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2005)..........'에 해당되는 글 78건

  1. 2006.12.15 시안 화청지
  2. 2006.12.14 ''장회태자묘 예빈도'' 앞에서
  3. 2006.12.13 시안의 명고성과 비림
  4. 2006.12.12 낙양 백마사에서 만난 금인(金人)

역사를 바꾼 총성, 역사가 윤회하는 땅 '화청지'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2] 시안 화청지
오창학(ohmadang) 기자
'역사가 윤회하는 땅 화청지'

7월 23일. 2호차 팀들은 시안 남쪽의 종남산(終南山)으로 향하고 1호차 팀인 아내와 나, 그리고 철봉씨는 시안 동쪽 교외의 화청지, 병마용을 향해 나섰다.

종남산. 서북의 신장성 호탄에서 시작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뻗어내리다 멈춘 곳. 일찍이 장안 사람들이 영산으로 우러렀던 이곳에 김가기전 마애각문(金可記傳 磨崖刻文)이나 신라왕자대(新羅王子臺), 흥교사(興敎寺)의 원측탑, 원측상 등 해동인의 흔적이 흥건하고 계곡마다 신라 고승의 흔적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이처럼 서해를 건너 신라방-장안-종남산으로 이어지는 해동흔적의 증표이면서 가깝게는 일본 강점기 때 국내 진공을 준비하던 시안 OSS지대의 장준하, 김준엽 선생 등이 산악훈련을 받던 장소이기도 하니, (지금의 흥교사는 당시 OSS의 통신훈련소로 쓰였다) 아니 가 볼 수는 없는 터.

그러나 중국 현대사의 흔적이 배인 화청지와 오랜 세월 상상으로만 그리던 진시황릉병마용을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 해서 부득이 팀을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나선 것인데 말이 1호차 팀이지 실상은 시안이 처음인 우리 셋뿐이다.

▲ 화청지 전경
ⓒ 오창학
화청지(華淸池)에 닿았다. 복원된 고풍의 건물들 뒤로 늘 한 모습이었을 여산(驪山)의 자태가 수려하다. 현종과 양귀비의 흔적이 짙게 밴 곳. 이곳을 찾는 대다수 관광객이 보고 싶은 건 콸콸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니라 먼지 쌓인 탕 속에 같이 서려 있는 그들의 자취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존재가 아니냐. 전진시대부터 존재한 유명한 온천지대에서 유독 그들의 흔적만 더듬게 되는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이리라.

▲ 양귀비 상
ⓒ 오창학
뜰 한가운데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육감적인 자태의 양귀비가 서 있다. 광동의 조각가 반학(潘鶴)이 91년도에 세운 작품인데, 이제 이곳 화청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조각으로 접근하는 양귀비의 모습만으론 당시의 정황이 명확히 그려지진 않는다. 북적거리는 관광객의 소음을 잠시 잊고 살포시 연못에 눈을 내리고 나서야 약간의 상이 맺힌다.

740년 가을. 겨울을 나기 위한 현종의 긴 행렬이 이곳 화청지로 오고 있다. 행렬엔 부왕들과 친왕의 무리도 보이고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과 수왕비 양옥환(楊玉環)의 모습도 보인다. 당도하여 연회를 베풀던 중 현종의 눈에 구룡전(九龍殿) 연못에 비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유부녀가 된 지 5년이고, 이미 스물둘의 나이이니 풋풋한 아름다움이야 찾을 길 없건만, 이미 지천명을 넘긴 지 오래인 현종의 눈엔 그 농익은 자태가 황홀하다. 3년 전 아내(무혜비)를 잃은 현종의 가슴에 금세 새로운 사랑이 둥지를 튼다. 겪어본 자들은 그러더군. 사랑의 아픔을 잊기엔 세월보다 좋은 것이 또 다른 사랑이라고.

그런데…, 며느리라는 사실이 현종의 맘에 걸린다. 그 할아비 고종이 부왕의 후궁인 측천무후를 취했던 바를 떠올리며 용기도 내어보지만, 이러다 '베지밀 가족'이 되지나 않을지 자못 염려스럽다. 이때 우리의 환관 고력사가 '제왕은 무치'라며 똥구멍을 살살 긁는다. 어느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분한 송재호가 뱉은 대사 '남자 배꼽 아래의 일은 따지는 게 아니야'도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드디어 현종은 아들 수왕을 왕복 2년의 광동지역에 어사로 출장 보내고, 양옥환은 '태진'이란 도사로 임명하여 가까이에 둔다. 우리의 불쌍한 수왕. 태자 쟁탈전에서 참으로 아까운 고배를 마신 수왕은 이때까지도 이 긴 출장을 자신에 대한 신임으로 받아들이며 단꿈을 꾼다. 순박한, 아니 영악한 양옥환도 이참에 현종 옆에서 확실한 점수를 따 남편을 태자 자리에 앉히겠다는, 그리하여 종내는 자신이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사람 맘처럼만 되겠는가. 양옥환이 들어앉은 태진궁은 곧장 신방으로 변하고 끝내 수왕을 새장가 들인 현종이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했다. 이곳 화청지의 온천궁에서 그녀를 만난 지 5년 뒤의 일이다.

"나 사진 찍어 줘요." 아내의 말에 서서히 환각에서 깨어난다. 하얀 양귀비상 앞에 아내가 선다. 렌즈의 초점을 맞추니 파인더에 가득한 아내의 얼굴 뒤로 양귀비상이 급하게 흐려진다.

"해어화(解語花)." 나도 모르게 읊조린다.

"뭐요?" 자세를 잡던 아내가 물었다.

"말을 알아듣는 꽃. 내게는 당신이 해어화야." 아내가 히∼웃는다.

