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2005)..........'에 해당되는 글 78건

  1. 2006.06.26 10. 투루판의 명물 카레즈와 포도
  2. 2006.06.26 9. 베제클리크 석굴의 수난
  3. 2006.06.26 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4. 2006.06.26 7. 오아시스 북도의 관문 옥문관

10. 투루판의 명물 카레즈와 포도

혹독한 자연환경 맞선 인간 ‘응전의 전리품’

문명은 어떤 곳에서 탄생하는가. 문명사가들이 던지는 해묵은 질문이다. 대체로 자연환경이 유리한 곳에서 탄생한다는 게 종래의 통설이다. 나일 강을 비롯한 세계 4대 강 유역에서 보이듯 강물이 범람해 기름진 땅이 생기며 인류는 그곳에서 고대문명을 꽃피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문명사가 토인비는 상반된 견해를 내놓았다. 오히려 문명은 불리한 자연환경의 도전에 인간이 성공적으로 응전한 곳에서 탄생한다는 ‘도전과 응전’의 원리가 그것이다. 사실 강물의 범람은 자연의 도전이며,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응전일 따름이다. 높은 산과 빽빽한 정글 속에서 태어난 마야나 잉카 문명은 토인비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좌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 그 논리를 투루판의 현실에서 검증해 보자. 투루판 주위는 만년설 뒤덮인 고산지대이고 땅은 해면 이하로 움푹 패어 항상 강풍이 불어대는, 사막 속 분지다. 한여름과 한겨울 기온차는 무려 섭씨 60~70°를 헤아리며 증발량은 강우량의 180배나 된다. 형언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의 극한지대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 땅에 태를 묻은 투루판 사람들은 극한적 자연조건에 과감히 응전해 풍요로운 땅을 일궜다. 그 본보기가 바로 ‘카레즈(坎兒井)’와 포도라는 ‘응전의 전리품’이다.

5,000km 지하 인공수로, 카레즈는 투루판의 생명수요 혈맥이다

▲ 혹독한 자연환경 맞선 인간 ‘응전의 전리품’-‘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투루판 명물 카레즈와 포도


투루판에 도착한 첫 날 곧바로 카레즈 박물관으로 향했다. 카레즈의 우물과 고성 유지, 포도 건조장 같은 투루판의 상징물들을 배합한 박물관 건축양식이 퍽 이채롭다. 관내 전시품 중에는 대형 카레즈 모형을 비롯해 카레즈의 굴설 과정과 방법, 공정에 쓰인 공구 등이 각종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을 둘러보고나서 박물관 지하를 관통하는 카레즈 현장으로 내려갔다. 깊이 10여 미터에 폭은 1미터 되나마나한 좁은 지하 터널에는 손발이 시릴 정도의 찬물이 줄줄 흐른다. 저 멀리 텐산의 눈녹은 물이 화염산 바닥을 뚫고 흘러 온 신기한 한 갈래의 카레즈다.

원래 ‘카레즈(坎兒井)’는 페르시아어의 ‘지하수’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지금은 카레즈라고 하면 거의 투루판의 전유물로서 건조 지대의 지하 인공수로를 지칭한다. 사실 다른 건조지대에도 지하수로는 일찍부터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투루판과 마찬가지로 ‘카레즈’라고 부르나, 이란에서는 ‘까나트’로, 시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는 ‘호가라’라고 부른다. 카레즈의 기원에 관해서는 이란을 비롯한 서역에서 5세기께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는 게 통설이지만, 11세기 이슬람 세력의 전래 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반면 중국 학자들 일부는 중원 유래설을 주장한다. 카레즈를 팔 때 쓰는 도구, 가령 흙을 나르는 광주리인 ‘운토광(運土筐)’이 중국어 이름이며, <사기>나 <한서> 등에 우물을 파서 물을 통하게 하거나 수로를 파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등의 기록을 근거 삼은 것이다. 심지어 투루판에서 2000년 전 자생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1990년 투루판에서 카레즈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이 시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높은 편이다.

톈산 만년설 녹아 화엄산 뚫고 흘러

대체로 카레즈는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수직으로 파내려간 우물인 수정(垂井)과 우물과 우물을 잇는 물길인 암거(暗渠), 하구로 내려오면서 땅 위로 드러난 물길인 명거(明渠), 물길의 종점에서 물을 저장하고 배수하는 댐격인 노패(? 土+貝)가 그것들이다. 사각형이나 타원형으로 파내려가는 수정은 공기와 햇빛이 통하게 하고 물길을 만들거나 고칠 때 인부들이 드나들면서 홁모래를 파내는 통로로도 쓰인다. 한 갈래의 카레즈를 만들기 위해선 수십 개의 우물을 파야 한다. 경사지게 이어지는 암거는 상류로 올라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므로 우물은 그만큼 더 깊이 파야 한다. 그래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깊이 30~70m, 낮은 곳이라도 10~20m 정도는 파야 한다. 투루판을 다니다 보면 가끔 난데없이 나무숲 우거지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암거를 지나 흘러온 명거의 물이다. 그 물길을 따라가면 영낙없이 나지막한 곳에 노패가 나타나는데, 거기서 물을 끌어올려 주거지와 농경지에 공급하게 된다.

▲ 포도구는 투루판 시 동북쪽 골짜기에 수로를 따라 약 8킬로미터에 걸쳐 조성된 거대한 포도농원이다. 이곳에서 나는 포도는 특히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약 200여 종의 포도 뿐만 아니라 갖가지 과일들이 톈산에서 카레즈를 타고 흘러온 물을 이용해 자라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레즈는 1000여갈래나 되며, 한 갈래의 길이는 수 ㎞에서 수십 ㎞에 달한다. 전체 연장 길이는 무려 5천 ㎞로서 베이징에서 항저우에 이르는 경항(京杭) 대운하(3200km)보다 더 길다. 그래서 카레즈는 대운하,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 3대 역사의 하나라고 한다. 인부 3~5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갈래를 파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고 하니 숱한 노력과 희생, 지혜로 이루어낸 문명의 귀중한 소산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카레즈는 그토록 뜨겁고 건조한 날씨에도 증발에 따른 물 손실을 최소화하고, 강풍과 모래의 피해나 오염으로부터 수질을 보호하며, 질 좋고 시원한 물을 사철 인간과 자연에 공급한다. 한마디로, 카레즈는 투루판의 생명수요 혈맥인 셈이다.

