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8 편)

(2006` 6, 17 ~ 6, 25)

야간열차서 또 흥겨운 술판

우리는 침대칸이 아닌 우등좌석 칸에 올랐다. 빈 좌석이 많아 끼리끼리 앉을 수 있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친구는 아무도 없다. 10명이 앉은 좌석은 이내 시끄러워졌다. 술판이 벌어졌으니깐. 두 시간이란 시간은 흥겨운 술자리 때문에 언제 흘러갔는지 몰랐다. 신강성 하밀 역엔 새벽 1시 10분쯤 닿았다. 우루무치에서의 그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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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에서 유원역으로 가는 길에 사막을 다시 찍어봤다. 지평선 뒤엔 푸른 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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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자라는 나무에도 열매가 열렸다. 나무 이름은 가이드조차 몰랐다.)

가격달빈관(加格達賓館)이라는 호텔에서 여정을 푼 시간은 거의 새벽 2시가 지났다. 우리 룸은 반지하다. 1층이라고 했는데, 막상 찾아가니 아니었다. 샤워 룸에 들어갔더니 구역질이 바쳐왔다. 반 지하라 하수구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썩는 냄새가 역류해 올라온 듯했다. 도저히 샤워를 할 수 없어 되돌아 나와 버렸다.

마침 가이드 장진영양이 룸을 체크하려고 들렸다. 그만 고함이 터지고 말았다. “일류 여행사가 이런 대접할 수 있느냐?”고 속사포로 쏘아붙였다. 가이드 장양의 무참했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저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면서. 바로 후회막급이란 것 느꼈다. “왜 좀 더 신중하지 못했느냐?”고 스스로를 꾸짖고 또 꾸짖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 아니라 평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눕기만 하면 5분 내에 잠이 들고 마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 날이 또 밝았다. 난 간단히 세수만 했다. 룸메이트 권 부장과 산책을 나왔다. 나와 보니 홍 단장도 어쩐 일인지 일찍 나와서 서성였다. 홍 단장은 어느 여행에서든 시간 맞춰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다. 오늘은 일어날 시간을 잘 못 계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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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달빈관 옆에 있는조그마한 인공호수. 가지가 늘어진 버드나무와 이름모를 꽃이 피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침이면 주민들이 나와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한다. 부채춤으로 몸을 단련하는 이곳 부인들의 모습.)

식당 오픈시간이 40분가량 남았다. 덕택에 우린 함께 이른 아침 호텔주변 시가지를 산책할 수 있었다. 가로수가 싱싱했다.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가로수엔 땅 속으로 연결된 호스를 통해 마침 물이 공급되는 중이었다. 사막지방 오아시스에도 이 같은 많은 량의 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하미과’로 이름난 하밀에서

하밀(哈密: Hami)에서는 오전 일정을 보냈다. 하밀은 인구 50만의 큰 도시다. 이곳 특산물 ‘하미과(哈密瓜)’로 더 유명해졌다. 청(淸)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을 순시하면서 더위에 목이 말랐을 때 호박같이 생긴 과일을 먹어봤다. 당도가 높고 사각사각하는 맛이 일품이었다. 껍질은 누르스름하나 속은 약간 불그스름한 빛을 띤 누른색 과일이다. 황제는 못생겼어도 그 맛에 반해 ‘하미과’란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하미과’는 참외와 멜론을 합친 모양과 맛을 가졌다. 길거리에서는 리어카나 삼륜오토바이 짐칸에 이 과일을 가득 싣고 파는 위구르 상인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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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의 하미왕국 왕릉. 모스크식으로 만든 무덤이다. 갖가지 타일을 외벽에 붙여 치장했다.)

우선 회 왕릉을 봤다. 회족(回族)은 1697년부터 1930년까지 하미왕국을 세워 9대(九代)를 이어오며 이 지역을 통치했다. 이 왕릉은 1840년 왕과 왕비를 묻은 높이 25m의 모스크로 만든 이슬람식 무덤이다. 모스크 안쪽엔 이슬람 전통양식 ‘복숭아 모양 봉분’을 한 대리석 관이 놓였다. 그 위에는 색색의 천이 덮였고. 모스크 안과 바깥은 여러 색깔 여러 모양의 타일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뽐냈다. 모스크 앞에는 나무로 만든 3층 건물형태의 대형 탑을 세운 건물이 버티어 왕실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화려하거나 웅장한 건물이 아님은 물론이다. 국력에 맞추어 검소함이 베어나는 듯한 왕릉이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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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3층 건물의 대형 탑 전경. 벽은 흰 회로 발랐고, 나무는 단청도 올리지 않았다. 문살과 창살무늬가 살가와 눈길을 끈다.)

