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의 묘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⑧] 낙양 백거이묘와 수웨이시
오창학(ohmadang) 기자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다...'장한가'의 백거이 묘

아이스크림 하나로 겨우 더위를 속인 우리는 용문석굴 출구에 나설 때까지도 눈앞에 보이는 백거이의 무덤에 갈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지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오늘 갈 길이 바쁘다는 둥, 먼 발치서 봤으니 본 거나 진배 없다는 둥. 약간의 회의적인 반응이 일었다.

이하(伊河)를 가로지르는 저 다리 하나만 넘으면 그의 무덤이었지만 그만큼 날씨는 더웠고 다리는 아팠다. 그러나 그때 구원과도 같은 복음이 있었으니 거기까지 가는 전동차가 있다는 것. 전동차 소식에 대세는 순식간에 ‘가자’로 기울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있냐는 둥, 평소 백낙천의 시를 흠모하던 터에 이제야 보게 됐다는 둥.

아아, 이 참을 수 없는 결정의 가벼움이여. 그러나 어쩌랴 우린 더위에 무너지고 발품에 지친 나그네인 것을.

▲ 백거이 묘 전경
ⓒ 오창학

백거이(白居易:772-846)의 무덤은 조촐하면서도 올망졸망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나무도 있고 인공 냇물도 있고. 입장료를 받자니 어쩔 수 없이 그럴싸하게 꾸며야 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방문객 입장에선 매표소 문지방 넘자마자(사실 매표소조차 없다면 금상첨화지만) 본론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어딜 가나 고만고만한 조경인데 굳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달랑 비석 하나에 봉분 뿐인 곳에 이르게 만드는 건 가혹한 고문이다. 어디 경관 수려하고 으리으리해야 맛이랴. 돌조각 하나라도 마음만 두면 유적인 것을.

▲ 백거이 묘비 앞에서
ⓒ 오창학

거이의 무덤은 애초 향산사(香山寺) 북쪽 자리에 있었다. 오죽 향산사를 아꼈으면 그의 호가 ‘향산거사(香山居士)’였으랴. 지금의 향산사 건물은 중국이 ‘해방’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인데 당 시대의 향산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 자리는 원측스님을 화장하고 탑을 세운 장소이기도 하다.

▲ 백거이 초상
ⓒ 오창학

“백거이는 한 잔 술을 마시고는 ‘꺼이 꺼이’울며 일필휘지로 시를 지었다지. 그래서 이름을 백거이라 한 게야.”

평소 진중한 자포님의 말이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라기엔 너무 경악스럽고 진담으로 보기엔 너무 터무니 없고. 순간 좌중의 분위기는 실로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곤두박질 쳤다. 자포님마저 기어이 나리님화(황당무개) 되어가고 있다.

그의 이름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君子居易以俟命)"에서 취한 것이고, 그의 자 ‘낙천(樂天)’은 <역(易)·계사(繫辭)>의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는 말에서 얻는 것이니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한다(順天與素位而行)”는 유가의 처세사상이 그대로 그의 이름자 속에 비친 것이다. 참 좋다. 누구 애 이름, 이렇게 지었으면.

거이를 생각하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미화한 ‘장한가(長恨歌)’가 떠오른다. 그의 기념관 벽에도 시 전문이 새겨져 있다.

...전략
헤어질 무렵 간절히 다시 전할 말 부탁하니 臨別殷勤重奇詞
그 말 중에 둘만 아는 맹세의 말 있었다네 詞中有誓兩心知
칠석날 장생전에서 七月七日長生殿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 나면 비익조 되고 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 되리라 在地願爲連理枝
하늘과 땅의 오램도 시간이 다할 때 있으나 天長地久有時盡
이 한만은 면면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此恨綿綿無絶期


연리지(連理枝). 뿌리가 다른 두 그루 나무가 한 몸으로 합쳐진 상태를 이름이다. 사이가 화목한 부부나 남녀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인데 현종과 양귀비 사이에 접목하니 애절함이 더하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인륜을 어기며까지 이루었던 사랑이기 때문일까. 연인의 목을 직접 매어야 했던 비극적 사랑이기 때문일까. 사람 없는 밤중에야 속삭일 수 있었던 말, 하늘에서는 한 쌍의 새가 되고 땅에서는 떨어지지 않는 연리지가 되었으면.

둘 사이 애정의 절절함을 이토록 극명히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장안의 기녀들까지 이 시를 외워 화대를 높였다는 일화가 사실일 성 싶다. 현종과 양귀비에 얽힌 사연의 시를 접하니 그들의 사랑에 대해 저마다 말이 많아진다. 교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

“그 무서운 측천무후의 손자로 날 시퍼런 그녀의 눈을 피해 혁명의 꿈을 키우고 종국에는 황제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그가(이 때 모사로 오른팔 역할을 한 이가 고구려 유민 왕모중이다), 그리고 즉위 후 ‘개원의 치’라는 칭송을 받던 이가 여자 때문에 망가져 결국 망조의 길을 걸었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입니다.

양귀비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현종의 총애 때문이라면 결국 권력의 핵심은 총애를 준 현종일진대, 그가 여자에게 빠져 나라가 기울었다니요. 저는 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국운이 다한 시점에 양귀비가 있었던 것이지요. 나라와 시대를 넘어서서 왕이 실정을 하는 데에 여자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후세 사가의 조작이요 편벽한 해석이라 믿습니다. 이성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이 반비례한다는 이상한 법칙은 꼭 사서에서만 등장합니다. 현실에서는 정 반대인데요.”

교수님께선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국정을 등한시 했다는 사서의 내용을 수용한다 하신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이, 그리고 늘 국사를 생각하며 긴장해 온 사람이 만년에 겪는 허탈감을 감안한다면 여인에 빠져 일을 버리는 게 이해가 돼. 지키는 것이 이루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지.”