양귀비가 함수화를 건드렸더니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리며 시들었다는 데서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이란 별칭이 붙었다지. 이 때문에 현종이 양귀비를,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일렀다는데, 오늘은 아내 앞에서 양귀비상이 시든다.

▲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해당탕
ⓒ 오창학
1981년에 발견되었다는 귀비지(貴妃池)에 이르렀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었다는 해당화 모양의 해당탕이 중앙에 놓여있다. 당시엔 연꽃 모양의 분출구가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물기 없는 먼지투성이 몸으로 관광객이 던져 놓은 동전만 끌어안고 있다.

현종과 양귀비 사랑의 정체는 뭐였을까. 짝 잃은 노인의 한물간 욕정? 물불 안 가리는 여인의 권력욕? 지체와 나이를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 말라버린 욕탕만큼이나 그들 사이를 가늠할 상상력이 건조해진다.

모르겠다. 현종이 양귀비의 언니 양옥쟁과 놀아난 적이 있다는 등 양귀비는 안록산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등 사서에 등장하는 여러 기사가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먼 뒷날의 나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다만 안록산의 난을 피해 도주하던 현종이 부하들의 독촉에 못 이겨 그녀에게 자결을 명할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떠올려 볼 뿐이다.

오간청 총성이 역사를 바꾸다

▲ 시안사변의 장소 오간청
ⓒ 오창학
화청궁의 흔적을 돌다 보니 뒤편에 1878년에 조성한 후원이 나타난다. 화청지에 가서 진짜 보고자 했던 건 양귀비의 목욕탕이 아니라 이곳이었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 당시 홍군에 대한 서북봉쇄를 독려하기 위해 방문한 장제스가 사용한 숙소. 중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들었던 그날의 장소 오간청(五間廳)에 온 것이다.

▲ 처마 뒤로 보이는 사진 중앙의 여산 자락에 병련정이 있다. 이 부근에서 장제스가 잡혔다.
ⓒ 오창학
여산 중턱의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병련정(兵練亭). 새벽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장제스(蔣介石)가 숨어 있다가 잡힌 장소의 언저리에 세운 정자다. 중국 정부든 이곳 안내원이든 장제스가 잡힐 당시 '잠옷 바람에 끌신' 차림이었음을 강조한다. 시대의 권력자 장제스의 졸렬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속내이리라.

시안사변은 '시안에 둥지를 틀고 있던 동북(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에 혈안이 되어 목전의 일본을 방치하던 장제스를 체포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하도록 유도한 사건'으로 어렵지 않게들 정의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린 <대륙의 딸>과 <마오>의 저자 장융(張戎)의 표현대로 "이 사건 이후 세계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 애국적이었고 일본과 싸우려는 투지에 불타올랐으며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제의했다고 믿게 되"지는 않았을까?

1935년 10월. 대장정을 끝내고 중국 북서지방에 닿은 홍군은 소련 관할 영토의 국경에 이르는 보급로가 절실했다. 이때 북서로 1000Km 떨어진 신장과 500Km 떨어진 외몽골로 향하는 요충을 장악하고 있는 부대는 장쉐량의 병력이었는데, 그는 중국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건으로 소련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자신을 지원해주기를 원했던 터이므로 홍군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일본이 북쪽으로 머리를 돌려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스탈린으로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리라. 비록 흉중에 장쉐량이 중국 전체를 단합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즉각적인 거부를 피하면서 장쉐량을 유도해 중국 공산당을 돕도록 만들었다.

1936년 10월 초. 홍군은 외몽골을 통해 150대의 차량으로 들어오는 소련의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대대적인 돌파작전을 개시한다. 장쉐량은 홍군에게 현금과 겨울 옷가지를 제공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였기에 8만의 홍군으로 작전을 감행한 것이었으나, 10월 22일 봉쇄작전의 독려차 시안에 날아온 장제스에 의해 계획은 뒤틀어지고 만다.

장쉐량이 장제스의 면전에서 홍군에 대한 공격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황하를 건넌 홍군 2만1800명이 강 건너에 버려둔 채 주력만 산시성 북부의 근거지로 퇴각한 홍군은 10월 말이 되자 고사 직전의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 오간청 내 장제스의 숙소. 아내 송메이링과 찍은 부부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오창학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 장쉐량의 머리에서 나온 장제스 납치 작전. 장제스의 2차 시안 방문일정을 아는 장쉐량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12월 4일에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경호를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숙소 주변에만 수십 명의 호위병이 배치되었을 뿐 외곽은 장쉐량의 병사들이 경비했다. 납치임무를 맡은 장쉐량의 병사들이 이곳 화청지의 장제스 숙소를 정찰하고 침실까지 점검해 놓은 뒤의 일이다.

지금도 오간청 장제스의 숙소엔 당시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고 장제스의 제복 사진과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찍은 부부사진이 걸려있다.

▲ 장제스 침실 옆의 경비실 모습. 벽에 교전 중에 전사한 경비대장의 사진. 장제스의 조카다.
ⓒ 오창학
12월 12일. 장제스가 새벽 체조를 마치고 막 옷을 입으려 할 때 총소리가 울렸다. 장쉐량의 부하 400여 명이 이곳을 에워쌌고, 장제스 호위병과 총격전이 벌여 호위병 다수가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경호대장인 장제스의 조카 장효현도 전사하는데, 장제스의 침실 옆 경호실 벽에 붙은 그의 젊은 풍모를 보니 남의 나라일 같지 않다.

