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11 편)

(2006` 6, 17 ~ 6, 25)

아스타나 고분군 세 분묘 봐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 광장엔 12지신을 형상화한 석상과 ‘복희여와도’를 조각한 석탑이 세워져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반신이 뱀인 복희와 여와는 마주 바라보는 형상이다. 1914년 영국탐험대가 발견한 이 지하무덤 군에서는 문서 외에도 묘표, 토우, 견직물, 그리고 미라가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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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아스타나 고분군 일대. 담장 밖엔 '복희와 여와'를 상징한 석조물이 서있다. 뒷 편엔 화염산맥이 둘렀다.)

일행은 발굴을 끝내고 공개하고 있는 분묘 세 곳을 들어가 봤다. 216호분 정면엔 6첩 병풍이 그려졌다. 바로 유교의 윤리적인 지침이 그 내용이다. 그 중 4첩은 성인도로 앞가슴이나 등에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즉 공자묘의 네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흰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의 신중함을, ‘석인’은 돌처럼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고 올바른 무위정직(無爲正直)을 뜻한다.

나머지 두 굴도 지하로 비스듬히 뚫려있는 널길을 따라 들어가면 널방이 나오고, 널방엔 각종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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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나 고분군 입구 전경. 12지 상과 '복희와 여와'를 조각한 작품들이 묘지를 지키고 있다.)

이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 몇 점이 서울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에 전시 중이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묘표, 무덤을 지켜주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여러 가지 부장품들이다. 이중 특히 주목을 끄는 유물은 복희와 여와를 그린 삼베그림이다. 이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강행군이다. 이어 시내에서 45km나 떨어진 화염산 동편 무르투크강(木頭江) 왼쪽기슭 낭떠러지에 판 백자극리극(柏孜克里克 : 베제클리크: Bezekliq) 천불동을 찾았다. 화염산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다른 산봉우리와 달리 이 산만은 온통 붉은 2층 모래 산이다. 너무 아름다웠다. 주차장 위쪽 붉은 모래밭엔 낙타가 몇 마리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불같은 더위가 온 몸을 벌겋게 불태워 버려도 낙타를 타고 저 아름다운 붉은 모래 산을 오르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쩌랴! 패키지여행이라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으니깐. 충동을 억지로 참으면서 굴 입구로 들어간다.


서원화 가득 찬 백자극리극

굴 입구를 통해 이 산 기슭을 가로 질러 계곡에 이르면 강물이 흐르고, 톈산산맥의 눈 덮인 고봉준령이 한 눈 가득히 다가오는 풍경을 만난다. 또 놀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 덮인 하얀 높은 봉우리들이 연이어졌으니~~~. 힘이 부쳐 쓰러지더라도 오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10m를 내려간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 초승달 모양의 벼랑에 굴이 숭숭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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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맥 중엔 이렇게 아름다운 봉우리도 있어 깜짝 놀랐다. 명사산이나 진 배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붉은 모래로 이뤄진 산이다. 불같은 더위가 온몸을 불살라 버려도 낙타를 타고 이 산을 오르고 싶었다.)

‘백자극리극’이란 말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을 가진다. 이 굴 사원은 모두 83개의 굴이 있었으나 지금은 57개굴만 남아있다. 그 중 훼손됐지만 남은 벽화가 있는 곳은 40여 개 굴이다. 굴은 사암을 뚫어서 만든 것도 있고, 흙벽돌을 쌓아 전실과 본실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만든 것도 상당수에 달했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 420 ~ 589) 후기다.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그 후 당(唐)과 오대(五代), 송(宋), 원(元) 등 7세기에 걸쳐 이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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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을 숭숭 뚫어 만든 백자극리극 천불동 모습. 사암을 뚫은 굴과 벽돌을 쌓아 전 후실을 만들기도 한 굴들을 볼 수 있다. 굴 내부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굴 안 벽화와 부처는 철저히 훼손되었다.)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鶻) 칸국 시대다. 이 때 이 동굴사원은 왕실 전속사원이었다고 전한다. 칸국 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하다는 평을 듣는다. 투루판의 석굴 중 가장 크고, 벽화의 내용도 풍부하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서원화(誓願畵)다. 전생의 석가부처가 과거 불에게 공양을 올려 미래 성불을 보장받는다는 줄거리를 다채롭게 윤색해 그린 것들이다. 벽화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려던 노력의 흔적이다.

우린 몇 개의 굴을 둘러봤다. 17호 굴은 불상은 사라지고 광배만 남았다. 천정의 벽화도 거의 뜯겼다. 남은 벽화 중 불상의 눈이란 눈은 몽땅 예리한 칼로 도려내버렸다.

20호 굴은 회골 칸국 시대의 공양도로 유명하다. 굴에 들어서면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는 좁은 회랑이 둘렀다. 중당의 좌 우 벽엔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귀족들의 공양도가 그려졌다. 이 벽화는 거의 뜯겨졌다. 독일인 그륀베델의 소행이란다.


문명 파괴행위 극명한 현장

또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그린 벽화가 있다. 이 벽화도 아랫부분은 없어지고 윗부분만 남아있다. 벽화의 오른쪽에는 석가열반을 애도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100여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고, 왼쪽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이 그려졌다. 왕자들의 눈은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문명파괴행위의 극명한 현장이다. 벽화와 불상 등은 이곳 주민들이 대부분 파괴했다. 주민들이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유물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난도질을 하는 등 크게 훼손해 버렸다. 남은 벽화도 더 뜯어가지 못하도록 흙으로 덧칠을 해놓았다. 훼손된 벽화는 20세기 초까지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외국인들이 불상은 물론 벽화까지 그대로 뜯어 가져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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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화염산의 한 장면이라 다시 올려봤다. 붉은 모래산 뒷편엔 사암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머리에 흰 눈을 인 천산산맥이 손에 잡힐 듯 한 그 모습은 역광이라 사진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독일인 그륀베델(Grunwedel, Albert : 1856 ~ 1935)을 비롯해 영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 1876 ~ 1948)와 그의 탐험대 등이 이곳 불상과 뜯어낸 벽화를 가져가 버렸다.

