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린 팔뚝을 돌려 줘!

[유럽기행 67] 바티칸 벨베데르 궁(Cortile del Belvedere) 기행
09.12.29 10:41 ㅣ최종 업데이트 09.12.29 10:43 노시경 (prolsk)

나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 바티칸의 유물들에 대해 하루종일 설명 해준다는 바티칸 지식 투어를 신청했다. 나는 하루를 온통 바티칸에서만 보내기로 했다. 숙소도 바티칸 앞에 잡았다. 나와 나의 가족은 어제 저녁의 피곤함을 물리치고 아침부터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지식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오타비아노 에스 피에트로(Ottaviano S. Pietro) 지하철 역까지 8시 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아침 식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택시를 집어탔다. 역 앞에서 내린 우리는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다행히 지식 가이드와 한국 여행자들은 아직 바티칸으로 이동을 하기 전이었다. 미혼으로 보이는 가이드 아가씨는 자신있고 씩씩한 목소리로 인원 점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아가씨가 나를 지식의 바다로 마음 편하게 안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바티칸 성벽 아래 늘어선 입장대기자들

▲ 바티칸 입장 대기 줄. 아침 8시만 넘어도 입장 대기 줄은 끝 모르게 이어진다.
ⓒ 노시경
바티칸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지만 바티칸 성벽 아래에는 바티칸에 입장하려는 관광객들의 줄이 긴 꽈리를 틀고 있었다. 이 아침에, 놀라운 광경이었고 아침부터 기가 질렸다. 우리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입장 대기 줄이 있었다. 긴 줄은 바티칸 성벽을 따라 이어졌고 입구를 향해 한번 좌회전으로 꺾인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 가이드 아가씨가 우리를 안심시켰다.

"앞을 보지 말고 뒤를 보세요. 우리 뒤로 저렇게 긴 줄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 가족 뒤쪽으로도 백미터는 되어 보이는 줄이 순식간에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가로로 8명씩 맞춰 서 있는 줄이 내 앞뒤로 수백 미터씩 이어지고 있었다. 잘 훈련된 대한민국 여행자들은 다른 어느 나라 여행자들보다 일사불란하게 줄을 잘 맞췄다. 나는 흡사 초등학교 때 수많은 친구들과 줄을 맞춰 서던 매스게임 연습시간이 생각났다. 수많은 군중 속에 나와 나의 가족이 박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바티칸에 입성하기 위해 뙤약볕을 견디고 있었다.

바티칸에 입성하기 위해 2시간 대기하는 것은 보통이라고 들었지만 우리 일행은 40분 만에 바티칸 박물관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아침 8시 조금 넘어 입장 대기 줄에 합류했기 때문에 바티칸에서의 천금 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로마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바티칸의 거대한 성벽을 통과해 신성한 언덕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바티칸 내부로 들어선 후에도 정식 입장을 위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우리는 또 줄을 섰지만 이미 거대한 줄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정도 줄은 우스웠다. 박물관 입장표는 여행자들 각자가 구입해서 들어갔다. 티켓 검표를 하는 아저씨가 신영이 나이를 묻는 것 같았지만 못 알아듣는 척했다. 미취학 어린이는 관람요금이 공짜였기 때문이다.

▲ 솔방울 정원. 푸른 하늘과 녹색 잔디,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어우러진 멋진 정원이다.
ⓒ 노시경
바티칸

우리는 박물관 내부의 중앙정원인 피냐 정원(Cartile delle Pigna)에 모였다. 박물관 내부의 시원스런 정원 한편에 4m 높이의 거대한 솔방울 모양의 청동 조형물이 있어서 이 정원은 솔방울 정원이라고 불린다. 이 청동 솔방울은 원래 고대 로마와 바티칸의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다가 이 정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푸른 하늘과 초록의 잔디, 그리고 솔방울과 고대 조각상들이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계의 어느 정원도 그 값어치와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 없는 정원이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구본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운데 부분이 썩은 것처럼 보이는 이 지구는 오염되고 병들어 가는 지구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반질거리는 이 현대적 작품이 중세의 박물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선조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디자인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지구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돌리면 빙글빙글 돌아간다고 한다. 한번 돌려보지 않은 것이 괜히 후회된다.

정원의 곳곳에는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을 장식하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솔방울 정원 옆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서 가이드들의 설명을 듣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 가이드로부터 한 시간 정도 바티칸박물관의 명작들에 대한 사전교육을 들은 후 바티칸 박물관을 구성하는 곳 중의 한곳인 벨베데르 궁(Cortile del Belvedere)의 정원으로 갔다.

나폴레옹이 약탈했던 아폴로상, 2천년된 복제품

▲ 벨베데르 정원.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이 야외에서 햇볕을 맞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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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르의 팔각 모양 정원은 서양 조각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들이 가득 채워진 황홀한 곳이다. 역대 교황들이 모아 놓은 그리스와 로마의 명품 조각상들이 탁 트인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외에 개방형으로 전시된 진품 조각상들이 아름다운 신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원을 감도는 빛의 향연이 대리석 조각상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폴레옹이 한때 약탈해갔다던 아폴로 상이다.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청동상을 로마에서 2세기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작품이다. 아폴로 조각상 왼편의 원통형 나무 기둥이 그리스 조각상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복제품의 역사가 2천년이니 복제품이라고 말하기도 머뭇거려진다.

