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처 고성 성벽에 고선지 장군 함성이…
2006-05-26 16:02 | VIEW : 6,486

밍우타거산의 산기슭을 따라 3km에 걸쳐 조성된 키질 석굴
다섯 차례 서역 원정 출발 개선 장소
음악과 춤 오랜 명성 키질 석굴에서 눈으로 확인

새벽녘 쿠처역에 내리자마자 호텔로 갔다. 기차에서 이틀 밤을 지낸 뒤라 움직이지 않는 잠자리에 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다.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쿠처의 불교사원 유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호텔을 나섰다.

사원 터는 쿠처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가 크게 흥했던 쿠처의 중심 사원으로, 국사에 대한 전국 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코끼리나 낙타를 타고 깃발을 앞세운 수천명의 사람이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천년 전 혜초는 신라에서 바닷길로 동인도를 거쳐 페르시아까지 간 다음 파미르고원을 넘어 쿠처에 다다랐다. 정수일 선생은 이 사원에서 큰 종교적 집회가 열렸던 만큼 혜초도 틀림없이 이곳에 들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쿠처민속가무단의 공연 모습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도 쿠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무예를 닦았다. 그는 다섯 차례나 서역 원정에 나섰다. 패전한 탈라스 전쟁을 빼고는 그 출발지와 개선지가 모두 쿠처였다. 중국의 종이가 고선지를 통해 서쪽으로 퍼졌고, 오늘날의 중국 국경이 그에 의해 어느 정도 그어졌다. 무수한 전쟁을 치렀던 고선지도 이곳에 들러 마음을 다스렸을까. 그들을 기념해 자갈을 하나 주웠다.

고선지는 사원보다는 주로 성에서 활동했다. 그의 흔적이 남은 쿠처 고성은 성벽인지 흙무덤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잔해만 남아 있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쓰레기도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입구에 세워진 푯말만이 이곳이 성터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수일 선생은 너무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와 관련 있는 해외 유물들을 준문화재라는 개념으로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즉석에서 그곳에 고선지를 기념하는 비를 건립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오후에는 밍우타거산의 산기슭을 따라 3km에 걸쳐 조성된 키질 석굴을 방문했다. 키질 석굴은 둔황 모가오굴보다 빠른 3세기부터 만들어졌다. 석굴 맞은편 산맥에는 산줄기마다 하얗게 눈이 쌓였는데, 발밑의 호수와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인이 열쇠로 석굴의 문을 하나씩 열어주며 해설을 해줬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독일의 알렉산더 폰 르콕 일행이 벽화를 훑다시피 떼어간 데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곤 이슬람을 믿는 현지인들이 눈, 코 등을 긁어버린 그림이나 부서져 조각난 불상들뿐이었다. 처참한 폐허만이 우리를 맞고 있었다.

3세기부터 조성된 키질 석굴 처참한 폐허만 남아

10동 석굴에 새겨진 한낙연의 글. 카메라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10동 석굴은 독특했다. 원래 선방이었던 곳이어서 벽화는 없고, 한낙연이 새긴 글만 붙어 있었다. 중국 옌볜 룽징에서 태어난 한낙연은 정수일 선생의 고향 대선배다. 1924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29년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항일구국 투쟁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소수민족의 생활상과 풍경들을 많이 묘사했고, 석굴 벽화의 복원에도 힘써서 키질의 벽화를 모사한 작품도 20여 점이나 남겼다.

벽에 쓴 그의 글에도 벽화가 손상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표현돼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 모사를 위해 노력했음을 알리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석굴의 보전을 당부하고 있었다. 글 옆의 초상화 속에서 동그란 안경을 쓴 그가 웃고 있었다.

다음 굴로 가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갑자기 큰 소리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한낙연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은 안내인에게 우리끼리 한국인 한낙연을 위한 간소한 기념식을 행하려고 하니 잠시 나가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지만 분위기를 깰 수 없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인이 나가자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품 안에서 사진기를 꺼내더니 한낙연의 사진과 글을 배경으로 정수일 선생을 찍었다. 사진기는 입구 관리소에 맡기도록 돼 있는데 숨겨온 것이다.


△쿠처 고성을 알리는 푯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머지 일행은 얼떨결에 조그맣게 난 창으로 망을 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굴 안이 순간 환해지며 번쩍거렸다. 누군가가 사진기 플래시를 사용한 것이다. 이래서는 들키기 십상이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들어설 때부터 일행조차 모르게 두세 사람이 계획한 거사의 전말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수일 선생이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한낙연의 초상화와 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로 모의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한 사람은 안내인의 주의를 돌리려고 바닥에 방향 표시로 그어둔 화살표까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는데도 안내인은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그런데 한바탕 소동의 결과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도둑 촬영의 주된 임무를 맡은 사람의 디지털 사진기에 담긴 영상이 대부분 엉망이었던 것이다. 마치 키질 석굴을 주제로 한 포스트모던 추상화 같았다. 플래시 없이 노출 시간이 길었던 탓에 손이 흔들렸던 것이다. 반면에 들킬 위험을 감수하며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다른 사진은 선명하게 나왔다. 촬영에 실패한 게릴라는 비밀 임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대담성이 없다며 남은 여행 기간 내내 놀림을 당했다.

