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누이의 빅토리아 애비뉴를 걷다
뉴질랜드 여행기(12) : 낯선 도시 전망대 오르기와 도심 걷기 ②
정철용(ccypoet) 기자
모든 도시들은 제각기 그 도시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별명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경주에 늘 따라다니는 '천년의 고도'나 오클랜드를 달리 지칭하는 '돛의 도시(the City of Sails)'와 같은 별명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도시에 붙여진 이러한 별명은 그 도시의 진면목을 극적으로 요약한다.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도시 왕가누이 역시 별명을 지니고 있다. '유서 깊은 강의 도시(the Historic River City)'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서 강은 이 도시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고 있는 팡가누이(Whanganui) 강이다. 왕가누이(Wanganui)라는 도시의 이름까지도 이 강에 빚지고 있으니, '유서 깊은 강의 도시'라는 별명은 아주 적확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두리 힐의 전망대에서 바라봤을 때 왕가누이가 지리학적으로 '강의 도시'임은 분명하게 확인됐다. 하지만 그 앞에 놓여져 있는 '유서 깊은'이라는 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망대를 내려와 도시의 내부로 들어가야만 했다.

건물에 살아 있는 역사

시내 지도를 보니 두리 힐을 내려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면 왕가누이의 도심 중심가인 빅토리아 애비뉴와 바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주차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그 초입에 있는 도심 공원인 퀸스 파크 주변의 한적한 뒷골목에 차를 세웠다.

퀸스 파크는 한때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의 거주지이자 요새인 파(Pa)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도심 공원으로 조성되어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과 전쟁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사전트 미술관(Sarjeant Gallery)의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미술관 '사전트 갤러리'의 전경
ⓒ2005 정철용
1919년 9월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작은 도시에 소재하고 있는 미술관답지 않게 넓은 전시 공간과 수준 높은 소장 작품들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이 누리고 있는 명성의 절반은 미술관의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전시장을 다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 다시 바라보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흰색 미술관 건물은 과연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부를 만했다. '20세기에 지어진 소형 미술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의 하나'라는 여행 안내책자의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여행 안내책자에는 이 미술관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건물로서 로열 왕가누이 오페라 하우스(Royal Wanganui Opera House)를 소개해 놓고 있었다. 1899년에 건립된 830석의 극장으로 콜로니얼 스타일의 외관이 수려한 목조 건물이라고 했다. 지도를 보니 미술관에서 불과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어서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를 걷기 전에 우선 이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가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페라 하우스의 문은 닫혀 있었다. 토요일이어서 일찍 문을 걸어 잠갔거나 아니면 공연이 없는 날인 모양이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의 아름다움이 그 외관에서 오는 것인 반면 오페라 하우스의 경우에는 그 내부 장식의 화려함과 정교함에서 오는 법인데, 그 아름다운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게 되니 적잖이 아쉬웠다.

한 세기 전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은 미술관과 오페라 하우스 뿐만이 아니었다. 중심가인 빅토리아 애비뉴로 접어 들었는데도 현대식 고층 빌딩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2∼3층 짜리 낮은 건물들만이 눈에 띄었는데 그 건물들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 곳곳마다 오래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왕가누이의 도심. 건물 위쪽에 건립연도로 보이는 듯한 숫자가 쓰여 있다.
ⓒ2005 정철용
파스텔 톤의 잔잔한 색상으로 채색이 되어 긴 세월의 흔적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건물의 양식이나 벽에 씌어져 있는 숫자(건축연도)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왕가누이에는 도심에만도 약 30여 개에 달하는 유서 깊은 건물들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된 독특한 관광상품이 있을 정도이다. '브라스 러빙 헤리티지 트레일(Brass Rubbing Heritage Trail)'이라고 불리는 이 관광상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지도와 함께 동판 탁본용 종이와 황금색 크레용을 구입해야 한다.

