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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만㎡나 되는 유적은 꽤 넓어 보인다. 쪼잔 하지 않아서 좋다. 둘러보기만 해도 십 리가 족히 넘고 직선 왕복이래도 최소 오 리 이상이다. 여느 때라면 십 리건 십 킬로건 문제될 바 아니겠지만 여기는 투루판! 그것도 여름날의 투루판이 아닌가. 가히 살인적인 날씨. 혀를 빼어 물고 씩씩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보지만 금세 후들거린다. '덥다'는 표현으론 2% 부족하다. '뜨겁다' 혹은 '따갑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린다. 먼지 폴폴 날리며 몇 발짝 떼었다가 갈등한다. 과연 저 끝에 갔다가 쓰러지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까. 교수님의 눈은 자못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아내는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산 숄을 뒤집어쓰고 태양을 막는다. 독한 여인, 얼굴은 벌건데 덥다는 내색 한 점 없다.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
소년의 흥정가는 더 내려간다. 중국에서 터득한 흥정법 둘. 첫째, 집착하지 말 것. 내 눈빛이 자기가 가진 상품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값은 알아서 적당하게 내려선다. 둘째, 구매한 이후 남과 비교하지 말 것. 남 가슴을 아프게 하든지 자기가 아프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므로. 어차피 재화란 자신이 부여한 만큼의 값어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금강석이 비싸지 않다면 단단하고 투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박힌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시시덕거릴 수 있을까. 물건 값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인 가격만큼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 마차를 포기하고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입이 방정이지. "싼스콰이(30위안)!" 안 탈 요량으로 내가 이 가격을 불렀다. 중국어 초급과정도 다 떼지 못한 주제에 숫자는 넙죽넙죽 잘도 주워 삼킨다. "커이, 싼스콰이(좋아, 30위안)" 그런데 소년이 쾌히 승낙한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마차를 타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이미 정원이 초과된 마차에 오른다. 나귀를 모는 위구르 사내는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을 흉내 내고 싶은가 보다. 십여 명이 걸터앉아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마차를 질주시킨다. 수 없는 채찍질이 오가고 보얀 먼지를 단 채 나귀가 달린다. 밍사산에서의 낙타도, 고창고성의 나귀도 유쾌한 경험을 만들지 못하는구나. 교수님의 입에서 탄식처럼 나온 한 마디.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 결국 마차에 오른 우리도 공범인 셈이다.
교수님은 오늘 유난히 맥을 못 추신다. 벽을 주는 그늘에 콕 갇혔다. 철봉씨는 그래도 팔팔하다.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도 난생 처음 신장에 와 보는 철봉씨는 신장의 새 구간을 넘어설 때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자랑을 한다. 그의 교포친구들 모두 '새로운 강역'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늘 속에서 돈을 헤아리며 셈에 열중하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다. 대단하다. 저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나 말고도 저토록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그런 까닭에 1904년 이곳에 당도해 수개월 간 발굴 작업을 진행한 독일탐험대의 르콕마저 발굴유물과 벽화의 싹쓸이 행위를 '보존'으로 합리화 하는 것이다. 이는 여기 투루판 뿐 아니라 동투르키스탄(신장)을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 일대 전체가 유적과 관련한 '약탈'과 '보존' 사이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맞다. 서양인들이 발굴과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유물들을 챙긴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보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물론 르콕처럼 똥오줌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뜯어가 버린(베제클리크 천불동처럼)과격함이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들이 실크로드사 연구와 유물 보존에 공을 세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존'하다가 원주인이 달라면 이제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간의 보관료나 노력이 아깝다면 마땅한 비용을 청구하면 될 것이고. 영구적인 '보존'을 꿈꾸니 '약탈'이란 소릴 듣는 것이다. 고창고성의 흙벽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시의 불심 깊은 왕 국문태는 현장이 계속 고창에 남아 설법해 주기를 원했다.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봤지만 구법을 향한 현장이 움직일 리 있나. 현장은 비장의 무기, 단식투쟁으로 떠나고자하는 의지를 관철시킨다. 마지못한 왕은 현장으로부터 천축에서 돌아올 때 삼 년을 체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놓아준다. 그러나 역사란 무상한 것이어서 현장이 돌아올 땐 고창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당에 정복되어 있었다. 고창국 멸망 후 651년 당태종이 보낸 소정방에 의해 서돌궐이 패망하는데 9년 뒤 동쪽 끝 한반도의 백제마저 당의 군대에 짓밟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고구려 유민 장수 고선지를 바라보는 눈도 다소 어둡다. 소정방이나 고선지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 입장에선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괴수가 아니었겠나. 나는 고선지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가. 가뜩이나 폭염으로 뇌가 뜨거운데 또 무거운 상념 하나를 보탠다. 옛 성에서의 기억들을 뒤로 하고 백구에 올랐다. 이제 투루판 시내로 차를 몬다.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지의 산물, 카레즈
만약 톈산 산맥의 눈 녹은 물과 여기 카레즈가 없다면 유명한 투루판의 포도 경작은 물론이요 인간의 생존여부마저 불투명하였을 것이다. 카레즈는 투루판 뿐 아니라 하미에도 약간이나마 존재하며 주로 여기와 같은 건조지대인 이라크, 터키, 아프카니스탄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수로양식인데 원조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투루판에 현존하는 카레즈는 주로 청대에 보수된 것으로 물길 2000여 개, 총연장 500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생각게 하는 시설이다. 그러나 이 역시 환경파괴와 인구증가로 고갈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환경 적응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거듭 시험해야할 때가 올 지도 모르겠다.
카레즈의 싸늘한 한기를 아쉬움으로 남기고 나서는데 입장할 때 만났던 잘 생긴 위구르인 사내가 따라 붙는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란다. 한국관광객을 상대하는 가이드가 꿈인 그의 한국동경이 만만치 않다. 이곳에서도 한류의 바람을 느낀다. 카레즈 박물관을 나서는 길에 위구르 노인에게서 포도를 사 즉석에서 베어 문다. 투루판을 흔히 최열(最熱), 최저(最低), 최한(最旱), 최감(最甘)의 땅이라 말하는 연유를 알겠다. 투루판의 악명 높은 더위(최열)와 해수면보다 낮은 고도(최저), 그리고 건조함(최한)이야 익히 들어 알고, 체험해 알았는데 이제 먹어보니 포도의 맛 또한 가히 환상이다(최감). '최열'과 '최한'이 빚어낸 부산물이 '최감'이 되는 셈이다 21세기 신장, 양고기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신장에선 음식 때문에 고생할 거라 한 이가 대체 누구야. 신장에 왔으니 양고기 요리도 좀 먹고 그러고 싶지만 막상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 한족 덕분에(?) 풍부한 먹거리가 기다리는 투루판. 이제 21세기 신장에선 양고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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