외적도 아니고, 이념을 달리하는 원수도 아닌 나름으론 동료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손에 죽어야 했던 젊은이의 마지막 느낌은 또 어땠을까. 그날의 교전흔적이 남아있는 유리창과 벽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휴양지에 남은 피냄새가 너무 진하다.

▲ 당시 교전의 흔적들
ⓒ 오창학
호위병사들이 뿌린 피 덕분에 장제스는 담장을 넘어 여산에 숨어들기는 하였으나 날이 밝자 민둥산인 곳에서 더는 몸을 숨기지 못하고 수색대에 잡힌다. 그러나 이틀 뒤인 12월 14일, 모스크바는 장쉐량의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스탈린은 분단된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전면전으로 끌고 들어갈 통일된 중국을 원했던 터였고, 스탈린에게 그런 인물은 장제스였지 장쉐량이 아니었던 것이다.

▲ 당시 시안사변의 주인공들. 좌측이 난징 정부 주석 장제스, 동북 군벌 장쉐량, 서북 군벌 양후청.
ⓒ 오창학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사태가 어그러졌음을 안 장쉐량은 장제스를 안전하게 보호하기로 마음먹는다. 체포 이후 줄기차게 장제스의 사형을 주장하던 마오쩌둥의 소원을 묵살하고 장쉐량은 협상을 위해 날아온 장제스측 대표(처남 쑹쯔원(宋子文)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와 마오쩌둥의 사절 저우언라이(周恩來) 간의 3자 회담을 성사시킨다.

난항을 겪던 회담이 급반전하게 된 것은 모스크바에 인질로 있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풀어주겠다는 중국 공산당 측의 제안 때문이었다. 24일,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고 25일 장제스가 시안을 떠날 때 장쉐량은 가택연금을 자원하여 장제스의 비행기에 오른다. 그날이 50년간 이어질 가택연금의 시작이었지만 장쉐량에겐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오간청이 있는 화청지 후원 전경
ⓒ 오창학
화청지 근처의 홍문보촌에서 항우가 유방을 초청하여 제거하려 했던 홍문연(鴻門宴) 사건의 재현이다. 연회석상에서 칼춤을 추며 다가서는 항우 측에 맞서 칼춤으로 대응하여 죽음을 모면한 유방 일행이 여산으로 빠져나와 본진으로 돌아간 반면, 2100여 년 뒤의 주인공은 불행히도 여산에 피하긴 하였으되 붙잡혀 볼모의 몸이 되었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어디 같은 장소 다른 시간뿐이겠는가.

43년 뒤 같은 날짜에 옆 동네 한반도의 육군참모총장 관저에서도 비슷한 납치극이 있었지 않은가. 납치부대와 경비병 사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소장이 대장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성공한 납치극이라는 점에서는 1936년 시안과 1979년 서울의 닮은꼴이고, 시안에선 나라를 훔치는 일에 실패했고, 서울에선 성공했다는 점이 다르다. 고향에서 먼 이곳 화청지에서 역사의 윤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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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의 박물관에서 신라인을 만나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1] '장회태자묘 예빈도' 앞에서
오창학(ohmadang) 기자
▲ 시안 시내에 있는 '산시성 역사 박물관'
ⓒ 오창학
시안 시내에 위치한 '산시성(陝西省) 역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이곳 어딘가에 있을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의 예빈도(禮賓圖) 생각으로 가득하다. 한참을 지나 위층 전시실에 들어서는데 사진으로만 수없이 접했던 낯익은 그림이 보인다.

여행이란 이런 게 아닐까. 백만 번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접했어도 내 홍채에 그 현장을 담고 내 발로 그 땅을 딛었을 때의 느낌만은 상상하지 못하매 기어이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과정. 지금 그 발품으로 이 '느낌'을 누리며 그림 앞으로 가고 있다.

▲ 당 대 실크로드 관련 전시실
ⓒ 오창학
장회태자는 당 고종과 무측천의 일곱째 아들 이현(李賢)을 말한다. 나이 22세에 태자에 봉해졌으나 불과 5년 만에 폐서인 되고 31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

새삼 이 사람을 거론함은 그의 생애가 색다른 의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묘 동벽에 그려진 객사도(客使圖) 즉, 예빈도(禮賓圖)라는 벽화가 한국 사람에 주는 각별한 의미 때문이다. 이 그림은 실제로 장회태자 생전에 외국의 사절을 맞이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림 속 한 사내가 눈길을 끈다.

▲ 장회태자묘 발굴 예빈도
ⓒ 오창학
그림 왼쪽에 조복을 입고 홀을 든 세 사람은 안내를 맡은 당 홍려시(鴻臚寺)의 관원들이다. 뒤에 선 세 사람이 외국에서 온 사신인데 눈이 깊고 머리가 벗겨진 네 번째 사람은 동로마인으로, 여섯 번째 사람은 동북아시아 소수민족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는 다섯 번째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 문제다. 복식과 용모로 보아 동아시아 사람임에 이견이 없다. 그러면 그 시대 어느 나라의 사신이었을까? 일본? 고구려, 발해, 백제, 신라?

일본은 최근 유난히 이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일본에서 특별전시회도 열고 다섯 번째 조우관을 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논문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중국학자들 내에서도 대다수는 고구려나 신라인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일본인으로 보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중국 내 역사 연구에 미치는 일본의 자금과 활동력에 의해 동양고대사가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한다면 이 판세는 또 어떻게 되어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 예빈도에 나타난 신라인의 얼굴. 기마민족의 전통인 조우관을 쓰고 있다.
ⓒ 오창학
이 사신은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왜신(倭臣)과는 판이한 모습이어서 일본인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백제, 고구려 역시 장회태자가가 태자로 책봉되기 훨씬 오래 전에 멸망했으니(고구려마저 태자 13세 때인 668년에 패망) 그의 생전에 두 나라와 연관을 가졌으리라 추측키도 어렵다.

