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시계탑에서 만나다
<뉴질랜드 여행기 8> 셰익스피어의 도시, 스트랫포드
정철용(ccypoet) 기자
스트랫포드는 타라나키산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도시다. 대부분의 여행 안내책자들은 인구 5천명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도시를, 본격적인 타라나키산 등정을 위한 배후 기지이며 에그몬트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붙였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은 영국 중부의 워릭셔에 있는 스트랫포드어폰에이본이라는 마을인데,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스트랫포드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트랫포드가 셰익스피어에 빚지고 있는 것은 단지 도시의 이름만이 아니다. 바둑판 모양으로 나 있는 스트랫포드의 거리를 조금만 걷다 보면, 표지판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리고 어떤 것은 매우 친숙하기까지 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 스트랫포드 시내 중심가 지도. 브로드웨이의 가운데 T라고 표시된 것은 시계탑이다.
ⓒ2004 taranakinz
햄릿, 로미오, 줄리엣, 티볼트, 리어, 리간, 코델리어, 미란다, 프로스페로, 에어리엘, 올란도, 포르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죽느냐, 사느냐"로 고민한 햄릿과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비극적 사랑의 두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은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이러한 거리 이름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스트랫포드의 거리 이름은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3번 고속도로에 붙인 브로드웨이라는 도로 이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27개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붙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타라나키산의 도우슨 폭포를 구경하고 나서 스트랫포드에 막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비극의 주인공 바로 햄릿이었다. 나는 차를 길 가에 세우고 햄릿을 카메라에 담았다.

▲ 스트랫포드의 모든 거리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붙였다.
ⓒ2004 정철용
그 거리의 어느 집에선가, 셰익스피어의 그 음울하고 비극적인 작품 세계로부터 빠져 나온 햄릿이 실제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 숨어 사는 햄릿은 독살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고민하고 숙부와 놀아난 어머니의 부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비운의 왕자가 더 이상 아닐 터이다.

그 길에서 마주친, 미소 띤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 한 사내가 어쩌면 행복한 평민으로 변신한 햄릿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른 도로들을 향해 걸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템페스트>의 미란다 스트리트가 나오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스트리트도 나왔다.

그렇다면 줄리엣과 만나는 도로들 중에 분명 로미오가 있을 터인데, 줄리엣 스트리트를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가도 로미오 스트리트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여행정보센터에서 집어 온 시내 지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로미오 스트리트는 줄리엣 스트리트와 한 블록 차이로 빗겨가고 있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난 두 청춘의 슬픈 사랑처럼 스트랫포드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빗겨가고 마는 것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계탑에서 마침내 만난다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여행정보센터에 들러 나오는 길에 마주친 높은 시계탑에서 우리는 죽음이 갈라놓은 두 청춘이 다시 부활하여 만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스트랫포드의 명물로 손꼽히는 이 시계탑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하루에 세 차례씩 특별한 공연을 보여 준다. 오전 10시, 오후 1시 및 오후 3시에 시작되어 약 5분 동안 계속되는 이 특별한 공연의 주인공들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실제 사람 크기만한 로미오와 줄리엣 인형은 시간이 되면 벽처럼 보이는 문을 열고 나와서, 차임벨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를 서로 주고받는다.

각각 다른 위치에서 두 번에 걸쳐 나타나지만 함께 만나지 못하고 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은 마지막 세번째에는 시계탑의 아래쪽 테라스에 함께 나타난다. 로미오의 손에는 붉은 장미꽃이 들려있고 그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보며 마침내 이루게 된 자신들의 사랑을 기뻐한다.

▲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번째 등장. 다른 위치에서 나타난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2004 정철용
▲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번째 등장. 거리가 더 벌어져 있다.
ⓒ2004 정철용
▲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 번째에 가서야 드디어 만난다. 로미오의 손에 든 장미가 붉다.
ⓒ2004 정철용
이 유쾌한 5분짜리 단막극을 위해서 스트랫포드의 시계탑은 세 명의 줄리엣과 세 명의 로미오 인형들을 그 안에 품고 있다. 그 여섯 명의 인형 배우들은 그날 오전 우리가 다녀왔던 타피티 박물관의 관장인 나이젤 오글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10여명의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3시 공연을 구경했다. 시계탑이 건너다 보이는 길가에서 의자도 없이 서서 관람하는 것이었고 공연 중에도 차들이 도로를 씽씽 달리고 있어서, 음악 소리와 대사가 명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계탑에서 부활하여 마침내 만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유쾌하고 조금은 가슴 찡한 것이기도 했다. 일년에 한 번, 칠석날에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우리의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셰익스피어의 도시 스트랫포드에서는 이렇게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계탑에서 하루에 세 번씩 만나고 있었다. 치열하고 뜨겁고 진정어린 사랑은 이렇게 마침내 만나는 법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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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2등, 타라나키산은 서럽다
뉴질랜드 여행기(7) 구름 안개 속에 울고 있는 타라나키산
정철용(ccypoet) 기자
타라나키산은 약 12만년 전에 화산 폭발로 형성됐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폭발이 있었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1775년에 마지막 용암 분출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된 나이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타라나키산은 흰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다.

