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Pompeii) 유적

이태리 2009. 11. 26. 15:56

나의 몸값은 와인 값의 8배다

<유럽기행 60> 폼페이(Pompeii) 유적 기행
09.11.20 09:59 ㅣ최종 업데이트 09.11.20 09:59 노시경 (prolsk)

서기 79년, 폼페이(Pompeii)는 그 당시의 순간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죽을 당시의 그 동작 그대로 멈춰 있었다. 당시 폼페이에 살던 사람 중 2천여 명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화산재에 그대로 갇혔고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사연이 갑자기 끊기고 그렇게 땅속에 묻혔던 사연은 조금씩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항구도시였던 폼페이의 바닷가 쪽 출입구를 통해 폼페이에 들어섰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공기는 맑았다. 햇살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고 파랬다.

▲ 폼페이의 캐스트. 화산재에 덮여 죽어가던 사람들의 형상이 놀랍도록 그대로 남아 있다.
ⓒ 노시경
이탈리아

그 유적지 안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살다간 건물 속에는 사람이 살다간 흔적만이 남지만 사람 형상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화산재 아래에 묻힌 사람의 시신은 썩어 없어졌지만 사람이 있던 공간은 화산재 속의 빈 공간이 되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었다. 당시 죽어간 사람의 형상은 석고를 통해 놀랍도록 생생하게 캐스트(cast)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죽어간 그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나의 딸, 신영이는 약간 실망한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산재에 묻혀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아빠를 따라나섰는데 폼페이 내에 보존된 '캐스트'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에 대한 역사서를 읽고 온 신영이는 고고학자가 되어 이곳에서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었다. 신영이는 머리 속에서 그리던 황량한 폼페이의 모습과 이곳의 모습이 다름에 약간 실망하고 있었다. 나의 딸은 직접 발굴을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질식사한 듯한 그의 얼굴에 참혹한 고통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산재에 덮히면서 자신이 이렇게 2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지 않았을까?

나는 폼페이 사람들이 살다간 건축물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서 움직였다. 로마문명에서 번성했던 목욕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공중목욕탕을 찾기 위해 다시 지도를 집어 들었다. 폼페이 안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공중목욕탕만도 세 군데나 됐다. 지도를 보니, 비아 델레 테르메(Via delle Terme)와 비아 델포로(Via del Foro)가 만나는 곳에 중앙광장이 있고 그 앞에 중앙 광장 욕장이 있었다.

이 대형 공중목욕탕은 그동안의 세월과 화산재의 영향을 고려하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현대에 공중목욕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의 공중목욕탕과 비교해도 기본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서기 79년이면 우리나라에 삼국시대가 태동될 시기이니 당시에 로마의 문화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앞서갔는지 절감할 수 있는 유적이다.

▲ 폼페이 대중목욕탕. 태양광선을 이용한 채광시설이 온탕 내부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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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의 천장은 거대한 돔형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 맺히는 물방울이 아래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떨어지지 않고 벽을 타고 흘러내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목욕탕 내부의 천장을 장식하던 모자이크는 당시 공중목욕탕의 화려함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목욕문화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고 하는 말은 이렇듯 화려한 로마시대의 목욕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당시 폼페이 사람들이 움직였을 동선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옷을 보관하는 탈의실은 강력한 어깨근육과 날렵한 복근을 자랑하는 헤라클레스가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로마인들이 그랬듯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탈의실을 지나면 냉탕과 온탕이 나온다. 냉탕에는 대리석 욕탕이 남아 있다. 이 욕탕에는 차가운 냉수가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냉탕에는 천장이 없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 노천탕이기 때문이다. 폼페이 사람들은 주변의 자연을 즐기며 이곳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했을 것이다.

냉탕 다음으로는 온탕이 연결된다. 온탕에서 놀라운 것은 태양 광선을 이용한 채광시설이 어두운 온탕 내부의 세면대 위에 태양빛을 신비롭게 드나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온수가 나오는 급수대는 지금 당장 사용해도 될 만큼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밝은 채광시설 반대편에는 현대의 공중목욕탕보다 더 큰 욕조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고 증기가 나오는 사우나 시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증기 목욕실에는 천장에 새겨진 조각들이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옷을 모두 벗은 남녀는 몽환적 분위기에 젖고 온갖 야릇한 상상도 했을 것이다.

공중목욕탕의 3번째 구조는 마사지실이다. 사우나를 하고 노곤해진 몸에 안마까지 받으면 몸이 노곤해지며 피곤이 풀렸을 것이다. 나는 2천년 전으로 돌아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이 욕조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나는 폼페이 유적지 앞에 당시의 공중목욕탕을 똑같이 만들고 여행자들을 받으면 상당한 돈벌이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목욕탕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사실인데 당시 로마 사람들이 너무 질펀하고 지나치게 목욕문화를 즐겼다고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 로마인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빗나간 섹스를 즐긴 것도 아닐 것이다. 로마제국에 큰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은 것도 로마인들이 이러한 공중목욕탕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씻었기 때문일 것이다.

▲ 폼페이 사창가 골목. 폼페이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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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특히 폼페이가 음탕한 곳이었다는 믿음은 다름 아닌 폼페이의 루파나르(lupanare)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창가'라는 의미의 루파나르는 '매춘부'라는 의미의 라틴어, '루파(lupa)'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폼페이의 잘 닦인 도로를 여러 개 지나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섰다. 몸 파는 여인들의 집은 대로변에 있지 않고 조금 외지고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폼페이의 온갖 유적지 중에서도 이 루파나르 앞에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있었다.

