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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말(且末)국과 소완(小宛)국의 도시였던 여기 치에모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곳이다. 2성급인 무스타크 빈관이 외국인을 위한 거의 유일한 숙소다. 사막 작은 마을에서 얻은 때 아닌 호사 때문일까, 어제 아팠던 배 때문일까. 또 늦잠을 잤다. 교수님 뵐 면목이 없다. 오늘의 계획은 치에모 고성을 찾아 답사한 후 뤄창까지 이동한 후 시간을 보아 갈 수 있는 한 아얼진 산에 근접해 야영하는 것이다. 20L 물통을 가득 채웠다. 이것으로 거얼무까지 이어지는 야영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지만 물통이 하나 뿐이니 나머진 생수를 구입해 적재하는 수밖에 없다. 낭 굽기를 구경하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리고 이웃이 동원되어 온 가족이 일주일 먹을 양식을 굽는 중이다. 먼저 둥글게 밀반죽을 뭉쳐 펼쳐 누른 후 채로 찍어 얇게 만든다. 마치 피자의 도우를 만드는 장면 같다. 신장의 빤미옌이 이탈리아 스파게티의 원조라는 설이 있는데 그 설을 인정한다면 피자도 마찬가지 가정이 성립할 것 같다. 다만 이곳은 물산이 척박한 곳이니 오로지 낭 자체만을 먹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같이 산물이 풍족한 곳이라면 온갖 해물이나 토핑을 얹어 먹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얇게 만들어진 반죽을 둥근 판에 얹어 화덕 안에 넣어 붙여놓으면 곧 따끈따끈하게 구워진 낭이 된다. 낭을 먹을 때는 반드시 쪼개 먹어야 하며 하나를 통째로 들고 입으로 베어 먹어서는 안 된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밥그릇을 들고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와 같다. 낭 맛은 항상 딱딱하고 맹숭맹숭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더니 따끈할 때 먹는 낭은 제법 먹을 만하다. 떠날 때 주인아저씨가 낭을 한 무더기를 안겨주시기에 값을 지불하려 하였으나 한사코 거절한다. 별 수 없이 답례로 볼펜 여러 자루를 드렸더니 아주머니들이 무척 고마워 하신다. 잘 됐다. 야영에 필요한 일체의 부식과 비상식량이 전부 2호차에 남아있기 때문에 비상식량으로 중국 컵라면과 라면을 준비했는데 든든한 양식이 생겼다. 치에모 고성을 찾아서
업은 아이 삼 년 찾듯 맴돌다 어렵게 찾은 문물국 사무소는 치에모에서 유명한 니아 지주의 집 한 켠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좋은 발상이다. 1911년에 지은 이 지역 최대의 부자 니아즈게이타의 장원은 과거 부유층의 가옥구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인데 그 한 켠을 사무실로 활용하며 관리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11개의 방 구석구석을 돌아 볼 수 있다. 사무실에서 치에모 고성에 가려는 뜻을 밝히니 제일 먼저 묻는 게 무슨 차를 타고 왔냐는 것. 사막 한 가운데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택시를 타고 와 그 곳에 가려하는 사람이 있어 미리 확인하는 듯하다. 사막을 가기에 충분한 사륜구동이라 하니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문물국 직원을 앞자리에 태우고 치에모 고성을 향해 사막으로 나섰다. 직원은 메이티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어 가능 위구르인. 요즘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며 백구의 차체에 붙인 스티커 중 영어로 쓰인 부분을 보고 관심을 보인다. 우리 말고도 최근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 있는가 물으니 지난 달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다녀간 뒤론 처음이란다. 치에모 고성까지 가는 길은 고운 모래가 수북이 쌓인 지대여서 진행이 여의치 않다. 처음엔 4H를 놓고 움직였는데 '꺼떡 꺼떡' 기어 겉 넘는 소리를 내며 힘에 부쳐한다. 4L로 놓고서야 진행이 가능한데 가끔 모래에 허우적거리며 차체가 논다. 모래에 빠지지 않기 위해 RPM 2000을 꾸준히 유지해줘야 하는 길이다. 왜 이곳 방문 의사를 밝혔을 때 먼저 차량의 종류부터 물었는지 알만하다. 꿈꾸는 폐허, 치에모 고성
"나는 폐허를 좋아한다. 꿈을 꾸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곳을 이루던 벽이며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기둥들을 내 마음대로 건설할 수도 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폐허에선 꿈을 꿀 수 있어 좋다. 올리비에와 같은 생각이다. 이곳을 이루던 벽과 기둥들이 내 머리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대홍수가 모든 걸 쓸어가고 이제는 도기 파편만이 인간의 흔적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3000년 전엔 번성한 곳이었다.