하지만 만년설에 덮인 타라나키산의 이마와 꼭대기는 맑은 날에도 구름 속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아서 온전히 그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도 여행 첫날 잉글우드를 향해 달리는 도로에서 타라나키산의 만년설을 목격한 이후로는 다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때 우리가 보았던 타라나키산의 만년설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고 있어서, 차가운 눈과 단단한 얼음의 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중턱을 둘러싼 흰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타라나키산의 모습은 마치 챙이 넓은 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구름이 감싸고 있는 타라나키 산
ⓒ2004 정철용
차가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부드럽고 평화로운 모습과 예각의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먼 그 완만한 능선으로 인해, 나는 해발 2518m라는 타라나키산의 높이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타라나키산이 그 주위에 비교가 될 만한 다른 산들이 없이 너른 벌판에 혼자서 솟아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1775년에 있었던 타라나키산의 마지막 화산 폭발을 목격했을 마오리들은, 이 산이 이렇게 외따로 높이 솟아 있고 맑은 날에도 구름 속에 잠겨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낭만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어 흥미롭다.

타라나키산은 통가리로산을 이기지 못한다

마오리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뉴질랜드 북섬의 높은 산들이 북섬 한가운데에 있는 타우포 호숫가 근처에 함께 모여 있었다. 이 산들은 작고 아름다운 산인 '피항아'를 사랑했는데, 산중의 산이라 불리는 '통가리로'와 '타라나키'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 두 산은 피항아를 차지하기 위한 대혈투를 벌이게 되고, 며칠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통가리로가 최후의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패배로 인한 분노와 사랑을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던 타라나키는 땅 속에서 온몸을 솟구쳐 해 지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 때 충직한 친구인 '라우호토 타파이루'라는 바윗돌이 타라나키의 앞길을 인도했다. 라우호토의 인도를 받아 타라나키가 지나간 곳에는 깊은 골짜기가 패여 강물이 흐르게 되었는데, 그 강물이 바로 아직도 흐르고 있는 '팡가누이강'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타라나키는 새벽 무렵에 서쪽 바닷가에 이르렀고, 지친 그는 그 곳에서 잠시 멈추고 잠을 청했다. 이 때 원래 이 지역에 서 있던 산들인 '포우아카이'와 '파투하'는 타라나키가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잠이 든 타라나키의 발에 족쇄를 채워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오직 라우호토만이 이 족쇄를 풀 수 있는데, 그는 아직까지 타라나키의 족쇄를 풀어 주지 않고 있다. 신비한 힘을 지닌 이 바윗돌은 지금도 타라나키산과 태즈만해 사이에 있는 작은 마오리촌 '푸니호 파'에서 타라나키산을 지켜 보며 서 있다.

이렇게 해서 타라나키산은 높은 산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타우포 호숫가 근처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서쪽 바닷가의 벌판에 외따로 혼자 서 있게 됐다. 그리고 아직도 잃어 버린 사랑 피항아를 그리워하며 눈물과 한숨을 삼키고 있어서, 타라나키산에는 맑은 날에도 구름과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화산 폭발이나 지진 등과 같은 지각 변동과 구름과 안개 등과 같은 기상 현상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재미있다. 더욱 재미난 것은 이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통가리로에게 패배하는 타라나키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를 통해서도 몇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타라나키는 통가리로에게 사랑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국립공원 지정에 있어서도 선수를 빼앗겼다. 1894년 뉴질랜드 최초로 통가리로 국립공원이 지정됐고, 타라나키산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0년에 가서야 두번째 국립공원(이 공원은 타라나키산의 영어 이름을 따서 에그몬트 국립공원으로 불린다)으로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연간 방문객 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 다녀가지만 타라나키산은 그 절반도 안 되는 30만명이 고작이다. 또한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일찍부터 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반면 타라나키산은 뉴질랜드 내에서만 조금 알아 주는 정도다.

▲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최고봉 루아페후산
ⓒ2004 정철용
높이로 보자면 통가리로산(1967m)이 타라나키산(2518m)보다 훨씬 낮은데도 이처럼 모든 면에서 앞서는 것은, 통가리로산은 주위에 든든한 원군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북섬의 최고봉인 루아페후(2797m)와 나우루호에(2291m)가 바로 그 원군들이다.