쿠처는 음악과 춤으로 중앙아시아와 장안까지 유명했던 곳이다. 현장도 이곳의 관현기악이 이름 높다고 전했다. 키질 석굴에는 비파를 켜는 모습의 벽화가 있고, 이곳에서 유래한 오현비파가 발견되기도 했다. 막가무라는 신장의 리듬은 우리와도 큰 관련이 있다. 신라 때 유행한 산예라고 불린 사자춤도 원래 쿠처의 것이다. 그러니 쿠처까지 와서 악무단의 공연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수소문을 해 비수기라 흩어져 있던 단원들을 겨우 찾아 호텔로 초청했다.

뱀 가죽으로 만든 북은 다프, 바이올린처럼 생긴 악기는 쿠시타르, 울림통이 훨씬 작은 현악기는 러와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공연은 이 악기들의 합주로 시작됐다. 눈썹이 짙고 수줍으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닌 무희의 춤이 그 뒤를 이었다. 머리 위에 접시를 올리고 추는 마이시라이프는 결혼식 같은 즐거운 자리에 어울릴 만한 춤이었다.

뱀 가죽으로 만든 북, 다프 소리에 몸 저절로 흔들려

쿠처 불교사원 유적은 성벽인지 흙무덤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다.

무희의 이름은 파티쿨리였다.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 때마다 몇 갈래로 땋은 긴 머리카락이 몸과 함께 힘껏 돌다가 다시 몸에 감겼다. 춤을 마친 뒤에는 머리 위의 접시에서 물을 따라낸다. 그 신기함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쿠시타르의 연주자는 쿠처의 꽃을 독주했다.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 솜씨도 뛰어났다. 다른 노래는 음의 떨림이 동양적이었던 반면 쿠시타르의 연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7음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다프 소리였다. 연주자는 다프를 양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받친 뒤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뱀 가죽을 두들겨 연주했다. 자유로우면서도 어딘가에 규칙이 숨어 있는 듯한 리듬이었다. 내 안의 박자와 맞았는지 그 리듬에 맞춰 몸이 저절로 흔들렸다. 아트 블래키의 거침없는 드럼 연주를 듣는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 연주자에게 다프를 잠시 빌려 연주를 해보았다. 의외로 소리 내기가 어려웠다. 맑고 큰 소리를 기대했는데 반대로 작고 둔탁한 소리만 났다. 실망스러웠다.

다프 연주자는 나의 연주를 미소 띤 얼굴로 지켜봤지만 자신의 악기가 망가질까 봐 불안한 모습이었다. 통역을 통해 들으니 연주 경력만 20년이란다. 일본까지 가서 타악기 공부를 하고 온 실력파였다.
그곳에 그의 문하생으로 남겠다고 큰소리쳤던 나는 카슈가르의 시장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다프만 하나 사들고 돌아왔다. 그는 실크로드의 일부였고, 나는 나그네였다.

기사제공= 주간동아 글·문건영 변호사 사진·서해성 작가

Posted by 동봉
,

.
.
.

#1



.
.
.

#2



.
.
.

#3



.
.
.

#4



.
.
.

#5



.
.
.

#6



.
.
.

#7



.
.
.

#8



.
.
.

#9



.
.
.

#10



.
.
.

#11



.
.
.

#12



.
.
.

#13



.
.
.

#14



.
.
.

#15



.
.
.

#16



.
.
.

#17



.
.
.

중국 실크로드... 그 첫번째 여행길...

Posted by 동봉
,

[중국 실크로드(상)] 사막길에 남아 있는 천 년 역사를 찾아서

난주~가욕관~돈황~투루판~우루무치~카시 구간

▲ 사막에 솟은 명사산의 오아시스 월아천. 수천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실크로드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F. 리히트호펜이란 사람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운반된 물품이 주로 비단인 것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에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가는 천산북로와 남쪽으로 가는 천산남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으로 가는 서역남로가 있다는데, 우리는 천산남로로 카스까지 갔다가 서역남로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10월13일(목) 맑음. 베이징~난주. 아침 9시4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만에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베이징 공항에서 점심식사를 하려니 물을 주지 않는다. “아니 물도 안 주는 식당이 어디 있냐?”고 불평들을 하니 베이징 공항은 물가가 비싸 물 한 병에 4,000원이나 한단다. 인솔자 김 사장이 물보다 맥주가 더 싸니 맥주로 먹자고 하여 물 대신 맥주로 갈증을 달랬다.

▲ 만리장성의 서단인 가욕관의 현벽장성.
오후 3시 다시 중국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난주로 향했다. 이코노믹 좌석이 꽉 찼는지 대장과 임경희씨는 비즈니스석에 앉아서 가셨다. 하여튼 복 많은 사람은 자빠져도 머리도 안 깨진다. 난주로 가는 길은 그저 황량한 산과 사막의 연속이다. 저렇게 황량하니 흙먼지가 날려 우리나라까지 황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싶고, 저기에 인간의 힘으로 나무 몇 그루 심은들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다.