퍽 재미있는 사실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 탈곡기와 베틀을 부장품으로 묻었다는 점이다. 팔찌 ․ 목걸이 ․ 귀걸이 등 귀중품을 부장하지 않고 왜 탈곡기와 베틀을 묻었을까? 황량한 사막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대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농사를 지어 먹을 거리를 마련해야했고, 베를 짜 옷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왕이나 왕비도 예외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백성들에게 의식(衣食)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려는 의도도 물론 포함되었으리라. 그들의 내세관은 극한 상황에서 생존이 무엇보다 우선시됐다는 강한 느낌을 받고 안쓰러움조차 일었다.


풍식작용이 빚은 ‘모래예술’

일행은 서둘러 마귀성이란 곳으로 떠났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사막 속으로 빠져든다. 달려도 끝도 없다. 조그마한 오아시스마을을 지난다. 사막의 황토와 모래를 섞은 흙벽돌로 지은 포도 건조장 건물이 죽 늘어섰다. 이 일대 오아시스에는 어느 곳 없이 포도농사가 주업임을 반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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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흙을 이긴 벽돌로 만든 포도 건조장. 사방 벽채는 격자형 창살처럼 바람이 잘 통하도록 뚫어놓았다.)

마귀 성 입구다. 조잡하고, 엉성하고, 생뚱맞은 마귀를 닮은 건물 몇 동이 길을 막는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곧장 또 사막 길을 달린다. 황량한 사막을 얼마나 달렸을까? 도로 양편 모래벌판에 물개, 공작새, 곰, 사자, 사람 등 갖가지 형상을 한 흙덩인지 돌덩인지 모를 것들이 버섯처럼 돋아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런 길을 또 한참이나 달린다. 마귀성이란 곳에 닿았다. 퇴적층 붉은 색깔을 띤 사암으로 이뤄진 산줄기가 70만년의 풍상을 거치면서 풍식(風蝕)작용에 의해 갖가지 멋진 조각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즉 풍식이 빚어낸 거대한 ‘모래예술’이라고나 할까? 절로 탄성이 쏟아진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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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 사암이 수십 만년 풍상을 겪으면서 깎이고 깎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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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성 가장 높은 바위 산에 올라 둘러본 모래평원.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들이 점점이 솟아있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이 거대한 조각 작품이 모래바람을 맞으면 여러 가지 괴성을 내뱉는다는 점이다. 사암덩이 산이 오랜 기간 곳곳에 풍식으로 닳고 깎여졌기에 바람에 날린 모래가 그곳에 부딪치면서 맴돌아 지나가니 소리를 낼 수밖엔. 괴상한 모양의 바위덩이 산들이 모래평원 위에 솟아있다. ‘회음곡(回音谷)’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바위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아쉬웠다. 모래바람이 불어주었더라면 그 귀신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이 이는 밤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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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이 가장 높은 바위 산에 올랐다가 모래 계곡으로 내려가는 장면. 오를 때는 가파른데다 발을 디다면모래가 밀리는 바람에 무척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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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음곡'이라는 표지판이 꽂힌 바위 산.)

햇볕이 강하게 쏟아졌지만 일행은 모래계곡과 언덕을 거쳐 가장 높은 바위덩이 위에 힘들게 올랐다. 주위가 확 트였다. 그 넓은 주변을 두루 살폈다. 장관이다. 모래 구릉은 끝없이 펼쳐졌고, 갖가지 형상의 바위덩이는 점점이 솟아있다. 마치 바다 위에 점점이 솟은 삐죽삐죽한 돌산이나 돛단배와 흡사했다. 이정길 사장과 곽청언 사장은 이들 바위산을 다람쥐처럼 뛰어 건너다니면서 호기심을 잠재웠다.