나는 타라나키가 항상 통가리로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것은 예부터 전해 내려 오는 전설이 씌워 놓은 비운의 운명이 타나라키의 발목을 항상 붙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족쇄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타라나키의 잠도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전설을 통해 전해지는 주문(呪文)이란 때로는 이토록 강력하게 현실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타라나키산은 후지산을 닮았다

하지만 타라나키산도 올해 들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기회를 얻으면서 차츰 그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올해 초 개봉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바로 타라나키산을 배경으로 해서 촬영됐다.

▲ 화살표로 표시된 마을에 사무라이 빌리지가 있다
ⓒ2004 사무라이빌리지투어
세계적인 톱스타 톰 크루즈가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하여 두달 이상을 타라나키 지역에 머물렀고, 그의 뒤를 좇아서 연예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그들에 의해서 타라나키산을 비롯한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통해 타라나키는 세계 무대에 등장했지만, 이 역시 통가리로보다는 한 발 늦은 것이다. 통가리로는 그보다 앞서 피터 잭슨의 3부작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영화계에 먼저 발을 내딛었다.

몇 년 차이로 또 선수를 빼앗기기는 했어도 <라스트 사무라이> 덕택에 평소에는 한산하기 짝이 없던 타라나키 지역 요식업체들은 영화 촬영 기간 내내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이 영화의 제작팀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타라나키 지역을 촬영 현장으로 택한 것은 바로 타라나키산 때문이었다. 원추형으로 완만하게 솟아 있는 타라나키산의 모습이 19세기 일본의 한 사무라이 촌락을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영화 속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후지산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

이에 주목한 <라스트 사무라이>의 제작팀은 타라나키산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 우루티에서 마침내 촬영에 아주 적합한 한 농장을 발견하고 약 6개월간에 걸쳐 사무라이 촌을 그 농장에 건설했다. 영화 촬영을 위해 세운 25개의 건물들은 촬영이 끝나고 난 후, 집 한채를 빼놓고는 모두 철거됐다.

▲ 사무라이 빌리지에 남아 있는 집 한 채
ⓒ2004 사무라이빌리지투어
그러나 농장 주인은 남은 집 한채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영화 촬영의 흔적들을 잘 보존하여, ‘사무라이 빌리지’라는 이름을 붙여 관광지로 꾸몄다. 그리고 여기에 전쟁 장면의 촬영시에 실제로 이용되었던 말들의 스턴트 쇼도 보여 주고 주변의 맥주 공장 견학 및 시음 기회도 함께 제공하는 관광 상품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인 관광객들이나 톰 크루즈의 극성팬들이 단체로 몰려들면서 우루티의 ‘사무라이 빌리지’는 이 지역의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여행 첫날 우루티를 통과한 우리는 시간에 쫓겨 아쉽게도 ‘사무라이 빌리지’에 들르지 못했다. 대신 여행 셋째 날, 우리는 멀리서 구름에 가린 모습으로만 보았던 타라나키 산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했다.

타라나키산은 구름 안개 속에서 울고 있다

타라나키산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산 주위에 방사선처럼 퍼져 있는 길들의 끝에 여러 개가 있다. 단지 15분에 불과한 초단거리 산책 코스도 있고, 정상까지 왕복 7~8시간이 소요되는 본격적인 등산로도 있다.

타라나키산을 속속들이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3~5일간에 걸쳐 산의 구석구석을 연결해 주는 등산로들을 누비는 산행 코스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동 시간을 포함해서 단지 2시간 동안을 타라나키산에서 머물기로 계획한 우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일단 자동차로 산의 깊숙한 안쪽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들어가서, 그곳에 자리한 도우슨 폭포를 구경하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는 산간 도로를 20여분 정도 달리자 막다른 길 끝에 넓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우리를 맞이한 것은 오싹 한기가 느껴지는 습한 구름 안개였다. 산 밑에서는 분명 맑은 하늘을 보고 올라왔는데 산 중턱에도 미치지 못할 이곳에는 구름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구름 안개는 여행자 정보 센터에 들어가 도우슨 폭포의 위치를 대충 확인하고 나오는 사이에 이미 흩어져 버리고 없었다. 변화무쌍한 타라나키산의 날씨 변화에 감탄하며 우리는 대충 감을 잡아 사람들 몇이 몰려 있는 쪽으로 갔다.

