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린 팔뚝을 돌려 줘!

[유럽기행 67] 바티칸 벨베데르 궁(Cortile del Belvedere) 기행
09.12.29 10:41 ㅣ최종 업데이트 09.12.29 10:43 노시경 (prolsk)

나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 바티칸의 유물들에 대해 하루종일 설명 해준다는 바티칸 지식 투어를 신청했다. 나는 하루를 온통 바티칸에서만 보내기로 했다. 숙소도 바티칸 앞에 잡았다. 나와 나의 가족은 어제 저녁의 피곤함을 물리치고 아침부터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지식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오타비아노 에스 피에트로(Ottaviano S. Pietro) 지하철 역까지 8시 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아침 식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택시를 집어탔다. 역 앞에서 내린 우리는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다행히 지식 가이드와 한국 여행자들은 아직 바티칸으로 이동을 하기 전이었다. 미혼으로 보이는 가이드 아가씨는 자신있고 씩씩한 목소리로 인원 점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아가씨가 나를 지식의 바다로 마음 편하게 안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바티칸 성벽 아래 늘어선 입장대기자들

▲ 바티칸 입장 대기 줄. 아침 8시만 넘어도 입장 대기 줄은 끝 모르게 이어진다.
ⓒ 노시경
바티칸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지만 바티칸 성벽 아래에는 바티칸에 입장하려는 관광객들의 줄이 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이 아침에, 놀라운 광경이었고 아침부터 기가 질렸다. 우리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입장 대기 줄이 있었다. 긴 줄은 바티칸 성벽을 따라 이어졌고 입구를 향해 한번 좌회전으로 꺾인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 가이드 아가씨가 우리를 안심시켰다.

"앞을 보지 말고 뒤를 보세요. 우리 뒤로 저렇게 긴 줄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 가족 뒤쪽으로도 백미터는 되어 보이는 줄이 순식간에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가로로 8명씩 맞춰 서 있는 줄이 내 앞뒤로 수백 미터씩 이어지고 있었다. 잘 훈련된 대한민국 여행자들은 다른 어느 나라 여행자들보다 일사불란하게 줄을 잘 맞췄다. 나는 흡사 초등학교 때 수많은 친구들과 줄을 맞춰 서던 매스게임 연습시간이 생각났다. 수많은 군중 속에 나와 나의 가족이 박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바티칸에 입성하기 위해 뙤약볕을 견디고 있었다.

바티칸에 입성하기 위해 2시간 대기하는 것은 보통이라고 들었지만 우리 일행은 40분 만에 바티칸 박물관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아침 8시 조금 넘어 입장 대기 줄에 합류했기 때문에 바티칸에서의 천금 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로마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바티칸의 거대한 성벽을 통과해 신성한 언덕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바티칸 내부로 들어선 후에도 정식 입장을 위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우리는 또 줄을 섰지만 이미 거대한 줄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정도 줄은 우스웠다. 박물관 입장표는 여행자들 각자가 구입해서 들어갔다. 티켓 검표를 하는 아저씨가 신영이 나이를 묻는 것 같았지만 못 알아듣는 척했다. 미취학 어린이는 관람요금이 공짜였기 때문이다.

▲ 솔방울 정원. 푸른 하늘과 녹색 잔디,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어우러진 멋진 정원이다.
ⓒ 노시경
바티칸

우리는 박물관 내부의 중앙정원인 피냐 정원(Cartile delle Pigna)에 모였다. 박물관 내부의 시원스런 정원 한편에 4m 높이의 거대한 솔방울 모양의 청동 조형물이 있어서 이 정원은 솔방울 정원이라고 불린다. 이 청동 솔방울은 원래 고대 로마와 바티칸의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다가 이 정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푸른 하늘과 초록의 잔디, 그리고 솔방울과 고대 조각상들이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계의 어느 정원도 그 값어치와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 없는 정원이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구본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운데 부분이 썩은 것처럼 보이는 이 지구는 오염되고 병들어 가는 지구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반질거리는 이 현대적 작품이 중세의 박물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선조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디자인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지구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돌리면 빙글빙글 돌아간다고 한다. 한번 돌려보지 않은 것이 괜히 후회된다.

정원의 곳곳에는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을 장식하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솔방울 정원 옆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서 가이드들의 설명을 듣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 가이드로부터 한 시간 정도 바티칸박물관의 명작들에 대한 사전교육을 들은 후 바티칸 박물관을 구성하는 곳 중의 한곳인 벨베데르 궁(Cortile del Belvedere)의 정원으로 갔다.

나폴레옹이 약탈했던 아폴로상, 2천년된 복제품

▲ 벨베데르 정원.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이 야외에서 햇볕을 맞고 있다.
ⓒ 노시경
바티칸

벨베데르의 팔각 모양 정원은 서양 조각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들이 가득 채워진 황홀한 곳이다. 역대 교황들이 모아 놓은 그리스와 로마의 명품 조각상들이 탁 트인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외에 개방형으로 전시된 진품 조각상들이 아름다운 신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원을 감도는 빛의 향연이 대리석 조각상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폴레옹이 한때 약탈해갔다던 아폴로 상이다.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청동상을 로마에서 2세기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작품이다. 아폴로 조각상 왼편의 원통형 나무 기둥이 그리스 조각상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복제품의 역사가 2천년이니 복제품이라고 말하기도 머뭇거려진다.