그륀베델은 가져간 유물을 베를린 박물관에 넘겨 진열까지 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간 벽화 4점이 조선총독부에 기증되면서 서울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이 벽화를 복원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들 유적을 도굴하려는 각축전이 열강 사이에 벌어졌다. 독일과 러시아는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유물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60 ~ 1970년 중국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도 유물 수난사에 한 수 거들었다. 이처럼 종교에 의해, 도굴꾼들에 의해, 이념에 의해 삼중으로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현장법사 ‘81난’ 그림으로

굴 입구 광장 상점에 제동식 사장이 냉동시킨 수박을 잘라놓고 우리 팀을 기다렸다. 하긴 목이 컬컬했다. 물을 마셔봐야 갈증이 해소될 리 없다. 얼린 생맥주 한 잔이 제격이련만 어찌 그것을 이곳에서 구한단 말인가.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엄청나게 시원했다. 번쩍 정신이 났다. 가이드도 하는 수 없이 일행에게 수박을 샀다. 그러나 그 수박은 그렇게 시원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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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맥 전경을 축소한 조감도. '신강대막토예관'의 실내이기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발길은 또 쉼 없이 이어진다.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손오공(孫悟空)이 등장하는 무대, 즉 화염산(火焰山 : Flaming Mountain)을 찾았다. 화염산 앞엔 신강대막토예관(新疆大漠土藝館 : Xinjiang Great Desert Local Art Gallery)이라는 지하건물이 있고, 건물밖엔 현장법사 일행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특히 파초선(芭蕉扇)을 든 손오공의 모습이 확 띄었다. 또 그 옆엔 낙타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건물 안에는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동안 만나는 81난(難)의 과정, 그리고 손오공이 72반(般) 변술(變術)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근두운(觔斗雲 )을 타고 10만 8천리를 단숨에 나는 그림을 재미있게 그렸다. 칠선공주에게 파초선을 빌려 마흔아홉 번 부채질해 화염산 불길을 잡고 비를 내리게 해 무사히 건너는 과정은 물론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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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 이글대는 햇볕과 타오를 듯한붉은 모래밭에 두 발을 딛고섰기에 이렇게 올려봤다. 대문사진이 바로 이것을 축소한 것이다. 너무 더워 사진을 찍을 수 조차 없었다. 다른 사진이 없어 안타까웠다.)

또 화염산맥 전경 조감도를 만들어 전시했다. 붉은 사암(紅砂巖)으로 이뤄진 화염산은 동서길이가 100km, 남북이 9km에 이른다. 최고봉은 851m의 승금구(勝金口)다. 우리나라로 치면 당연히 화염산을 화염산맥으로 대접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맥에 비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광대한 영토를 가진 이곳에선 누구도 ‘화염산맥’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단지 조선족 가이드만 ‘화염산맥’이라고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또 전시관 안엔 세계에서 가장 큰 온도계를 만들어 두기도 했다. 온도계는 천장을 뚫고 땅 위에 머리를 내놓고 있다. 당시 온도는 섭씨 41도를 가리켰다.


이슬람 상징물 소공탑 들러

전시관을 돌아나가면 화염산이 뒤를 두르고 있다. 바로 ‘火焰山(화염산)’이란 표지 석을 세워둔 곳이다. 이를 배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촬영하는 곳이다. 우리 팀도 물론 단체사진과 독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듯한 지열과 햇볕으로 온몸은 찜통에 들어간 것처럼 흠뻑 젖어버린다. 나는 글로서 도저히 화염산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참 안타까운 마음 가득 안고 버스에 올랐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하고 저녁을 먹는 뒤 위구르족 민속 쇼를 관람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이 마감된다고 했다. 간편한 차림으로 로비에 모였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줄 알았더니만 시간이 일어서인지 이슬람사원의 하나인 소공탑(蘇公塔 : Emin Minatet) 주차장에 버스가 닿았다. 바로 시내 변두리 포도밭에 둘러싸인 곳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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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탑에서 바라본 투루판의 한 농촌지역. 포풀러와 포도밭이 푸름을 더해준다. 여기가 과연 사막 속일까? 하는 의문이 일 정도다.)

이슬람교는 8세기 전반 신강의 서부지역인 카슈가르 등지에 전파됐다. 그 뒤 10세기에 들어 이 지역을 통치했던 카라한 왕조(Karakhanid dynasty : 999 ~ 1233)가 이슬람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어 13세기 초 이슬람교가 투루판까지 전파된다. 16세기 말쯤에는 투루판을 비롯한 신강전지역에 이슬람교가 휩쓸면서 다른 종교는 이 지역에서 사라져버린다. 사막의 등대 노릇도 해주는 소공탑은 이러한 이슬람교 상징물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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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탑이다. 흙벽돌로 쌓은 높은 탑이지만 외관만 봐도 얼마나 공을 들인 축조물인지?를 단 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흙벽돌로 쌓은 이 탑은 높이 37m, 밑지름이 10m에 달한다. 신장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첫 투루판 군왕이 된 애민호자(額敏和卓 : Emin Hoja)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술라이만이 1777년 세운 탑이다. 당시 7천량이란 거액이 공사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흙벽돌로 지었지만 외관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다. 채색된 타일로 모자이크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흙으로 체크무늬, 꽃무늬, 파도무늬 등을 수놓았다. 소공탑 아래의 모스크에는 지금도 예배를 본다고 한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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