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 우리는 왜 열사의 험로를 누볐나

위대한 문명에 취하고 ‘한국’ 자취에 놀라며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일행은 불볕 더위로 소문난 중국 서역의 투르판 분지와 중앙아시아의 키질쿰 사막, 중동의 루트 사막, 시리아 사막 등을, 그것도 연중 가장 뜨거운 7~8월에 찾아나섰다. 지열까지 합치면 보통 낮 기온이 50도를 웃도는 곳을 거친 40일 여정은 베이징~이스탄불의 오아시스 육로를 좇는 수만리 험로였다. 우리는 왜 열사 속을 누비며 험로를 택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 길의 참뜻을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제대로 이어진 길에서, 제대로 된 뜻을 찾으려고 한겨레신문사쪽이 파격적으로 내린 단안이기도 하다. 우리의 길은 여흥이나 즐기는 길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 떠난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우리의 위상을 확인하려 했고, 동서간 숱한 문물의 교류 흔적을 더듬으려 했으며, 인류가 창출한 위대한 문명들의 슬기를 체험하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이 길이 간직한 참뜻이라고 믿었기에, 열사나 고산준령도 마다하지 않고, 오아시스 문명의 향훈에 흠뻑 젖어 걷고 또 걸었다. 여정을 마치고 보니, 신문사의 단안과 우리의 표적이 적중했음을 피부로 느낀다.

우리의 길은 여흥이나 즐기는 길이 아니라 무언가 찾아 떠난 길이다

먼저 우리와 이웃한 중국의 시안(옛 장안)에서는 신라 고승들인 윈측과 혜초 스님을 기리는 탑과 기념정자를 찾아가 그분들의 위훈을 되새겼고, 고선지 장군의 고택 자리를 알아냈다. 명사산의 산령이 깃든 돈황 막고굴에서는 밝히지 못해 늘 응어리로 남았던 혜초 스님의 입적지를 밝힐 단서를 발견했다. 송대에 그린 세계 최대의 지도라고 하는 ‘오대산축소도’에 ‘신라승탑(新羅僧塔)’이라고 명기된 곳이 있으니, 적이 그곳이 스님의 입적지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밖에 장경동을 비롯한 막고굴 여기저기에 우리 문화사와 관련한 귀중한 유물들이 소장된 사실도 재확인했다.

한여름 50도 사막길을 택하다

문명교류의 십자로였던 신장 지구에서도 이런 유물들이 눈에 띈다. 특히 고도 쿠차는 우리 민족과의 몇 가지 인연 때문에 친근감마저 든다. 혜초 스님이 서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머물렀고, 고선지 장군은 여기서 어린 시절 청운의 꿈을 키워 서역 원정의 출발지로 삼았다. 그 분들이 넘나들던 쿠차 성터를 확인한 것은 몇 번의 답사 가운데 이번이 처음이다. 선현들의 유지를 받들어서일까. 중국 조선족 출신의 화가이자 항일투사인 한낙연이 이곳 키질 천불동에 빛바랜 벽화를 고색창연하게 복원하고 벽면에 제자(題字)까지 남겨놓은 것도 볼 수 있었다.

비록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중앙아시아는 어쩐지 낯설지 않다. 고구려 사신이 다녀간 아프라시압 궁전터가 있고, 고선지 장군이 이슬람 대군과 맞섰던 저 유명한 탈라스 싸움터가 있으며, 오늘날은 곳곳에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살고 있어 김치가 낯익은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박물관 모사품에서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도를 접할 수 있었지만, 현지 고고학연구소장의 안내로 출토했다가 다시 파묻어 비밀에 붙여졌던 발굴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세계 전쟁사와 문명사에 긴 여운을 남긴 탈라스 싸움에 관해선 그 장소부터가 논란거리였다. 이번에 현지 전문가의 협조로 탈라스 강 동안의 널따란 언덕빼기가 그 치열했던 전쟁터였으며, 그 땅 속에 수많은 전사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기상을 만방에 떨친 장군의 위훈을 제대로 기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못내 가슴이 조였다.

