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실크로드의 요충지 우루무치

40개국 기업들 집결한 국제물류 중심지

≫ 만년설로 덮인 톈산 산맥의 봉오리들이 구름 사이로 보이고 있다. 톈산 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우루무치는 쿠처에서 하늘길을 이용해 가려면 이렇게 높다란 톈산을 지나야 한다. 이윽고 몽골어 ‘아름다운 목장’ 이란 뜻의 우루무치가 나타난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문명의 명멸 역사이며, 그 중심에는 늘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피를 공급하는 심장과 그 공급로인 혈관의 관계처럼, 도시의 성쇠에 따라 길의 여닫임이나 소통이 결정되곤 한다. 옛날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고, 낙타 등에 업혀 사막을 지나며, 돛배에 실려 바다를 가르던 그 전통적 실크로드 시대에는 물론이거니와, 기차와 기선, 비행기로 지구가 땅·바다·하늘의 입체적 교통망으로 뒤덮인 오늘의 신실크로드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실크로드와 도시의 관계는 서로 맞물리는 변증법적 관계다. 그러한 관계의 역사적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보통 쿠처에서 카슈가르로 서행하는 오아시스로 답사의 상궤(常軌)를 벗어나 딴 길로 찾아간 곳이 바로 신흥 도시 우루무치다.

1884년부터 우루무치는 신장의 심장부로서 톈산 이북 초원로의 관문이 됐다

7월24일 오후 2시40분, 타림분지의 뜨거운 지열이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속에 우리 일행을 태운 서북항공 소속 40인승 소형 비행기는 사뿐히 쿠처공항을 이륙했다. 곧바로 기수를 동북쪽으로 돌리자 만년설을 머리에 인 중중첩첩의 텐산 산맥 묏봉오리들이 손에 잡힐 듯 발 아래로 스쳐지나간다. 동전닢 만한 오아시스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이윽고 듬성듬성 숲이 우거진 초원 한가운데 햇빛에 번뜩이는 고층건물과 공장 굴뚝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곧 우루무치다. 공중에서 봐도 현대적 면모를 갖춘 신흥 도시임을 이내 알 수 있다. 여기까지 비행에는 한 시간 10분이 걸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고산 초원지대라서 그런지 기온이 30도를 약간 웃돈다. 여러 날 50도에 가까운 열사 속을 누비며 부대끼던 우리에겐 사뭇 시원하게 느껴졌다.

915m 고산의 ‘아름다운 목장’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의 우루무치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로서 텐산 산맥의 북쪽 기슭, 우루무치강안의 해발 91의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준가리아 분지의 서단 초원지대로서 여러 종족계통의 유목민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전한이 타림분지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 둔황에서 하미를 통하는 이른바 텐산북도가 뚫려 이곳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7세기 이곳에서 동쪽으로 130km 떨어진 정주(庭州)에 북정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다. 당시 이곳은 윤태현(輪台縣)의 소재지였다. 8세기 중엽 당세력이 물러나자 위구르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약 천년 동안은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

≫ 우루무치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구도로써 해발 915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50도를 웃도는 투루판과 쿠처 등과는 달리 고산 초원지대인 우루무치는 서늘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와 영국 등 서구세력들의 눈독과 만청의 서진정책은 더 이상 이러한 ‘무풍’을 허용하지 않았다. 18세기 중엽에 청나라는 준가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텐산 남쪽 기슭의 카슈가르 칸국을 병합하고, 우루무치에 안서제독을 주둔시키면서 이름도 ‘이끌어 깨우치게 하다’라는 뜻의 ‘적화’(迪化)란 비칭으로 바꾸고, 회교를 배척하는 정책도 단행했다. 이에 격분한 무슬림들이 19세기 중엽 대규모 반청독립운동을 일으켜 일시 우루무치를 장악했다. 당황한 청정부는 흠차대신(欽差大臣) 좌종당(左宗棠)을 급하해 무력으로 이 운동을 진압하고, 1884년에는 준부(準部)와 회부(回部)를 합쳐 신장성을 만들고 우루무치를 성도로 삼았다. 이때부터 우루무치는 신장의 심장부로서 텐산 이북의 초원로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4년 위구르족과 카자흐족이 주동이 되어 쿠처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지만 얼마 못 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군이 진주해 정권을 넘겨받은 후 1955년에 지금의 위구르자치구를 설립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고 거리 이름부터가 신식 느낌을 주는 해방로와 인민로가 교차하는 남문 바자르(시장)로 향했다. 거리엔 형형색색의 얼굴이나 옷 모양을 한 사람들로 붐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에는 위구르족말고도 카자흐, 타지크, 회족, 한족, 몽골족 등 13개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실로 ‘민족의 십자로’란 말을 실감케 한다. 그만큼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나 1906년 3만9천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208만명으로 무려 53배나 늘어난 셈이다.