여행객은 지도에 표시된 유서 깊은 건물들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감상하고, 구입한 종이와 크레용으로 그 건물들과 유적지마다 설치되어 있는 명판들의 탁본을 뜨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왕가누이 여행을 추억하는 기념물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에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 몇몇을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가 왕가누이의 도심에 들어선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도 했지만, 단번에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원 같은 도심의 거리

그 아름다움이란 바로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꽃바구니들이었다. 2km가 조금 넘게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빅토리아 애비뉴는 초가을 늦은 오후의 엷은 햇살 속에서 화려한 꽃바구니들로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에, 화분 받침용 철골 구조물에, 횡단보도에 세워 놓은 기둥에, 상점의 간판 밑에, 눈길 가는 곳마다 수없이 많은 꽃바구니들이 매달려 있었다.

▲ 빅토리아 애비뉴의 꽃바구니 장식
ⓒ2005 정철용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눈부신 여름을 축하하기 위하여 1000여 개에 달하는 꽃바구니들로 빅토리아 애비뉴를 비롯한 도심의 거리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이 프로그램은 '활짝 핀 왕가누이(Wanganui in Bloom)'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왕가누이의 오랜 전통이며 자랑거리이다. 우리가 왕가누이를 찾은 시기가 4월 중순이었는데도, 빅토리아 애비뉴에는 아직도 그 꽃바구니들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카페와 레스토랑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드물고 차량 통행마저도 뜸해서 토요일 오후의 도심의 거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지만, 이렇게 매달아 놓은 꽃바구니들의 열렬한 환영인사로 우리는 즐거웠다.

▲ 횡단보도도 꽃그늘 아래에 있다.
ⓒ2005 정철용
번잡한 도심이 아니라 마치 공원의 한가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빅토리아 애비뉴는 아름다웠다. 우리는 빅토리아 애비뉴의 끝에서 유턴을 해서 반대편 도보를 걸어 내려왔다.

어둠이 내리려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멋스럽게 생긴 가로등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한때 가스로 불을 밝혔다는 이 가로등들은 지금은 전기로 점등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 가로등을 밝혀주는 것이 가스도 아니고 전기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가로등 양쪽 기둥에 걸어 놓은 꽃바구니가 벌써 오래 전에 화사한 꽃불을 밝혀두었으니 말이다.

▲ 불 밝힌 가로등보다 양 옆에 매달린 꽃바구니가 더 환하다.
ⓒ2005 정철용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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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 전망대 오르기와 도심 걷기 ①
[뉴질랜드 여행기 11] 왕가누이의 두리 힐에서
정철용(ccypoet) 기자
여행객이 처음 도착한 낯선 도시를 한눈에 파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전망대에 오르기.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도시들은 시가지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를 한두 개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망대는 서울의 남산이나 오클랜드의 원트리 힐과 같이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높은 산이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연적인 전망대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높은 위치에 인공의 전망대를 세우기도 한다. 남산의 서울타워나 오클랜드의 스카이타워가 그런 경우다.

자연적인 전망대가 있는데도 비싼 돈을 들여서까지 인공의 전망대를 세우는 것은 속된 말로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도시를 발 아래에 두고 굽어보는 맛이란 장쾌하기 이를 데 없어서 많은 여행객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도시를 굽어볼 때 여행객은 도시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몸의 수직 운동을 통하여 획득된 이 도시의 지리학은 언제나 현재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현재는 거칠고 희미한 윤곽선 안에서 도시의 개략적인 특징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그걸로도 충분한 도시들이 있고 또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객이라면 도시의 거리를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도 <걷기 예찬>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중요한 취재를 위하여 외국의 도시에 처음 도착하는 기자들이 있다. 보통의 기자는 곧바로 취재원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러나 대기자는 호텔 방에 짐을 던져놓은 즉시 그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는다. 그는 그 도시의 빛이, 그 도시의 냄새가, 그 도시의 소리가, 요컨대 그 도시의 구체적인 삶이 자신의 몸 깊숙이 스며들 때까지 걷는다. 그 전체적 삶의 환경이 그가 취재하는 구체적 문제의 조건이요 바탕이 될 것이다."