그들도 도우슨 폭포를 보러 왔으리라 짐작하고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 산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왕복 10분 거리에 있다는 폭포는 우리가 20여분을 걸어 올라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구름 안개가 내리고 빗방울도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해,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산길을 내려와 젖은 몸도 말리고 점심도 먹을 겸 들어간 산장 카페에서 나는 폭포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벽에 붙여 놓은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도우슨 폭포는 우리가 올라갔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인 아래쪽 도로 변에 있었다. 안내책자에는 30m 높이의 장쾌한 폭포라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가서 보니 보잘 것이 없었다.

▲ 도우슨 폭포 앞에서 엉거주춤 선 아내와 딸아이
ⓒ2004 정철용
그러나 타라나키산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는 그 물줄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저 폭포의 물줄기는 몰래 구름 안개 속에서 흐느끼다가 끝내 감추지 못하고 터뜨려 버린 타라나키산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사랑도 명예도 모두 통가리로산에게 내주고 만년 2인자로 서쪽 바닷가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타라나키산이 참았던 설움을 마침내 쏟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역사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2등은 쉽게 잊어 버린다.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은 닐 암스트롱과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을 밟은 에드먼드 힐러리경은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하여 그들보다 단지 몇 분 뒤처졌던 버즈 올드린과 텐징 노르게이는 쉽게 잊어 버리고 만다.

통가리로산에게 늘 선수를 빼앗긴 타라나키산도 인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잊혀져 간 무수한 2등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산을 내려와서 올려다본 타라나키산은 다시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그 구름 안개 속에서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을 커다란 산의 슬픔에, 나는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떠올리면 그러하듯이 목이 메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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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뉴질랜드 여행기(6) 하웨라의 타피티 박물관
정철용(ccypoet) 기자
"여자들과 땅은 남자들을 죽게 하는 원인이다(Women and land are the reasons why men die)."

이 말은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다. 오랜 세월 동안 부족 단위로 살아온 마오리족에게 부족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상사였으며, 그 전쟁에서 자기 부족의 여자들과 땅을 지키기 위하여 마오리 전사들은 목숨을 바쳐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라나키 지역에서 이 속담을 말하는 경우라면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타라나키 지역에서 마오리 전사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피부색이 같은 다른 부족의 마오리 전사들이 아니라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이었다.

그리고 마오리 전사가 지켜내야 할 땅도 자기 부족의 촌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족들의 촌락과 들판과 산하까지 모두 포함하는 마오리족의 삶의 터전 전부였다.

타라나키 토지 전쟁 : 땅은 남자들을 죽게 하는 원인이다

▲ 타라나키 지역 지도
ⓒ2004 taranakinz
뉴질랜드가 대영제국으로 편입된 1840년 이후,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에 따라 땅을 둘러싼 분쟁이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새로 이주한 백인들에게 땅은 돈을 벌기 위한 농장을 의미했던 반면, 오랜 세월 그 땅에서 살아온 마오리족에게 땅은 조상의 혼과 숨결이 서린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마오리족은 그 터전을 총 몇 자루와 돈 몇 푼을 받고 헐값으로 백인들의 손에 팔아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해서 촉발된 토지 분쟁이 대규모 전쟁 상황까지 이른 곳이 바로 타라나키 지역이었던 것이다.

1860년 2월, 뉴 플리머스 근처의 작은 마을 와이타라(Waitara)에서 발발한 타라나키 토지 전쟁(Taranaki Land Wars)은 이후 뉴질랜드 북섬의 중앙에 자리한 와이카토(Waikato) 지역과 동쪽 해안 지역인 플렌티만(Bay of Plenty)까지 확산되었다. 수 차례에 걸쳐 정부군의 진압과 마오리족의 저항이 이어진 이 토지 전쟁은 10년 이상 끌어 1872년에 가서야 그 막을 내렸다.

백인들은 이 토지 전쟁을 '마오리 전쟁(Maori Wars)'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마오리족은 이 전쟁을 '테리리 파케하(teriri Pakeha: '백인들의 분노'라는 뜻)'라고 불렀다. 수천 명의 마오리 전사들과 영국 군인들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땅은 남자들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마오리족의 옛 속담을 이 전쟁은 너무나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남부 타라나키 지역의 중심지인 하웨라(Hawera) 역시 이런 아픈 역사의 상처를 곳곳에 지니고 있다. 하웨라의 북쪽 근교에 자리한 투루투루 모카이 파(Turuturu Mokai Pa)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파(Pa)'는 다른 부족들의 침입에 대비해 주로 고지대에 요새처럼 지어놓은 마오리의 전통적인 주거지를 말하는데, 타라나키 토지 전쟁 때에는 영국군에 대항하는 마오리족의 방어 진지로도 사용되었다. 투루투루 모카이 파 역시 타라나키 토지 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주요 방어 진지 중의 하나였다.