연륜으로 인한 인식 차이일까. ‘지나치게’ 젊은 나는 아직 여인 때문에 일을 뒤로 한 한 사내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50대가 되면 그땐 현종의 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양귀비와 현종의 애닮은 사연을 뒤로 하고 장한가 비문에서 눈을 떼려는데 교수님께 탄성을 내신다.

▲ 백거이 기념관의 <장한가> 비문
ⓒ 오창학

“아하, 그랬구먼. 바로 이 구절이 상투적으로 쓰여 백제 의자왕에 그대로 인용되었구먼.”

장한가 전문 구절 중에 ‘후궁가려삼천인 삼천총애재일신(後宮佳麗三千人 三千寵愛在一身).’‘아름다운 후궁이 삼천인인데 (양귀비가) 삼천인이 받을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는 내용으로 꼭 궁녀가 삼천이어서가 아니라 ‘많다’는 형용사로 쓰인 것이 백제 패망사 정당화용으로 끌어다 쓰인 것이다.

부여 낙화암이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을 규모가 되네 안 되네, 당시 사비성 내의 궁궐이 삼천궁녀를 수용할 수 있었네 없었네 하는 논란도 사실 부질 없는 짓이다. 그냥 ‘많은 궁녀’일 뿐인 것을. 그 ‘많다’를 수용하는 당과 백제의 상황은 의당 달랐을 터이고. 이곳 용문의 북위 시대 석굴 하나 파는 데에도 80만 명이 동원되는 중국과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결사대 5천’이 항전하는 백제가 어찌 수 개념을 함께 논하겠는가.

백마사를 가기 위해 용문을 나서는데 현종도, 의자왕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낙양에선 수웨이시를 맛 보세요

낙양의 3대 보물은 용문석굴, 모란, 수웨이시(水席). 그 중 수웨이시는 측천무후가 즐겼다는 24가지 물 많은 음식으로 낙양의 특산이다.

그 첫 음식이 모란연채(牧丹蓮采). 측천무후가 한창 고종의 총애를 받을 때 황후의 모함을 받아 독주를 마신 후 궁 밖에 버려졌으나 깨어나 주변의 무를 먹은 후 해독되었다 한다. 후에 정권을 잡은 후 30년 된 무를 받아 주방에 요리를 의뢰한 것이 이 음식의 시작. 무를 면같이 썬 요리인데 후추맛이 강하고 입술과 혀가 얼얼하다. 낙양은 분지가 되어놔서 비가 귀한 곳이라 탕요리가 많고 매운 음식이 많다.

▲ 수웨이시 '낙양 동종'. 한 번씩 울리면 복이 온단다
ⓒ 오창학

백마사의 종소리 낙양 8경 중 2경. 요리와 함께 나오는 이 종을 치면 복이 온단다. 여기서 복이란 ‘부자’겠지?

중국 요리에서 물고기 요리가 나오면 끝을 의미한다. 물고기의 ‘어(魚)’와 풍요로울 ‘여(餘)’는 유사음이어서 이것으로 마감을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광고니 뭐니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무슨 소중한 축원이나 되는 양 판을 치고 ‘부자 아빠’어쩌구 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요상한 풍토가 번져 거북한데 중국은 아예 모든 것이 ‘부자되세요’와 연결 되니 아주 죽을 맛이다.

오죽하면 휴대전화도 차량 번호도 필 ‘발(發)’과 음이 유사한 ‘팔(八)’을 따지 못해 안달하고 새해 덕담이 ‘꽁시파차이(恭喜發財: 돈 많이 버세요)’일까.

▲ 수웨이시의 대미 '잉어요리'
ⓒ 오창학

물고기의 머리는 귀빈 쪽으로 두며 뒤집어 먹지 않는다.(배의 형상이어서 전복되는 것을 꺼린다지) 무측천은 이 요리가 나오면 젓가락으로 콱 찍은 후 먹기 시작하였다는데 잉어의 음과 이씨의 성씨가 유사음이어서 황실이 자기 손 안에 있다는 과시의 행위였단다.

음식 자체에도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음식에 맞는 배경담을 넣고 소품을 추가해 그 맛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일견 잡스러워 보이면서도 부러운 일이다.

자동차 연료비와 도로비를 제외하면 우리 역사 탐험대의 가장 큰 지출은 식비. 매끼 이렇게 먹어대는 게 부담스럽긴 하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사 큰 틀이 먹고 입고 자는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문화를 논하매 어찌 먹는 것을 빼 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랴. 낙양에서 수웨이시를 놓칠 수 없는 탓에 오늘도 엥겔지수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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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신라 상감' 앞은 통행금지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⑦]용문석굴 방문에서 느낀 껄끄러움
오창학(ohmadang) 기자
▲ 전동차. 중국의 유용한 관광 수입원
ⓒ 오창학
7월 21일 금요일. 뤄양(洛陽)에서의 아침. 아니 이곳 만큼은 그냥 '낙양'이라 부르자.

자꾸 뤄양, 뤄양 그러니 그간 무수히 들어왔던 중국 고대도시의 냄새가 나질 않는다. <삼국지>의 무대라는 느낌도, 전국시대의 노자, 당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 활동하던 예술도시의 이미지도, '낙양지귀(洛陽紙貴)' 고사의 배경지라는 친숙함도 '뤄양'이란 표현에 같이 날아가 버린다.

낙양…, 한국인에게 이름의 편견이 너무 강하게 남은 곳이다. 우리 뇌리엔 저우룬파가 아닌 주윤발이 있는 것처럼.

낙양의 아침도 부산을 떨며 시작했다. 오늘은 시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낙양의 용문석굴과 백마사 두 곳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유적인 까닭이다. 차량 점검을 끝내고 현지 가이드를 섭외하여 용문석굴로 향했다.