이 아폴로 조각상은 그리스 시대에 조각된 아폴로 상 중에서도 가장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재 조각가에 의해 대리석이 장난감처럼 농락당하고 있었다. 아폴로의 다리를 유심히 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리의 핏줄이 꿈틀거리면서 대리석 다리 위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폴로상.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수작이다.
ⓒ 노시경
바티칸

왼팔에 걸린 옷자락은 아폴로의 팔뚝에서 지금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옷자락을 몸에 두르지 않고 팔에 건채 자신의 성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놓고 있는 점이다. 나는 괜히 바바리맨이 연상되어 피식 웃었다. 이 벨베데르 정원의 그리스 조각상들이 대부분 근육질 남성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남성의 힘에 대한 숭배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남성의 벗은 몸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인들은 요새 남성들이 몸짱을 선호하듯이 남성의 가꾸어진 신체가 아름다움의 대상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아폴로는 주변의 다른 신들과 같은 근육질이 아니라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태양의 신 아폴로는 무언가 절제된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파마를 해서 길게 내려뜨린 듯한 그의 머리카락은 여신과 같은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그리스 신중 남성미의 이상형이라는 아폴로는 오히려 실제 남성보다도 더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왠지 그리스에 넓게 퍼져 있었다던 동성애의 영향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폴로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불세출의 명작이 이 정원 안에 있었다. 이 조각상은 가장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다른 그리스의 신상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 작품은 나 같은 범부의 눈을 설레게 했다.

로마 공중목욕탕을 장식하던불세출의 명작, 라오콘

그 조각상은 트로이의 아폴로 신전 제관이었던 라오콘(Laokoon)이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 당시에 그리스 군의 목마를 성안에 들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그리스를 후원하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고, 라오콘과 두 아들은 포세이돈이 보낸 뱀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라오콘은 기원전 100년 경에 그리스 로도스(Rhodes) 출신의 조각가 3명에 의해 조각되었다. 이 라오콘은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신비한 전설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506년에 로마의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 위, 네로의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 근처에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포도밭을 갈던 한 농부가 땅 밑의 공중목욕탕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라오콘 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라오콘은 로마의 공중목욕탕을 장식하던 화려한 장식품이었다.

발견 당시 라오콘은 오른쪽 어깨와 팔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이 전설적인 대작의 오른팔을 복원하기 위해 저명한 예술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세기의 천재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남아 있던 어깨 근육과 가슴 근육의 뒤틀린 모양을 주시하였다. 그는 남아있는 육체의 근육 모양을 보면 오른팔이 굽어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천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라오콘의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잘려나갔던 두 아들의 오른팔도 오로지 상상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 잘못 복원된 라오콘 16세기에 복원된 라오콘상은 팔이 곧게 뻗은 형태로 잘못 복원되어 있다.
ⓒ 노시경
바티칸

▲ 라오콘상. 뱀에 물려 죽어가는 라오콘 부자의 일그러진 고통의 표정이 압권이다.
ⓒ 노시경
바티칸

사라진 오른팔...잘못된 복원, 그리고

그러나 무려 4백년이나 지난 1957년에 라오콘은 다시 로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로마시대 한 조각상의 오른팔이 로마의 한 석공 작업장에서 발견되었는데 뒤늦게 이 팔이 라오콘의 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결국 1960년에 라오콘의 오른팔은 마치 기적처럼 제 위치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 팔은 놀랍게도 미켈란젤로가 말했던 것과 같이 뒤로 굽힌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재 라오콘의 팔은 굽힌 채로 복원되었고 마음대로 상상하여 붙인 두 아들의 오른팔 조각은 다시 해체되었다. 라오콘 자체도 불세출의 명작이지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과정이나 이 명작을 복원하기 위한 천재들의 스토리가 라오콘 조각상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죽음을 맞게 된 라오콘은 고통에 절규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분노, 안타까움, 슬픔이 살아 있었다. 죽기 직전,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과 근육의 뒤틀림이 몸서리쳐지듯이 생생하고 처절했다.

라오콘 부자에게 덤빈 뱀은 라오콘 부자의 온 몸을 칭칭 감고 온 몸을 조여들고 있었다. 라오콘 부자를 공격한 뱀은 모두 두 마리였다. 뱀 한 마리는 머리를 쳐들고 라오콘의 등 아래 부분을 막 물려고 하고 있었다. 뱀이 입을 벌리고 라오콘을 물려는 동작이 순간포착처럼 멈춰 있었다. 라오콘의 근육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틀리고 있었다. 그의 경직된 왼발은 금세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또 한 마리 뱀의 머리를 찾아보았다. 다른 뱀 한 마리는 왼편의 둘째 아들 가슴을 이미 물어버린 상태였다. 뱀에 물린 아들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른편의 큰 아들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동생을 보면서 두려움과 안타까움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공포의 표정을 단단한 대리석에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들의 신에대한 믿음과 그리스 신화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대리석 조각에 녹아들어간 것인가? 라오콘 대리석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대리석 조각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고 2천년이 지난 현대에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닳고 상처가 심한 라오콘의 오른손을 보면서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라오콘은 나를 그리스 로마신화의 바다 속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두 아들의 잘린 팔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았다. 두 아들의 오른팔도 로마 시내 어딘가의 땅속 유적에 묻혀 있지 않을까? 작은 아들의 팔은 하늘로 곧게 뻗은 채로 절규하고 있지 않을까?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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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시내 황소 성기는 왜 움푹 패여 있을까