▲ 투루판 시내에 있는 카레즈박물관에는 지하 인공수로의 건설 과정과 방법 등을 실물 모형으로 재연해 놓았다.

카레즈가 엄혹한 자연의 도전을 이겨낸 일례라면, 2천여년 간 가꾸어 온 포도는 자연환경을 슬기롭게 활용함으로써 이룬 또하나의 문명적 산물이다. 석양이 가뭇거리기 시작한 오후 6시 무렵 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골짜기에 이르니 멀리서부터 향긋한 포도 냄새가 풍겨온다. 그곳이 화염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남북 길이 8km, 최대 폭 2km에 달하는 거대한 포도농원, 곧 ‘포도구(葡萄溝)’다. 찾아간 날은 8월 수확을 코 앞에 둔 7월22일이라 포도는 거의 무르익었고, 포도축제 준비도 한창이었다.

어귀부터 포도가게가 길 좌우에 쭉 늘어섰는데, 가게마다 형형색색의 포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포도구’라고 쓴 대문에 들어서니 포도 넝쿨과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로 운치있게 꾸민 포도터널이 맞는다. 터널 오른쪽에는 포도밭이 펼쳐졌고, 왼쪽은 절벽을 따라 연못이나 식당, 기념품 상점 등이 들어섰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별천지다. 연못가 절벽에는 정치가 펑전(彭眞)이 1988년 9월 방문할 때 남긴 ‘포도구’란 제자가 큼직하게 새겨졌다. 펑전은 한때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베이징시 당서기로 덩샤오핑과 차세대를 견주던 인물이다. 문화대혁명 초반에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로 가려는 파)에 몰려 실각했다가 명예가 회복된 뒤 찾은 듯하다. 세상의 무상함을 새삼스레 느끼게 한다. 포도 터널의 끄트머리의 한 포도주 가게에 들러 주인이 직접 담근 포도주를 맛본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200가지 포도 주렁주렁 무릉도원인듯

▲ 카레즈를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내거나 걸러내는 등 작업에 쓰인 공구들이 전시돼 있다.
돌아오는 길에 한 포도농가에 들렀다(관광 필수 코스다). 활짝 열린 문에 들어서니 10여평 남짓한 응접실이 나타난다. 일행이 한 자 높이의 마루 위 평상에 둘러앉자 주인은 갖가지 포도와 달콤한 하미과(멜론), 수박을 대접한다. 바닥에서는 알록달록한 위구르 옷 차림의 여나믄 살 소녀가 빙글빙글 돌며 ‘포도춤’을 추었다. 바깥의 포도 넝쿨이 천장을 뚫고 들어와 낮게 드리운 덕에 앉은 자리에서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따기도 했다. 이곳 포도나무의 평균수명은 150년이나 되며, 400년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포도는 그 종류가 2백여종이나 되는데, 그것을 말리는 이색적인 건조장이 곳곳에 눈에 띈다. 투루판 건포도는 자고로 유명하다. 일단 대접을 받았으니 사주는 게 예의라 싶어 일행은 400년 묵은 나무에서 땄다는 최상품 ‘왕 중 왕’을 비롯해 ‘여인향’, ‘수상건’(樹上乾:자연건조한 포도), ‘흑진주’ 등을 섞은 건포도 1근씩을 중국돈 60원을 주고 샀다. 이후 한달 남짓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꺼내보았는데, 맛이나 색깔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 역시 명품은 다르다.

‘명품’ 건포도 한달 지나도 맛 그대로

▲ 포도구에 있는 한 포도농가에서 위구르족 차림의 여자 아이가 전통춤을 추며 관광객을 맞고 있다.
여름 과일의 ‘여왕’이라는 포도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분지의 대원국(大宛國) 설과 카스피해 설이 있는데, 그 역사는 기원전 3천년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경우 전한 때인 기원전 2세기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 중국(일설은 투루판)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포도란 이름은 이란어 부다와(budawa)나 그리스어 보트루스(botrus)의 음사라는 것이 중론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해마다 약 6천만 톤씩 생산하는데, 이 수치는 세계 과일 총생산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단연 1위다. 종류로는 유럽종과 미국종, 교배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교배종을 심는다. 당분과 비타민 등의 유익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몇몇 질병에 양약으로도 쓰인다. 다남(多男)을 상징하는 포도무늬는 복식이나 회화, 공예품의 무늬로도 널리 쓰여왔다. 특히 조선 초기 전래한 포도무늬는 우리 전통 복식에서 동자문(童子紋)과 결부되어 특유의 포도동자문을 만들어냈다.

2천년 전 투루판 사람들은 낯선 포도나무를 서방에서 들여와 지역환경에 맞게 순화시키는 슬기를 발휘함으로써 오늘날 최상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순화력은 문명의 탄생과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포도 한 무제 때 처음 들여와 참깨 호도 마늘 당근 오이 등 한반도까지

실크로드와 서역작물 전파

▲ 단맛이 강한 투루판의 포도.
‘서역 나라들인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 등에는 많은 성읍이 있고 한혈마(달릴 때 피와 땀을 흘리는 명마)들이 떼지어 다니며, 쌀과 보리가 있을 뿐 아니라 포도에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 나라와의 교역을 간절히 갈망합니다… ’