여기서 기자를 여행객으로 바꿔놓는다고 해서 그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도시의 거리 특히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심의 거리를 걷는 것은 그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손쉬운, 그러나 필수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도심의 거리를 걷는 이 수평 운동은 도시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도심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도로명과 건물과 기념물과 현수막들은 도시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 내일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도시의 역사학을 통하여 도시의 문은 비로소 열리고 그 세부를 낯선 여행객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박물관과 극장의 문을, 맛난 음식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라면 카페와 레스토랑의 문을 먼저 열어볼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넓은 광장이나 좁다란 골목에서 문을 발견할 지도 모르고, 오래된 성당이나 이국적인 사찰의 문을 두드려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객이 도심의 거리를 걸으면서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여러 개의 문들 중 몇 개를 열고 들어가 볼 때, 도시로의 여행은 비로소 시작된다.

인구 4만 명이 조금 넘는 아담한 도시 왕가누이(Wanganui)를 돌아보는 우리의 여행은 바로 이 수직운동과 수평운동, 즉 전망대 오르기와 도심을 걷기, 다시 말해서 지리학과 역사학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하루를 이 도시에서 묵고 가기로 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두리 힐의 전망대에서

아찔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포장의 팡가누이 강변도로를 달려 왕가누이에 도착한 것은 약 1시 30분 경. 우리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눈에 띈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난 후, 우선 전망대에 올라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기로 했다.

전망대는 대부분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왕가누이의 경우에는 조금 달라서 동쪽에 치우쳐 있었다. 왕가누이에 이르러 태즈만해와 만나면서 넓어지고 유장해진 팡가누이 강은 도시의 동서를 가르면서 흐르고 있는데, 보다 평탄한 지역인 서쪽을 중심으로 도심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 두리 힐에 자리잡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
ⓒ2005 정철용
그래서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 전망대가 있는 두리 힐(Durie Hill)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돌로 축조한 듯한 회색의 거대한 기념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몰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5년에 세워진 것인데, 왕가누이 시가지를 굽어보는 전망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는 이 탑의 내부를 우리는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176개의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 33.5m 높이의 그 정상에 섰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한 그물 철망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편안하게 시선이 가 닿는 저 멀리 북쪽으로 루아페후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태즈만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쾌하고 거칠 것 없는 전망이었다.

▲ 밑에서 올려다 본 제1차 세계 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의 모습
ⓒ2005 정철용
그러나 우리가 정작 보고 싶었던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 어깨 높이쯤 쌓아올린 보호장벽에 좀 더 밀착해서 아래를 굽어보아야 했다. 조금 불편한 자세로 그렇게 굽어보고 있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도시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그리 좋지 못한 시설이었다.

땅속운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실 왕가누이 시내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이 기념탑 바로 앞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옥탑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여행 안내서에도 1919년에 건설된 이 두리 힐 엘리베이터를 기념탑보다 더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전망 때문이 아니라, 이 엘리베이터가 세계에서 단 두 대뿐이며 남반구에서는 유일한 땅속운행(earthbound) 엘리베이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 두리 힐의 땅속운행 엘리베이터의 승차장 입구
ⓒ2005 정철용
그러한 명성 탓인지 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는 승차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왕복 요금이 어른 1달러, 어린이 50센트.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안내양(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산뜻한 제복을 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아줌마였다)에게 돈을 지불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넓기는 했어도 목재로 마감된 낡은 벽은 이 엘리베이터가 아주 오래된 것임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약간의 공포감마저도 들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 뚫려 있지 않고 꽉 막혀 있어서,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내려가서 멈춰선 지점은 66m 아래쪽. 그 지하를 언덕 아래쪽 도로변에서 시작된 205m의 수평 터널이 지상과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터널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마치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어두컴컴하고 삭막한 터널을 둘러본 후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하여 다시 올라탔다.

이번에는 내려오면서 얼굴을 익힌 엘리베이터 안내양, 아니 안내아줌마와 눈을 맞추었다. 보통의 엘리베이터라면 숫자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연두색 카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나는 그것이 무슨 카드들이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건 주민들의 엘리베이터 승차권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언덕 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는 시내로 출퇴근하거나 볼일 보러 나갈 때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그들의 승차 카드를 비치해 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와 다리만 건너면 바로 도심으로 이어지니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리 힐의 이 엘리베이터는,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관광용으로는 너무 소박하고 구식이고 평범해서 다소 실망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언덕 위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교통수단인 셈이다. 이 엘리베이터 덕택에 언덕 위에 사는 주민들은 언덕과 그 아래쪽 다리 앞 도로를 이어주는 191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말이다.