반면에 신라는 연대적으로도 측천무후 통치기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새깃털(鳥羽)을 꽂은 관모(冠帽)에 붉은 고름, 넓은 소매가 있는 흰 포복에 속대를 찬 복식의 유사성이 있으니 가장 유력한 후보라 이르기에 무방하다. 사마르칸트 아프랍시압 궁전의 <신라사신도> 벽화와 같은 계보에 있는 그림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40분 넘는 시간을 오로지 예빈도 앞에서만 서성이고 있다. 한참은 진열장에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응시하고 또 한참은 반대편 벽에 기대어 멀찍이 바라본다. 1300여 년 전 해동국인이 뚜렷한 모습으로 서 있는 광경이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비록 모사품이지만. 실물은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전시품은 발굴에 참여한 당창동(唐昌東) 화백이 그린 모사).

석상처럼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박물관 경비병('경비원'이 아니라 스물이 갓 넘은 앳된 군인들이다)이 흘끔흘끔 곁눈질로 나를 본다. 궁금하기도 하겠지. 저 자는 왜 자꾸 이 그림 앞에서만 얼쩡거리나 하고. 그러나 그가 어찌 알랴. 이국에서는 자기 나라 여행객만 만나도 반가운 것이거늘 하물며 이역만리에서 옛 동포를 접하는 자별한 심회를.

▲ 예빈도 앞의 중국인 가이드들. 10여 팀 이상의 가이드 모두가 한반도와 관련한 인물로 다섯 번째 조우관 인물을 설명했다. 사진 맨 아랫쪽의 영어 해설 가이드는 "한국과 일본 중 어느 하나일 것"으로 설명했다.
ⓒ 오창학
개인, 혹은 한 무더기의 단체들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짓는지 지켜본다. 혹여 가이드가 딸린 단체가 지날 때면 무리에 끼어 설명을 엿듣기도 한다.

영어는 서툴고 중국어는 젬병이니 소상한 내용이야 알 길 없어도 다섯 번째 인물을 가리키며 내뱉는 단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겠다. '까오리'(高麗:고구려), '신루워'(新羅)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들리고 '조신'(朝鮮:북한을 이르는 말이니 아마도 고구려를 의미할 듯), '한구어'(韓國:신라를 말하는 듯함)도 간혹 나온다.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는 '코리아'(Korea)로 통칭해 말하는데 한 여자 가이드는 '한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나라일 것'이라며 제법 정확한 안내를 한다.

에릭님은 사신으로 조아리러 온 과거의 흔적에 불편한 감정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먼 곳에 그림으로 남은 굴욕의 역사. 그러나 유홍준 교수의 말대로 중국이라는 '대형할인매장' 옆에 조그만 '구멍가게'로 태생한 운명 그 자체에 대해선 어찌할 수가 없잖은가.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영세 가게들이 대형할인매장 옆에서 망해 넘어가고 흡수 통합되어 갈 때 당당히 업소를 지키며 끊임없는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구멍가게의 저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조공무역'이라 하나 그것이 당시 외교의 한 형태였다고 할 때 저 그림의 사신이 속한 나라들이 일찍이 동서문명 교류사의 주역들 중 하나로 참여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이 예빈도의 인물 중 하나가 자국인임을 주장하는 이유다. 문명 교류사의 객체로서, 피동적 수용자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체적인 활동국이었음을 증명하고자하는 노력인 것이다.

▲ 당 대의 여인상
ⓒ 오창학
박물관에 있는 당 대의 여인상들은 한결같이 풍만하다. 툽툽한 볼에 결코 잘록하지만은 않은 허리. 당 대 최고미인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미인 양귀비의 외모를 말할 때도 '날씬함'이나 '쭉쭉빵빵'과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 많은 어떤 이들은 그녀의 요강 분석을 토대로 몸무게 83kg이라는 가설까지 만들어 냈다. 그 가설의 신빙성 여부를 생각지 않더라도 중국 내 석굴조각이나 불교미술에서 당 대의 작품임을 입증할 때 풍만하고 복스러운 체형을 내세우는 바, 당시 미인의 조건으로 통통한 체형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가치규범의 변화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미의 기준이 변한다. 굳이 당 대와 현대의 가치기준을 따질 것도 없다. 우리네 모습을 비추어 보더라도 40년 전과 지금의 미인은 얼마나 다른가.

'다이어트' 광기가 세상을 덮더니 그것도 모자라 퓨마새끼 닮은 '작은 얼굴' 신드롬이 득세를 하고 급기야 '동안' 열기까지 가세한 지금 사람의 관점에서 1000년도 넘는 세월 저 편에 있는 미인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더니 여기 박물관의 여인상들에서 한 줄기 감을 얻는다.

▲ 경주 괘릉의 서역 무인상(좌)과 시안 박물관의 서역인상(우)
ⓒ 오창학
여인들의 조상(彫像)들 옆으로 서역 남자상이 몇 있다. 그런데... 이건 경주 괘릉 앞의 서역 무인상이 아니냐? 갑주도 없고 칼도 휴대하지 않았지만 텁텁한 장비수염에 우뚝한 코, 튀어나올 만치 부리부리한 눈, 배와 허리에 닿은 주먹 쥔 손. 그리고 다리 사이의 옷 주름까지... 괘릉의 무인 석상은 당시 신라에 들어와 있던 서역인(상인이든 용병이든 간에)을 모본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여기 박물관에 있는 것 같은 조상 하나를 들여와 석조로 크게 뻥튀기 한 것일까.