<유럽기행 72>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갤러리아
10.01.29 10:49 ㅣ최종 업데이트 10.01.29 10:49 노시경 (prolsk)

이탈리아 북부의 경제 도시 밀라노. 우리에게 패션의 도시로 알려진 밀라노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다르게 현대적이고 돈의 윤기가 흐른다. 나는 고대와 중세시대인 로마를 떠나 현대 도시로 시간여행을 와 있었다. 거리의 젊은이들은 남부 이탈리아 젊은이들에 비해 키도 크고 옷도 세련되게 차려 입었다. 나이 어린 아가씨들이나 연로한 할아버지들도 옷을 입는 개성이 뚜렷했다. 이 멋쟁이들은 거리의 아기자기한 오렌지색 트램을 오르내리며 도시를 장식하고 있었다.

밀라노의 중심, 두오모에 서서 스칼라 극장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복합상가의 아케이드 지붕이 밀라노의 하늘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갤러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의 거리로 불리고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이 복합 건축물은 현대 서울에서 유행하는 쇼핑몰을 무려 130년 전에 이미 구현한 곳이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유럽 3대 갤러리아, 밀라노의 응접실이다.
ⓒ 노시경
밀라노

착하지 않은 판매가격, 유행과 패션은 지구 스타일 선도

과거에 이 갤러리아 자리는 정치인들이 회합하는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갤러리아 건물은 1865년에서 1877년 사이에 지어졌으니 이탈리아가 통일되던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아케이드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는 건축물 중에서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이다. 현재도 이 갤러리아는 유럽 3대 갤러리아 중 하나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갤러리아는 밀라노 중심의 두 축인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극장 앞 광장을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위풍당당한 쇼핑몰을 본 적이 없었다. 갤러리아는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가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갤러리아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 가게에 들어가기도 하고 밖에서 둘러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한들거렸다. 갤러리아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천장 높은 갤러리아 내부에는 전통의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벤츠 멀티샵, 부띠끄와 함께 프라다 본사 같은 명품 브랜드 가게들이 한 공간씩 들어서 있다. 판매가격은 착하지 않은 편이라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곳의 화려한 거리와 가게들의 유행과 패션이 지구의 스타일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 거리는 '밀라노의 응접실'이었다.

건축물 입구에서부터 이 하나의 복합 건축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갤러리아 건물의 각 부분은 서로 어울려 하나의 전체적인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3층의 현란한 건축물이 십자가 모양 회랑을 사이에 두고 블록을 이루고 있었다. 사거리를 이루는 건물들은 독립적으로 건축된 별개 건물이지만 한 건축물같이 보였다.

이 4개 블록 사이 길 위로 촘촘한 철제 프레임으로 연결된 아치형 유리 천장이 마치 지붕같이 덮여 있었다. 회랑 위에 지붕을 만들면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지붕은 사람들에게 편히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고 거리를 하나로 만들고 있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유리로 뒤덮인 천장 아래에 많은 여행자들이 몰려든다.
ⓒ 노시경
밀라노

밀라노에 하나 밖에 없는 백화점 리나센떼, 세련된 디스플레이

유리 천장은 비 오는 날 길 가는 사람들의 비를 피하게 할 것이다. 오늘같이 맑은 날은 밝은 태양이 아케이드의 길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때 당시에 이 높고 넓은 공간을 모두 유리로 덮으려고 한 생각은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이 유리 천장은시원하게 높아서 갤러리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천장 유리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햇살이 들어오는 곳 가게 앞에는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이 구분되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살아가는 이탈리아인들은 빛이 부리는 마술의 힘을 아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빛의 마술은 회랑 바닥 대리석을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갤러리아가 두오모 광장을 면한 곳에는 밀라노에 하나 밖에 없는 백화점인 리나센떼(Rinascente)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탈리아에서는 신기하게 보이는 백화점이다. 윈도우 디스플레이가 과연 패션의 나라답게 컬러풀하고 세련되어 있었다. 밀라노의 문화와 유행을 선도하는 큰 가게, 리나센떼에서 아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활기가 넘쳤다. 아내는 내가 수영장에서 입을 수영복을 하나 샀다.

