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르고 보자'는 마음으로 떠난 뉴질랜드 여행
인천 공항~오클랜드 공항
배지영(okbjy) 기자
▲ 로토루아의 대표적인 지열지대 테푸이아. 마오리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 배지영
▲ 마오리 공연, 마오리식 인사는 눈을 크게 뜨고 혓바닥을 내미는 것이다.
ⓒ 배지영
사고를 쳤다. 마음속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무작정 저지르고 봤다.

2주 전의 어느 밤, 퇴근한 남편이 샤워하면서 말했다.

"배지영, 작은누나(아이의 작은 고모)가 현기(작은누나 아들, 고등학생) 보러 뉴질랜드 간대. 그래서 배지영하고 제규도 함께 가면 좋겠다고 했어. 잘했지?"
"우와! 끝내준다. 다음 달쯤에 가신대?"
"그건 모르겠어. 가긴 갈 거래."


다음날 낮에 작은 누나 전화를 받았다. 내일 날짜로 비행기 좌석이 딱 3개 남아서 당장 예약했다고 했다. 아이는 학교 기말 시험을 봐야 하고, 나는 일터에 휴가도 안 냈는데 일단 여권 사본을 보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서 인천 국제공항으로 갔다.

공항에는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 예약한 좌석은 세 자리, 그러나 우리 아이 좌석은 안 떴다. 항공사 직원은 아무리 해도 좌석이 없다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간 다음에 오클랜드 대사관으로 찾아가라고 했다. 아이가 지금 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둘이서 여행을 다녔지만 무릎에 앉힌 적은 없었다. 독립한 채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간은 고르게 흘렀지만 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아이는 자리에 앉히고, 나는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서라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뉴질랜드에서는 승인을 하지 않았다. 1시간 가까이 컴퓨터를 잡고 뭔가를 시도하는 항공사 직원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심란했다. 전 날, 갑작스런 휴가에 대한 양해 전화 50여 통을 할 때보다 진땀이 났다.

마침내 사라진 좌석에 대한 미스터리는 착오였다고 밝혀져서 탑승권을 받았다. 비행기 출발 시각 10분 전이었다. 화물로 보낼 짐은 특별대접을 받아서 따로 커트에 실렸다. 우리는 탑승구까지 전력질주 해야 했다. 아이의 탑승권을 찾지 못해 애를 먹던 항공사 직원은 '훈남'이어서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탑승구까지 함께 달려와 줬다.

▲ 타우포에서 파머스턴 노스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1시간 가까이 사막 같은 길이 나온다.
ⓒ 배지영
우리가 자리에 앉고 3분 뒤에 비행기는 뉴질랜드로 가기 위해 이륙했다. 내가 뉴질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두 가지, 조카 전현기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곳, 작은 누나네 회사에서 쓰는 나무는 뉴질랜드에서 실어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여행 계획은 딱하게도 달랑 한 가지, 공항에 있는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릴 예정이라는 것뿐이었다.

기내에서는 책을 빌려주는데 <뉴질랜드 100배 즐기기>가 있었다. 11시간의 비행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뉴질랜드에 대해서는 비행기를 탈 때보다 많이 알게 됐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실사로 찍었다는 것, 뉴질랜드 수도는 오클랜드가 아니라 웰링턴이라는 것도 알았다.

무언가 안다는 행위는 새로운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짠 '급여행계획'으로는 오클랜드 공항에서부터 렌터카로 해밀턴, 로토루아, 타우포를 거쳐 조카가 있는 파머스톤 노스까지 가는 거였다. 돌아올 때는 파머스톤 노스에서 렌터카를 돌려주고, 비행기로 오클랜드까지 오는 거였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차 핸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3년 전 영국 런던, 모든 차들의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었다. 차 핸들이 왼쪽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길을 건널 때 왼쪽을 살피게 된다. 그래서 런던의 도로에는 'LOOK RIGHT'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와 내가 탄 버스는 차 핸들이 왼쪽에 있는, 프랑스에서 온 남자를 치었다. 오른쪽에서 신호에 맞게 오는 차를 못 보고 차에 받힌 남자의 피는 옷을 적시고 도로로 흘렀다.

