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으리, 가난하지만 행복한 이들을...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4] 인촨의 승천사탑과 서하왕릉
오창학(ohmadang) 기자
인촨, 황하를 앞에 두고 뒤에 허란(賀蘭)산맥을 둔 배산임수의 땅으로 짧았지만 큰 흔적을 남긴 대하(大夏) 제국(1032-1227)의 수도였다.

한자를 본 딴 자신들만의 문자 체계와 과거제도를 갖추고 남으로 송, 요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왕국. 송, 요의 서편에 위치했기에 '서하'라 불렸고 200여년으로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인촨의 곳곳에 그 시기의 많은 유적을 남겼다. 인촨 내의 사찰을 비롯해 유명한 서하왕릉 등이 다 그 때의 산물이다.

늦은 아침을 이기고 승천사탑과 그 안에 딸린 닝샤보우관(寧夏博物館)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영하박물관

▲ 영하박물관. 승천탑 사 내에 위치해 있다
ⓒ 오창학
인촨의 서쪽에 자리하여 서탑이라 불리는 승천사탑(承天寺塔) 경 내에 영하역사문물, 서하문물, 회족민속, 하란산암각화 등의 4개 전시실이 위치해 있다. '박물관'이란 간판을 붙이기엔 지나치게 소박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닝샤후이족 자치구의 이모저모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조인(鳥人)'이 눈길을 끈다. 불경에 나오는 쟈릴핀가로 히말라야에 살며 묘한 울음을 운다는 새. 서하의 건축물에도 불교 건축 양식이 가미되었나보다. 도깨비 형상의 남녀 조각을 한 주춧돌 같은 대형 유물이 아니더라도 대나무 펜 같은 소소한 유물들도 서하제국의 면모를 읽게 한다.

무엇보다도 관심이 간 것은 서하의 문자. 한자에 회의자 구성원리로 여러 글자를 배합하거나 획을 더하여 구성해낸 문자다. 수천 자 이상의 문자가 전해져오고 있고 그 대부분은 해독이 가능해 서하인의 일상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로 남아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자에 한자를 더한 문자라 어떤 자는 40획이 넘는 글자도 있다.

꼬박꼬박 일기로 인생의 기록을 남기던 중학 시절 누군가 내 생활의 면을 엿보는 것이 싫어 철사로 일기장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워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 불안하기는 매 한 가지.

하여 중2 때 영어발음기호와 한글 자모의 형태를 변형한 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타인에게 노출하기 싫은 기록은 '내 문자'를 사용해 표기한다. 서하문자는 어린 시절 만들었던 내 문자보다도 더 불편한 체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한 번 한글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승천사탑에서 만난 '테츠'

▲ 승천사탑, 이곳에 오르면 인촨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테츠를 만났다
ⓒ 오창학
승천사탑에 오른다. 11층, 64m짜리 벽돌탑으로 오르는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계단에 가슴을 문지르며 올라 정상에 서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무의식 중에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은가봐' 하고 말을 하려다가 멈춘다. 50대의 교수님이 시야에 들어온 탓도 있지만 인생에서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은 입에 담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다.

가급적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현재에 대한 불만족으로 과거나 삼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내 인생 어느 때에 가파른 64m를 오르고도 숨이 차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랴.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아니라 숨 찬 일을 했기에 숨이 찬 거다.

1050년에 지어졌으나 지진으로 인해 1820년에 다시 지어진 이 탑은 인촨 지구에서는 가장 높은 탑이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탑 위에서 내려다 보는 인촨 시가지의 풍경도 꽤 좋다. 그런데 바깥을 내다보는 창문 쇠창살에 자물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이곳을 찾은 연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걸어놓은 것들이다.

자물쇠처럼 굳게 잠겨 서로의 사랑이 풀리지 않았으면 하는 기원에서.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처럼 추상적 대상을 구체적 사물인양 형상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들의 소망이 갸륵하다. 자물쇠가 녹슬어 삭아 내리는 세월이 지나도 그 사랑 영원했으면….

숨을 돌린 뒤 탑을 내려왔는데 뒤따라와야 할 아내가 내려오질 않는다. 탑 문지기 할아버지에게 물어도 우리 뒤로 내려 온 이가 없단다. 밑에서 계단을 통해 소릴 질러도 응답이 없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다 변고를 당한 게 아닌가 싶어 숨 헐떡거리는 그 계단을 다시 오른다. 거의 정상에 왔나 싶을 때 들리는 두 여인의 두런거리는 소리. 내려오던 아내와 올라가던 회족 여인이 눈이 맞아 긴 이야기에 빠졌다.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회족 여인의 이름은 테츠. 상하이가 고향인데 외국 생활이 잦고 현재는 일본에서 무역 관련 일을 하며 양국 생활을 반씩 영위하고 있다는 여인.

회족인 그녀에겐 인촨이 특별한 의미였던 것일까? 회족 자치구 내의 어려운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그 아이들을 볼 겸 여행도 할 겸 이곳에 들렀단다. 우리 자동차로 중국 내 실크로드 전 구간을 돌았다는 사실에 무척 관심 있어 한다.

▲ 회족 식당에서의 점심.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회족의 종교관습 때문에 양고기를 넣은 일종의 케밥 같은 음식을 시켰는데 입에 착 붙지는 않는다.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먼 조상이 아랍쪽 사람임을 알 수 있겠다
ⓒ 오창학
테츠도 우리와 함께 서하왕릉에 같이 가기로 하고 점심을 위해 승천사 앞 회족 식당에 들렀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회족의 입장을 배려해 들어온 것인데 양고기를 넣은 케밥은 우리 입맛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철봉씨는 내가 테츠와 대화하는 양이 신기한가보다(자평하건데 내 영어는 중2 정도의 수준에 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운전습관에 분노하고 체념하고 이해하길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했다는 하소연에 답하는 그녀의 말.

"이것이 중국이야.(It's a China!)"

그래 그 말이 맞다. 이 모습이 중국이다. 사실 소수민족 영토에 대한 강제 지배와 최근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해 염려와 질타의 목소리로 일관했지만 그게 어디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대한 원망이었겠는가. 여행의 마무리에 즈음하여 돌이켜 보건대 이 땅 어디에 소홀하고 하찮은 문화가 있었으며 친절하고 정감 어린 사람 없는 곳이 있었던가.

테츠가 중국 여행에 대한 인상을 묻기에 내 여정은 실크로드였으며 한족의 땅도 있었지만 몽골, 투르키스탄, 티벳, 그리고 여기 회족의 땅을 둘러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봐야 결국은 중국의 땅이 아니겠는가. 그녀 역시 중국인이면서 회족이어서일까. 내 말을 이해한다며 끄덕인다. 테츠는 어쩐지 마음이 통할 것 같은 중국인이다.

제국의 흥망과 서하왕릉

▲ 서하왕릉과 그 상공을 나는 중국 전투기
ⓒ 오창학
서하왕릉에 도착했는데 상공에 중국 전투기들이 계속 지난다. 어라, SU(수호이)-27이네? 중국에서 면허생산하였을 터니 J-11이라 해야 하나. 아얼진 넘으며 야영할 때 중국의 킬로급 잠수함은 어군탐지기에도 걸리는 고물이며 공군이래봐야 MIG-15(J-5)에서 21(J-8)에 이르는 구형기들로만 채워져 있다고 철봉씨를 놀렸는데(무척 약이 올라 하는 철봉씨를 보며 교포 이전에 어쩔 수 없는 중국인이라는 걸 느꼈다) 이런 삭막한 지역의 창공에서 최신예 전투기들의 군상을 접하게 될 줄이야.

망한 왕조의 무덤 위를 비행하는 전투기 편대와의 우연한 조우에도 중국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심부터 이는 것을 보니 나도 참 어지간히 피해의식에 절어있나 보다.

