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타기 하며 해안도로를 달리다
뉴질랜드 여행기(4) - 45번 고속도로 서프 하이웨이
정철용(ccypoet) 기자
▲ 뉴 플리머쓰와 하웨라를 잇는 두 개의 도로 3번과 45번 고속도로
ⓒ2004 taranakinz
타라나키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북쪽의 뉴 플리머쓰(New Plymouth)와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남쪽의 하웨라(Hawera)를 잇는 도로는 두 개가 있다.

타라나키 산의 동쪽 내륙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3번 고속도로와 반원을 이루며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45번 고속도로. 서두를 필요가 없는 우리는 해안도로인 45번 고속도로를 선택했다. 드넓은 태즈만해를 옆에 두고 달리는 드라이브의 맛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45번 고속도로를 선택한 이유는 이 도로가 '파도타기 고속도로(Surf Highway)'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는 여행 안내책자의 설명이 더 결정적이었다.

그 별명을 애써 증명이라도 하듯이 '파도타기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첫 마을인 오아쿠라(Oakura)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서핑보드가 서 있다고 한다. 그 서핑보드를 보기 위하여 우리는 뉴 플리머쓰에서 출발한 지 10여분 만에 차를 멈추었다.

그런데 웬걸, 세계 최대라는 그 서핑보드는 실제로 도착해서 보니 고작 5미터 남짓한 크기가 아닌가!

"에계계, 겨우 요만한 크기밖에 안되는데, 이게 세계 최대라고?”

아내와 딸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지만 세계 최대라는 말은 신빙성이 없어 보였어도, 이 서핑보드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세계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서핑보드 하나에 가장 많은 사람 올라타기' 부문에서 이 서핑보드는 열 세 사람을 동시에 태워 세계 기록을 세운 것.

오아쿠라의 앞바다에서 이 진기록을 세우고 난 후, 당시 사용했던 이 서핑보드를 서핑기구 전문점이 있는 마을의 중심도로변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이 서핑보드의 제작자 데이브 스미더즈에게 사람들은 '큰놈(biggie)'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세계 최대의 서핑보드

▲ 오아쿠라의 대로변에 서 있는 세계 최대(?)의 서핑보드
ⓒ2004 정철용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슈퍼 사이즈' 서핑보드는 세계 기록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보다는 자신의 가게를 선전하기 위한 상업적 의도가 더 짙게 느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파도타기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첫 마을에 이 서핑보드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징물은 없어 보였다.

실제로 많은 파도타기 애호가들과 전문가들이 태즈만 해에서 밀어닥치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하여 이곳에 온다고 한다. 그러니 여행 안내책자에 소개된 '세계 최대의 서핑보드'가 서 있는 곳이라는 말이 설령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 실수를 용서해주자.

이 곳에서는 파도타기에 전혀 경험이 없는 초보자라도 겁낼 필요가 없다. 파도타기 전문가가 고객과 함께 넓은 서핑보드에 직접 올라타서 파도타기를 가르쳐 주는 레저스포츠 상품이 있기 때문이다. 오아쿠라에 그 사업체를 두고 있는 이 특별한 관광상품은 하와이를 제외하고는 오직 이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오아쿠라가 오직 파도타기꾼들의 천국만은 아니다. 타라나키 지역의 이름난 화가, 도예가, 보석 디자이너, 유리 공예가들이 이 작은 마을에 터를 잡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예술가들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들은 작업실에 딸린 전시실 겸 매장에서 전시ㆍ판매되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대로변에 가장 가까이 있는 두 곳을 방문했다. '교활한 여우(Crafty Fox)'와 '도둑고양이(AlleyCat)'. 서핑기구 전문점 바로 옆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특이한 이름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는 구경만 하기로 하고 우선 '교활한 여우'의 집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목조 교회 건물을 매장으로 꾸민 이 건물은 그 이름이 말해주고 있듯이 아름다운 '공예품들이 가득 찬(Crafty)' 곳이었다. 온갖 앙증맞은 공예품, 도예품, 보석 및 기념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예술가들이 교활한 여우와 도둑고양이라고?