▲ 2004년 영국 런던, 모든 차의 핸들은 오른쪽에 있다. 나같이 핸들이 왼쪽에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길 위에 'LOOK RIGHT'라고 써 있다.
ⓒ 배지영
운전 걱정을 한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대책 없이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누나는 뉴질랜드에서 3년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전현기를 위해서 과일 상자 가득 김치를 싸왔다. 그래서 나는 입국 신고서를 쓸 때에 음식을 가져왔다고 따로 표시했다.

섬나라인 뉴질랜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엄격하게 규제한다. 그래야 이미지에 걸맞게 청정 뉴질랜드를 유지할 수 있다. 김치를 상자 가득 가져온 우리는 따로 한 켠에 있는 입국 심사대로 가야 했다. 김치 상자는 뜯겼다. 혹시 김칫국물이 넘쳐나서 샐까 봐 꼼꼼하게 동여 매 놓은, 웅장한 규모의 김치가 나왔다. 그네들은 저절로 인상을 쓰며 물었다.

"김치 말고 다른 것도 있습니까?"
"단지 김치뿐입니다."


어떤 사람의 김치 상자는 암담할 정도로 파헤치기도 했다는데 우리가 가져온 김치는 속속들이 헤집지 않아서 상자를 테이프로 붙이기만 하면 됐다. 예감이 좋았다. 이 여행은 순조로울 모양이었다. 작은 누나 발걸음은 빨라졌다. 곧 아들을 만날 거라는 설렘은 뒷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 가버먼트 가든 안에 있는 블루 배스.
ⓒ 배지영
나는 조카 전현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새 많이 자라고 변했겠지만 못 알아볼 리 없다. 찬찬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엄마! 숙모! 제규야!" 하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한국인 청소년은 없었다. 뉴질랜드 국내용 공중전화카드를 사서 전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폴 전(조카 전현기의 뉴질랜드 이름)이야?"
"나는 폴 전이 아니야."
"혹시, 거기 파머스톤 노스야?"
"아니야. 너는 잘못된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의 말은 같았다.

"나는 네가 찾는 폴 전이 아니야."

블랙홀에 빠지면 이럴까. 우리는 뉴질랜드에 온 게 아니라 지구 밖의 어느 별에 온 기분을 느꼈다. 작은누나는 기다리던 아들이 안 나와서 걱정과 짜증이 일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현기의 전화번호를 다시 살펴보았다. 오, 맙소사! 한국에서 국제전화 걸 때처럼 국가 번호까지 모두 누르며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러나 전화 통화를 했다고 현기를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그 애가 있는 파머스턴 노스에서 오클랜드까지는 자동차로 7시 반 거리,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만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는 택시처럼 잡아타거나 불러서 탈 수는 없다. 전현기군은 늦잠에서 막 일어난 참이어서 우리는 적어도 3시간 이상은 오클랜드 공항에서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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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
고적한 바닷가는 누가 지키고 있나?
[뉴질랜드 여행기 23] 코로만델 반도의 알려지지 않은 바닷가 몇 곳 ①
정철용(ccypoet) 기자
코로만델 반도가 오클랜드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들 덕택이다. 오클랜드에서 뻗어나온 1번 고속 국도와 코로만델 반도의 간선도로 25번 국도를 2번 고속 국도가 연결시켜주고 있는데, 이 도로들은 화창한 주말과 여름 휴가철에는 오클랜드와 코로만델 반도 사이를 오가는 차들로 몸살을 앓는다.

그중 2번 도로는 교통사고가 많기로 악명이 높아서, 도로 곳곳에 경고 표지판들이 수도 없이 세워져 있다. 졸음운전이나 과속운전은 또 하나의 치명적인 사고(Just Another Fatal Accident)의 요인이 되니 조심하라는 내용을, 그 두음자 'JAFA'를 이용하여 조금씩 변형시킨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지역 주민들은 이것을 다르게 읽는다. '또 한 명의 망할 놈의 오클랜드 시민(Just Another Fucking Aucklander)'이라고.

오클랜드에서 코로만델 반도로 오가는 차량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교통사고에 대해서 그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는가를 너무나도 확연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 뉴질랜드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선망이 어린 시샘과 오해가 섞인 편견을 담은 농담이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코로만델 반도를 찾았던 것은 봄 방학이 끝나가던 9월 말의 평일이어서, 1∙2번 고속 국도도, 25번 국도도 모두 한산했다. 도로 사정이 순조로워서 우리는 예정했던 일정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들러 보자고 마음에만 두고 있었던, 코로만델 반도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바닷가 몇 군데를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었다.

