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크로드 여정기' (10 편)

(2006` 6, 17~ 6, 25)

토욕구 천불동의 해프닝

투루판에서의 첫 관광지 토욕구 천불동을 찾았다. 시가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수바스 강을 낀 ‘토욕구’라는 계곡이 나타났다. 그 계곡 동 . 서 양쪽 언덕에 올망졸망한 굴들이 뚫려있다. 동굴 수는 모두 94개다. 주차장에서 굴까지는 아마 2km 가까운 거리로 여겨진다. 이 동굴군은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1879년 이 동굴 군(群)이 발견됐으나 2005년 10월에서야 공식적으로 공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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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구 천불동 가는 길에있는 회족 마을. 포도 건조장이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서 일행 중 한분과 우리 팀 사이에 말썽이 일어났다.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을 간 홍 단장이 늦었다. 그동안 일행들은 굴을 향해 떠나버렸다. 굴은 조그마한 회족마을을 거쳐 강둑을 따라 올라가야했다. 팀 7명이 홍 단장을 기다렸다가 늦게 뒤따라 나섰다. 이미 일행들은 마을을 거쳐 강둑으로 가 버린 뒤다.

마을에 들어서자 삼거리가 나타났다. 7명은 우왕좌왕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몰라 헤맨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물어물어 강둑길에 들어섰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친김이라 강둑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천불동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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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마한 마을에도 모스크가 있다. 모스크 앞엔 기도를 드리고 나온 회족 주민들이 보인다. 우린 이 지점에서 토욕구 천불동을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었다.)

일행들은 이미 굴 몇 개를 거친 뒤다. 또 다른 굴에서 가이드의 해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난 현지 가이드와 서울 한진관광 장진경양을 불렀다. “30여명의 많은 식구들이 이동하는데, 일부가 보이지 않으면 가이드 중 한사람은 남아서 뒤따라오는 사람을 챙겨야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게 화근이었다. “늦게 온 사람들이 잘못이지? 왜 가이드에게 화를 내느냐?”고 어느 분이 큰소리로 되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릴 직접 들었다면 당장 시끄러웠을 터인데, 직접 듣지 못해 지나쳤다.


불교 마니교 공존 동굴

가이드 두 명 모두 “잘못했습니다.”고 사과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해설해야하지 않느냐?”고 하자 “남은 굴 다 보고, 못 본 굴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고 해 말썽이 어느 정도 수습됐다. 그러나 우리 팀 7명 중 4 ~ 5명은 어이가 없는 듯 굴에도 들어오지 않고 굴 밖에서 서성였다. 이들에게 큰 소리로 되받았던 분은 자기부인의 성화에 못 견뎌서 인지는 몰라도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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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스 강가엔 이렇게 식물들이 푸름을 자랑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엔이글대는 화염산맥 줄기가 뻗어있다.)

관광객이 크게 붐비는 로마나 파리 루브르박물관 등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전체 관광 일정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을 터인데. 장진경양은 물론 현지가이드도 조용한 실크로드에서의 관광안내만을 했기에 경험부족에서 이 같은 실수를 했던 것으로 여기고 넘겨야했다. 그러나 큰소리로 되받은 분의 행위는 ‘불쑥 뱉은 실언’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 분이 한 얘기를 뒤늦게 다 듣곤 저녁에 단단히 따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그 분 부인께서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찾아와 “제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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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욕구 천불동도 사진을 못 찍게 했다. 천불동을 보고 나무로 만든 사다리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일행들 모습.)

이 동굴사원은 참 특이했다. 불교와 마니교가 공존하는 사원이란 점이다. 마니교 동굴사원이라고 말하는 42굴을 보면 동 서벽에는 불교의 관상(觀想)에 관한 벽화가 남아있다. 후일 마니교가 들어오면서 중앙 벽에는 나뭇가지마다 금박장식을 한 ‘생명의 나무’ 49개를 비롯해 온통 마니교 관련 그림들이 들어차버렸다. 또 이 굴에서는 마니교 경전도 발견됐다고 한다.

