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도 넘친 뉴질랜드의 로토루아 기행 (상)
박일원 2008-01-09 11:06:47 조회수: 695 추천:2

진실이라 믿기에는 그 증거가 부족했고 미신 따위로 깎아내리기에는 그 예측이 두려울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1886년 5월 31일 새벽안개로 덮인 뉴질랜드의 로토루아에 있는 타라웨라 호수에서는 불길한 징후 즉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날 아침 타라웨라 호수는, 빼꼭하게 침엽수림으로 뒤덮인 타라웨라 산 아래에서 새벽안개를 둘둘 말아 다리 사이에 낀 채 잠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먹이를 찾아 일찍 잠에서 깨어난 새들만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지요.


와카 타우아(Waka Taua, War Canoe)라고 하는 커다란 마오리 전사의 카누가 호수를 가로 질러 천천히 물가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배의 한쪽 줄에는 앉은 자세로 마오리 전사들이 노를 젓고 있었고 다른 쪽 전사들은 머리를 해오라기 깃털로 장식한 채 아마로 만든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겨울 해라 그런지 호수를 덮은 안개를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더라도 목격자들, 그러니까 그 날 아침에 마오리족 가이드인 소피아와 함께 호수 관광에 나섰던 랄프 박사와 켈리허 신부님과 오클랜드에서 온 사제를 포함한 여러 관광객들은 카누를 타고 가까이 다가오는 마오리 전사들의 모습을 식별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당시 안내를 위해 관광객 일행과 배에 함께 탔던 다른 마오리 족은 아마포로 온 몸을 싼 그런 마오리 전사의 모습은 죽음의 산을 향하여 떠나가는 영혼들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유령선의 출현은 불행의 전조이자 대재난의 징조라며 다들 몹시 불안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불안의 조짐은 정확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열흘 뒤인 6월 10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뉴질랜드 중심부에 있는 로토루아에서는 30여 차례의 지진이 있은 후 타라웨라 화산이 폭발을 시작합니다. 근 네 시간 동안 고로 속의 쇳물과도 같은 시뻘건 용암과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화산재와 진흙을 분출합니다. 해서 같은 북 섬에 있었던 오클랜드는 물론 800킬로나 떨어진 남 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그 불길이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대폭발이 있기 전까지 타라웨라 산 아래 마을은 평화롭고 목가적이었습니다. 농사짓는 얼마 안 되는 마을 주민과 호수에서 송어 낚시를 겸해 찾아오는 관광객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핑크엔 화이트 테라스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묵었다던, 작은 2층 목조 건물이었지만 당시로는 최고였던 호텔이 키 큰 전나무 숲 가운데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산 폭발로 타라웨라 호숫가의 ‘테 와이로아’ 마을을 포함한 인근 세 개의 마을이 150명의 생명과 함께 화산재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제가 타라웨라 호수를 찾았을 때는 상쾌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고깔 모양의 산봉우리들과 잉크 색의 호수가 조용히 어둠의 이불을 걷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여명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타라웨라 호수가 이처럼 빼어난 경치를 지녔음에도 송어낚시 배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구경꾼들이 별로 없는 걸 보니 뉴질랜드 인구가 적긴 적은가 봅니다. 시드니에서 세 시간을 날아와 오클랜드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이곳 로토루아까지 오는데 한적한 길가로 산등성이 마다 웬 양들이 그토록 많이 보이는지요. 확실히 양이 사람숫자보다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호수 근처에 있는 베리드 빌리지(Buried Village)는 화산재로 묻힌 마을을 복구해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마을입니다. 입구 전시장에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과 그림, 마오리 원주민의 장신구와 조각상 그리고 화산재 속에 묻힌 농기구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장이 있는 바깥으로 나가니 파란 하늘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푸드득 거리며 지나갑니다. 관리사로 보이는 펜스 너머로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몇 마리의 양이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입니다. 붉게 채색된 마오리의 전통가옥과 창고, 녹슨 펌프를 지나니 작지만 너무나 맑아 차라리 싱싱해 보이는 시냇물이 나타났습니다. 마을을 가르며 타라웨라 호수로 흘러가는 냇물은 이끼와 소철과 칡넝쿨로 덮여져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팔뚝만한 송어 떼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송어 떼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노는 게 하도 신기해서 냇가에 머물며 바라보고 있는데 배낭을 짊어진 청년이 옆에 앉더니 함께 먹자며 도너츠가 담긴 갈색 종이봉투를 불쑥 내밉디다.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오느라 아침 식사를 걸렀다며 오는 길에 주유소 마켓에서 샀다는데 배낭 속에 넣어두었기 때문인지 아직도 따끈따끈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역시 아침을 걸렀더군요. 자신은 핀란드에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뉴질랜드에 왔다며 현재 이년 반을 계획하고 여행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잡은 여행기간이 아무리 핀란드가 부자나라이고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한창 젊어 보이는 청년이 유랑하며 보내기에는 좀 긴 세월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근처 폭포를 둘러보고 가겠다는 그와 헤어져비탈길을 오르니 눈 아래로 타라웨라 호수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구름을 이고 있어 더욱 파랗게 보이는 하늘, 그 하늘과 마주한 채 마치 산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청푸른 호수. 그 호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쇄골 드러난 어깨 위로, 흘러내린 셔츠를 자꾸 올려대던 여인의 가늘고 긴 하얀 손가락. 탄넨바움 숲을 가르며 들려오던 바람소리와 가파른 산 위에 있어, 오르지 못했던 폭포물의 낙하소리, 그 폭포를 향해 가고 있던 핀란드 젊은이의 경쾌한 자갈 밟는 소리. 기쁨을 주며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냇물. 이끼 낀 바위 위를 유장하게 기어가던 민달팽이. 주인은 온데간데없이 무지개만 덩그러니 걸린 거미줄. 활짝 핀 민들레 들판. 그 위로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떼. 무수한 잎사귀를 해작거려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향기를 실어 온 산 바람. 독수리를 피해 도망가는 건지 죽어라고 들판을 달려가던 잿빛 토끼. 이 모든 것은 그토록 잔인했던 타라웨라 화산의 회복된 얼굴이었습니다. 세월이-젊은 청년이 유랑하며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던 그 세월이, 중년인 제가 안타깝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그 세월의 흐름이 대폭발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 위로 물과 바람을 흘려 피와 진액을 닦아주고 봉합하고 보듬어 마침내 새살이 돋아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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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옥의 문'에서 평온했다
[뉴질랜드 여행, 저지르고 보자 4] 마오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에서
배지영(okbjy) 기자
▲ 마오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 지옥의 문
ⓒ 배지영
▲ 모두 스물 두 곳에서 유황이 끓어오르고 있다.
ⓒ 배지영