중앙아시아를 지나 길의 서쪽에 접어들면서 우리와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 민족사와 유대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반겨맞았다. 우리는 가끔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무예를 겨루기 위해 말 타고 달리면서 격구(일명 폴로)를 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알고 보면 그 놀이의 발원지는 이란의 고도 이스파한 중심에 있는 이맘 광장이다. 그곳에 남아있는 두 쌍의 석조 골대가 그것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여정의 종착점인 터키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한때 세계 도자사를 주도했던 우리네 도자기 유품이 서방에서는 아직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어서 늘 가슴팍에 묻고 다녔다. 그래서 세계에서 도자기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토프카프 궁전 박물관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도자기 전시실이었다. 거기서 뜻밖에도 8괘와 태극문양이 선명한 청화백자 한 점에 눈길이 멎었다. 유독 그것만이 출처 미상으로 남아있으니, 우리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의심 반, 기대 반의 마음 속에 크게 눈도장을 찍어놓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한겨레 실크로드 탐방


다음으로, 이 길을 따라 오간 문물의 교류상을 살펴보는 것은 여정의 다른 참뜻이다. 원래 오아시스 육로는 실크로드의 한 갈래로서 문명 교류가 그 원초적 기능이다. 그래서 이 길을 가다보면 교류품이 지천에 깔려있다. 지난 해 말 개방되어 아직 발길이 뜸한 투르판 토욕구 천불동에는 마니교 동굴이 하나 있는데, 동서벽면은 불교 벽화로 채워져 있다. 다같이 동전한 종교들의 공존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과 마리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머리(불두) 한 점씩을 보고나서 출토 현장을 답사한 결과 불교가 북쪽과 서쪽 어디까지 전파되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탈라스 전쟁을 계기로 제지술이 서방으로 퍼져나갈 당시, 그 첫 공장이 사마르칸트에 있었다고 전해오나, 구체적인 장소와 종이를 만들어낸 과정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 공백을 메워야 했기에 일정을 늦추면서 수소문한 끝에 손수 전통 종이 제작 기능보유자 한 사람을 찾아냈다. 그는 최초의 제지공장 위치를 알려주고, 종이 만들기 과정도 손수 재현했다. 의외의 소득에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 길이 지중해 동쪽 해안까지 연장된 데는 시리아의 팔미라란 오아시스 도시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 당초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 서북해안에서 끝나는 것으로만 생각되었으나, 바로 이 도시에서 중국 한나라 때 비단조각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오아시스 육로가 지중해까지 이어졌음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 비단조각의 발견지를 확인했을 때, 우리의 가슴은 설렐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중국 한대부터 환상적인 서역 특산말로 선호해 온 ‘한혈마(汗血馬)’의 원종을 해발 3,300여 m의 페르가나 산중에서 찾아냈고, 석류의 본향이 이란의 사자산 일대임을 현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카프탄형(전개형) 전통의상의 유형적 원류가 서아시아에서 비롯되었음도 곳곳의 의상유품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고선지 장군 탈라스 싸움터 확인

이 길에서 확인하고 찾아본 이 모든 것은 길을 따라 창조된 위대한 문명들의 소산이다. 그 문명들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앎과 삶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된다. 그 자양분을 얻고자 떠난 것이 여정의 또 다른 참뜻이다. 현대문명의 혼탁을 훌훌 털고, 저 맑고 깨끗하며 웅심 깊은 문명들 속에 몸과 마음을 한번 담가보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보람찬 체험이다. 이제 가까이서만 맴돌지 말고 보폭을 다양한 문명세계로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답사단은 중앙아시아에서 화려하게 꽃핀 이슬람의 건축문화에 황홀해지고, 이란에서는 오리엔트 문명의 정화를 응축한 중동 최대의 문명유적 페리스폴리스와 1,500여 년간 꺼지지 않고 타오른 조로아스터교의 성화 앞에서 숭엄한 감회에 젖었다. 시리아에서는 라틴문자의 모체인 우가리트 문자와 만났으며 동서문명의 접합지 터키에서는 지상지하의 기적으로 가득찬 카파토키아의 지하도시와 기암괴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특히 터키 넴루트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2,150m), 그래서 천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묻혀 있는 세계 8대 기적의 하나인 안티오쿠스1세의 묘를 찾아 거기에 깃든 제우스와 아폴로, 헤라클라스 같은 그리스 신화의 원형적 신상들을 발견하게 됐다. 백년설을 머리에 이고 우뚝 솟은 성산 아라랏, 그 기슭에 이르러 창세의 비밀과 방주의 실체를 더듬었을 때는 짐짓 선경(仙境)에 이른 기분이었다. 한쪽 눈은 파랗고 다른 쪽 눈은 노란, 반(동부의 한 도시 이름) 고양이의 신비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았다. 다층적 문화유적의 융화성을 보여준 성소피아 성당의 궤적은 답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 중국 시안 섬서성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온 사신(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묘사된 벽화를 관람하고 있다. 박물관에 보관된 진품을 모사한 이 벽화에는 새 깃털을 꽂아 장식한 모자(조우관)의 형태가 확연히 보인다. 시안/이종근 기자 root2@hani.co.ikr