공개한 다른 굴들도 이와 비슷한 벽화들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동굴들의 유물도 도굴의 대상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의 탐험대란 미명의 도굴꾼들이 불상 등 유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물론 벽화도 오려내 가져갔고.


고창고성 입구 시장 통 같아

‘토욕구’ 천불동은 사실 제대로 보지 못했다. 뒤늦게 굴에 닿았고, 거기다가 해프닝까지 일었으니 굴 몇 개를 봤는지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없다. 단지 남아있는 벽화도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천불동을 가는 길에 위치한 조그마한 회족마을에도 모스크가 자리했고, 예배를 보고 나오는 주민들을 본 게 퍽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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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건조장이 있으면 포도밭이 있기 마련. 회족 마을 야트막한 언덕 밭, 포도나무 무성한 잎이 태양을 받아 더욱 푸른 빛을 냈다.)

그 마을 언덕엔 영국인 도굴꾼 스테인이 거주했던 주택도 아직 남아있었다. 또 주차장을 지나 좀 큰 빈터 나무그늘엔 좌판에 수박과 멜론, 그리고 오디를 내어놓은 상인들이 자리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일행에게 과일을 사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자리만 지켰다.


(마니교 摩尼敎 Manichaeism : 3세기 페르시아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종교.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분파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다. 이 교리에는 육식과 음주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고, 정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돼있다. 마니교는 당시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중앙아시아는 물론 로마제국까지, 그리고 인도 중국까지 전파됐으나 13 ~ 14세기에 소멸됐다. 이 종교는 동 서양을 문화적으로 연결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행은 토욕구 천불동에서 15km 떨어진 고창고성(高昌故城)을 찾았다. 고성 주차장부터 출입구까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큰 차일 아래 갖가지 민예품을 파는 점포들이 즐비했다. 노인 아이 가릴 수 없는 수많은 상인들이 손에 손에 물건을 들고 나와 사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상인들 사이를 뚫고 출입구까지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입구를 들어서니 황량한 붉은 벌판엔 무너진 흙더미들만 가득 펼쳐졌다. 햇볕은 벌써 이글댔다. 붉어스럼한 땅바닥은 아지랑이가 일듯 복사열을 내뿜었다. 먼지구덩이였다. 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미세한 먼지가 마치 춤을 추듯 했다. 이런 곳에서도 잡초는 듬성듬성 자랐다.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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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성. 폐허의 흙더미 속에 난 도로를 따라 관관객 한 그룹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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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만 폴삭이는 황량한 땅이지만 잡초는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마저 일었다.)

장방형인 성 둘레가 5.4km다. 수나라의 장안성과 흡사하게 만들었단다. 뜨거운 햇볕아래 먼지구덩이 속 긴 길을 걸을 수가 없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관광객을 태워 서남쪽의 큰 사찰과 궁성 터 등지에 내려다준다. 당나귀수레가 다니는 길은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의 먼지가 가득 쌓인 길이다. 폴싹거리면 먼지를 뒤집어 설 수밖에 없었다.


늙은 악사 현 퉁긴 소리 가득

‘츄~, 츄~’, ‘워~, 워~’. 당나귀수레 마부는 신이 나 목청을 돋웠다. 일거리가 생겼으니깐. ‘츄~, 츄~’를 외쳤지만 나귀가 빨리 달리지 않는다고 엉덩이에 채찍질을 해댔다. 마부는 젊은이에서부터 늙은이들까지 섞였다. 그들은 노소에 관계없이 맞담배질했다. 나귀수레엔 보통 6 ~ 7명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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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가 관광객을 실고 발목이 푹푹 빠지는 먼지구덩이를 달리고 있다. 그 놈의 엉덩이엔 '츄~, 츄~'라는 마부의 고함과 함께 채찍질이 가해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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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태워놓고 잠시 땡볕 아래서지만 쉬고 있는 당나귀, 마차와 마부들. 마차 바닥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어 이채롭다.)

