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유럽기행 58] 베니스 유리공예 박물관(Museo dell'Arte Vetrario)
09.11.05 09:52 ㅣ최종 업데이트 09.11.05 10:52 노시경 (prolsk)

3층의 붉은 벽돌색 민가 아래에 아드리아해(Adriatic Sea)의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의 가족을 태운 베니스의 수상버스, 바포레토(vaporetto)는 바닷 물결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햇살도 뜨거웠지만 바람도 셌다. 햇살 아래 바닷바람은 나와 딸의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 무라노 섬 가는 길. 바다의 수로 위로 선박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 노시경
이탈리아

수상버스는 무라노(Murano) 섬 중심부의 수로 속으로 점점 들어갔다. 작지만 물이 가득한 바닷물 수로 위로 크고 작은 요트와 선박들이 정박해 있고 배들 사이에는 배를 바다 위에 달아매는 나무 말뚝들이 바다위로 솟아 있었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유리공예 박물관(Museo dell'Arte Vetrario) 수상버스 선착장에 내렸다.

무라노 섬의 거리에는 그 이름 유명한 베니스의 유리공예품 가게가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앙증맞고 예쁜 유리제품들에 딸 아이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약간 작은 유리제품은 가격이 5유로(euro). 이탈리아 물가를 고려하면 비교적 저렴하게 원산지 유리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도 중국산 싸구려 유리 제품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유리제품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이탈리아 산과 중국산 유리제품은 정교함에서 차이가 난다.

나는 선착장 오른편으로 난 수로를 따라 길을 계속 걸었다. 나의 목표는 베니스 유리공예 박물관(Museo dell'Arte Vetrario)이었다. 여행 안내서나 인터넷 자료에서도 거의 찾기 힘든 박물관이지만 나는 이 박물관이 역사성과 작품성을 갖춘 박물관일 거라고 확신하고 걷고 있었다.

이 더위에 길을 헤매면 가족의 성화가 이어질 것 같아서 나는 무라노 섬 지도를 다시 들쳐 보았다. 내가 가족과 함께 가는 방향이 박물관 가는 방향이 맞는 것 같은데 박물관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행지 길 찾기의 원칙대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길을 따라 걸었고, 지나가는 서양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 그 아저씨는 이탈리아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걷는 방향이 '아마도' 박물관 가는 방향일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도 무라노 섬이 처음인 여행자였다.

박물관 입장료는 일인당 5.5유로나 되고 학생요금은 유럽의 학생들만 할인이 되고 있었다. 값비싼 유리 제품과 중세 유리 유물의 도난 우려 때문에 모든 짐은 입구에서 맡겼지만 카메라 가방은 들고 들어갔다. 내 카메라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직원이 다른 직원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 카메라 가방을 그대로 통과시켜 준다.

▲ 베니스 유리공예박물관. 과거부터의 유리공예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 노시경
이탈리아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총천연색, 휘황찬란한 현대 유리제품들이 나의 눈길을 잡아끈다.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들은 박물관 바깥, 유리제품 상점에서 파는 제품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명품들이었다. 유리 제품들이 정말 흔해진 세상이지만, 이곳의 유리 제품들은 큰 감동을 주고 있었다. 이 유리 제품들은 제품이 만들어질 당시에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리 작품들이었다.

나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유리공예 제품에서부터 시간 순으로 전시된 유리 제품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 무라노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천 여전 전인 982년경에 처음으로 유리공예가 전래되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무라노는 이탈리아, 아니 유럽 유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고, 이 유리공예박물관은 무라노 유리공예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박물관의 가장 오래된 유리제품은 기원전과 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굽 달린 큰 컵과 유리로 만들어진 사발이다. 이 제품들은 틀에 넣고 공기를 불어 만든 제품과 자유롭게 공기를 불어넣어 만든 유리 공예 작품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유리를 만드는 기본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 유리공예박물관 전시실. 화려한 무라노 유리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 노시경
이탈리아

박물관은 조용하면서도 현대적 분위기의 디자인을 품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다른 원료로 만들어진 제품은 없고 모두 유리로만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박물관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라노 유리 공예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제품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이곳 무라노에서 생산된 유리공예 전시품들 중에 가장 오래된 제품은 14세기에 만들어진 유리 제품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고대의 백색 식기는 참으로 이국적이다. 비록 투박하고 유리의 빛이 영롱하지 못하지만 유리의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물들이다. 작품들 중에는 주먹 만한 크기의 갈색 유리병들이 미완성인 상태로 전시 중이다. 볼 품 없지만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남아 있는 소중한 유물들이다.