난주에 도착하니 전체 가이드 김창묵씨와 난주 가이드 허동식씨가 우리를 맞이한다. 시간이 늦어 부지런히 백탑사(百塔寺)를 보러 갔다. 막 문을 닫으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어두컴컴한 백탑사로 올라갔다. 백탑사 꼭대기에 올라가니 7층 높이의 하얀 탑이 서 있고, 발 아래로는 어두운 황하에 밝은 조명으로 모양 낸 황하대철교가 걸려 있다. 허동식씨는 우리들이 밤에 황하를 보게 되어 흙탕물이 잘 안 보이니 다행이라고 했다.

▲ 가욕관 박물관.
어두운 백탑사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오니 아뿔싸 문이 잠겨 나갈 수가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이 사람 키 세 배는 되어 뛰어내릴 수도 없다. 돈 받고 넣어줄 때는 언제고, 나가지도 않았는데 문을 잠그는 법이 어디 있나. 기가 차서 마냥 서 있는데 가이드가 관리실에 찾아가 이야기하니 다른 쪽 출구로 나가는 문을 열어준다.

부지런히 나와 이번에는 황하모친상(黃河母親像)을 보러 갔다. 중국에서는 황하를 어머니로 보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황하의 자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황하모친상은 누런 조명을 받고 누워 있는 여인의 곁에 아기가 엎드려 있었는데,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본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 카사의 위구르족 여인들.
저녁 식사 후 난주역으로 가서 가욕관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4인 1실의 2층 침대차였다. 임양숙씨와 나는 밑의 층에 눕고 날쌘돌이 조수경씨와 조연옥씨가 2층으로 올라갔다. 덜거덕거리는 열차에 누워 있다 보니 요람에 누운 어린 아기 같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10월14일 맑음. 가욕관. 아침 8시쯤 가욕관역에 내려 인원을 점검하니 4명이 없다. 먼저 나갔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나가려는데 김 사장이 역무원에게 부탁해 떠나려는 열차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서야 정원식, 임경희, 우정복, 윤영자씨가 짐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내리라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다. 우리는 아찔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진벽화묘(魏晋壁畵墓)를 보러갔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돌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니 부부합장묘 안쪽 벽에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소, 멧돼지, 닭 등을 잡는 모습도 있고, 요리하는 모습, 뽕나무의 새를 쫓는 모습 등 일상생활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몇 백 년을 지난 그림 같지 않게 선명한 색깔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 투루판시장의 건포도 선별작업.
다음에는 가욕관성(嘉欲關城)을 보러 갔다. 여러 개의 성루와 망루가 잘 보존되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관아 건물에는 작전지시를 하는 장군의 모습, 졸고 앉아 있는 관리의 모습, 몸단장을 하는 여인의 모습 등을 만들어 그 때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욕관성에서 나와 현벽장성(懸壁長城)이라고도 하고, 단벽장성이라고도 하는 만리장성 끝자락을 보러갔다. 갈 길이 머니 조금만 올라갔다가 돌아오라는 것을 30분만에 정상의 성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정말 빠르다며 가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가욕관 관광을 마치고 오후 3시가 넘어 돈황으로 출발했다. 돈황까지는 포장도 안 된 고비사막의 흙먼지 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무슨 화물차들은 그리도 많은지 이 육중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10m 앞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옛날에만 물류의 중심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길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9시간 이상 달리려니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뻐개지는 것 같다. 길에는 당연히 화장실도 없어 수시로 노상방뇨를 일삼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차 타고 가기도 이렇게 힘든데, 이런 길을 몇 달씩이나 낙타 타고 다녔을 옛 상인들을 생각하니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싶다. 실크로드는 비단결같이 아름다울 줄 알았더니 아주 사람을 잡는 길이었다. 그래도 가는 도중 이종성님이 고비사막 노래를 불러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됐다.

▲ 필자 이현숙씨.
날이 어두워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돈황국제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다 됐다. 돈황국제호텔은 별이 세 개라는데 어찌나 추운지 이게 별 세 개면 열차는 별 다섯 개짜리라고 툴툴대며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는 잔뜩 웅크리고 고양이 잠을 잤다.

10월15일(토) 맑음, 돈황.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날을 새우고 아침 일찍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鳴沙山)이란 모래로 된 산인데, 밟으면 모래의 마찰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난생 처음 낙타를 타려니 좀 겁이 났지만 남들도 다 타는데 못 타랴 싶어 안장 앞의 손잡이를 잔뜩 부여잡고 낙타 등에 오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까불더니 낙타가 일어섰다.

일단 일어서니 별 어려움 없이 명사산 밑에 도달해 거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올라갈 사람은 20원을 내고 올라가 썰매로 내려오고, 걸어 올라갈 사람은 모래산을 그냥 올라갔는데 한 발짝 올라가면 두 발짝 미끄러지니 할 수 없이 손가락을 모래에 꽂으며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햇볕을 받지 않은 모래는 어찌나 차가운지 장갑을 끼어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끄러지며 고꾸라지며 능선 부근까지 오르니 난생 처음 보는 모래언덕이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 투르판의 우구르족 소녀들.
능선길을 걷다가 대장님을 따라 모래언덕을 뛰어내려왔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스릴이 있었다. 반쯤 내려와 썰매 타는 곳에 와서 대장님의 탁월한 능력 발휘로 5원씩에 썰매를 타고 눈썰매보다 더 빠르게 내려왔다. 명사산 아래쪽에는 월아천(月牙泉)이라는 작은 오아시스가 있고, 초생달 모양의 호수 주위로 나무도 있고 멋진 집도 있었다. 이 호수는 모래산에 둘러싸여 수천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신비한 샘이다.