▲ 오래된 목조 교회를 매장으로 꾸며 놓은 공예품 가게 '교활한 여우'의 내부
ⓒ2004 windwand
그리고 넓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이 그 공예품들에 반사되어, 스무 평 남짓한 그 내부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을 높은 천정에 고인 깊은 어둠과 윤기 나는 바닥마루의 은은한 나무질감이 부드럽게 흡수하고 있어서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도시의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눈을 찌르는 그런 금속성의 매끈하고 차가운 빛과는 달랐다. 오래 들여다보게 되고 자꾸 손이 가게 만드는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에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도 이것저것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면서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다가 별로 소용도 없는 것을 여행 기념품 삼아 충동구매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얼른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그 ‘교활한 여우’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어서 방문한 ‘도둑고양이’의 집은 도예가 수잔의 작업실인데, 그녀가 직접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주로 도예 작품들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매장은 ‘여우의 집’보다는 작았지만 작품들의 가격은 훨씬 고가품들이었다.

그 가격에 지레 놀라 대충 둘러만 보았더니, 우리가 들어섰을 때는 친근하게 쳐다보면서 말을 건네던 수잔은 이내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고 만다.

'그렇구나. 이들 예술가들에게 우리는 관람객이 아니라 고객이구나. 그들도 돈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될 터이니,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단순히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면 힘이 빠지겠구나.'

근대 이후 성립된 자본주의는 예술품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었고, 예술가들의 창조행위에도 이제는 비싼 가격을 매겨 놓았다. 마치 미다스 왕의 손처럼 부르주아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에는 가격표가 매겨지고 말았다. 예술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어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담은 창조성은 이내 화폐 가치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활한 여우'와 '도둑고양이'라는 저 매장과 전시실의 이름은 얼마나 적확한 상호(商號)인가! 그것이 비유가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내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총연장 105킬로미터에 달하는 ‘파도타기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내륙 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어서, 바다는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낼 뿐 잘 보이지 않았다.

목걸이의 구슬처럼 도로가 꿰뚫고 통과하고 있는 작은 마을 몇을 지나, 서쪽 끝에 있는 에그몬트 곶(Cape Egmont)의 등대를 구경하고 나왔다(이번 여행에서 내가 만난 등대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니 등대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자).

파도타기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다

▲ 오푸나케의 검은 모래 사장 해변
ⓒ2004 정철용
그리고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우리는 인구 1500명의 작은 마을 오푸나케(Opunake)에서 차를 우회전하여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검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오푸나케의 해변은 비어 있었다.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은커녕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바람이 자서 파도가 높지 않아, 파도타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날씨였다. 더군다나 주말도 아니고 목요일이었으니….

'파도타기 고속도로'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파도타기의 최적지라는 그 곳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는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결국 포기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일 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리는 기어코 파도타기 하는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삶은 정말 너무 쉽게 포기할 것이 아닌 모양이다.

웰링턴을 들러 뉴질랜드 북섬의 최남단에 자리한 팰리서 곶(Cape Palliser)의 등대를 향해 달리던 우리는 그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는 한 떼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
ⓒ2004 정철용
흰 거품을 내며 달려오는 옥색 파도의 고개를 솜씨 좋게 타고 넘어가는 그들의 자세는 위태로워 보였지만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이 가벼워 보였다. 더러 중심을 잃고 바다 속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금세 떠올라 서핑보드에 배를 깔고 다가오는 파도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절묘하게 몸을 솟구쳐 서핑보드에 올라탔다.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의 작은 서핑보드는 우리가 오아쿠라에서 만났던 그 커다란 서핑보드가 지닌 세계 기록이나 상징과는 무관하게 오직 그들 자신만의 몸을 받아주고 있었다. 밀착된 몸과 서핑보드는 한 배가 되어 파도를 올라타고, 미끄러지고, 빠지고, 솟구치고, 다시 올라타는 일련의 동작을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그 반복이 힘에 겨우면 그들은 바닷가로 나와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을 잤다. 가을이라고 해도 햇볕이 뜨거워서, 한 젊은이는 자신의 낡은 차가 만들어 주는 손바닥만한 작은 그림자 그늘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자세가 이제 막 태어난 태아의 자세를 닮아 있었다.