다음날, 우리는 신장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사전에 연락이 있어 이 박물관 연구원인 쟈잉이(賈應逸, 여) 교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쟈 교수와는 1년 전 한국 중앙아시아연구회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만나 안면을 익혔다. 박물관은 10월1일 개관 50주년을 앞두고 신관 신축공사가 한창이어서 전시실은 일부만을 공개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쟈 교수의 친절한 안내 속에 전시품들을 돌아보고 대략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자치구의 종합 박물관으로서 구내 주요 출토품들은 거의 다 모아 전시해놓고 있다. 소장품만도 3만 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관심거리는 문명교류와 관련된 유물들인데, 그 양이 적지 않다. 하미에서 출토된 두 귀 달린 채도항아리를 비롯해 페르시아계 유리그릇, 알타이계 구리솥, 시베리아계통의 토기, 북방계의 석관묘 등이 그 대표적 유물들이다. 눈길을 끈 것은 누란에서 출토된 ‘잠자는 미녀’를 비롯한 여러 점의 미라다. 이 미라에 관해 쟈 교수는 이집트 미라는 약물처리를 한 것이나, 신장 것은 자연건조된 것이므로 응당 구별해서 ‘건사’(乾死)라고 이름해야 한다고 일리 있는 주장을 한다.

≫ 쿠처에서 타고온 비행기에서 바라본 우루무치 시내의 모습.

100년새 인구 53배 늘어 200만명

돌아오는 길에 시 중심에 자리한 훙산공원 앞을 지났다. 붉은색 암괴로 이루어진 산이라고 해서 ‘훙산’(紅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해발 1391m 높이의 산 정상에는 우루무치의 상징이라고 하는 9층 진룡탑(鎭龍塔, 1788년 세움)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이 산은 한 마리의 용이었는데, 우루무치에 대홍수를 일게했음으로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화나서 머리 위에 탑을 세워 용을 진압했다고 한다. 그 탑이 바로 이 진룡탑이라는 것이다. 서왕모의 전설은 여기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10km쯤 떨어진 텐산 산맥의 두 번째 고봉인 보고타봉(博格達峰, 해발 544)의 중턱(해발 1980m)에 있는 고산호 천지에도 그녀에 관한 애틋한 전설이 깃들여 있다. 둘레가 11km나 되는 이 천연호수는 우리네 백두산 천지보다는 작지만, 이름도 같거니와 다 같이 성산으로 추앙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호수는 서왕모가 목욕하는 곳이고, 그 동서에 있는 작은 못 두 개는 발을 씻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3천년 전 주나라 목왕(穆王)이 여덟 필 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쪽 지방을 주유할 때 서왕모가 성대한 환영연회를 베푼 장소인 요지(瑤池)가 바로 이 천지라고 한다. 이렇듯 이곳 우루무치는 신성한 기운이 서린 고장이다.