몸 파는 여인들의 집 앞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처마가 길게 이어져 있다.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남정네들을 위해 만들어진 처마였다. 사창가 앞에서 줄을 서서 자신의 섹스 차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창피한 상황이지만 당시 남자들은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는 것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이 골목길에는 바로 옆 대로의 돌길에서 보이는 마차바퀴 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마차를 타고 오기에는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과거 폼페이의 사창가에 몸을 팔던 여인들이 지금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서 과거 폼페이 사람들의 섹스 장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행객들은 갖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곳을 둘러본다. 화산재를 뒤집어썼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방들은 어두컴컴하고 많이 퇴락했지만 로마시대 당시에도 골목길의 이 사창가는 어두웠을 것 같다.

아내야 성인이니까 괜찮지만 딸, 신영이가 어떤 질문을 할지 조금 걱정이 됐다. 현지 가이드가 미성년자는 얼른 지나가라고 해서 어린 아가씨 그룹은 대충 보고 골목길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 질문이 많은 신영이가 고분고분히 밖으로 나갔다. 어린 아이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건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사창가 건물은 2층 구조인데 층마다 5개의 방들이 연이어 붙어 있고 1개의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나는 2천년 전의 시간에 수많은 남자들이 성욕을 채우기 위해 드나들었을 사창가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왜 어린 아이들을 이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지 이해가 갔다.

방 입구의 벽면에는 2천년의 역사를 견뎌낸 성행위 그림이 생생하고 다양하게 남아 있었다. 건물 1층의 입구 근처에는 자신의 남근을 자랑스럽게 양손으로 쥔 채 무화과 나무 옆에 서 있는 남자의 그림이 남아 있다.

▲ 폼페이 사창가의 벽화. 각 방마다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는 성행위 벽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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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천년의 무시무시한 세월이 저 벽면의 그림을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탈색된 곳과 변색된 부분에 대해 1년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재공개된 그림들이지만 그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복원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유적이다.

벽화는 회반죽이 된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벽면의 그림에는 이 매춘굴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체위의 서비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해당 서비스가 그려진 방에 있는 접대 여성은 자신의 특기를 이 벽면에 묘사해 둔 것이다. 현대도 그렇지만 항구도시의 특성상 폼페이는 각 나라의 무역상들과 뱃사람들이 많이 왕래했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말이 안 통할 때 방의 성행위 그림 중 원하는 체위를 정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거시기를 했던 것이다.

이 선정적인 프레스코화는 당시 남성들에게 묘한 분위기를 자극했을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폼페이 전체에서 발견된 섹스 그림들의 체위 종류가 무려 120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어떻게 체위가 120가지나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만큼 성행위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성행위 자세는 아마도 화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매춘굴의 주인은 손님들에게 와인을 시가보다 8배나 비싸게 팔았다고 하는데 이 가격이 루파나르의 이용가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젊은 여자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들은 화대가 달랐을 것이다. 화대는 결국 섹스의 자세와 매춘 여성의 용모에 따라서 달랐을 것이고 낙서 내용을 고려하면 화대는 최대 8배까지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이 세금도 냈다는 사실이다. 화장실에 남아있는 낙서 중에 세금이 비싸다고 불평하는 낙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냈다는 것은 이 사창가가 로마 제국 내에서 법적으로 인정된 곳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매춘을 하는 집이 여러 곳 있었고 매춘의 기회도 많았다. 폼페이 안에서만 매음업소로 추정되는 곳이 25곳이나 발견됐다. 작은 매음업소들은 가게나 술집의 건물 위층에 준비된 방에서 운영되었었다. 하지만 공창제도를 운영하던 로마시대에 법적으로 매춘이 허용된 폼페이의 장소는 루파나르 뿐이었다.

▲ 폼페이 사창가의 침상. 침상의 길이가 너무 짧은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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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작은 방 안에 자리한 침상의 크기이다. 내가 이 침대에 눕는다고 생각해도 다리를 다 펴지 못할 정도로 침상의 길이는 짧았다. 침대의 크기를 보면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키가 아주 작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키가 150cm 밖에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당시 죽어간 사람의 형상이 남은 캐스트(cast)들은 내 키보다도 더 커 보인다는 사실이다. 캐스트로 남은 사람들은 키가 크고 사창가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키가 작았다는 말인가? 나의 추측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사창가는 많은 손님들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방의 수를 늘리면서 각 방의 크기가 좁아졌고 좁은 방에서 손님들은 몸을 다 펴지 못하고 성행위를 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2천년 전에 번성했던 사창가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봐야 할 지 헷갈렸다. 성도덕 윤리는 상대적인 것이고 단지 고대 로마인들은 섹스에 대해 자유분방한 태도를 지녔던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의 하나가 매춘부라고 하는데 이 로마시대 사창가도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었던 것인가? 현대의 우리나라도 성매매를 법으로 처벌하고 있는데 이 매춘은 척결해야 할 인류의 적인가?

역사는 위대한 성인과 왕, 정치가들의 역사로 남아 있지만 이 사창가에는 당시 보통 사람들의 섹스문화와 섹스의 역사가 살아 있다. 매춘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의식주와 같은 일상사 중의 하나였고 어느 사람의 밥벌이 수단이었다.

이곳이 아내, 딸과 함께 보기에는 민망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슬며시 웃음도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요새 성매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성매매는 척결해야 할 대상이지만 2천년 전의 이 벽화들을 보면 완전 척결이 어려운 것이 성매매가 아닌가 싶다.

사창가 건물을 나오니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을 유적들이 큰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땅 속에 묻혀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유적들도 많았다. 저 유적을 파면 더 큰 사창가 건물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땅 속의 저 유적들 아래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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