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살지 않았다
뉴질랜드 여행기 (20) - 등대 앞에서의 명상
정철용(ccypoet) 기자
젊었을 때 내가 은밀하게 마음 속에 품었던 꿈은 등대지기였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의 여름, 홀로 떠난 소매물도 여행에서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외롭게 서 있는 하얀 등대를 만나고나서부터였다.

그런 등대에서 산다면,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의 소음과 너무나 휘황한 대낮의 눈부심을 모두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외로움과 어둠을 벗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등대지기의 일상이란 몹시도 쓸쓸하고 고적하겠지만, 그런 삶에는 분명 보통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고요함과 풍요로움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여겼다.

저녁 무렵에 밝혀 놓은 등대의 환한 불빛 아래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다 지치면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때때로 밤하늘의 별들과 눈을 맞추고 새벽 바다에 떠오르는 여명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는 등대지기의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하지만 내가 꿈꾸었던 이런 등대지기의 삶은, 실제로는 등대에 매혹된 한 사내의 낭만적인 몽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나는 등대지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시도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루지 못하는, 아니 이룰 수 없는 꿈일수록 더 매혹적인 법이어서, 나는 휴가여행 때마다 등대 쪽으로 향하는 내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다녀온 소매물도의 등대와 거문도에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 그리고 마라도에 있는 우리나라 최남단 등대 앞에서 내 꿈은 잠시 날개를 펴곤 했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와서도 등대를 찾아 나서는 나의 여행은 계속되어서, 2년 전 본격적으로 나선 뉴질랜드 첫 여행도 뉴질랜드 최북단에 있는 케이프 레잉아(Cape Reinga) 등대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아, 낯선 이국에서 처음 만나는 그 등대는 어찌나 반갑고 또한 얼마나 눈물겹던지! 나는 아내와 딸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이번 여행길에서도 등대들을 만났다. 그 등대들 앞에서 나는 내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그 어느 등대에도 이젠 더 이상 등대지기가 살지 않았으니….

○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바다를 바라보는 노년의 추억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등대는 타라나키 지역의 서쪽에 돌출해 있는 케이프 에그몬트(Cape Egmont)의 등대였다. 여행 둘째 날, 뉴 플리머쓰에서 하웨라로 이어지는 45번 국도, 일명 '파도타기 고속도로(Surf Highway)'를 타고 달려 작은 마을 오카토(Okato)를 지나자, 오래지 않아 등대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그 표지판을 보고 바로 우회전해서 10분 정도 초원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달리자 작은 농가 앞에서 길이 끝났다. 차를 내려 살펴보니, 바다는 저 멀리 보이고 등대는 농가 뒤쪽 나지막한 언덕 위에 솟아 있었다. 소매물도의 등대처럼 아찔한 높이의 절벽 위에서 드넓은 바다를 한눈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등대를 기대했던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 있는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
ⓒ2005 정철용
조금은 실망스런 마음을 추스리며 우리는 언덕 위 등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언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완만하게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해안선이 한참 멀리에 있어서 장쾌한 맛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시야는 탁 트여서 허연 거품 물고 달려오는 파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등대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읽어보니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원래는 1865년에 웰링턴 북쪽의 마나섬(Mana Island)에 세워놓았던 등대라고 한다. 그런데 마나섬 등대의 불빛을 웰링턴 부근에 있는 또 다른 등대의 불빛으로 착각한 선박들의 사고가 잇따르자, 1881년에 마나섬 등대를 분해 해체하여 웰링턴에서 한참 북쪽인 이곳으로 옮겨 다시 조립하여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거의 150살에 가까운 오랜 나이와 한 차례 사지절단을 당한 아픈 상처가 있어서 그런지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는 대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청춘의 꿈이라기보다는 흐릿한 눈으로 간신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노년의 추억쯤으로 보였다. 등대의 하얀 색 기둥에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묻어난 시뻘건 녹은 그런 인상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에 오르는 계단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2005 정철용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이 등대 역시 환한 불빛으로 자신의 당당함을 되찾으리라. 나는 등대를 올려다보면서 저녁마다 이 언덕을 올라와 등대의 불을 밝혔을 등대지기의 생활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그는 행복했을까? 나는 그가 계단을 오르내리며 바라보았을 바다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그가 저 멀리 태즈만 해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꿈만 꾸었지 한번도 등대지기가 되어 보지 못한 나는 끝내 알 수 없으리라. 안내판에 의하면, 이 등대에 마지막으로 등대지기가 살았던 것은 1986년까지라고 한다.