한국 기업들·한글학교 ‘한류’ 구심점

≫ 우루무치 시가
그러기에 오늘은 백년 전 서양 탐험가들이 ‘찌들대로 찌든 지저분한 거리’라고 묘사했던 치욕을 말끔히 가셔내고 일약 현대적인 신흥 도시로 발돋움한 것이다. 석유와 석탄, 철광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갈무리하고, 강철과 전력, 시멘트와 방직 등 중공업과 경공업의 여러 분야를 두루 망라하고 있으며, 여기에 사통팔달된 교통망을 겸비하고 있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도는 물론, 이미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까지 잇는 철도가 개통되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해 주변 8개국과의 항공로도 일찌감치 열리고 있다. 해마다 20조원 이상이 투자되는 서부대개발사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우루무치는 올해 12%의 고성장률을 기록한다고 한다. 이러한 굳건한 경제적 및 문화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지금 막 유럽까지를 겨냥한 국제물류센터를 건설 중이라고 한다. 그들의 야심 찬 구호는 ‘경제 실크로드의 선점’이다.

지금 우루무치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하는 수출의 기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미국과 일본 등 40여개 나라 1,300여개 회사가 진출해 이 기지를 차지하려고 앞다투어 경쟁을 벌이고있다. 우리 나라도 여러 기업들이 들어와 경쟁에 당당히 합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1년에 문을 연 ‘한글학교’는 우리의 문화홍보는 물론, ‘한류’를 이끌어가는 구심역할을 하고 있어 흐뭇하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실크로드, 즉 신실크로드가 잉태하고 있는 잠재력과 분출하고 있는 활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은 비단 우루무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일행이 따라가는 길의 곳곳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신장성의 주인들

아리안족 이어 7세기 위구르인 차지
한·카자흐·만주인 등 13개 민족전시장

≫ 우루무치 시내 남문 바자르(시장)에서 한 상인이 양고기를 굽고 있다.
실크로드 역사의 주무대였던 신장성(동 투르키스탄)에는 지금도 무려 13개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8세기 이후 지역의 주인공이 된 투르크 계통의 위구르족과 정치·경제적 실권을 쥔 한족을 비롯한 카자흐족, 회족, 키르키즈인, 몽골인, 타지크인, 타타르인, 만주인, 투르크멘인,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으니 가히 민족 전시장이라 이를 만하다. 공용어는 중국어지만, 각 민족들의 언어 또한 각기 달라 신장 지역은 여전히 복합 문화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2000여 년 전 동 투르키스탄 민족구성이 오늘날과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위구르족이 다수인 현재와 달리 실크로드 교류사가 서막을 열었던 당시에는 둔황 부근부터 타림분지 일대까지 유럽, 인도, 이란인의 선조인 아리안계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서를 보면 기원전 2세기께 타림분지 일대는 이란·아리안 계 민족이 만든 50여 개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후대 실크로드의 지배권은 흉노족과 중국 왕조의 손아귀에 넘어가지만 이 지역의 고대 아리안 인들은 독특한 동식물 문양, 연주문 따위의 독창적 양식의 공예미술을 만들며 실크로드 교류 문화사의 여명기를 이끌었다. 일본의 실크로드사 권위자인 나가사와 가즈도시는 명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에서 “세계 고대사의 여러 변화는 중앙아시아의 아리안족이 곳곳의 원주민 문화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 계기를 만들었다”까지 단언하고 있다.

이후 실크로드 교류사를 발전시킨 민족은 흉노와 월지족이다. 실크로드 교역로를 개척한 장건의 서역행도 중국 간쑤 지방의 하서회랑에 있던 월지족과 이들을 파미르 고원 서쪽으로 쫓아내고 신장성 일대에 대판도를 구축한 흉노와의 민족 전쟁을 업고 기획한 것이다. 흉노는 중국의 비단을 얻어 파미르 서쪽 국가들의 물품과 교역하는 등 실크로드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고, 월지족은 이후 인도대륙에 쿠샨 왕조를 세워 불교를 서역과 중국에 전파하는 주역이 된다. 텐산산맥 북쪽에서 남하해온 투르크(위구르)인들은 뒤늦은 7~8세기 이란 아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실크로드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후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오스만·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 유럽대륙의 역사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천부적 상인이던 소그드인들 또한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고대 중세 실크로드 교류사에 큰 자취를 남겨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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