▲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바라다본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
ⓒ2005 정철용
그래도 못내 아쉽고 어쩐지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여행객이 있다면, 그 옆 엘리베이터 옥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보기를 나는 권한다. 그 옥탑에서 바라다보는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실망을 위로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층빌딩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거리와 숲 사이로 보이는 색색의 낮은 지붕들이 아름다운 주택가,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 도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조금 번화한 시골 읍내를 바라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당장에 왕가누이가 맘에 들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 중에서도 나의 시선은 강물에 오래 머물렀다. 내 기억 속의 어떤 강물도 지금 그렇게 흐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두리 힐 엘리베이터 운행시간>

- 월요일 ~ 금요일 :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 토요일 :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일요일 및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난 해 4월에 다녀왔던 뉴질랜드 북섬 남부지역의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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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도 예루살렘이 있다
뉴질랜드 여행기(10) : 팡가누이 강을 따라서
정철용(ccypoet) 기자
▲ 아침 햇살에 서리가 녹으면서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에서 고국의 늦가을을 떠올리다
ⓒ2004 정철용
타우마루누이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 8시 30분경에 모텔을 나선다.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탓인지 열어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가을이래도 전혀 가을답지 않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가을을 실감한다.

▲ 타우마루누이에서 왕가누이까지의 지도.
ⓒ2004 onenz.net
운전을 하면서 곁눈질해 본 차창 풍경이 눈부시다. 밤새 내린 서리가 아침 햇살에 녹으면서 물기 머금은 잔디밭과 수풀들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늦가을 고국의 산하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풍경이 내 마음에 오래 맺힌다.

그 눈부신 풍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4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넉넉잡고 약 3시간 정도 달리면 만나게 되는 해안도시 왕가누이(Wanganui)가 오늘의 목적지.

그러나 우리는 그 도로의 중간쯤에 있는 작은 마을 오하쿠네(Ohakune)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을 해서 들어간다.

얼마 달리지 않아 포장도로는 끝이 나고 작은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좁고 먼지가 풀풀 날리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그 길을 우리는 덜컹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앞으로 약 4시간 정도는 이 흙먼지와 덜컹거림과 함께 가야 하리라.

팡가누이강을 따라가며 동강을 떠올리다

포장이 되어 있어 운전하기 편하고 빠른 4번국도 대신에 우리가 이렇게 험한 비포장도로를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팡가누이강(Whanganui River)을 보기 위해서다.

지난 번 타라나키산에 대한 여행기에서 잠깐 소개한 바 있듯이, 팡가누이강은 전설의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강이다. 마오리 전설에 따르면 통가리로산에게 패배한 타라나키산이 서쪽 바닷가를 향해 달려 나가면서 땅에 깊은 골짜기를 새겨놓았고, 그 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통가리로산은 맑은 샘물을 흘려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팡가누이강이 되었다고 전설은 말하고 있다. 타라나키산이 얼마나 요동을 치며 달려 나갔는지, 강물이 흐르는 골짜기는 숱하게 꺾어지면서 이어진다. 그렇게 꺾어지면서 급류를 만들어내는 여울이 모두 239개나 된다고 한다.

▲ 팡가누이강은 굽이굽이 꺾어지는 깊은 계곡을 흐른다
ⓒ2004 정철용
그런 골짜기를 따라 길을 내었으니 피피리키(Pipiriki)에서부터 왕가누이까지 이어지는 비포장의 강변도로 역시 구불구불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좌우로는 급격하게 요동치면서도 상하로는 별로 요동이 심하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운전하는 나보다 더 긴장하던 아내는 이제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에 익숙해졌는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무도 없는 그 고적한 길을 달리며 우리는 중간 중간에 차를 멈춘다.