뉴 첨스 비치, 작은 바위섬과 바닷새들이 지키고 있는 해변

여행 첫날, 와이아우 워터웍스에서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나온 우리는 그날 우리가 묵을 숙소가 있는 코로만델 타운 바로 직전에 우회전하여 동쪽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 팡가포우아(Whangapoua)로 향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정에 여유가 생겨서, 다음날 시간이 나면 잠깐 둘러보기로 한 뉴 첨스 비치(New Chums Beach)를 앞당겨서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 뉴 첨스 비치 바닷가에는 뫼 산자 형상의 작은 바위섬이 떠 있었다.
ⓒ 정철용
여행정보 안내책자에는 이곳의 모래사장이 핑크빛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을 끝에 있는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다본 모래사장은 흰색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되어, 우리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면서 물어보았다. 퉁퉁한 몸집의 젊은 여주인은 여기가 뉴 첨스 비치가 맞다고 했다. 오늘은 하얗게 보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햇빛 좋은 날에는 모래사장이 엷은 핑크색으로 보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조금 실망스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고운 흰 모래가 펼쳐져 있는 모래사장 너머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바다에 뫼 산(山)자 형상으로 떠 있는 바위섬이라니! 마치 누군가가 분재를 해놓은 듯한 바위섬이 지키고 있는 해변은 고적하고 아늑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해변을 이리저리 거니는 우리를 방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갑자기 나타난 우리가 이 바닷가에는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드는 저 멀리 바닷가 모래밭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바닷새들이 우리를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으니 말이다.

▲ 모래밭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바닷새들은 우리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 정철용
가까이 다가서기를 그만두고 우리는 잔뜩 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면서 모래밭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바닷새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일찍이 바닷새들의 차지였던 곳이니 우리가 물러나는 것이 마땅했다. 뫼 산자 형상의 작은 바위섬과 수십 마리 바닷새들은 우리가 떠나고 나서도 무심할 것이나, 그리고 모래사장에 남긴 우리의 어지러운 발자국들도 이내 지워지고 말 것이나, 사진 몇 장에 담아온 그 바닷가는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렇게 그날 찍었던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기억 속에 고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9월의 어느 봄날 그 바닷가를 복원해내고 있는 것이다.

콜빌 잡화점, 저물 무렵에 만난 코로만델 반도 최북단의 구멍가게

뉴 첨스 비치를 출발한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서 코로만델 타운으로 되돌아왔다. 예약해 놓은 모텔에 도착한 오후 4시경, 일단 체크 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은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도로 곳곳에 일방통행의 비좁고 작은 다리들이 복병처럼 숨어 있기는 했어도, 차들이 드물어서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 일방통행 다리에서는 길고 검은색 화살표 방향에서 오는 차에게 양보해야 한다.
ⓒ 정철용
우리는 1시간 정도 그렇게 달려서, 19세기 중∙후반에 카우리 나무 제재업의 중심지였던 마을 콜빌(Colville)에 닿았다. 콜빌은 1970년대에는 '뉴질랜드 히피 문화의 수도'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문이 닫혀 있는 낡은 구멍가게 하나였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문을 닫은 콜빌 잡화점(Colville General Store)이 석양빛에 커다란 붉은 간판을 물들이며 도로변에 고적하게 서 있었다. 각종 생필품과 차량용 휘발유, 그리고 낚시꾼들을 위한 미끼 등 온갖 잡화들을 팔고 있는 이 가게는 코로만델 반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상점인데, 간이우체국도 상점 옆에 붙어 있었다.

아, 이 가게의 주인은 누구이며, 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하루에 몇 사람이나 이 가게를 이용할 것이며, 또 간이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는 이들은 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차에서 내려 잠시 가게를 둘러보는 내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들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입 다문 채 말없이 앉아있는 이 낡고 오래된 구멍가게가 눈물겨웠다.