기원전 126년 서역으로 갔다가 13년만에 돌아온 한나라 사절 장건은 무제에게 서역 국가들의 이모저모를 이렇게 보고했다. 미지의 서역 산물에 호기심이 유별났던 무제는 보고 내용에 당장 매혹되어 장군 곽거병, 이광리 등에게 페르가나(오늘날 중국에 접경한 타지키스탄 북쪽과 우즈베키스탄 동쪽), 하서회랑 등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명령한다. 그 결과 사상 처음 대규모 실크로드 교역로가 뚫린다. 군사장비격인 한혈마에 대한 유난한 애착이 가장 주된 요인이었지만, 포도 같은 서역의 먹거리 식물들 또한 동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사기> 대원전을 보면 “대원 사람들은 포도로 술을 마시며 부자들은 많은 양의 술을 저장하고 있다… 말은 거여목(콩과의 식물)을 먹는다. 한의 사신이 열매를 얻어와 천자가 처음 포도와 거여목을 심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도 외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먹거리 식물들은 대단히 많다. <사기>의 기록처럼 무제 때 포도, 거여목이 전해졌고, 참깨, 누에콩, 마늘, 호두, 석류, 완두콩, 당근, 오이 등도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한국, 일본 식탁에 오르게 된 먹거리들이다. 이들 작물의 중국 이름이 호마(胡麻:참깨) 호도(胡桃), 호두(胡豆:누에콩), 호과(胡瓜:오이) 등 대부분 오랑캐 호(胡)자로 시작하는 것도 전파 경위가 실크로드임을 일러준다. ‘실크로드의 콜럼버스’로 불렸던 장건의 명성 때문에 19~20세기초까지 서구 식물학자들은 장건이 서역의 먹거리 식물 대부분을 전파한 주역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들 서역 작물이 한 무제의 서역 원정 이후 본격화한 실크로드 공사 교역으로 전파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포도만 해도 장건이 가져왔는지, 후대 사신이 가져왔는지를 놓고 지금도 주장이 엇갈린다. 실크로드의 먹거리 식물 교역사는 원산지, 전파로, 계통사, 호칭 기원 등에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논란거리가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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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베제클리크 석굴의 수난

‘아름답게 장식한 집’…문명 파괴의 증언장

▲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산 절벽에 벌집처럼 굴을 뚫어 만든 ‘토욕구 천불동’의 전경. 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강 양쪽에 94개의 석굴이 있는데 베제클리크와 마찬가지로 내부 유물은 심하게 파괴된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개방돼 아직 탐방객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중국 당국은 아직 모든 동굴을 열지 않을 뿐더러 사진 촬영도 막고 있다.

문명 탐사를 다니다 보면 자주 파괴된 유물·유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풍화나 지진 등에 따른 자연적 파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일부러 자행한 유물 파괴는 반문명적 작태로서 ‘반달리즘’, 즉 문명파괴 행위라고 한다. 그런데 파괴자들은 얄궂게도 ‘구제’ ‘보존’ ‘보편적 가치’니 하는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범죄를 감싸면서 사죄는커녕 편취해 간 유물들마저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갖은 앙탈을 부린다.

유적 분포밀도에서 단연 손꼽히는 투르판은 문명파괴 행위의 처절한 증언장이다. 그 중에서도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가장 극명한 현장이다. 석굴은 불꽃처럼 산세가 천변만화하는 투르판 외곽의 화염산을 끼고 30분쯤 달려가야 나온다. 산기슭을 가로 질러 무르툭(목두구·木頭溝) 계곡에 이르면 푸르죽죽한 나무로 뒤덮인 계곡 한복판에 물이 흐르고, 멀리 텐산산맥의 만년설이 한눈에 안겨오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의 서쪽 벼랑 중턱에 벌집처럼 뚫린 굴들이 송송히 보이는데, 바로 위구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의 베제클리크 석굴이다.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벽화 속 불상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10여m 내려가니 절벽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선 석굴들이 나타난다. 지금껏 발굴된 석굴은 83 개로, 그중 벽화가 일부라도 남은 것은 40여 개뿐이다. 굴을 만든 때는 6세기 국씨 고창국시대부터 7세기 당·서주시대를 거쳐 13세기 원나라 때까지인데,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骨+鳥:위구르) 칸국시대다. 석굴은 파라미어와 서하어, 위구르어 등으로 쓰여진 숱한 불경 사본과 여러 시기에 그려진 천불도를 소장한 불교문화의 보고다. 특히 왕가 전속 사원이 된 회골 칸국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 위구르어로 베제클리크는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이다. 무르툭계곡의 깎아지른 협곡의 서쪽에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곳이 석굴이다. 서구 도굴꾼들로 인해 석굴 안의 유적들이 파괴된 까닭에 지금은 내부 촬영조차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왼쪽)


불교문화의 보고…장엄의 극치

석굴은 마니교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고비사막 북쪽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9세기 중엽 고창(투르판)으로 옮겨와서 신봉하던 마니교를 퍼뜨렸는데, 그 생생한 자취가 여기에 남아 있다. 석굴에는 위구르어로 쓴 마니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고, 삼신광명수(三身光明樹) 같은 마니교 성수가 그려져 있으며, 마니동상(높이 9㎝)도 발견되었다. 그밖에 금동불상(높이 37㎝)과 불탑지, 황동대야, 각종 자기그릇, 어린이 놀이 그림(48굴), 밭에서 소먹이는 그림, 악기 연주도, 용의 비상도, 비천도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종교 생활상과 교류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어이없게도 이들 유물 대부분은 제자리에 없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기 위해 후세에 남겨진 참유물(遺物)이 아니라, 무연고지로 흘러가 변조된 ‘유물(流物)’이고 편취된 장물(臟物)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둘러본 여섯개 굴에서 그 속내평을 한번 드러내 보자.

처음 들어간 17굴부터 만신창이다. 원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이 각각 좌우로 3좌씩 있었는데, 온데간데 없고 광배 자리만 남아 있다. 천정 벽화도 거의 뜯겨 벽화 속 불상들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20굴은 회골 칸국시대 공양상으로 유명한 굴이다. 문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 좁은 회랑이 둘러있는데, 그 좌우벽에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왕후, 귀족들의 공양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공양상마다 한문이나 위구르어, 산스그리트어로 방제(榜題: 제사받는 사람의 이름)가 쓰여져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간 자리들만 휑뎅그레 남아 있다. 독일인 폰 르콕이 20세기 초 뜯어가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는데, 이 마저도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 폐쇄회로와 경비원들의 감시 속에 간신히 찍은 베제클리크 33호굴의 벽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100여명의 왕자들이 도열한 장면인데, 신라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도 보이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회골 칸국의 후기 동굴벽화에 속하는 27굴은 내용상 앞의 20굴과 비슷하다. 역시 르콕의 분탕질에 걸려 텅 비다시피 되어버렸고 소조불상들의 눈도 성한 데가 없다. 게다가 무지한 현지인들이 청소한답시고 물로 알카리성 황토벽을 씻어내리다 벽이 그만 거무튀튀하게 변색되고 말았다. 31굴에는 동벽에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本行經圖)와 열반경변도, 공양도가, 불단 정면에는 회골 칸의 공양도가, 서벽에는 복식 세밀도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거지반 없어졌다. 남은 부분은 뜯어가지 못하게끔 흙으로 덧칠해놓았다고 하니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가. 벽면 곳곳에 송곳으로 긋거나 갈퀴로 긁은 자국이 역력하고, 지금은 4장의 사진만 떼어간 자리에 오도카니 붙었다.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 부분은 없어지고 윗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100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왕자들의 눈만은 온전히 남았다. 마지막 굴인 39굴에서도 벽 한채를 아예 통째로 떼어갔는가 하면, 제단 속을 파헤치다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되묻은 흔적도 보였다. 둘러보지 않은 나머지 굴들의 상황도 대채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파괴 선봉 독일인 르콕과 반달리즘