○ 케이프 팰리서 등대...258개 나무계단 바위산 꼭대기의 미끈한 몸매

여행 7일째 되는 날, 우리가 마주친 두번째 등대 케이프 팰리서(Cape Palliser) 등대는 케이프 에그몬트 등대가 안겨주었던 실망을 완전히 상쇄시켜 주고도 남았다. 등대로 이어지는 도로의 풍경부터 벌써 달랐다.

▲ 케이프 팰리서 등대로 이어지는 비포장 해안도로
ⓒ2005 정철용
나무 한 그루 없이 메마른 초원으로 뒤덮인 거칠고 황량한 바위산들과 이마를 높이 쳐들고 달려와 부서지는 거센 파도의 포말이 튀어 오르는 갯바위들 사이를 뚫으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비포장 해안도로는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마침내 바다 가까이 돌출해 있는 높은 암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등대의 모습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도로는 갑자기 끊어지고 우리는 그 막다른 길 끝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등대가 자리잡고 있는 바위산의 꼭대기까지 매우 가파르게 이어지는 258개의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 암벽에 놓은 258개의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만나게 되는 케이프 팰리서 등대
ⓒ2005 정철용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장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멀리 남태평양에서부터 밀려온 파도가 갯바위에 부서지면서 만들어내는 흰 거품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서, 그걸 바라다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 속에까지 밀려드는 듯했다. 마치 청량음료를 마신 뒤처럼 후련해지는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또 얼마나 상쾌하던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그 등대에서 우리는 한참 동안 머물렀다. 정오의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거친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등대는 미끈하게 잘 생긴 몸을 유감없이 드러내놓고 있었다. 녹슨 곳 하나 없고, 선명한 주홍색으로 목도리를 두르고 벨트도 매고 있는 등대의 깔끔한 모습에서는, 이 등대가 100년도 훨씬 전인 1897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등대에는 등대지기가 살면서 녹슨 곳도 벗겨내고 새로 페인트칠도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잘 관리된 깔끔한 등대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이 등대 역시 무인 등대로서 웰링턴에 있는 뉴질랜드 해상안전청(Maritime Safety Authority of New Zealand)의 컴퓨터에 의해서 자동 조정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100년이 넘은 등대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깔끔한 모습의 케이프 팰리서 등대
ⓒ2005 정철용
등대지기가 없어도 어둠이 내리면 불빛을 반짝거리면서 뱃길을 인도해주는 무인 등대. 하지만 멀리서 이 등대의 불빛을 보는 뱃사람들도 과연 그 불빛이 단지 컴퓨터에 의해 조정되는 전등에 불과할 뿐이라고만 생각할까? 그 불빛이 무인 등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어쩌면 그 불빛에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따스한 등대지기의 마음을 늘 떠올리지는 않을까?

선원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이 또한 나는 끝내 대답할 수 없으리라. 그때 나는 그 동안 그렇게 많은 등대를 보았어도 실제로 어둠 속에 불을 밝히고 있는 등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항상 햇빛 환한 대낮에만 등대를 보러 다녔으니까.

○ 캐슬포인트 등대...처음으로 등대 불빛을 보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난 세번째 등대는 마침내 불 환히 밝힌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케이프 팰리서 등대를 보려고 달려간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와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단풍 구경을 한 후에, 다시 동쪽 해안지역으로 약 1시간 정도를 달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작은 바닷가 마을 캐슬포인트(Castlepoint)에서였다.

