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막고굴이 간직한 힌국 문화유산


‘신라승탑’ 이라면? 혜초 입적지 예감에 전율

▲ 모래가 윙윙 운다는 밍샤산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도 2천여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은 오아시스. 초승달 모양을 닮아 월하천(웨야천)으로 불린다. 능선 넘어 멀리 지평선이 둔황 시가지다.

둔황의 밍사산(명사산, 鳴沙山)은 모래산의 날카로운 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신비의 해돋이가 일품이다. 이 장관을 보려고 새벽 6시 이전에 서둘러 둔황 시가 남쪽으로 4㎞쯤 떨어진 밍샤산 어귀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로 붐빈다. 밍사산은 불어대는 강풍에 무너져내리는 모래 소리가 산울림처럼 들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가 무려 1600여 미터나 되며 길이만도 동서 100리, 남북 50리나 되니 모래산 치고는 드물게 큰 산이다.

모래산 경사면에 기다랗게 드리운 나무계단을 타고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이윽고 사막의 아스라한 지평선 너머에서 금빛 햇살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모래 바람이 윙윙거리기 시작한다. 밍샤산은 제 등성이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는 모양이다. 멀리 푸른 물감으로 점 찍어놓은 듯한 둔황 시가지가 한눈에 안겨온다. 둔황 사람들은 단옷날 이 산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면 한해의 액을 면한다고 믿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믿음이 상술로 변해서인지 100여 미터 높이의 산 중턱에서 돈 받고 함지박 같은 미끄럼대를 빌려준다. 모래 바람 흩날리며 미끄럼 타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따로 없이 액땜에 신이 나는 모습들이다.

780년께 오대산 건원보리사란 절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

산 기슭에는 초승달 모양의 신비로운 월아천(月牙泉)이 고여있다. 2천여 년 전부터 기록에 나오는 이 월아천은 사막의 나그네들에게 마를 새 없이 마실 물을 대주는 천혜의 생명수다. 길이가 동서 224m, 남북으로 최대 39m, 깊이 2m쯤 되는 샘물가에는 이름 모를 수초들이 파릇파릇하다.

열사의 험로를 누비는 ‘고행’은 이제 시작이다. 산장에서 동남쪽을 향해 25㎞쯤 황량한 사막을 달려 막고굴(莫高窟)에 도착했다. 막고굴 고급해설원이자 한국둔황학연구회 회원인 리신(李新)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대면이지만 미리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리 선생은 막고굴의 한국 관련 유물을 연구, 소개하기 위해 10여 년전부터 한국어를 독학해왔다고 한다. 지금은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전문가답게 안내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17호굴이다. 16호굴 안에 있는 곁간굴이다. 사방이 10m 정도로 막고굴에서는 꽤 큰 굴에 속하는 16호굴 전실에서 연도로 들어서자 오른쪽 벽면에 ‘017’이란 번호가 붙어있는 17호굴의 작은 벽문이 나타난다. 높이 180㎝, 아래 넓은 부분이라야 92㎝에 불과해 보통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안을 보니 굴 크기는 사방이 3m쯤 되는데, 중앙에 당나라 고승 홍변의 소상이 있다. 상의 좌우에는 미녀와 비구니가 고승을 향해 협시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런 곁간굴 형식에 관해서는 중국 전통 분묘축조법의 일부로 묘도 좌우에 부장품을 넣으려고 지은 ‘이실’(耳室) 설과 인도 비하라 석굴식으로서 승려들이 수도하는 승방이라는 설이 있다. 이 굴은 1900년 막고굴의 주지 왕원록 도사가 쌓인 토사를 치우다가 갑작스레 벽이 무너지면서 발견됐다. 그 안에 뒷날 서방 탐험가들이 털어간 숱한 경전과 회화 유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부른다.

맨먼저 ‘왕오천국국전’ 발견된 17호굴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굴에서 신라승 혜초가 남긴 불후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다. 1908년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는 이 굴에 소장된 사경류 1500여 종을 헐값에 사들였는데, 그 속에 이 여행기가 들어있었다. 여행기는 한 권의 두루마리 필사본으로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나간 총 227행의 절략 잔간이다. 이 국보급 진서는 후손들의 불초로 오늘날까지 90년 넘게 연고도 없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다. 또한 연구도 남들보다 뒤져있으며 해명하지 못한 점들도 적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불초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지난해 역주본을 펴내면서 여행기의 내용과 스님의 행적을 밝혀보려 했다. 물론,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미제의 과제들도 많이 남겨놓았다. 가장 큰 공백은 스님의 입적지를 알아내지 못한 점이다. 780년께 오대산에 들어가 건원보리사란 절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 되뇔 뿐, 그 절이 도대체 어디 어느 사찰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최근 한 연구자가 ‘보리’라는 말의 연원부터 추적해 그 사찰을 오대산에 있던 금각사의 별칭 혹은 숙종 원찰로서의 상징적 보통명사일 것이라는,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가설’로 제기한 것인 만큼 확증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런 미궁 속을 헤매는 우리에게 61호굴은 한오리 불빛을 던져주었다. 원래 이 굴은 사방이 14m 정도로 막고굴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굴이다. 동·남·북 세 벽면에 강렬한 색채로 한족, 위구르, 호탄 출신의 여성 공양자상 52명을 그린 벽화가 있고, 특히 굴 중앙에 놓여있는 기단 뒤 서벽에 거의 완벽한 ‘오대산지도’가 그려져 유명하다. 전체 면적 250㎢에 달하는 산시성 오대산의 축소도인 이 그림의 길이는 13m, 폭은 3.4m로서 막고굴에서도 가장 큰 벽화 중 하나다. 리 선생은 남아있는 지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대에 그렸다고 하나, 당대 지도라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지도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남선사와 불광사를 비롯한 67개의 명찰 이름이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생활풍속도 그려져 대단한 진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신라○탑’이란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20년 전에는 ‘신라승탑(新羅僧塔)’으로 또렷이 보였다고 한다. ‘신라의 승려 탑’(사리탑)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한 고승이 입적한 곳임을 시사한다.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스님은 궁중 원찰에서 지송승이란 지고의 지위를 누리다가 이곳에 와 천화한 혜초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번뜩인다. 그 곁에 ‘신라송공사(新羅送供師)’, 즉 ‘공양을 보내는 신라인’이란 글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닳아 보이지 않는다고 리 선생은 소개한다. 속단은 이르지만 혜초의 입적지를 밝히는 새 실마리를 찾아냈음에는 틀림 없다.