‘마귀성’ 갖가지 바위에 탄성

중국이란 땅덩이가 얼마나 넓은지, 이 풍식지형은 1990년대 후반에야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곳은 2001년부터 관광지 개발에 착수해 사업을 진행 중이다. 버스주차장엔 아무 편의시설이 없다. 단지 짚으로 엮어 햇볕을 가려주는 우산 모양의 조그마한 원두막 몇 개가 고작이다. 또 한편엔 천정도 없이 남녀 칸막이만 겨우 갈라놓은 모래담의 노천화장실이 있을 뿐이다. 대변은 그대로 햇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파리가 들끓고 악취가 풍겼다. 이 황량한 모래벌판에 파리가 서식한다니 의아했다. 중국인들은 머잖아 이곳을 멋진 관광지로 만들어 돈벌이에 안간힘을 쏟을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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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성의 유일한 편의시설의 하나인원두막. 천장을 짚으로 덮어 그나마 정겹게 느껴졌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왔다. 하밀과 선선(膳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삼도령(三道岭)이란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때만 되면 일행이 많아 세 테이블로 나뉜다. 우리 팀 열 명은 언제나 한 테이블에 앉는다. 점심과 저녁 매 끼니마다 맥주 한 컵이 기본으로 주어진다. 한 테이블 당 두 병이 나오면 적은 컵에 한 잔씩 돌아간다. 우리 테이블엔 꼭 세 병이 나온다. 여성 두 분을 빼곤 모두 술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두 병이 올랐으나 먹다가 보니깐 다섯 병까지도 마셨다. 그 후 가이드가 아예 세 병을 기본으로 맞춰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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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평원에도 움푹 꺼진큰 함지박같은 곳이 있다. 바람이 어떻게 불었길래 이곳 모래만 날려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늘 많은 량을 마셔대고 목소리가 크니깐 다른 두 테이블의 일행에게 밉상보일 수밖엔. 이 날은 맥주 다섯 병을 추가해 더 마셨다. 추가 술값은 물론 홍 단장이 계산했고. 이곳 삼도령에서 선선(膳善: 샨샨)까지는 세 시간 버스를 타야했다. 다른 테이블의 일행들은 “노인들이 저렇게 맥주를 마셔놓고 소변이 마려워 어쩔 건가?”라는 눈치들이 역력했다. 우린 단체행동에 지장을 줄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장시간을 잘 버텨내면서 목적지 선선에 닿았다.


붉은 색 ‘쿠무타크’, 미의 극치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 사막은 선선시내와 붙었다. 사막과는 키 큰 포플러나무 숲이 경계선을 이뤘다. 시가지에서 불과 300m도 떨어지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역시 철저한 장사꾼이다. 이 사막에 모래조각을, 그리고 사막으로 가는 통로에 나무판으로 깐 길을 만들어놓곤 입장료를 받았다. 뿐만 아니다. 모래구릉지대를 달릴 수 있는 특수차량을 배치해두곤 엄청나게 비싼 요금을 받아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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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무타크 사막에서 조금 떨어진 산야지대. 모래밭엔 낙타풀이 드문드문 보인다. 뒷편엔 높은 산의 연봉이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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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무타크 사막 안내판. 붉은 모래가 쌓인 산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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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무타크 사막은 선선 시내와 붙어있다.포풀러 숲이 바로 경계선이다. 담장을 둘러 돈을 내지 않고는 전경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사막의 모래 또한 너무 보드라웠다. 색깔은 명사산 모래보다 더 붉은 빛깔을 띠었다. 색깔이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에 여느 사막보다도 아름다웠다. 모래언덕 높이는 명사산 보담 낮으면서 많은 구릉으로 이어졌다. 강한 태양 볕을 흡수한 모래는 얼마나 달구어졌는지 오후 4시가 지났는데도 그 복사열로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타올랐다. 중국 여성 몇 명이 파라솔 아래 모래찜질하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한데 차라리 모래찜질이라도 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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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무타크 사막의 전경. 나무로 깐 길이 허옇게 보인다. 사막 위쪽엔 양산으로 그늘을 만들어 놓고 모래찜질을 하고있다.)

이 뜨거운 모래벌판에도 ‘로우타우차우’라 불리는 낙타풀이 듬성듬성 자라나 꽃을 피어냈다. 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인 이 풀은 날카로운 가시가 숭숭 돋아나있다. 이 가시 때문에 양떼도 먹을 수 없다. 단지 낙타만이 이 풀을 먹는다. 낙타도 이 풀을 먹을 땐 주둥이와 입안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든다고 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마구 찌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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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풀.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잎보다는 가시가 더 많은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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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만든 조각작품들. 인어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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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바닥이 마치 물결 모양을 하고있다. 칼날같은 능선을 바람의 속도와 풍향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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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땡볕과 지열 속에 모래조각품을 만드는 작가들. 물을 뿌려 반죽하면서 작업을 했다.)