이처럼 베제클리크 석굴은 2중 3중으로 인위적 파괴를 당했다. 그것도 문명을 외치는 현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 첫 장본인은 르콕을 비롯한 독일인들이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란 이름의 도굴꾼들을 투르판에 투입했다. 첫 탐험대는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이었다. 대무기상 크루프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던 그들이 예비조사에 불과했던 첫 탐험에서 46상자나 되는 유물을 챙겨오자 횡재의 꿈은 부풀었다. 급기야 황제와 크루프의 후원을 받는 재단이 설립되고 장기 탐험을 주관할 전문위원회도 만들어졌다.

▲ 토욕구 아래 마을에 있는 독일인 탐험가 르콕의 집. 베제클리크 입구에도 르콕이 머물던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투투판 일대에 10년간 머물며 수많은 유물을 파괴했다.


그룬베델의 건강이 악화되자 위원회는 2차 탐험대장에 르콕을 임명한다. 베를린의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 아들로 태어난 르콕은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다 베를린 동양언어학원에서 아랍어, 페르시아, 산스크리트어 등의 동양어를 배운다. 마흔 두 살 때 처음 민속박물관에 무보수 견습생으로 채용된다. 그러다가 행운의 기회를 잡은 그는 1904년 9월 투르판으로 향한다. 그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는 이때의 행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을 보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부근에 도착한 그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러시아 영사의 말을 듣고 금화 1만 2천 루블을 넣은 주머니 위에 앉아 라이플 권총을 한손에 든 채 우루무치까지 간다. 약 두달 뒤인 11월18일 투르판의 카라호자에 도착해 약 4달간 머물면서 베제클리크 석굴을 비롯한 유적지들에서 유물 편취에 몰두한다. 베제클리크 석굴 밑 강가와 멀리 토욕구 석굴로 들어가는 어귀에 그가 머물었던 집터가 있다. 그는 10년간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 전역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그리고 홍위병

르콕을 비롯한 2차 탐험대는 103상자분의 유물을 뜯어갔고, 그후 그룬베델이 합류한 1905~7년의 3차 탐험에서는 128상자의 유물을 또 가져갔다. 르콕은 노획한 ‘기적의 전리품’에 대해 후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덤덤히 ‘성공담’을 회상하고 있다.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르콕은 극단적인 문명파괴자였다. 애당초 학자도 탐험가도 아닌 그가 무기상의 재욕(財慾)에 놀아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벌어진 르콕의 반달리즘적 행태는 앞다퉈 실크로드 곳곳의 유적을 짓뭉개고 유물을 뜯어간 다른 편취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굴꾼들이 투르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지금껏 ‘유물(流物)’로 유폐되어 있다. 그 과정은 낯뜨거운 질투와 모해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스타인은 늘 경쟁자들을 조소하면서 독일인들은 ‘항상 떼거리로 사냥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이들 탐험가들을 겨냥해 듣기에는 좀 섬뜩하지만, ‘악마들’이라고 일침한다.

▲ ‘아름답게 장식한 집’…문명 파괴의 증언장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베제클리크 석굴의 수난


석굴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간신앙에 현혹된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모든 재앙의 근원인 이른바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착각한 나머지 통째로 도려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60~70년대 중국땅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 또한 문명파괴에 대한 단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 무모한 도굴꾼들과 파괴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기어 텅빈 헛간처럼 변한 현실 앞에서 울분과 허탈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승려 탐험가 오타니 조선총독부 기증
고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

▲ 베제클리크 15굴의 공양보살상. 눈이 파괴돼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숱하게 털린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스타인·르콕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실에 전시중인 투르판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1500여 점) 가운데 40%로 가장 많다.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생활유물들이 주종인데,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서원화들과 마니교 관련 회화들의 가치는 지대하다. 서원화는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위구르족 상인, 왕 등이 미래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데, 투르판이 중세 동서교역 중심지로 큰 재력을 쌓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제클리크 15굴에서 절취해온 10~12세기 공양보살상의 경우 열다섯 주제 서원화의 조각 그림인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첫손꼽힌다. 민병훈 학예관은 “안목 높은 학승들이 교리상 중요한 벽화 모티브를 골라 뜯어왔기 때문에 소장 벽화들은 미술사적 의미가 특출한 명품들”이라고 말한다.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들은 한인 왕조인 국씨 고창국 시대의 유물들로 묘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다양한 부장품들을 망라한다. 중국·서역 문화가 지역 특색에 맞게 교류·융합된 양상을 대변하는 기준 유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13~14세기께의 꽃무늬 바구니도 이후 출토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희귀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수시로 보는 투르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의 3차 조사 주역인 절집 사무라이(무사) 출신의 요시카와가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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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불·모래·바람…그 어떤 세력도 장벽을 넘지 못했다

▲ 2천년 전 차사전국의 도읍지였던 교하고성.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의 벼랑 위에 세워진 면적이 약 43만평에 이른다. 남쪽 입구에서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 도로가 곧게 뚫려있다. 고성 안에는 불탑, 현장 법사가 머물렀다는 불전, 사원, 관청, 감옥과 민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많은 탑의 잔해가 남아있어 신비로운 분위기이다. 이종근 기자