▲ 코로만델 반도 최북단의 구멍가게 콜빌 잡화점은 오후 5시인데 벌써 문을 닫았다.
ⓒ 정철용
재촉하는 딸아이의 성화를 듣고서야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거기서부터 1~2분 조금 더 북쪽으로 달려가 보니 포장도로는 문득 끝이 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이고 바닷가 절벽을 끼고 달리는 위험한 길이니 4륜구동차 말고는 통행하지 말 것이며 미숙한 운전자도 피할 것을 당부하는 안내판이 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시간도 늦었지만 우리 차는 일반 승용차여서 우리는 그 안내판 너머 길은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턴을 해서 다시 잘 포장된 길을 되돌아오면서도, 나는 안내판이 가로막고 있는 저 비포장도로 너머로만 자꾸 향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유를 꿈꾸었던 뉴질랜드의 히피들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아마도 저 길 너머, 일반인들은 쉽사리 닿지 못하는 코로만델 최북단의 바닷가 어디쯤에 숨어 살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 저녁 하늘 흰 구름이 숨어드는 연두빛 구릉 너머엔 누군가 저녁밥을 짓고 있으리.
ⓒ 정철용
차에서 내려 그 어디쯤을 가늠하며 사진 몇 장을 또 찍었다. 물론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저무는 저녁 하늘 흰 구름이 숨어드는 저 연두색 구릉 너머에서 누군가 저녁밥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기진 배를 안고 모텔로 돌아온 그날 저녁, 우리는 밥을 지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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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자연 속 놀이공원 두 곳
뉴질랜드 여행기(22) : 와이아우 워터웍스와 드라이빙 크릭 레일웨이
정철용(ccypoet) 기자
방학을 맞아 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저 신이 나서 따라나서던 딸아이 동윤이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달라졌다. 이번 방학에 코로만델 반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했다. 엄마ㆍ아빠 따라 다니느니 집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즐겁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나와 아내의 여행 취향이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문화 유적을 둘러보는 것이다 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자연의 풍취나 문화 유적보다는 신나게 몸을 움직여 재미를 느끼거나 뭔가 특별하고 신기한 볼거리에 더 눈길이 가는 나이가 되었으니, 동윤이의 마음이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그 나이 때 아이들의 생명 리듬은 성인의 그것보다 열 배 백 배 더 빠르게 고동치기에 그러한 아이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려면 열 배 백 배 풍부한 삶의 질료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한없이 느려서 한결같아 보이는 자연의 풍경이나 오랜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문화 유적으로는 이제 열세 살이 된 딸아이의 마음을 도저히 채울 수가 없을 터였다.

궁리 끝에 나는, 이번 코로만델 반도 여행은 식구들 각자가 나름대로 여행 일정을 짜서 그것을 모두가 합의하는 일정으로 다시 짜 맞추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딸아이가 원하는 바를 이번 여행 일정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엄마ㆍ아빠가 일방적으로 짠 일정을 따라다닌다느니, 그래서 재미없다느니 하는 딸아이의 불평, 불만도 미리 차단할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동윤이가 짠 일정에서 두 곳이 이번 여행에 포함되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놀이공원 비슷한 성격의 관광지여서, 아내와 나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인공의 놀이기구 몇 개를 타는 것이 전부이겠지만 딸아이가 원하니 갔다 오자는 심정으로 그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두 놀이공원에는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고 어른과 아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화로움이 있어서 우리도 몹시 즐거웠다.

그렇다.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매력이 아니던가! 기대 밖에서 만난 기대 이상의 두 놀이공원을 다시 추억해 보는 지금 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와이아우 워터웍스에서 하늘을 나는 자전거 타기

나비와 난초 정원을 구경하고 난 후 25번 국도를 타고 코로만델 타운을 향해 약 50분 정도 달리니 우측으로 309번 도로가 나타났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 와이아우 워터웍스(Waiau Waterworks)는 비포장도로인 309번 도로의 약 5km 정도 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 정철용
주차장에서 우리를 맞이해준 것은 커다란 물레방아였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다. 잔뜩 그을린 프라이팬, 찌그러진 주전자, 음식 찌꺼기가 달라붙어 있는 냄비와 깡통, 심지어는 고무장화까지도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받이 용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연결되어 있는 철제인간 '터너(Turner)'씨가 펌프의 발판을 밟아서 물은 가느다란 관을 타고 위로 다시 올라가게 되고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참으로 재미난 아이디어에 감탄하면서 공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아담한 연못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약 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숲의 곳곳에 그리고 연못의 주변에 물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온갖 기발한 기계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의 힘을 이용해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직 박스도 있었고 시계추에 거꾸로 매단 플라스틱 병들 속으로 분사되는 물의 압력을 이용해서 작동되는 물시계도 있었다.

