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9 편)

(2006` 6, 17 ~ 6, 25)

이글대는 화염산맥과 해 내림

쿠무타크 사막에서 홍 단장과 제(諸) 사장 두 분은 모래구릉을 달리는 특수차량을 탔다. 구릉을 오르내릴 때 얼마나 속력을 내는지 간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스릴 만점이었다고 자랑했다. 홍 단장은 차량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쓴 모자를 사막에 날려버렸다.

사구(砂丘)의 칼 능선에선 모래바람이 불어 지형을 자꾸만 바꾸어 가는 모습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참 신기했다. 그만큼 모래 입자가 잘고 보드라웠다. 일행은 이곳에서도 ‘하미과’를 사먹었다. 더위에 지쳤는데, ‘하미과’의 독특한 맛은 곧 열을 식혀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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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으로 가는 도로 아랫쪽 강가의 포도밭. 오아시스 주변엔 이런 포도밭들이 수도 없이 많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투루판(吐魯蕃: 토로번)으로 향했다. 두 시간을 달려야 투루판에 닿을 수 있단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렸을까?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화염산맥(火焰山脈)의 끝자락인 듯한 벌거숭이 붉은빛 바위산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나타났다. 벌써 시간은 오후 8시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막과 화염산엔 아직 노염이 이글거렸다. 붉은 빛깔을 띤 산은 이글거리는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타오르는 듯 보였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참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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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난 해넘이 장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것이라 신통치 않다.)

도로는 이 불타오르면서 이어진 화염산맥 연봉의 능선을 바라보면서 계곡으로 이어졌다. 그 계곡엔 시원한 물줄기가 보였다. 양떼와 소떼가 강가에 싱싱하게 자란 풀을 뜯는 모습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또 포도밭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느 모롱이를 돌아들자 화염산 연봉이 반대쪽으로 돌았고, 그 기슭으로부터는 또 넓은 사막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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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시내에 있는 한 농가. 아랫층엔 주거지역이고 2층은 포도를 말리는 건조장이다.)

모래벌판엔 석유를 퍼 올리는 펌프가 연신 끄덕 끄덕 고갯짓을 해댔다. 펌프 수가 엄청났다. 이들 펌프는 곧바로 떨어지는 해를 등졌다. 사막에서 장엄한 해넘이가 시작됐다. 해는 화염산 건너 더 먼 천산산맥의 높은 봉우리의 허리에 걸리면서 붉은 빛을 토해냈다. 붉디붉은 빛이다. 산도 모래도 함께 붉게 물들어갔다. 단지 모래땅 위에 돋아난 소금기만은 더욱 하얀 빛을 발하면서 붉음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듯 했다. 마치 강모래 위를 쓸고 지나간 물줄기가 남긴 흰 거품처럼. 이때가 아마 저녁 9시 30분에 가까웠다. 붉은 빛을 토해내던 해가 빛을 머금고 서서히 산마루로 자취를 감추면서 땅거미가 찾아든 시간은 9시 50분쯤이었다.


‘3-3-7’로 자정 넘긴 술판

이즈음 버스는 투루판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시가지엔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시가지 복판도로변 한 공원엔 인파가 북적댔다. 장사꾼들도 과일과 다른 물건을 리어카에 실고 나와 가스 불을 밝혔다. 여장을 풀곤 바로 이 공원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투루판 빈관(賓館)에 닿아 버스에 내려서자 그만 숨이 꽉 막혀버린다. 해가 떨어졌지만 낮 동안 바짝 단 지열은 낯선 객의 호흡조차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곳을 두고 원(元) 명(明) 때 ‘화주(火州)’라고 부른 것이 과연 허명(虛名)이 아님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공원을 가봐야겠다”는 마음은 천리만리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빨리 룸으로 가 시원 물로 샤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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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돋아난 소금이 낙조를 받아 마치 물거품처럼 보인다.)

배정된 방을 찾아선 바로 샤워를 했다. 권 방장(方丈)께선 선순위를 양보해주었다. 방장이 샤워할 동안 목이 컬컬하게 탔다. 시원한 맥주 한 컵 쭉 들이켰으면 하는 마음 급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홍 단장 룸으로 집합!”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나 반가운 명령이 이었을까. 단장 룸엔 이미 술상이 차려져있었다. 들어오는 이에겐 맥주 컵이 안겨졌다. 호텔 바에 찬 맥주를 배달시켰던 것이다.