기대하고 간 용문석굴

낙양의 거리는 광활하고 한적하다. 본시 지명 뒤에 ‘양(陽)’자가 붙는 것은 ‘산지남북지수(山南之北之水)’의 형세를 가진 지역을 의미하는데 낙수를 남에 둔 낙양이 과연 그러하다. 지금도 수십만이 넘는 대도시의 규모는 주나라의 수도가 된 이래 아홉 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면모를 보여주나, 옛모습 찾을 길 없는 현대적인 건물과 단정한 거리는 어쩐지 낯설다. 달랑 요거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용문석굴이다. (겨우 13Km)

차를 주차장에 멀찍이 세워두고 전동차를 이용해 매표소까지 이동. 다시 매표소에서 석굴까지 걷는다. 이 기막힌 상술. 어느 관광지나 매표소와 주차장 사이가 지나치게 멀다. 매표소와 주차장 사이가 가까우면 매표소와 유적지 사이가 기가 막히게 멀다. 그 사이를 꼭 전동차가 오간다. 드넓은 땅을 현금화하는 절묘한 수다.

▲ 용문석굴 이하다리. 사얼 희부연 낙양의 대기. 다리 건너에 백거이 묘가 있다
ⓒ 오창학
날씨. 운무가 낀 듯 황사가 깔린 듯 온천지가 부우연 가운데 한여름 훈기가 장난이 아니다. 흡사 저 부연 대기가 하우스막이나 한증막 수증기가 아닐까 싶다. 저마다 등줄기에 선명한 땀 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덥고, 습하고, 탁하다. 모두가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잉어가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된다던 고사의 그곳. 용문 협곡 동서 두 절벽 사이에 이수(伊水, 伊河)가 흐르고, 보기에 문턱과 같아서 옛사람은 이곳을 이수문턱이라고도 불렀다. 기어이 '등용문' 하지 못한 잉어가 강으로 되돌아 와 포획되면 용문을 오르느라 짓찧은 머리 뒤에 시커먼 멍자국이 선명하다 하였으니 이를 먹으면 그 운을 얻는다지.

헌데 자꾸만 멍자국을 남긴 채 용이 되지 못한 잉어의 한만 내 가슴에 남는다. '왜 있잖아, 드라마를 볼 때도 삼각관계에서 도태되는 남자 조연이 내 모습과 오버랩되는 그런 거.'

▲ 용문석굴. 북위 시대부터 당대까지 조성된 1300여개의 석굴이 있다.
ⓒ 오창학
더위가 미간으로 뭉치는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이하를 따라 걸으니 용문산 기슭에 벌집처럼 자리 잡은 석굴들이 나타난다. 인간 삶의 흔적에 어찌 순번을 매길까 싶으나 마는, 호사가들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더불어 이곳을 중국의 3대 석굴로 꼽는다지.

개의치 않으려 해도 '3대', '10대' 운운하는 순위를 접할 때 은근한 기대가 이는 것은 인지상정. 거기에 'AAAA'(중국은 관광지 등급을 A1∼4로 매긴다)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니 하는 선전을 보태면 용문석굴에 대한 기대는 자연 부풀어 오르게 된다.

▲ 용문석굴 안내도
ⓒ 오창학
이곳은 439년 북위(北魏)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이래 만들기 시작한 석굴이다. 이하(伊河) 양안의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 암벽에 1352개의 석굴이 있고, 그 속에 약 10만 개에 이르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2초씩 보며 뛰어도 이틀 반이 걸리는 일이니 애초에 다 볼 욕심이야 언감생심이고, 낙양 현지 안내원의 주도에 이끌려 한 바퀴를 휘이 돈다.

ⓒ 오창학
현재의 용문석굴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불두(佛頭)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민간의 속신, 이른바 탐험대로 명명한 서양의 도굴단, 그리고 희대의 헤프닝 '문화혁명'이 주범이다.

그나마 홍위병들이 훼손할 때에는 낙양 주둔 장군이 불심이 깊은 이라 도맡아 파괴할 것을 자청하고 석굴입구를 봉쇄한 덕에 이만큼이나 남았다지.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隨), 당(唐)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완성된 것들이고, 지금까지 1500년 역사가 더해졌으니 하나하나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겠지만, 동네 최고의 미인들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와 무더기로 있을 때는 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처럼 내겐 투박진 조형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옥석을 가리지 못하는 이 미천한 눈이 한스럽다.

▲ 봉선사. 용문석굴의 얼굴마담
ⓒ 오창학
그래도 보편적인 사람의 눈이란 게 있어서인지 당대에 조성한 봉선사(奉先寺)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크고 아름다운 거야 단박에 느끼는 감상이고, 여기에 만든 17m의 비로자나불은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는데, 벌써 사천왕상과 보살상의 시립 모양이 왕을 둘러싼 문무백관의 형상을 연상케 해 정치적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하긴 북위 효문제가 이곳에 석굴을 파기 시작한 것도 통일 직후의 혼란 상황을 불교라는 통합 매개를 통해 극복해보고자 하는 의도였으니, 이곳에서 종교를 정치와 따로 생각하여 문화재를 보기는 어려운 일.

▲ 석굴암. 어쩌면 경주 석굴암의 석공은 이곳에 다녀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 오창학
에릭님은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이곳이었을 거라 여긴다. 단순히 이런 문화의 막연한 영향이 아니라 석굴암 공사를 이끈 석공은 아마도 낙양땅을 밟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석굴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허리 꺾임 선마저 이토록 흡사할 순 없을 거라고 한다. 당시 석공의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와 낙양에 머물다 들어갈 수 있었을까? 에릭님 의심에 이견을 내어 보았지만 내심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 확언은 못 하겠다.