우리는 조금 쉬어가기 위해 백화점 7층의 푸드 마켓을 찾았다. 7층에는 레스토랑 외에도 차와 커피를 파는 카페, 와인 바, 초콜릿 바, 샌드위치 바, 모짜렐라 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물을 병에 넣어 파는 가게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레스토랑 마이오. 리나센떼 백화점의 이름난 레스토랑이다.
ⓒ 노시경
밀라노

높이가 무려 47m인 중앙돔, 지구 상징

이 식당가는 이탈리아 정통 요리 외에도 다양한 스낵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레스토랑 마이오(MAIO)는 무척 세련되고 깔끔했고, 그 옆의 스시 바에서는 많은 밀라노 시민들이 앉아서 접시에 담긴 스시를 먹고 있었다. 이 7층 푸드 마켓 남쪽이 인기가 있는 것은 장엄한 밀라노 두오모의 외관을 바로 눈앞에서 꽉 차게 감상할 수 있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 앉을 자리는 전혀 빈 공간이 없었다. 나는 계획을 수정해서 갤러리아 입구 1층 푸드 코트로 내려갔다. 우리는 피자 큰 조각과 함께 올리브, 토마토가 들어간 볶음밥을 먹었다. 배가 부르고 다리가 편했다.

나와 나의 가족은 다시 갤러리아를 산보했다. 십자로 같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갤러리아 중앙에 서자 유리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축물 전체의 균형을 잡고 있는 중앙 유리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높이가 무려 47m에 이르는 중앙 돔은 지구를 상징하고 있었다.

중앙 돔의 바로 아래 4 방향으로는 지구의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을 상징하는 여신들이 그려져 있다. 벽화의 그림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벽화 속 대륙이 있는 방향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결국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 그려진 이 벽화들은 이탈리아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들인 것이다.

▲ 돔 천장의 벽화 십자가 모양의 회랑으로 4개 대륙을 상징하는 여신이 그려져 있다.
ⓒ 노시경
밀라노

맥도날드 가게마저 전통 로고 포기하고 주변과 조화를 이뤄

각 대륙 원주민들과 함께 묘사된 여신들은 농경, 공업, 과학, 예술과 같은 4가지 인간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하늘에 붙은 벽화 곁에는 독수리상들이 날개를 한껏 펼치고 있고, 여신 조각상들은 벽화를 떠받치고 있다. 여신 조각상들은 유리 돔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함께 어두움도 머금고 있었다.

1층 회랑 가게들의 간판은 모두 도도한 검정색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간판이 무질서하게 자신만을 보라고 소리치지 않고 가게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깔끔한 간판들로 인해 거리의 미관이 보존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게에 이름만 적힌 황금색 간판이 무척이나 명품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게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성을 가진 작품같이 빛난다.

이 회랑의 간판들은 황금색 간판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맥도날드 가게마저 자신들의 전통 로고를 포기하고 다른 간판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서민들의 패스트푸드인 맥도날드 가게가 명품인 척 하고 있는 곳이다.

갤러리아의 바닥도 놀랍다. 자세히 보면 이곳 바닥은 전체가 대리석과 타일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갈색, 푸른색의 잔잔하고 화려한 색상으로 다양한 문양이 채색되어 있다. 모자이크 바닥은 흡사 거대 미술관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갤러리아 십자로 한 중앙 바닥에는 십자가 문양이 들어간 깃발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문양은 밀라노가 자리한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Lombardia) 주의 상징문양이다. 그리고 회랑 사거리의 4개 방향에는 이탈리아의 유명 4개 도시를 상징하는 모자이크들이 남아 있다.

▲ S.P.Q.R. 이탈리아 남부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 노시경
밀라노

십자로 모양 회랑 중 남쪽 방향에는 이탈리아 남쪽의 로마를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있다. 여기에는 로마 시내 유적지마다 눈에 띄던 'S.P.Q.R.'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세나투스 포풀루스쿠에 로마누스(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서 로마를 받치고 있던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을 뜻하고 있다. 그 위에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타일 조각이 그려져 있다.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서 테베레 강변의 언덕에 로마 역사상 최초의 나라를 세운 이들이다.

신영이에게 모자이크의 의미를 설명해 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여러 관광객들이 갤러리아 바닥의 모자이크 그림 주변에 둘러서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바닥에는 원형의 월계관과 방패 문양 속에 도약하는 모습의 황소가 그려져 있었다.

▲ 별자리 황소자리 문양. 수많은 관광객의 발꿈치에 황소의 성기가 닳아져 없어졌다.
ⓒ 노시경
밀라노

별자리 12궁도, 유독 황소 성기 부분만 움푹 패여

이 바닥에는 태양의 이동경로에 위치한 별자리 12궁도가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었다. 황소(Taurus)는 그 별자리 중 일부였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별자리 이름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황소의 성기 부분만 유독 움푹 패여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이 황소자리에 대해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서 별점을 치듯이 소원을 비는 곳이었다. 황소의 성기 부분을 신발의 뒤꿈치로 찍고 돌면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면 몸이 건강해지고 왼쪽으로 돌면 자신이나 가족이 바라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1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3 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몇 바퀴를 돌아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많은 관광객들이 구멍에 발을 넣고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고 돌아서 이 구멍은 일 년에 3차례 정도 보수공사를 한다고 한다. 이 갤러리아에 모인 관광객들의 행동을 보니 보수 후에도 황소의 성기는 바로 구멍이 나버릴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유래가 없는 기복신앙이었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별자리들은 사람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점성술일 뿐이다.