이런 답사의 여정들은 값진 문명체험의 기회였다. 우리는 다름을 이해하는 데 무척 신경을 썼다. 다름을 이해했을 때, 벌써 같음에 이르렀고, 그것이 곧 공생공영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이 낯선 여정을 그나마 무탈하게 만든 한 비결이기도 하다. 벅찬 여정은 보람과 더불어 아쉬움도 남겼다. 정세 불안으로 길의 요지에 자리잡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 몇 곳은 발길이 닿지 않았고, 닿은 곳도 꼼꼼히 살펴보는 탐사에는 미치지 못했다. 필자는 이 모든 것들을 앞으로 약 1년간, 매주 1회씩, 총 45회쯤 나눠 연재하려고 한다. 이제부터는 독자들과의 동반 여행이 될 것이다. 실크로드는 오아시스 육로말고도 초원로와 해로가 있으니, 그곳으로 발길도 이어져야 할 터이다. 이제는 세계와 더 가까이, 우리와는 더 멀리 떨어져서 세계와 우리를 바르게 보는 안목을 키워나가야 할 때다. 그래서 우리에게 실크로드가 필요한 것이다.

정수일/문명사연구가

한반도 땅끝에서 로마까지 1만2천km

비단길의 핵심 ‘오아시스로’

정수일 교수와 <한겨레>취재팀이 다녀온 길은 유라시아 비단길(실크로드)의 핵심 통로인 오아시스로다. 보통 한반도 남단이나 중국의 옛 도읍 서안(옛 장안)에서 중앙아시아 사막 오아시스 지대를 거쳐 지중해, 로마에 이르는, 1만2000여 km의 길을 말한다. 북방 초원길, 남방 해로와 더불어 실크로드 3대 간선으로 캬라반(대상)과 구법승, 각국 사절단들이 낙타행렬을 이끌고 오갔던 동서교류사의 터전이다.

오아시스로는 애초 19세기 말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 의해 명명된 실크로드의 별칭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오늘날과 달리 20세기초까지는 중국-인도간 교역로를 가리키는 좁은 개념이었다. 장안에서 중앙아시아의 심장부인 트랜스 옥시아나와 파미르 준령을 넘어 인도 서북부 간다라, 펀잡 지역으로 빠지는 불교 전파로를 일컫는 길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스타인, 헤딘 같은 서구 탐험가들이 중앙아시아와 시리아 등에서 한나라 비단 유물을 잇따라 발견하면서 독일 학자 헤르만은 1910년 오아시스로를 지중해까지 연장해야한다는 논고를 낸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실크로드의 공간 개념은 이 때 정립된 것이다.

2차 대전 뒤에는 서구·일본쪽 학자들의 고대 문헌 발굴과 추가 조사 등으로 오아시스로를 비롯한 실크로드 개념이 크게 확장되었다. 가장 오래된 동서교역로인 북쪽 스텝 지역의 초원로와 8~9세기 이후 간선망으로 떠오른 중국 동남해안~페르시아만~아프리카 동안의 남방해로가 새로 부각됐으며 오아시스로의 동서쪽끝도 한반도와 로마로 연장됐다. 오늘날 실크로드는 이들 3대 간선을 총칭하며 남북으로 이들 간선을 이어준 마역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등의 5대 지선도 그 일부분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최근 정 교수처럼 15세기 이후 개척된 아메리카 신대륙과 구대륙간의 교역로까지 도 실크로드사의 중요 영역으로 보는 환지구적 관점도 등장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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