당시 중국 불교계엔 수많은 신라 유학승이 고승, 대덕, 역경승, 주지로 활동하고 있었고, 원축, 승장, 신방, 지인, 현범, 무저, 혜초, 혜일 등 8고승이 담당한 역경의 비중이 현장, 의정 때에 번역된 총수량의 60%에 이르던 때였다. 한 마디로 재당 승려들의 판이었던 이때에 이들과 더불어 불교 문화 관련 장인들이 함께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 더위에 지친 탐험대
ⓒ 박재익
그러면 결국 석굴암이 용문석굴 베껴간 것이니 별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으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용문석굴의 불상들을 보며 석굴암의 본존불을 떠올려 보면 안다. 여기처럼 푹푹 석벽을 파지 못한 조국의 장인들이 어떻게 돌을 깎아 인공의 석굴을 형성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감읍해야 하는지. 먼 길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간 문화가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를. 그렇게 한반도는 '중화'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육로로 맞대고도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당 신라인의 혼이 담긴 '신라상감'엔 통행금지 푯말만이

해동국에서 길을 떠나 실크로드를 더듬고 있는 우리가 용문석굴에 관심을 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신라상감. 당 대에 재당 신라인들이 조성한 석굴. 황제가 세운 것만큼 화려하고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지역유지들만큼의 세는 갖춘 굴이다. 낙양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 머물던 신라승 원측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여기서 60Km 떨어진 소림사의 혜초가 주도했을 거란 설이 있다.

하지만 당시 16세인 혜초가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사사 받을 무렵에 이런 큰 불사를 맡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왕족인 원측스님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강 맞은편에 있는 향산사 뒤 곡에서 그의 사후 다비식을 했던 인연을 봐도 그렇고….

▲ 신라상감. 통행금지 푯말이 계단을 막고 있는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다.
ⓒ 오창학
교수님이 10년 전 행보의 기억을 더듬어 어렵사리 찾은 그곳은 '통행금지'였다. 석굴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동편으로 200여 미터를 벗어나 언덕 10여 미터 위에 외따로 위치한 석굴.

예전에 보였다던 '신라상감(新羅象嵌)'이라는 판각은 보이지 않는다. 교수님은 성묘를 온 분처럼 굴 근처의 무성한 풀들을 잡아 뜯었다. 왜 중국 속의 우리 유적은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을 들으면 중국 쪽에선 펄펄 뛸지 모르겠다. '우리유적'이라니? 중국땅에, 중국돌로, 중국풍의 석굴을, 중국장인을 통해 조성했는데, '우리 유적'이라니? 그럼 정정하겠다. 중국 속의 '우리 흔적'은 왜 이리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통행금지'.

외떨어진 신라상감으로 오르는 계단을 이 푯말이 막고 있었다. 급기야 관리인 하나가 뛰어와 굴 앞에 몰려 있는 우릴 내쫓는다. 이곳은 '통행금지'라며.

교수님은 이를 '역사를 관리'하겠다는 중국의 의지로 해석하셨다. 그럴까? 저들은 과연 역사를 '관리'하려는 차원에서 신라감실 앞에 저 푯말을 세웠을까? 어쩜 우연인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아 보호 차원에서 휴식년제를 시행해야 한다든지, 감실 뒤로 오르는 능선을 등산로로 사용하려는 이가 있어 굳이 길을 폐쇄하여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데 내게도 저 행위가 순수한 의도로 여겨지질 않는다.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불순한 저의가 이미 드러난 상태여서일까? 티벳, 몽골, 동투르키스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 모든 소수민족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는 공작을 마친 이력이 있는 탓일까?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닐 저 푯말의 의미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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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⑥] 길 위의 노래
뤄양(洛陽) 가는 길
오창학(ohmadang) 기자
2006년 7월 20일 목요일.

오늘 진행로를 결정하는데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사전 허가 노선대로라면 바오딩(保定)-스좌창(石家庄)-타이위엔(太原)을 거쳐 싼먼시아(三門峽)에 당도해야 하는데 우린 스좌창에서 남하해 정저우(鄭州) 거쳐 뤄양(洛陽)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가이드 철봉씬 허가된 노선이 아니어서 곤란하다는 입장이었고 우린 군사적인 문제가 있는 곳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시안(西安)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왜 안 되느냐는 생각이었다.

뤄양에 꼭 가야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래 허가 신청을 넣었던 톈수이(天水) 맥적산 석굴을 경유하는 310번 도로는 군사훈련 중이란 이유로 핑량(平凉) 312번 도로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톈수이의 맥적산 석굴과 더불어 둔황의 막고굴과 따통의 운강석굴까지 실크로드상의 주요 석굴을 답사하겠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그렇다면 중국 3대 석굴에 드는 뤄양의 용문석굴이라도 꼭 들러야 했다.

허가노선 엄수여부를 감시해야하는 철봉씨는 여전히 난감한 기색이다. 결국 내가 팀 대표 자격으로 부득이하게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유서를 써 주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갈 길이 멀다. 뤄양까지의 거리 650㎞. 고속도로로 가는 길이라지만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거리이다. 이론적으론 시속 100㎞ 주행 시 7시간이면 닿을 거리고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도 9시간이면 갈 거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시 타이어가 터지는 일도 없고 앞길을 막는 화물차들도 말끔히 치워져 있을까? 지도상에 고속도로라 표시된 길들은 정말 고속도로의 기능을 다하도록 정비되어 있을까? 뤄양에 도착해 숙소까지는 수 킬로미터 내의 짧은 길일까? 절대 길을 잃는 일없이 순조롭게 질주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리 순조로워도 오늘 하루는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다만 길 위에 머무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내가 갈 전체의 여정이 그러하듯 오늘도 길에서 생각하고, 길에서 쉬고, 길에서 움직일 것이다.

▲ 바오딩 나서며 헤매던 길. 이런 외곽에선 아직 삼륜차가 대세다.
ⓒ 오창학
아침 먹기가 바쁘게 길을 떠났다. 먼 길이니 만큼 마음이 급하다. 1호차 백구가 선두에 서고 가이드 철봉씨가 1호차 조수석에서 길잡이를 했다. 이런 이런 철봉씨가 고속도로 지도에서 진입로를 잘못 봤다.