그 마을에 우리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로 비치하우스를 예약해 놓았는데, 집주인과 서로 연락이 어긋나는 바람에 짐을 풀어놓지도 못한 채 바닷가에서 기다려야 했다.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의 햇살로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우리는 차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집주인이 열쇠를 갖고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저녁 노을 속에 반짝 눈을 뜬 캐슬포인트 등대
ⓒ2005 정철용
어두워지면서 점점 심해지는 바람과 거센 파도와는 대조적으로 수평선 위쪽의 하늘은 분홍색 노을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솟아있는 바위섬의 하얀 등대에 오래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등대의 머리 부근에서 반짝거리는 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 빛을 노을 사이로 잠깐 비친 별빛쯤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몇 초 후에 다시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그게 등대에서 나오는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 생애 처음으로 등대가 눈을 뜨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번 여행은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을 보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른 새벽 어둑어둑한 여명에 바라본 캐슬포인트 등대
ⓒ2005 정철용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도착한 집주인에게서 열쇠를 건네 받아 비치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나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아직 꿈속 여행중인 아내와 딸아이를 두고 혼자서 등대까지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직도 밖은 깜깜했지만, 나는 등대의 불빛이 꺼지기 전에 가까이 가서 그 불빛을 보고 싶었다.

어둑어둑한 바닷가 길을 20여 분 동안 걸어서 등대가 서 있는 바위섬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도착했다. 모래사장과 바위섬을 연결하는 긴 나무다리를 건넜다. 지난밤 거세게 불던 바람은 거의 잠들었고 파도도 잔잔해져 있었다. 바위섬 위에 웅크리고 있던 바위들이 수평선 위에 붉게 펼쳐진 아침 노을의 수혈을 받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웅크렸던 바위들은 아침 노을 속에 기지개를 켜고
ⓒ2005 정철용
그러나 긴 밤 내내 어두운 바다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을 등대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아침 노을과 마지막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이 희미해지고 마침내 멈출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수평선 위 구름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드디어 등대의 불빛이 꺼졌다.

하지만 등대의 불빛은 꺼졌어도 등대 밖으로 나오는 등대지기는 없었다. 캐슬포인트 등대 역시 이제 더 이상 등대지기가 살지 않는 빈집이기 때문이었다. 안내판에 의하면, 캐슬포인트의 마지막 등대지기는 1988년에 철수했다고 한다.

▲ 등대는 밤새 지친 눈을 비비면서 아침 노을을 맞는다
ⓒ2005 정철용
그렇구나. 등대에는 이젠 더 이상 등대지기가 살지 않는구나. 등대지기가 되고자 했던 내 오랜 꿈도 이젠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구나. 나는 내 오랜 꿈을 이국의 땅에서 만난 아침 바다에 놓아주었다. 남태평양의 물결을 타고 내 꿈이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국 바다에 풀어보낸 나의 꿈, 그리고 등대지기들의 꿈

그러나 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등대지기들이 꿈꾸었던 등대는 자신만의 작은 등대에 있지 않고 등대의 불빛이 비추는 저 넓은 바다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났던 등대들이 이젠 더 이상 등대지기가 살지 않는 빈집들이 되고 만 것도 등대지기들이 모두 그렇게 자신이 꿈꾸는 등대를 찾아 바다로 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해가 떠오르자 캐슬포인트 등대의 불빛은 꺼졌다
ⓒ2005 정철용
그러니 지금 내가 바다에 풀어준 내 오랜 등대지기의 꿈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된 것일지도 모르리라. 작고 고립된 나만의 등대가 아니라 넓은 바다를 향해, 열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등대지기의 꿈.

그날 밤늦게 오클랜드로 돌아오면서 7박 8일간의 뉴질랜드 북섬 남서부 일주 여행은 끝났다. 그러나 내가 캐슬포인트의 바위섬 하얀 등대 앞에서 놓아준 등대지기의 꿈은 지금도 계속 여행을 하고 있으리라. 넓은 바다를 향해, 열린 세상을 향해.