▲ 서하왕릉 전시관 내의 실물 크기 디오라마
ⓒ 오창학
왕릉으로 가는 길 한 켠에 전시관이 위치해 있다. 그 중 서하의 역사를 알기 쉽게 디오라마로 구성해 놓은 장소가 이색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짧지만 굵었던 서하 200년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하를 건국한 이원호(李元昊)가 송 40만 대군을 간쑤성 부근에서 비둘기 매복 작전으로 격퇴한 이야기, 요나라 대군을 건초를 불살라 없애는 청야 작전으로 말먹이를 없앤 후 공격하여 바야흐로 하, 요, 송의 삼국 시대를 맞이하는 역사적 장면, 그런 건국의 제왕이 주색잡기에 빠져 며느리를 새 황후로 삼아 허란산 아래에 궁을 짓고 놀기에 재상이 왕자를 부추겨 모반을 꾀하게 하는 장면 등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1048년에 왕자가 술 취한 원호를 베었으나 팔에 스치고 말아 피 흘리며 방을 나서는 장면도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이 때문에 원호는 출혈과다로 죽고, 왕자와 황후는 시해죄로 투옥되고, 2살 난 원호의 아들이 즉위하여 6살 때에 권위를 굳히기 위해 지은 것이 오전에 둘러본 승천사(乘天寺)가 아니었나.

이후 꼬드겼던 재상이 국권을 찬탈하려다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나 서하가 문을 숭상하고 불교를 숭앙했던 장면들을 그럴싸하게 구성해 놨다. 어찌 보면 조악하고 유치한 구성이 아닌가 싶겠지만 역사의 장면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유용한 장치임은 인정할 밖에.

그 중 강하게 나를 붙잡는 대목. 서하국 정벌의 길목에서 득병한 징기스칸이 몽골 텐트 안에서 "서하인의 씨를 말리라"고 유언하는 장면이었다. 네이멍구 에치나치의 '카라호토(黑水城)'에 관련한 흑장군 전설의 잔영이 너무 깊게 남은 탓일까? 남들은 그냥 그런 장면인가보다 하고 넘길 장면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김영종의 <반주류실크로드사>에 소개된 흑장군 전설의 개요는 이렇다. 거칠 것 없는 몽골의 진로를 겁 없이 서하가 가로 막았다. 1226년의 일이다. 서하의 서북부 최전방 요새인 흑수성엔 명장으로 이름난 흑장군이 있다. 명성에 걸맞게 성 안의 백성과 일치단결하여 몽골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낸다.

이 과정에서 징기스칸은 흑장군에게 부상을 입고 위중해지는데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이 사실을 은폐한다. 임종을 앞둔 징기스칸은 서하의 멸망을 명하고 눈을 갚는다. 몽골군대가 성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돌려버림으로써 끝내 흑수성은 함락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서하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때가 1227년.

천하의 몽골군과 마주했던 카라호토의 유적을 보고 싶어 원래의 계획에는 넣었다가 일정상 뺀 곳이라 이곳 전시관에서 만나는 징기스칸의 유언 장면이 남 다르게 다가온다.

▲ 서하왕릉
ⓒ 오창학
여름 한낮의 태양을 이기고 서하왕릉으로 나아간다. 9개의 릉이 남아 있는데 그 중 3호릉이 이원호의 것. 먼발치서 보기에도 거대한 흙덩이가 봉분처럼 솟아 있는데 이것은 능이 아니라 묘탑이다. 애초에 기와를 얹은 7층 목조건물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다가갈수록 웅장해지는 전경에 교수님은 연신 "너무했어"를 뇌이신다.

"죽은 다음이 뭐가 그리 중해서 이토록 크고 화려하게 치장했을까?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의 고혈이 빨렸을까?"

교수님의 감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크고 화려하게 치장한 효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천 년 세월을 견뎌 우릴 이곳으로 끌었고 거대한 몸집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 안에 스며들게 하였으니….

왕릉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경쾌한 댄스곡이 울려퍼지는 정문을 나와 다시 인촨 시내의 숙소로 돌아왔다. 밤 9시. 에릭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제 하미를 떠난 2호차가 몽골과 네이멍구 국경지대의 노선을 통해 인촨으로 이동 중이란다.

무리하지 마시고 내일 바오터우(包頭)에서 만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인촨의 닝샤보우관(寧夏博物館)과 서하왕릉을 보고 싶어 인촨에 꼭 오고 싶다 한다. 그야말로 무인지대의 사막길을 쉴 새 없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32시간 2300Km 죽음의 질주

2호차가 도착한 건 새벽 4시. 나리님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사업체에 긴요한 일이 생겨 우루무치에서 비행기로 귀국했다 한다. 그러면서도 일행에 누가 될까 떠남을 알리지 말라 하여 그간의 통화에선 말씀을 안 하셨단다.

그렇다면 하미를 출발한 지 32시간 만에 하미-안시-지아위관-에치나치-인촨에 이르는 길 2300Km를 숙박 없이 단 둘이서만 교대 운전하며 달려왔다는 것인데…. 가히 초인적인 여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에치나치 가는 비포장 사막길에서 타이어 휠이 찌그러져 공기압이 새는 것을 에어락커에 달린 컴프레서로 바람을 넣으며 달렸다 한다. 연료가 떨어질 뻔한 사태도 겪고 험한 사막길 주행에 왼쪽 뒷바퀴 서스펜션이 내려앉은 줄도 모르고 예까지 내달렸다.

이 양반들 표현에 의하면 '32시간 죽음의 질주'였다. 그냥 '무사히'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고맙다. 내가 무사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이들을 무사한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 해보탑
ⓒ 오창학
다시 아침. 겨우 몇 시간도 되지 않는 단잠 끝에 에릭님과 자포님은 희망했던 영하박물관과 서하왕릉을 둘러보러 나섰고 그 사이 우리 1호차 팀은 해보탑(海寶塔)을 보러 나섰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합류해 인촨을 떠난다.

주말이 겹친 통관 일정 때문에 계획을 당겨야 했다. 오늘 바오터우나 후허하오터까지 최대한 진행해 다음날 다퉁(大同)의 운강 석굴을 들러 톈진까지 빼는 무리한 계획을 세웠다. 나야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 괜찮다 치더라도 죽음의 질주를 마친 에릭님과 자포님께 죄송하다.

▲ 후허하오터 가는 고속도로
ⓒ 오창학
인촨에서 북상하는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뻗어있다. 밤 10시. 의외로 이른 시간에 바오터우(包頭)를 지나친다. 여의치 않으면 여기서 묵기로 했던 것인데 이 상태라면 후허하오터(呼和浩特)까지 진행해도 될 것 같아 조금 더 무리수를 두어본다.

그런데 문제는 두 차 모두 연료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 바오터우 조금 지나 싸라치(士右祈)라는 소읍으로 빠져 나가 주유소를 찾았다.

▲ 바오터우 근처의 싸라치 주유소
ⓒ 오창학
다행히 주유소는 문을 열었다. 주유를 마쳤는데 저녁을 거른 탓에 배가 고프다. 후허하호터까진 아직 먼 길이지만 '먹고 죽은 귀신' 이론에 의거해 배를 채우고 길을 떠나기로 한다. 그간 2호차와 분리되어 있던 탓에 구경하지 못했던 한국 음식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한적한 공터에서 비상식량을 조리할까 하다가 바람도 불고 아늑한 가운데 끼니를 채우자는 의견이 있어 비상식량을 들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선다.

주유소 앞의 작은 식당에 들어서니 태어나 처음 한국인을 본다는 사람들에 둘러싸였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도 나서고 갖은 질문을 하며 한 밤의 작은 식당이 활기를 띤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햇반과 라면을 끓일 설비만 제공케 하고 약간의 경비를 주기로 했다.

꿈의 대화

▲ 싸라치의 인심 좋은 식당. 2호차와의 해후로 한국 비상식량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오창학
철봉씨와 함께 주방에 들어가 조리한 라면과 햇반을 가운데 두고 우린 얼마나 행복한 포만감에 몸을 떨었던가. 오래 살고 싶다. 살면서 이런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친절한 주인 내외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 수도 시설이 없는지 항아리에 물을 받아 살아야하는 이곳이지만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오래 기억하고 싶다. 오늘의 행복한 음식과 가난하지만 밝은 표정의 이들 얼굴을.