ⓒ 정철용
그러나 40여종의 기계장치 중에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일련의 자전거 시리즈였다. 먼저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폼나게 착용하고 연못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뼈대만 앙상한 이 아저씨를 좀 보자. 아니나다를까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 아저씨 이름이 '뼈(Bones)'라고 하는데, 칼라하리 사막을 자전거로 횡단하는데 실패했던 인물이라는, 진위가 아리송한 글이 적혀 있었다.

사막에서는 얼마나 멀리 달렸는지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작은 관을 통하여 바퀴들 위로 뿜어져 나오는 고압 물줄기의 힘으로 하루에 40km를 달린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과연 뼈만 남을 만도 했다.

ⓒ 정철용
두 번째 자전거는 또 다른 작은 연못가에 설치되어 있는 물대포 자전거 두 대였다. 이 자전거들은 관광객들이 실제로 타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손잡이 중앙에 설치된 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딸아이와 함께 자전거 하나씩을 올라 타고 앉아 누가 더 멀리 물대포를 쏘아보내나 시합을 했는데, 엉뚱하게도 코흘리개 어린 시절 공터 담벼락에 누가 더 높이 오줌 줄기를 쏘아 올리나 시합을 하던 생각이 났다.

ⓒ 정철용
움직여도 제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이 자전거들과는 달리, 세 번째 자전거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전거여서 자전거가 아니라 비행기 타는 맛이 났다. 시소처럼 양쪽 끝에 달려 있는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면 그 힘의 세기에 따라 자전거가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것이긴 했어도 허공을 날아가는 자전거를 보고 있자니, 영화 < E.T. >에 나왔던 아름다운 장면이 떠올랐다.

ⓒ 정철용
인공의 놀이기구로만 가득한 복잡한 대개의 놀이공원과는 달리, 자연의 품에 아늑하게 안겨있는 이 소박하고 기발하면서도 유쾌한 놀이공원에서 우리는 1시간 30분 동안 동심을 즐겼다. 이곳을 다녀간 미국의 한 관광객이 입구에 놓아 둔 방명록에 남기고 간 소감처럼, 아내와 나는 다시 어린 시절의 아이가 되어 몹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 아빠도 재밌었지? 그것 봐, 내가 여기 꼭 오자고 그랬잖아."

와이아우 워터웍스를 떠나면서 보란 듯이 뽐내는 딸아이의 말에 우리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다.

드라이빙 크릭 레일웨이에서 꼬마 열차를 타고 계곡 오르기

코로만델 타운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아침, 우리는 딸아이가 고른 또다른 놀이공원인 드라이빙 크릭 레일웨이(Driving Creek Railway)로 향했다. 전날에는 신나게 자전거를 탔는데 이번에는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산 기슭에 자리잡은 그곳에 도착해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기차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철로를 따라 가파른 계곡을 올라가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일종의 산악열차 관광이었다.

ⓒ 정철용
그런데 1974년, 2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림지를 사들인 이곳 소유주 배리 브릭켈(Barry Brickell)씨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구입한 산자락 한 구석에 도예공방을 세우고,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점토와 가마용 목재들을 가파른 산골짜기와 정상으로부터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로를 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역전이 되어서 산악열차 관광이 주사업이 된 것이다.

보통 시즌에는 하루에 두 차례(오전 10시 15분과 오후 2시) 열차가 운영되지만 방학이나 여름 휴가철 등 바쁜 시즌에는 두 번을 더 운영한다(오후 12시 45분과 3시 15분). 이것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허탕을 칠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미리 예약을 해서 10시 15분에 떠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 정철용
열차라고는 해도 궤도의 간격이 40~50cm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놀이공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어린이용 꼬마 열차 수준이었다. 드디어 우리가 탄 3량 짜리 꼬마 열차 '뱀(snake)' 호가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젤 엔진으로 움직이는 열차는 가파른 계곡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정말 뱀처럼 기어 올라갔다. 워낙 가파른 곳은 지그재그로 선로를 놓았기에 고개에 올라설 때마다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꿔 주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운전사가 내려서 뒷자리로 옮겨앉는 것이 우스웠다.

ⓒ 정철용
어쨌거나 그렇게 가파른 계곡을 타고 힘겹게 산을 오르는 열차는 도예공방에서 직접 구운 벽돌로 만든 터널도 지나고 계곡 사이를 잇는 철교도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짧고 작은 것들이어서,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나 청룡열차를 탈 때와 같은 스릴이나 아찔함은 없었다.