둔황에서 쿠처까지는 기차를 타고 답사하기로 했다. 때문에 둔황 시가에서 차로 두시간쯤 북쪽으로 밤길을 달려 리우위앤 역에 도착했다. 신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철도 길목이어서 관광객과 행인들로 붐빈다. 표는 예매했지만 출발을 5분 앞두고도 앉을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다. 현지 안내원 꿍즈청이 안달복달하며 뛰어 다녀 겨우 좌석을 구했다. 그러나 북새통 속에 출발한 기차에서 그는 내리지 못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7시간 남짓한 강행군을 해온 터라 일행 모두 파김치였고, 스물네살 젊음으로 버텨오던 꿍즈청의 눈자위도 움푹 패어 들어갔다. 그가 하미역에서 내려 되돌아갈 때까지 세시간 동안 이야기를 계속했다. 순박하고 호기심 많은 젊은이다. 새벽 2시 반, 손을 저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한여름 낮 평균 50도, 지열 합쳐 83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둔황에서 이오(伊吾:하미)를 거쳐 고창(투루판)에 이르는 ‘신도(新道)’로 후한때 개척한 것이다. 차창 밖이 어두운데다 꿍즈청과 이야기하는 바람에 험난하기로 이름난 ‘막하연적’(莫賀延#石+責:고비사막의 일부)을 살피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일찍이 현장법사는 ‘인적은 물론, 날짐승도 없는 황막한 천지’라면서 이 곳을 지난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밤에 요사한 도깨비불이 별처럼 환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닷새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입과 배가 말라붙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그는 털어놓고 있다. 여윈 말에 몸을 싣고 가다 모래 위에 엎드려 관음을 염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기차로 휙휙 지나가는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다.

▲ 불·모래·바람…그 어떤 세력도 장벽을 넘지 못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아침 7시 투루판 역에 도착했다.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의 투루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동서 120㎞, 남북 60㎞의 사막 속 분지 오아시스다. 해발 800m의 기차역에서 시내 호텔에 이르는 길은 내내 내리막 길을 가는 기분이다. 투루판 중심부는 해면보다 60m나 낮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투루판 총면적 5만㎢ 중에서 80%인 4만㎢는 해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한가운데의 아이딩호(艾丁湖)인데, 수면이 해발 -154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392m) 에 버금간다. ‘아이딩’은 위구르어로 ‘달빛’이란 뜻이므로 일명 ‘월광호(月光湖)’라고도 한다.

바다보다 낮은 사막분지 속 오아시스

며칠간 열사에 시달렸지만, 이곳의 불볕 더위에 비하면 약과다. 산들로 에워싸인데다 고도마저 낮으니 태양 열이 주위로 발산되지 않는다. 한여름 낮 기온은 보통 50도를 밑돌며 지열까지 합쳐 최고 83.3도까지 올라간 기록이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16.6㎜밖에 안되는데, 증발량은 3천㎜나 되니 사막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딩호 총면적은 1949~1958년, 불과 10년사이에 7분의 1로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반면 만년설 뒤덮인 주변 고산지대는 차기 때문에 봄에는 강풍이 불어닥친다. 한마디로, 이곳 지형지세는 고온, 건조, 강풍의 세 가지 특징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자고로 화주(火洲:불의 땅), 사주(沙洲:모래의 땅), 풍주(風洲:바람의 땅)라고 불려 왔다.

▲ 고창고성 북쪽의 아스티나 고분 입구에 12지신을 형상화한 석상들과 중국 신화 속에 인류의 시조로 전해오는 ‘복희여와도‘ 탑이 서 있다. 1914년 영국 탐험대가 발굴한 지하 무덤에서 미라 묘지명 토우 견직물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이종근 기자
불과 모래와 바람은 이곳을 문명의 용광로로 만들었다. 불, 즉 고온은 포도나 면화 같은 특산물 산지로 이름을 떨치게 했고, 모래, 즉 건조한 기후는 카레즈 같은 전무후무한 관개시설을 발달시키고 유물 보존을 가능케 했다. 바람, 즉 기류 또한 문명 소통을 가져오고 오늘날 에너지원까지 제공한다. 이 3박자 선율을 타고 투루판의 유구한 역사는 흘러왔고, 그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가 합류하는 독창적 문화를 창출해 교류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전역에 178개소의 유적지가 널려 평균 280㎢ 당 하나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유적 분포밀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투루판 박물관에 전시된 코뿔소 화석, 춘추전국시대 미라 등은 이 곳의 유구한 역사 문화를 말해준다. 7천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으며, 3천년 전부터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다. 원래 토착민들은 텐산 산맥 북쪽에서 유목하다 남하한 이란계 차사인(車師人)으로 전한 시대(기원전 3~기원후 1세기)에 야르호(교하고성)를 도읍 삼아 차사전국을 세웠다. 그후 한나라와 흉노가 번갈아 통치하다 5세기 중엽 북량이 지방정권을 세운다. 그러다가 한족 출신의 국씨(麴氏) 고창국이 들어서 640년 당에 멸망될 때까지 140여 년간 통치한다.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 초원에서 남하한 위구르족이 차지했으며, 13세기 초 몽골군에게 점령되어 차카타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중엽부터 청나라가 설치한 중가르부에 속했다가 1881년 신장성이 신설되자 행정구역으로 독립했다.

기복무상한 역사 속에서 투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 지역으로 변했다. 오늘날 50만 인구 중에서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나, 비율은 변화 중이다. 1949년부터 2004년까지 55년 사이 위구르족은 90%에서 70%로, 회족은 9.6%에서 7.6%로 줄어든 반면 한족은 1%에서 22%로 급증했다. 그밖에 여러 소수민족도 공존한다.

▲ 499년 한족 출신 국문태가 세운 고창국의 대표 유적인 고창고성. 투루판 시내 남동쪽에 있다. 우산으로 뜨거운 햇볕을 가리고 선 관광객들 뒤로 500미터 높이의 봉우리들이 무려 100km나 늘어서 있는 화염산과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톈산(천산)이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의 폭이 더욱 넓은데,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고대에는 주류인 불교에 유교나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동서 종교가 합류되었다면, 중세부터는 이슬람교 일색이다. 시내 서쪽으로 10㎞쯤 떨어진 ‘버들잎 모양’의 교하고성은 2천년 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남북 80m, 동서 40m에 달하는 불교 사원구역이 있다. 중앙탑 중심으로 승방, 소탑들이 배치된 양식은 인도의 사라나르 불적이나 나란다 탑군 등에서 보이는 초기 인도 양식이다. 교하고성 동쪽 40㎞ 지점에 있는 국씨 고창국의 도읍터 고창고성의 궁전 부근 절터에서도 인도식 복발탑(覆鉢塔:탑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근 탑)이나 방형탑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인도에 원류를 둔 불교의 동전을 말해주는 유적 유물들이다.