이 박물관의 유명세는 베니스만의 미적 감각이 가미된 유리 공예를 끝도 없이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곳에 전시된 유리 공예작품은 무려 4,000 여점에 달하고 유리를 제작하던 과거의 도구까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다른 나라에서 아직 무라노의 유리공예를 따라오지 못하던 시절인 18세기와 19세기 중엽까지의 섬세한 유리공예 작품들이 주로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를 구워 온갖 그릇으로 사용하듯 당시 무라노에서는 총천연색의 유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라노 섬을 포함하는 베니스는 동방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융성하던 나라였다. 자연히 베니스는 동방으로부터 선진적인 유리 공예 기술을 배우고 도입하게 되었고, 특히 14세기 중엽 이후에는 화려하고 섬세한 베네치안 글라스 특유의 디자인과 색상이 발현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베니스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유리 공예품의 생산지로 발전하여 왔다.

나는 이 유리공예박물관의 매력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심미적인 예술작품의 정수들이 모여 있는 진짜 박물관을 만나는 뿌듯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사진촬영 금지라는 표지는 있지만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는 직원은 없었다. 디지털 카메라의 모니터에 담긴 유리제품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단지 눈으로 구경하는 것이지만 나의 마음은 즐거웠다.

나는 바다 위 외딴 섬의 공방에서 수세기 동안 만들어졌을 유리의 마술을 상상해 보았다. 유리 공예의 장인들은 유럽 각 나라의 귀족들로부터 인정받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이 섬에 모이게 되었고, 이곳에 발을 디딘 유리 공예의 장인들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한 가지 일에 미쳐야 고수의 경지에 미칠 수 있다고 하듯이 이 섬에 잡혀버린 장인들은 미친 듯이 작품을 만들었고 베니스 유리 제품의 명성을 쌓아갔던 것이다. 오묘한 색상과 정교함을 자랑하는 무라노 유리 공예의 명성은 쉽게 얻어진 게 아니라 평생을 이 섬에서 유배된 듯이 살았던 그들의 희생 위에서 이룩되어진 것이었다. 수로를 사이에 둔 당시 유리공예 공방에서는 유리 제품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 천장에 걸린 현란한 유리 샹들리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유리만 가지고 저런 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유리는 보석이 가지지 못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유리가 보석 대비 제조비용이 저렴해서 보석보다 인기가 없을 뿐이지 그 아름다움은 보석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유리공예박물관의 창밖. 베니스의 마을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전시된 유리 공예품 중 가장 압권은 유리로만 만들어진 거대한 분수 모형이다. 전시실의 한쪽 구석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유리 분수에는 유리로 분수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롱한 유리 분수물이 전시실을 밝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무라노 섬의 수로가 내려다보이는 박물관의 2층 창가에 섰다. 아! 그리도 그리던 베니스의 마을, 베니스의 바다가 창밖에서 어우러지고 있었다. 바다에 면한 집들은 오래 되어 헐었지만 역사의 풍상을 안고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붉은 집들은 이곳의 하늘과 바다와 너무 잘 어울렸다.

▲ 유리공예박물관 안마당. 대리석 우물 위에 총천연색의 유리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나는 아내, 딸과 함께 박물관 1층의 안마당을 지나 후원으로 가 보았다. 대리석 조각과 함께 무지개 빛깔의 유리공예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도기로 만들어진 인공의 열대나무들이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붉은색 침대의 현대적 디자인인 박물관의 과거 작품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고향이었다.

▲ 유리공예박물관 후원. 베니스 비엔날레의 고향답게 현대적 디자인을 뽐내고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후원의 잔디밭에는 사람도 몇 없다. 나는 벽돌을 쌓아 만든 벤치에 아내와 함께 앉았다. 베니스 시내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무라노 섬의 적막함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의 딸이 엄마, 아빠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 정원 안에는 우리 가족만 남게 되었다. 나는 이 고요한 행복을 가족과 함께 함에 너무 행복했다.