▲ 시안의 저녁
ⓒ 오창학
한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일까. 쉬 날이 저문다. 방학일정을 맞춘 아내가 오늘에서야 시안으로 날아왔다. 느낌이 이상하다. 하루 넘게 바다를 건너고 차량통관을 위해 톈진에서 며칠을 기다리고 또 그만큼의 날짜를 어렵게 달려 시안에 도착했는데 아내는 오늘 한국을 떠나 금세 이곳에 나타난다. 지난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한 없이 어이없다.

약조한 시간보다 늦게(이 짠순이 아줌마가 센양(함양)공항에서부터 택시가 아닌 버스를 탔다)숙소 현관에 들어서는 아내를 보니 왈칵 반가움이 몰린다.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 싶은데 그저 두 손 비죽이 잡아주는 게 고작이다. 바보.

이제껏 얼굴 보며 살았던 사람이 이토록 반가울까. 매일 맡는 공기는 소중함을 모른다. 부부도 떨어져 봐야 서로의 가치를 아나보다.

▲ 드디어 아내가 합류했다. 시안의 대표 만두점 '덕발장'에서의 만찬
ⓒ 오창학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길 "인생의 즐거움은 잠자는 것과 교자를 먹는 것"이라하니 교자의 본고장인 이곳 시안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마님(아내의 팀 내 대화명)의 합류기념으로 덕발장 교자연(德發長 交子宴)에 들렀다. 만두로 채운 땡땡한 배만큼이나 불룩한 시안의 밤이 깊어 간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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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가는 통로 시안(西安)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⑩] 시안의 명고성과 비림
오창학(ohmadang) 기자
▲ 시안의 상징 명고성 전경
ⓒ 오창학
'과거로 가는 통로 시안'

비에 젖은 시안(西安). 모든 여행자들이 시안 이야기의 서두를 비 이야기로 시작하기에 어쩜 이리도 상투적일까 싶었는데 나마저도 그 전철을 밟는다. 그만큼 먼지로 이루어진 고도(古都)에서 만나는 비가 각별한 심회를 돋운다.

시간의 장막이라 할까? 내리는 비가 나를, 그리고 이 도시를 먼 과거 어디쯤으로 옮겨 놓는다. 시안에 들어서며 느꼈던 교통 지옥과 도시의 현란한 조명은 이곳이 고도 장안(長安)이라는 사실을 잊게 했었다. 그런데 오늘 비는 1400여 년 전, 당 장안 어느 거리로 나를 안내한다.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나’에 필적하는 ‘팍스 당’의 그 시대. 속지주의와 속인주의 근대법 체제가 일찍이 실현된 국제인의 도시 장안.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108개의 방(坊)에 신분의 귀천과 사농공상의 직능에 의해 엄격히 분리된 100만의 인파가 우글대는 통제의 도시.

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트리우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의 용광로.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조기유학파 학자나 의상·혜초 등의 승려, 고구려의 천남생 같은 망명객, 흑치상지와 고선지 같은 무장, 왕모중 같은 모사가 꿈틀거렸던 귀 익은 도시 장안.

눈앞엔 비안개에 가린 고층빌딩의 상이 맺히는데 마음속에선 여전히 종루에서의 70번째 종소리에 맞춰 열리던 장안성과 300번 정오 북소리에 개장하고 300번 일몰 종소리에 폐장하던 동시, 서시의 정경이 읽힌다.

어쩌면 저 골목 어디선가 그네들을 만날 것 같다. 서시(西市) 한 켠에선 소그드 상인이 분주한 셈을 놓고 장안 호걸이 호녀(胡女)를 찾아 잰걸음을 줄이고 있을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먼지의 땅에 내리는 비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 옛 정취를 가득 간직하고 있는 시안의 매력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시안은 과거로 가는 길목이다.

▲ 명(明)고성의 성루. 버스 두 대가 능히 비껴갈 만한 넓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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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성에 올랐다. 14C에 당대의 흙벽 성곽에 명대 주원장이 벽돌로 개축하여 쌓았기에 굳이 ‘명’고성이라 이른다. 당대의 국제도시 장안은 이런 규모의 성곽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서 25리(9.7Km), 남북 20리(8.2Km)의 거대한 장안성. 결코 함락될 것 같지 않던 이 고성도 안전한 방패막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안록산으로부터도, 이자성으로부터도.

▲ 성벽. 나를 지키기 위한 벽이냐, 가두기 위한 벽이냐.
ⓒ 오창학

성벽을 볼 때면 묘한 느낌이 든다. 저건 나를 지키는 방벽일까, 가두는 감옥일까? 결국 성 안에 둥지를 튼 이의 힘 크기에 따라 성은 방벽이 되기도 하고 감옥이 되기도 한다. 갑오농민전쟁 때 전주성에 입성한 동학군이 꼭 그렇고, 흉노를 두려워해 만 리에 걸쳐 벽을 두른 진시황도 마찬가지다. 성은 확실한 방어의 상징이지만 성밖의 세상으론 더 이상 발을 내딛지 않겠다는 소심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지속적이진 않았으나 유목민족이 정주민족을 누르며 세상을 호령한 것도 정주민족을 성벽 안에 가둘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망루에 서서 성벽 너머의 세상을 보는데 바람결에 이백의 ‘소년행(少年行)’이 환청으로 앵앵거린다.

오릉(五陵)의 젊은이 금시(金市) 동쪽으로
은안장 백마 타고 봄바람 뚫고 간다
낙화를 밟으며 어느 곳에 놀려는가
웃으며 맞는 호희(胡姬)가 있는 술집으로


오릉은 한나라 역대 황제의 능묘지역으로 당대에는 유명한 협객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니 당대의 압구정동(오릉)의 젊은이가 삐까 번쩍한 외제차(은안장 백마)타고 돈 벌러 온 러시아 아가씨들(호희:6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망하면서 들어온 여인들)이 있는 ‘깔삼한’ 나이트로 행차하신다는 말씀인데…. 세월은 흘러도 사는 모습은 어째 이리 똑같더냐.