▲ 황소자리 문양과 금발의 어린이 이곳을 지나는 모든 여행자들이 황소의 성기를 공격한다.
ⓒ 노시경
밀라노

나는 아내와 딸과 계속 걷고 있었다

그러나 밀라노까지 여행 와서 그냥 갈 수 없지 않은가? 딸, 아내, 나까지 차례로 소원을 빌며 황소의 성기를 힘껏 밟았다. 그리고 한 바퀴씩 돌았다. 우리 뒤로도 금발의 어린 소녀가 성기를 짓밟으며 소원을 빌고 그 아빠는 사진을 찍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어 황소 성기 난타 장면을 보고 웃으며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자이크 속 황소의 성기를 유린하고 있었다.

행운의 상징물이 닳아서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바티칸 성당의 베드로 상 같이 사람의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것이 아니라 형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앞발을 들고 도약하는 황소를 거세해 버렸으니 황소의 충격은 아주 클 것이다.

갤러리아를 나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거리(Cso Vittorio Emanuele II)를 끝까지 걸었다. 물론 아내의 눈에 특색 있어 보이는 가게들은 다 들어가 보았다. 가게의 인테리어가 예쁜 가게, 마네킹이 특이한 가게, 신영이가 좋아하는 인형이 있는 가게까지 모두 들어갔다. 고객들에게 온갖 좋은 말을 하며 꼬시는 것은 어느 가게나 비슷했다. 걷다보니 산 바빌라 광장(Piazza S. Babila)이 나왔다. 계속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Via monte Napoleone)까지 걷고 있었다.

이탈리아 패션의 첨단을 달리는 밀라노의 거리, 나는 아내와 딸과 계속 걷고 있었다. 우리는 갈 때와는 다른 길로 거슬러 갤러리아 방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도 가게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갤러리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소의 성기는 끊임없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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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Pompeii) 유적

이태리 2009. 11. 26. 15:56

나의 몸값은 와인 값의 8배다

<유럽기행 60> 폼페이(Pompeii) 유적 기행
09.11.20 09:59 ㅣ최종 업데이트 09.11.20 09:59 노시경 (prolsk)

서기 79년, 폼페이(Pompeii)는 그 당시의 순간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죽을 당시의 그 동작 그대로 멈춰 있었다. 당시 폼페이에 살던 사람 중 2천여 명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화산재에 그대로 갇혔고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사연이 갑자기 끊기고 그렇게 땅속에 묻혔던 사연은 조금씩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항구도시였던 폼페이의 바닷가 쪽 출입구를 통해 폼페이에 들어섰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공기는 맑았다. 햇살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고 파랬다.

▲ 폼페이의 캐스트. 화산재에 덮여 죽어가던 사람들의 형상이 놀랍도록 그대로 남아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그 유적지 안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살다간 건물 속에는 사람이 살다간 흔적만이 남지만 사람 형상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화산재 아래에 묻힌 사람의 시신은 썩어 없어졌지만 사람이 있던 공간은 화산재 속의 빈 공간이 되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었다. 당시 죽어간 사람의 형상은 석고를 통해 놀랍도록 생생하게 캐스트(cast)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죽어간 그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나의 딸, 신영이는 약간 실망한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산재에 묻혀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아빠를 따라나섰는데 폼페이 내에 보존된 '캐스트'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에 대한 역사서를 읽고 온 신영이는 고고학자가 되어 이곳에서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었다. 신영이는 머리 속에서 그리던 황량한 폼페이의 모습과 이곳의 모습이 다름에 약간 실망하고 있었다. 나의 딸은 직접 발굴을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질식사한 듯한 그의 얼굴에 참혹한 고통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산재에 덮히면서 자신이 이렇게 2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지 않았을까?

나는 폼페이 사람들이 살다간 건축물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서 움직였다. 로마문명에서 번성했던 목욕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공중목욕탕을 찾기 위해 다시 지도를 집어 들었다. 폼페이 안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공중목욕탕만도 세 군데나 됐다. 지도를 보니, 비아 델레 테르메(Via delle Terme)와 비아 델포로(Via del Foro)가 만나는 곳에 중앙광장이 있고 그 앞에 중앙 광장 욕장이 있었다.

이 대형 공중목욕탕은 그동안의 세월과 화산재의 영향을 고려하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현대에 공중목욕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공중목욕탕과 비교해도 기본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서기 79년이면 우리나라에 삼국시대가 태동될 시기이니 당시에 로마의 문화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앞서갔는지 절감할 수 있는 유적이다.