아침부터 지옥을 보러 갔다. 로토루아 시내에서 로토루아 공항을 지났다. 운전하는 현기는 헛갈리는지 "숙모, 여기가 맞나 지도 좀 봐 줘요" 했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도 어색했다. 남의 나라를 렌터카로 다니면서 단 한 번에 목적지를 찾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현기는 차를 멈춰서 살펴보더니 방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로변에 '지옥의 문'이 있었다.

지옥의 문은 입장료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마오리들은 화산지대 입장료와 따로 돈을 내고 하는 스파에 대해서 얘기해 줬다. 우리는 모텔 샤워 꼭지에서도 온천물이 나오는 로토루아에서 나흘을 묵었다. 머드팩 1만 개를 풀어서 파헤쳐놓은 스파가 있다는 마오리들의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곳은 마오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다. 로토루아 시내의 와카레와레와 지열 지대가 20m 넘게 솟구치는 온천물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라면, 지옥의 문은 조붓했다.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어서 로비가 통하기도 한다면, 지옥의 문은 특별 대접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지옥의 휴양지쯤으로 보였다.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왜 지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느낌이 온다. 1시간 정도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지옥의 문은 모두 스물 두 곳에서 유황이 끓어오르고 있다. 화산 저 밑바닥의 진흙은 끓어올라 말라서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도 화산 구멍이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발랄하게 끓어올랐다.

▲ 악마의 목욕탕, 수심 6미터에 유황이 끓는 온도는 95도.
ⓒ 배지영
지옥의 문에서 처음 만나는 곳은 악마의 목욕탕이다. 수심 6m(어떻게 쟀을까)에 95도가 넘는 유황이 끓는다. 우리 아이가 생각하는 악마는 머리 모양에 신경을 쓰며 '썩소'도 날린다. 아이의 악마는 반신욕을 할 것 같은데 마오리들의 악마는 목욕탕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잠수를 하는 듯 했다. 아마도 마오리들 악마의 머리 모양은 '올백'이겠다.