Posted by 동봉
,

여름날 호숫가와 가을의 공원
뉴질랜드 여행기(19) 공원을 거닐며 노독을 풀다
정철용(ccypoet) 기자
여행이 단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강행군의 연속이라면 그 즐거움은 분명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럴 경우, 흥미로운 볼거리와 신나는 체험을 아무리 많이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시간에 쫓겨 충분히 보고 즐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휴식과 여유 있는 일정은 기억에 오래 남는 즐거운 여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여행길 휴식, 공원 산책

하지만 모처럼 떠난 여행길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부린답시고 숙소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낯선 거리로 나서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기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랬다가는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느라고 오히려 더욱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이럴 때 공원 산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특히 뉴질랜드에는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마을에조차도 공원 한두 개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어서 공원 산책은 여행 중에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휴식의 방법이 된다.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다보면 오랜 운전과 관광명소 순례로 지친 몸과 마음이 가볍게 풀어진다.

더군다나 뉴질랜드의 공원들은 대개 입장료가 없으며 어디를 가나 갖가지 꽃들로 장식한 화단과 넓고 푸른 잔디밭 그리고 울창한 나무들로 잘 가꾸어져 있어서 공원 산책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는 몹시도 즐거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잘 가꾸어진 공원들은 아예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되기까지 한다.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이번 여행길에서, 7박 8일이라는 다소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내가 지치지 않고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행 중에 틈틈이 즐긴 공원 산책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곳을 지금 떠올리자니 문득 박인환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노래 '세월이 가면'이 생각난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라는 노랫말처럼, 그 두 공원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호수와 가을빛이 한창인 단풍과 가로등 옆 벤치에 쌓인 낙엽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름날의 호숫가,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여행 4일째 되는 날, 팡가누이 강을 옆에 끼고 험한 비포장도로를 잔뜩 긴장하면서 달려 도착한 아담한 도시 왕가누이에서 전망대와 미술관, 시내 도심 거리를 오후 내내 걸으면서 구경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예약해 놓은 모텔로 직행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는 도시의 북쪽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버지니아 호수(Virginia Lake) 공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호수 가운데 설치해 놓은 분수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비추기 때문에 몹시 볼만하다고 여행안내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내에 있는 '윈터 가든'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2005 정철용
버지니아 호수 공원의 산책로로 들어서기 전에 우리는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윈터 가든(winter garden, 유리로 만든 온실 안에 주로 열대 식물들과 꽃들을 전시해 놓은 실내정원)에 먼저 들렀다. 문 닫을 시간인 5시가 거의 다 되어서인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윈터 가든 내부의 곳곳에 놓여 있는 다양한 정원 장식물과 이색적인 조각 작품들에 힘입어, 활짝 피어난 갖가지 꽃들의 표정이 더욱 풍부하게 다가왔다. 그 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자니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반쯤 풀리는 듯했다.

▲ 아내와 딸아이는 몰려드는 오리 떼에게 식빵을 뜯어 먹이를 주었다
ⓒ2005 정철용
윈터 가든을 나와서 버지니아 호숫가를 한 바퀴 빙 돌아가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리 떼가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자주 경험했던 일이라 아내와 딸아이는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 간 식빵을 조금씩 뜯어서 던져주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계속 쫓아오는 오리들을 어쩌지 못해 뒤처지고 어느덧 나는 혼자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가을인데도 아직 싱싱한 초록의 잎사귀들을 지닌 나무들이 어두워지는 호수의 수면 위에 선명하게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채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 여름 나무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2005 정철용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으면서 나 역시 모처럼 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미소와 함께 건네는 다정한 인사와 귀소하는 새들의 평화로운 울음소리만 가끔씩 끼어드는 저녁 어스름의 고즈넉한 침묵 속을 나는 혼자서 거닐었다.