패망한 페르시아 여인들이 호선무(胡旋舞)를 추며 연명하던 이곳에서 당나라에 끌려온 백제와 고구려 여인들의 같은 운명을 떠올린다. 국제유학생들로 바글대던 장안. 외국 인재를 유학으로 영입하고 다시 고국에 돌아가더라도 친미파가 되게 만드는 위대한 아메리카 제국의 정책보다 1400년 앞섰다.

아, 이곳 시안(장안)이 어찌 나와 연관 없는 그저 남의 나라 도시에 지나지 않겠는가. 지금과 단절된 과거의 땅에 그치겠는가.

'돌로 만든 도서관 비림'

▲ 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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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碑林). 말 그대로 비석의 숲, 돌로 만든 도서관에 들렀다. 구양순, 구양통, 안진경, 왕희지 등의 작품이 그대로 남아 서체의 화석들이 모여 있는 곳. 비를 뚫고 비림에 들어섰다. 한대부터 근대까지 1800여 개 비석을 7개 진열실에 전시하는데 논어 등 12부 경서를 비석에 새겨 보존한 1진열실이나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2진열실도 볼만한 것이지만 내가 정말로 찾고자 한 것은 요것이었다.

▲ 대진경교유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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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781년 음력 1월 7일 제작. 비문의 작성자는 경정(景淨, 시리아 명 아담) 비의 건립자는 이사(伊斯, 이지드부지드).

1620년대에 한 인부가 집을 짓느라 땅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비석으로 대진(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주교 알포펜이 이끄는 사절단이 635년 당나라 조정의 포교허가를 받고 장안의 서시 가까운 의녕방에 교회를 세운 이래의 중국 내 네스트리우스교 전래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처음엔 페르시아의 종교라 하여 ‘파사교’라 하였으나 현종 때에 ‘큰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 한 것인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진 종교가 불교에 국한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당나라 때. 중앙아시아를 통해 전파된 네스트리우스교가 당시 서역과 접촉이 활발했던 오아시스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온 것인데 이후 200여 년간 중국에서 교세를 넓히다가 845년 불교를 포함한 외래종교를 금지한 조치인 회창법난과 874년 황소의 난에 휘말리면서 중원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

그 후론 중앙아시아 대초원으로 무대를 옮겨 강한 생명력을 이어가게 되는데 경주의 7∼8세기 신라유적에서 경교 유적으로 보이는 성모 마리아 상과 돌 십자가가 출토되는 것을 보면 실크로드의 경로가 한반도까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탁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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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실 한 켠에서 탁본을 뜨고 있다. 저렇게 견본 비석에 탁본 뜨는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관람객에게 산 교육을 시켜주고 그 탁본은 판매용으로 넘기니 일석이조다. 헌데 비림 해설원 아가씨가 저건 견본비석이 아니라 진품유물이라 말한다. 설마? 탁본을 뜨고 있는 저 비석이 진품유물이면 소위 문화재라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돈을 밝혀도 문화재에 설마 저런 짓이야 하겠나. 이리 생각하는데 안내 아가씨가 탁본판매대 아주머니께 묻더니 다시 와 말한다.

“진품비석 맞습니다.”
“엥?”
놀랍다.

“탁본이란 게 자꾸 반복되면 비석이 상할 텐데 진품 문화재의 탁본을 떠서 판다고요?”
“그래서 비교적 최근(청대)의 비석으로 탁본을 뜹니다.”
“아무리 가까운 시기의 비석이래도 문화재는 문화재잖아요.”
“그래서 하루에 3장만 탁본합니다.”
“….”

할 말이 없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하루 3장만 탁본한다? 300장을 뜰 수도 있는데 3장만 뜨니 문화재는 훌륭히 보호되겠다.

▲ 글씨로 그린 그림. 이 비식들은 진품인가 모조품인가.
ⓒ 오창학

나리님이 글씨로 그림을 형상화한, 아니 어쩌면 그림 속에 글씨를 넣어 좋은 뜻을 새긴 비문의 탁본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덩달아 자포님도 눈독을 들였다. 두 분 모두 지루한 협상 끝에 적정가에 구입하고 나서는데 누군가 같은 탁본을 또 산다.

▲ 길고 지루한 흥정. 하루 '딱 3장'만 찍는다는 탁본을 앞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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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래! 3장뿐이라며? 어디서 저렇게 계속 나오는 겨? 아마 누군가 사러 가면 또 한 장을 내놓겠지? 그래서 우리가 3장뿐이라며? 하고 말하면 그럴 게다. 이건 어제 뜬 것 중 안 팔린 분량이야. 어차피 장삿속으로 앉은 사람에게 긴 말 해봐야 입만 아픈 일. 내 알기로 탁본용 비석은 모조품으로 알고 있는데 저리 진품이라 우긴다.

그 말이 사실이면 관광수입의 대가로 문화재를 파괴하는 불학무식 한 족속이 되고, 사실이 아니라면 허위장사를 하는 사기꾼이 된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비난을 면키 어려운 수를 두고 있다. 차라리 ‘정밀’하게 복제한 모조품임을 강조하고 판매하는 것이 나을 성싶은데 나리, 자포 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저 비석이 진본이 아니기만 바랄 뿐.