▲ 폼페이 대중목욕탕. 태양광선을 이용한 채광시설이 온탕 내부를 비추고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목욕탕의 천장은 거대한 돔형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 맺히는 물방울이 아래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떨어지지 않고 벽을 타고 흘러내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목욕탕 내부의 천장을 장식하던 모자이크는 당시 공중목욕탕의 화려함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고 하는 말은 이렇듯 화려한 로마시대의 목욕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당시 폼페이 사람들이 움직였을 동선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옷을 보관하는 탈의실은 강력한 어깨근육과 날렵한 복근을 자랑하는 헤라클레스가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로마인들이 그랬듯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탈의실을 지나면 냉탕과 온탕이 나온다. 냉탕에는 대리석 욕탕이 남아 있다. 이 욕탕에는 차가운 냉수가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냉탕에는 천장이 없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 노천탕이기 때문이다. 폼페이 사람들은 주변의 자연을 즐기며 이곳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했을 것이다.

냉탕 다음으로는 온탕이 연결된다. 온탕에서 놀라운 것은 태양 광선을 이용한 채광시설이 어두운 온탕 내부의 세면대 위에 태양빛을 신비롭게 드나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온수가 나오는 급수대는 지금 당장 사용해도 될 만큼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밝은 채광시설 반대편에는 현대의 공중목욕탕보다 더 큰 욕조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고 증기가 나오는 사우나 시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증기 목욕실에는 천장에 새겨진 조각들이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옷을 모두 벗은 남녀는 몽환적 분위기에 젖고 온갖 야릇한 상상도 했을 것이다.

공중목욕탕의 3번째 구조는 마사지실이다. 사우나를 하고 노곤해진 몸에 안마까지 받으면 몸이 노곤해지며 피곤이 풀렸을 것이다. 나는 2천년 전으로 돌아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이 욕조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나는 폼페이 유적지 앞에 당시의 공중목욕탕을 똑같이 만들고 여행자들을 받으면 상당한 돈벌이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목욕탕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사실인데 당시 로마 사람들이 너무 질펀하고 지나치게 목욕문화를 즐겼다고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 로마인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빗나간 섹스를 즐긴 것도 아닐 것이다. 로마제국에 큰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은 것도 로마인들이 이러한 공중목욕탕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씻었기 때문일 것이다.

▲ 폼페이 사창가 골목. 폼페이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 노시경
이탈리아

로마제국, 특히 폼페이가 음탕한 곳이었다는 믿음은 다름 아닌 폼페이의 루파나르(lupanare)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창가'라는 의미의 루파나르는 '매춘부'라는 의미의 라틴어, '루파(lupa)'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폼페이의 잘 닦인 도로를 여러 개 지나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섰다. 몸 파는 여인들의 집은 대로변에 있지 않고 조금 외지고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폼페이의 온갖 유적지 중에서도 이 루파나르 앞에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있었다.

몸 파는 여인들의 집 앞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처마가 길게 이어져 있다.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남정네들을 위해 만들어진 처마였다. 사창가 앞에서 줄을 서서 자신의 섹스 차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창피한 상황이지만 당시 남자들은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는 것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이 골목길에는 바로 옆 대로의 돌길에서 보이는 마차바퀴 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마차를 타고 오기에는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과거 폼페이의 사창가에 몸을 팔던 여인들이 지금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서 과거 폼페이 사람들의 섹스 장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행객들은 갖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곳을 둘러본다. 화산재를 뒤집어썼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방들은 어두컴컴하고 많이 퇴락했지만 로마시대 당시에도 골목길의 이 사창가는 어두웠을 것 같다.

아내야 성인이니까 괜찮지만 딸, 신영이가 어떤 질문을 할지 조금 걱정이 됐다. 현지 가이드가 미성년자는 얼른 지나가라고 해서 어린 아가씨 그룹은 대충 보고 골목길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 질문이 많은 신영이가 고분고분히 밖으로 나갔다. 어린 아이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건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사창가 건물은 2층 구조인데 층마다 5개의 방들이 연이어 붙어 있고 1개의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나는 2천년 전의 시간에 수많은 남자들이 성욕을 채우기 위해 드나들었을 사창가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왜 어린 아이들을 이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지 이해가 갔다.

방 입구의 벽면에는 2천년의 역사를 견뎌낸 성행위 그림이 생생하고 다양하게 남아 있었다. 건물 1층의 입구 근처에는 자신의 남근을 자랑스럽게 양손으로 쥔 채 무화과 나무 옆에 서 있는 남자의 그림이 남아 있다.

▲ 폼페이 사창가의 벽화. 각 방마다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는 성행위 벽화가 남아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나는 2천년의 무시무시한 세월이 저 벽면의 그림을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탈색된 곳과 변색된 부분에 대해 1년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재공개된 그림들이지만 그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복원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유적이다.

벽화는 회반죽이 된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벽면의 그림에는 이 매춘굴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체위의 서비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해당 서비스가 그려진 방에 있는 접대 여성은 자신의 특기를 이 벽면에 묘사해 둔 것이다. 현대도 그렇지만 항구도시의 특성상 폼페이는 각 나라의 무역상들과 뱃사람들이 많이 왕래했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이 안 통할 때 방의 성행위 그림 중 원하는 체위를 정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거시기를 했던 것이다.