지옥의 문 전체 분위기는 '전설의 고향'에서 본 저승길과 닮아 보였다. 유황은 쉴 새 없이 팔팔 끓어올라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냈다. 사진을 찍다가 뒤처진 나는 놀랐다. 저만치 앞서 걷는 작은 누나와 현기, 우리 아이가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유황은 쉴 새 없이 팔팔 끓어올라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 배지영
두 번째 화산 후리티니 못은 비극을 담고 있었다. 마오리의 한 공주는 집안싸움 때문에 이곳에서 자살했다. 엄마가 왔을 때, 딸의 흔적은 100도를 넘으며 펄펄 끓는 연못가에 남겨진 외투뿐이었다. 후리티니 맞은편에는 유명한 탐험가가 이름 붙인 지옥의 문이 있었는데 유황은 끓어오르며 소용돌이를 쳤다. 작은 누나는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네 번째부터 집중력이 떨어진다. 우리 아이는 가위 바위 보 같은 것도 '한국인은 삼세 판'이라며 한판승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패배를 받아들이게 애 쓴 내 수고는 결국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그래서 네 번째부터는 안내문을 읽지 못했다. 차례대로 유황 목욕탕, 지옥, 유소년, 수면 못을 지나서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돌았다.

지옥치고 좀 시시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안내도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아냐, 더 갈 수 있어. 숲 쪽으로 가야 해."

▲ 카카히 폭포, 사람들은 남반구에서 유일한 지열 폭포 아래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 배지영
우리는 작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카카히 폭포가 나왔다. 남반구에서 유일한 지열폭포라는 카카히는 사람이 기분 좋다고 느끼는 38도를 유지한다. 폭포 아래서 샤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폭포 위 계곡에는 순수 유황이 깔려있어서 채굴 사업을 벌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높은 임금 때문에 사업은 실패했다. 그 사람에게 이곳은 진짜 지옥이 돼 버렸다.

숲을 벗어나자 우리가 처음 지나온 곳과는 딴판인 세상이 보였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예쁘고, 뉴질랜드 고유의 키 큰 나무들이 펄펄 끓는 온천 사이로 드러났다. 우리는 화산 곳곳에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3초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아이는 화산이 끓는 구멍에 모래를 던지고, 작은 누나는 현기가 뽀뽀를 퍼부어도 "다 큰 자식이 징그럽게 왜 이래?" 하지 않았다.

▲ 잡목 숲을 지나자 다른 분위기의 지옥이 나왔다.
ⓒ 배지영
▲ 유황 곳곳에 손을 집어넣어 봤다. 뜨거워서 3초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 배지영

가장 뜨거운 진흙탕물이라는 악마의 가마솥도 바짝 붙어 들여다봤다. 마오리들이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불렀던 작은 화산 구멍들은 갯벌에서 게가 숨어드는 것처럼 벌어졌다가 닫혔다. 마오리들이 손으로 짠 바구니에 음식을 넣고 30분 정도 담가놓으면 음식이 저절로 됐다는 요리하는 못에서는 작은누나를 음식이라고 밀치는 장난도 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실버 펀(silver fern)을 봤다. 실버 펀은 우리나라 고사리와 비슷한데 크기가 훨씬 크고, 뒤집어 보면 은색이다. 수십 가지의 고사리 종류 중에서 마오리들 삶에 빛이 되었다. 마오리들은 밤중에 먼 길을 갈 때면 실버 펀을 길 위에 떨어뜨렸다. 실버 펀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고, 마오리들은 아무리 멀리 가도 집으로 돌아왔다.