밤12시. 싸라치를 떠나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 차가 미끄러지듯 어둠을 가르는데 적당히 그렁이는 엔진음과 바람 가르는 소리만 동행이 된 채 차 안은 적막과 고요로 가득하다. 뒤 따라 오는 2호차가 살짝씩 좌우로 쏠린다. 이틀간 차 내 수면으로 교대 운전한 후유증이 나타나나보다.

무선을 통해 호출하니 졸음 가득한 자포님의 음성. 동승한 에릭님은 교대운전을 위해 수면모드로 전환 중이라며 뜻하지 않은 말 상대에 반가움을 표한다. 서로 헤어져 있던 동안의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대화하기, 노래하기로 체체파리처럼 달라붙는 졸음을 몰아낸다. 모두가 잠든 밤에 전파를 타고 오가는 두 사내의 목소리만 공중을 떠돌고 그 사이 차는 한 발 한 발 후허하오터에 다가서고 있다.
이제 긴 여행을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오네요. 후허하오터에 도착하면 왕소군묘를 보고 다퉁의 운강석굴을 경유해 정신 없이 톈진으로 들어서게 되겠지요. 이미 마친 여행인데 전 여러분과 두 번째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1~2회 분량의 이야기가 남았는데 벌써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간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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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속도로에서 기름이 떨어지면?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3] 란저우 마밍심 묘, 인촨 가는 길
오창학(ohmadang) 기자
그간 곪았던 또 하나의 문제가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기상 시간에 맞추지 못한 나와 아내 때문에 교수님께서 노하셨다. 죄송하다는 사죄는 되레 역정만 돋는다.

"이런 식이라면 그만 둬! 오늘은 나 혼자 다니겠네!"

만류하는 내 손을 뿌리치고 교수님은 택시에 오르신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고 싶은 심정. 비록 세 사람, 철봉씨까지 네 사람의 약속이지만 어찌하였든 조직의 율을 밥 먹듯 어겼다. 돌에 맞아도 싸다.

▲ 란저우 정비소. 휠얼라이언먼트를 위해 찾았지만 미리 알고 있는 설정값이 없어서 그냥 하체점검하고 에어크리너 먼지만 털었다.
ⓒ 오창학
란저우 정비소

혹여 교수님이 돌아오실까 싶어 아내를 숙소에 남기고 나와 철봉씨만 백구를 정비하기 위해 나선다. 미리 파악해둔 정비소까지는 금세 닿는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오일 필터와 에어크리너를 갈아주지 못한 게 석연찮다. 엔진오일은 합성오일을 넣었기에 무교환주행 속에서도 큰 부담은 없었는데 1만2000㎞ 가까운 거리를 쉼 없이 달려온 지금쯤엔 한번쯤 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여분의 오일은 없고 남은 거리는 고작 2000㎞뿐인 것을. 광오일로라도 갈까 하다가 생각을 접는다.

휠얼라이언트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 공업사였지만 무쏘 스포츠에 대한 설정값을 알아야 하는데 미리 준비를 못했다. 한국에 전화를 해서 알아볼까 그만뒀다. 여정의 끝에 섰다는 것이 모든 걸 미루게 한다. 그냥 돌아가서 하지 뭐.

그러고 보니 정말 여정의 막바지다. 오늘 란저우를 떠나 인촨(銀川)에 닿으면 한 이틀 머물고 바로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가서 베이징 톈진에 닿을 것이다. 겨우 며칠의 시간이 남았다. 내일쯤 2호차와 합류하게 되겠지. 하미에서 출발한 2호차는 흑장군 전설로 유명한 카라호토(黑水城)가 있는 에치나치를 경유해 몽골과의 국경 지대를 따라 사막을 넘고 있는 중이니까 빨리 도착한다면 내일 밤이나 모레쯤 은촨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출국을 마치려면 반드시 합류해야 한다.

정비소에 온 걸음이니 하체 점검하고 에어크리너도 털어냈다. 그 험하고 긴 구간을 달렸음을 감안하면 백구의 상태는 양호하다.

란저우 도수평의 청진사

▲ 도수평 청진사 가는 길
ⓒ 오창학
정비소를 나서 마밍심(馬明心)의 묘를 찾아나선다. 마밍심(마호메트 아민)은 18세기 회족 이슬람 지도자로 회족 봉기 중 순교한 성자이다. 1719년 중국 임하(臨夏) 지역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마저 잃고 어린 나이에 청진사를 오가며 아랍어를 익히고 9세에 숙부와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예멘의 자비드(Zabid) 교단에서 교리를 공부하게 된다.

7대 장로인 압둘 할리크의 뒤를 이은 후 1744년 중국에 돌아온 그는 기존 교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신도들의 신망을 얻고 일명 자흐리 교단을 세운다. 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반대파인 기존 교단과의 충돌이 심해지고 급기야 화사(花寺) 교단에서 란저우 총독을 회유해 청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교파간 분쟁이 청에 대한 반란으로 비화되기에 이른다.

하주를 점령당해 다급해진 청 정부는 마밍심을 란저우로 잡아들였고 이에 마밍심을 구출하기 위한 추종세력이 란저우 성을 포위하게 된다. 청군은 마밍심을 이용해 시간을 번 후 그를 처형하고 도착한 지원군과 함께 회족 반군을 토벌된다. 그러나 이것은 항쟁의 끝이 아니었으며 이후 100여년 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족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을 뿐이다. 마밍심은 반란의 주동세력이 아니었지만 회족들의 가슴에 깊게 자리 잡은 성자가 되었다. 지금 그의 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 자료조사가 부족해 김호동 교수의 저서 <황하에서 천산까지>에 언급된 '도수평(桃樹坪)'이란 지명과 그곳의 이슬람 사원 칭전쓰(清真寺)에 대한 단서만 가지고 찾아야 했다. 물어물어 란저우 외곽의 달동네에 닿았다. 물을 길어서 쓰는, 일부 구간은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후미진 골목으로 연결된 허름한 동네다. 이 달동네의 의미는 뭘까? 회족들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일까?

▲ 도수평 청진사 입구. 바로 이곳에서 1983년 전국 각지의 아홍과 회족의 이슬람 신자들이 모였다.
ⓒ 오창학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움직여 칭전쓰에 도착. 더 이상 차량의 진입이 안 되는 곳이어서 앞 쪽에 주차를 해놓고 철봉씨와 단둘이 걸어 들어간다. 대문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사방이 보이는 전망이다. 바로 이곳이 1983년 전국 각지의 아홍과 회족의 이슬람 신자들이 모였었다는 장소인가?

<황하에서 천산까지>에서 인용한 중국 작가 장승지(張承志)의 글에 의하면 흰 모자를 쓴 수백명의 노인들이 란저우의 도수평에 모여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올리며 시위를 했다 한다. 도시개발로 파헤쳐지게 된 마명심의 묘지를 돌려달라는 것, 이 요구가 관철되기 전까진 죽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정부가 협상 대표를 보내 이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장승지는 이 사건에 대해 "중국에서 모든 종교의 부흥을 알리는 시작"이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마밍심의 묘지를 굳이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회족들의 고난사를 접하며 느끼는 연민과 경외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륜궁과 천안문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자비하고도 단호한 대처를 기억하는 내게 종교인들의 시위에 굴복한 이 조처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보였기 때문이다. 진시황릉 발굴 당시 마을 사람들과 당국의 유물 쟁탈전 이후 눈길을 끄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청진사 예배당
ⓒ 오창학
칭전쓰 내부에 들어가니 무언가를 수선하던 사람들이 보내는 낯선 시선. 마밍심의 묘를 찾아 여기에 왔으며 한국인이라 소개를 하니 무척 반갑게 안내한다. 캠코더를 찍어도 되겠냐는 문의에 흔쾌한 허락. 회족의 이슬람 사원은 중국 건축의 형태를 띄며 이름 또한 '寺'를 붙여 청진사라 부른다. 이곳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사원이며 30~40명 가량의 신도가 기도하는 곳이라 한다. 회족이 많은 동네라고는 해도 한족 주민의 반이 채 되질 않는다.