▲ 말고삐를 매어두는 기둥들. 머리장식이 이채롭다.
ⓒ 오창학

전시실을 돌아 마당으로 나서는데. 여러 형상의 머리장식을 가진 돌말뚝들이 열 지어 있다. 가이드 철봉씨가 어떤 용도의 조각기둥들이겠냐고 문제를 낸다. 오호라 알겠다. 박재동 화백이 ‘목에 힘주지 않고 창작한 조용한 걸작’이라 평한, 그래서 ‘느끼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고 말한 바 있는 말매기 기둥(말고삐를 묶는 기둥)들이렸다. 편견 없이 봐도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자태가 보기 좋다. 때론 하늘을 나는 예술가의 나무 기러기보다 목수의 수레바퀴가 더 값진 법.

▲ 현종비각의 '비림' 현판
ⓒ 오창학

현종비각의 획 빠진 ‘비림’현판을 다시 확인하며 비림을 빠져 나온다. 아편전쟁의 주역 임칙서가 영국의 압력으로 좌천되어 있을 때 현판 글씨를 부탁 받고 일부러 ‘비(碑)’자의 위 획 하나를 빼놓았다는 설이 있다. 장군투구의 위 꼭지가 떨어진 것을 형상화해 획 하나를 빼고 언젠가 복권되면 찍어 넣겠노라 했다는 것인데, 낭설인 것 같다.

‘구라’라고 하기엔 좀 심하고 그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라고나 할까. 원래 서예에선 ‘비’자를 쓸 때 대개는 꼭지 획을 넣지 않는다. 활자판에서나 넣을 뿐. 그리고 임칙서가 잠시 좌천의 시기를 겪었다 하나 윈난성(雲南省)의 이슬람교도 반란(청의 입장에서 볼 때)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태자대부의 직명을 얻었고, 1850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가는 중에 병사하였으니 과거의 명예는 찾은 셈인데 왜 획을 안 그어 넣었냐는 말이지.

때론 해몽이 꿈을 만들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며 비림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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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족이 사카족이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⑨] 낙양 백마사에서 만난 금인(金人)
오창학(ohmadang) 기자
▲ 정형진 선생.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의 저자로 경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향토사학자다. 여행 출발 전 경주 유적을 안내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 오창학
"신라의 왕족은 만주와 중국을 지나 천산 너머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성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알타이 지역과 천산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천산의 동쪽과 알타이 지역은 유사이래 동서 인종의 충돌 지역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람과 문화가 넘어 오다가 기원후에는 동쪽의 사람과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중국 동북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정형진 지음, 일빛, 2005)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천착하게 된 의문이었다. 사실일까?

▲ 문무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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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秺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기록은 모화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과 연관시키려한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을 기록해 놓은 것일까?

모화사상에 젖은 공작으로 보기엔 비의 주인공이 당나라와 대결하였던 문무왕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안 되고 사실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천산 언저리의 흉노 일파가 동으로의 이주를 거듭해 결국 신라왕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니….

▲ 경주 박물관 마당의 서역 문양석. 경주 소재의 사찰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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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라 김씨 왕족이 집권했던 2~6세기 사이 신라가 채용한 적석목곽묘는 우리나라 삼국 중 유일한 양식으로 북방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는 묘제라는 점. 이 시기 황금유물을 비롯한 북방초원문화의 상품들도 다량 유입되었고 서역의 문물들이 대거 발굴된다는 점이 문무왕비 내용을 무시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는다.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경주 괘릉. 그 앞을 지키는 서역 무인상의 존재가 흥미롭다
ⓒ 오창학
중국의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왕릉도 평지에 조성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연못을 메워 조성했기에 무덤방에 물이 차, 관을 천정에 매달았다고 해서 괘릉이다. 중국의 장묘문화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괘릉에 무인 석상은 왜 서역인일까? 단순히 신라에 들어와 있던 용감무쌍한 서역 용병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뿐인가?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깨지니 위 학설은 말이 안 된다고?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지장스님이 중국 유학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 왕인데 이미 불기(記: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모니의 세속 인연 종족인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이것이 위 책 저자의 주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휴도왕(休屠王)은 '금인제천(金人祭天)'을 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금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금인이 불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게 해석하면 휴도왕이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기에 '금인(金人)'이라 불린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데(<한서> 김일제전에도 휴도황이 금인제천하는 까닭에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찾은 백마사는 이 금인(金人)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 백마사 전경. 송 대에 만들어진 두 마리 백마상이 서 있다
ⓒ 오창학
백마사(白馬寺: 바이마스)는 낙양의 동북쪽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목덜미에 일륜(日輪)을 걸고 있는 금인(金人)을 꿈속에서 보고 난 뒤, 여러 신하들에게 그 꿈에 대해서 묻고 천축국에 사신을 보내 불법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Kasyapa Matainga), 축법란(竺法蘭:Dharmaratna) 등이 명제의 사신 채음(蔡愔)의 간청으로 불상·경전을 흰 말에 싣고 낙양에 들어왔으므로 후대에 절 이름을 백마사라 한 것. 이를 상징하듯 절 입구 양쪽에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두 마리의 백마상이 서 있다.

AD 67년,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최초의 사찰이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지만 현재의 건물은 명·청대에 중수된 것이고 그나마 관광지화 된 80년대 이후의 느낌이 많아 가람 자체에서 느끼는 고아한 맛이 덜하다. 어쩌면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백마사 승려들. 무언가 재미난 담소에 골몰해 있다
ⓒ 오창학
더구나 떼거지로 몰려서 벽에 등 기대고 검표하는 승려들(적어도 외양상으론 승려가 맞다)의 풀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찰에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과는 더욱 멀어진다.
중국이 '해방'된 49년부터 종교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한 80년대까지 근 30여 년 동안 종교가 없었던 나라인데 사찰이라는 건축물에 갑자기 신실한 종교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다.