처음 와 보는 곳이고 처음 보는 풍경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어디서 내가 이런 모습을 보았던가? 오래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의문은 금세 풀린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 팡가누이강은 몇 년 전, 하회마을을 다녀오면서 들렀던 영월의 동강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 익숙한 이 풍경은 영월의 동강 어라연 계곡과 닮은 모습이다
ⓒ2004 정철용
동강의 강변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달려가 만났던 그 아름다운 어라연 계곡이 지금 보고 있는 이 팡가누이강의 계곡 모습과 겹쳐지면서 나는 잠시 그리움에 젖는다. 그리움은 해외에 나와서 살더라도 잊지 말라는 듯이 이역만리인 이 땅에 고국의 모습을 심어놓았다.

뉴질랜드에서 예루살렘을 만나다

사람이 전혀 살 곳 같지 않은 이 외진 산골에도 마을들이 드문드문 있다. 피피리키를 지나 우리가 처음 만난 마을은 히루하라마(Hiruharama). 그런데 그 마을의 표지판에는 괄호 속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함께 써 있다.

▲ 뉴질랜드의 산골에서 만난 예루살렘 마을 표지판
ⓒ2004 정철용
그러나 여행 안내책자에는 이와는 반대로 히루하라마라는 마오리 지명이 괄호 속에 들어가 있고, 지도에는 아예 예루살렘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는 의미일 터이다.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를 보고 미국의 텍사스 주에 파리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처럼, 나는 뉴질랜드에도 예루살렘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웠다. 그 지명의 유래를 알려주듯이 마을에는 천주교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수녀 2명이 관리하고 있다는 그 교회와 수도원은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전설을 품고 있는 강의 물줄기와 그 강기슭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 깃들어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마오리들이 이 교회의 신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교회의 내부는 그동안 우리가 보아 왔던 어둡고 무거운, 경건하다 못해 억눌린 느낌마저 갖게 하는 서양식 천주교 성당의 모습과는 다르다. 벽면의 일부와 제단이 마오리 전통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 환한 흰 색의 벽과 천정은 장식이 거의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다.

▲ 예루살렘의 천주교 교회의 내부는 마오리 장식이 인상적이다
ⓒ2004 정철용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나온 우리를 교회 옆의 수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인자한 모습의 수녀상이 반긴다. 마더 메리 오베르(Mother Mary Aubert). 이 교회의 창건자인 그녀는 1880년 대에 이 외진 곳을 찾아와 약 2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펼친 프랑스의 수녀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 마오리들에 대한 선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약학과, 식물학과, 간호학 지식을 활용하여 병든 마오리들을 많이 치료해 주었다. 그래서 많은 마오리인들이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마오리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찾아온 이는 메리 오베르 수녀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백스터(James K. Baxter)는 마오리인과 유럽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꾸며 생애의 말년을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기도 중에 문득 얻은 영감에 의하여 1968년에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그는 돈과 책 없이, 오직 신에 대한 기도와 땅을 일구는 노동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를 설립하고, 그를 따라 온 추종자들과 함께 이곳 주민들인 마오리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3년이 채 못 되어 공동체는 기강이 흔들리면서 와해되기 시작했고, 1972년 그의 죽음과 함께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죽어서도 꿈을 이루기를 소원했는지 예루살렘의 산자락에 묻혔다.

▲ 바깥에서 보면 평범하게 보이는 단아하고 정갈한 일반교회의 모습이다
ⓒ2004 정철용
한 시인의 꿈은 이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지만 한 수녀의 꿈은 100년을 넘기면서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정녕 종교는 예술보다 강한 것인가. 교회 뒤쪽으로 제법 올라간 산기슭에 있다는 제임스 백스터의 무덤에 대한 경배는 그 쪽을 향하여 눈길 한 번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차에 오른다.

끊어진 도로에서 마음을 졸이다

예루살렘을 벗어난 차는 1853년에 밀가루를 빻기 위하여 지은 카와나 물레방앗간에서 잠시 멈추었을 뿐 내처 달린다. 점심을 바닷가 도시 왕가누이에서 먹으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뭔가! 도로 폐쇄 표지판이 차를 막아선다.