▲ 서핑보드와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나아간다
ⓒ2004 정철용
그렇게 바닷가에서 잠이 든 몸들과 바다 속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몸들은 얼마나 싱싱한가! 그 몸들에서는 화폐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오직 주어진 이 세계에 열중하여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그리고 그렇게 즐기다가 지쳐 곤하게 잠이 들어 있는 이 젊음에는 그 아무리 뛰어난 미다스의 손도 결코 가격표를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타기를 하는 한 떼의 젊은 육체들 앞에서 한 번도 파도타기를 한 적이 없는 오래된 나의 몸은 많이 부끄러웠다. 내 몸에서 나는 화폐 냄새를 그들은 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Posted by 동봉
,

바람 지팡이와 언덕 위의 하얀 배
뉴질랜드 여행기(3) : 바람의 도시 뉴 플리머쓰
정철용(ccypoet) 기자
▲ 타라나키 지역 지도
ⓒ2004 taranakinz
잉글우드의 장난감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북서쪽으로 30분을 달려 우리는 뉴 플리머쓰(New Plymouth)에 도착했다. 뉴 플리머쓰는 타라나키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는 겨우 5만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다. 그 작은 도시가 드넓은 태즈만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7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해변 산책로를 45미터 높이의 길고 가느다란 ‘바람 지팡이’가 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길 건너 맞은편에는 하얀색의 현대적인 건물 ‘푸케 아리키’가 막 날아오를 듯한 자세로 양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바람 지팡이와 푸케 아리키. 우리는 2시간을 머물기로 한 뉴 플리머쓰에서 인상적이고 현대적인 이 두 기념물을 우리의 여행 앨범에 담아 가기로 했다.

춤추는 무용수, 윈드 원드

원래 ‘바람 지팡이(Wind Wand)’는 영화 제작과 키네틱 조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질랜드의 예술가 렌 라이(Len Lye)가 생전에 여러 차례 만든 바 있는 움직이는 조각품의 이름이다.

그가 만들었던 바람 지팡이들은 작은 크기의 것들이었지만 그는 언젠가는 45미터의 대형 바람 지팡이를 만들어 보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는 198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 20년이 지나서 생전에 이루지 못한 그의 꿈이 마침내 뉴 플리머쓰의 바닷가에 현실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뉴 플리머쓰 지역의회에서 새 천년맞이 기념조형물로 생전에 렌 라이가 꿈꾸었던 45미터 높이의 바람 지팡이를 제작하기로 하고, 렌 라이 재단에 작품 제작 위촉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 길고 유연한 바람 지팡이의 끝에 매달린 둥근 유리구 안의 붉은 전등이 1999년 12월 31일 자정, 새 천년을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에 첫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렌 라이가 살아서 그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감격했을까.

▲ 멀리서 바라본 바람 지팡이의 모습
ⓒ2004 정철용
생전에 렌 라이는 자신이 만든 바람 지팡이들을 춤추는 무용수에 자주 비유했다. 그런데 뉴 플리머쓰의 바닷가에 세워질 45미터의 철제 기둥이 춤추는 무용수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력하면서도 유연한 소재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철제에 유리와 탄소 섬유를 함께 사용하여 이 45미터 높이의 춤추는 바람 지팡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우리가 뉴 플리머쓰에 도착한 그날 오전은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아서, 멀리서 바라본 바람 지팡이는 거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정말 바람을 타고 좌우로 흔들거리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어두워지면 저 붉은 눈동자에 불이 들어오리라. 어둠 속에서 그렇게 뜬눈으로 태즈만해를 밤새 지켜보면서 저 날씬하기 짝이 없는 외눈박이 붉은 거인은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춤을 추리라.

▲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바람 지팡이(Wind Wand)의 모습
ⓒ2004 정철용
그러나 우리는 어둠 속에 불 환히 밝히고 춤을 추는 바람 지팡이의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는 순간은 후일을 기약하고, 길을 건너 푸케 아리키로 향했다.

날아오르는 하얀 배, 푸케 아리키

윈드 원드가 서 있는 해변 광장의 길 건너편에 하얀 날개를 펼치고 앉아 있는 현대적인 건물 ‘푸케 아리키(Puke Ariki)’는 마오리 말로 ‘족장들의 언덕(Hill of Chiefs)’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푸케 아리키가 자리 잡고 있는 그 나지막한 언덕은 그 옛날 마오리족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긴 땅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그 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자니 정말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이 그렇게 좋으니 호텔을 세우기에 정말 딱 알맞은 자리로 보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거기에 매우 독특하고 자부심어린 문화공간을 세워 놓았다.

박물관과 도서관과 여행자 정보 센터를 한 자리에 모은 독특한 개념의 이 문화공간을 그들은 ‘지식 센터(Knowledge Centre)’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화공간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은 ‘이것이 우리다(This is Us)’라는 푸케 아리키의 슬로건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타라나키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푸케 아리키’를 먼저 들러야 하리라. 타라나키 지역의 역사와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들여다보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 보였다.