월아천에서 낙타를 타고 다시 나와 호텔에 와서 샤워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우정복님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장님과 김사장님은 얼굴이 일시에 사색으로 변하고 회원들에게도 먹구름이 내렸다. 명사산에서 내려와 사진을 찾을 때 많은 중국인들과 섞이면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대장님은 명사산 관리소에 전화를 하여 한국 여권 주운 사람이 있으면 특별히 사례하겠다고 연락하고, 돈황 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우정복님과 김사장은 둘이서 대사관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정복님을 보는 회원들은 여기서 아주 이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 투르판의 화염산을 낙타로 오르고 있다.

사막 사람들에게는 물 위 세상이 극락세계

돈황 박물관에 도착하여 보는 둥 마는 둥하고는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수많은 동굴로, 굴마다 부처님과 벽화들로 가득했다. 이 굴들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스님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굴을 파고 그 속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근 천 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벽화에 그려진 극락세계가 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들이 생각한 극락은 물 위에서 마음껏 물 마시고 물을 물 쓰듯 하며 사는 세상이었나 보다. 특히 17굴에는 대량의 불경과 도경, 비단 그림, 수공예미술품 등 4세기에서 14세기까지의 문화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도굴꾼들이 자기 나라로 반출해 가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는데, 프랑스인 페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가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 명사상의 월아천.

이렇게 불상과 벽화를 보고 있는데 우정복님과 김 사장님이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대사관 직원이 다시 나와 임시통행증을 발급해줘 같이 관광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우정복님을 다시 만난 우리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듯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막고굴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유원역으로 이동해 투루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오늘은 5성급 호텔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다고 기뻐하며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한 후 조금 갔는데 대장님이 우정복님 여권을 찾았다고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다니셨다. 어디서 찾았나 했더니 우정복님 트렁크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해프닝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하며 덕분에 여권 단속 확실하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마음 편히 자리에 누웠다.

10월16일, 투루판. 아침 5시 반쯤 투루판역에 내린 우리는 머릿수를 몇 번씩 세어본 후 30명이 무사히 내린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식사를 하고는 고창(高昌) 고성으로 이동, 당나귀차를 타고 성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창고성은 고대 고창국의 성터인데,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13세기경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성벽과 불탑이 겨우 남아 있을 정도였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그 때의 번성을 짐작케 할 뿐이다. 남아 있는 성벽을 바라보니 이곳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그 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지금과 같이 생을 고민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이라도 그 때의 사람이 벽 뒤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난주의 황하 모친상.

고창고성에서 나와 아스타나 고분을 보러 갔는데,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란다. 여기에는 귀족의 묘, 상인의 묘, 평민의 묘가 있었는데, 평민인 부부 묘에는 부부의 미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자는 40대에 폐결핵으로 숨졌고, 여자는 70대에 숨졌다는데, 어떻게 폐결핵이란 것까지 알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다음은 화염산 북쪽 강 절벽에 있는 천불동으로 갔다. 83개의 동굴이 있었다는데, 현재 57개만 남아 있었다. 동굴 속에는 역시 불상과 벽화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불교를 우상으로 생각하던 이슬람교도의 진입으로 많이 훼손되고, 근세에 와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사람 등의 도굴로 많은 불상과 벽화가 해외로 반출되고 대신 사진만 걸어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굴을 보고 나서 뒤의 타는 듯한 화염산(火焰山)을 보자 대장님이 충동심이 발동하여 가이드에게 1시간만 달라고 했다. 산을 오를 사람은 올라가고 낙타를 탈 사람은 타고 희망대로 하라고 하여 대장님과 정원식님, 이포규님, 안순자님, 나, 임양숙씨 이렇게 여섯 명이 붉은 흙과 모래로 된 화염산으로 기어올랐다.

보기에는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저기가 끝인가 하면 또 봉우리가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없는 능선을 걸으며 양옆을 바라보니 한쪽은 강이요 한쪽은 빙하가 쓸고 간 듯한 거대한 모래 협곡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길을 가노라니 이 길을 따라가면 이대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 돈황 막고굴 입구. 근 천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

화염산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인데, 서유기에서 우마왕의 집이기도 했단다. 화염산은 이름 그대로 생긴 것도 불꽃 모양이고, 색깔도 불꽃 색깔이고, 여름에는 55℃까지 올라가는 불의 산이란다. 정상에서 깃발까지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오는데, 대장님은 오른쪽 모래 계곡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시고 여자들은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다들 달려 내려가고 무릎과 발가락이 시원찮은 나는 제일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는데 임양숙씨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천천히 보조를 맞춰 주었다.

화염산에서 내려와 교하고성(交河古城)으로 향했다. 교하고성은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다. 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번성했다가 멸망한 교하국의 성이란다. 교하고성은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 벼랑을 위에서 아래로 파들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는 지층이 그대로 남아 있고, 벽돌로 쌓은 고창고성처럼 허물어지지 않아 많은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번성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이토록 폐허로 변했는데, 중국 귀퉁이에 코딱지만 하게 붙어 있는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생각할수록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무상, 나라무상이란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 가욕관의 `찬하웅광` 앞.