Posted by 동봉
,

사람을 굳어버리게 하는 괴기스러움

[유럽기행 53]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기행
09.06.30 09:32 ㅣ최종 업데이트 09.06.30 09:32 노시경 (prolsk)

르네상스의 본고향, 피렌체의 한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아침부터 호텔 로비의 PC를 찾았다. 한국에서 예약한 우피치(Uffizi) 미술관의 답변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인 일인지 로비의 PC에는 국내의 포털 메인화면이 나타나지지 않았다.

호텔 리셉션 데스크의 종업원 아가씨에게 데스크의 PC를 잠깐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로그인한 화면이 온통 한글로 가득 차자 호텔의 아가씨가 한글 글자에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미술관 예약확인서를 출력하고 박물관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아내와 딸을 깨웠다.

이탈리아의 아침은 왜 이리 햇살이 맑고 싱그러운지 모르겠다. 투명한 햇살은 땅위에 부서질 듯 깔리고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파랗기만 하다. 시원한 아침 공기는 앞으로의 여행을 설레게 한다.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까지 먼저 이동하기로 했다. 광장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걸어서 이동할 경우에 아침부터 다리의 힘이 많이 소진될 것이다. 나는 피렌체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호텔 바로 앞의 역까지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딸, 신영이의 발걸음이 자꾸 뒤쳐졌다. 식사를 서둘러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체한 모양이다. 나는 택시 정류장 앞에서 신영이의 투정을 들으면서 택시를 기다렸다. 어제 로마에서 강행군을 한 신영이의 몸은 휴식을 원하는 상태인 것 같지만 수많은 여행자들이 유적지마다 긴 줄을 서는 피렌체에서 한껏 늦장을 부리다가는 아무 곳도 입장할 수 없다는 상황을 나는 알고 있었다.

택시는 피렌체의 구시가로 들어섰다. 작고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길을 택시는 잘 빠져나가고 있었다. 택시 앞 차창으로 아침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하얀 역광이 나올듯한 빛이 얼굴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맑은 아침 햇살 속에서 가족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 아침을 맞는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부지런한 여행자들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다.
ⓒ 노시경
피렌체

나는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지만 내가 준비한 답사 일정을 시작할 수 없었다. 나는 피렌체의 햇살 가득한 광장에서 화장실을 먼저 찾아야 했다. 신영이가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계속 찾았기 때문이다. 이 아침에 어디 가서 화장실을 찾아야 하나? 내가 한국에서 수집한 수많은 피렌체의 정보 속에 시뇨리아 광장의 어디에 화장실이 있는지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작은 돌발상황에 대한 순발력이 필요했다.

유럽의 옛도시에서는 화장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문을 연 큰 식당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시뇨리아 광장을 면한 곳에는 몇 곳의 식당과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첫 번째로 찾아간 식당은 방금 문을 연 듯 했고 남자 종업원이 나무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물에 젖은 식당의 야외 바닥이 아침 햇살에 빛나며 말라가고 있었다.

내가 식당 야외좌석을 청소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다가서자, 그는 자기가 청소하고 있는 물기 묻은 바닥에 내가 올라서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는 화장실은 여기저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자기 식당 손님도 아니고 식당일 개시를 위해 청소하고 있는데 화장실을 찾는 나를 반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주변에서 가장 크고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식당을 찾았다. 이 리보이레(RIVOIRE) 레스토랑의 야외 좌석에는 이미 많은 피렌체 시민들이 앉아 아침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크기나 내부 장식으로 보아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 내부로 나는 가족과 함께 무작정 들어섰다. 나는 손님인양 종업원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나는 식당을 가로질러 식당 내부 가장 안쪽에 자리한 화장실을 찾았고 신영이는 화장실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고급 갈색 목재로 마감된 화장실은 참으로 안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백인 여자 어린이가 화장실 앞에 줄을 섰다. 나는 신영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야외박물관 같은 시뇨리아 광장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수준 높은 조각상들이 광장을 에워싸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광장의 모든 조각상들은 누구나 한 번씩은 보았을 정도로 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 광장은 수많은 명작들이 남아 있었다.