이 선정적인 프레스코화는 당시 남성들에게 묘한 분위기를 자극했을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폼페이 전체에서 발견된 섹스 그림들의 체위 종류가 무려 120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어떻게 체위가 120가지나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만큼 성행위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성행위 자세는 아마도 화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매춘굴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와인을 시가보다 8배나 비싸게 팔았다고 하는데 이 가격이 루파나르의 이용가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젊은 여자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들은 화대가 달랐을 것이다. 화대는 결국 섹스의 자세와 매춘 여성의 용모에 따라서 달랐을 것이고 낙서 내용을 고려하면 화대는 최대 8배까지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이 세금도 냈다는 사실이다. 화장실에 남아있는 낙서 중에 세금이 비싸다고 불평하는 낙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냈다는 것은 이 사창가가 로마 제국 내에서 법적으로 인정된 곳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매춘을 하는 집이 여러 곳 있었고 매춘의 기회도 많았다. 폼페이 안에서만 매음업소로 추정되는 곳이 25곳이나 발견됐다. 작은 매음업소들은 가게나 술집의 건물 위층에 준비된 방에서 운영되었었다. 하지만 공창제도를 운영하던 로마시대에 법적으로 매춘이 허용된 폼페이의 장소는 루파나르 뿐이었다.

▲ 폼페이 사창가의 침상. 침상의 길이가 너무 짧은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노시경
이탈리아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작은 방 안에 자리한 침상의 크기이다. 내가 이 침대에 눕는다고 생각해도 다리를 다 펴지 못할 정도로 침상의 길이는 짧았다. 침대의 크기를 보면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키가 아주 작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키가 150cm 밖에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당시 죽어간 사람의 형상이 남은 캐스트(cast)들은 내 키보다도 더 커 보인다는 사실이다. 캐스트로 남은 사람들은 키가 크고 사창가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키가 작았다는 말인가? 나의 추측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사창가는 많은 손님들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방의 수를 늘리면서 각 방의 크기가 좁아졌고 좁은 방에서 손님들은 몸을 다 펴지 못하고 성행위를 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2천년 전에 번성했던 사창가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봐야 할 지 헷갈렸다. 성도덕 윤리는 상대적인 것이고 단지 고대 로마인들은 섹스에 대해 자유분방한 태도를 지녔던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의 하나가 매춘부라고 하는데 이 로마시대 사창가도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었던 것인가? 현대의 우리나라도 성매매를 법으로 처벌하고 있는데 이 매춘은 척결해야 할 인류의 적인가?

역사는 위대한 성인과 왕, 정치가들의 역사로 남아 있지만 이 사창가에는 당시 보통 사람들의 섹스문화와 섹스의 역사가 살아 있다. 매춘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의식주와 같은 일상사 중의 하나였고 어느 사람의 밥벌이 수단이었다.

이곳이 아내, 딸과 함께 보기에는 민망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슬며시 웃음도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요새 성매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성매매는 척결해야 할 대상이지만 2천년 전의 이 벽화들을 보면 완전 척결이 어려운 것이 성매매가 아닌가 싶다.

사창가 건물을 나오니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을 유적들이 큰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땅 속에 묻혀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유적들도 많았다. 저 유적을 파면 더 큰 사창가 건물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땅 속의 저 유적들 아래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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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온 몸의 피부 가죽을 벗겨라

[유럽기행 59] 밀라노 두오모(Milano) Duomo di Milano) 기행
09.11.17 09:15 ㅣ최종 업데이트 09.11.17 09:20 노시경 (prolsk)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의 내부는 크고 넓으며 아주 높다. 내부가 탁 트인 시원스러운 공간이다. 우리는 대성당 안의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없냐고 물었으나 아쉽게도 한국어로 된 기계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영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한 개만 빌려서 딸, 신영이 목에 걸어줬다.

내가 이 두오모에서 찾는 작품은 아주 깊은 곳에 있었다. 그 조각상은 두오모 내부 오른쪽 끝에 있었다. 성 바돌로메(St. Bartholomew) 입상. 그는 기독교 탄압 시기에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한 성인이다. 그의 벗겨진 가죽은 그의 순교형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성 바돌로메 입상.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고 죽은 가톨릭 성인이다.
ⓒ 노시경
이탈리아

몸 가죽이 벗겨진 그는 자기의 가죽을 망토 매듯이 어깨에 둘러매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그의 발가락 껍질인 듯한 가죽이 들려 있고 피부가 벗겨진 얼굴 뒤편으로는 그의 머리카락과 코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 가죽이 늘어져서 걸려 있었다. 그의 몸은 배고픔에 앙상하게 마른 신체의 외부가 아니라 한 꺼풀 가죽을 벗겨낸 신체의 내부다.

나는 태어나서 이런 작품을 처음 보았다.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통 속에서도 결의에 찬 듯한 그의 표정이 내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나는 대리석 근육 하나하나의 생생함에 놀랐다. 그 사이사이로 튀어나온 혈관들이 가늘게 자기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 성 바돌로메 입상. 얼굴 뒤편으로 그의 머리카락과 코의 윤곽이 뚜렷한 가죽이 걸려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나는 이 성스러운 성당에 왜 이렇듯 시야를 강하게 자극하는 작품을 세워 놓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스럽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의 죽음을 강하게 기억하라는 의미인가? 성당 내외부에 수많은 조각상도 모두 사실적으로 사람의 형상을 묘사하였지만 이처럼 표정이 충격적인 조각상은 없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성 바돌로메 입상을 지나 입상 뒤편 지하 예배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하 예배실 옆에는 성 유물실이 있었다. 이곳은 밀라노 두오모의 박물관 같은 곳이다. 유물실 전시관에는 상아, 금, 은으로 만든 식기류들도 보관되어 있다. 사람의 손이 오랫동안 닿지 않고 색이 닳은 유물들은 생기가 없었다.