고성을 돌아 다시 나오는데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영화촬영 중이란다. 무슨 영화인지 몰라도 나중에 혹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꼭 봤으면 좋겠다.

교하고성에서 나와 카레즈(Karez)를 보러갔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빙하 녹은 물을 끌어들여 만든 수로다. 땅 밑에 수로를 만들고 거기까지 우물을 파서 나무도 심고 식수로도 활용하게 되어 있었다. 카레즈에 이어 찾은 소공탑(蘇公塔)은 신강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했다. 회교사원 탑이었는데 여자들은 사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나아져서 벽쪽에 있는 방 같은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날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관광을 끝내고 밥을 주는 것이 우리 대장님의 철칙이라면 철칙이다. 밥은 굶어도 볼 것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니 덕분에 우리는 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한다. 저녁식사 때 본 위구르 민속 쇼는 규모는 작았지만 정감이 가는 쇼였고, 끝판에는 박남철님, 이인섭님, 김영자님, 장계희씨까지 끌어내어 한바탕 몰아쳤다. 쇼 뒤를 이은 노래자랑에는 일중의 명가수가 총출동했다. 이순정님을 시작으로 김숙옥, 윤영자, 이정자님 등이 나와 노래했고, 이정자님이 노래할 때는 남편 되는 이인섭님이 같이 나와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웃음바다가 됐다. 보통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인데, 이분들은 婦唱夫隨였다. 하여튼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팀이다.

새벽별 보기 운동으로 시작되는 답사여행

▲ 투르판의 화염산 낙타투어. 절벽을 이룬 북쪽 강기슭(천불동)에도 불상과 벽화가 있는 동굴들이 있다.

10월17일, 우루무치. 아침에 일어나니 이 날도 양숙씨가 토마토 주스를 마시라고 준다. 매일 주스에 과자에 다시마에 대추에 해바라기씨에 껌까지 얻어먹으니 미안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부실한 줄 알고 대장님이 항상 짭짤한 룸메이트를 짝지어주시니 해외만 나가면 호강이다. 난생 처음 오만 가지 음식이 다 들어오니 내 위장이 엄청 감동 먹었을 거다.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아침식사를 하러 옆 건물로 가는데 오리온좌가 떠 있었다. 대장님에게 저 사각형의 별 속에 삼태성이 나란히 있는 것이 오리온자리라고 일러드렸더니 오리온 말만 들었지 처음 알았다고 기뻐하신다. 중학교 과학선생을 32년 했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뻑하면 나서게 된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곳곳에서 어젯밤 11시 반이나 되어 마사지 받으라고 전화 와서 잠들을 못 잤다고 아우성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자들이 있는 방에만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정원식님 방에도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아마 정원식이 남자인 줄 알았나 보다. 그리고 안순자님 방에는 남자가 있는데도 전화가 안 왔다는 것이다. 남편 이름이 최영주라서 여자인 줄 안 모양이다. 하여튼 이름 하나는 잘 지어야겠다.

이 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루무치로 출발했다. 우루무치는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이란다. 가는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풍력발전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바람이 약해 풍차가 돌지 않았다.

우루무치 조금 못 가서 들른 남산목장에서는 말을 탔다. 옥룡설산이나 천호산의 조랑말은 작아서 겁이 안 났는데, 여기 말들은 다 컸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자기 말을 타라고 하기에 따라가 보니 백말이었다. 백말을 타고 보니 백마 탄 기사가 된 듯 기분이 우쭐우쭐했다. 생각할수록 이현숙 정말 출세했다. 처음에는 45분을 태워준다고 하더니 타는 시늉만 내고 20분만에 내리라고 한다. 김창묵씨가 항의하여 더 탈 사람은 다른 쪽으로 더 돌았는데 우리가 말고삐를 가이드 앞에 놓으면 고삐 임자에게 돈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 아줌마들이 고삐를 마구 갖다 놓는 바람에 인원이 30명인데 고삐는 40개가 됐다.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데 정말 치열한 생존경쟁을 실감케 했다.

▲ 천불동 낙타투어의 주인공 쌍봉낙타.

우루무치에 도착해 홍산(紅山)공원에 올라갔다. 정상에 빨간 벽돌로 된 탑이 있었다. 진룡탑(鎭龍塔)이다. 옛날 이 지방에 홍수가 자주 나서 피해가 컸는데, 한 관리가 낮잠을 자던 중 꾼 꿈에서 도사가 나타나 홍수가 나는 것은 용의 조화이니 홍산과 그 옆의 야마리크산 사이에 탑을 세워 용을 진정시키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 탑을 세웠더니 그 후로 비가 잘 안 온다고 한다.

홍산공원에서 나와 천산 천지(天山 天池)를 보러갔다. 천지는 백두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천지가 있는 모양이다. 원래는 천지 밑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관광객이 많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하이브리드카를 타고 올라갔다.