▲ 시뇨리아 광장의 넵튠 분수. 바다의 신 넵튠이 늠름하게 서 있다.
ⓒ 노시경
피렌체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넵튠(Neptune) 분수에서는 물줄기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넵튠은 나 어릴 적 만화에서 많이 보았던 그리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로마화된 이름이다. 1575년에 바르톨로뮤 아마나티(Bartolomeo Ammannati)가 만든 넵튠 대리석상은 조각상들을 내려 보는 위치에서 늠름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넵튠 상은 주변의 조각상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넵튠을 둘러싼 물의 요정, 아들인 트리톤(Triton)이나 광장의 다른 조각상들에 비해 넵튠은 신체 비례상 얼굴이 너무 커 보인다. 그의 턱을 감싸고 있는 수염이 너무 덥수룩해서 얼굴이 너무 도드라지고 있었다. 광장 안에서도 넵튠신만 유난히 커서 광장 조각상들과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이 넵튠상은 내가 어디선가 보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넵튠이 부리는 바다의 말 4마리는 어찌 된 일인지 잘츠부르크 구시가 광장분수에서 보았던 말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도시 곳곳의 건물과 조각상들이 이태리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넵튠상은 로마의 어디선가 본 듯한 조각상이다. 이 넵튠 분수대는 넵튠 조각을 중심으로 트리톤, 물의 요정, 해마로 이루어진 로마 트레비 분수와 형제 같이 닮은 조각상이다.

나는 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영화 '전망 좋은 방'을 떠올렸다. '전망 좋은 방'의 여자 주인공은 피렌체 여행을 왔다가 이 시뇨리아 광장에 들르게 된다. 여주인공으로 나온 영국 배우, 헬레나 보헴 카터(Helena Bonham Carter)는 이 광장에서 그로테스크한 한 조각상을 보고 기절을 하게 된다.

그 작품은 이 광장의 어떤 작품이었을까? 내가 대학생 때 보았던 영화라서 그 조각 작품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배우가 충격을 받고 쓰러졌던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 시뇨리아 광장의 란치 회랑. 그리스 로마신화의 영웅들이 조각되어 있다.
ⓒ 노시경
피렌체

나는 3개의 대형 아치로 이루어진 란치 회랑(Loggia dei Lanzi)을 우선 찾았다. 고딕 말기 양식의 건물 내부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표현한 여러 조각상들이 박물관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사람을 기절케 한 강렬한 힘을 가진 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영화 대본 속에서 주인공이 기절하는 상황설정이 가능케 한 그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 눈 앞에는 강렬한 힘을 지닌 한 작품이 나타났다. 1554년에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가 만든 '메두사(Medusa)의 목을 베어 든 페르세우스(Perseus)'였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페르세우스 조각상은 주변의 대리석 작품들과 달리 청동으로 만들어져서 강렬한 구리빛이 감돌고 있었다.

▲ 메두사의 목을 베어 든 페르세우스. 괴기스러운 모습에 몸이 오싹해진다.
ⓒ 노시경
피렌체

페르세우스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는 목이 잘린 메두사의 끔찍한 얼굴을 든 채로 잘려나간 메두사의 몸통을 밟고 있다. 헬레나 보헴 카터는 아마도 뱀의 형상을 한 머리카락과 함께 목에서 피가 떨어지는 메두사의 두상을 보고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어찌나 끔찍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던지 나는 마치 신화 이야기가 실제의 사실인양 착각하고 있었다. 잘려나간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마치 신화에서와 같이 내 몸이 돌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러한 괴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광장에 배치해 놓은 피렌체 사람들의 문화와 이런 작품이 가능했던 문화적 자연스러움에 경외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앞서서 우피치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아내와 딸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 청동상 앞에 돌같이 서 있었다.

광장에는 각국에서 온 부지런한 여행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여름의 아침 태양은 아직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건물 그림자들은 광장을 향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광장의 아침은 상쾌했다.