오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산사태 난 곳이 있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우려하던 사태가 기어코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우회로가 없으니 2시간이 넘게 달려온 비포장도로를 다시 되돌아 달려가 4번 국도를 타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 도로 폐쇄 표지판에서 눈앞이 캄캄해지다
ⓒ2004 정철용
그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잠시 후 우리 뒤에 차 한 대가 멈춘다.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들이다. 차에서 내리는 그들의 얼굴이 우리처럼 일그러진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산사태로 무너진 저쪽 도로 위를 작은 불도저가 분주하게 오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저들이 오늘 중으로 도로를 이을 수 있는 것일까.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똑같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연대감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체코에서 왔다는 그들은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공사를 하고 있는 저쪽에서 아버지를 따라 나온 모양인지, 한 어린 소년이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숨차게 달려온 그는 반가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한다. 15분이면 도로가 임시 복구될 것이니 돌아가지 말고 기다릴 것! 우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 긴급 보수에 나선 인부들에 의해서 도로는 임시복구되었다
ⓒ2004 정철용
그 짧은 시간마저도 그냥 헛되이 버리기가 아까운지 체코에서 온 여자들은 차를 길가에 세워 놓고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우리는 차의 창문을 올리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 온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을 먹는다.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마침내 저쪽에서 이제 됐다는 수신호를 보내오고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복구한 길을 먼지 가득 풍기면서 지나간다. 길을 만들어 준 불도저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전하고 우리는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달린다.

제법 높은 고개를 하나 넘고서야 길은 평온해진다. 얼마 달리지 않아 포장도로가 나타나자, "야호! 이제 포장도로다"하고 아내와 딸이 먼저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모험 없는 삶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모험이 없다면 삶의 기쁨도 없을 터이다. 비록 4시간에 불과하지만 험한 비포장도로를 달려왔기에 우리는 이제 편안한 길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을 맛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험하긴 해도 그 비포장도로가 산사태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있었더라면, 우리가 그 길의 끝에서 이렇게까지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까.

▲ 마지막 고개 위에서 바라본 팡가누이 강은 힘든 계곡을 달려왔지만 곧 만나게 될 바다 때문인지 평화로워 보였다
ⓒ2004 정철용
깊은 골짜기를 굽이굽이 요동치며 달려온 팡가누이 강물도 마침내 닿는 바닷가에서는 우리처럼 이렇게 기쁠 것이다. 왕가누이 시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그 다리 아래에서 들려오는 팡가누이 강물의 노래를 듣는다. 기쁨에 넘쳐 바다로 달려 나가고 있는 강물은 나지막하지만 매우 분명한 노래 소리를 낸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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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들의 구멍, 모키 터널을 지나다
뉴질랜드 여행기(9) : 43번 국도 '잊혀진 세계'
정철용(ccypoet) 기자
스트랫포드의 시계탑이 보여준, 너무나 짧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5분짜리 단막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구경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차의 시동을 거는 마음은 유쾌하다.

남은 오후의 서너 시간 동안 우리는 내륙 쪽으로 깊숙이 이어지는 도로를 달릴 것이다. 그 도로는 뉴질랜드 북섬의 서쪽 해안 타라나키 지역과 중부 내륙의 킹 컨트리 지역을 이어주는 도로인 43번 국도다.

주유소가 하나도 없는 ‘잊혀진 세계’ 국도

사람들은 타라나키의 동쪽 관문 스트랫포드와 킹 컨트리의 서쪽 관문 타우마루누이를 연결하는 이 국도를 ‘잊혀진 세계(Forgotten World)’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험한 오지를 통과하는 도로길이길래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 43번 국도 지도
ⓒ2004 taranakinz
총연장 155km에 달하는 이 국도에는 중간에 주유소가 하나도 없으니 ‘잊혀진 세계’로 들어서기 전에 자동차의 연료 탱크를 가득 채워 놓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여행 안내 책자의 경고문은 나의 이런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그 길을 달려 보는 수밖에 없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주로 바닷가를 끼고 달리는 이번 여행의 여정과는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 ‘잊혀진 세계’ 국도를 일정에 넣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여행 안내 책자의 당부대로 나는 ‘잊혀진 세계’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의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우고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15분. 좀처럼 볼 수 없는 전인미답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내 발은 경쾌하게 가속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핸들을 잡은 손에는 그만큼의 긴장이 배어 있다. 지금까지 달려 왔던 평탄하고 곧게 뻗은 도로와는 달리, 가파른 고갯길과 굴곡이 심한 길이 이어지는 초행길을 달리게 될 터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골 학교 담장에서 허수아비를 만나다