세계 최대 ‘오대산지도’ 에서 발견한 단서

막고굴에 간직된 우리네 문화유산을 언급할 때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이른바 조우관(鳥羽冠,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과 이 관을 쓰고있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원래 조우관은 일찍부터 북방 유목민족들이 즐겨 쓰던 모자였다. 그 상관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땅에서는 고구려나 신라시대 갑자기 나타난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귀천 구별 없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러한 조우관을 쓴 인물상이 막고굴 벽화를 비롯한 중국 고적 유물에서 여러 점 발견되었다. 관이나 주인공의 모양새, 그림의 배경 등이 엇비슷한 것도 있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달리 보이는 것도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중당시대 조성된 막고굴의 220호와 335호굴 벽화에 그려진 조우관의 배경은 다 같이 ‘유마힐경변상도’의 공양도다. 시안 이현묘의 예빈도에서 본 것처럼, 새의 깃털 모양이나 주인공의 얼굴 생김새, 직령에 오른쪽 여밈을 한 옷차림 등에서 전형적인 조우관을 쓴 한국인(고구려나 신라)의 모습이다. 최근 같은 시기 조성된 237호굴 변상도에도 조우관을 쓴 인물이 있다는 주장이 있어 그 그림을 자세히 훑어보니 조우관은 있으나, 청대에 다시 그린 것이어서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

벽화 속 장구 가락에 덩실 춤추는 무희도

이러한 벽화말고도 시안에서는 뚜껑의 표면을 장식한 꽃잎에 조우관을 쓴 다섯명을 그린 은함(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산시성 법지사지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정방형 사리함 표면에도 조우관을 쓰고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나 유물들에 조우관을 쓰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온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절, 공양사 신분의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거나 공양하는 자리, 인도 불교전설의 불사리 분배 장면 등에 다른 외국 사절들과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인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을 등장인물로 만들어 당나라 중심의 천하사상을 은연 중 과시하려는 양식화된 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 막고굴 제61호굴의 서벽화인 ‘오대산지도’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실사 지도로 꼽힌다. 이 가운데 ‘신라승탑’(동그라미 안, 오른쪽 확대한 그림)이라는 명문과 함께 신라 고승의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탑이 그려져 있다. 석굴 내부 촬영이 금지돼 입구에 새롭게 만들고 있는 ‘석굴문물보존연구소’에 있는 모사품을 찍었다.


그밖에 98호굴 남벽을 비롯한 여러 굴의 벽화에는 장구(장고)의 신명나는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익숙한 장면도 눈에 띈다. 428굴 벽화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비천상은 고구려 덕흥리 고분 전실 천장에 그려진, 천마상을 연상케 하며, 435호굴 벽화에서 인물상을 흑백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법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기단을 입체감 나게 그린 기법과 동일한 음양법이다. 이들 현상은 두 지역간 문명이 공유한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다.

외국에 간직된 한국 관련 기록이나 유물을 우리 문화유산으로 보고, 진상을 따지고 캐묻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지간의 교류 관계와 당시 이 땅의 옛 나라들이 지닌 대외적 위상의 일면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을 비쳐주는 거울도 되기 때문이다. 몰랐던 역사를 그러한 기록이나 유물 속에서 알아낼 수 있으며, 또한 비교를 통해 남들과의 공유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나음과 모자람을 가릴 수도 있다. 어디를 가나 우리와 관련된 것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고, 잘 가꿔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한·중·일 불교 미술 모태 서역풍 기법 고구려 벽화서 절정

둔황 막고굴과 석굴예술

▲ 막고굴 외벽에 그려진 피리부는 무희.

4~14세기 무려 천년 동안 조성된 둔황의 옛 석굴과 벽화, 불상들은 한국과 중국, 일본 불교 미술의 모태다. 암산에 뚫은 예배굴과 승방굴 따위의 석굴 건축, 간다라 불상, 채색 벽화 따위의 서역 미술은 둔황을 거쳐 한·중·일 불교 예술의 자양분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석굴 예술은 인도 아잔타에서 비롯된 것이나 바미얀과 쿠처 키질 석굴을 거쳐 둔황 막고굴에서 비로소 동아시아 불교의 합리적 특성에 맞게 정제된 얼개가 세워졌다. 후대 룽먼, 윈깡 석굴, 한국의 석굴암, 군위 삼존불 같은 걸작 석굴의 계보를 낳은 산실이 돈황이다.

우리 불교 미술사에서 둔황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 양식을 전파한 매개 유적으로서 친숙하다. 둔황에서 간다라 양식은 서역의 자연주의적 맵시를 간직하면서도 더욱 원만한 형상으로 다듬어졌다. 오른 어깨가 드러난 채 왼쪽에서 아래로 상의를 늘어뜨린 이른바, 편단우견의 의복 패션, 인간적 미소, 육체 윤곽의 자연스런 묘사 등은 둔황의 옛 장인들이 다분히 추상적인 서역 불상들을 변용시킨 데서 비롯한다. 이 흐름이 룽먼, 윈깡 등 중국 본토의 석불 양식에서 더욱 심화하면서 통일신라, 일본 나라·헤이안 불상들의 기본 모티브로 자리잡는다. 아울러 둔황은 명암 대비와 뚜렷한 채색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서역풍 벽화 기법을 중국에 전한다. 하지만 그 전통은 중국 본토에서는 조각의 기세에 눌려 시들해지고, 뜻밖에 중원 북쪽을 장악한 고구려로 이어져 찬란한 고분 벽화의 활력을 낳게 되는 것이다.