Posted by 동봉
,

사타구니 사이에 사탑을 세우는 남자들

[유럽기행 61] 이탈리아 피사(Pisa) 기행
09.11.24 10:41 ㅣ최종 업데이트 09.11.24 10:41 노시경 (prolsk)

내가 이탈리아의 피사(Pisa)를 찾아가는 이유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나는 기울기가 그렇게 심한 피사의 사탑(Torre di Pisa)이 어떻게 무리 없이 서 있는지 의문이었다. 지반공사를 해서 기울어진 사탑을 억지로 붙들고 있겠지만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중세의 건축물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멋진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피사는 작은 도시다. 역에서 걸어 30분이면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까지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의 걷는 시간을 잘 고려해야 했다. 하루 종일 걷는 여행을 하는 다리가 지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중앙역 앞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어쩐 일인지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시골 도시이고 관광지까지 너무 가깝기 때문인 모양이다.

▲ 피사의 버스 정류소. 역 앞에서 큰길을 건너면 피사의 사탑으로 가는 버스 정류소가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나는 피사 중앙역에 다시 들어가서 버스 티켓 3장을 샀다. 버스 티켓은 내린 후 60분 이내에 타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종이 티켓이었다. 나는 아내와 딸에게 버스 티켓을 나누어 주었다.

버스는 중앙역을 등지고 계속 직진하고 있었다. 이곳이 이탈리아의 유명한 관광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피사의 주민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지 거리에는 사람 보기가 힘들고 길가의 가게들도 조용했다.

▲ 피사의 아르노 강. 이 강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지중해가 나온다.
ⓒ 노시경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보았던 아르노(Arno) 강이 이곳 피사에도 흐르고 있었다. 피사가 피렌체보다 바다에 더 가까운 하류이기에 강폭은 더 넓었고 강물은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Toscana) 주를 적시고 있었다. 저 강의 끝에는 바다, 지중해가 나온다. 11세기 말 피사가 강력한 해상 공화국으로 번영했던 시절, 이곳은 바로 바닷가였다. 천년 동안의 아르노 강 퇴적작용으로 바다가 서쪽으로 10km쯤 이동하고 항구도시였던 피사는 내륙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시골 도시 피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달리 적막에 싸여 있었다. 강변의 길가에는 지나가는 사람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 피사가 토스카나 공국에 속했을 당시에 대학과 문예도시로 유명했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버스는 아르노 강을 건너고 얼마 가지 않아서 피사의 사탑 가는 길로 들어섰다. 버스 차창 너머로 한껏 기울어진 사탑의 백색 대리석 구조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말로 거짓말같이 피사의 사탑 주변에 수많은 여행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갑자기 인구폭발의 현장을 만난 것만 같이 여행자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순간, 오늘 피사의 여정을 내가 너무 잘못 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피사의 사탑만 얼른 보고 다시 피렌체에 가서 피렌체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는 계획. 그러나 푸른 잔디 광장이 펼쳐진 피사는 대성당과 세례당, 사탑이 어울리는 작지 않은 곳이었다. 여유 있게 둘러보다가 가고 싶은 생각이 절실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짤 때 이동시간, 관람시간 등을 철저하게 미리 계산하지 않았던 나의 실수가 현실화되는 시점이었다.

이미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서둘러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피사의 사탑 앞까지 걸어가면 나의 딸, 신영이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까지 올라가자고 할 게 뻔했다. 과연 피사의 사탑을 오를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있을 것인가?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휴식을 취하러 온 자유여행인데 뭐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탑에 못 오르면 사탑 밑에서 사탑을 여유있게 즐기다가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여행일정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억지스러운 자기 합리화도 좋은 방법이다.

▲ 피사의 성벽 입구. 피사의 보물들을 지키기 위한 성벽의 높이가 높다.
ⓒ 노시경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성벽의 성문을 통과하게 된다. 성벽은 잘 보존된 모습이고 누구도 기어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성벽은 제노아 등 인근 도시국가와 치렀던 전쟁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다지도 높은 것은 외적의 침입이 극심했고 성벽 내부에 꼭 지키고 싶은 성당과 유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벽 외부에는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이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특히 성문 주변에는 많은 흑인들이 짝퉁 가죽제품을 팔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그 옆에는 수많은 여행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다. 피사도 소매치기로 명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피사의 사탑까지 가는 길가에는 삐딱한 피사의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여행자들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온갖 인종의 여행객들이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아이와 아빠의 건강한 사진 찍기가 유쾌하게 연출되고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여행자들이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정녕 이 사탑은 절대 기울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 피사의 사탑. 많은 여행자들이 온갖 포즈로 사탑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가장 유명한 사진 포즈는 손으로 탑을 가볍게 받쳐서 들거나 등으로 사탑을 업고 있는 모습이다. 나의 딸 신영은 두 손으로 밀어서 사탑을 세웠고 아내는 등 뒤에 사탑을 들어올렸다. 가장 웃기는 포즈는 드러누운 채로 사타구니 사이에 사탑을 넣어 세우는 남자들이다. 그들을 보는 남자들과 알 건 아는 아줌마들이 한참을 웃고 지나간다.