여성을 뺀 여덟 명이 다 모이는 덴 채 5분이 안 걸렸다. 모두가 컬컬한 참이라 술잔 돌아가는 속도가 빨랐다. 한 박스가 게눈 감춰지듯 사라졌다. 또 열병을 시켜서는 폭탄주를 만들어 돌렸다. 나는 일어서서 폭탄 컵을 들고 또 “전 3-3-7로 하겠습니다.”고 했다. ‘3-3-7’ 박수를 칠 동안 컵을 다 비우지 못하면 벌주로 한 컵을 더 마시겠다는 서약이다. 다른 친구들은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 이렇게 손뼉을 쳐준다. 컵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어떤 친구가 또 ‘3-3-7’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렇게 몇 순배 돈 후 얼큰해지면 ‘3-3-7’이 ‘3-3’으로 바뀌고 만다. 어느 듯 자정을 넘겼다.

투루판, 새벽도 후덥지근해

벌써 여행도 절반을 훌쩍 지났다. 투루판은 새벽기온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 6시. 그 때도 후덥지근했다. 이정길 사장은 벌써 호텔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와 함께 다시 호텔주변 산책에 나섰다. 많은 주민들은 더위 때문에 가로수 밑에 평상을 내놓고 잠을 잤다. 담요 한 장을 덮었지만 다 걷어차 버린 지 오래로 보였다. 그래도 새벽나절이라 시원하니깐 단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부지런한 상인도 보였다. 빵을 구워 파는 아저씨는 언제 일어났는지 페치카 벽에 붙여 잘 구워진 빵을 꺼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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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시내 어느 도로변의 새벽녘 모습. 집 앞엔 평상들이 놓여있다. 더운 날씨로 사람들이 평상에서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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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인데도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 접씨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 화덕 일부를 비닐로 덮어 진열대로도 이용했다.)

투루판. 북쪽은 천산산맥, 동북쪽엔 보고타산맥이, 남서쪽으로는 크루카다크산맥이 둘러싼 동서 120km, 남북 60km 크기의 사막 분지다. 투루판의 중심부는 해면보다 60m가 낮다. 또 총면적 5만㎢ 중 80%인 4만㎢가 해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이 분지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아이딩 호수(愛丁湖)가 있다. 이 호수는 해발 -154m다. 따라서 이 분지를 ‘아시아의 우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름철 기온은 섭씨 40 ~ 50°가 보통일 정도로 무척 덥다. 한 여름 낮 기온 50°에 지열까지 합하면 80°를 넘은 적도 있단다. 연간 강우량은 20 ~ 40mm에 불과한데, 증발양은 3.000mm가 넘는다. 그러니 사막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만년설 덮인 주변 고산지대는 차기 때문에 봄에는 강풍이 몰아친다.

이곳 지세는 고온, 건조, 강풍의 세 가지지로 특징지어 진다. 그래서 화주(火州 : 불의 땅), 사주(沙州 : 모래의 땅) 풍주(風州 : 바람의 땅)라고 불려졌다. 북서쪽은 우루무치, 남서쪽은 카슈가르, 남동쪽은 돈황 등 감숙성으로 연결되는 교통 요지라 예부터 뺏고 뺏기는 이민족간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동 서 문명교류의 십자로’인 이 오아시스 고도(古都) 투루판 역사의 뒤안길에는 쉼 없는 전란과 학살이 이어진‘분쟁의 터’라는 그늘이 서려있다. 하서회랑의 서쪽 끝 돈황이 서역문화를 걸러 중국으로 받아들이는 병목이었다면 서역 타림분지 위쪽의 투루판은 톈산북로와 남로로 들어온 서역 이민족의 문화와 서쪽으로 뻗어가려는 중국문화가 한자리에 질펀하게 부려져 뒤섞인 후 융합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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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빈관 앞 도로를 덮은포도넝쿨. 대형버스도 통행하는 도로를 이렇게 포도넝쿨로 완전히 덮어 '포도고장'이라는 정취를 물씬 풍기게했다.)

이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야르호토는 한대(漢代)의 사서에 차사국(車師國)이라고 기록된 교하성(交河城)이고, 남서쪽의 카라호토는 고창국(高昌國)의 수도 고창성(高昌城)이다. 청대(淸代) 이전까지는 분지 전체를 고창 또는 ‘호토’라고 불렀다. 이 지역이 중국역사에 등장한 것은 BC 2세기경인 전한(前漢)시대부터다.