▲ 저녁 어스름이 내려 앉고 있는 호숫가의 고즈넉한 침묵 속을 혼자서 거닐었다
ⓒ2005 정철용
30여 분 정도 걸어서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출발지점에 가까워지자, 멀리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리들에게 붙들려 호숫가 산책하는 것은 포기하고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땅거미가 이미 호수의 수면까지 내렸고 우리는 호수 가운데에 있는 분수를 비춰줄 조명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

6시를 조금 넘기자 드디어 분수가 높게 솟구치고 있는 가운데 조명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아빠 손잡고 산책 나온 몇몇 꼬마들이 탄성을 질렀지만 나는 별로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나무의 그림자가 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 짙어진 어둠 속에 잠긴 호수의 가운데에서 솟구치는 분수를 조명은 환하게 밝혀주었다
ⓒ2005 정철용
가을의 공원,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가을을 우리는 마스터톤(Masterton)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Queen Elizabeth II Park)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반환점인 웰링턴을 돌아 다시 오클랜드를 향하여 북상하던 여행 7일째의 날이었다.

마스터톤은 이렇다할 볼거리가 전혀 없는 평범하고 한가로운 농촌 지역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나는 운전에 지쳐 잠깐 그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잠깐'은 1시간을 넘길 정도로 지체되고 말았다.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우리가 마주친 가을 풍경 탓이었다.

▲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마주친 가을빛이 우리의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2005 정철용
화려한 색상의 꽃보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훨씬 더 좋아하는 아내는 모처럼 만나는 고운 단풍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오클랜드에 살면서 아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단풍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오클랜드는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고 눈 한 송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해양성 기후여서 그런지, 가을에도 좀처럼 단풍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몇 차례 이곳에서 가을을 맞았어도 가을빛 흠씬 묻어나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아내는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 가로등이 있는 호숫가 옆 벤치 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도 내 피곤한 몸을 잠시 내려놓았다
ⓒ2005 정철용
아내가 연신 감탄사를 발하면서 딸아이와 함께 공원의 이곳저곳을 거닐며 단풍든 나뭇잎들을 올려다보고 단풍에 지쳐 떨어진 낙엽들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나는 작은 호숫가에 마련된 벤치 위에 앉아서 가을빛을 즐겼다.

맑은 햇빛 속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싱싱한 초록에서 불타는 듯한 빨강으로 그리고 다시 아련한 노랑으로 건너가는 저 색채의 향연에는 아내와 내가 두고 온 고국의 산하가 숨어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 찬란한 가을빛이 지금 여기 낯선 나라 낯선 땅에서 이렇게 폭발하고 있구나!

▲ 우리 기억 속의 가을은 호수에 가로놓여 있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서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2005 정철용
호수에 가로놓여 있는 다리를 건너온 아내의 얼굴이 맑아져 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오래 참았던 눈물이라도 흘리고 왔나보다. 너무 오래 지체했다.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 무거운 발걸음을 아이들의 발랄한 목소리가 잡아끌었다.

나무로 견고하게 만든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띄었다. 성채처럼 쌓아올린 그 놀이터의 나무 벽에는 '키즈 오운 플레이그라운드(Kids Own Playground)'라고 적혀 있었다. 놀이터야 어디서나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데, 새삼스럽게 '어린이 전용 놀이터'라니!

▲ 공원을 걸어나오는 길에 마주친 어린이 놀이터는 나무로 만든 견고한 성채처럼 보였다
ⓒ2005 정철용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울타리와 미끄럼틀과 난간과 계단을 만드는데 사용된 하나 하나의 나무판마다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놀이터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 마을의 아이들 이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조금씩 아껴 모은 자신의 돈을 자신들이 신나게 뛰어 놀 어린이 놀이터를 만드는데 기꺼이 기부금으로 낸 것이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아이들이 이 놀이터를 소유하고 있는(Kids Own Playground) 셈이다.

▲ 나무판 하나하나마다 기부금을 낸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05 정철용
아이들의 이 자랑스러운 놀이터가 모처럼 만난 단풍을 두고 떠나야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가을빛이 찬란한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 떨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은행잎보다 더 환한 황금빛이었다.