그러나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온통 푸르른 녹색으로 물들었고 비할 데 없이 상쾌한 숲의 바람을 들이마신 우리의 폐는 돛폭처럼 한껏 부풀었다. 전망대까지 이르는 선로의 총연장은 3km에 불과한 짧은 거리였지만, 우리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 정철용
꼬마 열차는 출발한 지 25분 정도 지나서 마침내 산중턱에 우뚝 솟아있는 전망대에 닿았다. 아이풀 타워(Eyefull Tower)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망대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은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장쾌한 모습이었다. 구릉 너머 멀리 보이는 바다의 푸른 색은 희미했지만, 바로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는 울창한 숲의 짙푸른 녹색은 장엄하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이 지역의 산과 숲은, 광부들의 금광 채굴과 나뭇꾼들의 산림 벌채 그리고 뒤이은 농부들의 목초지 개발로 90퍼센트가 황폐화 될 정도로 훼손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숲을 가꾸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 정철용
이 산림지를 사들인 이후, 예전의 그 푸르고 울창했던 숲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난 30여 년 동안 뉴질랜드 고유수종인 카우리(Kauri) 나무, 리무(Rimu) 소나무 등 1만 5천 그루의 나무를 이곳에 심었다는 배리 브릭켈의 끈질긴 노력과 헌신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딸아이 동윤이에게는 조금 심심하고 시시한 기차 타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차에서 그리고 전망대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이곳의 풍경과 역사는, 여행정보 안내서에서 코로만델 반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형용사 중의 하나인 '장엄한(magnificient)'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코로만델 반도의 장엄미는, 자연이 펼쳐보이는 아름다움만도, 인간의 손길이 닿은 문화 유적만도 아니라, 자연과 인간, 그 둘이 함께 서로를 보살피는 과정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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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들의 세계에는 인종차별이 없다
[뉴질랜드 여행기 21] 잊혀진 금광의 도시 템즈 그리고 나비와 난초 정원
정철용(ccypoet) 기자
오클랜드 동쪽 해상에 길게 발을 내밀고 있는 코로만델(Coromandel) 반도는 오클랜드를 지켜주는 천연의 방파제다.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높고 사나운 파도는 코로만델 반도에 부딪혀서 그 높이와 힘을 일단 낮추게 되고, 오클랜드의 동쪽 바닷가에 이르러서는 그저 발목을 찰랑찰랑 적시는 잔물결 정도로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 코로만델 반도 지도
ⓒ 정철용
오클랜드의 동쪽 바닷가가 대양(남태평양)과 접해 있으면서도 바다(태즈만해)에 접해 있는 서쪽 바닷가보다 훨씬 더 잔잔한 파도와 완만한 해안을 가지게 된 배후에는 이처럼 코로만델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정작 코로만델 반도의 명성을 올려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지형학적 중요성보다는 오클랜드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라는 점에 있다.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주말과 휴가를 즐기기 위한 별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지역도 바로 코로만델 반도라고 한다.

이는, 오클랜드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편리함이 주로 작용한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개발의 손길이 덜 타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2박 3일간의 코로만델 반도 일주 여행을 준비하느라 읽었던 여행정보 안내서에서도, 코로만델 반도를 묘사하는데 다음과 같은 4개의 형용사를 앞세우고 있었다. 다듬지 않은(rustic), 편안한(relaxed), 장엄한(magnificent), 훼손되지 않은(unspoiled). 그러니 이 형용사들의 진위를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이번 짧은 봄여행의 목적이 될 것이었다.

템즈, 잊혀진 금광의 도시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다

여행 첫머리에서 만난 템즈(Thames)는 코로만델 반도로 들어가는 관문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가 고작 7500명 정도에 불과하니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코로만델 반도 지역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고 제법 번화한 곳이라 한 발 양보해서 '작은 도시'라 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은 도시가 한때는 오클랜드보다도 인구가 많았고(그래 봤자 1만8000명 정도이지만) 100개가 넘는 호텔이 들어찰 정도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1867년, 이곳을 흐르는 한 시냇가에서 금이 발견되고 나서 이른바 '골드러시'로 인한 인구 집중이 낳은 기현상이었다.

오래지 않아 금광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황금을 좇던 사람들의 꿈은 거품처럼 꺼졌고 그와 함께 마을도 조금씩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당시에 세워져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사회기반시설과 코로만델 반도의 어느 곳이든 1시간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 의지하여, 템즈는 코로만델 반도 여행의 거점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행정보 안내서에는 템즈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금광 투어와 템즈 역사박물관을 추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광부들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문을 열어두고 있는 100년도 더 된 금광굴은 우리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또 템즈의 지난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잘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템즈 역사박물관은 이민 오던 첫 해에 이미 다녀갔던 곳이라 다시 볼 필요가 없었다.

