뒤 차는 생각 않고 내빼면 어쩌냐고, 애타게 무전을 해도 왜 답이 없냐고 야단이다. 살펴보니 무전기 채널이 돌아가 있다. 아직 무전기 조작에 서툰 교수님이 채널 단추를 잘못 누르셨다. 훌륭한 중국에서의 운전 데뷔. 그러나 약간의 가슴졸임을 동반했다.

▲ 자동차 여행의 자유로움. 가고 싶을 때 간다. 서고 싶을 때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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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로 이 맛이다. 내 차를 끌고 애써 실크로드에 오른 이유가. 기차도 버스도 흉내내지 못할 바로 이 맛. 서고 싶을 때 서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다는 것. 밀 타작을 하는 들판 풍경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또 멈춰섰다.

일행은 좌우 어디론가 흩어져서 각자 볼일(체내 노폐물을 방출하는 작업의 또 다른 말)을 본다. 그리고는 제각각 들판의 고즈넉함과 산에 맞닿은 푸른 하늘을 한껏 마신다. 이 순간 만큼은 500~600위안의 중국 농가 저소득을 염려하지 말자. 그냥 그대로 들판에 안긴 사람과 흐르는 구름만 보자. 참 푸른 하늘이다.

▲ 란저우 요금소. 시안을 떠나 15번 째 요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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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소.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많다. 시안에서 란저우까지 10여 차례가 넘는 요금소를 거쳤다. 차량 당 200위안이 넘는 통행료를 지불했으니 거의 차량 연료비에 육박하는 비용이 도로비로 지출됐다. 고속도로를 달린 것도 아닌데 웬 요금소가 이리 많나. 그래도 이 요금소는 반갑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란저우. 14시간의 운전 끝에 드디어는 어둠에 잠긴 도시에 닿았다.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엔 길안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작은 푯말을 들고 있다. 원하면 그 사람들을 태우고 길 안내를 시키면 되는데, 운전경력이 없는 사람이어서 자가용의 시선이 아닌 버스 노선에 근거해 안내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택시를 앞세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숙소 인근까지 잘 찾아 왔다.

▲ 란저우 라면 맛 보기.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먹는 것으로. 사필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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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끝은 항상 음식이다. 숙소에 짐 풀고 그 유명하다는 란저우 라면을 먹으러 나섰는데 쯧쯧…. 10시 넘긴 이 시간에 문 연 집이 있나. 다행히 숙소가 역 근처인지라 초라한 음식점 몇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 역 근처 식당은 맛이 없다. 내일은 일찍 병령사를 거쳐 우웨이(武威)로 가야하니 사실상 란저우 라면은 이 한 끼가 끝이어서 아쉽다. 왜 옛말에도 있잖은가. “잘 먹은 음식 한 끼, 열 유적 안 부럽다.” 여행자의 수칙이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들어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일주하고 칭하이성을 거쳐 돌아와 고비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 란저우를 거쳐야 한다는 점. 그땐 꼭 제대로 된 란저우 라면을 맛보리라.

무리한 운전으로 어깨가 무겁다. 아내는 숙소 옆에 있는 맛사지집에 나를 밀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철봉씨와 뭉친 몸을 풀라며 은전을 베푼다. 전신맛사지 요금을 내고 몸을 맡겼는데, 무서워서 혼났다.

왜 그런 집 있잖아. 칸막이 쳐진 침대에 빨간 불 아롱거리는. 이 상태에서 돈 더 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맛사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놀란 가슴을 안고 숙소에 올랐다. 하루, 참 길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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