▲ 카를로 보로메오의 방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던 밀라노 주교의 죽음이 모셔져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성 유물실에는 밀라노의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었던 성인,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의 유물들이 남아 있다.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유골은 카를로 보로메오의 방 안, 은제 납골단 안에 남아 있다. 죽은 이의 흔적을 성당 내부에 전시하듯이 남기는 전통은 참으로 이국적이다. 땅 속에 보이지 않게 시신을 묻는 동양과 달리 유럽은 매장 방식이 참으로 개방적이다.

▲ 밀라노 두오모 스테인드 글라스. 밝고 화려한 햇빛이 성당 내부에 퍼지고 있었다.
ⓒ 노시경
이탈리아

창문에 꾸며진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외부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는 분명히 새까만 유리가 성당 내부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신비스러운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고 그 그림들이 여행자들에게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요새 TV의 HD 화면같이 밝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상은 과연 15세기 당시에 그려진 그림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성당 내부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건지, 스테인드글라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성당 내부를 어둡게 했는지 헷갈릴 정도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은 성당 내부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해가 지는 시간에 보면 더욱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나는 다시 두오모 밖으로 나왔다. 흰 대리석의 거대한 대성당이 눈을 압박하고 온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첨탑의 이 대성당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 탄성을 지르거나 탄식을 내뱉는다. 과연 유럽 고딕 건축의 대표다운 건축물이다. 현대 고층건물의 규모와 높이에 단련된 사람이라도 이 대성당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성당 외부의 규모만 놓고 보면 밀라노 두오모는 세계 4위의 대성당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두오모의 등에 뾰족하게 하늘로 치솟은 135개의 첨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두오모는 성당 지붕의 둥근 돔에서 유래한 단어지만, 밀라노 두오모는 둥근 지붕이 없고 날카로운 첨탑으로만 장식되어 있다.

웅장한 밀라노 두오모를 다시 보자, 몇 년 전에 두오모 사진을 찍으며 계속 뒷걸음치던 생각이 났다. 사진기에 두오모 전경이 들어오지 않아 계속 뒷걸음쳤지만 웬만큼 후퇴하지 않고서는 두오모 전경을 찍기는 어려웠다. 과거에 보았던 두오모는 역사의 숨결과 세월의 때를 안고 있었지만 지금 보이는 두오모의 대리석 외벽은 완전히 새로 지은 듯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밀라노 두오모로 입장하는 곳에는 여행자들의 긴 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입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복장 검사를 받고 있었다.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면의 문만 5개였다. 좌측 입구의 줄에 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오모의 가장 높은 첨탑에 밀라노를 수호하는 황금 마리아 상이 곡예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었다.

▲ 밀라노 두오모 성인상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상들의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 노시경
이탈리아

성당 외벽에 조각된 섬세하고 정교한 인물상들은 그 수가 몇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성당 정면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 등 성모 마리아의 일생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인물상들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물상들은 각자 대리석의 색상이 조금씩 달라서 더욱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수많은 조각상들이 벽면에 붙어서 나를 보고 아우성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수없이 많은 성인 조각상들이 도열하듯이 하늘을 보고 있다는 두오모의 옥상 테라스로 올라가고 싶었다. 두오모의 옥상 테라스로 오르는 리프트는 성당 정면과는 정반대의 뒤쪽에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두오모 리프트 앞은 한산했다. 한 서양 아저씨가 리프트 관리인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기 때문에 리프트 운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리프트 관리인의 한심한 태도였다.

미국에서 온 듯 한 아저씨가 리프트 운항 안 하느냐고 묻자 리프트 관리인은 점심 먹으러 간다고 말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또 물었다.

"당신, 영어 할 줄 알아요?"

두모오 리프트 관리인은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신경질적으로 이렇게 답변했다.

"여기는 이탈리아고 나는 이탈리아어를 한다."

▲ 두오모 리프트 입구 성당 옥상에 오르는 리프트는 점심시간에 운행을 하지 않는다.
ⓒ 노시경
이탈리아

나와 미국 아저씨는 서로 얼굴을 보고 그냥 웃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이 이 관리인의 개인적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관광차 온 손님들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전무했다. 그는 아카데미상을 받은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주연으로 나온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와 얼굴까지 너무 닮아서 웃기기까지 했다.

밀라노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두오모의 옥상 테라스는 나의 여행일정과 인연이 없는 듯 했다. 여행 경험상 한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내는 벌써 밀라노의 다양한 옷가게에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결국 나는 두오모의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다. 밀라노 두오모 옥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은 지금도 밀라노의 하늘을 올려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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