스트랫포드의 경계를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제법 가파른 고갯길을 만났다. 이 도로에서 만나게 되는 네개의 큰 고개 중 첫번째 고개인 스트래스모어 새들(Strathmore Saddle).

이 고개의 꼭대기에서는, 동쪽으로는 루아페후산을 비롯해서 통가리로 국립공원에 우뚝 솟아 있는 세개의 연봉들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타라나키산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그 높은 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스트래스모어 새들에서 바라다본 풍경
ⓒ2004 정철용
대신 양들과 소들을 방목하는 초록 풀밭의 낮은 구릉들이 겹겹이 물결치듯 이어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풍경들을 보고 있는 사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을 오르느라 긴장했던 손과 발과 눈이 편안해진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출발한 우리는 채 5분도 달리지 않아 다시 차를 멈췄다. 길가에 도열해 있는 수많은 허수아비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한국의 가을 들판에 서있는 허수아비들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 허수아비들에서 그리운 고국의 가을 들판을 한순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허수아비들은 가을 들판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외진 시골 초등학교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담장에 기대어 서있다. 후이아카마 초등학교. 팻말을 보니 100년도 훨씬 전인 1896년에 세워진 학교다.

▲ 도로변 학교 담장에 도열해 있는 허수아비들
ⓒ2004 정철용
▲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후이아카마 초등학교
ⓒ2004 정철용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인가를 한 채도 보지 못했는데, 이런 학교가 있다니! 학생 수는 몇이나 될지 궁금해진다. 덩그마니 서 있는 건물 한동이 전부이다. 방학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아이들 웃음소리로 시끄러웠을 넓은 잔디밭 운동장과 한쪽에 마련된 놀이터가 비어 있다.

방학 중에는 이렇게 텅 비어 아무도 없는 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놓은 것일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허수아비들을 만들었을 어린 꼬마들을 생각하니 ‘훗훗’ 웃음이 절로 나온다.

딸아이는 담장을 막 넘어 가려는 한 허수아비가 재미있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있고, 아내는 허수아비들보다 곱게 물든 단풍에 더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 나무 아래를 서성인다. 나는 허수아비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아예 목이 없는 것도 있고, 한국의 허수아비처럼 밀짚모자를 쓴 것도 있고, 사람의 얼굴인지 동물의 낯짝인지 언뜻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나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모두 반갑고 정답다.

▲ 학교 앞의 큰 나무를 곱게 물들인 가을빛
ⓒ2004 정철용
▲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와 고개를 떨군 허수아비
ⓒ2004 정철용
이 외진 곳까지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 우리가 너희들을 잊지 않으마. 너희들도 우리를 잊지 마렴.

아이들이 만들어 학교 담장에 세워놓은 허수아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잊혀진 세계’의 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작별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찌푸렸던 하늘은 참았던 눈물방울을 기어이 떨구고 만다.

유령의 마을에 웬 호텔?

큰 고개 두개를 더 넘어 우리는 ‘유령의 마을’이라 불리는 팡가모모나(Whangamomona) 마을에 도착한다. 1895년에 첫 거주민이 살기 시작하면서 한때는 ‘풍요의 계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던 이 마을은 1924년에 대홍수를 겪고 나서 사람들이 떠나면서 점점 쇠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 있던 마을 주민들의 개척자적인 불굴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 1989년 행정 구역을 재편하면서 이 작은 마을을 어느 쪽으로 편입시킬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을 때,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공화국’으로 선포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에 자신들만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이 때가 되면 이 마을 출신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흥청거림은 일년에 단 하루뿐이고 나머지 날들은 무덤처럼 고적할 것이다.