▲ 타피티 박물관에서 본 마오리족의 전통적인 방어용 주거지 파(Pa)의 미니어처
ⓒ2004 정철용
그런데 투루투루 모카이는 마오리 말로 '마른 머리들을 걸어놓는 효수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마오리족과 영국군 사이에 벌어졌던 타라나키 토지 전쟁의 격렬함과 끔찍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것으로 알려진 투루투루 모카이 파를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하웨라 근교의 한 농장에서 묵고 난 다음날이었던 그날 아침,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뒤처져 있었다.

평화로운 농장의 아침 풍경과 귀여운 돼지새끼에 마음을 빼앗겨 꾸물거리느라 그날 오전 일정으로 잡아 놓은 투루투루 모카이 파와 타피티 박물관을 모두 다 둘러보기엔 시간이 많이 모자랐던 것이다. 둘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우리는 타피티 박물관을 선택했다.

타피티 박물관 : 역사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가 투루투루 모카이 파를 제쳐놓고 타피티 박물관(Tawhiti Museum)을 선택한 데에는, 그 전날 밤 농장을 찾지 못해 도움을 청한 우리에게 직접 차를 몰아 농장까지 길 안내를 해 준 시골 아저씨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우리와 헤어지기 전, 내일 꼭 타피티 박물관에 가보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여기에 '뉴질랜드 최고의 사설박물관'이라 소개하고 있는 안내 책자의 유혹도 쉽게 외면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투루투루 모카이 파를 건너뛰고, 하웨라 시내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타피티 박물관으로 바로 향했다.

겉에서 본 박물관 건물은 고색이 창연했다. 1917년에 건립한 치즈 공장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찌 보면 역사를 품고 있는 박물관 건물로서는 더 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많은 기대를 품고 찾아온 여행객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겉모습이었다.

그 겉모습처럼 먼지가 풀풀 날리고 곰팡이 냄새 가득한 낡은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으리라고 지레 짐작한 우리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물관의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그러한 첫 인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유럽인들의 이주 전 마오리족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는 미니어처
ⓒ2004 정철용
유럽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발을 딛기 이전, 타라나키 지역에서 살았던 마오리족의 삶의 모습을 마치 축소한 영화세트처럼 정교하게 복원해 놓은 수많은 미니어처 전시물들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빛 바랜 사진과 유리관 안에 모셔진 유물만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그 옛날 마오리족의 생활상이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얼굴에 문신이 가득 새겨진 모습으로 전시장의 구석구석에 서 있는 실물 크기의 마오리 전사 인형들은 금방이라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 것 같았다.

▲ 마오리족의 전통적인 방어용 촌락 파(Pa)의 미니어처
ⓒ2004 정철용
그러나 용감무쌍해 보이는 이 마오리 전사들도 총과 포로 중무장한 영국군 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으리라. 실제로 타라나키 토지 전쟁에 관련된 전시물들을 늘어놓은 다음 전시실에서 우리가 본 미니어처들은, 마오리 전사들이 영국군에 쫓겨서 고지대의 파로 피신하고, 그나마 그 파도 공격을 당해 서둘러 부녀자들을 피신시키고 있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라나키 토지 전쟁이 끝나고 뉴질랜드 정부는 130만 에이커에 달하는 타라나키의 토지를 몰수했다. 땅을 잃은 마오리족은 깊숙한 오지나 도시의 빈민가로 내몰렸고, 유럽에서 이주해온 백인들이 이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오리족에게 빼앗은 땅에서 양을 방목하고, 아름드리나무들을 벌목하고, 석탄을 채굴했다.

▲ 실물 크기로 제작한 초기 유럽 이주민들의 생활상. 어린 소녀가 아빠에게 잡은 쥐를 보여주고 있다.
ⓒ2004 정철용
타피티 박물관에 마련된 전시장의 대부분은, 바로 그렇게 마오리족에게 빼앗은 땅에 이룩한 백인들의 행복한 삶의 풍경들을 포착하여 제작한 실물 크기의 인형들과 정교한 미니어처 전시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가 한 세기 전에 등장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음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2004 정철용

▲ 미니어처로 제작한 초기 유럽 이주민 가정의 흥겨운 한 때
ⓒ2004 정철용
일하고 있는 아빠에게 들판에서 잡은 쥐를 보여주고 있는 소녀, 멋지게 차려입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쳐다보고 있는 신사, 그리고 함께 우유를 짜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더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남자들의 피를 지불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각각 독립된 방으로 구분되어 전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박물관 문이 닫히고 어둠이 내리면 땅을 잃은 마오리 전사들과 그 땅을 차지한 유럽에서 온 백인들 간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수적으로 열세인 마오리족이 백인들을 당해내기는 어려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 벌목한 나무들을 실어나르는 녹슨 철로가 이어지는 제재소 건물
ⓒ2004 정철용