우리는 계단에 이어지는 북쪽 전시장(North Wing)의 입구로 들어가 약 3천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라나키 지역의 자연사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았다. 딸아이는 첨단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타라나키 화산의 폭발과 그에 따른 주변 땅의 변화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가장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 옛날 마오리족들이 사용했던 유물을 전시해 놓은 마오리 유물 전시장과 1841년 영국에서 첫 유럽 이민자들이 건너오고 나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더듬고 있는 타라나키 역사박물관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규모가 작은 남쪽 전시장(South Wing)에는 타라나키 지역의 풍광을 담은 그림들과 사진들을 전시해 놓은 갤러리와 도서실 및 리서치 센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시간을 거의 다 써버려서 우리는 남쪽 전시장은 갤러리만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 하얀색의 현대적인 건물 푸케 아리키(Puke Ariki)의 전경
ⓒ2004 정철용
밖으로 나와 다시 바라본 푸케 아리키는 한 척의 거대한 배처럼 보였다. 2003년 6월에 진수한 이 거대한 배는 과거에서 솟아올라 미래를 향해 그 하얀 돛폭을 펄럭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보인 길 건너 맞은편의 윈드 원드가 거대한 마스트가 되어 푸케 아리키 호에 겹쳐졌다. 순서가 바뀌어 마스트를 먼저 세우고 배를 나중에 건조한 셈이 되긴 했지만 윈드 원드를 마스트 삼아 푸케 아리키는 하얀 돛폭을 양 날개처럼 퍼덕이며 막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 인상적인 느낌 앞에서 나는 사람들이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붙여준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을 오히려 뉴 플리머쓰에게 붙여주기로 했다. 뉴 플리머쓰는 그렇게 바람의 도움을 얻어 막 날아오르려는 바람의 도시처럼 내게 느껴졌다.

훗날 내가 뉴 플리머쓰를 다시 찾게 될 때에도 윈드 원드와 푸케 아리키는 분명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그들의 항해일지를 그 때에도 내가 판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나의 바람이 훗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여행객의 한낱 여수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뉴 플리머쓰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빌어주면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오후 1시를 훌쩍 넘어섰는데도 태양은 좀처럼 두터운 구름장 속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Posted by 동봉
,

장난감 트랙터는 죽고, 오래된 벤츠는 살아 남다
[뉴질랜드 여행기 2] 자동차 박물관서 본 자동차의 순장과 부활
정철용(ccypoet) 기자
잉글우드(Inglewood)의 한 모텔에서 여행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첫 행선지로 ‘펀 호! 장난감 박물관(Fun Ho! Toy Museum)’을 찾았다. ‘펀 호!’는 지난 1930년대부터 50여 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질 좋은 장난감 자동차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친 상표 이름이다.

펀 호! 장난감 자동차들은 처음에는 납을 사용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납으로 만든 장난감이 금지되면서부터 알루미늄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서 만들었다. 그렇게 주물로 형태를 잡은 후, 일일이 사람 손으로 정교하게 페인트칠을 하고 꼼꼼하게 마무리 작업을 했기에 보통 장난감들보다 훨씬 미려하고 내구성도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펀 호! 장난감 자동차는 당시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선물이었고, 생산이 중단된 지금도 수집가들이 즐겨 찾고 있는 품목이라고 한다.

장난감 박물관, 순장당한 장난감 자동차

9시 정각에 장난감 박물관이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설박물관이라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박물관 내부는 작았지만, 작은 장난감 자동차들의 전시공간으로서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안내 책자에 의하면 약 3000개에 달하는 다양한 장난감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 펀 호! 장난감 박물관에 전시 중인 장난감 자동차들
ⓒ2004 정철용
스무 평도 안 돼 보이는 전시 공간의 사방 벽면에 진열장이 놓여 있고, 그 진열장의 유리 선반 위에 귀엽고 앙증맞은 온갖 자동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반 승용차, 버스, 트럭, 불자동차, 경주차 등 익숙한 모양의 자동차들보다는 트랙터, 경운기, 트레일러 등 지극히 뉴질랜드다운 차량들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 농사용 장난감 자동차들을 가지고 놀았을 주근깨 투성이의 꼬마가 상상이 되면서 내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2004 정철용
딸아이는 전시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오래된 소형 승용차의 내부에 꾸며놓은 모형 마을이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실제 자동차 안에 작은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을 장난감 기차와 작은 트럭들이 달리고 있었다. 실제 자동차 안에 장난감 자동차들을 전시해 놓다니!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 오래된 소형 승용차 내부에 꾸며놓은 모형 마을. 소형 기차와 자동차들을 볼 수 있다.
ⓒ2004 정철용
장난감 수집가들이라면 이런 것들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을 테지만 우리는 전시장을 다 둘러보는데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전시장을 거의 다 둘러보았을 무렵, 남자 직원이 와서 전시장의 한 쪽 구석에 설치된 TV를 켰다. 펀 호! 장난감 박물관의 역사에 대한 짧은 비디오 영상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펀 호! 장난감은 1935년 웰링턴에서 살고 있던 잭 언더우드의 집 지하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몇 년 뒤에 잉글우드로 옮겨져 한때는 200명의 일꾼들을 거느릴 정도로 큰 공장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도 값싼 플라스틱 장난감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펀 호! 장난감 공장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마침내 1987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2004 정철용
하지만 다행스럽게 이것으로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장의 구매담당 직원이었던 배리 영이 그동안 공장에서 생산되었던 장난감 자동차들을 한데 모아서 1990년에 박물관으로 새롭게 선을 보인 것이다.