일반도로와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을 골라 쭉 뻗어 갔는데 고가도로 아래로 고속도로가 놓여있고 그 위를 우리가 지나친다. 맙소사! 이 양반이 지도상의 나들목 표시를 구분하지 못한다. 운전 경험이 없으니 평생 교통지도 볼 일이 없었던 탓이다.

현재로선 1호차 안에서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나 하나 뿐. 운전대를 교수님께 넘겨 드릴 처지도 안 돼 지도를 보지 못하니 갑갑하다. 엉뚱한 시골길을 뱅뱅 돌다가 다시 고속도로에 오르니 이미 11시. 네비게이션 역시 고속도로의 선만 표시할 뿐 나들목의 정확한 위치를 잡아내지 못해 더 애를 먹었다. 어이없게도 오전 동안 100여㎞를 헤맨 셈이다.

고속도로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안정적이고 편하다. 속도제한은 시속 120㎞까지이지만 과적과 노후된 엔진의 출력부족으로 대부분의 화물차는 시속 90을 넘기지 못한다. 간혹 승용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그래봐야 시속 120 내외. 중국의 도로엔 아직 속도측정용 무인카메라가 일반적이지 않아 무한 질주가 가능한 구간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언감생심. 군데군데 저속으로 가는 화물차가 양 차선을 다 틀어막는 탓에 맘대로 내달리는 게 쉽진 않다. '조금 느린 화물차'가 '많이 느린 화물차'를 추월하려 애쓰는 상황이란 보기 애처롭다. 결국 조금 느린 화물차가 많이 느린 화물차를 다 추월하여 2차로로 비껴나 줄 때까지 1차로는 열리지 않는다.

▲ 도로에서 화물차는 우리의 적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끝없는 과적차량들의 주유 전쟁.
ⓒ 오창학
모든 구간에서 우리의 진정한 적은 화물차였다. 때로 인적 없는 사막에서 유일한 친구도 화물차였다. 긴 몸에 짐을 실을 대로 실어 차가 넘어갈 것 같은 상태에서도 용케 균형을 유지하며 구물구물 움직이는 화물차들. 저 것이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겠으나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겐 위협적인 장애물이다.

화물을 저리 과도하게 싣다보니 도로가 남아나질 않는다. 2차로 쪽은 노면이 많이 울어 있다. 곳곳에 과적 검문소가 많고 활발히 단속하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같이 과적한 차량들만 도로를 다니고 있을까? 과연 과적의 기준치는 어느 정도일까?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드넓은 하북평원의 정경이 눈에 그득하다. 유럽의 지평선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음… 뭐랄까(나리님의 말투다. 무언가 선뜻 표현하기 어려운 문장을 시작하는 발문인데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일행에게 전파되었다) 유럽이 색감 잘 나오는 유화의 풍경이라면 중국의 지평선은 담담하고 끝이 흐려지는 수묵화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난생 처음 그런 아련한 지평선을 향해 운전한다. 하늘과 맞닿은 땅을 바라고 한참을 달리면 어느새 그 끝은 또 저만치로 멀어져 있다. 차 안에서 굳이 이러저러한 말들이 흐르지 않아도 지루할 겨를이 없다. 나는 지금 지평선 좇기 놀이 중. 나도 달리고 길도 달린다.

▲ 휴게소. 도로에서 몸을 펼 수 있는 유일한 휴식처
ⓒ 오창학
드디어 휴게소에 들렀다. 우리네 고속도로의 휴게소 배치와는 달리 이곳은 참 드물게도 놓여 있다. 나리님말을 들으니 예전에 고속도로에 휴게소도 없었던 모양이다. 차가 서자마자 1, 2호차 일행 모두가 화장실로 달려간다. 몇 시간만에 얻는 몸 펴기 시간이다.

▲ 뷔페식 휴게소 식당. 모든 휴게소가 이렇게 호사스러운 것은 아니다. 먹을 복 터진날.
ⓒ 오창학
휴게소 식당 또한 근사한 뷔페식. 오늘은 음식복이 닿는다. 남들은 중국 와서 제일 힘든 게 언어보다도 음식이라 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 일행은 없어서 못 먹기는 해도 도대체 음식 앞에 두고 타박하는 법이 없다.

▲ 주유소. 눈금이 반 이하로 내려가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하루 한 번 이상 거치는 통과 의례
ⓒ 오창학
차이요우와 짜만!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에서는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은 입에 이 말을 달아야 한다. 고속도로상의 휴게소는 대략 100~150㎞ 간격으로 위치해 있는데 휴게소는 주유소를 포함하고 있다. 연료 잔량을 잘못 예측하면 차가 설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경유. 디젤차는 항상 이놈을 확인해서 이 앞에 서야 한다.
ⓒ 오창학
주유소에 들어서면 항상 "차이요우(紫油·경유)"를 외칠 것. 그렇지 않으면 중국 내 SUV들은 대개 휘발유차인 까닭에 묻지도 않고 '치이요우(汽油·휘발유)'를 넣을 수 있다. 항상 경유를 넣고 있는지 옆에서 확인해야 하며 '가득'이라는 의미의 '짜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낙타처럼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뒤가 든든하다.

중국 연료는 황성분이 많아 엔진과 연료기기 계통에 무리가 많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다. 백구가 출고 1년 밖에 안 된 차라 매연이란 걸 모르고 살았는데 중국에서 연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다녔다. 따로이 연료정화제를 준비해 가서 섞어 사용했다.

▲ 주유보다 차 구경에 더 신경을 쓰는 주유원. 여행 기간 내내 겪게 될 풍경이다.
ⓒ 오창학
차가 서는 곳마다 구경꾼으로 붐빈다. 아니 주행 중인 차들도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우리 차 구경에 넋을 놓는다. 차에 붙인 스티커가 요란해서일까? 차 모양이 독특해서일까?보닛 위의 스티커에서 한글을 발견하면 구경꾼들의 반응은 한층 더 뜨거워진다.