유적 178곳…세계 최고의 분포 밀도

시 중심에서 동쪽으로 60㎞쯤 가면 수바스강을 낀 ‘토욕구’란 계곡이 나타나는데, 그 동서 양쪽에 94개의 동굴이 올망졸망 뚫려있다. 3세기 만들어진 이 동굴군은 1879년 발견되었으나, 지난해 10월에야 처음 공식 개방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교와 마니교의 공존이다. 흔히 마니교 동굴이라고 하는 42동을 보면, 원래 불교의 관상(觀想)을 위한 굴로서 지금도 동서벽에는 이와 관련한 벽화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후일 마니교가 들어오면서 중앙벽에는 나무가지마다 금박장식을 한 ‘생명의 나무’ 49개를 비롯해 온통 마니교 관련 그림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이 굴에서는 마니교 경전도 발견되었다.

고창국과 당나라 때 무덤떼인 아스타나 고분군에서는 무덤 456기가 발굴되었다. 거기서 총 1만근이 넘는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300여 건은 토카라어나 소그드어, 위구르어로 씌어진 불교와 마니교, 경교 등 종교 문서다. 216호분 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그중 4첩은 성인도로서 왼쪽부터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흰 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신중을,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곧은 무위정직(無僞正直)을 뜻한다.

이슬람교는 8세기 전반 카슈가르를 비롯한 신장 서부지역에 전파되었고, 10세기 이 지역에 출현한 카라한 왕조가 이슬람교를 수용함에 따라 13세기 초 투루판까지 전파된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투르판을 포함한 전 신장지역에서 이슬람교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다른 종교들은 자취를 감춘다. 시가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우람한 소공탑은 그 상징물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額敏和卓)를 기리기 위해 아들 술라이만이 1777년 은 7천 냥을 털어 높이 37미터, 밑지름 10m의 흙벽돌탑과 사원을 세웠다. 신장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서방종교도 중국문명도 멈춘 경계선

한편, 성터·고분벽화에서도 이질 문명들의 융합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하고성의 장묘구역에서는 괴수가 호랑이 목을 물어뜯는 북방 유목문화의 공예 문양인 동물투쟁도, 서역 교류를 시사하는 채도가 나왔다. 토욕구와 베제클리크 천불동 벽화에는 서방의 비천상 모습이 뚜렷이 보이며,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가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여러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마니교나 경교 등 서방 종교는 투르판의 고산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동전을 멈췄다. 중국 왕조가 직접 통치한 최서방 지역으로서 유교를 비롯한 중화문명도 이곳을 넘어 본격적인 서전은 하지 못했다. 북방 유목문화도 대체로 이곳을 남전(南傳)의 경계선으로 삼는다. 이는 뜨거운 분지인 투루판이 주위 여러 문명들을 받아들여 녹이고 응고시키면서 특유의 지역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기원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역패권 쟁탈의 피비린내 질펀

투루판과 전란의 역사

▲ 교하고성의 위그루족 무희.

오늘날 투루판은 둔황과 더불어 반드시 거쳐가는 실크로드 투어의 꽃이다. 하지만 문명교류의 십자로였던 이 오아시스 고도의 역사적 뒤안길에는 전란과 학살이 유난히 잦았던 분쟁 지대의 그늘이 늘 서려있었다. 하서회랑의 서쪽 끝 둔황이 서역 문물을 걸러 중국 땅에 쏟아놓는 병목이었다면 서역 타림 분지 위쪽의 투루판은 텐산 산맥을 낀 텐산 북로와 남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에 놓였다. 때문에 텐산 남북로로 들어온 서역 이민족 문화와 서쪽으로 뻗어가려는 중국의 문화가 한 자리에 질펀하게 부려져 서로 부대끼고 나서야 융화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숙명을 안고 있었다.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중근대까지 투르판이 평화롭게 번영하던 시기는 4~7세기 남북조 시대 들어선 한족 왕조인 고창국 시절에 불과했다. 기원전부터 타림 분지를 호령하던 흉노족과 한 왕조 사이에 서역 패권을 둘러싼 격전이 이곳에서 숱하게 벌어졌고, 당대 이후에는 토번(티베트)과 위구르인, 탕구트인, 몽골·이슬람 세력 사이의 복잡한 민족 전쟁이 거듭되었다. 당나라는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킨 뒤 서역 전진기지로 투루판 교하고성에 초대 도호부를 설치해 100여 년간 통치했지만,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 패배로 서역 경영 체제가 붕괴되자 재차 혼란에 빠져든다. 이 틈을 타 8~10세기 하서회랑과 타림 분지를 누볐던 위구르·토번인들은 투루판의 이란계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13세기 이후엔 몽골군이 교하고성, 고창고성 같은 고도를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후대의 명나라 또한 둔황 동쪽의 관문인 가욕관 요새를 보루 삼아 급속히 밀려온 무슬림들과 투루판과 인근 하미 일대에서 피비린내 나는 땅뺏기 싸움을 거듭했다. 청나라 건륭제가 18세기 투르판을 정복하면서 정세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19세기 들어 독립을 꾀하는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다. 20세기초에는 잽싸게 이곳에 들어온 중국 소군벌들 사이의 야만적인 혈투와 주민 학살이 50년대 초 중국 인민해방군의 접수 때까지 계속됐다. 세계 최대 최고의 흙성이라는 교하고성 한 귀퉁이에서 흉노 침입 당시 학살당했다는 아이들의 떼무덤을 보면서 이곳의 어두운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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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아시스 북도의 관문 옥문관

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

▲ 둔항 서북쪽에 자리잡은 옥문관의 입구. 옛 원형을 살리기 위해 후대에 세운 사립문 안으로 사각형 석탑 모양의 옥문관이 보인다. 입구에서 말몰이꾼들이 관광객들에게 기념촬영을 권하기도 한다.

둔황을 오아시스 육로의 인후(목구멍)라고 하면, 서역행 길목을 지키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은 마치 인후에서 갈라지는 식도와 기도의 여닫이 같은 곳이다. 이를테면, 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톈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쪽 관문이고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도쪽 관문이다. 우리 답사길은 북도를 따르는 길이므로 옥문관은 첫 관문인 셈이다.