▲ 청진사 관리건물과 이곳에서 일하는 18세 청년 마하시.
ⓒ 오창학
18세의 회족 청년 마하시가 따라붙어 차를 대접하고 우릴 안내했다. 회족 중 열에 아홉은 마(馬)씨다. 원나라 때까지만 해도 원래의 이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대엔 거의 한족화된 이름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마호메트'에서 따온 '마'씨 성이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어디 이름뿐이랴. 7세기경부터 중국에 들어간 아라비아인이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혼혈되고 한어를 사용함으로써 인종 간 구별이 거의 없어졌다. 이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흰 모자와 엄격한 이슬람 종교가 회족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점이 불가사의다. 어떻게 이들은 언어와 인종적 특징 없이 중국 정부의 종교탄압기를 이기며 자기 정체성을 지켜왔을까. 청 대의 회족 강제 이주로, 또는 생활상의 이유로 중국 전역에 흩어진 회족들은 겨우 900만이란 숫자로 한족의 섬에서 자기를 지켜나가고 있을까. 이 모든 것의 중심엔 그들의 종교가 있었을 것이다.

마하시는 내 질문에 소상한 답변을 해 주다가 마명심의 묘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인데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며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아까 입던 옷도 말끔한 옷인데 성자의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당사자의 마음 자세는 그게 아닌가 보다.

▲ 란저우 대학 인근의 똥촨따꽁베이(東川大拱北). 여기에 마밍심의 묘가 있다.
ⓒ 오창학
마하시가 안내한 곳은 다시 복잡한 란저우 시내의 어느 복판이었다. 그러니까 란저우 시내에서 외곽인 도수평을 찾아 차로 20분 넘게 애써 이동했는데 그 길을 그대로 다시 되짚은 셈이다. 그래도 아깝진 않다. 내 발걸음은 의미있는 흔적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꼭 누구의 묘비를 구경하려 하는 건 아니니까. 도수평의 작은 청진사와 그 언덕마을을 보며 의미있는 사건에 잠기지 못했다면 도심 속 묘비 하나를 눈에 담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밍심의 묘를 찾다

란저우 대학 인근의 똥촨따꽁베이(東川大拱北)에서 멈췄다. '꽁베이(拱北)'란 칭전쓰는 아니면서 성현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이슬람 사원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마밍심의 묘는 도수평으로 쫓겨 갔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는 셈이었다.

▲ 마명심의 묘.
ⓒ 오창학
공원 같기도 하고 고즈넉한 절집 마당 같기도 한 공베이의 뜰을 지나 후원 건물인 듯한 곳에 이르니 따로 전각을 마련해 놓고 마밍심의 묘비를 세워놨다. 아랍어를 새긴 묘비가 산뜻하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조심스레 훑어보았다. 마하시의 표정이 사뭇 경건하다. 먼 곳에서 온 이방인조차 순교한 성자의 무덤에서 회족의 고난과 애환을 읽을진데 그의 마음은 오죽하였으랴.

마하시가 공베이의 아홍을 소개시켜 줬다. 아홍은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다. 기독교의 목사나 천주교의 신부와 같은 개념이냐는 물음에 '의식 주관자'이며 이란에선 '학자'의 의미이며 당 대에 처음 왔을 땐 이세민이 '현자, 지자, 덕인'의 의미로 불렀다는데 정확한 개념 이해는 되지 않는다.

우리 말고도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마밍심과 회족의 신앙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직 50대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아홍은 인상도 좋고 우호적인데 회족의 신앙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눈매가 살아 움직인다.

짧은 시간에 내게 회족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이슬람 신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조금 분위기를 풀다가 가장 궁금했던 1983년 도수평 사건에 대해 물었다. 예민한 부분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마음과 함께.

▲ 83년의 도수평 사건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아홍
ⓒ 오창학
"여긴 이슬람 4개 교파 중 '광명정대(자히르)'파의 창시자 마밍심이 묻힌 곳으로 해방 후 70무 정도의 규모로 꽤 컸죠. 1958년 종교 억제 이후 주변 토지가 병원, 파출소, 유치원 등 정부기관으로 이용되는 등 수난을 당했습니다. 불만이 있었지만 말을 못하고 지내다가 80년대 이후 종교 회복 정책으로 간쑤성 정부와 원래 땅의 회복을 협의하고 유품들은 일단 도수평 칭전쓰로 옮겨 놓고 참배했습니다."

잠깐 생각 후 입을 연 아홍은 단호하고 거침 없는 태도로 열변을 토했는데 어휘 선택과 내용 전개엔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어쩌면 통역을 해 준 철봉씨의 선택과 태도가 신중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83년도 전국 각지의 아홍과 신자가 도수평에 모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밀결사로 신고가 들어가서 란저우 군구의 3개 대대가 도수평을 포위했지요. 순수한 종교 집회란 걸 알게 되었던지 군대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모인 신자들도 포위 사실조차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신자 대표를 영하회족 자치구 성정부에 있는 마명심의 6대 손자 마연송에게 보내어 어떻게 종교모임을 반혁명단체로 규정할 수 있는가 강력히 항의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 후 중교 종교협의 부회장 왕 아무개가 파견되고 감숙성 정부와 협상하여 여기 공베이를 84년에 짓고 85년에 마명심의 묘를 이장해 온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순화된 표현이며, 어디까지가 아홍의 개인적 견해인지 감이 잘 오지 않지만 83년의 일이 중국 작가의 묘사만큼이나 장엄하지는 않았을 거란 의심은 인다. 목숨을 내건 신념 고수의 투쟁이었다기 보단 특정 사건에 대한 단체적 항의 성격이 강하지 않았나 싶다. 그 때의 시위는.

중국 정부도 관용은 있다.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농민시위가 그 실례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 즉 공산당을 넘어서는 위험에는 단호한 제재를 가한다. 당원보다도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정치이념을 넘어설 종교이념을 가진 거대 존재 파륜궁이나 당과 국가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민주화 시위는 용납할 수 없었으되 소수 인민이 종교적 열망으로 소원을 비는 데야 굳이 강경한 입장을 취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수평을 그리워할 때의 희열감은 퇴색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사건에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문헌으로 세상을 접하던 꺼풀이 벗겨진 것 같아 마음은 가볍다. 차 대접과 함께 긴 시간 우릴 응대했던 아홍과 마하시가 배웅하는데 그 모습이 참 순수하고 맑다. 마하시는 오랜 만에 나왔으니 공베이에서 사람들을 더 보고 가겠다 한다. 지갑에서 택시비를 꺼내 그에게 건넸더니 펄쩍 뛰며 거절한다. 도수평에서 예까지 우릴 안내해 준 것도 고마운데 그 먼 거리를 자기 돈으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며 나도 같이 펄쩍 뛰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 돈을 넣고는 얼른 나섰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교수님께서 돌아와 계신다. 그저 송구스런 마음으로 머릴 조아리는데 먼저 말씀을 건네신다.

"그래 원하는 건 봤는가?"
"예."
"그럼 됐네."

다행이다. 오전을 보내시면서 교수님의 심기가 많이 누그러지신 것 같다. 타지까지 나와서 불초한 제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시다.

한국인 구경

아침의 불편함은 어디 갔냐 싶게 다시 의기투합. 오후 한시에 란저우의 숙소를 나서 인촨으로의 여정에 나섰다. 공평하게 100Km씩 3교대 운전. 다행히 란저우-인촨 사이엔 전 구간 고속도로여서 5~6시간 안에 당도할 것으로 같다. 시닝과 베이징을 잇는 거대한 고속도로의 한 중간을 끊어 달리는 일정이다.

▲ 란저우에서 인촨 가는 길. 광막한 모래 땅 사이로 뻗은 고속도로의 연속이다.
ⓒ 오창학
오후 2시. 란저우 83Km지점의 바이인(白銀)휴게소에서 점심을 했다. 복무원(종업원을 이렇게 부른다) 수보다 손님의 숫자가 적은 곳이다. 흰 밥과 서너 가지 요리를 놓고 먹는데 나이 어린 여복무원들은 한국인 구경에 난리가 났다. 우리들의 대화를 대놓고 엿듣다가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고 시끄럽게 군다.