가이드 철봉씨 말에 의하면 중국 내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좋고 한국인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라 한다.

화물차 운전수 하나는 남의 차 안에 머리를 들이 밀고 본격적인 탐색이다. 행여 물건이라도 집어갈까봐 밖에서 은근한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내 소심함. 그걸 읽었는지 그는 순진무구한 웃음으로 인사를 남기어 사람을 무안케 한다.

누가 내게 "왜 하필 자동차냐?"고 묻는다면, 난 자유때문이라 답하겠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실크로드 여행은 그야말로 '점'적인 통찰이다. 시안에서 둔황으로 찍고 투루판, 우루무치 그리고 카슈가르. 실크로드 상의 주요 오아시스 거점 도시들만을 건너 뛰듯 이동하는 여행은 빠르고 편한 만큼 길에 대한 통찰로는 부적격이다.

중국의 연료

2006년 여름 기준 중국의 경유값은 평균 L당 4.64위엔. 대략 한국의 1/2 가격이다.

중국 내 주유소(주유소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업종에서)에선 카드 결제가 안 되니 두둑한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고원지대나 오지는 경유값이 5위엔까지도 올라간다. 중국에선 휘발유나 경유나 거의 같은 가격이다. 화물차들로 인해 경유 수요가 많은 곳에선 휘발유값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

휘발유는 #93과 #97이 있는데 97을 넣는 게 좋다. 수치가 높을수록 정제품질이 좋다. 물론 가격차이는 있다. 경유는 여름철이라면 #0이라는 번호가 대다수인데 이는 어는 점을 나타낸다. 고원지대라면 여름이라 할지라도 #-10을 판다. -등급의 숫자가 클수록 가격은 비싸다. / 오창학
기차는 '선'적인 이동이다. 노선과 시간의 제약이 있고 비행기보다 지상을 관망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긴 해도 정해진 노선으로만 질주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서고 싶을 때 서고 가고 싶을 때 가는 시간의 자유와 좌로든 우로든 느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의 자유에 제약이 따른다.

자동차를 통한 이동 역시 계획한 구간이 있고 허가된 주요 노선이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나 기차에 비길 바가 아니다. 이동의 속도도, 경로도, 서고 갈 곳도, 보고 싶은 곳도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다. 운전의 피로와 경비의 부담이라는 자유의 대가가 따르기는 하나 본시 자유엔 피냄새가 나는 법 아니겠나.

사륜구동은 그 자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산이나 물, 그리고 모래, 제약을 극복하고 의지가 닿은 최대한의 깊이까지 접근하고 관통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유다.

▲ 사막을 건너는 백구. 길 아닌 곳도 길이 되게 하는 사륜구동은 내 '자유의지'의 유용한 수단이다.
ⓒ 오창학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은 '자유의지'일 게다. 심지어 신에 대한 부정과 긍정까지도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요소이다. 사륜구동은 바로 그 자유의지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그런데 오늘은 선적인 이동을 한다. 정해진 고속도로를 따라 최단거리 노선을 잡고 끝없는 주행. 기차나 다름없다. 더구나 고속도로다. 사륜구동도 필요 없고 AT타이어도 오히려 장애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내겐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필요하다면 고속도로를 포기하고 먼 길을 돌 것이며, 바쁘지만 하루쯤은 중간의 기착지에 몸을 뉘일 것이다. 이것이 기차나 버스와 다른 점이다. 그리고 같은 고속도로라도 내 발로 가속 페달을 밟아 내 손으로 조향해 한땀 한땀 길을 줄여 나간다. 이 길은 내가 간 것이다. 비록 말과 낙타가 아닌 차의 힘을 빌기는 하였으나 내 발과 의지로 실크로드를 딛어 나가는 것이다.

▲ 뤄양 가는 길. 일모도원. 갈 길은 먼데 해가 지누나.
ⓒ 오창학
오늘은 그 자유의 대가를 참 톡톡히도 치룬다. 하루를 참 무던히도 달려 일정의 막바지 정저우로 들어서려는데 그만 고속도로상의 순환도로를 잘못 타 반대쪽인 쭝모(中牟)방향으로 들어서 버렸다. 그 진입로 바로 뒤의 길로 빠졌어야 하는데.

무능한 1호차를 앞세운 탓에 2호차 사람들도 속 좀 타겠다. 어쩌랴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중국의 도로를 겪는 사람이고 철봉씨는 고속도로 운전 경험이 없는 사람인 걸. 웬일인지 네비게이션도 먹통이 되었다. 대기가 온통 부연한데 황사인지 먼지인지 그냥 공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위성과 신호를 주고 받는 놈이라 이 현상과 관련 있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

한국의 고속도로도 길 한 번 잘못 들면 먼 길을 에도는 고생이야 감수해야하는 노릇이지만 중국의 상황은 더욱 심하다. 족히 60㎞는 손해봤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는데 갈 길이 멀다.

▲ 뤄양의 숙소. 막 닿은 백구가 숨을 고르고 있다.
ⓒ 오창학
정저우(鄭州)를 지나 드디어 뤄양(洛陽)에 들어섰다. 현시간 오후 9시 30분. 아침 8시 30분에 바오딩을 떠나 13시간 동안 793㎞를 달렸다. 그 중 193㎞는 불필요하게 헤매인 공간이다. 그러나 여행은 '불필요'한 길이라는 게 어디 있겠나. 어찌보면 이 길 자체가 '필요'를 위한 떠난 길이 아닌 것을. 백구 먼 길 고생 많았다. 내일 보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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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⑤] 만리를 걷는 것은...
5. 톈진에서 바오딩까지
오창학(ohmadang) 기자
7월 19일 수요일. 오전에 톈진항에 가서 차를 찾았다. 항 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궁벽한 곳에 컨테이너로 된 통운 사무실이 있다. 돌아돌아 외진 주차장에 당도하니 흙비를 뒤집어 쓴 백구와 파라곤이 보인다.