▲ 바큇살이 떨어져나간 이 나무 수레바퀴처럼 역사의 수레바퀴에도 사라진 부분이 많으리라.
ⓒ2004 정철용
전시장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니 숲으로 이어지는 녹슨 철로가 있는 제재소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한 세기 전 이 지역에서 번창했던 벌목 산업을 재현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된 이 숲 속을 달리는 철로는 지금도 매달 첫째 일요일(방학 중에는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운행이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제재소 앞에 있는, 바큇살이 떨어져 나간 수레바퀴를 여러 장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은 도로에서 사라진 수레바퀴처럼, 피로 물든 타라나키 지역의 역사도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망각을 불러내는 박물관에서조차 이 땅의 옛 주인이었던 마오리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저 수레바퀴의 바큇살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는 패자에 대한 기억은 실어 나르지 않는다.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 역사의 이 냉혹함에 나는 잠깐 몸서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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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이 호텔보다 더 좋은 이유
뉴질랜드 여행기(5) : 팜스테이, 비치 하우스 그리고 B&B
정철용(ccypoet) 기자
혼자 떠나는 여행길에서는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 큰 일이 아니지만, 딸린 식구들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숙소는 볼거리에 버금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나는 타라나키 지역에서 웰링턴으로 이어지는 이번 가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인터넷과 안내책자를 뒤져서 우리가 묵을 숙소들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나흘은 모텔에서 자고 사흘은 민박을 하기로 했다고 하니, 딸아이는 호텔에서도 하루쯤 묵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이미 예약도 다 끝났거니와 이제 와서 숙소를 바꾸면 여행의 세부 일정들도 흐트러지기에, 나는 딸아이의 소원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뉴질랜드의 모텔은 한국과는 달리 주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직접 식사를 해먹을 수 있다. 따라서 모텔에서 묵으면 먹는 데 들어가는 여행 경비를 그만큼 줄일 수 있다. 알뜰한 아내는 이런 점을 들어 괜히 비싼 호텔에 묵을 필요가 없다며 딸아이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내는 사흘씩이나 민박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불편해 하는 기색이었다.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흔히 ‘B&B(Bed and Breakfast)’라고 부르는 민박이 일반 모텔의 숙박비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박을 하면 아무래도 집 주인의 눈치가 보일 거라는 점이 아내가 민박을 꺼리는 더 큰 이유였다.

나는 B&B 말고도 농장에서 자는 팜스테이(farmstay)와 이곳 사람들이 휴가철 별장으로 사용하는 비치 하우스(beach house)에도 각각 하루씩, 모두 3일간의 민박을 이미 예약해 놓은 터였다.

딸아이는 모텔에서 자는 것에, 아내는 민박하는 것에 대해 조금씩 불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뉴질랜드의 다양한 숙박문화를 경험해보자면서, 민박집 예약을 끝내 취소하지 않았다.

팜스테이, 농장에서 맞이하는 평화로운 아침

여행 둘째 날에 우리가 묵을 숙소는 타라나키 제2의 도시 하웨라(Hawera)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농장이었다. 시내에서 저녁을 사 먹은 후 땅거미가 질 무렵, 우리는 그 농장으로 향했다. 주소를 확실하게 알고 지도도 있으니, 초행길이라도 전혀 걱정하지 않고 나는 차를 몰았다.

▲ 둘째날 묵었던 팜스테이 농장의 주인집. 그 옆의 별채에 우리는 묵었다.
ⓒ2004 정철용
그런데 시내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그 농장의 표지판이 아무리 달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1시간이 넘게 길에서 헤매는 동안 이미 사방이 깜깜해졌다. 나는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한 인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그 집의 남자는 너무나 고맙게도 손수 차를 몰고 앞장섰다. 그는 우리가 이미 지나온 길을 10분 정도 달려, 우리가 찾고 있는 농장의 진입로 앞에 차를 세웠다. 자세히 보니, 길가에 세워진 8절 도화지보다도 작은 표지판에 우리가 찾고 있는 농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큰 안내판을 기대하고 달렸으니, 저렇게 작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을 리가 없지.”