둔황 미술의 절대적 영향력은 중국사상 유례없는 경제·문화적 번영을 누린 당 왕조 때 유적의 절반 이상이 만들어진 점과 밀접하다(막고굴 480여 곳 가운데 270여 곳이 당 유적이다). 당 황실은 초기부터 서역 경영에 진력해 파미르 고원 서쪽의 소그드 지방, 북인도 간다라 지역 부근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때문에 동쪽 신라와 일본열도까지 불교를 축으로 한 거대 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지정학적 거점인 돈황은 필연적으로 동서 문화 융합의 첨병에 서게 되었다. 당 왕조의 국제성이야말로 돈황의 예술사적 위상을 키운 모판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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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아시스 육로의 병목 둔황

신비한 문명의 샘 솟아나는 개발의 기운

▲ 신기루는 더운공기와 찬공기에 의한 굴절 현상으로 극지방이나 사막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위먼관(옥문관)에서 둔황 시내로 올 때 멀리서 바라본 밍사(명사)산 줄기가 마치 신기루나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시안을 떠난 비행기는 중원의 황토평원과 고비사막의 끝없는 모래 바다를 두 시간 남짓 가로질러 둔황 공항에 착륙했다. 백양 나무와 미루 나무 잎사귀들이 자동차 불빛에 어른거리는 포장 길을 10여 분 달려 둔황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흙벽돌로 지은 사막풍의 단층 건물로 사막의 나그네들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숙박소다. 마침 안마당에 둔황 가무단의 공연이 한창이다. 악사들의 악기나 악곡, 무희들의 춤사위나 의상은 모두 이곳 막고굴 벽화에서 본떠와 한결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막고굴 답사의 화두, 그 황홀한 벽화들을 누가 그렸을까

중국 학자들은 둔황을 ‘인후’에 비유한다. 마치 입에서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목구멍과 같다는 뜻이다. 하서회랑을 거쳐 몰려드는 동방 문물이 이곳을 지나면 몇 갈래의 길로 갈라져서 시원스레 빠져나가며, 반대로 그 길들을 거쳐 밀려오는 서역 문물은 이곳을 어렵사리 지나서야 동방에 전해지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비유하면 병목이다. 병목이니만치 얽히고 설킨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크게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둔황은 깐수성과 칭하이성, 신장성이 만나는 교통요지로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박과 참외 같은 과일이 많이 난다고 해서 과주(瓜州)라고 불렀으며, 월지와 오손족들의 방목지였다. 진나라와 전한 초에는 흉노가 차지했다가, 기원전 2세기 전한의 영역에 들어오자 하서 4군의 하나인 둔황군을 설치했다. 5호16국 시대에는 전량의 영지가 됐으며 모래가 많은 곳이란 뜻에서 사주(沙州)라고 고쳐 불렀다. 한때 단명한 서량의 도읍이 되기도 했다. 둔황이 도읍이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세기 북위가 점령했을 때는 둔황진으로 개명하고 수·당대에 다시 둔황군으로 원상복귀했다. 당나라 전반기에 전성을 누렸지만, 후반기에는 일시적으로 토번(티베트)에게, 11세기 초엽부터는 서하에게 190여 년 동안 점령당한다. 이때 1천여 년의 둔황 역사를 증언하는 막고굴은 땅속에 묻히고 만다. 서하를 멸망시킨 원대에는 사주로, 명대에는 사주위로, 청대에는 둔황현으로, 지금은 둔황시로 이름이 왕조 때마다 바뀌었다. 기복이 잦은 둔황의 연혁은 막고굴을 비롯한 주변 유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면화 과일 원유단지 그리고 호텔들

▲ 밍사산 줄기의 동쪽 끝에 있는 둔황석굴(막고굴)은 실크로드 최대의 불교유적으로 꼽힌다. 사진은 천여개의 석굴 중 하나인 제96굴로 안에 당대 초기에 만든 35미터 높이의 미륵불이 있다.
역사의 고비고비를 슬기롭게 이겨온 둔황은 오늘날 옛 영광을 되찾는 성싶다. 거리 중심에 오뚝하니 선 ‘비파를 켜는 처녀상’이 그것을 상징한다. 신이 나서 한발 치켜들고 비파를 머리 뒤로 돌려가며 켜대는 처녀의 모습은 퍽 발랄하고 활기차 보인다. 18만여 명에 달하는 둔황의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고 회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10개 소수민족은 1%에 불과하다. 녹지(오아시스) 면적은 전체 면적의 4.5%밖에 안되지만, 지랜산에서 발원하는 길이 390km의 당하(黨河)가 시내를 관통한다. 여기에 초당 3㎥씩을 뿜어내는 샘물까지 합쳐지니 사막의 녹지 중 녹지다. 사막답지 않게 푸르싱싱한 면화와 과일밭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둔황은 깐수성 최대의 면화와 과일 산지다. 시 산하 2개 진 중 하나인 치리진(七里鎭)은 유수의 원유단지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야심 차게 진행 중인 ‘서부 대개발’의 중점대상지 중 하나라고 한다. 아담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둔황은 오늘도 예나 다름없는 병목 구실을 한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공항과 기차역에는 매일 수천 명씩의 통과객들이 들른다고 한다. 시내에 실크로드 호텔을 비롯한 현대적 호텔만도 10여 곳이고, 도로는 말끔하게 포장되었으며, 곳곳에서 신축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의 둔황이 뿜어내는 모든 기염은 실크로드의 재발견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그 밑그림은 영화로웠던 과거에 그려진 것이다. 어제의 둔황은 한마디로 문명의 보물고이자 성지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보물만도 59곳이나 있으며, 명사산과 월아천은 전국 40대 관광명승지의 하나로 꼽힌다. 돈황의 명승유적 가운데 단연 백미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이다. 매번 찾을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막고굴은 보면 볼수록 깊어지는 그 오묘함과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매혹한다. 보는 이들은 때로는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황홀한 선경 속에서 헤매게 된다.