피사의 대성당과 사탑 맞은편에는 신영이의 눈을 설레게 하는 온갖 기념품 가게가 줄을 잇고 있었다. 자꾸 옆으로 빠지려고 하는 신영이의 발길을 서둘러서 '기적의 광장(Piazza dei Miracoli)'이라고 불리는 피사의 대성당 광장에 도착했다.

역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대성당 옆 사탑 주변에 몰려 있다. 대성당 앞의 여행자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성당의 그늘에서 여행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늘에서 햇볕을 즐기는 서양 여행자들은 대부분 햇볕이 부족한 유럽국가에서 온 여행자들일 것이다.

▲ 피사의 대성당과 세례당 둥근 돔과 대리석 조각이 현란하다.
ⓒ 노시경
이탈리아

피사의 대성당과 사탑 주변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달리 주변에 민가나 현대식 건물이 없고 그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사의 사탑 뿐만 아니라 대성당, 세례당도 다 기울어져 있었다. 사탑도 아름답지만 세례당 돔의 붉은 지붕도 햇살 아래 장관이고 대성당 돌기둥의 현란한 조각과 푸른 청동문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대리석의 주산지인 피사의 명성대로 사탑과 대성당의 대리석은 어제 올린 듯이 깨끗하기만 했다. 한 마디로 중세의 운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여행사진에서 수없이 보아온 이탈리아의 대표 건축물, 피사의 사탑. 실제 기울어진 사탑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무려 7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사탑은 2m 60cm, 5도 30분이나 기울어졌다고 한다. 물론 사탑의 한쪽 지반이 약해서 탑이 기울었지만 신의 뜻에 의해서 탑이 기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탑을 세운 사람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기우러진 미학이 피사의 사탑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탑으로 만들었다.

아쉽게도 피사의 사탑은 미리 예약을 해야 오를 수 있는데 안내원을 동반하여 1시간마다 30명씩 밖에 오를 수 없다고 한다. 사탑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다. 사탑의 앞에는 이미 3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까지 사탑에 올라갈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시간이 쫒기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들어 높이가 50m를 넘는 사탑의 맨 상층부를 올려다보았다. 대성당의 종탑으로 지어졌던 저 사탑의 꼭대기 층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갈릴레이의 전설적인 이야기의 현장이 눈앞에 들어 왔다. 현대에 와서 갈릴레이가 진짜 이곳에서 낙하의 법칙과 관련된 실험을 했는지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실제 사실은 나에게 상관이 없었다. 이 현장은 초등학교 시절 갈릴레이 위인전의 흑백 그림 속에서 내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했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을 직접 마주하고 서 있었다.

무게 차이가 나는 2개의 공을 동시에 낙하시키면 무게에 관계없이 동시에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 아무리 단순한 사실이라도 이를 객관화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은 훌륭한 과학자들의 업적이다. 갈릴레이가 낙하의 법칙을 실험한 곳이 피사의 사탑이 아닐 수도 있고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히려 틀릴 수도 있다. 16세기 말의 상황을 정확히 밝혀내기는 현재로서는 힘든 일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주장의 논거를 내세우면서 단지 추측의 나래를 펼 뿐이다.