천지에 도달하니 맑고 푸른 물 위에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이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유람선을 타고 천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호 선생은 여기 찍으랴 저기 찍으랴 이 사람 찍어주랴 저 사람 찍어주랴 정신이 없다. 카메라도 좋고 ‘찍사’도 좋아 사진이 기막히게 나오니 너도나도 찍어달라고 야단이다. 한 번 여행 갔다 오면 사진 값만 100만 원 넘게 나온다는데, 매번 공짜로 주니 언제나 이 신세를 다 갚으려나 모르겠다. 그저 하시는 사업이 잘 되어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천지에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려 했다. 위구르 박물관이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허둥지둥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는데 하도 차가 막혀 꼼짝하지 않는다. 걷는 게 더 빠르겠다며 버스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어가니 막 문을 닫으려고 한다. 사정해서 들어가니 불까지 다 끄고 문도 잠갔다가 다시 불을 켜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박물관 속에는 여러 민족의 고유의상, 그림, 생활용품들이 있었는데, 다리미는 옛날 우리나라에서 숯을 넣어 쓰던 것 하고 똑같이 생겼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아기 요람이었는데, 요람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기들 오줌 받아내는 구멍이란다. 누워 있는 아기 고추에 ㄱ자 형태의 나무대롱을 끼워 밑으로 내려가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저귀를 채우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 것 다 보고 저녁에는 또 민속쇼를 보며 식사하는 곳에 갔는데, 안순자님 내외가 거금 300달러를 내어 한 턱 쐈다. 쇼도 화려하고 음식도 푸짐했는데 신나게 먹다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화장실 표시가 없어 일하는 아줌마에게 토일릿이라고 해도 모르고 더블유씨라고 해도 몰라서 할 수 없이 쉬이~ 했더니 단박 알아듣고 저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준다. 하여간 어줍잖은 영어보다는 바디랭귀지가 최고다.

10월18일, 카시.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해 카시로 향했다. 카시의 원래 이름은 카슈가르. ‘옥석 같은 땅’이란다. 이번 여행은 연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었다. 별 보고 출발하여 별 보고 호텔에 들어오니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보다 더 하드 트레이닝이다. 인도에서 귀국하던 당나라 현장법사도 이곳에 들렀는데, 그 때도 꽃과 과일이 풍성했다고 한다.

▲ 우루무치 민속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현지인.
실크로드는 이곳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천산산맥의 북쪽을 지나는 천산북로, 천산남로,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지나는 서역남로가 그것들이다. 그래서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컸는데, 기본 70%는 깎아야한다고 한다.

카시공항에 내리니 오전 8시 반이 되었는데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중국은 전체가 북경을 표준시로 잡기 때문이란다. 대장님이 주신 지도를 보니 카시가 북위 39도쯤 됐다. 우리나라도 38도선 부근이니 위도는 비슷한데 북경과의 경도차 때문인 것 같다. 북경은 동경 약 115도이고, 카시는 동경 75도밖에 안 되니 40도 차이면 1시간에 지구가 15도 자전하니까 약 2.7시간이 늦는 셈이다. 그러니 신강자치구 시간으로는 6시도 안 된 것이다.

공항에서 곧 바로 아이티카 청진사(淸眞寺·이슬람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보러갔다. 청진사는 신강자치구에서 가장 큰 청진사라고 했는데, 들어갈 때는 여자 남자가 팔짱을 낀다거나 짧은 팔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하기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 길거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집어쓰고 다니는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얼굴까지 시커먼 머플러를 썼는데 어떻게 앞이 보이는지 잘도 걸어 다녔다.

신을 벗고 청진사 안에 들어가니 예배시간이 아니어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벽에는 현재 시각을 알리는 시계와 예배시간을 알리는 6개 시계가 걸려 있고, 예배를 주관하는 아홍(위구르족 이슬람 승려)이 앉는 의자와 큰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이 카펫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 했다.

사원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려고 ‘WC’라고 쓴 곳으로 갔더니 한 남자가 못 들어가게 한다. 여자 화장실은 아예 없고 남자 화장실만 있는데 그것도 돈을 내야한다기에 대장님도 그냥 돌아오셨다. 속으로 ‘에라이~, 여기 아니면 화장실 없냐?’ 하며 돌아나왔다. 하여튼 회교국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청진사에서 나와 위구르 시장 거리를 구경했다. 푸줏간에, 대장간에, 과일가게 등등 우리나라 옛날 장터 같았다. 포도가 어찌나 싼지 1kg에 2원(우리 돈으로 280원)이었다. 우리는 포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 카시의 향비묘. 북경서 자살한 시신을 3년 반에 걸쳐 운구해 봉안한 묘다.