막고굴은 둔황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명사산에 있다. 이상야릇한 전설로 가득한 이 산의 동쪽 끝 깎아지른 절벽에 1.6km에 걸쳐 벌집 같은 석굴들이 뚫려있다. 바로 막고굴이다.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막고굴은 4세기 중엽 전진 시대에 악준이란 승려가 처음 뚫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까지 1천여 년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전체 석굴 안에는 4400여 구의 소상과 연면적 약 4,500㎡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m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약 112리)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상이나 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이른바 ‘둔황문서’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 점이나 된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불교 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 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지어 사원의 경영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公私)문서도 있다. 그 보물들은 근 백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는 ‘둔황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제국주의 장물로 팔려간 숱한 유물들

1899년 헝가리의 로치가 처음 막고굴을 탐방한 이래 숱한 이방인들이 탐험이란 이름 아래 이 비장의 보물고에 앞다퉈 모여들었다. 더러는 순수한 탐험심에서 왔지만, 대부분은 도적의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행각을 벌였다. 영국의 스타인은 석굴 주지인 왕원록 도사를 꾀어 사경류 20상자와 회화류 5상자를 마제은(馬蹄銀,:말굽 모양의 중국 은화) 40닢과 바꾸어 런던으로 보냈다. 프랑스의 펠리오도 역시 왕 도사를 매수해 사경류 1500여 권이 든 24개의 상자와 회화 직물류 5상자를 헐값에 사들여 프랑스로 직송했다. 약삭빠른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뒤이어 왕 도사가 숨긴 잔여 문서 중 500여 권의 사본을 챙겨갔다. 뒤질세라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미국의 워너도 한달음에 달려와 같은 수법으로 각각 벽화 10장과 20여 장을 뜯어갔다. 무모한 외국 편취자들에 의해 할퀴고 뜯기고 찢긴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 신비한 문명의 샘 솟아나는 개발의 기운-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둔황 유물을 가져간 나라들은 현재 엄연한 주인이 장물을 되돌려달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보편적 가치’ 운운하면서 앙탈을 부리고 있다. 문화유산은 어디에 있든 창조자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저들 박물관의 공동(空洞)에 안달이 나 남의 유산을 사취해놓고는 아닌보살하는 것은 공분을 피할 수 없는 행위다. 우리도 이러한 뼈아픈 경험을 겪고 있지 않은가.

막고굴에 관한 연구나 기사는 안내원 말대로 수레 몇 대에 실어도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다. 필자가 그간 몇 차례 찾았지만, 갈 때마다 새록새록 느껴지고 안겨오며, 얻게되는 것이 있어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 이번 여정에는 일반 공개하는 몇몇 굴에다 특별히 보고싶은 5굴을 합해 모두 15굴을 둘러봤다. 답사의 화두 중 하나는 과연 그 뛰어난 벽화를 누가 그렸는가 하는 화사(畵師) 찾기다. 벽화에 돈 많고 권세있는 귀족·실력자들의 공양이나 시주로 그려졌다는 기록은 있어도, 누가 그렸다고 밝힌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왕조 때마다 전해오는 몇몇 명화가들로는 그 엄청난 그림들을 그릴 수가 없었을 터이니 분명 수많은 화사들의 위대한 지혜가 빚은 결과물일 것이다.

민중 화공들이 만든 ‘사막이 대화랑’

막고굴 북쪽 끝에는 벌집처럼 뚫린 동굴군이 있다. 조사 결과 물감 그릇과 안료 등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화공들 주거지였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어리 같은 비좁은 방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새우잠을 자면서 위대한 ‘사막의 대화랑’을 일궈냈다. 장경동에서 발견한 조승자(趙僧子)의 ‘전아계(典兒契)’란 문서에는 공장도료(工匠都料, 도편수)인 그의 살림이 하도 구차해 아들을 6년 동안 친구에게 전당 잡히고 보리 20석과 좁쌀 30석을 얻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다른 한 장의 문서에는 공장들의 고달픈 처지를 이렇게 시로 토로하고 있다. “공장은 재주를 배울 필요가 없나니(工匠莫學巧) / 재주가 있으면 남의 부림이나 받게 된다(巧卽他人使). / 내 몸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세이고(身是自來奴) / 아내 역시 벼슬아치들의 노비로다(妻亦官人婢).”

▲ 서부대개발의 바람을 타고 성황을 이루고 있는 둔황산장호텔의 로비. 흙벽돌로 지은 사막풍 양식이어서, 옛 대상들이 동쪽에서는 하서회랑을 지나고, 서쪽에서는 파미르고원과 타림분지 등을 힘들게 넘어와 쉬던 대상관(캐러반사라이) 같은 느낌을 준다.


노예 신세에 있는 공장들에게는 재주가 오히려 화근이 된다는 역설적인 부르짖음이다. <역대명화기>에는 당나라 때의 명화가 염립본(閻立本)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싣고 있다. 어느날 그는 태종의 봄 놀이에 함께 행차했는데, 연못에서 노는 진귀한 새를 그려보라는 명을 받는다. 그는 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연못 주변에 엎드리기까지 하면서 그려 바쳤다.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훗날 아들에게 “화가로서 유명하게 되어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심부름꾼과 다름없다. 그림을 배워서는 안된다”라고 훈계를 했다고 한다. 명화가의 경우가 이러했으니, 일반 화공들의 처지야 더 말할 나위 없이 비참했을 것이다.

막고굴에 남은 불후의 화폭들 하나하나는 모두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초 화공들의 손끝에서 나왔다. 인류의 거룩한 문명들은 모두 노동하는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시에 천하를 발호하던 군주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쓸모 없는 해골만 남기지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공장들은 불후의 작품을 남겨놓는다. 돈과 권력만을 능사로 여기며 학문과 예술, 민중을 업신여기는 세태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목구멍 닮은 협곡 1천km 동서교역 사활 걸린 생명선

둔황과 하서회랑

▲ 둔황석굴에서 튀어나온 듯한 둔황가무단의 무희.
서역의 관문 둔황을 목구멍을 뜻하는 ‘인후’로 일컬은 것은 수나라 때 관리 배구(547~627)가 지은 <서역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배구가 이런 비유를 든 것은 고도 시안에서 서북쪽 둔황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지세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중원의 대평원이 북쪽의 고비사막과 마중산맥, 남쪽의 시련산맥에 끼여 회랑처럼 갑자기 좁아졌다가 둔황을 기점으로 다시 지세가 트이기 때문이다. 동서로 1000km가 넘는 이 회랑 지역이 곧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인 ‘하서회랑’(또는 하서주랑)이다.