나무판을 깔아놓은 길을 아마 2km 이상이 될듯했다. 그 뜨거운 기온 속에도 모래조각 작품을 만드느라 땀 흘리는 작가도 보였다. 낙타를 몰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을 조각 중이었다. 긴 호수로 물을 옮겨와 뿌려가면서 작업했다. 어떤 작품은 너비 40 ~ 50m, 높이 20m나 되는 대형도 보인다. ‘서유기’ 주인공 모습, 삼국지 주인공 등 역사속의 인물들이 그려졌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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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보다 낮은 땅 '아이딩호'를 가다
[실크로드 여행기 ⑧]
최성수(borisogol) 기자
▲ 애딩호 가는 길의 폐허가 된 인가. 사막의 상처처럼 남아있는 풍경
ⓒ 최성수

트루판은 뜨겁다 못해 몸이 온통 익어 가는 것처럼 덥다. 그늘만 들어서면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습도가 낮기는 했지만, 오히려 타클라마칸 사막보다도 높은 온도라 정신이 없을 정도다.

더위뿐만 아니라 몸이 지친 탓도 있을 것이다. 밤중에 카슈카르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루무치에 도착했고, 다음날 다시 아침부터 잠을 설치며 버스로 트루판으로 이동한 탓이리라.

트루판, 화주(火州)라는 다른 이름이 있을 정도로 온도가 높은 곳이다. 두 번째 트루판 방문이다. 트루판 시내에 내리면서 나는 인간의 판단이란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를 생각했다.

몇 해 전 처음 트루판을 방문했던 기억은 이렇게 덥지 않았다. 공기도 상쾌하고 느낌도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리자마자 혹독한 더위다.왜일까? 곰곰 생각하다 지난 여행 때 트루판에 도착하는 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일 년에 겨우 20mm 남짓 내린다는 비가 그날 아침에 내렸다. 그리고 사막에는 홍수가 지고, 트푸판은 상쾌했다. 그 첫 여행의 기온이 오히려 특별한 것이었다. 본래 진면목이 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트루판은 더위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다.

아이딩호(艾丁湖) 가는 길

▲ 자동차가 지나간 길에도 소금꽃이 피어 날리는 애딩호 가는 길
ⓒ 최성수

포도 덩굴이 가로수를 이룬 길을 지나 트루판 빈관에 여장을 풀고, 나서기 힘든 몸을 마음이 끌고 길을 떠난다.

아이딩호를 향해 출발이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아이딩호를 넣자는 내 말에 여행사에서 난색이었다. 관광지도 아니고, 가겠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가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볼 게 없어도 좋으니 무조건 가겠다고 우겼다. 몇 차례 옥신각신 끝에 일정에 넣기는 했는데 현지 사정에 따라 못 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왜 굳이 아이딩호를 고집했던가? 아이딩호 가는 길 내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아이딩호 가는 길이 힘들었다는 뜻이다.

아이딩호 가는 길은 인생과 같다. 처음 트루판 외곽까지는 그야말로 안온한 길이다. 눈부시게 흰 백양나무가 다른 오아시스 도시처럼 이열 종대로 길가에 늘어서 있다. 서로 어깨 겯고 단 한 점의 모래 먼지도 허용할 수 없다는 늠름한 자세로 서있는 백양나무는 아름다움을 넘어 당당함까지 갖추고 있다.

길가로는 수로가 이어져 있고, 그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그 물은 천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중국 3대 공정의 하나(만리장성, 경강대운하)인 카얼징이 물의 원천이다.

트루판의 중심은 해발 -60m라고 한다. 천산의 아득한 높이와 트루판의 낮은 해발 차이를 이용해 만년설 녹은 물을 지하 수로로 이곳으로 흐르게 만든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힘으로 지하 수로를 뚫었는데 그 총 길이가 5000㎞에 이른다니 규모도 놀랍거니와 그런 일을 한 의도가 무섭기까지 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만들면서 세상을 떴을까?