베이징서 자살한 향비의 시신 3년 반 걸려 운구

시장 구경을 마치고 향비(香妃)묘로 향했다. 향비는 카시 여자로서, 이 지역 귀족의 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 때 한 장군이 카시를 점령하면서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에 향비는 정혼한 사람이 있어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황제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황태후가 그녀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하자 별실에서 자살케 했다고 한다.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서 향비라고 했다는데, 그녀의 죽음을 안 카시 사람 124명이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베이징에서 시신을 운구한 다음 이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향비묘로 들어가니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는 듯했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고 왕비묘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다 똑 같은데, 어떤 사람은 쓰레기처럼 땅에 묻히고 어떤 사람은 온갖 장식으로 뒤덮인 건물 속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록 뭇 세인의 애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비묘에서 나와 1인당 30위엔씩 내고 고택민가를 보러갔다. 2000년 전부터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며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만들었다는데, 현재의 집들은 400~500년 된 집이라고 했다. 이 집 저 집 들어가 봤는데 마침 아기 젖 먹이는 여자도 있고 대문에 걸터앉아 모자를 만드는 여자도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니 어제 박물관에서 본 것과 같은 요람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도 있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가 구경하는 것이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투르판의 고창고성. 13세기 이슬람국의 침입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택민가에서 나와 찾은 바자르는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과 흡사했다. 그런데 한 아홍이 흰 터번을 두르고 어떤 여자를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곤 했다. 여자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반항도 안 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회원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여러 가지를 샀는데 다들 깎는 데 도사가 됐다. 180원인가 하는 스카프를 30원에 달라고 떼를 쓰니 안 된다고 그냥 가라고 마구 손짓을 한다. 그냥 가려고 하니 “last price! last price!” 하며 35원 내란다. 그래도 안 사고 가는 시늉을 하니 붙잡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은 안 되나 보다고 다시 가서 아홉 개씩 열 개씩 사가지고 버스로 돌아왔다. 기막힌 신경전인데, 신경전에서 지면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다.

바자르에서 나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 먹고 나오는데 어떤 중국 여자가 우리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KOREA’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통 모르겠다. 가이드 김창묵씨에게 물으니 자기가 TV 드라마 대장금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고 한국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도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한국의 위상을 엄청 높인다는 생각이 들고 공해 없는 이런 사업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이 남편 생일이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비즈니스룸에 들어가 무조건 “telephone” 했더니 전화기를 가리키며 쓰라고 한다. 남편에게 아침에 뭐 좀 드셨냐고 했더니 아들 며느리가 아침밥을 해 와서 잘 얻어먹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 덜 미안했다. 남편 생일도 안 챙겨주고 뭘 보겠다고 이러고 다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갈수록 자연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 모습이 갈수록 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현숙 일중산악회 회원

Posted by 동봉
,

실크로드 - 영원으로 통하는 길

아시아 내륙을 가르는 실크로드 횡단은, 유목민의 기질을 가진 한 남자에게만 매력적인 여행은 아니다. 수평선 위로 춤추듯 부유하는 사막과 지구 계면을 연상시키는 화염산...
(2005-07-18)
글 사진 = Travie Photographer 박규민 / idtomato@hanmail.net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아시아 내륙을 가르는 실크로드 횡단은, 유목민의 기질을 가진 한 남자에게만 매력적인 여행은 아니다. 수평선 위로 춤추듯 부유하는 사막과 지구 계면을 연상시키는 화염산, 수천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침잠된 천산 천지를 관조하는 일은, ‘나’를 잊고,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대해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2005년 6월14일, 서울 출발-우루무치 도착

실크로드…잠을 못 이루다

상하이나 베이징으로의 여행이었다면 마음이 좀더 가벼웠을지 모른다. 유적지를 감상하거나 힙한 거리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플래그 숍을 구경하며 중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잠재적 가치 따위를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내 앞에 펼쳐질 곳은 아시아의 역사, 종교, 문화의 교착지인 거대한 실크로드다.

실크로드로 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루무치’라는 도시를 거쳐야 했다. 몽골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의 우루무치는 천산천맥(天山山脈)으로 둘러싸인 고원으로 해발 900m에 위치한 신강성 위구르족(몽골리아 터어키스탄 부족) 자치구의 수도이다. 우루무치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1시.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를 가로질러 하룻밤을 묵게 될 미려화 호텔에 짐을 풀고, 지친 몸을 뉘였다.

6월15일, 우루무치 관광

현대화 물결에 길을 잃다

우루무치는 실크로드를 잇는 도시들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케 하지만 어엿한 시가지가 형성돼 있고, 관광객들을 위해 다양한 관광 상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우루무치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남산 목장.’ 우리나라로 치자면 제주도의 풍광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를 따지자면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남산 목장에서는 미끈하게 뻗은 근육을 자랑하는 몽고산 토종 말을 탈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신강성 박물관 역시 빠뜨려서는 안 될 관광지. 고대에 빚어진 도자기를 비롯한 유적들과 수천 년 동안 보존되어 온 미이라를 감상하면서 중국의 역사를 한눈에 읽어 본다.

고작 두 곳을 경유했을 뿐인데도 어느 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친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우루무치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다는 발 마사지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다음 행선지인 돈황으로 떠났다.


6월16일, 명사산-월아천-막고굴

인생…가짜 같은 진짜, 진짜 같은 가짜

오늘부터는 실크로드의 실체와 본격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 출발은 명사산(鳴沙山)에서 시작됐다. 명사산은 바람에 모래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 돈황에서 7km쯤 떨어진 수십 미터 높이의 모래산이다. 끝이 없이 펼쳐진 금모래산과 금모래벌판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정도다. 이 산은 인간의 힘으로 걸어서 등반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낙타와 모래 썰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낙타의 느린 걸음을 따라 천천히 명사산 자락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신기루처럼 한 점 푸른 빛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달의 어금니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월아천(月牙泉)’이다. 가이드는 바람이 월아천 자락에서 명사산 산등성이를 향해 거슬러 불기 때문에 산 아래 월아천에는 모래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귀뜸해 주었다. 모래 사막을 지나 작은 뜰을 지나 몇 그루의 고목이 서 있고, 초승달처럼 어여쁜 호수가 찰랑거리고 있다.