하서회랑은 동쪽의 공업도시 란저우에서 한·당 때 설치한 하서사군인 우웨이(무위), 장예(장액), 주취안(주천)을 거쳐 둔황으로 길게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 길이다. 전한 시대 장건이 이 길을 지나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래 서쪽 끝 둔황을 거쳐온 서역 문물과 동쪽 장안에서 내보낸 중국의 문물이 서로 오가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서역 교역의 사활이 걸린 생명선이었던 만큼 기원전부터 청대까지 회랑의 패권을 둘러싸고 역대 중국 왕조와 흉노, 토번(티베트), 위구르 등 이민족들 사이에는 전란이 그칠 새 없었다. 기원전후 흉노나, 8세기 토번, 10~11세기의 탕구트 족처럼 이민족이 회랑을 점령하면 당장 실크로드는 가로막혀 서역 주둔군이나 사신들이 수십 년 간 고립되곤 했다.

역대 중국 왕조의 서북 국경선이 한결같이 둔황을 기점으로 목이 홀쭉한 자루처럼 형성된 것은 하서회랑의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 국경수비의 대명사인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 이 회랑의 서쪽 지아위관(가욕관)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중국, 서역 문화가 융합 되는 길목이던 하서회랑은 고래로 동서 교류의 화려한 결실을 꽃피운 무대였다. 서역의 불교 회화와 조각, 공예 양식이 이 길을 거쳐 둔황과 맥적산 석굴, 뤄양의 룽먼 석굴로 전파되었다. 하서회랑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한 막고굴 벽화들은 그 정수다. 회랑 중심부에서 인도인 도용과 동로마산 은제 접시들이 출토된 것도 이 지역 문화의 국제성을 말해주는 증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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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현의 체취가 배어있는 시안
▲ 흥교사 법당 뒤쪽에 모신 커다란 와불상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669년 창건된 흥교사는 <서유기>의 등장인물인 현장법사와 신라출신의 고승 원측의 유골을 봉안한 사리탑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원측…혜초…명성 화려해도 유적엔 쓸쓸함만

시안 곳곳에는 우리 선현들의 고귀한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자국들을 하나하나 추적할 때면 늘 그 분들의 훈훈한 체취를 가슴 뿌듯이 느끼곤 한다. 시안에서 처음 찾은 곳은 시내 동남쪽 24㎞ 지점의 교외 야산 기슭에 있는 흥교사(興敎寺)다. ‘호국흥국사’라고 씌어진 벽돌 정문을 들어서니 고색 짙은 대웅전이 나타난다. 안에는 금동와불상을 비롯해 당대부터 청대까지 조성한 불상들이 보인다. 눈길 끄는 것은 미얀마에서 보내온 높이 30㎝ 가량의 백옥좌불상이다. 아담한 체구에 통통한 얼굴, 금칠한 주름가사를 걸친, 청아하기 이를데 없는 불상이다.

시안에 올 적마다 행여 해초 스님의 부스러기 정보라도 얻을까

대웅전을 나서니 오른쪽 벽돌담장 너머 숲에 싸인 고탑 3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운데 우뚝 솟은 탑이 높이 23m나 되는 현장탑(玄##壯+大塔:일명 삼장탑)이다. 그 오른쪽은 기사탑(基師塔), 즉 규기탑(窺基塔)이고, 왼쪽은 측사탑(測師塔), 즉 원측탑(圓測塔)이다. 원측탑은 5층 현장탑보다 훨씬 낮은 3층 전탑이나, 그 주인공은 신라 왕손 출신으로 불학에 일가견을 이룬 원측(613~696) 법사다. 우리는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두손 모아 예를 올렸다. 1층에 법사의 진흙상이 새겨져 있다. 그는 15살 때 중국에 들어가 장안에서 고승들로부터 수학한 다음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삼장의 문하생으로 역경과 학문에 정진해 수제자가 된다. 스승과 더불어 우주만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유식학을 깊이 터득해 중국 불교의 핵심인 법상종을 일으켰다. 법사는 산스크리트어 등 외국어에 비상한 재간이 있어 경전 번역에도 큰 업적을 쌓았다. 삼장의 다른 제자인 규기쪽이 ‘현장의 지식을 가로챘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시기와 모략을 폈지만 원측은 <유식논서십권> 같은 명저들을 남긴 유식학 대가로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진다.

신라왕손 원측 뛰어난 업적 찬사

▲ 2001년 중국 시안 외곽에 세운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현지 주민들이 비석이 있는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다.
생불로까지 추앙 받은 법사는 당 태종의 명에 따라 서명사에 주석하다 84세에 입적했다. 그의 유해는 향산사에서 다비되어 백탑에 봉안됐다가 송나라 때 다시 분골해 현장탑 옆에 모셔졌다. 흥교사 홍보책자에는 법사가 어릴 적부터 총명해 경문은 한번 듣고 읽기만 해도 내용을 통달했으며, 현장법사를 도와 많은 경전을 번역함으로써, 법상종 비조의 한 사람이 되어 불교의 동방전파에 기여했다는 찬사가 적혀있었다.

필자가 절을 찾은 또다른 이유는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와 이 절에 보관해온 패엽경(貝葉經) 진본(너비 10㎝, 길이 80㎝) 을 보려는 것이었다. 패엽경이란 종이가 없던 시절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나는 탈라라는 나무의 잎사귀에 적은 불경본을 말한다. 초기 불경은 물론, 종이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공교롭게도 절쪽에서는 유물 관리자가 열쇠를 지닌 채 외출했다며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문 틈으로 보관함을 흘겨보기만 했다.

아쉬움 달래며 절을 떠나 서남쪽으로 1시간쯤 달렸다. 혜초기념비가 있는 쩌우즈현 (周至縣) 진펀(金盆)댐 기슭에 이르렀다. 혜초는 인도에서 돌아와 만년 오대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장안에 머물렀다. 스님만큼 오랫동안 장안에서 활동하면서 발자취를 남긴 한국인은 드물다. 스님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을 펴냈을 뿐 아니라, 천복사와 대흥선사에 주석하면서 밀교 연구와 전파에 한생을 바쳤다. 천복사에서 스승 금강지와 8년간 밀교경전을 연구하고, 대흥선사에서는 또다른 스승인 불공삼장의 강의를 수강하며 그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됐다. 관정도량 등의 밀교의식을 주도했으며, 스승이 입적했을 때 그가 제자들을 대표해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짓기도 했다. 궁중 원찰인 내도량에서 ‘지송승’이란 중책을 맡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스님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너무나 미흡하다. 이런 송구함이 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시안에 올적마다 행여 스님에 관한 부스러기 정보라도 얻을까 늘 귀를 쫑긋하고 다녔다. 지금 찾아가는 길도 그런 바람 때문이다. 꼭 10년 전 늦가을, 궂은 비 내리는 가운데 묻고물어 시안에서 150리쯤 떨어진 쩌우즈현 헤이수이취(黑水谷)에 있는 선유사의 옥녀담(玉女潭) 거북바위를 찾아갔다. 774년 1월 스님이 대종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낸 곳이다. 철야기도 이레만에 마침내 명주실 같은 감로수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그때 선유사 관리원은 어쩌면 필자가 옥녀담을 보는 마지막 한국 손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선유사와 옥녀담은 몇 해 뒤 그 곳을 흐르는 흑하를 막아 댐을 만드는 통에 수몰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댐이 지금의 진펀댐이다.