차사국(車師國)이 바로 이 때 투루판지역을 통치했던 국가다. 차사국의 주민은 이란계로 알려져 있으며, 우루무치까지 방대한 지역에 세력을 뻗쳤다. 이 때 차사국은 흉노에게 조공을 받치고 있었다. 흉노는 서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둔전병 4.000여 명을 주둔시키면서 차사국을 조종할 정도로 중요시했다.

한(漢)은 이 흉노와 끊임없이 다투었다. 소제(昭帝: BC 94 ~ 74)때 군사 20만 명을 출동시키자 흉노군은 피해 달아나고 차사국은 하는 수 없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 때 차사국의 수도가 교하성이다.

한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흉노가 다시 들어와 분탕질을 쳤다. 한은 BC 68년 정길을 대장으로 한 원정군을 또 파견해 흉노를 물리치곤 주민들은 한나라 군사기지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철수하는 바람에 결국 이 지역이 다시 흉노 세력권에 들어가 버렸다.

그 뒤 위 진 남북조시대에는 태수를 두어 직접 통치했고, 이어 후량, 북량 등의 세력이 부침했다. 497년에 한족인 국(麴)씨 고창국이 세워져 140여 년간 번성했다. 고창국의 수도가 바로 고창고성이다. 이 시기가 이곳 역사상 가장 안온했던 때다. 고창국은 당(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당은 고창성 대신 교하성에 도독부를 설치해 통치했다.

그러나 중국이 투루판을 지배한 것은 짧은 시기에 불과했고, 흉노(훈)와 돌궐(투르크)과 위구르민족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당 이전에 이미 위구르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고차라고 불렀다.

위구르족은 당나라 말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이미 독립 국가를 세워 송(宋) 말까지 번성했다. 이 나라가 바로 이드쿠트 위구르 왕조(860 ~ 1270)다. 이 국가를 통해 서역문화가 대부분 동으로 전달됐다. 불교와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 종교도 이 나라 수도 투루판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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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토욕구 천불동 가는 길에 난전을 벌였다. '하미과'를 탁자에 얹어놓고 팔았다. 알미늄 그릇에는 오디를 담아뒀다.)

13세기 이후엔 몽골군이 교하고성 고창고성 등 고도(古都)를 폐허로 만들었다. 몽골의 원(元)을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明) 대엔 돈황 동쪽 관문인 가욕관 요새를 보루로 해 급속히 밀려든 무슬림과 이곳을 중심으로 해 하미 일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거듭했다.

청(淸) 건륭제가 18세기 이곳을 정복하면서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뿐 19세기 들어 독립을 쟁취하려던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반란이 쉼 없이 이어졌다.

20세기 초에는 중국의 소 군벌들이 이곳에 들어와 50여 년 동안 서로 다투느라 야만적인 혈투와 주민 학살을 일삼았다. 1950년대 초 중국 인민해방군이 이곳을 접수할 때까지 소 군벌들의 싸움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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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는 사진이 없어 쿠무타크 사막에서 찍은 것을 올려봤다. 뒷편엔 파라솔 밑에서 모래뜸질을 하는 이곳 주민들.)

이 같은 장기간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투루판은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지방으로 변해갔다. 50만 인구 중 위구르족과 회족, 한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종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늘 변할 수밖에 없다. 1950년부터 지금까지 위구르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90%에서 70%로, 회족은 9.6%에서 7.6%로 낮아진 반면 한족은 1%에서 20%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그 외 소수민족의 분포도 늘 변화한다고 한다.

모래와 바람, 그리고 불은 투루판 문화의 용광로다. 모래는 바로 건조한 기후를 말하며, 그래서 카레즈 같은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지하 관개시설을 발달시켰다. 또 건조한 기후는 유물들을 잘 보존시켜주었다. 바람 즉 기류는 문명소통을 가능케 했고, 근래엔 에너지원으로 각광을 받게 했다. 불, 고온은 포도나 면화 등 특산물 산지로 이름나게 했던 것이다. 불과 모래, 그리고 바람, 이 삼박자의 선율은 투루판의 유구한 문화를 만들어 왔고, 다양한 문화가 합류하면서 용광로에 녹여 이곳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해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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