이후 1999년 잉글우드 개발 신탁이 이 박물관을 인수해서 현재의 자리로 확장 이전했다고 한다. 개관 첫해에는 1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왔고 지금도 1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작은 박물관을 보러 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공장의 상품에서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바뀐 펀 호! 장난감 자동차들의 운명이 부활인지 아니면 순장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순장에 더 가까우리라. 이제 더 이상 꼬마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난감 차들은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먼지 한 점 묻히지 않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저 자리를 지켜낼 것이지만, 그 생애에는 이제 더 이상 기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도 <신화론>이라는 책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현대의 장난감들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 바 있다.

“사실 현재 유통되는 장난감들은 자연에 거스르는 물질이다. 그것들은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화학적인 산물이다. 많은 장난감들은 복합적인 혼합물을 주조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은 반자연적이지만 동시에 위생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스틱은 촉감의 인간적인 본성을 파괴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스틱은 만질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부드러움을 파괴한다.”

“그것은 이제 촉감이 주는 즐거움과는 무관한 것이다. 게다가 이 장난감들은 매우 빨리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한 번 사라지면 아이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진다.”


물론 여기서 롤랑 바르트는 플라스틱 장난감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나무 장난감들을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펀 호! 장난감 박물관에서 내가 보았던 납과 알루미늄으로 만든 장난감 자동차들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펀 호! 장난감 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옛날의 장난감 자동차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으로 겨우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얼마 되지 않는 관람객들 가운데 아이들보다는 나이든 어른들이 더 많은 것으로 봐서는 그 노력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지 의문이다.

자동차 박물관, 부활하는 구식 자동차

하지만 여행 닷새째 되는 날, 웰링턴으로 향하는 길에 들렀던 '사우쓰워드 자동차 박물관(Southward Car Museum)'은 자동차라는 같은 품목을 전시하고 있었지만 펀 호! 장난감 박물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우선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부터가 달랐다. 잉글우드 시내의 번잡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펀 호! 장난감 박물관과는 달리, 사우쓰워드 자동차 박물관은 웰링턴으로 이어지는 1번 고속도로상의 작은 마을 파라파라우무(Paraparaumu) 근처의 넓은 벌판에 세워져 있었다. 전시장의 규모도 1500평 가까이 되어 펀 호! 장난감 박물관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 사우쓰워드 자동차 박물관 내부 전경
ⓒ2004 정철용
남반구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수의 차들을 전시하고 있는 자동차 박물관이라는 안내 책자의 설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사우쓰워드 자동차 박물관은 우선 그 규모로 우리를 압도했다.

구식 자동차 수집광이었던 렌 사우쓰워드경이 1956년부터 사 모은 자동차들을 내놓아 1979년에 문을 연 이 자동차 박물관에서 우리는 정말 다양하고도 이색적인 온갖 자동차들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었다.