‘혜초기념비’ 지원 끊겨 4년만에 낡아

진펀댐 관리소는 고개마루에 있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산기슭에 옭겨다 지은 선유사 탑과 2001년 세운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 정자가 아스라히 보인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유사 주지 창핑 스님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 내린 비 탓에 질퍽거리는 황토흙과 풀숲을 헤치며 스님을 따라 갔다. 정자는 그런대로 아담해 보이나, 비석은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세운지 4년밖에 안되었는데도, 비문 글자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낙서마저 덮치니 마냥 몇 백년 된 낡은 유물처럼 보인다. 또 선유사는 탑만 뎅그러니 옮겼을 뿐, 시설은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오가는 길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념비 제막식에는 몇몇 한국인들이 왔으나, 지금은 오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마음을 후비는 채근인 셈이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니 한걸음에 거처를 다녀와 땀에 밴 옷을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 원측…혜초…명성 화려해도 유적엔 쓸쓸함만


정자 곁에는 ‘혜초기우제평’이라고 새긴, 옥녀담 거북바위에서 뜯어온 돌 한 덩어리가 놓여 있다. 그 돌 덩어리를 보는 순간, 수몰 전 옥녀담과 그 위에 가로 놓였던 다리, 그리고 다리 너머에 있던 선유사의 모습이 삼삼히 떠오른다. 정자에서 수몰된 터를 바라보니 물보라에 가려 온통 뿌옇고 갑문만 희끄무레하게 보일 뿐이다. 착잡한 심경 속에 50미터쯤 내려오는데, 웬 비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당나라의 시와 미주(美酒)를 사랑했다는 일본 서예가를 기려 2년 전 세운 비석이다. 혜초 기념비보다 한결 깔끔하다. 별 연고도 없는 곳에 비를 세운 까닭이 무엇일까. 씁쓸한 의문을 남겨놓고 발길을 돌렸다.

승려말고도 장안에 발자국을 남긴 선현들로는 불원천리 이곳에 파견된 사절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건릉의 사절석상과 이현묘(李賢墓)의 예빈도(禮賓圖) 속에서 그들 면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시안 서북쪽 80km 지점에 있는 건릉은 당나라 3대 황제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다. 500미터의 참배길 동서 양쪽에 머리가 잘려나간 61기의 외국사절석상이 늘어서 있는데, 동군은 동쪽 나라, 서군은 서쪽 나라에서 온 사절들이라고 한다. 원래 사절의 국적과 이름은 각기 상의 등에 새겨져 있었으나 대부분 닳아 없어져 호탄국 등 4개국 사절만 확인될 뿐이다. 관심거리인 신라 사절은 복식과 체형상 특징으로 볼 때 긴 망토형 두루마기를 여며 입고 허리에 띠를 맨 동군의 제3열 제2상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 ‘혜초기념비’가 세워진 시안 쩌우즈현 진편 댐 기슭의 선유사에서 만난 주지 창핑 스님. 답사단을 보내며 아쉬운 듯 합장한 채 인사를 했다.


늘어나는 한국 관광객 선현부터 찾았으면

이현묘의 예빈도에 등장하는 사절의 신분은 좀더 확실한 추정이 가능하다. 이현(654~684)은 고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장회태자로 봉해졌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의 박해를 받아 유배되었다가 자결을 강요당한다. 그의 형인 중종이 등극하자 동생을 복권시켜 건릉 곁에 묻었다. 그의 묘에서 발견된 예빈도는 묘길의 양쪽 벽에 그려진 것인데, 서벽은 파손되고, 동벽의 것만 남아있다. 이 남은 그림 속에 외국사절 3명이 보이는데, 그중 조우관(새깃을 꽂은 모자)을 쓴 사절이 하나 보인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는 지금껏 논란거리다. 벽화의 사료적 가치도 높고 하여 이 벽화를 소장한 산시성 박물관을 찾아갔다. 어렵사리 관리자인 판공실 주임을 만나 실물을 봐야할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하지만 벽화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뒤로는 매주 월·수·금 오후 3~6시에만 전담자가 공개한다면서 오늘은 화요일이니 불가능하다고 잡아뗀다. 실물은 못 보고 현관 모사도에서 조우관을 쓴 사절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금은 신라인 설에 무게가 쏠리지만, 고구려인이란 주장도 있다. 어쨌든 조우관을 쓴 사절이 한반도에서 온 사람임에는 틀림 없으니 그 정도 확신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시안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날로 늘어난다고 한다. 몇몇 명소에만 현혹되지 말고, 선현들의 체취가 밴 곳들을 우선 찾아가 참뜻을 새기고 기리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삼국시대 1천여명 추정 서역문물·불교문화 길잡이로

중국 유학파 구법승들

▲ 흥교사 측사탑에 새겨진 원측 대사의 부조상

고대 서역과 한반도의 문화교류사는 중국에 간 구법승들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4~6세기 남북조 시대 이래 중국에는 서역으로부터 유식종 등의 새 불교 사상과 불경 등의 선진문화가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이에 따라 배움에 목말랐던 해동 승려들에게 중국에서 새 불법을 구하고 익히는 이른바, ‘입중구법’이 필연적 유행으로 확산되는데, 점차 서역의 정신문화를 이땅에 퍼뜨리는 연결고리 구실 또한 하게 된다.