말을 붙여보니 한국의 배우 안재욱이 자신들의 우상이라는데 드라마에선 항상 중국어가 더빙되어 나오는 탓에 한국어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단다. 해서 관심을 가진 것인데 자기들 딴엔 한국어 음성이 매우 신기하게 들린다나. 하긴 갓 고등학생이나 될까한 나이의 소녀들이 간쑤성의 외진 도시 바이인(白銀)에서 한국인을 만날 일이 언제 있었겠나. 복무원들은 우리 옆 탁자에 앉아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기꺼운 마음으로 구경거리가 돼 주었다.

부른 배를 들춰서 다시 차에 오른다. 연료가 반 가량 남아 있었으나 매사 불여튼튼. 아예 이 휴게소에서 기름을 넣고 떠나려는데 정전이라 안 된단다. 석연치 않았지만 별 수 있으랴. 설마하는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에서 생긴 일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한 시간이나 움직였을까. 휴게소 표지가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 휴게소는 아직 건축이 완료되지 않은 채 한창 공사 중이다. 그런데 휴게소 표지는 왜 벌써 세워놨담.

다시 고속도로로 나와 달리길 한 시간. 다시 휴게소가 나온다. 역시 공사 중. 슬슬 약이 오른다. 왜 신축 중인 휴게소 안내 표지를 수십 Km 전부터 성실히 세워놓느냔 말이다.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한 60Km만 더 가면 휴게소가 있단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미 연료계의 경고등은 들어왔다. 현창(백구의 짐칸 위 선반)의 비상 연료통엔 약간의 연료가 남아있는데 마저 넣을까 하다가 그냥 간다. 저걸 언제 내려서 넣겠나. 어차피 다음 휴게소엔 주유소가 있다는데.

운전을 하는 아내는 연료 경고등이 못내 부담스럽나 보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100Km 정속 주행을 한다. 경험상으로 백구의 경고등 들어오는 시점이 15L가량 남았을 때이며 100Km가량 주행할 수 있음을 알기에 내심 느긋했지만 아내에겐 잔뜩 겁을 준다.

"가다가 기름이 떨어질지 몰라. 그러면 엔진이 멈추고 차가 서거든. 운전대가 무거워지고 브레이크는 딱딱해질 거야. 그땐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깜빡이를 켠 채 갓길에 붙여."

하하. 아내가 긴장했다. 차를 2차선으로 붙인다. 하긴 1차선으로 가다가 차가 멈춰버리면 피할 방법이 없으니까. 백구는 아내의 차다. 등록도 그렇게 되어 있거니와 실제 출퇴근용으로도 아내가 탄다. 그래서 자기가 나보다 백구 주차를 더 잘 한다고 우긴다. 나도 그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 주는 편이다. 그런데 아내는 백구를 모른다.

탈 없이 다음 휴게소에 도착했지만 허망하게도 이 휴게소 역시 개장을 안한 상태. 드디어 고속도로에서 연료가 떨어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는 순간이다. 란저우를 떠난지 320Km 동안 한 번도 주유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다행히 싣고 다니던 연료통에 약간의 기름이 남았기에 망정이지 낭패를 볼 뻔했다. 한국 같으면 긴급서비스를 부르겠지만 이곳에선?

비상연료통을 챙겨 지나가는 차를 세운다, 한 60여Km 가다가 인근 읍으로 나가 연료통을 채운다, 다시 고속도로까지 와서 반대로 진행하는 차량을 잡는다(물론 세워줄 때 얘기다), 휴게소의 반대편에 내려 연료통을 든 채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이러기까지 시간은 3시간쯤 흘러간다, 날이 어두워진 후 야간 주행하여 밤 늦게 목적지에 들어간다.

단순히 연료가 떨어져 겪어야 하는 일 치고는 얼마나 어이없는 시나리오냐. 그러나 다행히 약간의 연료가 있다. 지난 날 아얼진-거얼무 구간에서 쓰고 남은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구간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그러나 고작 10L. 겨우 다음 주유소를 찾을 수 있는 분량이다.

결국 다음 휴게소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인근의 마을 주유소를 찾았다. 참 황당한 날이다. 오늘의 교훈, 고속도로에선 비상연료를 준비하자. 그렇지만 이 교훈도 내년이면 소용이 없겠다. 그 많은 휴게소들이 개장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이었으니 내년이면 60~80Km마다 주유지점이 생길 터이다.

회족들의 정신적인 고향, 인촨

▲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성도 인촨(銀川)에서의 저녁.
ⓒ 오창학
오후 7시. 닝샤 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성도 인촨(銀川)에 도착하다. 연료 문제로 숨을 죽이기는 했지만 비교적 순탄하고 원활한 여정이었다. 간쑤성과 지형적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도시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정돈된 자태로 자리잡은 황무지 속 도시. 흡사 중국 본토에서 만나는 홍콩, 싱가폴이라고나 할까.

이 낯선 느낌은 뭘까? 왜 이제까지의 다른 도시들과 다른 냄새가 나는 걸까? 건물 양식? 그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마 저 거리의 풍경 때문인 것 같다. 차들이 정지선에 서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너는 낯선 모습. 변방이기에 차와 인구가 적어 한산한 것이 아니가 생각하다가 그럼 시닝은 변방이 아니어서 그리 혼잡했나? 대체로 차들이 새 차인 것 같은데 비교적 최근에 차량의 보급이 이루어지고 교통문화가 정착했다는 이야기인가? 모르겠다. 이곳 인촨의 거리는 내게 또 하나의 궁금증을 안기며 편안하게 나를 받아들였다.

란저우-인촨

ⓒ오창학

란저우에서 인촨 가는 길은 전구간 고속도로. 시닝과 베이징을 잇는 고속도로를 타고 움직이면 된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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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 창시자인 종카바의 출생지, 타얼쓰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2] 시닝 박물관과 타얼쓰
오창학(ohmadang) 기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시닝의 칭하이성 박물관과 티벳 황교 6대 사원 중 하나인 타얼쓰(塔尔寺)에 들러 란주로 들어갈 예정이다.

시닝이 한적한 고원지대 칭하이성의 성도라 얕잡아 보았더니 교통 혼잡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치 최악이다. 시안과 거의 쌍벽을 이루는, 어쩌면 더 심할 정도의 혼돈이라고나 할까. 이젠 짜증을 넘어 반가운 마음까지 인다. 한동안 사막과 산악지대를 움직이며 심난한 교통상황을 잊고 살았는데 다시 시작인가 보다.

▲ 시닝의 ‘칭하이성 박물관’ 앞 수석 시장
ⓒ 오창학
칭하이성 박물관 광장은 수석 판매상들로 가득하다. 어느 강에서 들어왔는지 10톤은 족히 됨직한 바위들을 트럭 위에 올려놓은 채 구매자를 찾느라 한창이고 광장 테두리는 크고 작은 수석들로 즐비하다. '공룡알'이라고 우기는 돌도 있고 동식물의 형상을 한 기괴한 돌도 흔하다. 취미가 있는 이들에겐 눈이 돌아갈 광경인데 내겐 그 돌이 그 돌이다. 하긴 호탄강에서도 옥석을 구분하지 못한 눈인데 오죽하겠나.

▲ 시닝 박물관. 일본이 건설비의 반을 댔다. 3000년 전의 포크와 나이프
ⓒ 오창학
수석 시장은 남의 집 일처럼 보고 칭하이성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건설비용 1억 위안 중 5000만 위안을 일본이 댔다는 안내 문구가 있다. 왜 이토록 일본은 동양 고대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현재를 사는 이들의 의도에 맞춰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내실 있게 전열된 전시물 앞의 안내판에는 일본어가 병기되어 있다.