이 피사의 사탑에서는 실제로 5년에 한 번씩 낙하가 이뤄진다. 낙하하는 물체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몸을 날리면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탑은 자살을 막기 위해 예약제를 실시하고 안내원의 동행에 의해서만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대성당 뒤편의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온 단체 여행자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이제 유럽의 여행지마다 한국인이 없는 곳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온 패키지 여행자들의 이야기 소리가 이탈리아어, 영어 속에서 또렷이 들렸다. 여행 가이드가 시간의 압박으로 피사 사탑의 계단을 오르지는 못한다고 한 모양이다. 자유여행을 하는 나의 가족이나 패키지 여행을 온 한국여행자들이나 모두 시간이 부족해서 사탑을 오르지는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둘러보는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 피사의 기념품 가게. 피사의 기념품들도 사탑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햇살을 피해 화장실 옆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모든 기념품들이 피사의 사탑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년에 1밀리미터씩 기운다는 피사의 사탑. 이제는 더 이상 눈에 띄게 기울지는 않는다는 사탑은 기념품 가게의 유리컵까지 기운 모양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보여주는 사탑이 이탈리아 최고의 마케팅 콘텐츠가 되어 팔리고 있었다. 스토리가 무궁무진한 이 사탑 한 개로 인해 피사는 많은 여행자들을 세계로부터 불러오고 있었다.

잠시 휴식 속에서 피사 대성당과 세례당, 사탑의 전경을 감상하던 나의 가족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탑이 원래 종탑의 기능에 맞게 종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성문 밖까지 천천히 걸어갔고 피사 역까지 가는 버스가 곧 우리 앞에 와서 멎어섰다.

버스 티켓은 버스 검표기에 넣어 펀칭을 하고 타도록 되어 있었다. 아내와 딸이 버스 위에 먼저 올라타서 티켓에 펀칭을 했고 나도 따라서 검표기에 티켓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검표기 안에 들어간 내 종이티켓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도저히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탈리아 아가씨가 나를 도와주다가 티켓이 나오지 않자 포기하고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운 없으면 만나게 된다는 버스티켓 검표원 아저씨 2명이 우리 버스에 올라탔다. 순간 내 마음에 긴장감이 돌았다. 버스 티켓이 없는 사람은 현장에서 수십 배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표할 티켓이 없었고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족 앞에서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티켓이 없어진 과정을 지켜 본 이탈리아 아가씨에게 눈짓을 보냈고 내 상황을 이 아저씨들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검표기를 가리켰다.

순간 이 아가씨는 당시 상황을 이탈리아어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검표원 아저씨가 우리 가족을 보고 웃었다.

"검표기가 지금 무척 배가 고팠던 게 틀림 없어!"

나와 아내, 딸, 그리고 검표원 아저씨, 친절하고 예쁜 이탈리아 아가씨, 그리고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함께 크게 웃었다. 버스는 피사 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Posted by 동봉
,

기울던 ‘피사의 사탑’이 멈췄다 [중앙일보]

800년 끊임없이 옆으로
기초 보강 … 7년간 그대로



800여 년간 끊임없이 남쪽으로 기울던 피사의 사탑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은 땅속에 묻은 첨단 모니터로 관측한 결과 7년간 기울기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했다고 BBC 등이 28일 보도했다.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대승한 것을 기념해 세운 종탑이다. 종루를 포함해 8층 규모이며, 나선형으로 된 296개의 계단을 밟고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곳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 있다.

이탈리아 천재 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에 따라 1174년 착공했지만 공사 도중 지역이 불안정한 점토 지대여서 탑이 기울고 있었다. 몇 차례의 공사 중단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1372년 기울어진 상태에서 꼭대기 종루까지 완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매년 약 1㎜씩 남쪽으로 기울어져 왔다. 그래서 ‘기울어 가는 탑’이란 뜻에서 ‘사탑(斜塔)’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1934년 탑을 바로 세우라는 무솔리니의 명령에 따라 토대에 콘크리트를 부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990년 그대로 두면 수십 년 안에 탑이 붕괴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자 ‘피사의 사탑 국제위원회’는 그해 내부 관람을 금지하고 기초 보강 공사에 나섰다.

기초를 강철 케이블로 묶고 콘크리트로 보강했으며, 탑 북쪽 방향의 흙 700t을 퍼냈다. 4000만여 달러(약 400억원)를 쏟아 부은 대공사를 끝내고 일반에 다시 공개한 2001년에는 10년 전보다 45㎝ 정도 바로 선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변화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공사를 지휘해 온 지질학자 미켈레 자미올코프스키는 “현재의 기울기는 1838년 수준”이라며 “앞으로 200~300년은 안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탑을 똑바로 일으켜 세울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상품이 됐기 때문이다. 

원낙연 기자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