가이드의 말처럼 호수 주변에는 모래 바람이 일지 않았다. 분명,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자락은 모래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데 말이다. 모래 산을 정복하느라 일행은 온몸에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고, 우리는 잠시 호텔로 돌아가 몸을 씻은 후 다음 행선지인 돈황의 막고굴로 향했다.

돈황은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 중국과 중앙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자 동서교역의 거점지였다. 물론 지금은 그 옛날 번창했다던 돈황 도시는 사라졌지만 한 가지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막고굴.’

막고굴은 서기 366년 한 승려가 산에 빛이 있음을 느끼고 그곳을 성지로 정한 뒤, 굴을 파기 시작해 형성된 것이다. 삼위산과 명사산이 좁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는데, 거기에 작은 오아시스들이 푸른 띠처럼 놓여 있고, 그 절벽 사이로 1,600m 길이로 막고굴이 형성돼 있다. 막고굴 안에는 그야말로 방대한 문화 유산이 보존돼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벽화다. 총 1,045폭의 벽화 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당나라 때 유행한 서방정토변(西方淨土變)인데, 이는 극락을 나타낸 아름다운 회화다. 막고굴 벽화 앞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할 말을 잃게 마련이다. 거대한 모래성 안에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벽화는 세계의 그 어떤 문화 유산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랍다.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맑고 순화된 영혼의 집이자 미래를 향한 지고지순한 꿈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막고굴은 올해까지만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내년부터는 문화재로 보호될 예정이란다. 그렇다고 막고굴을 영영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방대한 막고굴을 그대로 복원해낸 가짜(?) 박물관이 이미 개관했기 때문이다.


6월17일, 트루판-화염산-고창고성

극락을 염원하는 마음

어제 새벽은 기차에서 눈을 붙였다. 유원역에서 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투르판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해돋이 풍경은 바닷가에서의 그것보다 장관이었다. 검은 지평선 위로 검은 불덩이가 솟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땅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6시간을 달려 도착한 트루판은 위그르어로 ‘파인 땅’을 뜻하며 해수면보다 280m가 낮은 분지로 섭씨 47.5도, 지표온도 섭씨 70도의 열을 느낄 수 있다. 그곳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화염산(火焰山)이었다. 화염산은 투루판 분지 중북부에 위치한 해발 50m의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마치 불타는 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자면 산 전체가 불에 이글이글 타고 있는 듯하다. 화염산의 그늘이 채 따라오지 않은 북쪽 강 절벽 기슭에는 큰 벌집을 연상시키는 구멍들이 보인다. 바로 천불동(千佛洞)이다. 6세기 고창왕국 때부터 9세기에 걸쳐 위그루족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된 석굴 촌락인 천불동에는 약 83개의 석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57개만 남아 있다. 극락으로 가고 싶은 염원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석굴 안에도 역시 수많은 벽화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반면 트루판 남동쪽에 남아 있는 고창고성은 모두 풍화되고, 붉은 흙더미만 폐허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에도 내리 쬐는 햇볕 아래서 관광객을 위한 노새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 이 마차를 타고 고창고성을 둘러볼라치면 어느 새 위그루족 아이들이 작은 손을 흔들며 물건을 팔아 달라고 뒤쫓아 온다. 그들은 고창왕조의 후예들로 관광객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고 광막한 폐허를 벗어났다.


6월18일, 카레스-포도밭-우루무치

환영과 환각 그리고 현실의 땅

이번 실크로드 기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마지막 날 돌아보게 된 카레스(지하 수로)다. 고대 중국인들이 지열 때문에 산 정상까지 물을 공급하기 힘들자 땅을 파고 그것을 연결해 지하 수로를 만든 것이다. 카레스는 땅굴처럼 크고 넓었다. 그곳에는 무릎 높이 정도의 물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고, 물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찼다. 가로 세로로 치밀하게 연결돼 있는 지하 수로는 트루판에만도 300군데도 넘는다고 한다. 이 물을 끌어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

카레스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자 광장에는 재래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주요 상품은 지역 특산물인 다양한 색깔의 건포도. 건포도의 종류는 족히 10여 종이 넘었으며, 모양새와 맛도 조금씩 달랐다. 투루판의 포도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포도를 키우기 위해서 포도밭에 거미줄처럼 수로를 깔고 물을 댔을 정도로 벼농사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 농사였다. 투루판의 포도밭 단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어 그 안에 들어서면 미아가 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느지막이 모처럼 마지막 여정을 느끼며 야시장에 들러 식사를 한 후 서울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전히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실크로드. 그 옛날 동, 서양의 유일한 문명의 통로였으며 환영과 환각이 둘러싸인 신비의 땅. 나는 그곳에서 나를 유혹하는 신기루를 보았으며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