Posted by 동봉
,

미 해병대 깃발이 걸려있는 교회
뉴질랜드 여행기(18) : 웰링턴에서 마주친 성(聖)과 속(俗) (2)
정철용(ccypoet) 기자
성(聖)과 속(俗)의 거리는 얼마쯤 될까? 또한 그 거리가 얼마쯤 떨어져 있어야 바람직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동시대라고 해도 종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컨대, 성과 속이 긴밀하게 통합된 삶을 살았던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화를 희구하는 무슬림들과 개인적 삶과 공동체의 관심사로 국한하는 크리스찬들, 그리고 다분히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집중하는 불교도들이 느끼는 성과 속의 거리는 분명 각각 다를 것이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는 그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대든, 어느 종교든 성과 속은 함께 갔으며, 함께 가고 있으며, 또한 함께 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과 속은 둘 다 우리 인간이 품고 있는 운명의 표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품게 된다. 따라서 이 세상 안, 즉 삶에 속해 있는 속(俗)과 이 세상 너머, 즉 죽음에 속해 있는 성(聖)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특정한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차처럼 모든 사람들의 삶은 성과 속이라는 두 개의 선로 위를 동시에 달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탈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이라는 책에서 톰 하트만이 말했듯이 "우리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신성을 제거했으며, 예전의 신성한 날들(holy-days)은 단순한 휴가(holidays)로 바뀌고 말았다."

여행을 즐기는 나의 휴가 역시 이와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속된 여행 속에서도 마음이 경건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장엄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나, 고적한 사찰이나 사원의 경내로 들어설 때 등이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었다.

▲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래스들로 장식되어 있는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의 내부
ⓒ2005 정철용
그런데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 가장 속된 직업인들의 건물인 국회의사당을 구경하고 나와서 뜻밖에도 그런 경건하고 성스러운 순간과 나는 조우했다. 그것은, 국회의사당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그저 구경 삼아 들어갔다가 마주치게 된 올드 세인트 폴(Old St. Paul's) 성공회 교회의 스테인드글래스들 앞에서였다.

교회 내부의 양쪽 벽들과 중앙의 제단을 빙 둘러가며 설치되어 있는 이 스테인드글래스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크리스챤이 아닌 나의 짧은 성경 지식으로는 그걸 모두 해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스테인드글래스들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 스테인드글래스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2005 정철용

▲ 스테인드글래스 너머 세상 밖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차분해지고 있었다
ⓒ2005 정철용
유리창 너머 세상 밖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차분해지고 있었다. 성(聖)으로 가다듬은 속(俗)의 빛이랄까. 그 빛이 조금씩 내 마음속으로도 흘러들었다. 나는 아내와 딸아이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교회 안을 거닐며 스테인드글래스를 통해 걸러진 빛을 내 마음에 담았다.

그렇게 모인 빛이 마침내 넘친 것은 하프를 켜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세 천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스테인드글래스 앞에서였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래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차분히 흘러들던 빛이 이 세 천사의 스테인드글래스 앞에서는 오히려 밖으로 넘쳐나가는 듯했다. 속(俗)으로 되돌려지는 그 빛은 환한 하늘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속으로 되돌려지는 환한 하늘색 빛이 너무나 아름다운 세 천사 스테인드글래스
ⓒ2005 정철용
이러한 성과 속의 교감은 이 교회의 역사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원래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는 1866년에 웰링턴 손던(Thorndon) 교구 교회로 봉헌된 것이었다. 그러다 점차 교인들이 늘어나 좌석이 부족하게 되자, 국회도서관 건물 바로 옆에 더 커다란 교회를 짓기 시작했고 1964년에 새로 지은 그 교회로 교회기능을 모두 옮겼다. 관할 교구에서는 쓸모 없게 된 옛날 교회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성직자들에 의하여 그 기능과 이름까지도 새로운 교회에 빼앗기고(그래서 새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 '올드'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이게 되었다) 건물마저 철거될 운명에 빠지게 된 이 낡고 작은 교회를 살린 이들은 다름 아닌 속세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완강한 저항이 성공을 거두어 1967년 마침내 뉴질랜드 정부는 이 교회를 사들였고 뉴질랜드 유적관리 재단(New Zealand Historic Places Trust)에 관리를 위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배를 봉헌하지는 않고 있으며 결혼식과 음악회 및 각종 문화예술 행사들을 개최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속화(俗化)되었어도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는 그 성스러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항상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성과 속, 그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함께 가는 교회, 성직자와 속인(俗人) 모두 자신의 교회로 품어주는 교회, 그런 교회의 모습을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내가 보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것이 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에 나는 그저 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겠다. 이 교회 내부의 모습을 찍은 이 사진에서 그 중간쯤에 있는 양쪽 기둥에 특이하게도 깃발들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들은 속세의 깃발들이다.