▲ 미래형 자동차처럼 생긴 1949년 미국산 자동차 '데이비스'
ⓒ2004 정철용
미래형 자동차처럼 유선형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데이비스'라는 이름의 자동차는 놀랍게도 1949년 미국산이었다. 게다가 바퀴가 3개인 삼륜차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트루만 대통령의 취임 행렬에 이 삼륜차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헤드램프가 달린 1911년산 캐딜락
ⓒ2004 정철용
지금은 거리에서 전혀 볼 수 없는 1911년에 생산된 캐딜락도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그 자동차 앞에는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헤드램프가 붙어 있었다. 어두운 밤길을 달릴 때에는 그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촛불을 끼워놓도록 되어 있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 매우 요란스럽게 장식한 지프 버스
ⓒ2004 정철용
그런가 하면 지금도 필리핀의 마닐라 시가지를 질주하고 있는, 매우 요란스럽게 장식한 지프 버스도 눈에 띄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며 아마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에 들 정도로 오래된 차인 1895년식 벤츠 벨로(Benz Velo)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뛰었지만 그 세련되고 우아한 자태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인상적이었다.

▲ 1895년식 벤츠 벨로(Benz Velo). 그 우아한 자태가 인상적이다
ⓒ2004 정철용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보니, 그 해에 나온 동일 모델의 벤츠 차량은 세계에 단 두 대 뿐이라고 하는데, 이 차가 바로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이외에도 <오즈의 마법사>가 도시를 배경으로 했다면 등장했을 법한 구리로 만든 자동차, 디즈니랜드나 용인 에버랜드와 같은 테마 파크의 놀이기구에서 막 떼어내 옮겨 놓은 듯한 코믹한 모양의 작은 자동차들도 있었다.

▲ 구리로 만든 자동차
ⓒ2004 정철용
안내 책자에 따르면, 약 250여 대의 옛날 차량들이 이 자동차 박물관에 있는데, 그 자동차들마다 붙어있는 안내판을 꼼꼼히 읽어가며 다 둘러보려면 한두 시간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우리는 폐장 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눈에 띄는 이색적인 모양의 차들만 자세히 구경하고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세기도 안 되어 벌써 박물관 신세를 지게 된 자동차들은 장난감 박물관에서 보았던 장난감 차들과는 달리 순장이라기보다는 부활에 가까워 보였다. 그들은 폐기처분을 앞둔 고물 자동차가 아니라 고가의 골동품이었다. 기름을 넣어주고 시동을 걸면 아직도 그들의 엔진은 생생한 육성을 내지르며 도로를 달릴 것처럼 보였다.

이쯤에서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다시 인용해보자.

“나는 자동차가 오늘날 거대한 고딕 성당들의 매우 정확한 등가물이라고 생각한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이 자동차에 열광하고, 대중 전체는 자동차를 사용가치가 아니라 이미지로서 소비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마술적인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자동차의 계기판은 발전기라기보다는 현대적 주방의 작업대와 닮아 있다. 희끄무레하고 물결무늬 차체의 얄팍한 덧문, 우수한 작은 기어, 매우 단순한 표식, 니켈 도금의 은은함 등. 이것들은 모두 운동에 대해 실행되는 일종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통제를 속도의 기록갱신이라기보다는 안락함으로서 이해한다. 우리들은 분명히 속도의 연금술로부터 드라이버의 식도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 떼를 지어 들이닥치는 관광객들이 중세의 고딕 성당들에게 경배를 드리듯이,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동차에게 일상의 경배를 드리고 있다. 도처에 넘쳐나는 자동차의 이미지 앞에서 오래된 구식 자동차들은 그 원본을 주장하며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또한 이제 어른이 된 우리는 엔진이 없는 장난감 차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조차 일찌감치 장난감 차를 내팽개치고, 전자오락실에서 자동차 핸들을 잡거나 TV나 컴퓨터 모니터 화면 위를 달리는 시뮬레이트된 자동차 운전을 더 선호한다. 자동차는 이미 너무 깊숙이 우리 삶에 침투해서 엔진이나 전기의 동력을 받지 않는 장난감 자동차는 이제 너무 시시한 것이 돼 버렸다.

어릴 적 놀이의 연금술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자동차는 위험해 보였지만, 자동차 박물관에 웅크리고 있는 그 많은 자동차들은 죽은 듯이 숨을 삼킨 채, 뒤늦게 입장한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오래된 내부를 공개하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나면 그 중의 하나는 전시장을 박차고 나가 도로를 달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련
기사
'펀 호! 장난감 박물관'과 '사우쓰워드 자동차 박물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 웹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www.funho.com
- www.southward.org.nz

Posted by 동봉
,

사람이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
뉴질랜드 여행기(1) : 타라나키 여행 첫날에 만난 두 사람
정철용(ccypoet) 기자
▲ 타라나키 지역 지도
ⓒ2004 taranakinz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인구 120만의 오클랜드이지만 수도는 그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인구 40만의 웰링턴이다. 뉴질랜드 북섬의 북쪽과 남쪽 끝에 각각 자리잡고 있는 이 두 도시를 잇는 일직선을 그어보자.