결국 템즈를 그냥 지나치기로 한 나의 결정에 다들 이의가 없었다. 사실 잠깐이라도 멈추어서 기웃거려 보면 템즈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흥미로운 풍경을 하나쯤 보여주었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템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민 오던 첫 해,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이 생겨서 처음으로 오클랜드를 벗어나는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왔던 곳이 바로 템즈였다. 그때 우리는 템즈 거리를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우리 곁을 지나치면서 차 안에서 한 떼의 백인 청소년들이 큰 소리를 질러댔다.

"고우 홈, 차이니즈! (Go home, Chinese!)"

나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향해 질러대는 고함 소리였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중국인으로 오인하긴 했어도, 이민 와서 처음 당하는 인종차별적인 모욕에 아내와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젊은 혈기를 어쩌지 못한 어린놈들의 치기로 받아넘기기에는, 우리는 아직도 풋내기 초보 이민자였다.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마음을 간신히 달래서 템즈 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지금도 그렇게 피부색이 다르다면서 모욕을 주고 있으니, 골드러시 당시 금광을 캐러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그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오죽했을까!

잊혀진 금광의 꿈처럼 상처로 남은 기억도 쉽게 잊혀지면 좋으련만 그럴 정도로 내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해서, 나는 멀어져 가는 템즈의 거리를 백미러를 통해 한 번 흘낏 쳐다보았을 뿐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비 날개에 나쁜 기억을 실어 보내다

템즈를 빠져나온 후, 코로만델 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오르는 25번 국도를 5분 정도 달려서, 우리는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비와 난초의 정원(Butterfly & Orchid Garden). 겉으로 보기에는 숲 속에 지어 놓은 자그마한 온실처럼 보였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후끈 끼치는 온기와 물안개처럼 어린 습기 속을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 정철용
ⓒ 정철용
ⓒ 정철용
검은 날개를 위·아래에 쌍으로 달고 있는 놈들도 있었고, 날개에 커다란 눈동자 하나씩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나비가 아니라 나방처럼 보이는 놈들도 있었고, 망또를 두른 듯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나비들이 아니어서, 우리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날개 빛깔과 형태와 무늬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입구 쪽에 붙여놓은 안내문을 읽어보니, 약 400마리의 나비들이 온실 안에 있다고 한다. 나비들의 수명이 약 2주 정도에 불과해서 매달 700마리의 나비들을 새로 풀어놓는다고 한다. 그럼, 그 많은 나비들을 어디에서 구할까? 이어지는 글에 그 대답이 적혀 있었다.

즉 자체 부화 시설에서 한 달에 300마리의 나비를 부화시키는 동시에 매달 아시아와 남미에서 나비의 번데기 400마리를 수입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나비들 중에는 우리처럼 한국에서 온 나비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비들의 세계에는 인종차별이 없어서 그들은 너나없이 한데 섞여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나비를 가려낼 수가 없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온실 안에서 1시간이 넘게 나비들을 보고 또 보는 사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을 흐려 놓았던 템즈에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이 사라졌다.

내가 그렇게 나비 날개에 나쁜 기억을 실어 보내고 있는데, 나를 부른 딸아이가 나뭇잎 뒷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황토빛 날개를 지닌 나비 한 쌍이 서로 꽁무니를 대고 한창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 말자고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 정철용
ⓒ 정철용
사랑을 나누고 있는 황토빛 날개의 이 나비 한 쌍이 혹시 한국에서 온 놈들이 아닐까. 아니면 호랑이 무늬를 하고 있는 날개를 활짝 펴고 앉아 있는 저 나비 한 쌍이 한국에서 온 놈들일까. 부질없는 물음이라는 듯이 호랑이 무늬 나비 한 쌍은 날아올라서 다른 나비들과 함께 섞였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분명 저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온실을 돌아 나오면서, 나비들의 날개만 바라보느라 난초 꽃들에게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여, 핑크빛으로 활짝 피어난 난초꽃 한 송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차에 오르는 나의 머리 속에는 템즈의 나쁜 기억 대신 나비와 난초 정원에서 누린 기쁜 기억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정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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