치에모로 다시 돌아와 농가들이 모여있는 골목을 더듬는다. 차가 멈춘 곳은 투디 아지의 집. '아지'란 메카 성지 순례를 마친 남자를 일컫는다. 나름대로 동리에서 유복하고 덕망있는 이의 집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주인 내외는 출타 중이고 그의 자녀들만 있었는데 오빠(20살)와 자매(18살, 15살)가 우리의 방문을 허락했다. <보고 또 보고>와 <목욕탕집 남자들>
자매는 수줍음이 많다. 학교 교육을 받았다니 중국어를 알 텐데도 메이티정의 통역을 통해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주인 아들도 중국어를 잘 못 하는지 위구르어로만 대화한다. 집안 곳곳의 구조와 용도에 대해 물으니 상세히 설명해 준다. 부엌도 실내도 별다른 조명이 없이 자연 채광에만 의지하는 막힌 구조다. 사막의 열기를 차단하는 효과가 커서 집 안은 서늘하다. 여름엔 대개 거실에서 나와 자며 겨울에나 각자의 방에서 머문다. 거실엔 집 주인의 증조부가 만들었다는 100년 된 가구가 있다. 메이티정이 이 집을 소개한 것도 '아지'의 집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그의 아들도 아버지가 성지순례자라는 사실에 비중을 두는가 보다. 집안의 사진을 꺼내어 군복무 중인 형과 성지순례 당시의 아버지 단체 사진을 보여준다. 신장 전체를 통틀어 40여 명이 갔다던 성지 순례 사진. 이들의 성지순례라는 게 돈이 있다고 맘대로 가는 게 아니어서 치에모 종교사무소에 신청서를 넣으면 치에모 현에서 쿠얼러의 종교 사무소로, 다시 우루무치의 종교사무소로 보내 승인이 떨어져야 가능하단다. 아버지가 갈 당시인 2000년도만 해도 치에모에서 단 4명이 갔는데 요즘엔 자격기준이 완화되어 15명까지도 간단다. 이 모든 대화가 다단계 통역을 거쳐 어렵게 이어진다. 내가 한국어로 물으면 철봉씨가 중국어로 그 말을 옮기고 이것을 메이티정이 위구르어로 옮긴다. 이에 주인 아들이 위구르어로 답하면 메이티정이 중국어로, 그러면 철봉씨가 다시 한국어로 내게 전해주는 기묘하고 긴 대화가 한참이나 오갔다. 자매가 부엌에서 우릴 위한 옥수수를 삶는데 연료는 옥수수 속 말린 것이다. 나무 구하기가 귀한 곳이니 이는 당연한 선택이다. 화덕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 화면이 흐릿한 흑백 텔레비전이 있다. 요즘 한국드라마 <보고 또 보고>와 <목욕탕집 남자들>에 푹 빠져 지낸단다. 이곳 서역 사막의 오지에도 한류의 열풍이 거세다. 한낮의 무더위를 그늘 속에서 한담을 나누며 잘 쉬었다. 옥수수와 포도에 대한 값을 치루고 투디 아지의 집을 나선 시간은 오후 2시. 이제 뤄창을 향한 마음이 급하다. 사막화, 인간과 자연의 처절한 투쟁
신장의 북쪽, 즉 베이장(北疆)에서는 0.5~2.5m씩, 난장(南疆)에선 동남 방향으로 5~10m씩 확대되고 있다. 사막은 마을, 농지, 도로, 초원, 수로를 막론하고 모든 것을 삼키며 매년 30억 위엔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주고 있다. 중국의 사막화로 대략 1200만명의 인구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 간접피해자인 우리나라와 인류를 제외하고도. 중국의 사막화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막대하기에 정작 중국 정부보다도 외국의 원조에 의한 사막화 방지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갈대의 장성을 덮은 저 모래의 산을 보며 인간은 과연 자연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지 궁금하다. 일탈과 일상에 대하여
먼지 하나 바람 한 점이 의미 없던 날이야 없었겠지만 그 전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은 아니다. 사막이 아름다웠던 건 어쩌면 일탈이 주는 신선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탈은 곧 일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교시절 하숙집 아주머니의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매주 토요일,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자습을 위해 학교로 돌아가기 전 2층 난간에 모여 10여 명 하숙생들은 해를 쪼였다. 우리들은 그걸 '고추말리기'라 표현했는데, 잠깐의 햇살이 주는 행복은 짜릿했다. 그때 누가 그랬다. "아저씨는 이 느낌을 알까?" 그 말이 나를 평안케 했다. 한 주 내내 야간자습에 시달리고 다시 주말 오후를 희생하기 전 절망을 말리는 마음으로 다급했던 그 짧은 휴식은 열심히 산 사람에게만 행복으로 다가오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연일 방 안에 누워 술병을 끼고 산 아저씨께는 오늘은 그저 어제의 내일일 뿐이고 이 햇살도 매일 내리쬐던 그 햇살 중 하나일 게다. 잠시 일상을 떠나 사막에 와 있다. 