이 아폴로 조각상은 그리스 시대에 조각된 아폴로 상 중에서도 가장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재 조각가에 의해 대리석이 장난감처럼 농락당하고 있었다. 아폴로의 다리를 유심히 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리의 핏줄이 꿈틀거리면서 대리석 다리 위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폴로상.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수작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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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에 걸린 옷자락은 아폴로의 팔뚝에서 지금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옷자락을 몸에 두르지 않고 팔에 건채 자신의 성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놓고 있는 점이다. 나는 괜히 바바리맨이 연상되어 피식 웃었다. 이 벨베데르 정원의 그리스 조각상들이 대부분 근육질 남성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남성의 힘에 대한 숭배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남성의 벗은 몸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인들은 요새 남성들이 몸짱을 선호하듯이 남성의 가꾸어진 신체가 아름다움의 대상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아폴로는 주변의 다른 신들과 같은 근육질이 아니라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태양의 신 아폴로는 무언가 절제된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파마를 해서 길게 내려뜨린 듯한 그의 머리카락은 여신과 같은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그리스 신중 남성미의 이상형이라는 아폴로는 오히려 실제 남성보다도 더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왠지 그리스에 넓게 퍼져 있었다던 동성애의 영향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폴로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불세출의 명작이 이 정원 안에 있었다. 이 조각상은 가장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다른 그리스의 신상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 작품은 나 같은 범부의 눈을 설레게 했다.

로마 공중목욕탕을 장식하던불세출의 명작, 라오콘

그 조각상은 트로이의 아폴로 신전 제관이었던 라오콘(Laokoon)이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 당시에 그리스 군의 목마를 성안에 들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그리스를 후원하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고, 라오콘과 두 아들은 포세이돈이 보낸 뱀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라오콘은 기원전 100년 경에 그리스 로도스(Rhodes) 출신의 조각가 3명에 의해 조각되었다. 이 라오콘은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신비한 전설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506년에 로마의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 위, 네로의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 근처에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포도밭을 갈던 한 농부가 땅 밑의 공중목욕탕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라오콘 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라오콘은 로마의 공중목욕탕을 장식하던 화려한 장식품이었다.

발견 당시 라오콘은 오른쪽 어깨와 팔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이 전설적인 대작의 오른팔을 복원하기 위해 저명한 예술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세기의 천재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남아 있던 어깨 근육과 가슴 근육의 뒤틀린 모양을 주시하였다. 그는 남아있는 육체의 근육 모양을 보면 오른팔이 굽어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천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라오콘의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잘려나갔던 두 아들의 오른팔도 오로지 상상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 잘못 복원된 라오콘 16세기에 복원된 라오콘상은 팔이 곧게 뻗은 형태로 잘못 복원되어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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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콘상. 뱀에 물려 죽어가는 라오콘 부자의 일그러진 고통의 표정이 압권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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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오른팔...잘못된 복원, 그리고

그러나 무려 4백년이나 지난 1957년에 라오콘은 다시 로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로마시대 한 조각상의 오른팔이 로마의 한 석공 작업장에서 발견되었는데 뒤늦게 이 팔이 라오콘의 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결국 1960년에 라오콘의 오른팔은 마치 기적처럼 제 위치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 팔은 놀랍게도 미켈란젤로가 말했던 것과 같이 뒤로 굽힌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재 라오콘의 팔은 굽힌 채로 복원되었고 마음대로 상상하여 붙인 두 아들의 오른팔 조각은 다시 해체되었다. 라오콘 자체도 불세출의 명작이지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과정이나 이 명작을 복원하기 위한 천재들의 스토리가 라오콘 조각상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죽음을 맞게 된 라오콘은 고통에 절규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분노, 안타까움, 슬픔이 살아 있었다. 죽기 직전,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과 근육의 뒤틀림이 몸서리쳐지듯이 생생하고 처절했다.

라오콘 부자에게 덤빈 뱀은 라오콘 부자의 온 몸을 칭칭 감고 온 몸을 조여들고 있었다. 라오콘 부자를 공격한 뱀은 모두 두 마리였다. 뱀 한 마리는 머리를 쳐들고 라오콘의 등 아래 부분을 막 물려고 하고 있었다. 뱀이 입을 벌리고 라오콘을 물려는 동작이 순간포착처럼 멈춰 있었다. 라오콘의 근육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틀리고 있었다. 그의 경직된 왼발은 금세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또 한 마리 뱀의 머리를 찾아보았다. 다른 뱀 한 마리는 왼편의 둘째 아들 가슴을 이미 물어버린 상태였다. 뱀에 물린 아들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른편의 큰 아들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동생을 보면서 두려움과 안타까움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공포의 표정을 단단한 대리석에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인들의 신에대한 믿음과 그리스 신화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대리석 조각에 녹아들어간 것인가? 라오콘 대리석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대리석 조각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고 2천년이 지난 현대에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닳고 상처가 심한 라오콘의 오른손을 보면서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라오콘은 나를 그리스 로마신화의 바다 속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두 아들의 잘린 팔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았다. 두 아들의 오른팔도 로마 시내 어딘가의 땅속 유적에 묻혀 있지 않을까? 작은 아들의 팔은 하늘로 곧게 뻗은 채로 절규하고 있지 않을까?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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