막고굴을 둘러본 뒤 둔황에서 서북쪽으로 90㎞ 떨어진 옥문관으로 직행했다. 반쯤만 포장되고 나머지는 모래, 자갈이 섞인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어서 1시간 반이나 걸렸다. 길가에 앙상하게 가시 돋친 낙타풀만 눈에 띈다. ‘옥문관 관리소’란 팻말 붙은 허름한 흙벽돌집 앞에 차가 멎자, 말몰이꾼 네댓명이 몰려와 저마다 자기 말 타고 유적지까지 가라고 법석인다. 원래 유적지는 밟아보는 데 묘미가 있는 터라 ‘말타고 꽃구경’할 수는 없었다.

우리네 혜초 스님도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이 문을 거쳐 갔을 것이다

관리소 맞은편에 20평 남짓한 ‘옥문관 박물관’이 있다. 옥문관 인근에서 발견된 죽간(글씨를 쓴 대나무 조각), 비단, 마지, 나무빗 등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옥문관 터임을 입증하는 몇몇 죽간이다. 통관증에 해당하는 ‘과소부’(過所符)라고 쓴 죽간이 이채롭다.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사립문 비슷한 문을 열어젖히고 800미터쯤 걸어갔다. 지금 남은 관문의 크기는 동서 24m, 남북 26m, 높이 9.7m로 부지면적은 약 630㎡다. 역대 장성의 관문치고는 작은 편이다. 그래서 ‘소방반성’(小方盤城), 즉 네모난 작은 성문이란 속명을 붙였다. 북면과 서면에 문이 하나씩 나 있다. 북문은 서북쪽으로 가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로, 서문은 서남쪽으로 뻗은 남도로 출발하는 문이다.

▲ 옥문관의 전경. 원래는 좌우로 장성과 연결돼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지금은 울타리가 쳐져 있다.
원래 옥문관은 ‘옥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옥은, 고대에는 연옥을, 근대에는 경옥을 말한다. 고대 연옥의 주산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변에 있는 남도의 요지 ‘화기’(호탄)였다. 중국은 일찍이 은·주 시대부터 온화함, 투명함, 순수함, 강직함, 공정함의 다섯 덕을 갖췄다는 이 보석을 화기로부터 수입했다. 그 수입로의 지킴 구실을 한 곳이 바로 옥문관이다. 당시 월지인들이 옥 교역을 전담했다 해서 ‘옥의 민족’이라고 했으며, 화기를 시발로 하여 옥을 교역한 길을 ‘옥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사실상 그 길은 오아시스 육로의 남도에 해당한다. 고서에 옥을 가리켜 ‘화씨벽(和氏璧)’이라 한 것은 ‘화씨’, 즉 화기 사람들(월지인)이 캐내는 옥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은주시대부터 ‘옥이 들어오던 문’

고대 중국의 사서나 시집, 인도 구법승 등의 여행 기록에는 옥문관에 관한 내용들이 유난히 많다.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증거다. 기원전 2세기 전한 한무제는 장안 서쪽의 하서회랑을 공략하고 주천군을 설치하면서 가장 서쪽의 변방요새에 ‘옥문관도위’를 설치했다. 그때부터 이 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라고 했다. 변방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가거나, 외적을 정벌하러 나간다는 뜻이다.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만 해도 옥문관은 ‘군영이 즐비하고 거마가 폭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당대에 이르러 원정 나간 님에게 전하는 ‘따뜻한 봄바람마저도 넘지 못하는 황막한 관문’(春風不度玉門關)으로 변해버렸다.

더욱이 옥문관을 지나면 ‘악마의 늪’이라는 죽음의 사막 ‘백룡퇴(白龍堆)’가 펼쳐졌다. 400년 인도를 향해 떠난 동진의 고승 법현은 이곳을 지나면서 느낀 바를 〈불국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이 백룡퇴가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으면 우리 판소리의 ‘열녀춘향수절가’ 중에도 이런 대목이 나올까. 그네를 뛰며 노니는 춘향을 보고 이도령은 마음이 울적하고 정신이 아찔해 “단봉궐 하직하고 백룡퇴 간 연후에 독류청총하였으니 왕소군도 올 리 없고…”라고 중얼거린다. 뜻인즉, 중국 전한 때 궁궐을 하직하고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효원제의 궁녀 왕소군이 외로운 무덤일 수밖에 없는 백룡퇴로 갔으니 돌아올 리 만무한데, 어디서 그녀 같은 절색이 나타났을까라고 춘향의 미색에 놀란다. 아무튼 선현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악마의 늪’에서 서역 개통이라는 월척을 낚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우리네 혜초 스님도 들어 있다.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를 따라 귀로에 오른 스님은 분명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옥문관을 거쳐 둔황에 들렀다가 장안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그 모습이 지금 막 저 사막 지평선에서 사라져가는 신기루처럼 아련하다.

▲ 옥문관에서 둔황 시내 쪽으로 오는 길목에 보이는 봉화대. 원형은 많이 허물어져 있지만 뒤쪽 밍사산 자락의 모래 물결과 함께 실크로드의 화려했던 한 시절을 엿보게 한다.(왼쪽 사진) 옥문관 앞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말몰이꾼 중에는 여성들도 있다.


사방에 울타리를 쳐 관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지형을 좀 살피고 싶어 얼마 떨어진 언덕 위에 서서 사방을 조망했다. 우선 서북쪽으로 5㎞쯤 떨어진 당곡수에 있는 한대 장성이 한눈에 안겨온다. 보통 장성 관문은 성곽에 붙어 있는데, 이 옥문관만은 성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진실성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지형상 부득이했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 ‘한장성(漢長城)’은 2100여 년 전인 기원전 2세기 초 축조한 것으로서 명대에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 개축된 만리장성보다 무려 1500년 앞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 한장성이야말로 만리장성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진대에는 장성, 한대에는 새원(塞垣), 명대에는 변장(邊墻) 등으로 다르게 불렸거니와 그 축조방법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둔황 동쪽 안서로부터 서쪽의 로프노르(뤄부포) 호수 부근까지 150여 ㎞에 이르는 ‘둔황장성’은, 당시 서호 일대에 무성한 각종 수초와 모래자갈을 1:4 비율로 엇바꾸어 가면서 쌓는 방법을 썼다. 이 한장성의 기단 너비는 3m, 높이는 2.6m나 된다. 아직도 2천년 넘긴 유적답지 않게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나오는 죽음의 늪