전시물 중 3000년 전에 쓰였다는 나무 포크와 나이프가 인상 깊다. 세월과 지역을 넘어선 유사문화를 재확인하는 순간이다.

현관 가판대에서 쓸만한 책을 발견하신 교수님이 판매원을 찾았으나 점심 먹으러 갔단다. 어찌할까 싶은데 역시 가판대의 10위안짜리 옥귀걸이에 혹한 아내가 우리도 밥 먹고 다시 오자고 청한다. 그래서 박물관 인근의 식당을 찾으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긍덕기(肯德基: KFC).

▲ 시닝 박물관 앞의 케이에프씨
ⓒ 오창학
KFC엔 평생 처음 와 본다. 패스트푸드를 처음 먹는다는 게 아니라 묘한 고정관념으로 기피하다가 처음 오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젠 나도 변할 때가 됐다. 국산품 애용 세뇌 세대의 시대정신과 남산골 샌님 근성으로 점철한 내 인생의 흔적을 벗을 때도 됐다. 얼마나 우스운 시대착오적 발상이냐. 외국계 할인매장을 가고 콜라를 마시면서 특정 음식 업체는 안 된다?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지분을 외국이 틀어쥐고 굴지의 한국 자동차가 외국계로 넘어간 마당에 국산과 외제의 구분에 연연해하는 내 모습이.

북적거리는 중국의 이 업소를 보면서 꼭 내 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입으로는 반미를 외치고 자신의 국가가 미국의 유일한 견제국임을 외치지만 중국의 미국계 패스트 푸드점은 차고 넘친다. KFC가 아니라 긍덕기(肯德基)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일까?

또 하나의 단상. 이제 중국은 가난하고 어려웠던 옛 모습을 벗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물가보다도 더 비싸게 팔리는 패스트푸드점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막 변방의 어떤 가족은 1년 내 농사를 지어 600위안을 벌었는데 내 자리 옆의 가족은 가족 점심 한 끼에 200위안을 쓰다니…. 참 이상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가 어디 여기뿐이랴.

교수님이 서적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박물관 앞 점심( 실은 장신구에 대한 아내의 집념이 만들어 낸 일정이었지만)이 무색하게 다시 찾은 가판대엔 여전히 판매원이 없다. 아직 식사시간이 끝나지 않았단다. 그럼 대체 이놈의 점심은 언제 끝나냐고 물으니 그걸 알 수가 없단다. 결국 모든 걸 포기. 갈 길을 재촉한다.

티벳 5000여개의 사찰 중 3600여개가 황교에 속해

▲ 타얼쓰 주차장(테라칸 옆에 차를 두니 흡사 한국의 주차장 같다)과 사원 전경
ⓒ 오창학
시닝 시 외곽으로 20여km를 달린 뒤 타얼쓰(塔尔寺)에 닿았다. 차를 두고 내리는데 테라칸 두 대가 나란히 서 있다. 중국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한국산 차들이건만 이럴 때마다 가슴 뿌듯하다. 백구와 나란히 있으니 흡사 한국의 주차장 같은 느낌이다.

주차장에서 언덕을 넘어 타얼쓰로 내려가는 구조인데 언덕 위에 서면 사원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티벳 5대 불교 중 최대의 신도와 교세를 자랑하는 종파가 게룩파, 일명 황교(黃敎)로 티벳 5000여 개의 사찰 중 3600여 개가 이에 속한다. 바로 이 타얼쓰는 황교의 창시자인 종카바(宗喀巴:1357~1419)의 출생지라서 라마교의 성지로 인식이 되는 곳이고 황교 6대 사원 중 하나다. 종카바가 53세 때 라마교를 창립한 후 제자 근돈주파(根敦朱巴)와 극주절후(克朱節後)가 각각 제 1대 달라이 라마와 1대 판첸라마가 되었으니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알겠다.

▲ 안내원과 함께
ⓒ 오창학
티벳어로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쪼마춰'를 안내원으로 선택했다. 사원 곳곳을 조목조목 상세히 설명한다. 수명연장을 비는 기수전(祈壽殿)은 좌로 입장해 우로 퇴장하는데 어느 곳이고 문지방은 밟지 않아야 한다. 기수전엔 112그루의 보리수나무가 있어 7월 꽃 필 무렵엔 향기가 일품이란다. 좌측 담엔 장수와 건강을 비는 사슴과 학이 새겨져 있고 우측 담엔 엔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포도와 재운이 트인다는 쥐가 새겨져 있다. 어디나 기복과 기원으로 점철되어 있다.

타얼쓰에서 놀란 것. 불전에 돈을 바치도록 하는 구조는 세심하고도 치밀하다. 불상 앞에 함을 구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물로 비석에 돈을 붙일 수 있게 하였는데 비석에 돈이 가득 찰 때마다 재빠르게 수거함으로써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는 배려가 돋보인다. 물론 100위안 이나 50위안짜리 큰 돈은 남겨두어 타의 귀감이 되도록 유도하는 사려 깊음과 그 돈들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시선을 떼지 않는 보안의식이 철저함은 말할 것도 없다.

▲ 대법당
ⓒ 오창학
과거에 많을 땐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며 공부하였으나 현재는 600여 명 정도만 있다 하며 의학, 무용, 음악 등 모든 걸 배워야 하기에 대개 13~15년을 수행한다 한다.

천연 목장이었던 곳에서 방목 중 종카바가 출생하였고 그의 출생 후 보리수나무가 자라났는데 한 자 쯤 자라자 잎이 10만개였더라지. 불교와 인연이 있는 이라면 잎에서 부처가 보인다는데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리하여 종카바는 16세에 라싸로 가게 된다. 22세쯤 어머니가 종카바를 보고 싶어 하자 바빠서 갈 수는 없으니(불효자였나?) 보고 싶으면 탑을 세우고 나인양 여기소서 하였다는데 그 탑이 기원이 되어 축조된 사원이 바로 여기 타얼쓰(塔尔寺)다.

지금은 원래 탑 위에 11m짜리 탑을 세우고 1.5톤의 은을 녹여 입히고 3500개의 진주를 박아 넣었다. 35kg의 금을 녹여 만들었다는 소금와전의 지붕과 함께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 마음이 답답하다. 금과 은으로 도배한 세속의 냄새.

▲ 절의 이모저모
ⓒ 오창학
오색천이 매달린 기둥은 티벳 경전이 적힌 각종 리본으로 둘러져 있다. 바람으로 경전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 쪼마춰가 경륜을 돌려보라 한다. 안에 경전 한 부를 넣고 밖엔 '옴마니 반메홈'이 적혀 있다. '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티벳어로 평생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의미다. 오른 손으로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행복이 온다고 말하는데 그 말 때문에 안 돌렸다. 내 행복 빌자고 무슨 행위를 하는 게 꼭 무슨 거래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아내는 열심히 돌린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긴 뭐든 할 수 있단다. 역시 한 경지 위의 사람이다. 난 왜 초월하며 살지 못할까.

타얼쓰의 3가지 예술품은 자연염료로 그린 벽화와 짐승 기름으로 조상한 수유화, 입체감 있게 수놓은 천이라 한다. 조목조목 잘 구경하는데 어째 경내에 낯선 냄새가 가득하다. 바로 수유등 타는 냄새다. 신도들은 짐승의 젖으로 만든 기름 '수유(獸油)'를 헌납하고 불등(佛燈)을 켜서 마음 속 불결한 생각을 떨친다. 야크나 양의 젖 스무 근에서 한 근의 기름이 나오며 연기와 그을음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는데 어째 내 비위에는 잘 맞지 않는다.

승려에 울고 신도에 웃다

▲ 타얼쓰 승려와 노파
ⓒ 오창학
각각의 불사 입구에서 입장권을 확인하는 승려들의 자세는 심드렁하고 무성의하다. 불전함을 지키는 눈빛도 탐욕스럽기만 해 도무지 불제자로서의 고결한 면모는 찾을 길 없다. 중국 내 사원에서 한결같이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 타얼쓰에서의 실망은 매우 크다.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왔던 티벳 불교에 대한 환상이 컸기 때문인가?