트루판은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의 물로 이루어진 인공 오아시스다. 풍부한 물로 주로 포도를 생산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포도가 나는 곳이기도 하다. 밤낮의 일교차가 크고, 사막이라 벌레도 드무니 좋은 포도가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 트루판 교외의 수로에서 설거지 하는 아이들. 수로가 오아시스의 삶을 가능케 한다.
ⓒ 최성수

트루판이 돌궐어로 ‘풍요로운 땅’이라는 말이라는데 그 뜻대로 트루판은 물도 풍부하고 과일도 풍부하다. 도시 곳곳이 포도 덩굴이고, 목화밭이고, 옥수수 밭이다. 밀밭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풍요로움은 거기까지다. 도시를 벗어나 무한정 이어진 사막 길에는 풍요와 대조되는 황무지만 존재한다. 황무지로 한없이 달려가는 길이 바로 아이딩호 가는 길이다.

봉고차 비슷한 지프는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후끈후끈한데, 햇살을 가릴 가림 판 하나 없어 우산을 펼쳐 써야 겨우 숨을 쉴 만하다. 차를 타기 전에 산 얼음 생수로 연신 얼굴과 팔에 문지르며 가는 아이딩호 길은 정말숨막히는 아득한 길이다.

가도가도 끝을 알 수 없는 황무지, 낙타 풀만 등성 듬성 돋아나 있고, 폐허가 되어버린 옛 마을들이 군데군데 상처처럼 남아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은 굴곡이 심해 붕 떴다 떨어지는 것이 몇 초마다 이어지는데 길 위로도 소금이 햇살에 말라가고 있다. 앞차가 일으키는 먼지조차 하얀 소금 먼지 같은 아이딩호 가는 길, 그 길을 몇 시간 달리다보면 자신이 그대로 사막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아득함이 절로 가슴을 짓누른다.

아이딩호,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땅

▲ 해발 -154미터의 애딩호 표지석. 중국에서 가장 낮은 땅, 그곳은 온통 지열의 열기로 가득하다.
ⓒ 최성수

좀처럼 닿을 것 같지 않던 아이딩호에 마침내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도 호수는 없다. 이름만 호수이고 물은 보이지 않는 곳, 해발 -154m의 아이딩호는 위구르어로 달빛의 호수라는 뜻이다.

차에서 내리자, 그래도 차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겁다. 이미 저녁 무렵이 다 되었지만 오히려 더위는 더 심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몸 아래부터 서서히 불에 달구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호수 입구에 작은 웅덩이를 파 놓고, 트루판 사람 여럿이 목욕을 한다. 물을 만져보니 제법 따끈하다. 염수욕이란다. 짠 호수의 물을 이용해 목욕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환한 미소가 번진다.

호수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들어갈수록 땅이 무르다. 앞서 가던 아내가 갑자기 발을 푹 꺾는다. 뻘밭에 발이 빠진 때문이다. 더 이상 진입 불가다. 하긴 더 가봐야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한 저 끝으로 흰 호수가 바라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흰 호수도 물이 아니다. 소금이다. 쨍쨍한 햇살에 물은 말라버리고, 소금만 남아 제 몸을 말리고 있는 것이다. 신기루처럼 눈앞에 소금밭만 아득하다.

▲ 아득히 흰 소금만 제 몸 말리는 애딩호. 겨울이면 호수로 차가 들어가 소금 덩어리를 캐 온단다.
ⓒ 최성수

호수에서 되돌아 나오는 사람들이 디딘 발자국마다 순식간에 하얗게 소금 꽃이 피어오른다. 그 소금 꽃이 그 사람이 지니고 살아온 삶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겨울이면 트럭이 호수 속으로 들어가 소금덩어리를 캐낸다는 아이딩호, 그 막막하고 숨막히는 열기 속에 내 존재의 무게조차 하얀 소금처럼 지워지는 곳, 그래서 아이딩호에서 돌아오는 길은 마음속에서 무엇이 하나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허전하고 허망하다.

툭툭 떨어져 금세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붉은 노을과 갑자기 찾아오는 어스름한 농가의 풍경들, 어둑어둑한 사막 길로 꼴을 베 싣고 돌아오는 위구르 사람들의 당나귀 마차가 마음을 아득하게 만든다. 길 한가운데 경운기 한 대가 오도 가도 못하고 서있다. 나무를 너무 많이 실어 오르막길이 힘에 부쳤나보다.