내가 탄 수레의 마부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다. 나에게 “한국 담배~”라면서 손을 내민다. 우리 담배를 달라는 얘기다. “에잇! 버릇없는 놈”이라고 호통 쳤다. 그러나 마부가 알아들을 턱이 없음은 물론이다. 목적지에 닿아 담배를 피우는 장준환 이사에게 담배 한 가비를 얻어뒀다. 돌아갈 때 주니깐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한 갑 통째로 주지 않는다고 얼굴이 부었다.

허물어진 왕성과 사찰 내엔 위구르족과 회족 처녀들이 각각의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췄다. 늙은 악사가 현을 튕기는 이름 모를 악기소리에 맞춰 흥겨운 듯 너울댔다. 그들을 보면서 까닭 모를 슬픔이 살며시 고였다. 그들의 고된 삶이 애처로워서일까? 아니면 폐허더미에서 피어난 몇 송이의 꽃들 때문이었을까? 그리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팔을 끈다. 물론 사진모텔이 돼주곤 팁을 받기 위함이다. 처녀들은 땡볕아래 늘 노출되어있어 얼굴은 가무잡잡했지만 윤곽이 뚜렷한 미녀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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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의상을 입은 처녀들이 춤을 추곤 관광객들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자청하고 있다.붉은 색의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궁성과 사찰 등 모든 건축물은 분토나 흙벽돌로 지어졌다. 물론 불에 구운 것이 아니라 햇볕에 말린 벽돌이다. 사찰과 불탑은 그래도 잘 보존된 셈이다. 사찰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벽돌 위에 흙칠을 입히기도 했다. 현장법사가 설법했다던 절 안을 둘러봤다. 인도식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주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장식)과 방형 탑 형태가 보였다. 바로 인도에서 동전(東傳)된 불교유적과 유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츄~', 귓전 맴돈 고함소리만

벽돌로 쌓은 높은 벽채와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비가 오지 않으니깐 1천 5백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래도 잘도 버텨내었다. 허물어진 벽채 옆 그늘에서 당나귀수레가 오기를 기다린다. 장구한 세월의 흐름, 그리고 한 때 융성했다가 폐허더미로 변해버린 잔해에서 그 무상함을 느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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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서 남아있는 유적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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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올려 세운 건물임을 당장에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고창국(高昌國) 시절인 629년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 602 ~ 664)법사는 불교경전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중간에 이 나라에 들렸다. 국왕 국문태(麴文泰)는 법사를 귀하게 대접해 한 달간 머물도록 하면서 설법을 듣기도 했다. 그는 법사가 인도까지 거치는 여러 나라(도시소국)에 “편의를 봐주라”는 친서를 쓰서 들려주는 등 융숭하게 대접했다. 또 귀국길에 꼭 다시 들릴 것을 부탁했다. 641년 법사가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다시 찾았을 땐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멸망해 버린 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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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법사가 고창국 국왕에게 설법을 했다는 큰 사원의 전경. 이 사원만은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 있었다.)

이 고창국성은 13세기에 몽고가 휩쓸었고, 이슬람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끝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츄~, 츄~'라는 젊은 마부의 귓전을 맴도는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고성을 빠져나왔다. 그 고함소리 영영 지울 수가 없다.

이곳을 오가는 도중 회족 집단거주지를 봤다. 이들은 그들 특유의 빵모자를 즐겨 썼다. 양을 잡아 생고기를 부위 채로 삼륜오토바이에 걸어놓고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들의 주거상황이나 시장 등 생활상은 우리의 60년대 후반과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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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족 집단거주지의 거리 모습. 음식점엔 점심 때가 가까워 오자 음식을 만들어 내면서 연기를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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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잡아 오토바이 짐차에 고기를 부위별로 걸어놓고 파는 상인이 돈을 센다. 그들은 어른이면 한결같이 다 전통적인 모자를 쓴다.)

버스에 올라 아스타나 고분군을 향했다. 고창국과 당나라 때 무덤 군(群)이다. 발굴된 무덤이 456기나 된다. 이들 무덤에서 2.700여 건의 문서가 출토됐다. 그 중 300여 건은 위구르어 등 소수민족 언어로 쓰인 불교 ․ 마니교 등의 종교문서다. 또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도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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