▲ 실버 펀, 고사리보다 크고, 뒤집어 보면 은색이다. 그래서 마오리들은 밤길을 갈 때 실버 펀을 떨어뜨리면서 갔다.
ⓒ 배지영
실버 펀을 들고 어두운 곳으로 갔다. 빛이 났다. 우리 아이가 야광 팬티를 입고서 잠들기 싫다고 불 꺼버린 방안에서 돌아다닐 때처럼 선명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도로에 깔린 흰 조약돌을 보며 '헨델과 그레텔'의 오빠가 주머니에 하얀 돌을 모으는 장면을 이해했다. 마오리들에게는 실버 펀이 들어간 옛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오래전, 밤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등에서도 나오는 것을 알았다. 가로등이 없던 시골에 살 때 엄마를 따라 친척 집 제사에 갔다. 돌아올 때는 잠 든 채 엄마 등에 업혔다. 고양이 소리도 귀신 소리로 알아듣던 엄마는 "내 딸 잔가?" 물으면서 업고 있는 존재가 여우나 귀신이 아닌 이녁 새끼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셨다. 나는 바깥 기운에 잠을 깼지만 기척하지 않았다.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 엄마 등에서 나오던 소리는 지금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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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와 포이, 꼭 보아야 할 마오리들의 춤
[뉴질랜드 여행, 저지르고 보자 3] 마오리들의 대표 예술
배지영(okbjy) 기자
▲ 혀를 내밀고 눈을 부라리는 마오리들의 하카, 상대방 부족에게 겁을 주고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 배지영
▲ 마오리들의 공연은 낯설지 않았다.
ⓒ 배지영
뉴질랜드, 밤은 길고 갈 곳은 없다. 사람들은 오후 5시면 집으로 간다. 마땅히 찾아갈 곳은 대형 할인마트 뿐, 밤마다 뭔가를 샀다. 손톱깎이를 사고, 짐을 꾸릴 때 쓰는 테이프를 사고, 한 개를 먹으면 지구를 빛의 속도로 일곱 바퀴 돌아야만 살이 빠진다는 마시멜로를 샀다. 허전한 날은 뉴질랜드 대표 음식인 키위와 녹색 홍합을 사러 갔다.

우리는 뉴질랜드에서 1년쯤 머물며 여행할 사람들처럼 느긋해져야 했다. 사흘을 묵었던 로토로우의 모텔 '맨하탄' 사장님이 저녁밥을 먹으면서 마오리 공연을 볼 수 있는 호텔에 가 보라고 알려주었다. 밤마다 공연은 열리지만 단체 손님들이 많아서 예약을 했다. 호텔은 노천 온천부터 모텔과 격이 달랐다.

개인 여행자들은 따로 앉았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을 썼다. 공연을 보러 온 한국인 단체 손님들의 테이블에는 김치가 있었다. 내가 김치를 주문하면, 우리와 같이 앉은 외국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 몰래 '굴욕 사진'을 찍어 그네들의 블로그에 올릴 것 같았다. 작은 누나는 김치를 갖다 달라는 당연한 주문을 했다.

▲ 조카 전현기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호주 아가씨. 직업이 초등학교 교사란다.
ⓒ 배지영
내 옆에는 모녀가 앉았다. 딸은 < CSI 마이애미 >편에서 해변을 거니는 여자 역할을 해도 될 것처럼 생겼다. 우리 아이와 나는 예쁜 여자 옆에 앉아서 신기하고 기분도 좋았다. 거기다가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먼저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미녀 아가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나라라고 했다.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만 안다고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마오리들은 뉴질랜드로 몰려오는 유럽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마오리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모른다. 내 얼굴은 서구화와 거리를 둔 동양적인 얼굴,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뚱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대서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나도 당신 나라를 모르는데…."
"모른다고? 보스턴과 뉴욕 사이에 있는데?"


우리나라는 마음 상했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 그래서 한이 많은 나라. 나는 타고난 풍토성을 팽개치며 "당신은 내가 사는 군산시 나운2동을 알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옷매무새만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나한테만 들리게 "진짜 우리나라를 모른대?" 했다. 곁눈질로 보니 조카 현기는 호주에서 온 쌍둥이 자매랑 얘기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 마오리가 아닌 남자 사람들이 혀를 내밀며 하카를 하면 웃기기만 했다.
ⓒ 배지영
▲ 호텔에서는 공연이 끝나면 마오리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 배지영
마치 맞게 공연을 시작했다. 마오리들의 노래와 춤은 노래방에서 듣는 '달 타령' 같았다. "1월에 뜨는 저 달은…" 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어쩌면 저런 노래를 골라서 부를까 싶다. 그런데 달 타령이 7월, 8월로 넘어갈 즈음이면 노래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새 일어나서 노래를 따라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마오리 남자들이 추는 '하카'와 여자들이 추는 '포이'. 마오리들은 공연을 보던 사람 중 몇을 무대로 데려갔다. 나도 뽑혔다. 볼 때는 쉬웠는데 솜으로 만든 공 포이를 리듬에 맞춰 돌리는 건 어려웠다. 마오리가 아닌 남자 사람들이 혀를 내밀고 눈을 부라리는 하카를 따라하는 모습은 어색해서 웃음이 났다. 도무지 위력 과시로는 보이지 않았다.