학계는 6~10세기 1000명에 가까운 이 땅의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시대인 6세기 초중기부터 남조에 고구려의 의연·지황, 백제의 겸익·현광, 신라의 각덕·원광 등 다수의 구법승들이 파견된 기록이 보인다. 7~9세기 수, 당대는 가히 ‘입중구법’의 전성기로서 명랑, 자장. 의상, 원측, 도륜, 도증, 승장, 혜각 등 불교사에 남은 걸출한 승려들이 앞다퉈 건너갔다. 현장을 도와 법상종을 개창한 원측,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주역인 자장, 해동 화엄종을 일으킨 의상 등의 활약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당대 장안 도심에 있던 자은사, 대흥선사, 보수사, 영감사 등 주요 사찰에서는 상당수 신라 승려들이 주석하거나 공부했다. 혜초나 원측처럼 황실의 신임을 얻어 고승대덕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과 서역을 거쳐 ‘천축국’으로 불리던 인도까지 순례를 떠난 승려들도 많다. 인도 순례승하면 우리는 대개 혜초만을 기억하지만, 당의 승려 의정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보면 인도에 갔다가 현지에서 입적한 아리야발마, 혜업, 현각 등의 낯선 신라 승려들 이름이 다수 언급되어 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장안의 신라 승려들은 서역 불경을 번역하는 역경사업에 큰 공로를 남겼다. 귀국한 구법승들을 통해서는 서역에서 입수한 불경 번역본과 산물들이 국내에 전파되었다.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선종을 익힌 도의, 혜철, 체징 등은 귀국 뒤 이땅 곳곳에 선문을 열어 후삼국, 고려시대의 역사 전개를 이끈 정신적 주역이 되었다. 구법승은 ‘법수(法水)’로 불리운 서역·중국의 선진 불교 문화를 한반도에 터준 ‘파이프라인’이었던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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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서문명의 접합지 시안

‘천하보물’ 넘치던 천년왕도 영광 다시 꽃피는듯

베이징을 떠나 시안으로 순항하던 비행기 안에서 착륙 20여분을 앞두고 기내방송이 울려나왔다. 갑작스런 소나기 때문에 쩡저우로 회항한다는 것이다.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가끔 당해본 사람들은 그런대로 느긋하지만, 초행자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쩡저우 공항에 착륙하자 뒷좌석에 앉은 60대 라틴아메리카 승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박수를 치자 다들 따라 박수를 쳤다. 사실 1950~60년대엔 비행기가 안착만 하면 승무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게 상례였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시안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공항을 빠져나와 얼마쯤 달리자 용광로에서 뽑아낸 쇳물처럼 몇 줄기 불빛이 어디론가 아득히 뻗어간다.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중인 이른바 ‘서북 대개발’의 첫 역사로 건설한 시 외곽 순환도로와 하서회랑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가로등이라고 한다. 시안을 기점으로 한 ‘서북 대개발’의 일환으로 닦은 저 고속도로는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시안은 일찍부터 동서문명의 접합지로서 오아시스 육로가 동서로 뻗어간 기점이었고, 오늘날 그 삭막했던 길 위에 화려한 고속도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안의 고속도로는 21세기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관중평야 한복판에 자리잡은 시안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반파(半坡) 마을에서 시작된다.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2세기께 서주 왕조는 서북쪽 근교인 주원(周原)에 도읍을 정했다가 서남쪽 호경(鎬京)으로 옮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나라가 근교 함양을 수도 삼았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부호 12만을 이주시켜 저 유명한 아방궁을 짓는 등 거대 도성으로 축성했다. 그러다 한나라 때에 와서 지금 시안에 도읍을 정하고 이름도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소망을 담아 ‘장안’이라고 지었다. 장안이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수·당 때부터다. 수 문제는 전대 왕조인 북주의 흔적을 씻어버린답시고 옛 수도는 몽땅 쓸어버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크게 흥할 것이란 뜻에서 ‘대흥성'(大興城)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성을 지은 사람은 서역 출신의 우문개(宇門愷)여서, 오늘날 장안성에는 어딘가 모르게 서역적 요소가 섞여 있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이름만 장안성으로 고치고 계속 증수·확대해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단연 굴지의 세계도시를 만들었다.

1100년간 11개 왕조 도읍에서 상공업 도시로

8세기 당나라 최성기 때, 장안은 길이 37㎞의 성곽에 84㎢의 면적을 지닌 거대 도시로서 인구는 무려 100만에 이르렀다. 너비 150~170m에 이르는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뻗었고, 시가지는 바둑판 같은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었다. 시가지는 황궁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양분되었다. 거기에 각각 동시와 서시라는 시장이 섰는데, 시장마다 ‘진기한 천하 보물이 다 모인다’는 200여 점포가 모여 있었다. ‘밤낮 시끄럽고 등불이 꺼질 줄 모르는’ 야시장도 즐비했다. 특히 서시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들어온 서역 상인들로 밤낮없이 붐빌 뿐 아니라, 서역의 노래와 춤, 옷과 먹거리가 판을 쳤다. 이를테면 호풍(胡風) 일색이었다. 여기에 더해 가로수와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곡강지(曲江池)나 화청궁 같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경관들이 장안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 ‘천하보물’ 넘치던 천년왕도 영광 다시 꽃피는듯-실크로드의 재발견

대도 장안의 영화는 현종 때 안녹산의 난과 당말 농민전쟁 등으로 빛이 바래 더는 도읍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영광의 자취가 하루아침에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14세기 초 이곳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눈에는 여전히 ‘지극히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비쳤던 것이다. 오늘날 시안성은 14세기 말 명나라 때 수축한 것이며, 이때 이름도 ‘시안’으로 바뀌었다.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1100여년 동안 11개 왕조의 도읍지로 자리를 굳혀온 고도 시안은 지금 인구 660만을 헤아리는 산시성 성도이자, 서북지방의 최대 상공업 도시로 새 번영기를 맞고 있는 성싶다.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알려주는 비석도