옥문관 주위로 눈길을 돌리니 걸리는 것은 온통 봉화대뿐이다.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화대가 관문을 에워싸고 서 있다. 봉화대 가까이에는 예외없이 움푹 파인 곳이 드러나는데, 봉화용 나무를 수북이 쌓아뒀던 곳이라고 한다. 중국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봉화제도가 대단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봉화는 규모에 따라 가장 큰 것은 장(障), 다음은 정(亭), 수(燧) 순이고 가장 작은 것은 봉(烽)이라 한다. 그리고 적정에 따라 봉화용 나무 규모도 달랐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죽간 기록에 의하면 적이 50~500명일 때는 나무 한 섶을, 500~1000명일 때는 두 섶을, 3000명 이상일 때는 3~4섶을, 만명 이상일 때는 5섶을 태우기로 되어 있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인 한장성 너머에는 로프노르호로 흘러들어가는 소륵하(疏勒河)가 흰 실오리처럼 늘어서 있다. 20년 전만 해도 물이 차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고갈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강바닥에 앙금으로 남은 염분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보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옥문관 땅도 마찬가지다. 이곳도 소륵하 지류에 의해 형성된 소택지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말라버려 희끄무레한 소금기만 번뜩인다.

▲ 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오늘날 황막하기 그지없는 땅이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삶이 약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아름다운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 권단(權旦)이란 마음 착한 목동이 어느날 옥문관 서남쪽 남대호란 큰 연못에서 옥처럼 아름다운 세 미녀가 무자맥질하는 것을 발견한다. 권단을 본 큰 두 자매는 두 마리 백학이 되어 홀연히 하늘로 날아올랐으나, 막내는 그만 권단에게 날개옷을 빼앗겨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와 성혼해 백일을 보낸다. 옥황상제는 엄명으로 막내딸을 불러들인다. 모두의 화를 면하기 위해 권단이 감춰둔 날개옷을 꺼내주자 선녀는 피눈물을 흘리며 작별한다. 그 피눈물로 남대호는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권단은 속세를 떠나 삭발하고 절에 들어간다. 그후 가끔 백학 한 마리가 호반을 배회하며 슬피 울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옥녀천(玉女泉)이라 부르며 그 애틋한 사연을 전해오고 있다. 우리네 금강산 팔선녀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숱한 전설과 사연 새기며 다시 둔황으로

지금은 보잘것없는 유적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숱한 이야기 서린 옥문관을 떠난 것은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이었다. 이것저것 듣고 본 것들을 되새기다 보니 되돌아오는 길은 무료하지 않았다. 둔황 시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오른편 모래언덕가에 둔황의 고풍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보인다. 1987년 중-일 합작으로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을 영화로 찍을 때 지은 ‘둔황고성’이란 세트장이다. 송대 둔황 성곽과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으로 둔황 영상물을 찍을 때면 단골로 등장하며 관광명소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원래 역사에는 재현이란 없는 법, 그 환각에 빠지기 쉬운 재현의 진정성을 유념해야 한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가장 오래된 오아시스로 남도는 잊혀지고 북도 성황

▲ 미란의 사원 회랑에 그려진 날개달린 천사상.

실크로드 역사를 접할 때 헷갈리기 쉬운 부분 가운데 하나가 남북도의 개념이다. 톈산 남북도, 서역 남북도, 안서 남북도 등 다양한 남북도가 한나라 이후 옛 사서에 수시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서역 남북도는 기원전 1세기 장건이 개척한 가장 오래된 오아시스로다. 중국 실크로드 영역의 대부분인 신장성 타림 분지를 위아래로 관통한다. 이 남북도가 타림 분지 북쪽 톈산산맥 남쪽 기슭의 길인 톈산 남로에 모두 포함된다. 톈산 북로는 서역 북도의 길목인 둔황 북쪽의 하미나 투루판에서 다시 북상해 톈산산맥 북쪽 기슭을 거쳐 중앙아시아 카자흐 초원으로 빠지는 길이다.

〈한서〉 ‘서역전’을 보면 서역 남북도는 둔황 서쪽의 옥문관·양관을 지나 갈라졌다. 남도는 누란 왕국이 있던 선선을 거쳐 타림 분지 남쪽 둘레를 따라 서행하며 타림 분지의 서남쪽 소도시 사차(야르칸드)에 이른 뒤 총령(파미르 고원)을 넘어 안식국(파르티아:이란)으로 빠진다. 북도 역시 옥문관·양관에서 투루판으로 간 뒤 톈산산맥 기슭을 따라 카라샤르, 쿠처, 악쑤, 카슈가르 등의 오아시스 도시로 서행하다 총령을 넘어 중앙아시아의 강거(사마르칸트)로 향한다. 티끌 섞인 열풍이 몰아치는 옥문관에서 1000여 년 전 구법승과 대상들은 망망대해 같은 사막을 바라보며 남북으로 흩어졌던 셈이다.

서역 남북도는 후대에 희비가 엇갈렸다. 남도는 천축(북인도)으로 빠지는 구법 순례 길목인데다 중국 황실이 애지중지한 옥의 도시 호탄을 중간에 끼고 있어 일찍부터 각광받았다. 비단무역도 겸하면서 남도 주변에는 1~5세기 누란, 미란 등의 소왕국들이 번영했다. 20세기 초 스타인, 헤딘 등이 발굴한 요트칸, 단단위릭, 체르첸 유적들의 그리스·로마식 벽화와 공예품·직물, 카로슈티 고문서들은 옛 영화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급속한 사막화와 이민족 침입으로 소왕국들은 7세기 초 몰락하고 남도는 잊혀진 길이 되고 만다. 반면 북도는 사막 횡단 거리가 짧아 갈수록 통행이 늘어났다. 1세기 한나라 군대가 둔황 북서쪽 거점 이오(하미)를 점령한 뒤에는 둔황에서 이오로 북상해 서북쪽 투루판에 이르는 새 북도가 개척된다. 이에 따라 남북도의 분기점도 둔황 동쪽 안서로 옮겨가고, 옥문관도 출입이 뜸해지게 되었다. 방치된 남도 지역은 이후 토번(티베트)이 차지해 중국 서역 지배의 숨통인 하서회랑을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노형석 기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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