공연 보기 위해 신발 벗는 행동은 며칠 만에 먹는 김치 맛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로토루아에 있는 마오리들의 요새촌 와카레와레에서 다시 마오리 공연을 봤다. 옷을 따뜻하게 입었는데도 비가 와서 자꾸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이었다. 마오리들은 자신들이 원래 살던 집보다 훨씬 크게 지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네들은 맨발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망토를 둘렀다.

마오리들은 원래 1000년 전쯤에 열대의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와서 정착했다. 그네들은 계절이 바뀌다는 것, 날씨가 추워진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을 지도 모른다. 그네들은 후손들에게 삶의 방식을 더 열심히 가르쳤을 것이다. 짐승 털로 망토를 해 입고, 온천이 펑펑 솟고, 지열만으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로토루아를 떠나지 말라고.

▲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로토루아. 마오리족 요새촌이 있는 와카레와레는 온천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지역이다.
ⓒ 배지영
마오리들은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식을 진행했다. 공연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 중에서 대표 한 사람을 뽑았다. 대표가 된 사람은 마오리 여인과 마오리 인사 '홍이(Hongi)'를 나눴다. 홍이는 악수 하면서 서로 코를 맞대는 인사다. 저쪽 마오리 집에서 대장 마오리가 나와 떨어뜨린 펀(fern, 고사리)을 관광객 대표가 주워들자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내하는 마오리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고 알려줬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며칠, 우리는 신발을 신고 벗는 경계가 없는 숙소에서 머쓱했다. 아이는 침대까지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했고, 조카 현기는 작은 누나와 내가 신발을 벗어둔 현관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신발을 벗는 행동은 며칠 만에 먹는 김치 맛이었다. 개운했다.

관광객 대표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공연을 앞둔 마오리들과 다시 홍이를 나눴다. 어른들은 의자에 앉고, 어린이들은 무대 앞의 바닥에 앉았다. 테이블에 음식을 두고 공연을 보던 호텔과는 느낌이 달랐다. 야성이 있었다. 사람들이 공연에 빠져드는 속도도 달랐다. 여름날,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둠벙'에 뛰어들던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 마오리들의 인사 '홍이'. 악수를 하면서 서로의 코를 맞댄다.
ⓒ 배지영
마오리들의 노래는 낯설지 않았다. 옛날 드라마에서는 젊은이들이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부르던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은 마오리들의 노래다. 마오리들의 노래를 뉴질랜드에 정착한 백인들이 따라 불렀다. 한국전쟁에 파병되어 온 뉴질랜드 병사들은 고향과 부모님이 생각나면 '연가'를 불렀다.

▲ 하카. 마오리들은 '메롱'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분통을 터지게 하는 일인지를 알고 있다.
ⓒ 배지영
호텔 공연 때처럼 관광객들은 포이와 하카를 따라했다. 나는 솜이 든 공을 들고 부드럽게 춤추는 포이 보다는 상대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혀를 길게 내미는 하카를 배우고 싶었다. '메롱'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인지는 잘 안다. 어린 날 우리 자매들의 싸움은 혀 내밀기로 시작해서 육탄전으로 끝날 때도 있었다.

조카 현기도 학교에서 럭비시합을 할 때 하카를 한다고 했다. 키위(뉴질랜드 백인)든, 마오리든, 유학생이든, 뉴질랜드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하카. 아무리 봐도 마오리가 아닌 남자들이 혀를 내밀고 눈을 크게 부라리는 것은 웃기기만 했다. 본디 뜻을 살리기 위한 하카는 마오리들처럼 웃통을 벗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모텔 '맨하탄'의 사장님은 뉴질랜드 국가대표 럭비팀 '올 블랙(All Black)'의 의식도 하카라고 가르쳐줬다. '올 블랙'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카를 추며 상대팀을 압도한다. 뉴질랜드에 살러 온 백인들은 마오리들을 무작정 억누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뉴질랜드의 '올 블랙'은 신의 어여쁨을 받아서 세계 최강의 럭비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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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 WAY도 모르면서 무슨 운전이야?"
[뉴질랜드 여행, 저지르고 보자 2] 렌터카로 다니기
배지영(okbjy) 기자
▲ 로토루아 박물관, 뉴질랜드 마오리들의 삶을 볼 수 있다.
ⓒ 배지영
현기가 왔다. 작은 누나와 현기는 '모자 상봉' 하며 눈물을 쏟지 않았다. 한 사흘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듯 잘 생겼던 현기 얼굴은 살이 올랐고, 엉덩이는 서양 사람처럼 질펀했다. 그 애는 늦잠 자서 오래 기다리게 한 게 머쓱한지 "숙모, 내가 차에서 들으려고 CD 구워왔어요. 숙모도 맘에 드는 거 많을 걸요? 잘 했죠?" 했다.