▲ 오른쪽 뒤에 내걸려 있는 깃발은 성조기, 그 앞은 미 해병대 제2사단의 깃발이다
ⓒ2005 정철용
영국 해군과 뉴질랜드 해군의 깃발과 함께 미국 성조기와 미 해병대 제2사단의 깃발이 교회 안에 내걸려 있는 것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침입에서 뉴질랜드를 지켜주기 위하여 웰링턴에 머물렀던 미국과 그 군대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 군대의 깃발을, 그것도 미 해병대의 깃발을 걸어 놓은 이 기이한 모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안내문의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성과 속의 결합을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기차의 선로가 결코 만나지 않으면서도 또 결코 헤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서로 마주보며 이어나가는 그 팽팽한 평행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라는 기차가 달리는 성과 속의 두 궤도 역시 그렇게 헤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마주보며 달려나가야 하리라.

웰링턴의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내가 마주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래스들과 기사회생한 교회의 역사와 교회 안에 내걸은 속세의 깃발들은 그러한 진실을 말없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성과 속은 서로를 팽팽하게 긴장시켜주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함께 달릴 때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오래 갈 수 있는 두 개의 선로라는 진실을.

Posted by 동봉
,

국회의사당도 관광상품이다
뉴질랜드 여행기(17) : 웰링턴에서 마주친 성(聖)과 속(俗) (1)
정철용(ccypoet) 기자
카피티 해안의 아늑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1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1시간 정도 달리니, 고속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Wellington)이다.

웰링턴의 입지는 뉴질랜드 북섬만을 놓고 보면 남쪽 끝이겠지만 그 아래쪽 남섬까지 고려에 넣는다면 뉴질랜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1865년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수도를 옮기도록 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수도임에도 만년 제2도시인 웰링턴

한 나라의 수도는 대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서 있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인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수도 워싱턴보다 더 앞서 있고 더 규모가 큰 대도시를 여럿 거느리고 있는 미국의 경우처럼 예외도 있는 법인데, 뉴질랜드가 바로 그렇다.

경제규모의 지표가 되는 인구수로 따질 때, 웰링턴의 인구수는 오클랜드의 3분의 1 수준인 약 40만명에 불과하다. 웰링턴은 뉴질랜드의 수도이긴 해도 오클랜드라는 거대 도시의 그늘에 가려 있는 만년 제2도시인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수도는 그 규모나 순위가 어떻든 간에 '정치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항상 주목을 받게 되고 이것은 어느 나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두번째 방문이 되는 이번 웰링턴 여행에서 우리는 바로 그 정치의 중심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것이 웰링턴을 뉴질랜드의 수도답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표지일 테니까.

▲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벌집 모양의 행정부 건물
ⓒ2005 정철용
출근 시간이 지나 비교적 한가한 웰링턴 시내의 한 도로변에 차를 주차시키고 우리는 국회의사당 쪽으로 걸어갔다. 국회의사당은 벌집 모양의 행정부 건물 ―그래서 '벌집(Beehive)'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과 동화 속의 성처럼 예쁜 국회도서관 건물을 양옆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다