선배가 후배에게 경전의 내용을 질문하고 그 대답으로써 수행의 수준을 가늠하는 변경(辯經)의 장면을 목도할 기회를 얻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의 중앙에선 묻고 답하고 진지한데 양 끝에 앉는 승려들은 치고 박고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돌을 던져 동료를 맞추고 관광객을 보고는 시시덕거린다. 아, 빠져나가고 싶다.

10대 판첸라마(1938~1989)의 육신탑에서 계속 머리가 자란다느니 종카바 당시의 보리수가 살아 뻗어 여기 보리수나무가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그냥 들어줄 수 있을 터인데 이 광경 앞에선 다 덧없다. 뭐를 어찌하면 오래 산다느니, 뭐를 어찌 바치면 복이 온다느니 하는 말과 더불어 혹세무민의 주술로만 다가온다.

그러다 내 눈을 사로잡는 광경에 마음이 풀린다. 수미산 위에 오곡을 부으면 자신이 속한 나라에 평화가 온다는 단 앞에서 가만히 곡식을 얹는 노파의 정성 어린 손길. 이마와 입과 가슴에 두 손을 모으는 그 정성스런 자태에 마음을 바꿨다. 그래 이것이다. 사람의 손에서 나 사람의 손으로 유지하는 속임수라 해도 좋다. 종교라는 것이. 저 노파가 저렇게 신심으로 평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한 것 아닌가. 사람이 이로써 행복해지면 그만 아닌가. 그것을 위해 고개 숙이는 대상이 돌이면 어떻고 나무면 또 어떤가.

땡중은 땡중이고 신앙은 신앙이다. 타얼쓰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리는데 노파로 인해, 그리고 온 몸을 내던지는 뜨거운 신심의 신도들로 인해 마음은 편하다.

혀에 남을 란저우

▲ 시닝에서 란저우 가는 고원길
ⓒ 오창학
오후에 타얼쓰를 떠나 란저우로 향했다. 시닝 시가지를 경유할 필요 없이 곧장 고속도로에 오를 수 있었다. 시닝에서 란저우 가는 길은 고원지대를 관통해 매끈하게 이어진다. 많은 구간이 고가도로처럼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해 이어진 탓에 회전할 때나 바람이 불 땐 아찔한 부분도 있지만 운전하기에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건설비용 탓인지 유독 이 구간의 통행료가 비싸다.

▲ 란저우 뉘러미옌(牛肉面)과 황하 철교 야경
ⓒ 오창학
3시간 만에 란저우에 도착했다. 다시 돌아온 길. 낯익은 것들에서 느끼는 안도. 여장을 풀자마자 란저우 라미옌(拉麵)부터 찾는다. '뉘러미옌(牛肉面)' 즉, 쇠고기면이라고도 하는 이 녀석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던 탓이다. 여정 초반에 이곳에 들렀을 땐 너무 늦게 도착해 식당 선택의 폭이 좁아 2% 부족한 면 맛을 느껴야 했는데 오늘에야 제대로 된 식당을 골랐다. 그냥 면이 아니라 '정식'을 시켰더니 달걀에, 고기에, 오이반찬까지 딸려 나온다. 입맛 제대로다.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에 설익은 듯한 면발까지 다 제 맛이다. 때로 지역에 대한 인상은 눈이나 뇌가 아니라 혀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란저우가 그럴 것 같다. 란저우 라미옌이여 영원하라.

밤늦도록 황하철교며 란저우 야경을 노닐었다. 이제 남은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수 일 내로 네이멍구(내몽고) 지역을 관통해 톈진으로 들어가리라. 벌써 지나온 날들이 그리워진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밤에 보는 황하는 사람을 공연스레 감상에 젖게 만든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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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바라본 그 호수, 그리울 때가 있겠지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41] 거얼무-시닝, 칭하이호에 머물다
오창학(ohmadang) 기자
어제 과식한 화꿔 때문인지 야간에 먹은 복숭아 때문인지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이번 여행 중 벌써 세 번째로 장이 고장난 것이다. 숙소에 비치된 화장지는 2인 2회 분량이어서 아내의 안면 마사지 종이까지 동원해야 했던 처절한 밤이었다. 잠을 설친 탓에 아침 출발 시간을 맞출 수 있었으니 배탈을 고마워해야 하나?

시닝 가는 길

▲ 거얼무에서 시닝 가는 길. 하늘과 맞닿은 길을 따라 한 없이 달린다
ⓒ 오창학
거얼무에서 시닝(西寧)까지 773㎞ 도로 표지가 보인다. 지도상 거리는 800㎞여서 약간 긴장했었는데 700단위라니 만만해 보인다. 겨우 27㎞ 차이인데. 원래는 시닝 가는 중간에 칭하이호(靑海湖)에서 야영한 후 내일쯤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교수님께서 계속되는 야영을 두려워하신다. 그래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시닝까지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거얼무에서 시닝으로 향하는 도로에 요금소가 설치되어 있다. 여행 초반엔 도로마다 저걸 세우고 통행료를 받아먹는 게 여간 밉살스럽지 않았는데 이젠 오히려 반갑다. 저것이 있다는 것은 돈을 받아먹어도 좋을 만큼 매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므로. 2박 3일의 비포장 행군이 사람을 바꿔놨다.

요금소 앞에서 교통공안이 제대로 된 서류검사를 한다.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운행허가증 등등…. 이제까지 대개는 면허증만 보거나 어디로 가냐는 정도로 검문이 끝났었는데 이번엔 뭘 좀 아는 공안을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이 순간 운전은 내가 하고 있다. 중국 면허를 받지 못한 교수님은 도심구간 운전을 피하셨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공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중국의 공안은 소문으로 듣던 중앙아시아 쪽 경찰들과는 너무 다른 이미지다. 안 보이는 뒷거래야 어떤지 모르겠고 길에서 만난 공안들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트집을 잡아 돈을 요구하거나 귀찮게 구는 일을 보지 못했다. 중국도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 차가 고장 나면 차선을 막고 정차하여 주변에 돌로 바리케이트를 친다. 그리고 다 고치면? 돌들을 놔둔 채 그냥 간다. 그러면? 다른 차들이 사고 난다
ⓒ 오창학
요금을 내고 타는 길답게 사막 사이로 뻗은 외줄기 길은 시속 120~140㎞를 오르내리게 하는 탄탄대로. 풍경도 삭막한 사막지대에서 점차 녹색이 가득한 야산들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변해간다. 아직까지도 100㎞씩 교대운전을 진행하고 있는 탓에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차를 세워야 하는 계속되지만 이것이 싫진 않다.

그러나 낮이 아니라면 이런 속도는 상상하기 어렵다. 도로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장난 차는 차선을 막은 채 돌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그러다 수리가 끝나면 그 돌들을 방치한 채 그냥 떠난다. 그리고 야간 운전 중에 돌을 발견하지 못한 차가 그것들을 들이박는다. 운이 좋으면 돌들을 튕겨낼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차가 튈 것이다. 지난 번 타클라칸의 밤길에서 우린 운이 좋은 쪽이었기에 아직 살아있다.

▲ 오체투지. 이곳이 티벳 아랫녘임을 실감한다
ⓒ 오창학
오체투지 순례객을 보고 잠시 차를 세운다. 머리, 두 팔, 두 다리를 땅에 붙여 절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는 행위다. 온 몸을 던져 절한 후 머리가 닿았던 부분에서 다시 시작하는 저 속도를 하루에 10㎞를 채 넘지 못할 것이다.

죽기 전 한 번은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고 오랜 세월을 준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진행하는 것은 내 여행의 자세와 같겠으나 그들의 신심과 고통을 감내하는 정신에는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그 성찰의 행군 속도에 비해 나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 3800m고원지대에서의 유목. 그곳에서 만난 티벳인들
ⓒ 오창학
오후 1시 넘어 도란(都蘭)에서 점심 식사 후 출발해 다시 길을 줄인다. 3800m 상피산(橡皮山)을 넘다가 야크와 말, 그리고 양떼가 빼곡한 초원지대를 접하다. 길 옆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보니 풀이라기 보단 거의 이끼에 가까운 것들이 깔려있다.