우리는 농장을 찾지 못한 것을 우리 탓이 아니라 작은 표지판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낯모르는 여행객에게 베푼 이 시골 남자의 호의는 너무 작은 표지판을 세워 놓은 농장 주인의 불친절(?)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농장 주인에게 표지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농장 주인은 주방이 딸린 별채로 우리를 안내하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아내와 딸아이가 씻는 동안, 나는 마당으로 나왔다. 불빛 하나 없는 짙은 어둠으로 사방이 적막했다. 머리를 들어보니 밤하늘이 온통 별천지였다.

소름 돋듯이 끔찍하게 돋아난 별들을 보며, 나는 도시가 아니라 이렇게 시골의 농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날 아침에 만난 농장의 평화로운 풍경에 비하면 정말 별 게 아니었다.

▲ 마당 한쪽에 마련된 바비큐 시설. 그 옆으로는 야외식탁도 있었다.
ⓒ2004 정철용

▲ 손바닥을 벌려 돼지 새끼들을 부르고 있는 딸아이
ⓒ2004 정철용
아침에 일어나 이곳저곳 거닐며 본 농장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구름에 덮인 타라나키 산이 저 멀리 보이고 일찍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야외 바비큐 화덕 밑에는 엊저녁에 고기라도 구워먹었는지 나무 숯 몇 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양철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다 낡아 부스러지고 있는 야외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

딸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돼지 새끼들이 너무나 귀엽다고 손바닥을 벌리고 앉아 돼지 새끼들을 불러댔다. 수탉들은 가끔씩 생각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목책 너머 눈을 껌벅이며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도 보이고, 더 멀리로는 푸른 초원에 코를 박고 있는 양떼들도 보였다.

농장의 이 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취해 우리는 아침을 먹고 나서도 한참동안을 주저앉아 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조금 더 있다가 가자는 딸아이를 재촉해 차에 짐을 실었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 전, 우리는 인사를 하기 위해 주인집에 들렀다.

▲ 농장의 목책 너머 양떼들은 하루 종일 풀밭에 코를 박고 풀을 뜯는다.
ⓒ2004 정철용
작은 표지판을 탓하던 엊저녁의 불평어린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평화롭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정작 우리의 그런 마음을 받아줄 주인집 식구들은 벌써 다들 일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해가 벌써 높이 떠올라 있었다.

비치 하우스,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

뉴질랜드 사람들은 제법 돈을 모으면 2B를 우선적으로 산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요트처럼 근사한 배(boat)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통 비치 하우스라고 불리는 바닷가의 별장(bach)이다. 이들에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휴가란 바닷가의 별장에서 배를 타고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름 휴가철만 되면 자동차의 뒤꽁무니에 배를 달아맨 차량들의 행렬이 바닷가의 작은 마을들로 줄줄이 이어진다.

휴가 기간 동안에만 잠깐 사용하기 때문에 이 바닷가 별장들은 그렇게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보통 방 1개 또는 2개에 주방과 거실 등을 갖춘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다. 별장의 주인들은 이 별장을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기간 동안에는 여행객들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 바로 그러한 별장이었다.

등대가 아름답다는 캐슬포인트(Castlepoint)의 이 비치 하우스를 여행 안내책자에서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개인 소유의 휴가용 별장인 줄은 몰랐다. 팜스테이처럼 주인집 옆에 붙어 있는 별채로만 여기고, 예약만 한 채로 별도의 확인 없이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무렵에 캐슬포인트에 도착해서 찾아보니 그 거리의 어느 곳에도 여행 안내책자에서 보았던 그 집의 이름이 씌어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팜스테이 농장을 찾던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지만, 다행히 공중전화가 있어서 이번에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쪽의 말인즉슨, 자기네는 캐슬포인트 못 미쳐 있는 도시인 마스터톤(Masterton)에서 살고 있으며, 1주일 전에 우리가 묵을 그 비치 하우스의 열쇠 전달과 관련한 이메일을 내게 띄웠다고 한다. 그런데 내 쪽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안 그래도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고 한다. 1주일 전이면 바로 우리가 여행을 떠난 날이니 내가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 마스터톤에서 한 시간을 달려온 그 주인 여자에게서 열쇠를 전달받는 것으로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비치 하우스가 개인의 휴가용 별장이기에 사전에 집 주인과 열쇠를 주고받을 약속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저지른 이 실수 덕에, 우리는 불을 밝힌 등대를 생애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 비치 하우스의 열쇠를 기다리는 동안, 등대에 불이 켜지는 광경을 만났다.
ⓒ2004 정철용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등대가 눈을 뜨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 뭉클해지는 광경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기 위하여 눈을 뜬 저 등대의 빛처럼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 열쇠를 주러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따스해졌다.