우리는 렌터카부터 빌리러 갔다. 공항 안에 사무실이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 속하는 Hertz에 갔다. 큰 회사들은 전국이 지점으로 연결되어서 오클랜드에서 빌렸다가 남섬의 끝까지 가서 반납해도 된다. 값이 싼 렌터카 회사도 있는데 덜컥 계약했다가는 여행의 쓴 맛을 볼 수도 있다. 날마다 드는 보험료가 덧붙여지고, 주행거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렌터카를 빌리려고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왔다. 우리 집은 군산, 전주 운전면허시험장에는 국제운전면허증 창구가 따로 있었다. 30분도 안 걸려서 발급 받았다. 뉴질랜드에서 렌터카를 빌릴 때는 국제운전면허증과 여권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용카드도 필요한데 만약의 사고를 위해서 보증금을 거는 의미다. 차를 반납할 때 돈은 돌려준다.

청정 뉴질랜드는 공장이 별로 없어서 물건을 거의 수입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이나 유럽차가 많다. 차를 빌릴 때는 맘에 드는 모델로 고르면 되는데 우리는 눈에 익은 차가 하나도 없어서 현기가 타보고 싶었던 차로 골랐다. 계약서를 쓸 때는 운전하는 사람과 보조 운전할 사람까지 함께 적었다. 든든한 작은 누나가 있어서 나는 '2빠' 운전수로 등록했다.

▲ 시내에서 주차하기, PAY HERE 앞에 차를 세운다. 보통 1시간에 1달러쯤 한다.
ⓒ 배지영
▲ 우선 멈춰서 오른쪽 길을 내어주라는 뜻이다. 3초쯤 멈춰서 주위를 살핀 다음에 출발해야 한다.
ⓒ 배지영
차 열쇠를 받아서 공항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탈 차를 찾았다. 여자로 살기에는 아깝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작은 누나는 거리낌 없이 오른쪽 운전석에 앉았다. 차를 빌려서 나올 때까지 까불고 느슨하던 분위기는 팽팽해졌다. 뉴질랜드에서 자기 차를 갖고 다니는 현기는 자기가 운전할 줄로 안 모양이었다.

"엄마, 여긴 한국하고 완전히 반대야. 엄마가 어떻게 운전해?"
"시끄러, 렌터카는 21세 이상만 가능한 거야. 네가 하면 불법이야."


우리가 탄 차는 공항을 벗어나기도 전에 역주행할 뻔 했다. 차는 운전대만 반대로 있는 게 아니었다. 차선도 반대고, 방향지시등과 와이퍼도 반대였다. 교차로에서는 'ROUND ABOUT'라는 교통 법규를 따로 지켜야 한다. 무조건 정지, 무조건 오른쪽 차량 우선이다. 'GIVE WAY'도 오른쪽 차선을 내어주기 위해 3초 정도 멈춰서 주위를 살핀 다음 출발해야 한다.

작은 누나가 운전하는 차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위태위태했다. 차 안에 앉은 우리는 한국에서 교통사고 났을 때처럼 행동했다. 무엇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잘못 없다고 발 빼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고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사람들 같았다. 현기가 많이 참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 'GIVE WAY'(양보)도 모르면서 무슨 운전이야? 엄마, 제발, 운전대가 눈에 익을 때까지만 내가 할게."
"이 자식이 컸다고 엄마를 무시해? 엄마는 할 수 있어."
"몰라. 엄마가 어디로 가든 난 상관 안 해. 나 없어 봐. 바로 역주행이라고!"