비탈길에 멈춰 선 그 경운기를 피해 버스에서 내린 길옆으로 당나귀 마차 가득 꼴을 베 오는 위구르 소녀가 눈에 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느냐고 묻자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표정을 지어준다. 마치 오래 전에 만났던 옛 이웃처럼, 그렇게 소녀의 웃음은 스스럼이 없다.

▲ 돌아오는 길, 마차 가득 꼴을 베오던 소녀가 생끗 웃어주었다. 애딩호의 웃음이 저럴까?
ⓒ 최성수

아마도 아이딩호의 모습은 그 소녀의 그 환한 웃음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막막하고 숨막히는 길 끝에 저토록 환한 웃음이 있다는 것을, 아이딩호는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교하고성, 그 시간 속의 옛 마을

트루판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포도, 그리고 교하고성이다. 달디단 포도를 먹으며 걷는 트루판의 포도 가로수 길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끝에서 만나는 교하고성(交河故城)은 쓸쓸하다.다 무너지고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금만 남은 고성의 햇살 속을 걷노라면, 교하고성의 옛날로 떠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하고성은 차사전국(車師前國)의 성이다. 차사국은 기원전 약 2세기 때의 나라다. 이천 년이 넘는 그 아득한 세월의 자취가 교하고성에는 고스란히 배어 있다.

교하란 말 그대로 두 물줄기가 서로 교차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성은 물줄기가 교차하는 사이에 섬처럼 놓여 있다. 버드나무 잎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진 성은 강물에서 무려 40m나되는 높이에 있다. 어디 한 군데도 적이 쳐들어 올 수 없도록 된 천혜의 요새다. 흙은 쌓아서 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있는 흙을 아래로 파내려 만든 성이기도 하다.

▲ 교하고성 벼랑 끝. 아득한 아랫쪽 강가에서 자란 포플러가 제 머리를 흔들며 성을 넘겨다보고 있다.
ⓒ 최성수

성 끝의 벼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높이에 절로 오금이 저린다. 강물 근처에서 자란 포플러들이 성의 아래쪽에서 바람에 한들거리는 풍경은 다 삭고 스러져 가는 성의 잔해들과 대조를 이루어 나그네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이기(李頎)의 시 <전쟁터로 떠나는 노래(古從軍行)>의 무대다. “맑은 날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저물 녘 교하 강물에 말 물을 먹인다(白日登山望烽火/黃昏飮馬傍交河)”하는 시구의 교하가 바로 여기다.

성의 내부에는 절터나 궁궐터 등이 흔적만 남아있다. 세월은 저렇게 모든 것을 자연의 일부로 돌려버린다. 고창국에 속했다가 결국은 당나라의 일부가 되어버린 차사전국의 슬픈 운명처럼, 교하고성은 제 발 아래 포플러와 포도 과원을 거느린 채, 21세기의 여름 하루를 또 그렇게 스러지고 있다.

▲ 교하고성은 차사전국의 성이다. 버들잎 모양의 땅에 만들어진 성 아래에는 강물이 교차된다. 천혜의 요새다.
ⓒ 최성수
삼장법사를 극진히 대접한 고창국왕

고창고성(高昌故城)은 고창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고창국은 당나라에게 멸망한 국문태(麴文泰)가 왕이었던 나라다. 국문태는 삼장법사 현장의 인도 구법 여행에 큰 도움을 준 왕이다. 현장은 이곳 고창국에서 열흘 정도 머물 계획이었으나, 국문태의 강요에 가까운 부탁으로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국문태는 고창국 사람 모두를 현장의 제자로 만들고, 그를 나라의 도사(導師)로 삼겠다며 떠나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국문태는 심지어 직접 시중을 들며 현장에게 식사대접하기도 했고, 설법에 나갈 때는 자신을 발판으로 밟고 올라가도록 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인도로 가야 할 현장은 결국 나흘간의 단식으로 겨우 고창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떠나는 현장을 위해 국문태는 네 명의 소년을 출가시켜 시중을 들게 했고, 왕복 20년간의 여비에 해당하는 황금 백 냥, 말 30마리, 인부 25명을 딸려 보냈으며 도중의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 현장의 무사한 인도 행을 부탁했다고 한다.