“푸로르릉, 글글글”
중국에서의 첫 시동을 거는데 녀석의 심장음이 예전처럼 가볍다. 반갑다, 백구. 그 며칠 새에도 건강했구나. 녀석을 향해 씨익 웃는다. 너나 나나 잘 견뎠다. 이제 출발하는 거야.

▲ 통관 절차를 마친 차량을 천진항에서 인수
ⓒ 오창학

난생 처음 접하는 중국의 교통상황에 심신이 긴장된다. 한국의 교통상황을 견뎌낼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곳의 상황은 사람을 바짝 쪼그라들게 한다. 똥개도 제 집에선 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을 절감한다. 질주하는 게 아니니 죽지는 않는다. 다만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이번 여행은 끝이다. 그토록 공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번의 사고가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부담이 사람을 더 위축되게 한다.

실은, 교통상황이란 게 한국과 다르긴 다르다. 직진 신호에 같이 떨어지는 좌회전은 원칙적으로 ‘비보호 좌회전’이다. 내게 질주하는 차들을 뚫고 ‘알아서’ 좌회전해야 한다. 추월을 할 때도 도대체 좌, 우측의 구분이 없다. 형편 되는대로 좌, 우 어느 쪽이든 내질러 추월한다. 주행 차선을 구분하는 중앙선은 그저 페인트가 남아 부어놓은 선이 분명하다.

운전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주요인은 차보다도 사람이다. 지그재그로 추월하는 차량들 가운데 그 속을 뚫고 무단횡단하는 사람의 무리를 정확히 찾아내 피해야 한다. 정말이지 0.1초의 판단이 치고 안 치고를 결정하게 하는 상황을 한두 번 접하는 게 아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손발만큼이나 뇌도 바쁘다. 나를 바라보며 태연히 무단횡단하는 사람과 나누는 부단한 교감. 그가 피해 줄 것인가, 내가 피해야할 것인가.

1, 2호차의 보닛 좌우에 태극기와 오성홍기를 달고 두 차 모두 전조등을 켠 채 정속 주행한 탓에 다른 차들이 배려를 해 주는 게 이 정도다. 요란하게 스티커를 붙이고 지붕에 무언가를 얹은 낯선 차가 나란히 지나가니 무슨 외빈이라도 되는가 여기는가 보다.

며칠 톈진에서 지내며 저런 교통 상황에서 우리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저으기 염려는 해왔던 터이지만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 상태는 더 심각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그래도 톈진은 한산한 준법도시였던 것을.

▲ 임시 번호판 부착. 부착 위치와 방법에 대해 한참을 갑론을박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번호판은 사용 후 출국 시 반납하여야 하기에 튼튼하게 부착하여야 한다.
ⓒ 오창학

임시 번호판 부착을 위해 수리창에 들렀다. 붙일 위치와 부착 방법에 대해 한참을 갑론을박. 결국 떼고, 뚫고, 복잡한 절차를 통해 부착을 끝냈다. 무슨 일을 하든 중국의 업소엔 사람이 많다. 번호판 하늘 달아도 너덧 사람이 달라붙고 세차 한 번을 맡겨도 대여섯 명이 기본이다.

'만 리를 걷는 것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나으리니'

수리창에서 나서는데 L경리가 장도를 빌며 점심을 내겠다 한다.

▲ 샹마저우(上馬酒). 먼 길 떠나는 이에게 술잔을 올리며 무사귀환을 비는 중국 전송 의식이다. 중국측의 L경리(사진의 중앙)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들 달뜨고 웃는 자리였는데 잔을 들며 표정이 비장하다.
ⓒ 오창학

“만 리를 걷는 것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 보다 나으리니.(行萬里路, 勝讀萬卷書)”
경리가 잔을 돌리며 서하객(徐霞客)의 말로 치하했다. 가슴에 남는 말이다. 스스로도 ‘나를 키운 건 8할이 여행’이라 뇌던 내게 또 다른 격려의 말이 되었다.

샹마저우(上馬酒). 먼 길 떠나는 이에게 무사귀환을 빌며 술을 올리는 중국의 전송의식을 우리에게 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비록 술 한 잔을 입에 못 대는 처지라 잔을 받지는 못 했지만 경리의 기원대로 무사히 돌아와 샤마저우(下馬酒) 자리에도 참석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다들 고맙다며 웃음을 짓는데 분위기는 어째 이리 비감하냐. 비로소 떠나는 이 길이 얼마나 멀고 불확실한가를 다시 한 번 떠올렸으리라. 한민족 발자취를 찾는다는 나름의 목표가 언제 ‘무사귀환’으로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톈진을 떴다. 내일 중으론 시안(西安)이나 뤄양(洛陽)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부터의 거리 930Km. 애초 하루에 가려 했던 길이나 오늘 가는 데까지 가고 나머지를 내일 가고자 한다. 이대로 톈진 외곽순환도로를 탄 후 허베이(河北)평원을 가로 지르는 톈바오(天保)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대략 230여Km 경과한 스좌창(石家庄)쯤에 묵게 되리라.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가슴이 확 트인다. 시내의 아비규환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깔끔한 검정 바닥이 선명하고 지평선까지 뻗은 시야가 쾌청하다. 승용차는 그리 흔하지 않고 화물차들이 주종인데 길을 메울 정도는 아니다.

▲ 차를 업은 차. 경비 절약 차원에서 이러는데 중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오창학

중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독특한 광경. 트럭 위에 트럭이 업혀서 간다. 벌써 여러 차례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 한 번 움직이면 수 천 킬로미터를 움직여야 하니 물건을 실으러 공차로 이동할 땐 한 대를 다른 한 대에 얹어 가는 방법을 쓴다. 며칠 간 수천 킬로미터를 그렇게 이동하면 도로비며 연료비며 막대한 경비가 절약될 법도 하다. 두 운전자가 한 대를 교대로 운전한다면 덜 피곤할 터이고.