민펑 지난 사막의 가시풀 오아시스와 같은 상황이다. 겉에서 보기엔 한 없이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인데 실상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 그 이끼들 사이로 양 똥들이 가득하다. 드넓은 초원지대이긴 하지만 가축의 수효를 다 먹이기엔 태부족일성 싶다.

인근의 유목 티벳인들이 주섬주섬 모여든다. 아이들도 구경하느라 신났다. 이곳은 차가 관통하는 길이니 외지인을 제법 보았을 터인데도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왁자지껄이다. 캠코더 액정에 비친 자기 모습에 어린 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 중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대화는 불가능하다.

아내가 몰려든 티벳 아이들에게 볼펜을 나눠준다.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못내 걱정스럽다. 저 아이들, 다시 외국인을 만나면 이제 습관처럼 볼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길에서 만난 한국인이 건네준 볼펜 한 자루의 의미를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분명 우정의 징표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내려오다 대형트럭 두 대가 정면충돌한 현장을 봤다. 구조차량들이 와서 사고처리가 한창이다. 고지대에서 내려오는 구간엔 브레이크 파열이 잦고 이 구간에선 졸음운전도 많아 사고가 종종 있나보다. 길 옆에 사고 난 차량을 전시해 놓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운 바다 칭하이(靑海), 우린 서로 사랑하나봐

어느 순간부터 산자락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칭하이호(靑海湖)! 과연 바다의 면모를 닮은 고원의 호수답다. 아련히 수평선이 일렁이고 물결은 잔비늘을 반짝이는 모습이 가히 신비롭다. 칭하이성의 명칭 자체가 칭하이호에서 왔다는 것을 보면, 이곳의 티벳족들이 저 호수를 신성시 한다는 사실이 믿겨진다.

▲ 그리운 바다 칭하이(靑海) 호수. 해발 3200고도에 펼쳐진 수평선의 향연
ⓒ 오창학
몇 굽이를 더 돌고 고원을 넘어서야 길은 칭하이호에 연해 뻗는다. 교수님께서 2호차와의 무사한 상봉을 위해 청해수신께 올리는 제문을 지으셨기에 서둘러 저 푸른 바다에 닿고 싶지만 칭하이호로 내려서는 곳은 온통 철조망으로 관리되고 있다.

적당한 진입로를 찾지 못하고 주행하기를 한참. 이러다 결국 다가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칭하이호 둘레가 거의 600㎞에 달하고 면적도 4300㎢로 서울 면적의 5배이니 그 사이 무슨 해결책이 없겠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달린다.

간혹 관광객을 위한 단지가 있었지만 저 곳에 내려 호수를 보고 싶은 생각을 일지 않는다. 그러다 발견한 진입로. 아마 인근 유목민들의 출입로인 것 같다. 야크와 양들이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접근해 드디어 호수에 접근했다.

▲ 사막을 돌아 칭하이에 이른 백구
ⓒ 오창학
해발 3200m 지대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닮은 호수 칭하이. 수평선이 아스라한 넓은 규모가 아니어도 대륙의 융기로 갇혀버린 바닷물이며 아직도 염수로 남아 있으니 바다라 불러도 좋을 곳. 드디어 이곳에 내가 섰다.

하베이의 평원을 지나고 간쑤성의 황토고원을 넘었다. 고비의 열기와 타클라마칸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이기고 급기야는 고원지대의 푸른 바다 호수에 섰다. 벅찬 가슴과 회한. 흔히 먼 길 달려 겨울바다에 섰을 사람들의 심경이 이러하리라.

▲ 칭하이호 앞에서 아내와 나, 그리고 백구. 사랑은 마주보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한 곳을 응시하는 것이라는 말이 옳다면 우린 사랑하는 게 맞다. 여행 내내 함께 앞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 오창학
바다를 가장한 호수 앞에서 아내를 본다. 사랑은 둘이 마주보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한 곳을 응시하는 것이라 한 생떽쥐베리의 말이 참명제라면 우린 사랑하는 게 맞다.

이 여행 내내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진종일 같이 앞만 보고 달려야 했으니. 마주본 적도 없지만 한 순간 다른 곳을 본 적도 없다. 같은 곳을 보고 같은 느낌을 안고…. 이토록 오래 둘이서 한 곳을 응시한 시간들에 감사한다.

먼 훗날 늙고 병들어 서로를 부축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을 때 조용히 아내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얹고 읊조릴지 모를 일이다. 그때 그 길들, 모래와 구름들, 우린 아주 오랜 시간 한 곳을 같이 바라본 때가 있었노라고.

▲ 호수에서 무언가를 찾던 티벳 청년들. 불법임에도 이들은 딜라이 라마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다
ⓒ 오창학
긴 옷을 입어야 하는 서늘한 날씨인데도 다리를 걷어붙인 티벳 청년 둘이 물 속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철봉씨가 무엇을 찾느냐 연신 묻지만 그저 웃을 뿐이다. 그들은 중국어를 하지 못하고 철봉씨는 티벳어가 되지 않으니 그저 눈치로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도 금세 친해져 철봉씨도 물 속에 동참한다.

그들이 물 밖에 나온 사이 사진을 찍으려 하니 바지를 내려 자세를 가지런히 하고 다소곳한 표정을 짓는다. 참 순박해 보이는 이들이다. 장신구로 치장한 건 둘 다 마찬가지인데 한 청년의 목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곳은 과연 누구의 땅일까?

▲ 티벳 소년과 흑마. 등자도, 안장도 없는 말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이 황홀하다. 우린 그의 말을, 그는 우리의 차를 구경한다
ⓒ 오창학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가운데 참 많은 말들을 주고 받는데 초원 저편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가 있다. 아, 이것이 꿈꾸는 것이냐? 등자도, 안장도 없는 검은말과 한 몸이 된 소년의 모습이 몽환적이다. 늦은 오후의 여린 햇살에 반질거리는 흑마의 털도 매력적이다.

염호에 들어가 물 한 입을 먹고 몸을 적신다. 소년을 따라 역광의 호숫가를 소일하는 말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검은 말이 흰 빛의 백구 주변을 돈다. 우린 그들을, 그들은 우릴 구경한다. 등자 없는 말잔등에 몸을 제껴 올라타는 소년의 모습에 경탄하니 청년들도 올라타 본다. 그들의 자세는 더 경쾌하다. 이들은 말을 졸업하면 오토바이를 타나보다.

수박 한 통을 같이 쪼개먹고 헤어졌다. 두 청년은 오토바이를 소년은 말을 타고 초원으로 사라지는데 그 모습이 아릿하다. 세상은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다.

지나온 길에 대한 그리움

▲ 시닝 가는 길. 타클라마칸에서 깨진 옆거울은 대충 다른 차종의 거울을 접착시켰다. 시닝에 늦게 도착해 밤거리를 헤맨다
ⓒ 오창학
칭하이호에서 시닝까지는 고작 150㎞. 이미 해가 지고 있었지만 시닝엔 그리 늦지 않은 밤에 들어설 것이다. 타클라마칸에서 깨진 백구 옆거울 자리에 다른 차종의 거울을 접착시켜 쓰고 있는데 그런대로 기능을 발휘한다.

거울에 비친 지나온 길. 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지나온 길에 마음을 두고 있다. 상관없다. 앞으로의 길도 어차피 '지나온 길'이 될 터이니, 지금의 애정을 그때 주지 뭐.

해 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4000m 고개를 넘어야 했다. 밤 10시. 시닝에 도착해 야시장을 헤맨다. 하루 이동거리 763㎞. 어렵게 닿은 곳일수록 쉬 잠드는 것이 아깝다.

거얼무-시닝 여정

ⓒ오창학

거얼무에서 시닝까지의 거리는 지도표기에는 800㎞, 도로표지판은 773㎞였는데 자동차 거리계로는 763㎞였다. 시닝을 150여㎞남겨두고 칭하이호가 위치해 있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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