그 왼편에 마치 옆에서 본 젊은 여성의 유방처럼 봉긋한 가슴을 내밀고 있는 땅덩어리가 눈에 띈다. 이 땅이 바로 그 중심에 원추형으로 솟아 있는 신성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타라나키(Taranaki)' 지역이다.

타라나키는 뉴질랜드 최고의 치즈가 생산되는 '젖의 땅'이며, 그 앞바다에서는 '산업의 젖'이라고 할 천연가스와 석유가 생산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촬영 현장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아 뉴질랜드 관광수입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다. 이래저래 타라나키는 땅덩어리의 생김새처럼, 뉴질랜드를 먹여 살리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기 이전부터 타라나키 지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매우 유서 깊은 땅이었다. 14세기에 마오리족들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원정을 통해 이곳에 이주해서 정착하기 이전부터 타라나키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가을이 한층 무르익어가던 지난 4월 중순, 2주간의 방학을 맞은 딸아이와 아내와 함께 타라나키 지역을 여행하려고 계획한 것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ㆍ문화적 흔적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7박 8일간의 넉넉한 일정은 타라나키의 아래쪽인 왕가누이(Wanganui) 지역과 수도 웰링턴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 북섬의 남동쪽 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가도 몇 군데 들를 수 있을 터이다. 자, 이제 떠나자.

버려진 욕조? 아니, 양들의 물통!

아침 9시에 오클랜드를 출발한 차는 해밀턴을 지나면서 1번 고속도로를 버리고 3번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조수석에 탄 아내는 차가 3번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홀가분한 듯 지도책을 접는다. 이제 3번을 타고 쭉 달리면 되는 것이다.

점심 먹을 기착지로 예정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모카우(Mokau)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예정보다 30분이 앞서고 있다. 모카우는 뱅어(whitebait)로 유명하다고 해서 나는 뱅어 버거를, 아내는 뱅어 튀김을 주문해서 먹는다. 음식에 관한 한 전혀 도전적이지 않은 딸아이는 한 번 먹어보라는 우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에 맞는 하와이안 버거를 고집한다.

하지만 접시에 담겨 식탁에 나온 음식을 본 아내는 이내 후회한다. 작은 멸치만한 흰 뱅어를 통째로 넣어 만든 탓에 까만 뱅어의 눈알이 그대로 보여 아내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다.

나는 조금 입에 대다가 남긴 아내의 뱅어 튀김을 마저 해치우고 대신 얼마 남지 않은 내 뱅어 버거를 아내의 손에 쥐어준다.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다.

부실한 흰 뱅어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우리는 20여분을 더 달려 해안가에 '하얀 절벽(whitecliff)'과 '세 자매(Three Sisters)'라고 불리는 기암괴석이 있다는 통아포루투(Taongaporutu)에 닿는다. 안내 책에 나온대로 비포장 길을 타고 꺾어져 들어가니 목책의 나무문이 닫힌 채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 절벽 위에 억새의 은색 머리카락들이 흩날리고 있다
ⓒ2004 정철용
'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되는 모양이구나.' 우리는 차를 그 앞에 세워두고 마른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길을 걸어간다. 왼쪽으로는 여름 폭염에 시든 풀밭 위에 양들이 점점이 흩어져 풀을 뜯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태즈만해를 배경으로 절벽에 억새들이 부스스한 은색의 머리카락들을 휘날리고 있다.

얼마쯤 걸어가니 풀밭에 버려진 욕조가 있다. 누가 처분하기 골치 아픈 이 쓰레기를 여기에 내다버린 모양이구나.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다 보니 욕조 하나가 또 풀밭에 버려져 있다.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가 본다. 물이 가득 차 있다. 아, 이건 양떼들이 목을 축이는 물통이로구나. 나는 비로소 풀밭에 놓여 있는 욕조의 쓰임새를 깨닫는다.

▲ 이 욕조는 버려진 쓰레기가 아니라 양들이 목을 축이는 물통이다
ⓒ2004 정철용
그렇게 여기저기 참견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면 멀리 달아나는 양들도 불러보면서 한가롭게 그 시골길을 걷는다. 구름이 많이 끼어서 걷기에 딱 좋았고 길 양쪽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로워서 예상치 못했던 이 시골길 산책이 몹시 즐겁다. 딸아이도 즐거운지 앞서서 언덕길을 오른다.