늘 자동차 지구여행을 꿈꾸지만 현실에 발을 담고 사는 일상인으로서는 여행이 직업이 되는 사람들과 같아질 수 없었다. 그러다 오랜 준비 끝에 기어이 여기 사막을 내 차로 지나고 있다. 언젠간 진짜 자동차 지구여행을 하고 싶다. 대륙의 끝에서 대륙의 끝으로 향하는 그런 여행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지. 이번 여정이 끝나면 나는 아마도 긴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것이고 많은 부분은 거짓말처럼 다른 이의 귓전에서 튕겨져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위 경구는 이런 것에 대한 위로이리라. 그러나 여한은 없다. 나의 눈과 귀와 몸에 이 길들의 노래를 담았으니. 내게 '내일'이란 오늘 하지 못 일에 대한 아쉬움으로 한 많은 눈을 감아야 하는 때였기에 오늘 실행을 결정했고 지금 하고 있으니 무슨 후회가 있으랴. 이제까지의 사막길을 떠올리며 '실크로드'란 어떤 허상이 아닐까 의심한다. 혹시…. 19세기에 라인트 호펜이 처음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 것처럼 몇몇 개연성 있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장안과 로마 사이 어떤 루트들을 조합해 낸 것은 아닐까? 턱 없는 의문인 줄 알지만 내가 직접 이 길을 움직이고 있는 마당엔 과거의 사실들이 믿기지 않는다. 온 종일을 가도 모래사막뿐인 이 길을 사람과 낙타가 건넜다고? 현대문명의 총아인 자동차로도 이 구간을 돌아보는 게 이렇게 고통스럽고 긴데 여길 걸어서 다녔다고? 낙타와 휴대용 물통에만 의지해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획 지나친 한 사람의 풍경. 언뜻 보기에도 노숙자인 듯한 한 사내가 돗자리를 진 채 걷고 있다. 마지막 오아시스를 지나온 때가 못 해도 80여Km, 뤄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 시간여를 차로 달려야 하는데 저 사내는 어디에서 어디로 걷고 있는 것일까? 2~3일 분량의 물은 어디에 지고 걷는 것일까? 저 사내의 불가사의도 풀지 못 하거늘 고대 실크로드의 기적을 운운함에야….
뤄창에서 약간의 과일과 음료, 그리고 연료를 재보충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아얼진 산길의 험준함과 고됨만을 누누이 들었을 뿐 구체적 길이와 구간 정보가 부족해 오늘 최대한 산 가까이 접근해 야영한 후 내일 해가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함이다. 포장된 도로는 뤄창까지가 끝이었다. 뤄창을 벗어나자마자 지독한 사막길 비포장에 시달린다. 끝없는 굴곡과 먼지의 연속. 그 옆으론 곳곳마다 도로공사현장이 이어진다. 이 추세라면 2~3년 내에 이 사막구간에도 반질반질한 도로가 생겨날 것이다. 카슈가르에서 뤄창에 이르는 1400㎞구간은 얼마나 안락한 것이었나를 새삼 깨닫는다. 그래 차라리 이런 먼지가 반갑다. 어차피 내가 가야할 길은 이런 길이 아니었나. 온통 포장된 사막의 길에 실망한 내가 아니었나. 달리다가 지는 해를 맞는 곳, 그 곳이 오늘의 야영지다
카슈가르 도착 전부터 일찌감치 먹통이 된 GPS 대신 나침반에만 의지해 방위를 잡는다. '지도를 믿지 말고 나침반에 의지하라. 이것이 사막의 생존법이다' 이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길 없는 사막구간에만 들어서면 느끼는 것이지만 지평선이 보이는 사막은 흡사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나침반에 의지해 항로를 유지할 땐 더욱 그렇다. 그래서 2차 대전 중 북아프리카의 독일 전차군단을 지휘한 에르빈 롬멜이 전차를 사막의 전함에 비유했던 것일까. '손가락 끝에 앉은 직감', 즉 제 6감을 믿었던 롬멜은 사막의 전쟁은 해전과 흡사하다며 이런 말을 남겼다. "어느 제독도 육지의 기지에서 해전을 지휘하여 이긴 일은 없다. 모래밭은 바다이며 전차는 배다. 육상의 전투에서는 한 치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전에서 배는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적함을 찾아 헤맨다. 사막의 전투는 바로 해전과 똑같은 것이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구가 마치 그 시절 적함을 헤매는 전함처럼 여겨진다. 연합군이든 추축군이든 소속은 상관 없다. 어차피 내 조준경에 잡힐 적함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저녁 9시 17분. 오늘 백구의 시동을 걸고 달린지 358Km. 어느새 해가 가라앉는다. 보름임에도 달 없는 저녁이다. 사막의 복판에 차를 세웠다. 달리다가 지는 해를 맞는 곳, 그곳이 오늘의 야영장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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