여기 유적이 대개 청대의 건축물이라 해설하는 낙양 현지 가이드에게, 그럼 이곳이 문화혁명의 위기를 어찌 넘겼느냐 물으니 건물이 회의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란다. 참 짙게 드리운 문혁의 그림자다.

▲ 향로. 대국답게 규모부터가 우리네와 다르다
ⓒ 오창학
대국기질이라 해야 하나 황제기질이라 해야 하나. 향의 격이 다르다. 두께 3Cm의 몽둥이만한 향이 아니면 일반 향 10여 개 이상의 모둠 향이다. 그러니 연기가 연막탄처럼 자욱하고 절집을 압도한다. 향로의 규모도 다르다. 말구유만한 철제함에 재가 그득할 때까지 태운다.

과거 자금성을 지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위압하고자 했던 그 황제기질이 상하이 푸동거리와 베이징 장안대가에 지어진 필요 이상의 고층건물들로 발현되고 있다고 할 때, 이 향로의 규모도 그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겠다. 중국 고사에 '중국인 개개인은 모두 순민이지만, 또한 모두가 황제다(中國人個個都是順民, 亦個個都是皇帝)'라 이르는 말이 빈소리가 아닌가 보다.

▲ 이 돌을 손으로 문질러 환부에 대면 그 부위가 낫는다 한다. 배앓이를 하던 자포님은 아예 몸을 맡긴다
ⓒ 오창학
향로 앞에 복숭아 모양의 돌상이 서 있는데 꼭지가 반들반들하다. 꼭지 부위를 손으로 만진 후 신체의 아픈 부위에 대면 병이 낫는다지. 이 설명을 듣고는 벌써 며칠째 배앓이를 하던 자포님이 아예 기둥을 껴안아 버린다. 믿고 기댈 대상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믿고 싶은 열망이 저 돌기둥을 존재하게 했으리라.

기복(祈福)에 관한한 한국인은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확실히 중국은 한 수 위다. 절집 곳곳에 복을 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안배하고 직접 현금을 모을 수단도 고려해 놓았다.

▲ 金人入夢白馬䭾經. 기둥에 한 명제 때의 창건배경을 새겨 놓았다
ⓒ 오창학
'금인이 꿈에 나타나 백마에 경전을 싣고 오다(金人入夢白馬䭾經)'를 옮겨 놓은 기둥이 보인다. 여기서 일륜을 걸고 있는 금인이란 바로 불상을 일컬음이다. 휴도왕의 '금인제천'을 불교의식으로 이해하는 바가 무리가 아님을 알겠다.

▲ 서안에 닿았다. 적어도 오늘은 살아남았다
ⓒ 오창학
오후 6시 넘어 뤄양(洛陽)을 떠나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시안(西安)에 닿았다. 다시 한 번 도심의 어이없는 도로 상황에 절망한다. 사람과 자전거와 차량이 뒤엉키는 아비규환. 이를 카오스라 정의할 수 있을까.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상황이 과연 이러할까. 아니, 아수라지옥이라 이르자. 피가 튀고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의 정경이 이러하리라.
끝없는 무단횡단과 끼어들기의 물결. 경적, 경적, 경적.

쿵. 기어이 택시 하나가 소형트럭의 꽁무니를 들이 박는다. 다행히 사람이 다칠 정도는 아니다.

낙양 벗어나며 작동되기 시작한 네비게이션 덕에 숙소 인근까지는 잘 왔는데 입력이 안 되어 있는 호텔인지라 택시를 앞세워 찾아냈다(도심에선 유용한 길 찾기 방법이다).

밤 11시 10분. 숙소 앞에 차를 대고 나니 몸이 후르르 무너진다. 야간 고속도로 주행의 위험과 도심 교통의 혼잡함 때문에 신체의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날을 세운 탓이다. 아… 오늘도 살아남았다.

중국 고속도로 야간 주행이 위험한 5가지 이유

1.고속도로에 가로등이 없다
오로지 차량의 전조등에 의지해야 하는데 상향등을 켜도 반사체가 드물어 가시거리가 짧다. 고속으로 주행하다보면 후미등을 켜지 않은 화물차의 등판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달랑 표지 하나로 차선 감소를 알리는 길에 접어든다.

2.노면상태가 불규칙하다
대개 2개의 차로가 있는데 갓길엔 화물차가 다니다보니 과적으로 인해 도로가 마구 울었다. 운전대가 휘둘릴 정도로 노면 상태가 좋지 않다.

3.고속도로에도 무단 횡단자가 있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발견치 못하면 무척 위험하다. 특히 야간에 중앙분리대쪽 화단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목격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심정 이해 못한다.

4.반대편 차량들이 상향등을 켜고 다닌다
중앙분리대가 빛을 가려주지 못해 이쪽 운전자의 시력을 일시적으로 뺏어간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무척 위험하다.

5.화물차들이 졸면서 운전한다
중국 고속도로에서 소형 화물차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모두가 트레일러 크기에 짐을 몇 m씩 쌓아 움직이는데 보통 2000~3000km씩 움직이다보니 피로가 누적된 상태여서 졸음운전이 흔하다. 1차선으로 주행하고 있는데 2차선의 화물차가 졸음으로 1차선을 덮칠 땐 등골이 서늘하다. 고속도로 대형사고의 대부분은 화물차 졸음운전 때문이다. / 오창학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만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2 년여 가까이 계속해 오던 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의 연재마저 보류한 채 많은 시간을 이 여행의 준비에 매달렸고 결국은 실행에 옮겨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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