흔히들 시안(장안)을 실크로드 동쪽 끝, 혹은 출발지로 알고 있다. 조선족 안내원은 그 증거물이 있다면서 우리를 옛 서시터로 안내했다. 복잡한 길 한가운데 자그마한 거리공원 비슷한 곳에 나지막한 개원문(開遠門)이 세워져 있다. 개원문이란 ‘먼 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란 뜻이다. 문에 들어서면 낙타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서쪽으로 길 떠나는 대상을 형상화한 ‘실크로드 기점 군상’이란 석조물이 나타난다. 고행길이지만 7월의 석양볕에는 생기가 감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거나, 조형물만 보면 영낙없이 시안을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착각하게 된다. 시안은 동서문명의 접합지라는 입지조건 외에, 실크로드 개척과 얽힌 숱한 연고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 이슬람교 사원인 시안 칭전대사 옆 시장에서 이슬람 복장의 여주인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기원전 한나라 무제는 숙적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하려고 멀리 서쪽으로 장건을 파견한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까지 쫓겨간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그가 오간 길은 오아시스 육로의 남·북도다. 장장 13년이 걸린 장건의 1차 서역사행을 역사에서는 ‘서역착공'(西域鑿空), 즉 서역길의 개척으로 본다. 사실 이 서역착공을 계기로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육로가 사상 처음 뚫렸으며, 그 시발점은 수도 장안이었다. 그래서 당대까지 개척된 오아시스로의 남·중·북도의 기점도 모두 장안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동서문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여러 유물들은 요로에 자리잡은 시안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인데, 여기에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2호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돌십자가와 발해 유적에서 나온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등 국내 고대 기독교 관련 유물은 경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1917년 이 비의 모조품을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진시황릉∼병마용 세계 최대 박물관 설계

비의 의장이나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서문명간 융합의 흔적들이다. 의장에서 보면, 비는 상부와 비신, 좌대로 구성된다. 상부는 용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그 바로 밑에 십자가가 연꽃과 뜬구름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기독교(십자가)와 더불어 불교(여의주)와 도교(뜬구름)의 요소가 섞였음을 말해준다. 내용 면에서도 다른 종교와의 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들이나 용어들을 불교나 유교, 도교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을 건(乾), 종교를 법, 주교를 법주, 구원을 제도, 사원을 법당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또 박물관 5호실에는 최근 시안 역 공사 때 발굴된 보살상 한 점도 전시중인데, 목걸이·복식 등으로 미루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간다라상임이 틀림없다.

▲ 시안 시내 개원문 안에 있는 석조물 ‘실크로드기점군상’에서 동네 아이가 올라가 놀고 있다.
서방 종교의 동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교다. 그래서 땅거미 질 무렵이지만 시안 칭전대사(淸眞大寺)를 찾았다. 8세기 중엽 세워진 이 사원은 이슬람 사원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미어자나’(예배 시간을 알리는 첨탑)나 반구형 돔이 따로 없는 중국 전통식 건물이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자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데, 15년 전에 비해 젊은이들이 더러 끼여있는 것이 달라진 모습이다.

시안은 동서문물 집산지이고 교역장일 뿐만 아니라, 동서양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가장 번성했던 당대에 동서양 각지를 드나든 사신이나 상인, 승려, 유학생, 연예인 등 이른바 ‘교류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눌러앉은 외방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안녹산을 비롯한 번장들이나, 시선 이백, 양귀비 같은 위인들도 서역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시안은 동서문명을 한곳에 아우른 거대한 박물관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 교외의 진시황릉과 거기서 1500m 떨어진 병마용 박물관까지 합쳐 외성이 6.2㎞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한다. 모양새를 어떻게 갖추든, 분명한 것은 시안이 오아시스로의 중요 길목에 자리잡은 동서문명 접합지일 뿐, 결코 길의 동쪽 끝이거나 출발지는 아니란 점이다. 이를 반영하듯, ‘파수절류'( 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란 말이 전해온다.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파수 가에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고사다. 고리를 뜻하는 한자 환(環)은 ‘돌아오다’는 뜻의 환(還) 자와 발음이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가 된다. 이처럼 시안은 길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길손들이 동서로 떠나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안이 한반도를 포함한 그 이동의 여러 지역, 나라들과 오아시스로를 통해 교류를 지속했음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통념은 자칫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7∼9세기 풍미한 ‘호풍’ 지금도 밤시장 밝혀

서안과 서역문화

▲ 당나라 때 장안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서역 예술인들의 조상. 비파 뜯고 피리 부는 악사들과 곡예사가 낙타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어디서 그대와 이별할까/ 장안의 동쪽 문인 청기문이네/ 술집의 호희(서역의 무용수)는 하얀 손 내밀어/ 손님을 잡아끌고 금준(야광술잔)으로 취하게 만드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은 ‘송배십팔도남귀숭산’이란 한시에서 장안을 휩쓸었던 당시 서역문화 열풍을 이렇게 빗대었다. 〈신당서〉 〈구당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보면 7~9세기의 장안 시내는 어디서든 쿠처·투루판, 소그디아나, 이란 등의 중앙·서아시아에서 온 호인(胡人)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실크로드 교역을 주도한 소그드 상인들은 악기, 약품, 향료, 융단 등의 희귀품을 낙타 행렬에 싣고 들어와 서시에서 장사를 했고, 만명에 육박하는 이란, 투르크 사람들은 도심 곳곳에 집단촌을 이뤄 살았다. 이들이 가져온 서역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의식주 문화는 왕실 귀족과 재산가들의 넋을 빼앗아 이른바 ‘호풍'(胡風)이라는 실크로드 문화를 100년 가까이 유행시켰다.

복식제도를 다룬 〈당서〉의 ‘여복지’를 보면 개원 연간인 8세기 초 이후 서역인들의 호모(모자), 호복(옷), 호극(신) 등이 유행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잘나가는 귀족 젊은이들은 서역풍 모자와 옷을 입고서 온종일 성안팎을 거닐다 서역 무희가 기다리는 술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일과였다고 전해진다. 유병, 호병, 탑납 따위의 이란풍 음식류와 ‘호주’로 불리는 투르판산 서역 포도주, 회오리춤으로 극찬받은 호선무와 쿠처악 따위 서역칠조 등이 도성 안에 널리 퍼졌다. 9세기 이후 황소 등 빈번한 수도 침탈로 장안의 서역문화는 스러져 갔다. 하지만 그 흔적은 오늘날도 남아 칭전대사 주위에는 중국 신장 출신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차린 휘황찬란한 바자르(밤시장)가 성업중이다.

노형석 기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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