육중한 석조건물인 국회의사당은 멀리서 보니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보였다. 우리는 정문을 통과하여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갔다. 국회의사당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텐데 내게는 의외로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아니 감히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국회의사당 건물에 이렇게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다니! 하긴 이 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이용하는 시위 현장이 바로 이곳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우리는 건물 1층 로비에 있는 국회의사당 투어 데스크로 가서 11시에 있는 다음 투어의 대기자 명단에 우리 이름을 올렸다. 건물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카메라와 가방을 데스크에 맡기고 로비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건장한 몸집의 투어 가이드가 나타나 인사를 했고, 국회의사당의 역사를 담은 12분짜리 영상물을 관람한 후에 국회의사당 투어가 시작되었다. 약 1시간 동안 그는 40여명의 관광객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의 이곳저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건물 내 각 공간의 역사와 용도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국회의 구성과 기능하는 방식도 자세히 설명해주어 무척이나 교육적이었다. 복도와 로비 공간 등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품ㆍ그림들과 설치 예술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내가 밖에서 국회의사당을 보면서 미술관을 떠올렸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작품들 하나 하나마다 중요한 의미가 있어 국회의사당 안에 영구 전시를 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 동화 속의 성처럼 예쁜 국회도서관 건물
ⓒ2005 정철용
이처럼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말굽 모양으로 국회의원들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는 본회의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침 회의가 없는 날이어서 우리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내부와 소박한 나무책상과 의자들이 참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고성과 설전이 오가는 국회 본회의장이 아니라 오래된 대저택에 있음직한 넓은 서재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실제로도 TV 뉴스에 자주 비치는 이곳 본회의장의 풍경은 이러한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가끔씩 고성과 야유도 들려오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에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반론할 것은 반론하는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곳의 지배적인 풍경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진 피해 방지를 위하여 건물 지하에 설치한 방진(防振)시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웰링턴을 가로지르고 있는 지진 단층에서 불과 400m 벗어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국회의사당과 국회도서관 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두 건물의 기초를 조금씩 절단해 들어가 그 빈 자리를 충격 흡수력이 뛰어난 400여개의 고무 베어링으로 채워놓은 것이다.

지난 1992년에 시작되어 약 4년간 이루어진 이 보강작업으로 국회의사당과 국회도서관 건물은 진도 7.5의 강진도 견뎌낼 수 있는 유연한 기초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내게는 이것이 단지 기술혁신의 모범 사례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운 유연성과 포용력을 갖추기 위하여 국회에서부터 몸소 실천해보인 노력으로 본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까.

정치를 가장 속된 직업 중의 하나로 여기고 정치인을 가장 믿지 못할 직업인들 중의 하나로 멸시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라면 깜빡 기가 죽는다. 그리고 그런 정치인들의 직장인 국회의사당은 감히 함부로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성역으로 여긴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 우리가 마주친 국회의사당은 전혀 달랐다.

정문은 경비하는 사람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고 광장에는 사람들이 햇빛을 즐기면서 점심을 먹고 있었고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막아서는 설치물도 전혀 없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바라본 웰링턴의 국회의사당은 행정부와 국회도서관 건물 가운데서 키를 낮추고 앉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는 정오의 햇살이 지극히 '민주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 국회의사당은 행정부와 국회도서관 가운데서 키를 낮추고 앉아 있었다
ⓒ2005 정철용

웰링턴 국회의사당 투어 일반정보

o 개관시간
- 평일(월-금) : 첫 투어는 오전 10시, 마지막 투어는 오후 4시임.
- 토요일 및 공휴일 : 첫 투어는 오전 10시, 마지막 투어는 오후 3시임.
- 일요일 : 첫 투어는 정오(12시), 마지막 투어는 오후 3시임.

o 휴관일 : 크리스마스 연휴(12월 25일과 26일), 신년 연휴(1월 1일과 2일), 와이탕이 데이(2월 6일), 부활절 금요일

o 입장료 : 없음(무료)

o 기타 사항
- 투어를 원하는 관광객은 자신이 원하는 투어 시간 전에 국회의사당 1층 로비에 마련된 안내 데스크로 가서 신청하면 됨.
- 10명 이상의 단체 관광객이 투어를 원할 경우에는 사전에 예약을 해야 됨.
- 국회의사당 건물 내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함. / 정철용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