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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단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강행군의 연속이라면 그 즐거움은 분명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럴 경우, 흥미로운 볼거리와 신나는 체험을 아무리 많이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시간에 쫓겨 충분히 보고 즐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휴식과 여유 있는 일정은 기억에 오래 남는 즐거운 여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여행길 휴식, 공원 산책 하지만 모처럼 떠난 여행길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부린답시고 숙소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낯선 거리로 나서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기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랬다가는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느라고 오히려 더욱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이럴 때 공원 산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특히 뉴질랜드에는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마을에조차도 공원 한두 개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어서 공원 산책은 여행 중에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휴식의 방법이 된다.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다보면 오랜 운전과 관광명소 순례로 지친 몸과 마음이 가볍게 풀어진다. 더군다나 뉴질랜드의 공원들은 대개 입장료가 없으며 어디를 가나 갖가지 꽃들로 장식한 화단과 넓고 푸른 잔디밭 그리고 울창한 나무들로 잘 가꾸어져 있어서 공원 산책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는 몹시도 즐거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잘 가꾸어진 공원들은 아예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되기까지 한다.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 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이번 여행길에서, 7박 8일이라는 다소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내가 지치지 않고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행 중에 틈틈이 즐긴 공원 산책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곳을 지금 떠올리자니 문득 박인환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아름다운 노래 '세월이 가면'이 생각난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라는 노랫말처럼, 그 두 공원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호수와 가을빛이 한창인 단풍과 가로등 옆 벤치에 쌓인 낙엽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름날의 호숫가,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 여행 4일째 되는 날, 팡가누이 강을 옆에 끼고 험한 비포장도로를 잔뜩 긴장하면서 달려 도착한 아담한 도시 왕가누이에서 전망대와 미술관, 시내 도심 거리를 오후 내내 걸으면서 구경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예약해 놓은 모텔로 직행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는 도시의 북쪽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버지니아 호수(Virginia Lake) 공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호수 가운데 설치해 놓은 분수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비추기 때문에 몹시 볼만하다고 여행안내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윈터 가든 내부의 곳곳에 놓여 있는 다양한 정원 장식물과 이색적인 조각 작품들에 힘입어, 활짝 피어난 갖가지 꽃들의 표정이 더욱 풍부하게 다가왔다. 그 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자니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반쯤 풀리는 듯했다.
아내와 딸아이는 계속 쫓아오는 오리들을 어쩌지 못해 뒤처지고 어느덧 나는 혼자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가을인데도 아직 싱싱한 초록의 잎사귀들을 지닌 나무들이 어두워지는 호수의 수면 위에 선명하게 떠오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채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6시를 조금 넘기자 드디어 분수가 높게 솟구치고 있는 가운데 조명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아빠 손잡고 산책 나온 몇몇 꼬마들이 탄성을 질렀지만 나는 별로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나무의 그림자가 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왕가누이의 버지니아 호수 공원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가을을 우리는 마스터톤(Masterton)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Queen Elizabeth II Park)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반환점인 웰링턴을 돌아 다시 오클랜드를 향하여 북상하던 여행 7일째의 날이었다. 마스터톤은 이렇다할 볼거리가 전혀 없는 평범하고 한가로운 농촌 지역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나는 운전에 지쳐 잠깐 그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잠깐'은 1시간을 넘길 정도로 지체되고 말았다. 마스터톤의 퀸 엘리자베스 2세 공원에서 우리가 마주친 가을 풍경 탓이었다.
오클랜드는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고 눈 한 송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해양성 기후여서 그런지, 가을에도 좀처럼 단풍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몇 차례 이곳에서 가을을 맞았어도 가을빛 흠씬 묻어나는 곱게 물든 단풍잎을 아내는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맑은 햇빛 속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싱싱한 초록에서 불타는 듯한 빨강으로 그리고 다시 아련한 노랑으로 건너가는 저 색채의 향연에는 아내와 내가 두고 온 고국의 산하가 숨어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 찬란한 가을빛이 지금 여기 낯선 나라 낯선 땅에서 이렇게 폭발하고 있구나!
나무로 견고하게 만든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띄었다. 성채처럼 쌓아올린 그 놀이터의 나무 벽에는 '키즈 오운 플레이그라운드(Kids Own Playground)'라고 적혀 있었다. 놀이터야 어디서나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데, 새삼스럽게 '어린이 전용 놀이터'라니!
그들은 조금씩 아껴 모은 자신의 돈을 자신들이 신나게 뛰어 놀 어린이 놀이터를 만드는데 기꺼이 기부금으로 낸 것이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아이들이 이 놀이터를 소유하고 있는(Kids Own Playground)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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