그러나 40여분을 걸어도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절벽은 가까워지지 않고 마침내 딸아이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길은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면서 좀처럼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거 내가 길을 잘못 들은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생각해서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한다.

한 사진작가의 아름다운 유턴

▲ 언덕이 진 비포장 흙길을 딸아이는 처음에는 앞서서 걸었다
ⓒ2004 정철용
갔던 길을 다시 돌아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온다. 아니, 이 길이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나?!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눈에서 헛수고를 한 것에 대한 힐난이 느껴진다. 마침내 목책 나무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승용차 한 대가 멈추어 있고 백인 여자 한 명이 내려서 나무문을 밀어서 열고 있다.

다가가서 그 여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나무문은 방목하는 양떼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닫아놓은 것이지,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하여 잠가놓은 것이 아니란다. 이런, 그것도 모르고 쓸데없이 1시간 20분을 허비했으니 기가 막혔다.

▲ 목책의 나무문은 방목하는 양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닫혀 있는 것이다
ⓒ2004 정철용
그런 우리의 표정을 읽은 여자가, 저 끝까지 걸어서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며 멀리서 '하얀 절벽'만 힐끗 보고 '세 자매' 바위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세 자매' 바위는 여기서 멀지 않다면서,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준다.

그녀의 설명에 내가 한두 번 '뭐라고요(Pardon)?'라고 되묻자, 그녀는 자신을 따라 오라면서 차를 돌린다. 그것은 아름다운 유턴이었다. 따스한 유턴이었다. 영어가 서툰 우리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까봐, 그녀는 직접 자신이 나서서 그 길까지 우리를 안내하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그 지역에 사는 사진작가였다. 그날 구름이 많이 끼어 일몰이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되어 절벽 끝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와준 그녀의 친절이 너무나 고마워서 우리는 캔 음료수 한 개와 오렌지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랬더니 그녀는 정색을 하고,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라며 사양을 한다. 그래도 그렇게 주고 싶은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마지못해 우리의 작은 사례를 받아든다. '세 자매' 바위가 있는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에서 헤어지면서도 그녀는, 지금 밀물이 들어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당신은 최고의 가이드!

조금씩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바닷가에 불쑥 솟아있는 '세 자매' 바위들도 그저 평범한 바위일 뿐 별게 아니었다. 그나마 그 중의 하나는 작년에 무너져내려 키가 아주 작아져서, '세 자매'가 아니라 '두 어른과 한 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했다.

▲ 가운데 서 있는 바위는 세 자매중의 하나가 아니라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는 아이처럼 보인다.
ⓒ2004 정철용
가벼운 실망을 안고 돌아서려는데 저쪽 바닷가에서 조금 퉁퉁한 아줌마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우리가 멀리서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우리가 오클랜드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녀는 "어떻게 그런 복잡한 대도시에서 살 수 있느냐?"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반가운 듯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있는 별장에서 머물면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그녀는 '세 자매' 바위보다 해식 동굴에 새겨진 마오리 암각화가 더 볼만하다며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 상륙한 마오리족들이 새겨놓은 것인데, 특히 여섯 개의 발가락이 달린 발 그림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여섯 대의 카누가 이곳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당시 마오리족들이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밀려들기 시작한 바닷물 때문에 천정에 그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해식동굴 안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그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아줌마와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아내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직접 해식동굴 앞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 그 아줌마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최고의 가이드예요"라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오라고 말한다.

▲ 전망 포인트에서 본 세 자매 바위의 뒤로 정상에 만년설이 덮힌 타라나키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2004 정철용
'하얀 절벽'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 자매' 바위보다도 더 유명한 고대 마오리족들이 새긴 암각화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기 전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0분. 예정보다 1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중간에 보고가려고 했던 우루티(Uruti)의 '사무라이 빌리지'를 건너뛰기로 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촬영 장소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자주 들른다는 그 곳을 우리는 생략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

이렇게 우리의 여행은 첫날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 준 친절한 사진작가와 가이드 뺨치게 설명을 해 준 수다스러운 아줌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렇다. 여행이 어찌 보고 즐기는 것이 전부일 것인가. 멋진 풍경과 근사하게 꾸며놓은 관광지보다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예상치 못한 친절과 대화가 오히려 더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미리 예약해 놓은 잉글우드(Inglewood)의 모텔로 향하는 우리의 길은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부푼 기대에 내 마음은 헤드라이트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관련
기사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