우리가 이 마을에 들어서던 그날 오후에도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2001년 인구조사 때에는 그래도 170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고작 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람 구경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 유령의 마을의 상징, 팡가모모나 호텔
ⓒ2004 clear.net
비가 내려 한층 음산하게 보이는 이 마을을 그나마 사람 사는 마을처럼 여겨지게 하는 것은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94년 된 커다란 건물이다. 팡가모모나 호텔. 잠깐 내려서 호텔 바에서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갈까 하는데, 아내는 그냥 통과하자고 한다.

우리는 뒷좌석에서 곤하게 잠이 든 딸아이와 가는 비가 내리는 날씨를 핑계 삼았지만, 어쩌면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유령 마을의 고적함과 음산함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호빗들의 구멍, 모키 터널을 지나서

‘유령의 마을’을 통과하고 20여분을 더 달려 우리는 ‘잊혀진 세계’의 마지막 큰 고개인 타호라 새들(Tahora Saddle)을 넘는다. 나는 그 고개의 꼭대기에 있는 ‘호빗들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모키 터널(Moki Tunnel)을 통과하고 나서 길가에 차를 멈춘다.

▲ '호빗들의 구멍'이라고 불리는 모키 터널
ⓒ2004 정철용
1936년에 이곳에 거주한 개척자들이 말과 사람들과 자동차들의 통행을 위해서 뚫은 이 터널은 길이는 180m로 제법 길지만 폭은 겨우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일방통행 터널이다. ‘호빗들의 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도 하다. 차량 통행이 적은 도로이니 이런 일방통행의 터널이 가능한 것일 게다.

그러나 이런 일방통행로는 터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뉴질랜드의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차 한대만 통과할 수 있는 1차선 다리(One Lane Bridge)를 종종 만나게 된다. ‘잊혀진 세계’ 하이웨이도 바로 그런 1차선 다리들의 천국이다. 수십 개의 1차선 다리를 통과해야만 ‘잊혀진 세계’를 빠져나올 수 있다.

▲ 1차선 다리 표지판.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된 방향의 차량에 통행우선권이 있다.
ⓒ2004 정철용
1차선 다리에서는 굵은 검은 선으로 표시된 방향에서 오는 차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도로상에 있는 1차선 다리라도, 그 다리가 있는 곳의 지형에 따라 우선권이 있는 쪽의 화살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이 표지판이 나오면 특별히 신경을 써야만 한다.

즉, 지금 통과하는 1차선 다리에서는 내가 우선권이 있다 하더라도 5분 후에 만나게 될 1차선 다리에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좀 전에 지나친 다리에서 내가 우선권이 있었으니 이번 1차선 다리에서도 내가 먼저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표지판의 검은 화살표 방향을 살피지 않은 채 무조건 진입하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다.

모키 터널을 지나면서부터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더 많아서 운전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도 내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수분 간격으로 나타나는 1차선 다리들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그 1차선 다리들을 조심스럽게 건너며 나는 우거진 숲 속 길을 통과한다. 나무 그늘 때문에 대낮에도 어두울 그 길들은 오후 다섯시가 지나면서부터는 짙은 어둠이 깔려 한층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그 어둠 속 길을 달리며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마주 오는 차들이라도 많으면 그 불빛을 위안이라도 삼으련만, 차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약 3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내가 만난 차량의 수는 불과 13대에 불과했으니, 정말 ‘잊혀진 세계’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6시 32분, 헤드라이트를 켠 차 한대가 막 지나쳐 빗겨간다. 지금 이 시간에 ‘잊혀진 세계’로 들어서는 저 차량의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이 멀고 험한 도로를 오늘밤에 넘어가야만 하는 차량일까, 아니면 저 산골의 어디쯤으로 귀가하는 차량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 부디 무사하기를. 우리가 빠져나온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그 열세번째의 차량을 향해 무사 운전을 빌어 준다.

저 마지막 차량은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나는 ‘잊혀진 세계’를 막 빠져나와 문명의 빛인 가로등이 점점이 늘어선 도시로 다시 진입한다. 또 하루가 저물고 나는 도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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