주인 여자는 자기가 너무 늦게 이메일을 띄워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우리에게 거듭 미안해했다. 우리는 덕분에 등대에 불이 들어오는 광경을 구경했다며, 먼 길을 달려와 열쇠를 건네준 그녀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우리는 서둘러 라면과 밥을 해서 오이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방 2개짜리 바닷가의 작은 비치 하우스에 오래도록 켜진 불빛도 저 멀리 누군가에게는 등대의 불빛처럼 느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우리는 거실의 불을 켜둔 채 잠을 청했다.

창문 너머 거센 파도 소리가 너무나 가깝게 들려왔지만, 먼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는 그 소리조차도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비앤비(B&B), 주인과 손님이 친구가 되는 휴식처

민박이라고는 해도 이처럼 팜스테이와 비치 하우스는 숙박만 제공할 뿐이고 식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주인집과는 떨어진 별채라서 가족끼리만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여행객에게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흔히 ‘B&B(Bed and Breakfast)’ 라고 불리는 민박보다 더 좋은 숙박처는 없을 것이다. 그 이름처럼 숙박과 아침 식사를 함께 제공하는 이 민박집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만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고적함도 달래고 돈도 벌 겸,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빈 방들을 손님방으로 꾸며 여행객들을 받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집 내외는 손님을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대하게 된다. 손님도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치 집에서 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저녁에 거실에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다보면, 정말 한 가족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주인과 여행객이 이후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자주 왕래하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뉴질랜드의 B&B는 길에서 지친 육체의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따스함과 재미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사귀는 마음의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 우리가 묵은 '킬라라 홈스테이'의 2층 거실 창문에서 바라본 새벽 바다의 모습
ⓒ2004 정철용
여행 닷새째 되는 날 우리가 묵은 카피티(Kapiti) 해안 지역의 B&B ‘킬라라 홈스테이’도 그랬다. 13년 동안 특수학교의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몇 년 전부터 B&B를 시작했다고 하는 캐롤(Carole)은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를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근처 마을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캐롤의 남편 돈(Don)은 우리가 자신들의 집에서 묵는 최초의 한국인 손님이라면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한국인들이 정말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말을 경주용이 아니라 식용으로 먹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에 아내는 펄쩍 뛰며 한국 사람들은 말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바로 잡아 주었다. 이미 개고기를 먹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으니,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곳 사람들이 한국인들은 말고기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토스트와 씨리얼, 그리고 쥬스와 우유로 비교적 간단하게 준비된 뉴질랜드식 아침 식사를 하면서 캐롤과 돈과 나눈 이야기들은 즐거웠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 이야기, 자신의 집에서 묵었던 특이한 손님들 이야기도 들려주고, 손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과 그들이 남겨 놓은 명함들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킬라라 홈스테이'를 바다쪽에서 본 모습. 2층을 통째로 우리가 썼다.
ⓒ2004 정철용

▲ 캐롤과 돈과 함께 찰칵. 아내는 사진을 찍느라 여기에서는 빠져 있다.
ⓒ2004 정철용
나도 기념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찍혀 있는 내 명함을 그들에게 주었다. 훗날 어느 한국인 여행객이 그 집에 묵게 된다면, 캐롤과 돈이 보여주는 명함들 중에서 한글로 씌어진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도 반가워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미소지었다.

떠나기 전, 그 집의 이름으로 내건 ‘킬라라(Killara)’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그 뜻을 물어보았더니, 호주 원주민어인데 ‘항상 그곳에(Always there)’라는 뜻이라고 한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나중에 다시 한 번 방문하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이름처럼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너무 뒤늦게 그곳을 찾게 되어 캐롤과 돈, 그리고 바닷가에 세워진 그들의 하얀 집을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 추억 속에서는 항상 살아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넉 달이 지난 지금, 이렇게 민박으로 묵었던 팜스테이와 비치 하우스와 B&B는 그 집 주인의 얼굴까지도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우리가 묵었던 모텔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모텔은 어디를 가나 거의 똑같은 구조라 별 특색이 없으며, 모텔 주인도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무실에서 잠깐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모텔이 이럴진대, 좀 더 규격화된 구조와 표준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모텔과 호텔은 도시를 닮아서, 세계 어디를 가나 그 모습이 비슷하다.

이번 여행 동안에 내가 가급적 큰 도시를 피해 작은 마을에 있는 모텔에 묵고, 다양한 형태의 민박을 이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묵을 숙소에 대해 조금씩 불만들을 가지고 있었던 딸아이와 아내도 막상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진 눈치들이었다.

우리는 새롭게 경험한 뉴질랜드의 민박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호텔보다 낫다”고 평을 했다. 시골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하는 한, 뉴질랜드의 민박은 분명 호텔보다 낫다. 다음 번 여행에도 우리는 다시 민박을 선택할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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