▲ 주유소는 셀프 서비스가 기본이다. 도시 밖으로 나가면 조금씩 비싸진다. 우리나라보다 기름값이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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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아무 때나 앞 차를 추월할 수 없다. PASSING LANE에서만 가능하다. 통행료는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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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도 표정은 있다. 뒤를 보았더니 우리를 따라오는 차들은 알아서 비켜가는 모양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한숨을 놓았다. 이제는, 풍선이 삭아서 스스로 빠지는 바람 소리 같은, 허무한 웃음이라도 필요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이 냉랭한 상태를 건드려주면 좋을 것이다. 나는 시골 사람, 순박하게 말했다.

"우리, 뉴질랜드 왔으니까 호칭 떼고, 외국식으로 이름 불러요. 나는 민숙! 현기! 이래야지."
"나는 그럼 숙모보고 지영이라고 해도 돼요?"


오른쪽 운전대에 신경을 쏟고 있는 작은 누나도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고모와 엄마, 형아한테 '맞장'을 뜰 수 있는 기회를 반대했다. 싫다고 하는 아이 표정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차창 밖으로 한때 뉴질랜드의 수도였던 오클랜드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누나는 경기 종료 휘슬을 불기 직전에 터진 골처럼 시원하게 렌터카를 주차했다.

대도시인 오클랜드를 벗어나고 나서는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는 차를 가지고 다녀도 사정이 조금 나아진다. 차량 통행도 적어지고 운전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거기다 우리가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21살이 안 되었어도 옆에 보호자가 있으면 렌터카 운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자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현기를 '1빠' 운전수로 임명한 셈이었다.

여행은 해밀턴을 지나고부터는 '늘쩡'했다. 슬슬 돌아다녀서 가속도가 붙지 않았다. 우리 성정이 갑자기 뉴질랜드 자연을 닮아서 느긋해진 건 아니었다. 가끔씩 길을 잘못 들었다. 밤에 묵는 모텔에서 지도를 얻고, 지나는 사람들한테 길을 묻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고 싶은 곳을 한 방에 찾지 못해 헤맬 때가 있었다.

▲ ROUND ABOUT, 둥글게 돌아가는 형태로 무조건 멈춤, 무조건 오른쪽 차량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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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대의 밴에 나눠 탄 아이들이 교차로에서 비켜주지 않고 계속 도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 어느 차도 끼어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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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반대로 뉴질랜드는 겨울, 사람들은 오후 5시면 집으로 돌아간다. 한국처럼 거리의 밥집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화가 없다. 표를 끊는 절차를 거치는 관광지는 적어도 4시까지 가야 친절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로토루아 호수를 거쳐 로토루아 박물관을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차가 꿈쩍하지 않았다.

교통 표지판은 'ROUND ABOUT'였다. 몇 대의 밴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둥글게 돌아가는 교차로에서 비키지 않고 돌면, 어떤 차도 낄 수가 없다. 현기 또래의 아이들이 음악을 크게 켜고 몸을 흔들면서 장난 치고 있었다. 우리도 끼어들고 싶다고 하자 한 자리를 내줬다. 현기는 빠른 랩이 나오는 CD로 바꿨다. 나는 차에서 내려 환호하는 애들을 구경했다.

한 번은 끝없는 호수가 있는 마을에서 차를 멈추었다. 작은 누나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는 호수의 새들을 따라 놀고, 나는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그 때 현기는 렌트한 차가 익숙하지 않아선지 기름이 떨어졌다고 착각했다. 마침 조깅하던 여인에게 주유소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이는 "15분만 기다려"라고 하고선 사라졌다.

▲ 달리기하던 여인, 우리에게 기름을 갖다 주었다. 돈을 받지 않는 대신 길에서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당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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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서 사라졌던 여인은 차를 끌고 왔다. 그리고 우리 차에 기름을 넣어주었다. 뭔가 한국적인 것을 선물하고 싶은데 가방은 모텔에 있었다. 고맙다는 표현은 투명한 상거래처럼 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누나는 뉴질랜드 여인이 태어나 처음 들었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군산말로 "고마워서 어쩌까요?"를 몇 번이나 했다. 현기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돈을 내고 싶어요."
"아니. 괜찮아. 대신 약속 해. 즐겁게 여행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돼."


그이의 말을 계시처럼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GIVE WAY'를 만날 때마다 자동차가 서고, 오른쪽을 살피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서로 운전 스타일이 달라서, 앞차와 간격을 두지 않고 바짝 붙었다, 지나치게 속도가 빠르다, 같은 이유를 대며 싸우기는 했다. 그러나 역주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않았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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