'실연의 아픔'

이제와 고백하건데 내겐 아내 말고도 마음을 준 존재가 있다. 그 앞에만 서면 심장이 뻐근하고 이마에 미열 같은 기운이 서린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맞춤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저 “아...”하고 엷은 신음만 뱉게 하는.

쭉 빠진 자태에 공격적이랄 만치 선 굵은 풍모와 백만 가지 감흥을 일게 하는 그의 섬세한 표정을 읽노라면 과연 내가 그를 사랑해도 되는가 싶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

오늘의 일을 하마 파경이라 말할까. 실연이라 표할까. 고속도로 중간에서 그녀가 터져버렸다. 나들목 진입 48Km 지점. 우두두두. 갑자기 차체가 부르르 떨고 운전대가 요동친다. 운전 노면 주름 때문인지 차체 이상 때문인지 몰라 2호차의 상태를 물으려는 순간, 무전기가 다급한 말을 토해낸다.

“1호차! 연기납니닷!”

어쩐지. 뒤가 한산함을 확인하고 급히 1차선에서 갓길로 차를 세웠다. 운전대가 통제력을 상실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좌측 후륜의 그녀가 처참히 찢겨져 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실연의 아픔.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그녀가 터져 버렸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보다 믿었던 대상에 대한 배신이 더 뼈 아프다.
ⓒ 오창학

만일 뒷바퀴가 아니라 앞 바퀴였다면? 140Km로 주행 중이었다면? 옆에 차가 오고 있었다면? 차를 세우고 나서도 등줄기가 찌릿해지는 상상이다. 사고가 난 것과 날 뻔 한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다시 확인한다. 오늘 문제는 타이어의 ‘구멍(펑크)’이 아닌 ‘찢김(터짐, 파스)’으로 인한 증상이 분명한데 딱히 떠오르는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자포님은 백만분의 일 비율로 존배한다는 ‘불량품설’을 제기했다. 어떤 이는 톈진 어디선가 입은 손상이 압력을 못 이긴 것이라는 ‘기존손상설’을 말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보지 못한 고속도로의 이물질, 이를테면 큰 나사나 모서리 돌 같은 것에 찢긴 것이라는 ‘주행 중 손상설’을 이야기 한다. 정말 모를 일이다.

▲ BF AT 타이어 255/70 R16. 내가 반한 그녀의 자태.
ⓒ 오창학

오프로드에서의 거친 노면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AT(All-Terrain)타이어가 깨끗한 고속도로를 시속 100Km로 주행하다 터져버렸다. 별 사고 없이 내가 살았다는 안도보다는 연정을 품었던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배반의 아픔이 크다. 펑크와 추력에 강하다는 넓은 2중 스틸벨트는 다 뭐였나. 모래와 진흙에 타이어가 묻힌 상태에서도 구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쇼울더록은 다 뭐였나. 너의 당당한 자태는 다 어디로 가고 왜소한 사체만 남았나.

너를 믿고 나머지 구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너를 향한 애정이 계속 유효할 수 있을까.

▲ 졸지에 정비기사가 된 자포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 오창학

‘정비담당’ 자포님이 재빠르게 공구를 챙겨 나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맞는 말이다. 굴지의 택시회사 사장이었던 양반이 손수 공구를 챙겨 후끈한 열기 아래 땀을 쏟는다. 딱히 정비기술을 습득한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 정비사업소 관리자 경력을 포함해 우리들 중 차량에 대한 이해의 폭이 가장 넓은 이였기에 배정된 역할이었다.

강성스프링으로 하체를 보강한 터라 순정 잭으로는 아무리 들어올려도 바퀴가 땅에서 뜨질 않는다. 한 개로 최대치까지 올린 후 그 옆에서 다시 또 한 개의 잭을 돌 위에 얹어 올리니 교체할 공간이 생겼다. 온통 땀으로 범벅된 자포님과 나리님을 보며 뭉클한 동지애를 느낀다.

다시 길을 재촉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인천을 떠나며 깨진 앞유리, 중국 첫길에 터진 타이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나는 이 여행을 지금이라도 중단하라는 계시가 아닐까 걱정하는데 2호차 사람들은 일정 중 생길 방정맞은 일들에 대한 액땜이라며 애써 안심 시킨다. 제발 그렇기를. 이보다 더한 일은 안 생기기를.

▲ 중국 네비게이션. 길 찾기 첫날의 훌륭한 안내자.
ⓒ 오창학

타이어 교체 작업으로 시간이 지체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운전날이니 만큼 야간 운전은 피하기로 했다. 숙소 찾을 일도 걱정이고 하여 쓰좌창 135Km 전 바오딩(保定)시로 들어간다. 다들 긴장한 첫 길인데 중국 네비게이션이 오차 범위 수십 미터 내까지 정확히 숙소를 안내한다. 이런 기계가 있었냐며 신기해 하던 가이드 철봉씨는 금세 조작에 능숙해졌다.

숙소에 몸을 뉘니 긴장한 몸이 탁 풀어진다. 한참 얼었던 하루가 간다. 오늘은 무사하다.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잘 지내. 모든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어서 시안에서 봅시다.”

타이어 얘긴 하지 못했다. 같이 겪고 있는 때와 그저 말로만 전해 들을 때의 걱정이란 그 무게가 다름을 알기에. 그래서였을까. 지난 달 시골집 청소하다 발견한 스물 두 살 무렵 훈련소에서 편지. 부모님이 수신자로 되어 있는 그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몸 건강히 잘 있습니다. 군대밥도 입에 맞고 조교들은 꼭 형 같이 대해줍니다.”

때로는 반어가 직설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바오딩의 밤은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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