국문태가 온갖 준비를 다 해주며 현장에게 부탁한 것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고창국에 들러 3년간 설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현장은 국문태의 준비와 도움으로 인도 행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 고창고성, 현장법사를 기념하는 비문이 있는 곳. 그러나 옛 모습은 없고, 새로 쌓아놓은 것이다.
ⓒ 최성수

그러나 고창고성은 그런 옛 일을 기억조차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입구로 들어서는 곳부터 온통 장사치들로 혼잡하다. 꼬치를 구워 파느라 연기가 진동하고, 말방울을 흔들며 사라고 외치는 아이들로 정신이 없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당나귀 마차꾼이 마차를 타라고 마구 재촉이다. 걸어가기에 너무 더운 날씨 탓도 있지만 걸어가면서 볼 만한 유적조차 별로 없어 보인다. 성의 끝부분으로 가면 옛 왕궁 터와 현장법사를 기념하는 비문이 있던 자리가 나온다. 몇 해 전 왔을 때는 그 비문이 있던 곳이 비록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완전히 새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옛 정취는 없고 인공만 남아있는 것 같다.

원래 고창고성은 진흙과 버들가지, 마른 풀을 섞어 만든 벽돌로 건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 농부들이 그 성을 헐어다가 밭에 비료로 쓰면서 성이 다 무너지게 되었단다. 그런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고창고성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서 단순한 관광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돌아 나오는 길, 빈 당나귀 마차를 모는 소년 하나가 마차에 누워 휘파람을 불며 우리 곁을 스쳐간다. 저 소년은 고창고성의 슬픈 운명을 알고나 있을까?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시간, 어둑어둑해지는 트루판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사막에서의 삶과 역사를 생각한다. 모래 알갱이처럼 버성기며 사막의 일부분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유물 또한 그 사막의 모래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내 삶 또한 저런 한 줌의 먼지처럼 스러질 지도 모르는 것, 어쩌면 내가 내 삶의 전부라고 발 디디고 살아온 이 땅의 삶도 모래사막을 걷는 것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발길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것만 같다.

▲ 화염산 중턱의 낙타. 문득 내 발길도 사막을 디디듯 푹 빠지는 것 같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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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문화 탐방(4) : 투루판 가는 길

투르판 가는 길 : 우르무치에서 상하이까지 5000Km의 왕복 4차선입니다.

곡식 씨앗을 뿌리면 금방 옥토로 변할 수 있는 중국의 고비 사막, 중국이 인구가 많다고 하지만 이것을 보면 국토가 얼마나 넓은지 짐작이 갑니다.

노천 석탄 : 고비 사막은 단순한 모래 사막이 아닙니다.

중국 최대의 풍력발전소 : 이 길을 따라 차는 20분간 달립니다.

중국의 사해 :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어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소금을 공급합니다. 고비사막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사해 때문이라면 신은 얼마나 공평합니까(하얀 것이 소금이며 한국 기업이 진출하여 소금을 만든다고 합니다).

바위산에서는 야생 염소가 풀을 뜯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도 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납니다.
투르판
투르판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며 볼거리가 많은 곳입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 물을 수천 Km 인공적으로 지하로 수로를 만들어 사막을 옥토로 만든 곳입니다. 중국의 위대함을 여러곳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독특한 수리 시설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동양과 서양의 중간으로 특히 여인들은 대부분 눈에 쌍까풀이 있으며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곳의 포도는 날씨가 덥고 일조량이 풍부하고 건조하여 당도가 높아 세계적인 포도 산지로 유명하며 특히 건포도가 아주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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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문화 탐방(5) : 교하 고성

교하 고성

교하 고성 이모 저모

교하 고성 이모 저모

교하 고성 이모 저모

교하 고성 이모 저모

교하 고성 우물 터

교하 고성 이모 저모

교하 고성 왕이 사용하던 방, 환기통에서 햇볓이 들어옵니다.

교하 고성(交河 古城)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전한 시절 차사왕이 다스렸던 고성입니다.
보통 성은 벽돌을 쌓아 올려서 축성하지만 이곳은 땅을 파내려가 주거지를 만든 곳입니다(야생동물을 피하기 위하여).
13세기 몽고군에 의하여 성은 파괴었지만 기후가 건조하여 흙으로 만든 건물들이 지금까지 보존 되고 있습니다.
성의 길이는 약 2Km 폭이 약 300m 이고 중아에 일자로 뻗은 주도로가 있습니다.
무더운 성의 망루에서 두명의 예쁜 원주민 아가씨가 관광객에게1달러을 받고 사진 모델이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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